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1151
#1150.
권유하다 (5)
“보육원을 나가?”
“응.”
강진호의 물음에 한진성이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왜?”
“왜긴 왜야. 나이가 찼으면 나가야지.”
“학교 다닐 동안은 괜찮은 거 아냐?”
“음, 그렇긴 한데…….”
대한민국의 법이라는 건 그렇게 매정하지 않았다.
반드시 해줘야 할 부분은 깔끔하게 외면하고 지나가가기도 하지만, 의외로 이런 부분까지 신경을 써주는가 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부분도 있었다.
기본적으로 보육원은 아이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보호와 교육을 담당하는 역할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인이 되는 순간 무작정 사회로 내보내 버리지는 않는다.
직업을 구하는 아이들에게는 직업과 생활이 가능한 곳을 알선해 주고, 대학에 진학하는 아이들에게는 대학을 다니는 동안 보육원에 머무를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었다.
“좀 껄끄러워서.”
“뭐가?”
“그런 게 있어. 현실적으로도 좀 그렇고.”
문제는 보육원에 머무른다는 건, 보육원에서 통학이 가능한 학교에 갔을 때나 의미가 있다는 점이었다.
강진호가 재경을 통해 지원한 덕분에 보육원은 서울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었고, 한진성의 성적으로는 근처에 갈 수 있는 대학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별로 도움도 안 되면서 그냥 방이나 축내고 싶지는 않아. 나도 이제 성인인데, 내 돈은 내가 벌어 쓰고, 내 삶은 내가 책임져야지.”
조미혜가 입을 삐쭉 내밀었다.
“예예, 참 대단한 성인 나셨네요.”
“저게.”
강진호가 쓴웃음을 지었다.
“형도 그게 맞다고 생각하지? 남자가…….”
“아니.”
강진호가 단호하게 한진성의 말을 잘랐다.
“응?”
“아니라고.”
“……왜?”
한진성의 의외라는 얼굴로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박유민이면 몰라도 강진호라면 한진성이 보육원을 나가 제 삶을 스스로 지탱하는 걸 응원해 줄 줄 알았다. 강진호의 성향이 그러니까.
“일단 첫 번째로…….”
강진호가 한진성을 보며 말했다.
“너는 성인이 아냐.”
“에이, 내 나이가 몇인데.”
“밥은 해 먹을 줄 알아?”
“…….”
한진성이 입을 꾹 다물었다. 물론 대답은 조미혜가 대신 해주었다.
“라면도 잘 못 끓여.”
“너 가만히 좀! 제발 가만히 좀!”
강진호가 피식 웃었다.
“성인은 나이로 구분하는 게 아냐. 저 혼자 자기를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성인이지. 그런 의미로 봤을 때, 너는 아직 성인이 아냐.”
“그런데 그렇다고 그냥 여기서 죽치고 있으면 달라질 게 없잖아.”
“아무것도 안 하니 그렇겠지.”
“…….”
“수능 끝나면 준비해. 혼자 살 수 있도록.”
“아니…….”
“그리고…….”
강진호가 고개를 내저었다.
“네가 준비를 마치고 결심을 해서 혼자 살기로 한다면 반대 안 해. 그건 네가 할 선택이지. 그런데 너는 지금 그냥 무작정 나가려는 거야. 아냐?”
“…….”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아.”
이제 갓 스물이 된 이가 쉽게 헤쳐 나갈 수 있을 정도로 세상은 부드럽지 않다. 이곳에 있는 아이들은 그나마 세상을 조금 더 겪은 축에 속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세상의 각박함을 완전히 알지는 못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강진호가 어깨를 으쓱했다.
“더 좋은 환경이 있는데, 다른 환경을 택하는 건 그냥 자존심일 뿐이야. 현명한 사람은 자존심이 아니라 이득을 택하지.”
“……아니, 형 생각처럼 보육원에 있는 게 그리 좋은 게 아니라니까.”
“네 생각보다는 좋아.”
“생활비 문제도 있고…….”
“그건 내가 해결해 준다.”
강진호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을 해뒀어. 그동안은 대학을 가는 애가 거의 없거나 대충 다니다가 그만둬서 딱히 실행하지 않았을 뿐이야. 네가 대학 다닐 동안 학비나 생활비는 내 쪽에서 해결할 거야.”
“형.”
한진성이 살짝 인상을 썼다.
“그게 싫은 거라고.”
“응?”
한진성이 한숨을 쉬었다.
“내가 형 아들도 아니고…….”
“끔찍한 소리.”
“아니, 여기서 끊지 말고.”
한진성의 얼굴에 짜증이 어렸다.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건데, 어쩌겠는가.
“내가 형 아들도 아니고, 친동생도 아닌데, 당연하다는 듯이 형이 해주는 걸 받고 싶지는 않아. 호의도 좋고, 다 좋지. 그런데…… 그걸 당연하다는 듯이 받는 사람이 되면 안 된다고 생각해.”
“……호의?”
“응, 호의.”
강진호가 뚱한 얼굴을 했다.
“오해하는 모양인데, 공짜로 준다고 한 적 없어.”
“응?”
“갚아.”
“…….”
“이자 쳐서.”
한진성이 멍한 얼굴로 강진호를 바라보았다.
“대학 나와서 취업하고 돈 벌게 되면, 그때부터 갚아.”
“그게 학자금 대출이랑 뭐가 달라?”
“십 년이 아니라 이십 년이 걸려도 상관없어.”
“…….”
“갚아. 그러고 나서 남는 돈 있으면 보육원에도 지원해. 그렇게 한 명, 두 명이 쌓이다 보면, 나중에는 너희가 보내는 돈만으로도 보육원이 돌아갈 거야. 그리고 더 많은 애들이 취업하게 되면, 보육원은 더 좋아지겠지.”
한진성이 살짝 눈을 찌푸렸다.
“형,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그게…… 애들이 형이 생각하는 것처럼 다 착하고 능력 있지는 않아. 누군가는 떼먹으려 할 거고, 누구는 그 돈도 못 벌 수 있잖아.”
“알아.”
“근데 손해 보는 장사를 왜 해?”
“있어야 하니까.”
강진호가 가볍게 웃었다.
모른다.
한진성은 아무리 들어도 모를 것이다.
그가 어떻게 짐작하겠는가, 강진호가 한때는 지금의 한진성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고달픈 상황에 처해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살을 에는 겨울. 쓰레기를 뒤지다가 죽어가는 어린아이를 봐도 누구도 손을 내밀지 않는다. 세상천지를 다 뒤져도 그에게 손을 내밀어줄 사람이 없다는 게 얼마나 두려운 건지, 강진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나마 운 좋게 스승을 만날 수 있었고, 그의 온정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적천마존?
마교의 교주?
웃기는 소리.
그것도 결국 살아남았기에 오를 수 있던 자리다.
만일 스승을 만나지 못했다면, 강진호는 그날 얼어 죽었을 것이다.
스스로 살아갈 수 있게 된 이후로 겪은 고난은 고난이라고도 할 수 없다. 강진호에게 있어서 가장 끔찍한 기억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린아이의 몸으로 견뎌내야 했던 추위와 허기짐이었으니까.
스스로의 삶을 지탱한다?
홀로 자신을 떠받치고 살아간다?
좋은 말이지.
하지만 그건 선택하지 않을 수 있다면 선택하지 않는 게 좋은 일이다. 기댈 곳이 있다면 사람은 기대고 싶어 한다. 기대고자 하는 이를 나약하다고 욕하는 것은 기대지 않는다는 게 유일한 자부심일 뿐인 이의 투정에 불과하다.
“무시하는 게 아냐. 네가 지금부터 혼자 살아간다고 해서 크게 잘못될 거라 생각하지 않아. 내가 아는 너라면 잘해내겠지.”
강진호가 한진성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그건 그저 살아갈 수 있다는 것뿐이야.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더 나은 삶을 살 기회를 잃어버리는 거지. 당장은 네가 혼자 살아간다는 거에 자부심을 느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몇 년이 지나면 후회하게 돼.”
강진호 역시 마찬가지다.
두 번째 삶과 지금의 삶이 그에게 알려준 것은 관계에 대한 소중함이다.
강진호는 타인을 긍정한다.
그들에게 손을 내밀어 도움을 청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먼저 손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도움을 청하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으니까.
“도움을 받아. 그러고 나서 더 나은 사람이 되고, 더 능력 있는 사람이 돼. 그렇게 되고 나서 갚아도 안 늦어.”
“하지만…….”
한진성은 여전히 고민하는 눈치였다.
강진호가 가만히 한진성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원장 수녀님이라면 이럴 때 뭐라고 말씀하셨을까?”
원장 수녀님이라는 말이 나오자 한진성이 움찔했다.
이미 돌아가신 지 시간이 꽤 지났지만, 그분의 가르침과 그분의 손길은 보육원의 아이들에게 화인처럼 남아 있다.
“빤하지, 뭐.”
한진성이 고개를 떨어뜨린다.
“선택은 네가 하는 거야.”
강진호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다만, 네가 말한 대로 네가 내 친동생은 아니지만, 동생이기는 하지. 형한테는 자존심 부리는 게 아냐.”
“…….”
강진호가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려고?”
“담배 한 대 피우고 올…….”
“좀 끊어!”
“오빠, 좀 끊어!”
강진호가 우울한 얼굴을 했다.
이 잔소리는 여기서도 사라지지 않는구나.
어떻게 보면 강진호의 건강을 생각해 주는 일이니 고마워해야 할 일이기는 한데…….
강진호가 아무 말 없이 달아나듯 방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한진성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거 봐, 내가 욕먹을 거라고 했지?”
“욕은 안 먹었어.”
“대신 욕보다 더 얻어맞았지.”
“끙.”
한진성이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나름 어디 가면 어른스럽다는 말 많이 듣는데.”
“결국은 그게 애 같다는 말이지. 어른한테 어른스럽다는 말은 안 하잖아.”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고…….”
한진성이 가만히 강진호가 나간 곳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따라가려고 해도 너무 멀다. 강진호의 대화를 하고, 강진호의 말을 듣다 보면, 스스로가 애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너무 멀다니까, 진짜.”
한진성이 피식 웃고 말았다.
찰칵.
보육원을 빠져나온 강진호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잘난 듯이 말했군.’
보육원에 소홀했던 주제에 굉장히 생각을 해주고 있다는 투로 말을 했다. 생각해 보면 민망한 일이다.
하지만 지금 한 말이 강진호의 진심이기도 했다.
강진호는 이 아이들이 잘되길 바라지만,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아이들의 미래가 아니었다.
바로 지금이다.
아이들이 미래에 더 좋은 사람이 되는 것도 좋지만, 강진호는 그저 지금 저 아이들에게 기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주고 싶었다.
한때 그가 그토록 바라던 것처럼.
절망의 끝에 내몰렸을 때, 그가 기대한 것은 기적이 아니었다.
그저 손길.
자신을 향해 뻗어지는, 온정을 담은 손길이었다.
세상이라는 절벽을 오르다 떨어진다고 해도 그 아래에서 받아줄 사람이 있다는 그 믿음, 그 믿음 하나.
그게 강진호가 저 아이들에게 진정 주고 싶은 것이다.
쉽지는 않겠지만.
“후우우우우.”
강진호가 천천히 담배 연기를 뿜어냈다.
이곳에 있다.
그의 삶을 바꾼 것, 그의 생각을 바꾼 모든 것들이 바로 이곳에 있었다.
그렇기에 강진호는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이현수의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군.’
그가 다른 지배자들과 다를 수 있는 이유는, 어쩌면 이곳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곳을 겪고, 이곳에서 느끼지 못했다면, 강진호는 결국 과거의 적천마존과 같은 사람이 되어버렸을 테니까.
이곳은 가족과 함께 강진호가 강진호일 수 있는 최후의 보루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니?”
별 하나 없는 어두운 밤하늘을 바라보던 강진호가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아니요. 아직은 아닙니다, 아직은.’
그는 아직 누군가가 쉽게 손을 내밀 수 있는 사람이 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렇지만, 잊지 않고 있습니다.’
길을 잃을 때마다 생각한다.
원장 수녀님이 그에게 해준 말, 그에게 보여준 표정.
일생을 통틀어 유일하게 닮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해준 그 사람을 말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언젠가는 저 물음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더없이 환희 웃으며 말이다.
어두운 밤하늘이 강진호를 쓰다듬듯 천천히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