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ver touch Eldmia Ega RAW novel - Chapter (506)
데오니 성녀님과 이단 심판관들의 말을 빌려 표현하자면 ‘너무나도 끔찍하여 정신이 오염될 것 같은 악랄함’이 내재된 나의 가설은 그래도 긍정적인 파급 효과를 불러왔다.
사람들이 최악의 상황을 다시 가정하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는 그저 필멸자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불경한 짓을 저지르고 있다고 여기던 교단이었으나, 이내 자신들의 적이 신살을 꿈꿀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는 그날 저녁 급하게 구성한 지휘소에서 장시간 회의를 진행했다.
다행히 말도 안 되는 가설이라는 형태의 부정적인 의견은 나오지 않았다. 경악하고 놀랄지언정 진지하게 고민하고 가능성을 검토하는 그들은 분명 유능한 지도자들이었다.
당장에 해결책을 강구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지하는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었다.
그렇게 새로운 가설의 근거가 되어 준 몬스터들의 습격 이후로는 액땜이라도 한 것인지 별다른 사건사고 없이 무난한 행군을 사흘간 이어간 끝에, 우리는 17일째 저녁 무렵 비레어 백작령에 진입할 수 있었다.
그 긴 시간 동안 부상자나 낙오자없이 여기까지 왔다는 점에 자긍심을 느끼는 것도 잠시, 지휘부는 숲 끄트머리에 숙영지를 편성하고 휴식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지금까지 왔던 속도로 하루만 더 걸어가면 영지에 도착한다. 이는 결국 민간인들을 떼어두고 병력만 움직일 경우 엎어지면 코닿는 거리라는 소리였으니 이쯤에서 방침을 결정해야 했다.
“여러 첩보에 의하면 칼 칸시 경의 말대로 비레어 백작령의 민심은 바닥을 치고 있다고 하더군요. 백작의 사병들은 근무조차 제대로 서지 않고 백성들은 그 사실을 알기에 저녁에 술집에 모여 앉아 귀족을 욕하는 데에 아무런 주저함도 없다고 합니다.”
성녀님은 지휘소에 사람들을 모아 두고 어제 도착한 까마귀들을 통해 얻은 정보에 대해 이야기했다.
처음 날아온 까마귀가 가져다준 정보는 별거 없었는데, 서너 마리가 더 날아오고 나니 꽤 그럴싸한 내용이 갖춰지며 방금 말씀하신 결론이 완성되더라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교차 검증을 위해 정보원들을 따로 두는 치밀함의 결과였던 것 같다.
“습격에 많이 취약하겠군요.”
출발하기 전에 이런 것도 신경 쓴 교단의 신중함에 내심 감탄하며 덤덤하게 소감을 말하자 성녀님을 비롯한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
성녀님은 도의적으로 바르지 못한 비레어 백작가문을 벌한다거나, 혹은 그걸 빌미 삼아 우리에게 정당성을 부여하고자 이야기를 꺼낸 게 아니다. 단순한 전략과 전술의 일환으로 ‘적’의 현황을 브리핑한 것에 불과하다.
“우리의 원래 계획은 지금 당장 부대를 이끌고 비레어 백작령을 습격하는 거였습니다. 원래라면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용사님이 계시기에 가능한 계획이었죠.”
말끝을 흐리는 성녀님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내게로 향했고, 나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공성전은 성벽과 성문이 굳건해야 성립되는 법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난 공성전 치트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승리를 의심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내성에 진입했을 경우 과연 얼마나 휴식을 취할 수 있을지 여러분들의 의견을 물어보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마왕군과 조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를 하나 꼽으라면 일부러 게이트와 먼 곳으로 이동해왔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티스엘과 마주한 전선을 유지하는 건 마왕군이라고 해서 여유가 넘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에스테에서 비롯된 신성 궤도 폭격으로 인해 사기와 병력과 물자가 뭉텅이로 날아가고 전선을 양보해야 했던 터라 녀석들은 굉장히 빡센 상황에 처해있다.
그래서 마족령 내부에서 거슬리기 짝이 없는 움직임을 보이는 마신교의 처리조차 악신의 찌꺼기로 만들어 낸 침식체와 신병들로 구성된 군대에게 맡긴 것이다. 그런데 그게 일말의 과장없이 하룻밤 사이 괴멸했다.
마왕군 입장에서는 원인조차 제대로 파악할 수 없을 정도로 싹 다 죽어 버렸으니 무턱대고 똑같은 병력을 꼴아박는 것보다 정규군을 투입해야 맞을 거 같은 상황인데, 정작 2만에 달하는 사람들을 처리하기 위해 움직여야 하는 병력이라는 건 그리 만만한 게 아니다.
교단이야 뒤가 없으니 일단 움직이고 본 거에 가깝다. 마왕군 사령부는 되도록 신속 정확하게 군을 투입해 사건을 일단락지은 뒤 병력을 다시 전선으로 돌리고 싶을 것이다.
그런데 하필 눈엣가시인 교단의 이동 경로 주변에 게이트가 없다. 병사들이 마력을 운용하여 진군하면 어떻게든 시간이 단축되겠지만, 이미 침식체 부대를 괴멸시킨 탓에 그렇게 힘을 빼고 맞붙어도 이길 수 있을 거란 확신도 함께 사라진 상황이다.
지금 놈들의 시점에서 교단은 무시할 수 없는 변수다. 예상을 아득히 초월한 결과 탓에 전력 측정조차 불가능한 최악의 변수.
그렇다고 해서 마스터 급을 운용할 수도 없다. 그걸로 교단은 쓸어버릴 수 있을지언정 전선에 생기는 구멍을 막을 수는 없을 테니까.
아마 마스터 급이 교단과 조우하여 전투를 치를 때쯤이면 전선이 한참 더 밀리게 될 것이다. 이티스엘만으로는 불가능했을지 모르지만 제국까지 본격적으로 가세한 이상 무조건이다.
이 모든 걸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기에, 교단은 마왕군이 그런 고민을 할 수밖에 없게끔 치밀하게 경로를 짰다.
2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만드는 거대한 흔적은 지운다고 지워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애먼 곳에 힘쓰지 않고 최대한 인족과의 전쟁이라는 상황을 이용해 운신의 폭을 좁히는 방향으로 계획을 구상했다.
인족이었다면 군대를 이동하는 데에 있어 당연히 소요되는 기간이라 여기는 수준조차 게이트에 익숙해진 마왕군에게는 막심한 손해처럼 느껴진다는 걸 꿰뚫어 본 결과다.
물론 마왕군이 닥치고 병력을 움직이거나 마스터 급을 투입했다면 시작부터 대차게 꼬였을 계획이지만 어쩌겠는가. 최악의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이란 대부분 그런 꼴이거늘.
사실 이런 도박수는 교단만 두고 있는 게 아니라 마왕군도 진즉에 뒀었다.
후방 교란을 위해 마력 폭탄도 만들고, 에스뮈에 납치도 계획했다. 심지어 오크 게이트 사건마저 게이트 주변에서 마족들의 시체가 발견되었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마왕군의 후방 교란 작전이었음이 분명하다.
분명 큼직하게 베팅은 했었다. 죄다 좆박았을 뿐이지.
그게 나비 효과로 이어졌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으나 교단은 아직 따고 있다.
하지만 그걸 단 한 번의 실수로 다 날려먹을 수도 있으니 신중을 기할 뿐이다. 성공에도 자만하지 않고 겸손하기가 참 힘들다고 하던데 우리 성녀님은 그걸 참 잘했다.
“완벽하게 비레어 백작령의 소문을 통제하지 못한다면 적들은 이곳에 용사님이 있다는 걸 알아차릴 겁니다. 이티스엘에 외성을 하루 만에 돌파하는 인물이 둘 있는 게 아니라면 말이죠.”
성녀님의 걱정은 단순하다. 비레어 백작령을 공격함으로써 ‘군을 움직이기 어중간한 위치에서 알짱거린다’ 라는 큰 이점을 버리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
순식간에 제압해서 비레어 백작령이 공략당했다는 소식이 넘어가는 것만 막을 수 있다면 어느 정도 유예가 있겠지만 아무리 부패했다고 한들 여긴 백작령이었다. 수도와 연락이 닿는 마법사 정도는 배치되어 있을 것이고, 그들이 다급함을 느끼고 통신을 보냄과 동시에 우리도 타임 어택 상황에 놓이게 된다.
내가 여기 있다는 게 명확해지면 놈들은 반드시 움직일 테니까.
슬프게도 지금의 나에겐 그 정도 파급력이 있었다. 이젠 슬슬 마스터 급을 보내는 한이 있더라도 날 죽이고 시작하는 게 장기적으로 이득이라 판단하는 놈들도 있지 않을까?
“즉, 우리는 이번 전투를 치르면서 적의 귀까지 막아야 합니다. 그러지 못해 정보가 흘러나가면 반쪽짜리 승리가 되겠죠.”
그러니 함께 지혜를 쥐어 짜 방책을 찾읍시다.
임시 지휘소에 모인 사람들은 성녀님의 말뜻을 이해하고 진지하게 지도를 바라보며 고민하기 시작했다.
“…비레어 백작령의 폐쇄성이 마침 도움이 될 것이라 여겨집니다. 저희조차 사람을 써서 면밀히 살피기 전까지는 실태를 전혀 모르고 있었을 정도이니, 분명 외적으로도 무언가 조치를 취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른 영지보다 순찰대를 더 자주 돌린다거나, 마을의 이상을 빠르게 보고할 수 있는 밀고자를 심어두었거나 말이죠.”
이단 심판관 한 명이 지도 위에 마을 위치를 표시해가며 꺼낸 이야기를 받은 건 팀시브 백작이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너무 오랜 시간 통제를 받은 탓에 되려 백작 가문과 내성에 무슨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쉬이 소문이 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차츰 눈치를 보다가 뒤늦게 불처럼 번져나가겠죠. 내성에 있을 통신 마도사와 전서구 같은 연락 수단만 무력화 시킬 수 있다면 못해도 닷새는 휴식을 취할 수 있을 것이라 사료됩니다.”
그가 차분히 내놓은 의견에 나와 성녀님 그리고 고위 이단 심판관을 제외한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나만 이해 못 한 게 아니라는 점에 안도하며 가만히 있었더니 잠시 턱을 괴며 고민한 성녀님이 대신 질문을 던져 주셨다.
“닷새를 예상하신 이유는?”
“각 영지의 정기 보고가 끊길 경우 이를 이상 사태로 분류하기까지 두는 유예가 최대 일주일입니다. 그 후로는 즉시 수도 정찰대가 파견되죠. 그런데 하필 내일이 정기 보고하는 날입니다.”
반 평생 해온 귀찮은 업무에서 해방된 자신과 달리 저들은 아직도 시달리고 있다는 말로 가볍게 분위기를 환기시켜 주는 팀시브 백작은 역시 괜찮은 귀족이었다.
결국 정리하면 아무리 여유를 잡아도 정찰대와 거리를 벌리기 위해 이틀을 빼고 닷새만 쉬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연락이 들어간다면?”
“1차적으로 인근 도시의 게이트를 통해 수도 방위군이 투입되겠죠. 그렇게 될 경우 쉴 수 없습니다. 물자만 노획한 다음 그대로 이동해야 합니다. 우리와 달리 그들은 게이트에 도착하고 하루도 안되어서 이곳에 당도할 테니까요.”
결국은 연락 체계를 먹통으로 만드는 게 최우선이었다. 전서구까지는 밖에서 저격을 하면 되지만 마법은 그런 구조가 아니다보니 모두의 표정이 자연스레 심각해졌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진지해서 말을 꺼내기가 쉽진 않았으나, 일단 손을 들어 발언권을 얻었다. 당연히 나에게 부탁할 줄 알았는데 모두가 영 다른 방향으로 고민하는 거 같아서 먼저 말을 꺼내는 게 나아 보였다.
“그냥 제가 들어가서 일단 수정구랑 붙은 마법사들은 다 죽이고 시작하면 되지 않을까요?”
“그, 용사님께서 외성을 뚫었다는 보고가 들어가자마자 통신 마법을 시전할 수도 있습니다. 거리도 거리인지라 그전에 도착할 수 있을 거라고는 확신을 못 하다 보니…”
“저도 대놓고 정문으로 들어가서 거기까지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암살해야죠.”
“…예?”
서로가 당연한 이야기를 당연하게 말하는데 어째 대화가 자꾸 어긋난다. 무려 성녀님마저도 고개를 갸웃거리는 와중에 뭔가 대차게 꼬였음을 직감한 나는 잠깐 고민한 끝에 그 이유를 찾아낼 수 있었다.
“…혹시, 외성을 돌파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제가 무력으로 성의 일부를 폭발시킨다고 생각하신 겁니까?”
“……아니었습니까?’
의문 가득한 얼굴들이 나를 주시한다.
이들은 내가 어떻게 외성을 뚫었는지 그 방법까지는 알지 못했다.
딱히 비밀이랍시고 숨긴 것도 아니었는데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 정보 공유에 차질이 생겼을 거라 예상하지 못한 나는 최대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며 방법을 설명했고, 의문만 가득했던 이들은 이제 벙찐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