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e Reign RAW novel - Chapter 35
“네, 네놈이 어떻게?”
노인의 얼굴에 당혹스러움이 가득했다.
얼씨구? 들켰으면 다짜고짜 칼질을 하든가 아니면 바로 도망치든가 해야지 당황하고 있어?
이건 뭐 평가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하수네.
이런 것들을 압습자라고 보내다니, 대체 날 얼마나 무시하고 있는 거지?
“니들 누구냐? 아니, 누가 시킨 거냐?”
“……”
능운비의 싸늘한 질문에 노인이 떨리는 눈동자를 감추지 못하며 침을 삼켰다.
여인의 얼굴은 이미 사색이 되었다.
“아, 질문이 잘못됐네. 누구든 뭔 상관이야? 날 죽이고 싶어 하는 놈들이 어디 한둘이라야지.”
“……”
“내가 마구잡이로 살생을 즐기는 건 아닌데, 날죽이러 온 놈들에게까지 아량을 베풀 정도로 성인군자도 아니거든?”
능운비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웃었다.
누르지 않고 마음껏 표출하는 마기 때문일까? 기묘하게 번뜩이는 눈빛이며, 아지랑이처럼 넘실거리는 마기가 당장에 누구 하나 죽여 뒷산에 파묻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살기등등하다.
하지만 두 사람도 완전히 얼뜨기는 아닌지, 곁눈질을 주고받다가 제각기 행동을 취했다.
노인은 식도를 수평으로 누이며 자세를 잡고, 비수를 꺼내 든 여인은 천천히 뒤로 물러나 침상으로 다가간다.
이 와중에 왕천을 인질로 잡겠다고?
어림도 없는 소리.
침상 하나, 탁자 하나가 전부인 작은방이다.
무음, 무영, 무형. 삼무의 보법을 익힌 능운비에게 일 장도 채 안 되는 거리를 뛰어넘는 일은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다.
찰나, 혹은 한 호흡.
여인을 쓰러뜨리고 왕천을 구해 내는 데에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습격자들을 유인하려 일부러 술을 먹여 놓긴 했지만, 한솥밥 먹는 사이에 뒈지라고 놔둘 순 없지.
스윽.
능운비가 가볍게 발을 내디뎠다.
“……어?”
그 순간, 묘한 느낌이 능운비의 뒷덜미를 곤두세웠다.
그리고 이내.
퍽!
“큭!”
“……?”
여인이 힘없이 꼬꾸라졌다.
“쯧, 이것들이 왜 남의 잠자리에 와서 행패를 부리고 지랄이지?”
“……”
왕천이었다. 숨넘어갈 듯 코를 골며 자고 있던 왕천이 벌떡 일어나 머리를 벅벅 긁고 있었다.
“……너, 어떻게?”
“어떻게는 뭘 어떻게예요? 살기가 이렇게나 진동하는데 잘 수가 있어야지.”
“수면향이 꽤 독했는데.”
“향이 좋습디다.”
왕천의 너스레에 능운비가 피식 웃고말았다.
향이 좋다니, 하여간 허세는 알아줘야 한다.
그나저나 생각보다 제법이다. 수면향에 대한 내성을 기르는 훈련을 거쳤던 건가?
“그냥 자꾸 술을 권하시는 게 이상해서 뭐 있겠다 싶었거든요. 뭐,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하고…… 일단 이놈부터 잡아다가 족쳐 봐야겠는데요?”
“……”
아주 입만 열면 거짓말이지. 쿨쿨 잘도 자는 걸 내가 손수 확인까지 했는데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말하기는.
“어쨌든 막 일어났으니까 기다려. 내가 할게.”
“어허! 칼이란 게 다 쓰임이 있는 겁니다. 주군씩이나 되시는 분께서 막 움직이고 그러시면 안 된다구요.”
“……”
놀고 있네. 판을 누가 깔았는데 지가 다한 것처럼 의기양양이야?
“자, 그럼 이제 제가 나서 볼까요?”
왕천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식도를 든 노인을 노려봤다.
“저분께 내 입신양명이 걸려 있거든? 니들이 뭔데 그걸 시작도 하기 전에 이 염병을 떠는 거지?”
“……”
“그리고 내가 모처럼 애양일 만나다가 와서 기분이 언짢거든? 그러니까 긴말 안 하마.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지시했는지 말해 주면 최소한의 고통으로 죽여 주마.”
깍지 낀 손을 위협적으로 부득거리는 왕천의 모습에 노인의 눈동자가 쉴새 없이 흔들린다.
이런 입신양명에 미친 호위장 놈 같으니, 넌 어떻게 사람이 그리도 한결같은거냐?
그리고 화난 게…… 애양이 때문이냐?
능운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뭐, 좀 늦긴 했어도 왕천이 나선다는데 굳이 자신이 하겠다 우길 필요는 없었다.
그의 실력이면 충분하다. 노인은 그리 강하지 않으니까.
그러니 이쪽은 왕천에게 맡기고…….
능운비가 고개를 쳐듦과 동시에 어느새 뽑혀 나온 비연검이 천장을 길게 갈라 놓았다.
파가가각!
흉하게 갈라진 천장 틈새로 나풀거리며 떨어져 내리는 천 조각.
“도망을 쳐?!”
곧장 바닥을 차 낸 능운비의 신형이 천장을 꿰뚫으며 솟구쳤다.
좀 전에 미세한 기척을 느꼈었다.
여인이 왕천을 인질로 잡기 위해 움직이던 그 순간에.
왕천이 깨어남과 동시에 곧바로 사라져 버렸지만, 능운비는 내내 주시하고 있었다.
또 다른 적이다. 자신을 습격해 온 객점 내부의 적들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암습자.
“……허!”
하지만 놓치고 말았다.
천장을 뚫고 지붕 위로 솟구쳐 찾아보았지만,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바로 마기를 사방으로 뿌려 세밀하게 훑어봐도 아무런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설마 그 짧은 순간에 사라질 정도의 경공술을 가졌다고?
무공은 둘째 치더라도 기감(氣感) 만큼은 누구보다 뛰어나다고 자신하고 있었는데…….
능운비가 손에 들린 비연검을 내려다보았다.
깊이 베진 못했지만 분명 느낌이 있었다. 그럼에도 핏자국 하나 남지 않았다.
“이거 정말 대단한놈이네.”
감탄 속에 허탈감과 더불어 짜증이 가득했다.
놀라운 놈이다. 만나 보진 못했지만, 자신보다 훨씬 더 뛰어난 실력을 가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어째서?
목을 취할 마음이었다면, 충분히 가능한 실력이었을 것인데…….
까득.
머릿속이 복잡해진 능운비가 어둠이 깔린 상락의 시가지를 바라보며 이를 갈았다.
젠장, 중원행이 생각보다 어려워질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 노도사의 경고처럼 노상에서 객사(客死)할 수도 있겠다.
‘그분’을 만나기도 전에.
“호위가 영 쓸모없진 않겠네. 적어도 마교에서 멀리 떨어지기 전까지만이라도……”
사라져 버린 암습자의 종적을 끝내 찾지 못한 능운비가 언짢게 머리를 긁어 대며 비연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바른대로 대! 말하라고!”
빡! 빠박! 빡!
“……”
행 뚫어 놓은 발밑 아래.
왕천이 노인 공경의 도리는 저 멀리 내다 버린 채 암습자를 두들겨 패고 있다. 마치 지가 다한 것처럼.
쯧쯧, 저런 못 배워 먹은 놈. 예의라고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는 놈.
그냥 내버려 두었다가는 초상 치르겠다.
그건 안돼지.
괜히 시신이라도 생기면 처리하는 것도 곤란하다.
무엇보다, 생각이 바뀌었다.
무려 마교주의 셋째 제자씩이나 되는 자신의 목숨을 노린 놈들을 저리 쉽게 죽여서야 쓰나?
무릇 음식을 할 때도 준비된 재료는 알차게 써먹어야 하는 법이랬다.
“왕천!”
“예!”
“그만해라. 그러다 죽겠다.”
부서진 천장을 통해 방 안으로 뛰어내린 능운비가 왕천을 말렸다.
“뭘 그만합니까? 주리를 틀어서라도 배후를 밝혀야지요.”
“밝히면?”
“예? 그야…… 교에 연락을 보내서 따져야죠.”
“잘도 먹히겠다.”
“……”
“말했지? 스승님께선 절대로 관여하지 않겠다고 하셨다고.”
“그, 그건……”
“그뿐이냐? 얘들 실력 봐라. 이게 어디 나 죽이자고 보낸 암습자겠냐? 세가원이나 원로원에서 썼다고 하기에는 너무 허접하잖아. 그들이라면 절대로 상락에서 일을 벌이지 않았을걸? 까딱하면 관부와 마찰을 빚을 텐데.”
“……그럼요?”
“아마 그 밑에서 충성하는 놈들이 독단적으로 벌인 일이겠지. 윗줄에 예쁨 좀 받아 보겠다고.”
“음, 하긴 너무 모자란 실력이긴 한데…… 그래도 그냥 내버려 두기엔 너무 억울하지 않습니까?”
“그럼 죽여?
“……”
“죽여 봐야 우리가 얻을게 없잖냐.”
“음…….”
능운비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여긴 왕천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왕천. 복수란 건 말이야,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예?”
“이런 허접한 계획을 세운 놈들이 누군진 모르겠지만, 동네방네 소문을내서 얼굴에 똥칠 정도는 해 줘야지.”
“……어떻게요?”
왕천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능운비가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
“여기가 어디냐?”
“……상락? 군사 도시?”
“잘 아네. 관군 불러.”
“과, 관군을요?”
“어. 객점 주인까지 줄줄이 엮어서 관군한테 넘긴다. 손님의 돈을 노리고 암습을 했다는 이유를 들어서.”
“하지만 관무불침이……”
“불침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건 무인 대 무인의 싸움일 때 얘기지. 우리가 누구냐?”
“예?”
“산천 유람 나온 시골 가문의 공자와 호위.”
“……”
“무림과는 아무 관계도 없어. 그저 지나가는 선량한 과객이란 말이야. 그런 자들이 여비를 노린 괴한, 아니 표면적으로는 객점 직원들한테 습격을 받은 거라고.”
왕천은 언뜻 이해가 안 돼서 눈만 끔벅 거렸다.
“큭큭, 아마 시뻘게진 얼굴들이 볼만할 게다. 관여 안 하겠다고 하신 교주님도 내막을 듣고 나면 당장에 수뇌들을 불러다가 불호령을 내리시고도 남을걸? 고작 이딴 것들로 목숨을 노렸다고 말이지.”
“……아!”
그제야 왕천이 탄성을 터트렸다.
능운비의 말대로 지금 그들은 산천유람을 떠난 시골 가문의 공자님과 호위로 위장하고 있다.
삼장로부에서 만들어 준 신분이니 관에서 조사해 봐야 어떤 문제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암습자는 다르다. 엄연한 범죄자다.
물론 아무리 조사해 봐도 관부에선 마교와의 연관성은 밝혀 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마교 내부에서는 난리가 날게 틀림없다.
마교인이 관부에 붙잡혀 조사를 받게 생겼는데 가만히 있을 이가 누가 있을까?
집요하게 타고 올라갈 것이고, 세가원이나 원로원 중 어느 한 곳이 걸려들고도 남는다.
명망 높으신 분들이 그 쪽팔림을 어찌 감당하겠는가?
고작 이런 놈들을 보내서 괜한 문제만 만들어 놓았으니 감히 얼굴을 들고다니지 못할 것이다.
“그렇군요, 그럼 제가 서둘러 어머님께 서신을 띄워야겠군요?”
“호오! 서당 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더니, 내 옆에 있더니 자네도 제법 머리가 돌아가는구만?”
“……제가 갭니까?”
“따지지 마. 칭찬이었다.”
“……이런 씨.”
왕천이 샐쭉하게 뜬 눈으로 째려보았지만, 능운비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서신을 받은 소설옥수가 어찌 나올지 뻔하다.
그 성격에 가만있겠어?
길길이 날뛰는 것도 모자라 직접 이름까지 거론해서 모두의 앞에서 개 쪽을 주고도 남을 것이다.
큭큭, 어떤 놈인지 모르겠지만 어디 엿 한번 잡숴 봐.
* * *
능운비가 관군을 불러 객점을 초토화시키고 있던 시점, 제법 떨어진 골목어귀에서 면사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객점을 주시하고 있었다.
“삼공자가 생각했던 것보다 제법이네.”
앳된 목소리였고, 뜻을 알 수 없는 중얼거림이었다.
하지만 면사에 가려진 입가에 머무는 것은 열은 미소였다.
조금 전, 그녀는 난장판으로 변해 가는 객점의 천장에 숨어서 능운비를 살피고 있었다.
암습자들은 실력을 평가하기도 언짢을 정도로 별 볼 일 없는 놈들이었지만, 만일을 걱정했다.
강호에 출도해 본 경험이 없는 능운비가 혹시 라도 그들에게 당할까 봐.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은 의외였다.
되레 암습자를 유인해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더욱이 수면향이 퍼진 곳에서 일각이 넘는 시간 동안이나 숨을 멈추었다.
“해식까지 알고 있을 줄이야, 다른이들의 생각보다 꽤 많은 것을 감추고 있는 모양이야.”
은신자들의 호흡법 중 최상위에 속하는 그것.
솔직히 의외였다.
어찌 교주의 제자가 자존심 강한 무인들에게는 잡기술이라 평가받는 것을 익히고 있는 것일까?
그뿐만이 아니었다.
문득 그녀가 자신의 옷자락을 살폈다.
잘려 나간 흔적이 보인다. 제때 몸을 빼지 않았다면 잘린 것은 옷자락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찾아냈다.
뛰어난 기감이다. 그에 관한 수련을 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가질 수 없는 수준의.
하지만 그가 무엇을 익히고 있던 무슨 상관일까?
단지 그의 신분과 어울리지 않을 뿐이다.
어쩌면 생존을 위해 익혀 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의 삶은 언제나 생사의 경계를 걷고 있었으니까.
와중에 일을 수습하는 삼공자의 대처가 무척이나 재미있다.
마교의 사주를 받은 것을 알고도 남았을 교주의 제자가, 설마하니 관군을 불러서 암습자들을 죄 넘겨 버릴 줄은 몰랐다.
대충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상되고도 남는다.
“큭큭, 정말 재미있는 분이라니까. 이런 식으로 복수를 하실 줄은 생각도 못 했네요. 하지만 이렇게 되면 저도 손을 좀 보태 드려야겠죠?”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던 그녀가 품속에서 지필묵을 꺼내 무언가를 적었다.
시작은 교주님 친전이었고, 끝맺음은…… ‘향이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