MEMORIZE RAW novel - Chapter 822
00821 “…인정 못 해.” =========================================================================
문을 통과하자 방금 지나친 방과 비슷한 크기의 공간이 나타났다. 공동(空洞)과 흡사한 곳이었다. 벽이나 천장은 돌이 아닌 흙으로 이루어졌고, 건너편에는 똑같은 철문이 있었다.
단, 문의 좌우로 장장 4미터를 넘어서는 거대한 사자 석상이 하나씩 놓여 있었는데, 클랜원들은 강박증에 걸렸는지 보자마자 달려가 석상을 부숴버렸다. 그것도 잘게 깨다 못해 아주 가루가 될 정도로. 움직이는 석물이 아닌 장식물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냥 웃고 말았다.
이윽고 방을 한 차례 꼼꼼하게 탐사한 후. 나는 힘들다고, 한순간 마력을 큰 폭으로 소모해 피곤하다는 이유로 오늘 여기서 야영할 것을 지시했다.
클랜원들도 사양하지 않았다. 외려 드디어 쉰다고 좋아하며 잽싸게 야영지를 설치했다. 방에 여타의 함정도 보이지 않고, 구석이나 천장에 숭숭 뚫린 구멍이 보이기는 했으나 여기까지 오면서 수백 개나 봐왔던 것들이라 딱히 특별할 건 없었다.
우리는 가져온 음식으로 금세 식사를 마쳤고, 경계조를 제외한 인원은 모조리 침낭으로 들어가 단잠을 청했다. 나는 김한별, 근원, 이유정과 함께 초번으로 섰다. 주변에 나무는커녕 나뭇가지도 없었지만, 미리 준비해온 장작으로 모닥불을 피웠다.
타닥타닥, 불똥 튀기는 소리와 코 고는 소리만이 들리는 가운데, 일렁이는 불길을 하염없이 응시했다. 오늘 탐험을 하나씩 되짚는다.
클랜원들은 아마 내가 아무렇게나 길을 잡은 줄 알고 있겠지만 실은 아니었다. 2층으로 내려온 이후, 나는 가장 왼쪽 문으로 들어가 서서히 오른쪽으로 이동하는 방향으로 행군했다. 그러면 마법 진 함정이 출현하는 공간이 나오는데, 그곳을 통과하고 나오는 방이 바로 진정한 1차 목적지였다. 왜냐면 이곳이 그 ‘요행’이라는걸 바랄 수 있는 장소였으니까.
물론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부분은 있다. 아니. 사실 될지 안 될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없다. 요행수라 함은 뜻밖에 얻어걸리는 경우를 뜻하니까. 오면서 들었던 사각거리는 소리나 여기저기 뚫린 구멍을 보면 가능성은 높겠다고 생각하지만.
“흐아아암. 졸려 죽겠네. 이거 꼭 경계를 서야 하나?”
상념에 잠긴 동안 문득 하품하며 종알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건너편으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이제 막 숨을 들이켜는 김한별이 보였다. 나와 눈이 마주치니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급히 젓는다. 보아하니 얘는 아닌 것 같고. 오른편으로 이유정이 입을 탁, 탁 두드리고 있었다. 하품은 전염된다는 설이 있던데 정말인 모양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응? 아, 그렇잖아. 일 층이라면 몰라도 이 층에서 괴물이라고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는걸?”
“자신할 수는 없지?”
“으응. 사실 이상한 소리를 몇 번 들었거든. 그런데 모습은 보이지 않고, 기척도 잡히지 않아. 과연 어떤 놈들일까?”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이던 이유정이 돌연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글쎄요. 저는 왠지 강철 산맥 이 지역을 공략할 때가 떠오르는데요.”
대답은, 김한별에게서 나왔다.
“오. 그럴 수도 있겠네.”
“심하기는 그놈들이 더 심했죠. 기척은커녕 소리도 안 들리고,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기까지 했으니까요.”
“아쉽다. 그때 네 모습으로 변한 놈을 만났어야 했는데.”
“그건 저도 그렇네요. 아니. 혹시 언니 그때 잡아먹힌 거 아녜요? 그럼….”
호기롭게 받아친 김한별은 돌연 보석을 꺼내 던졌다가 받기를 반복했다. 이유정도 지지 않았다. “들켰네. 그래서, 어쩔 건데?” 라고 말하고는 단검으로 묘기를 부리기 시작했다.
이윽고 동시에 싱겁게 웃는 둘을 보니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으르렁거리다 못해 무시하기 일쑤였는데, 언제 이만큼 관계가 호전된 걸까. 예전에는 날카로운 발톱을 꺼내 전심전력으로 할퀴는 고양이 같았다면, 지금은 서로 알면서 한 대씩 톡톡 주고받는 귀여운 새끼 고양이를 보는 듯하다. 그래. 이러니까 얼마나 보기 좋아.
“…어쩌면 이 지역은 이미 점령당했을지도 모릅니다.”
흐뭇하게 지켜보는 와중 언뜻 누군가 속닥이듯이 말했다.
“점령당해? 누구한테?”
“모르겠습니다.”
이유정의 반문에 옆에 얌전히 앉아 있던 근원이 칼같이 말을 잇는다. 눈은 멍하니 모닥불을 응시하다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단 지능은 물론, 감각도 상당히 뛰어날 거라고 예상됩니다.”
“왜?”
“제가 전장 분석을 시도할 때마다 바로 알아채고 범위를 벗어났습니다.”
“흐음. 그럼 그놈들이 이 함정 천지인 곳의 주인이라는 소린가?”
“속단은 이르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오면서 종종 보이는 굴의 형태와 위치를 분석 및 종합했는데, 곤충의 굴과 흡사하다는 결론이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
잠깐 말을 흐린 근원은 작달막한 검지로 바닥의 흙에 선을 긋기 시작했다. 흙장난은 아니고 무언가 그림을 그리는 것 같다. 이유정은 궁금하다는 얼굴로 스리슬쩍 들여다보더니 돌연 박장대소를 터뜨렸다.
“푸! 이게 뭐야! 근원 너 진짜 그림 못 그려! 푸하하하!”
한창 열중하던 근원이 흠칫 몸을 떨었다.
“어디 나도 한 번.”
성큼 몸을 일으키자 근원이 재빠르게 손으로 그림을 가렸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어찌나 잘 가렸는지 정말로 그림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번갈아 머리를 숙였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기울일 때마다 조금씩 손의 위치가 변하는 것이 아마 상대에게 보이는 각도를 계산해 가리는 듯싶다. 후후. 이렇게 나온다는 건가.
나는 왼쪽을 보는 척하다가, 오른쪽으로 숙였다가 순간적으로 다시 왼쪽으로 머리를 기울였다. 그런데도 근원은 용케 방어하더니 갑자기 고개를 들어 나를 빤히 응시했다. 무감정한 눈동자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니 왠지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원이 입을 달싹였다.
“…화가 납니다.”
아니. 왜 나한테 원망 어린 눈초리를 보내는 건데. 웃은 건 이유정이라고.
“에이, 오빠가 잘못했네~.”
“오빠 정말 너무하세요.”
얼씨구. 이럴 때는 또 쿵 짝이 맞는군.
나는 헛기침과 함께 자리에 앉고 품에서 기록을 꺼냈다. ‘사멸 무저갱’과 관련된 기록이었다.
“이 기록에 아주 재밌는 내용이 적혀 있거든.”
“와. 화제 전환하는 것 좀…. 응. 미안 오빠. 잘못했어. 계속 얘기해.”
“…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건 진중 기록이야. 적국의 수도를 점령한 장군이 적은 일기.”
“그거 저도 중간까지 읽었어요. 그 장군, 성격이 조금 이상하던데요?”
김한별이 아는 체를 해와 나는 맞는다는 의미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지. 결국에는 추적을 포기하지만, 사실상 포기가 아니었지. 주변에 있는 괴물을 깡그리 모아 강제로 이 안으로 처넣었거든.”
불현듯 김한별이 눈을 찌푸렸다. 아마 지하 1층에서 부딪친 죽음의 기사들을 생각하는 것 같은데, 또 의심병이 도진 모양이다. 뭐, 생각해보면 나름 합당한 의심이기는 하다만.
이유정이 입을 열었다.
“성격 한 번 화끈하네. 그럼 그 괴물들이 은신처 안에 숨은 놈들을 죽여주기를 기대한 건가?”
“아무래도 그렇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막 잡아다가 넣은 건 아니야. 이런 험악한 곳에서 오래오래 살아남을 수 있는 놈들로만 골랐지. 예를 들면 지하 1층에서 봤던 언데드나….”
“…언데드나?”
“뭐, 나머지는 나도 몰라. 거기서 기록이 끊겼으니까.”
나는 기록을 접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이유정이 어이없다는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김한별도 맥이 빠진 듯한 표정을 짓는다. 괴물의 정체를 알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기대한 모양인데, 그렇다고 이야기해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모르는 건 아니지만, 기록에 없는 내용을 말하면 의심받을 수도 있으니까.
“아무튼, 이곳은 더 이상 유적이 아닌, 괴물의 소굴로 변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항상 방심하지 말라는 소리야.”
결국, 진짜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이었다.
이윽고 돌연히 고요가 찾아왔다. 모두가 침묵하는 와중 오직 근원만이 살짝살짝 턱을 까닥였다. 아마 자신의 계산과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는 모양이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재밌게 하세요?”
그때 등 뒤로 잠이 덜 깬 듯한 음성이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남다은이 새초롬히 웃으며 내려다보고 있다. 이야기하다 보니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벌써 교대 시간인가.”
주섬주섬 몸을 일으키자 뒤에서 천천히 다가오는 임한나도, 그리고 얼른 일어나라며 진수현을 흔드는 정하연도 보였다. 나는 눈매에 힘을 푸는 동시에 일부러 눈을 비볐다. 남다은이 활짝 미소 짓는다.
“많이 졸리 신가 봐요?”
“그냥…. 조금 피곤하네.”
“먼저 주무시지….”
“그러려고. 중간에 깨면 피곤하니까 일부러 초번을 선 거야.”
“어머. 그거 직권 남용 아니에요?”
“수현이는 직권 남용해도 돼. 오늘 앞에서 가장 고생했는걸?”
임한나가 갑자기 남다은의 옆에 붙으며 끼어들었다.
“그런가? 하긴 오빠가 아니었다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거야.”
“맞아, 맞아.”
두 여인이 서로 주고받으며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가만히 지켜보다가 아무 말도 않고 걸음을 돌렸다. 그러자 웃음이 뚝 그치며 “응?”이나 “혹시 내가 말실수라도…?” 등의 소리가 들려왔으나 조용히 침낭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소곤거리던 소리도 사라지고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나는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바닥에 귀를 붙였다. 깊게 잠든 척하려 숨을 고르게 내쉬었지만 온 신경을 청력에 집중했다.
그리고,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사각….
“……!”
나는 번쩍 눈을 뜨려다가 간신히 실눈에서 멈추고 땅을 흘겼다.
사각사각, 사각사각…!
사각사각, 사각사각…!
아주, 몹시 미세하기는 하나 확실히 느껴졌다. 어둡고 축축한 땅을 긁는 무언가의 소리가.
…온다.
*
첫 경계조가 들어간 이후 두 번째 경계조가 모닥불 주변으로 앉았다. 벌써 교대한 지도 30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진수현은 꾸벅꾸벅 머리를 꺼트리고 있었고, 정하연은 천장이나 구석진 곳에 난 구멍을 살피며 마법 진을 설치했으며, 남다은과 임한나는 침낭이 있는 곳을 흘깃거리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한나야. 아까 수현이 표정 봤어?”
“봤는데…. 표정은 별로 안 이상했어. 오히려 행동이 이상했지.”
“내가 뭐 실수한 거라도 있나….”
“모르지. 피곤하니 빨리 자고 싶었는지도. 그런데 다은이 너 왜 수현이한테 오빠라 그래? 나이는 똑같지 않나? 그리고 나한테는 반말하잖아.”
임한나의 가벼운 항의에 남다은이 킥 웃는다.
“그건….”
그 순간이었다.
파악!
문득 무언가 퍽 터지는 소리와 함께 곳곳의 흙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흩날리는 흙가루가 얼굴을 두드리고, 두 여인이 황급히 몸을 일으킨 건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다.
그러나 1초도 지나지 않아 흙을 뚫고 나온 긴 형상이 하늘 높이 치솟았다. 길이는 최소 4, 5미터는 넘을까. 전신은 번들거리는 칠흑 빛 갑각(甲殼)으로 덮여 있고, 몸체 좌우로 털인지 촉수인지 모를 가는 것들이 촘촘히 달려 있다. 발은 짧으면서도 얼마나 많은지 흡사 지네를 연상케 한다.
그것은, 진정 찰나의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천장으로 솟구친 괴물 중, 두 마리는 올라온 기세 그대로 폭포처럼 쏟아져 모닥불 주변을 덮쳤다. 그리고 남은 세 마리는 천막 부근을 덮쳐 각각 침낭을 하나씩 휘감는다.
“괴물…!”
남다은이 크게 고함치며 옆으로 몸을 피했다. 괴물이 몸을 스치는 동시에 검을 휘두르자 얼음 빛이 번뜩였다.
써억! 확실히 무언가 잘리는 느낌은 있었다. 그러나 남다은의 눈은 곧 휘둥그레 변하고 말았다. 약 2미터 남짓한 부분이 깨끗이 잘린 단면을 보이며 땅으로 떨어져 꿈틀거렸지만, 머리를 포함한 상부는 그대로 스쳐 지나가 지면을 뚫고 사라진 것이다. 처음 출현했을 때와 똑같이.
진수현도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깨어났는지 검을 뽑은 채 왼쪽 무릎을 꿇고 있다. 옷에 흙이 묻어 있는 게 아마 반사적으로 바닥을 구른 모양이다. 그런 진수현의 주변에도 잘린 꼬리와 구멍 두 개가 새로이 뚫려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단 6초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침낭 인원도 후닥닥 일어나는 가운데, 정성 들여 마법 진을 설치하던 정하연이 황급히 달려왔다. 그러나 이미 일은 벌어진 후였다. 멍하니 한 곳을 응시하는 임한나를 따라간 정하연의 눈이 곧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툭! 손에 쥔 지팡이가 떨어져 하릴없이 바닥을 구른다.
왜냐면,
“마, 맙소사….”
천막 주변에는 아까 보지 못한 구멍이 6개나 새로 뚫려 있었으니까. 그리고 총 3개의 침낭이 사라졌으니까.
“수…. 현…?”
그중에는 김수현의 침낭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