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e Reign RAW novel - Chapter 289
활짝 열린 창으로 볕이 쏟아져 들어왔다.
쪼르륵.
방의 한쪽에서 향이가 정성 들여 우려낸 찻물을 잔에 따랐다.
“향이 너도 함께 와 앉거라.”
“아닙니다. 저는 늘 있던 곳에 있겠습니다.”
향이가 공손히 답하고 물러났다.
늘 있던 곳.
그녀가 담운천의 곁에 다매로 머물던 곳을 뜻했다.
“그 또한 오늘이 마지막이겠구나.”
“예.”
“신녀의 허울이 제법 어울린다. 이제는 말괄량이 같은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담운천의 말에 향이는 평소 성격과는 달리 살포시 웃기만 했다.
그 모습이 재밌었는지 담운천이 미소를 머금은 채 찻잔을 들었다.
“향이 좋구나.”
좋다는 것이 사람인지 차향인지 모호한 말이었지만, 능운비는 차에 대해 답했다.
“다섯째가 선물한 것입니다.”
“그 둔한 녀석이 차를 말이냐? 별일이구나.”
“어쩌면 스승님과 제가 이리 마주하게 될 것을 예상한 모양입니다.”
“녀석, 넉살은……. 그놈이 설마하니 이리될 줄 알았을까? 그저 네가 그리 끼워 맞춘 게지.”
능운비의 말에 재차 웃음 짓던 담운천이 물었다.
“혁이는?”
가장 먼저 묻는 말이 그것이다. 이미 들었을 테지만, 능운비의 입을 통해 다시 듣고자 한 것이다.
하여 좋았다.
마교의 지배자로서가 아니라 스승으로서 제자의 안부를 물어 주었기에.
“오지 못했습니다.”
담담히 한 대답에 담운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떠하더냐? 녀석의 끝은?”
“평온했습니다.”
“그랬겠지. 늘 무거운 짐을 지고도 내색 한 번 하지 않던 녀석이었으니.”
“……”
“만약 네가 아니었다면, 그 아이에게 주고자 했을 것이다. 어찌 보면 마교의 주인에 가장 어울리는 녀석이었으니.”
“압니다. 그런 사람이더군요, 그는…….”
“반발이 클 게다. 신혈가주가 가장 아끼던 아들이니만큼, 권좌에 오르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을 것이다.”
“그 또한 압니다.”
“자신이 있느냐?”
“자신감으로 모든 것을 이룰 순 없습니다. 다만, 묵묵히 나아갈 뿐입니다.”
“녀석…… 그새 말이 늘었구나.”
“수좌라는 자리가 그렇더군요. 나기를 그리 나진 않았으나,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모양입니다.”
“허허.”
능운비가 막힘없이 대답하는 모습이 좋았던 것일까?
담운천이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신혈가를 포기하지 말거라.”
“안 그래도 그럴 참입니다. 그들이 만들었다는 용작이라는 검이 참으로 대단하더군요.”
“마교 제일의 야장 가문이니까.”
“마음을 돌리기는 어렵겠지만, 얻기만 한다면 교의 무인들이 좋은 무기를 휘두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무의 기준이 보검에 있지는 않으나…… 있어 나쁠 것이 없다.”
“예.”
잠시 말을 끊고 차를 한 모금 들이킨 담운천이 다시금 물었다.
“진강이는? 혁이와 함께 있었을 것인데?”
“잘 모셔 두고 있습니다.”
“반발치 않더냐?”
“욕은 합니다만, 손을 쓰진 않더군요.”
“머리가 좋은 녀석이라 제 가진 것을 알 테니까.”
“다독거려 보려 합니다.”
“저보다 나이 어린 자에게는 쉬이 마음을 열지 못할 것인데?”
“원한다면 형님 대접을 해 줄 용의쯤은 가지고 있습니다.”
“녀석. 지존이 될 녀석이 형을 모실 참이냐?”
“그리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큭큭, 진강이를 이용해 혜심정을 포섭할 생각이겠지?”
“그래 볼까 합니다.”
“좋은 생각이다. 현자는 많을수록 좋은 법이니, 네가 해야 할 결정에 혜심정이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동감합니다. 다만 탐욕이 적지 않으니 그것이 걱정입니다.”
“괜찮다. 사람이든 조직이든 어찌 탐욕이 없을까? 적절히 달래며 채워 주면 능히 제 몫을 할 터다. 다만 배부르지않게 하여라. 본시 배가 차면 일을 하지 않는 법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선화는 여전히 휘와 사이가 좋더냐?”
“선화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 아이가 아니었으면 휘를 만나지 못했을겁니다.”
“어려서부터 사이 좋은 오누이처럼 지내 온 녀석들이니까.”
“자주 티격태격합니다.”
“진짜 남매처럼 말이지?”
“예.”
“아직 어려 혈기 넘치는 바가 있으나, 우직한 녀석들이다.”
“그 역시 잘 다독거려 볼까 합니다.”
그 답 또한 담운천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짙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래.”
담운천의 흡족한 표정과 함께 찻잔이 비고, 탁자에 술병이 올랐다.
술은 싸구려 백주에 안주라고 해 봐야 육포가 고작인 소박한 자리였지만 탓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한 잔 올릴까요?”
“그래.”
능운비가 술병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술잔을 채웠다.
찰랑이는 술을 단숨에 비워 버린 담운천이 빈 잔을 내밀었다.
“너도 받거라.”
“예.”
공손히 받아 든 잔이 채워지자 담운천이 말했다.
“스승으로서 주는 마지막 잔이 되겠구나.”
“의미가 깊으니 천천히 음미하며 마시겠습니다.”
“그리하거라. 다만 걱정이다.”
“……?”
“아직은 네 잔이 작아 술병 안의 술을 전부 담을 수가 없으니 말이다. 어떠하냐? 너는 전부를 담기에 충분하더냐?”
담운천의 말에 잠시 생각하던 능운비가 미소를 떠올린 채 말했다.
“제게 산맥을 이루라 하셨지요?”
“그랬지.”
“한데 굳이 잔 하나에 술병 안의 술을 전부 담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뭐라?”
“나누어 담을 것입니다.”
“나누어 담는다?”
“예. 제 잔으로 부족하면 다른 이와 나누면 될 일입니다. 크고 작은 잔들이 모여 술을 나누어 담다 보면, 언젠가 병이 비지 않겠습니까?”
“허! 우문(愚問)이었으나 네가 현답(賢答)을 하는구나?”
“과찬이시라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그리 겸양 떨 것 없다. 그것이 네가 가고자 하는 길이라면, 그대로 가면 그만이다. 다만 명심하거라.”
“……?”
“나누어 담되, 술병을 쥔 손은 너의 것이라야 한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럼 되었다.”
담운천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진심에는 진심으로 답하고, 농에는 농으로 답한다.
비록 자신이 그를 선택했고 몰래 도와주기도 했지만, 결국 스스로 뜻을 정하여 자신의 앞까지 찾아왔다.
문득 녀석의 그릇이 제 말처럼 나누어 담아야 할 정도로 작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능히 마교라는 술을 전부 담을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하다. 이미 산맥을 이루었다.
가만히 능운비를 보던 담운천의 입이 다시 열렸다.
“성화의 선택을 받았다고?”
“……그새 천리안이라도 깨우치신 겁니까? 이곳에 앉아 천 리를 내다보시는것 같습니다.”
“마교에서 가장 높다는 광천탑이 아니냐? 창을 통해 보이고, 눈을 감으면 들린다.”
“큭, 근처에 숨어 있는 쥐와 새가 들으면 섭섭해하겠습니다.”
능운비의 웃음에 천장의 어둠이 씰룩거렸다.
교주가 부리는 쥐와 새들의 수장 은위였다.
“큭큭, 놈…… 전부 알고서 시치미를 떼고 있었구나.”
“향이와 함께 다녔더니 기척을 읽는 재주가 제법 늘었습니다.”
능운비의 너스레에 담운천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내려오거라. 이미 들켰는데 굳이 불편하게 있을 필요는 없으니.”
그 말에 천장의 어둠이 뚝 하니 떨어져 나와 바닥에 내려앉았다.
검은 복면 밖으로 드러난 눈동자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언젠가 너도 만들어야 할 것이다. 이 마교에는 이 자리를 노리는 놈들이 원체 많거든.”
“때마침 성화곡에 쓸 만한 인재들이 많습니다.”
“그럴 테지. 하지만 아쉽구나. 향이가 적격인데 신녀가 되어 버렸으니.”
“……”
“그래, 성화곡의 이야기는 전부 들었고?”
“예.”
“하긴…… 하나 기존의 세력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역시나 묵묵히 걸어갈 뿐입니다. 풀고 또 풀다 보면, 아무리 복잡하게 얽힌 매듭도 결국 풀리지 않겠습니까?”
능운비의 말에 담운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은 잘라 왔다.
얽히고설킨 문제의 매듭을 볼 때마다, 자신은 고민 없이 잘라 버렸다.
하나 능운비는 자신과 달랐다.
그는 풀고자 한다.
자르면 둘이 되어 나누어지는 법이지만, 풀면 여전히 하나다. 목표를 향해 얼마나 돌아가게 될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정도(正道)다.
“쉽진 않을 게다.”
“각오하고 있습니다. 일월신교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기초를 탄탄히 세워야만 하니까요.”
“알겠다. 내 너의 뜻을 존중하니.”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담운천을 가만히 바라보던 능운비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여쭙고자 하는 바가 있습니다.”
“말하거라. 내가 듣고자 하는 답은 전부 들었으니, 이제는 네 말에 답해주마.”
“어째서 저였습니까?”
“뭐가?”
“왠지 처음부터 제가 이 자리까지 오기를 염두에 두셨던 것 같아서요. 정무맹주 이옥상에게 보냈던 편지도 그렇고…….”
“이옥상이 보여 주더냐?”
“예.”
“촉새 같은 놈.”
담운천이 이옥상을 욕하며 입을 삐죽거렸다.
“처음엔 그냥 너였다.”
“예?”
“그냥 너였다. 당시의 내겐 마교에 적을 두지 않은 제자가 필요했으니까.”
“……”
“한때는 나의 선택을 후회하기도 했다. 과연 나의 판단이 옳은가? 나는 마도를 마도답게 걸어가게 하고 있는가?”
회한처럼 이어지는 담운천의 말을 능운비는 묵묵히 듣기만 했다.
“하나 네가 주화입마에서 벗어난 이후, 다시 너였다. 확고하게.”
그 말에 능운비는 조금 놀랐다.
당시의 자신은 마교에서 도망칠 생각뿐이었다. 그 때문에 연일 사고만 치고 다니지 않았던가.
그런 자신에게서, 담운천은 대체 무엇을 보았단 말인가?
“확고씩이나…… 말입니까?”
“그래.”
“어째서요?”
“말하지 않았더냐? 너는 나와 달리 산맥이 될 수 있는 녀석이라고.”
“……”
“너는 결국 설산장의 마음을 얻어 냈고, 몇 되진 않지만 잠시 머물렀던 지부의 마음도 얻었다.”
“그건…….”
“안다. 하지만 네가 원한 바가 아니었어도, 혹은 우연히 그리되었다고 해도 결과는 변하지 않는다.”
확신으로 가득한 담운천의 말에 능운비는 괜스레 미안해졌다.
자신이 마교를 얻어야 하는 이유는 명백했다.
중원의 그늘에 숨어 천하를 쥐락펴락하는 위선자들에게 죽은 윤안로 대신해 복수하는 것.
그런 마음이 가득한데…….
“운비야.”
“예.”
“내 말했지.”
“예?”
“나누어 담을 순 있어도 술병을 쥔 것은 너여야 한다고.”
“……!”
“어느 잔에 얼마나 따를지는 오직 너만이 결정할 수 있다. 무엇을 하든, 네가 원하는 바대로 나아가면 될 것이다. 다만 그 걸음이 옳지 못하고, 또한 그 걸음이 잘못되었다고 여겨지면 누군가 네게 칼을 댈 것이다.”
“그렇군요.”
“뭇사람들은 이 권좌에 앉으면 모든것을 얻게 된다고 여기지만 오산이다. 나아가, 마교의 권좌를 피로써 세운다고 하는 이유는 수많은 정적을 쓰러뜨리고 앉기 때문이 아니다.”
“……?”
“앉은 뒤에 피로써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여전히 수많은 도전자가 그 자리를 탐내기에.”
어렴풋이 이해한 능운비가 고개를 끄덕이자 담운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굳이 한 번에 모든 것을 알려 할 필요는 없다. 시간이 흐르고 엉덩이가 배길 때쯤이 되면, 권좌가 얼마나 불편한지 자연히 알게 될 터니까.”
“……”
“그럼 이만 나가자꾸나.”
“예? 어딜요?”
“어디긴 어디더냐? 한잔 술을 청하고 마셨으니, 비로소 시작해야지.”
“……?”
“뭘 그리 멀뚱히 쳐다보는 게냐? 너는 제자로서 나를 찾아온 것이 아니지 않느냐?”
“아!”
어리둥절해하던 능운비가 그제야 탄성을 터트렸다.
자신이 그를 찾아온 이유.
담운천을 따라 일어난 능운비가 옷매무새를 고치고는 두 손을 앞으로 내밀어 포권하며 정중하게 말했다.
“삼가 일월신교의 십오 대 교주 능운비가 제천마제께 감히 도전을 청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