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jon's Advent RAW novel - Chapter 2116
#2115.
바라보다 (5)
고한봉이 살짝 허리를 폈다.
그건 억눌린 상황을 벗어나 평소의 제 자신을 되찾기 위한 무의식적인 행위였다. 상대가 자신의 기분을 눈치채지 않게 표정을 관리한 고한봉이 한껏 여유를 담은 목소리를 가장하여 입을 열었다.
“음, 그건 조금 이상한 말이로군요.”
고한봉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결국 총회의 의지란 회주님의 의지와 같은 말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제가 만나 뵈었을 때, 회주님은 이 모든 상황에 무척이나 전향적이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필요하다면 자신의 뜻을 굽힐 수도 있을 정도로요. 그사이 회주님의 생각이 바뀐 것인지 궁금하군요.”
이현수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총리님과 회주님이 어떤 대화를 나누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제 생각에는 회주님의 입장이 그리 바뀌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럼 지금 이 실장님의 발언은…… 그런 회주님의 의견에 반하는 말이 되지 않을는지요.”
이현수가 빙그레 웃었다.
“괜찮습니다. 이 협상에 관한 모든 것은 제게 일임이 되어 있으니까요.”
고한봉이 결국은 참지 못하고 눈을 찌푸렸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가. 애초에 이현수는 강진호의 입장을 전하러 온 메신저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강진호가 직접 이현수를 메신저로 선택한 만큼 개인적인 사견이 적당히 섞이는 것까지는 이해해야 하겠지만, 강진호의 생각에 완전히 반하는 일은 벌일 수 없어야 마땅했다.
다시 말하자면, 이건 월권이다. 그것도 상황을 전체적으로 뒤틀어 버릴 수 있을 만큼의 치명적인 월권.
하지만 고한봉은 그 사실을 지적하지 못했다.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그런 걸 모를 사람이 아니라는 거지.’
이현수 정도 되는 사람이 그 사실을 이해하지 못할 리가 없다. 그럼 이건 실수 같은 게 아니라 철저히 의도된 행위라는 의미였다.
그럼 이 상황을 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 순간, 이현수가 제 넥타이를 잡아 살짝 끌어당겼다.
“지금까지는 총회의 실장으로서 총회의 입장을 전달드렸습니다, 총리님. 그럼 지금부터는 이현수라는 개인으로 고한봉 총리님께 저희의 입장을 전달드려도 되겠습니까?”
“…….”
고한봉은 선뜻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저 말에 담겨 있는 의미가 생각보다 무겁다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이현수의 시선에 고한봉의 고개가 결국 끄덕여지고 말았다.
“그러시지요.”
“분명 회주님께서는 어떤 식으로든 협의를 깰 생각이 없으실 겁니다. 하지만…… 그쪽은 다르겠죠.”
“그건 오해입니다.”
고한봉이 고개를 내저었다.
“각국은 평화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 실장님이 생각하는 이상으로 말이지요.”
“네. 물론 그럴 겁니다.”
이현수가 빙그레 웃었다.
“당장 타고 있는 불을 꺼야 할 테니까요. 제 몸에 불이 옮겨붙기 전에.”
“…….”
“그런데…… 그 급한 불이 꺼진 뒤에는 어떨까요? 그때도 무인들의 독점적인 지위를 인정해 주려 할까요?”
고한봉이 입을 다문다. 한참을 망설인 끝에 고한봉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한번 체결된 조약은…….”
“네. 언제든 깨질 수 있죠? 그게 국제 관계 아닙니까?”
“…….”
차마 아니라고 대답할 수 없다는 게 고한봉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물론 총리님의 진의를 의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총리님이 총회를 위해 많은 것을 해주셨고, 지금도 총회의 파트너로서 노력하고자 하신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만…….”
이현수의 시선이 고한봉에게 가닿았다.
“총리님의 발언력이라는 게 총리님 뒤에 서 있는 이들에게 대체 어떤 의미가 있는지는 생각을 해볼 문제겠죠.”
고한봉이 눈을 딱 감았다.
조금 전, 그는 이현수에게 그에게 과연 강진호에게 반하는 의견을 제시할 권한이 있는지를 물었다. 그 질문을 지금 고한봉이 그대로 돌려받고 있었다.
그가 과연 그의 뒤에 서 있는 이들을 대변할 수 있는지를 말이다.
이현수는 그렇다고 대답했지만, 고한봉은 차마 그렇다고 대답할 수가 없었다. 저들에 비한다면 고한봉은 정말 아무것도 아닌 존재에 불과하니까.
“세상은 호의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 사실을 저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총리님.”
이현수가 서늘한 미소를 머금었다.
“언젠가는 여러분께 회주님의 존재 역시 사냥이 끝난 사냥개의 꼴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실장님, 그건…….”
고한봉이 말을 잇지 못하자, 이현수는 웃음기 띤 얼굴로 고한봉을 바라보았다.
“그러니 회주님은 차마 할 수 없는 말을 제가 대신 하겠습니다.”
“…….”
“회주님께서 바라는 것은 모든 무인들이 특별하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겁니다. 그분께서 스스로 얻지 못한 것을, 그렇기에 간절히 바라던 것을 다른 이들이라도 누리게 하는 거죠.”
이현수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회주님은 그 목표를 위해 많은 것을 감내할 수 있을 겁니다. 양보하고 또 양보하고, 스스로 모욕을 받는 것마저 참아낼지도 모르죠.”
이현수가 씁쓸하게 웃었다.
“글쎄요. 스스로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심리 때문일지도 모르고, 흑왕에게서 넘겨받은 것들에 대한 부채 의식일 수도 있습니다. 네. 그 원인이 무엇이든 회주님은 지금 자신의 안위보다는 무인계 전체를 생각하실 겁니다. 그건 분명한 사실이죠.”
“그럼 왜…….”
“하지만…….”
이현수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뒤틀렸다.
“죄송하지만, 제게는 그런 부채 의식 같은 게 없습니다. 아니, 저뿐 아니라 총회, 홍왕계, 원탁의 모든 무인들은 바깥세상의 평범한 이들에게 죄송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고, 먼저 죽은 흑왕에게 부채 의식을 느껴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실장님…….”
“그러니 똑똑히 말씀드리겠습니다.”
고한봉이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잡았다.
“회주님이 존재하시는 한, 우리는 그분의 의지에 따를 것입니다. 그분께서 마음을 바꾸지 않는 이상, 여러분이 원하는 세상을 이룰 수 있도록 최대한 협조하겠습니다. 다만…….”
이현수의 두 눈이 차가운 빛을 내뿜었다.
“당신들의 뜻이 변질되든, 아니면 숨겨둔 발톱을 드러내든, 회주님에게 작은 위해라도 가하는 일이 벌어질 시에는…….”
으르렁대는 듯한 이현수의 목소리가 고한봉의 귀를 파고들었다.
“총회 휘하 모든 무인들은 당신들의 목줄기를 물어뜯기 위해 제 목숨을 버리는 걸 마다하지 않을 겁니다. 잊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세상을 부술 힘은 없지만, 당신들 몇 정도는 언제든 처리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걸.”
“…….”
“전쟁을 원한다면 얼마든지 해줄 수 있습니다. 대신 당신들이 얻어야 할 것은 당신들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의 승리가 될 겁니다. 이건…….”
이현수가 빙그레 웃었다.
“경고입니다.”
“…….”
“물론 뭐, 개인적인 의견입니다. 아주 개인적인. 총회의 공식적인 입장과는 무관하니, 너무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고한봉이 손수건을 꺼내 이마에 배어난 땀을 닦아내었다. 그러고는 깊디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개인적인 의견이란 말씀이시지요?”
“그럼요.”
“……결국은 그 개인적인 의견들이 모여 합의가 이루어지는 것이겠죠. 다른 분들의 생각 역시 이 실장님과 그리 다르지 않을 거구요?”
“아니요. 저는 굳이 따지면 온건파에 속합니다.”
고한봉이 입을 다물었다.
“적어도 저는 당신들이 회주님께 위해를 가하기 전에는 움직이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편이니까요. 이미 저희 내부에서는 미리 선제적으로 당신들을 제거하고 무인들에게 우호적인 이들이 정권을 잡도록 움직이자고 주장하는 이들도 나오고 있습니다.”
고한봉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말씀하신 바는 확실히 이해했습니다.”
“그러시다면 다행입니다.”
“다만, 마지막으로…….”
“예.”
“한 가지 여쭈고 싶은 게 있습니다.”
“그러시죠.”
고한봉이 내려간 안경을 치켜올렸다.
“그…… 말하자면 이현수 씨 개인으로서는 무인계 전체의 안위보다…… 강진호라는 한 사람의 안위가 더 중요하다, 이런 말씀이신지?”
“정확합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저는 선뜻 이해가 잘…….”
아무리 이현수가 강진호에게 충성을 다하는 이라고 한들, 수십, 수백만의 목숨과 강진호를 비교한다는 게 어떻게 가능한가.
하지만 이현수는 조금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총리님, 저는 정치인이 아닙니다.”
이현수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솔직히 제 입장에서는 무인계 같은 건 당장 내일 모조리 사라진다고 해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당신들이 생각하는 만큼 무인들은 서로를 동료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협력은커녕 서로 죽여 없애야 할 적에 불과했죠.”
“…….”
“그런데 제가 왜 무인계의 미래와 안위 같은, 피부에 와닿지도 않는 거창한 목표를 위해 움직여야 합니까? 그건 제게는 귀찮은 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럼 왜…….”
“회주님이 원하시니까.”
이현수가 어깨를 으쓱했다.
“이유는 그거면 됩니다.”
“…….”
이현수가 잠깐 눈을 감았다. 생각을 정리하는 듯하던 그가 천천히 눈을 뜨고는 말을 이어갔다.
“저는 여전히 회주님께서 이 모든 상황을 안정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품고 있습니다. 그분은 언제나 제 상상을 뛰어넘는 분이시니까요.”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건 인간 강진호의 희생을 담보로 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
“그러니 제 입장은 간단합니다. 회주님께서는 무인계를 지키실 겁니다. 무인들을 지키시겠죠. 그러니 저는 그런 복잡한 건 생각하지 않을 겁니다. 제 모든 역량은 오로지 회주님 한 분을 보호하는 데 쓰일 겁니다.”
“이 실장님…….”
“그걸 위해서라면…….”
이현수가 이를 드러냈다.
“저는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
고한봉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그 모습을 본 이현수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어 댔다.
“이거, 이야기가 조금 심각해졌군요. 각설하고…….”
짝!
이현수가 가볍게 박수를 쳐 분위기를 환기했다.
“유럽과 동아시아의 지부는 곧 정리가 끝날 겁니다. 그 뒤에는 총회에서 공식적으로 무인들에 대한 통제를 시작할 겁니다. 총리님, 한 달이 지나기 전에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안정시켜 드리겠습니다.”
“……예.”
“그러니 말씀 잘 전해주십시오.”
고한봉이 헛웃음을 짓고 말았다.
어떤 말을 전해야 한단 말인가.
대외적인? 아니면 개인적인?
“그럼.”
이현수가 더는 할 말이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나가는 이현수를 향해 고한봉이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던졌다.
“회주님께선 좋으시겠습니다.”
“…….”
“이 실장님 같은 심복이 계셔서 말입니다.”
이현수가 고개만 돌려 고한봉을 보고 빙긋 웃었다.
“거꾸로죠. 회주님을 만난 제가 행운아인 겁니다.
“…….”
“그 행운이 총리님께도 함께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그러길 바랍니다.”
가볍게 고개를 숙인 이현수가 방 문을 열고 나갔다.
홀로 남은 고한봉이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으로 걸어간다. 그가 책상 서랍을 열어 담배를 꺼내 들었다. 당장 보고를 해야 할 만한 일이지만, 지금은 조금 쉬고 싶은 마음이었다.
‘화합이라…….’
고한봉이 눈을 가만히 감았다.
‘언제나 가장 어려운 일이지.’
너무도 멀고 험난한.
그래, 그런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