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1141
로그인 무림 1141화(1141/1141)
굳게 닫혀 있던 궁성의 입술이 열린 것은, 저 멀리 성벽 너머로 들려오던 풍악 소리마저 서서히 잦아들던 때였다.
“듣기 좋구나.”
모르겠다.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흐르는 강물 소리인지, 바람에 실려 전해지는 사람들의 웃음소리인지.
다만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할 뿐이었다.
“힘든 전투에서 승리한 뒤에는 늘 저런 잔치가 벌어지곤 했다. 사람들은 날이 새도록 웃고 떠들며 쉼 없이 술잔을 주고받았지.”
궁성이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던 과거의 기억이 나직한 음성을 타고 흘러나온다.
그리고 천천히 눈앞에 그려지는 그 풍경 속에서도, 그녀는 오늘처럼 홀로 동떨어져 있었으리라.
“그저 잠시라도 웃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날도 있어야 한 걸음이라도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테니.”
이미 강산이 몇 번이나 뒤바뀔 시간이 흘렀지만, 인간의 마음은 변함없다.
과거에도, 지금도 살아남은 이들은 한데 모여 술잔을 기울인다.
승리의 기쁨을 담아 한잔, 죽은 동료를 기리며 한잔.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이 시간을 위해 또 한잔.
때문에 이것은 잔치이며, 동시에 위령제(慰靈祭)다.
“하지만, 나는 늘 저 자리에 함께하지 못했지.”
말없이 강물만 바라보던 나는 그제야 입술을 뗐다.
“어째서입니까?”
“몸과 마음을 짓누르는 무게가 너무나도 힘겨웠으니까. 그 잠깐의 감정조차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 앞으로의 일이 걱정되었으니까.”
처음으로 강물에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뗀 그녀가, 특유의 침착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말없이 다가와 곁을 지켜 주었던 누군가가 있었지.”
“……!”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나는 안다.
알고 있다.
지금 궁성이 말하고자 하는 이가 누구인지.
다만 미처 추측하지 못했던 것은, 그녀 또한 내가 찾아온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는 부분이었다.
“그래, 무엇을 듣고 싶은 것이냐?”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듯한 궁성의 시선에, 나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답했다.
“무신(武神). 그분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싶습니다.”
아니.
이제는 알아야겠다. 반드시.
* * *
수십여 년 전, 한 사내가 있었다.
사문(師門)은 물론, 얼굴이나 이름조차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그러나 사내가 처음으로 역사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만천하의 모든 이가 그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그분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신인(神人)과 같았지.”
정마대전 초기.
마교는 곤륜산을 피로 물들이며 개전(開戰)을 알리는 신호탄을 쏘았고, 거대한 파도처럼 들이닥치는 십만마도의 기세에 중원 무림은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초절정의 경지에 이른 거마(巨魔) 셋과 마교도 오천. 첫 전투에서 대패한 공동파는 즉시 섬서로 퇴각하려 했지만, 금세 따라잡히고 말았다. 급하게 소집된 지원군은 마교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었지.”
그리고 그날.
알려지지 않았던 한 사내가 추격자들을 막아섰고, 새로운 하늘이 열렸다.
“고작 반나절이 지나기도 전에 적들은 모조리 죽거나 사로잡혔다. 단 한 사람이 행한 일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지.”
하지만 뒤늦게 도착한 화산파의 지원군은 그 모든 것을 똑똑히 보았다.
한바탕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한 전장 속, 무수한 시신 사이에 홀로 우뚝 서 있던 사내의 모습을.
그들 모두는 경악했고, 전율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지원군을 이끌었던 매화검수(梅花劍手)의 당대 수장이자, 고작 이립의 나이에 천하제일검으로 추앙받던 누군가는 전율을 넘어선 무언가를 느낀 것이 분명했다.
“매종학은 즉각 만천하에 소식을 알렸고, 이내 모두가 알게 되었지. 천마(天魔)와 맞서 중원을 수호할 또 다른 절대자의 존재를.”
무신(武神)은 그렇게 탄생했다.
그리고 이후 십여 년간 이어진 전란의 시기는, 곧 그가 써 내려간 전설이 되었다.
승리, 또 승리.
숱한 패배와 절망 또한 있었으나, 태양만큼이나 뜨겁고 눈부셨던 영광과 찬미.
이합집산을 반복하던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무림맹(武林盟)의 깃발 아래로 결속시키고, 그 어떤 사사로운 이득도 탐하지 않았으며 오직 인의(人義)만을 좇은.
그렇기에 만인의 경외를 한 몸에 받은 일세의 대영웅.
“나는 그 모든 것을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위업의 연속에 수없이 감탄했지. 감히 그분을 시기 질투하고 의심하던 이들도 있었으나, 그들 역시 머지않아 무신께 깊이 감복하게 되었다.”
하늘 아래 그 누가 태양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다는 말인가.
아니, 태양이 없다면 이 세상을 어찌 살아간단 말인가.
무신은 하늘이자, 곧 태양이었다.
제아무리 수 갑자에 달하는 공력을 쌓고, 드높은 무위를 지녔다 한들 감히 똑바로 바라볼 수조차 없는.
눈이 멀어 버릴 것이 두려워, 끝내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그리고 무신은 증명했다.
그는 천년 마도 역사상 두 번 다시 없을 절대자를 쓰러트렸고, 머지않아 자취를 감추었다.
영광, 명예. 역사.
심지어는 이 광대한 천하 무림까지.
무신은 자신이 쌓아 올린 모든 것을 미련 없이 내던지고 떠났고.
“전설은 비로소 신화(神話)가 되었지.”
궁성은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칠흑 같은 밤, 그녀에게 주어진 별호와 닮아 있는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으나 저 아득한 창공에 비하면 작은 불빛에 불과했다.
“나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이들은 알고 있다. 무신께서는 실로 이적(異蹟)과 같은 존재이자, 하늘 아래 그 누구도 그분과 같은 위업을 이룰 수 없으리라는 것을.”
긴 이야기 끝에 내려앉은 침묵 속, 말없이 궁성을 응시하던 나는 불현듯 입술을 뗐다.
“그게 전부입니까?”
하늘을 향해 있던 궁성의 시선이 나를 향해 스르륵 미끄러졌다.
“무슨 뜻이냐?”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분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싶다고.”
“……어찌 이것이 전부가 아니라 생각하지?”
미묘하게 늦게 되돌아온 대답.
일순간 궁성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고 느낀 것은, 나만의 단순한 착각일까 아니면 그녀의 눈동자에 비친 강물 때문일까.
나는 떠오르는 의문을 숨기며 재차 입을 열었다.
“조금은 다른 이야기를 기대했습니다. 궁성께서는 제가 아는 사람 중 무신과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하셨고, 서신을 전달받은 장본인이기도 하시니까요.”
“이 짧은 시간에 십여 년의 세월을 어찌 모두 이야기할 수 있겠느냐. 게다가 그분의 행보를 기억하는 이들은 적지 않다. 비록 조금 더 가까이 머물렀다 한들 다를 것은 없겠지.”
조금 전 내비친 찰나의 동요가 무색하게도, 궁성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온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서신에 관한 것 역시 마찬가지다. 나는 그분께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뜻에 따라, 오랜 세월 ‘선택받은 자’를 찾아 헤매었고 그것이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이유겠지.”
맞다. 나 역시 알고 있다.
수십여 년간 천하 각지를 떠돌았던 궁성의 지난 행보가 곧 저 말들이 진실임을 증명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눈앞에 있는 이 여인이 나로서는 감히 평가할 수 없을 만큼 힘든 길을 걸어온 협객이라는 사실도.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지금 궁성이 한 대답은 틀림없는 사실인 동시에 불완전한 진실이기도 했다.
‘분명, 뭔가를 숨기고 있다.’
이건 일시적인 짐작이 아닌, 본능적인 직감과 냉철한 이성이 더해져 나온 결론이다.
비록 그리 긴 시간은 아니지만, 지금껏 여러 번 생사고락을 함께했음에도 어째서인지 번번이 일행과 섞이기를 거부해 왔던 궁성의 태도.
그리고 결정적으로.
‘열흘 전에 있었던 바로 그 전투.’
나는 전날 밤, 홀로 찾아온 살성이 조심스럽게 꺼낸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날 궁성이 보인, 이해할 수 없는 언행들을.
그 모든 사실을 바탕으로 유추했을 때, 당시의 그녀는 분명 방관자에 가까웠다.
적어도 내 생사(生死)에 관한 문제에서만큼은 그랬다.
‘만약 궁성과 내 입장이 정반대였다면?’
이미 몇 번이나 되새겨 보았지만, 고민할 필요조차 없는 질문이다.
나는 최선을 다해 궁성을 구했을 것이다.
몸을 움직인 것이 본능이든, 이성이든.
하지만 궁성은 그러지 않았다.
서녕을 둘러싼 대혈투가 벌어졌던 그 날, 그녀는 나를 구하고자 하는 살성에게 말했다고 했다.
만약 오늘 진태경이 죽는다면, 그 또한 운명이라고.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사방팔방에서 무수한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판국에 목숨의 경중이 어디 있겠나.
하지만 무신이 남겼다는 낡은 서신 하나에 의존하여 수십여 년의 세월 동안 ‘선택받은 자’를 찾아 헤매었던 궁성이, 내 죽음에 대해 그토록 초연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어쩌면 그녀는.
‘아니, 무신은…….’
나도 모르게 숨을 삼킨 그 순간.
촤아악.
거세게 밀려든 강물이 발끝에 닿았다.
가죽신 속으로 스며드는 차가운 감촉과 함께, 깊은 상념에서 깨어난 나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물끄러미 나를 응시하고 있는 한 쌍의 시선과 마주했다.
“한 가지,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궁성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어느덧 잘게 떨려 오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무신께서…… 저를 찾고자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다음 순간, 궁성이 대답했다.
“천하를 위해서. 그뿐이다.”
선명하게 빛나는 눈동자와 올곧은 목소리.
그런 궁성의 모습에서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건 진실이다.
단 한 가닥의 거짓이나 어떠한 악의도 없는.
그리고 지금의 내게는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천하를 위해서.’
귓가에 남아 계속해서 울려 퍼지는 그 짧은 한마디를 삼키며, 나는 궁성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충분한 답이 되었느냐?”
“어느 정도는, 그렇습니다.”
“의외로구나. 그분에 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어할 줄 알았거늘.”
“아쉽지 않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이미 해 주신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도움이 됐습니다.”
이건 결코 입 바른 소리나, 거짓말 따위가 아니다.
무신이라 불리는 존재의 시작과 끝에 대해 들음으로써, 나는 비로소 확신하게 되었으니까.
그와 같은, 그러나 다른 하늘 아래에 존재했던 또 다른 이의 정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