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orim Login RAW novel - Chapter 952
#951화
솨아아아.
갑작스럽게 쏟아지기 시작한 빗줄기에 모두가 바빠졌다.
날짐승들은 날개를 접고 종종걸음으로 풀숲에 숨었고, 먹이를 찾아 어슬렁거리던 들짐승들은 인적이 닿지 않는 동굴 안에 몸을 뉘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쉼 없이 떨어지는 저 굵은 빗줄기로부터 체온을 지키기 위해.
그러나 이 광활한 초원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던 짐승들은 잠시 후 깨닫게 되었다.
항상 달갑지 않았던 저 자연의 산물이, 이번만큼은 자신들을 보이지 않는 위험으로부터 구했다는 것을.
드득. 드드득.
갑작스럽게 시작된 진동.
지면이 뒤흔들린다. 아니, 마치 초원 전체가 몸을 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곳곳에 숨어 있던 짐승들은 본능적으로 바짝 털을 곤두세웠다.
동시에 탄생과 함께 타고난 후각으로, 청각으로, 혹은 시력으로 보고 느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한 빗줄기 너머, 그들의 땅을 가로지르는 수많은 인마(人馬)의 무리를.
철퍽, 두두두두두!
흙탕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흥건하게 고인 물웅덩이를 짓밟은 말발굽은 힘차게 전방을 향해 달려 나갔다.
그리고 끝없이 이어지는 거대한 무리의 선두에, 유독 눈에 띄는 두 사람이 있었다.
“도무지 그칠 기미가 안 보이는군.”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린 날렵한 체구의 사내가, 말머리를 나란히 한 채 달려가고 있던 거한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보게, 테무르.”
갑작스러운 부름에 거한, 아니 테무르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으, 응?”
“속도를 좀 올려야겠네. 지체했다가는 사방이 온통 진창이 되고 말 거야.”
“그래, 그렇겠지.”
잔뜩 쉰 목소리로 고개를 끄덕이는 테무르의 모습에. 날렵한 체구의 사내가 미간을 좁혔다.
“그래서?”
“어?”
“그게 끝인가?”
“아.”
멍하니 눈을 깜빡이던 테무르가 이내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어딘가를 향해 손짓하자, 활과 돌격창으로 무장한 기병 수십이 바람처럼 달려와 고개를 숙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테무르 칸.”
“휘하 모든 천인장들에게 전해라. 비가 그치기 전까지는 휴식 없이, 전력을 다해 이동할 것이라고.”
애써 준엄하게 명령을 내린 테무르가 날렵한 체구의 사내를 곁눈질하며 덧붙였다.
“만일 이 명을 소홀히 하는 자가 있다면, 나 테무르 칸과 여기 있는 칭겐 칸의 이름으로 엄벌할 것이다.”
“충!”
힘찬 군례와 함께 사방으로 흩어지는 기병들.
그제야 날렵한 체구의 사내, 칭겐의 미간이 펴졌다.
“그래, 응당 이래야지. 아주 잘했네.”
마른침을 꿀꺽 삼킨 테무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칭찬 고맙군.”
“이제 자네도 칸으로서의 몫을 해내야 해. 언제까지 내가 옆에서 일일이 조언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응? 내 자랑스러운 형제여.”
툭.
갑옷 위를 두드리는 칭겐의 손길에, 테무르의 신형이 흠칫 떨렸다.
“많이 추운가 보군. 괜찮나?”
“……물론. 아무 문제 없다.”
“아니야, 자네 마음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네. 형제여.”
나직이 한숨을 내쉰 칭겐이 문득 이를 악물었다.
“더럽고 비열한 족속들 같으니. 나는 놈들을 사로잡는 족족 갈기갈기 찢어 독수리 먹이로 던져 줄걸세.”
빗줄기 사이를 뚫고 울려 퍼진 칭겐의 목소리에, 두 사람의 주위에서 묵묵히 앞만 보고 내달리던 유목민들의 투구 사이로 살기 어린 눈빛을 번뜩였다.
그날의 참극(慘劇)은 이미 초원 전체에 모르는 이가 없었으니까.
테무르와 칭겐.
단숨에 동부 초원을 장악하여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준 두 명의 젊은 칸은 각각 일백의 심복을 거느린 채 회동을 가졌다.
웃음소리로 가득하던 게르가 곧 피로 물 들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
“누가 알았겠나. 빌어먹을 한족 놈들이 그토록 끔찍한 흉계를 꾸미고 있을 줄은.”
물경 수백에 달하는 불청객들의 정체는 중원의 한족, 그중에서도 무림인이라 불리는 족속들이었다.
연회가 한창 무르익던 찰나 들이닥친 그들은 닥치는 대로 병장기를 휘둘렀다.
다행히 하늘의 도우심으로 두 칸은 살아남았으나, 치열한 혈투 끝에 그들이 거느렸던 심복 대부분은 피 웅덩이에 몸을 뉘어야 했다.
“친애하는 내 형제여. 텡그리께서 우리를 보살펴 주시지 않았다면, 동부 초원은 순식간에 갈기갈기 찢겨 저 한족 놈들의 손아귀에 떨어졌을 걸세.”
칭겐은 새하얗게 물든 손아귀로 말고삐를 힘껏 말아쥐었다.
“놈들이 무엇을 노렸는지는 뻔해. 각각 강력한 세력을 갖춘 우리가 위험이 될 거라 판단한 것이겠지. 마침내 감춰 두었던 야욕을 드러낸 거야.”
서늘하게 빛나는 칭겐의 눈빛에, 테무르가 쇳소리처럼 갈라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나도, 나도 그렇게 생각해.”
“우리는, 아니 이 땅의 모두는 처음부터 놈들에게 이용당한 거였어. 저 비열하기 짝이 없는 족속들은 애초에 초원 전체를 손에 넣을 속셈이었겠지.”
끓어오르는 듯한 칭겐의 음성을 듣고 있던 유목민들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한족들은 늘 그랬다.
아득한 과거부터 자신들을 오랑캐라 부르며 멸시하고, 짐승보다도 하찮게 여겼다.
위대한 선조들이 무수한 말발굽으로 중원을 짓밟고 거대한 제국을 세운 이후에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멸시를 넘어 증오마저 내비쳤다.
한낱 오랑캐 따위가 대륙의 역사에 오물을 흩뿌렸다는 이유로.
그러나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긴 세월이 흐르고, 선조들의 위업이 차츰 잊혀지자 그들은 새로운 것을 원하기 시작했다.
정복보다는 평화를.
말똥이 아닌 금은보화를.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테무르와 칭겐. 황금 씨족의 혈통을 타고난 전도유망한 두 젊은이가 한족과 손을 잡았음에도 모두가 쌍수를 들고 환영했던 것은.
“내 실수였네.”
칭겐은 쏟아지는 빗줄기를 맞으며 탄식했다.
“놈들이 어떤 족속이었는지, 무엇을 위해 우리와 협력했는지 더 깊게 생각해 보지 못했어. 우두머리의 무지함과 어리석음으로 인해 고귀한 초원의 전사들이 희생당한 거야.”
슬픔과 후회로 가득한 그의 모습에 모두가 고개를 떨군 그 순간이었다.
“그 실수를 바로잡는다면, 초원의 전사들은 텡그리의 품에 안길 것이다.”
담담하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
유목민 특유의 변발을 한 중년인의 모습을 발견한 칭겐이 눈을 크게 떴다.
“후미에 계셔야 할 자무카 칸께서 어찌 이곳까지…….”
“자무카 칸을 뵙습니다!”
칭겐을 시작으로 곳곳에서 터져 나오는 외침.
항거할 수 없는 힘이 실린 눈빛으로 모두를 쓸어보던 중년인, 자무카가 입을 열었다.
“후방에만 있으니 따분해서 말이야. 이 늙은이가 도움이 될 일이 없나 해서 와 봤지.”
귀밑머리는 밤처럼 까맣고, 당당한 풍채는 한창때의 젊은이보다도 강건하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보이는 모습일 뿐. 자무카는 이미 여든을 훌쩍 넘긴 노인이기도 했다.
초원 제일의 전사이자, 오랜 세월 동안 서부 초원을 통치해온 또 한 명의 칸.
자그마치 이 만여 명이 넘는 부족민들을 이끌고 합류한 그는, 이 거대한 군세를 이끄는 실질적인 수장이었다.
“늙은이라니요. 감히 누가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 안 그런가, 테무르?”
떨리는 눈빛으로 자무카를 바라보던 테무르가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 맞습니다.”
“자무카 칸께서는 우리 황금 씨족의 웃어른이시자, 위대한 전사이며 칸이십니다. 저희에게 선봉을 맡겨 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이지요.”
칭겐은 주위의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높여 말을 이었다.
“멍청한 한족 놈들은 죽어 가는 그 순간까지도 몰랐을 겁니다. 자무카 칸께서 얼마나 강한 분인지.”
구태여 말하지 않더라도, 자무카를 바라보는 시선들은 이미 흠모와 경애로 가득했다.
초원 제일의 전사. 자무카.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는 테무르와 칭겐보다 앞서 수백에 달하는 한족들의 습격을 받았다고 했다.
고작 십여 기의 친위대만 거느린 상황에서.
하지만 그 결과는 엄청났다.
자무카는 자신의 무용을 똑똑히 증명했다.
적들에 비하면 한 줌밖에 되지 않는 친위대를 거느리고, 무수한 한족들을 상대로 학살극이나 다름없는 전투를 펼친 것이다.
결국 서부 초원마저 위협한 한족들의 흉계는 수포로 돌아갔고, 분노한 자무카는 휘하의 부족을 이끌고 중원으로 말머리를 향했다.
지금 이 순간처럼.
“별것 아닌 일이다. 수하들의 솜씨가 뛰어났을 뿐이지.”
담담하게 대꾸한 자무카가 등 뒤를 턱짓했다. 거무스름한 갑옷을 걸친 친위대가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그의 뒤를 쫓아 달리고 있었다.
아득한 과거, 유목 제국의 기틀을 마련했던 위대한 정복자가 탄생시킨 최정예 전사들.
이른바 ‘케식’이라 불리는 그들은 여전히 황금 씨족의 잔재로서 자무카를 따르고 있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각 부족을 대표하는 전사와 맞먹는 강자들.
그런 이들이 무려 일천에 달한다.
물경 수만을 아우르는 초원의 대군세가 승리를 확신하는 것은, 단순한 희망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었다.
“지금부터는 내 친위대 중 일부가 선봉에 설 것이다.”
“케식을…… 말씀이십니까?”
“그래.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
생각지도 못한 자무카의 말에 잠시 침묵하던 칭겐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 있겠습니까. 저희로서는 오히려 부탁드릴 일이지요. 안 그런가, 테무르?”
“……그렇지. 나 역시 동의한다.”
가장 강한 전사들이 선봉에 선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정에 모두가 납득했다.
단 한 사람만 빼고.
– 그래도 되겠습니까?
불현듯 귓가를 파고드는 누군가의 전음에, 자무카가 입술을 달싹였다.
– 조금 전에는 오히려 부탁드릴 일이라고 하지 않았나?
– 그건…….
– 번복은 없다. 저 아이들을 선봉에 세워 최단 시간 안에 국경을 넘을 것이다.
– 함정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사방에 화살받이들이 널리고 널렸는데, 굳이 귀한 전력을 낭비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 함정이라면 무엇을 말하는 것이냐. 며칠 뒤에나 산서성에 도착할 화왕과 진태경? 아니면 보잘것없는 산서성 놈들?
무뚝뚝하게 대답한 자무카가 전음의 주인을 똑바로 응시했다.
– 네놈은 옆에 있는 그 얼간이나 제대로 단속하거라. 그때 죽이지 않았던 것이 슬슬 후회되려던 참이니.
– 제가 말씀드렸잖습니까. 차라리 머리가 잘 굴러가는 놈을 살리자고.
아무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흐릿하게 실소를 흘린 칭겐, 아니 그의 모습을 한 누군가가 자신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 그놈 참, 어떤 의미로는 대단하긴 했습니다. 사방에서 수하들이 죽어 가는 와중에도 협상을 시도했으니.
그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항거할 수 없는 무력의 차이에 굴복하여 오줌까지 지리던 테무르의 옆에서, 원하는 것을 말하라며 기개를 내보이던 칭겐의 모습을.
– 죽은 그놈에 비하면 이 멍청한 녀석은…….
– 멍청해서 살려 둔 것이다. 마음 깊이 굴복한 놈은 그만큼 다루기 쉬우니까.
– 그 부분은 인정합니다. 놈이 따라 준 덕분에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많은 오랑캐들이 모였으니까요.
웃음기 어린 눈빛이 초원을 가득 메운 대군세를 훑었다.
이제 남은 거리는 불과 하루 남짓.
이 비가 그칠 때, 그들은 초원을 지나 성벽을 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