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avenly Inquisition Sword RAW novel - Chapter 1523
1523회. 꽃과 나비
고개를 떨구고 있던 연적하는 자신이 잘못 들은 줄 알고 되물었다.
“뭐라고 했습니까?”
“영원한 사랑을 원하느냐고 물었다.”
“당연하죠. 하지만 그건 저에게 불가능한 이야기 아닌가요?”
자신이 불멸자인 데다, 남궁연마저 현세에 없으니 그건 꿈 같은 이야기였다.
“가능하다면 불멸을 포기할 수 있느냐?”
“죽으라는 말인가요?”
“평범한 인간의 수명대로 살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다.”
“저 같은 존재도 인간의 수명대로 살 수 있습니까?”
의아해 하는 연적하에게 구천현녀가 무심한 얼굴로 말했다.
“신을 가리켜 ‘불멸의 의지’라고 한다. 그래서 물리적으로 신을 죽이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 것도 사실이다.”
“제가 그런 존재입니다. 아시겠지만.”
“그럼에도 많은 신들이 죽었다. 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간에게 잊혀진 신들이 스스로 ‘존재의 의지’를 꺾음으로 소멸을 맞이했다.”
순간 연적하는 망치로 뒤통수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그렇게 신이 소멸될 수도 있다는 것은 처음 알았다.
“저에게 인간의 수명대로 살라는 말씀은……. 그들처럼 존재의 의지를 꺾으라는 건가요?”
고개를 끄덕이는 구천현녀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
그러자 연적하가 연이어 말했다.
“하지만 연 누님은요? 연 누님이 없잖습니까? 설마 다른 사람과 영원한 사랑을 하라는 말씀은 아니시겠죠.”
“남궁연이 선계(仙界)를 버리고 완전한 인간으로 전생(轉生)한다면?”
구천현녀의 눈이 열망으로 달아올랐다.
본래 남궁연이 득도를 택한 것은 홀로 늙어 죽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였다.
만약 연적하와 함께 생을 마칠 수 있다면 신선의 자리쯤 버릴 의향이 있었다.
전생한 육체는 불멸의 삶을 선택했는데, 정작 본신(本身)은 필멸자가 되겠다니 꽤나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다른 신선들이 알았다면 어리석은 욕망이라 만류할 테지만, 현세의 구천현녀는 불로장생 대신 사랑을 선택했다.
구천현녀의 극적인 변화를 이끈 주범은 남궁연이었다.
과거 남궁연은 주어진 죽음을 각오하고 ‘네 번째 하늘’로 가서 연적하와 만났다.
‘네 번째 하늘’은 선계보다도 상계에 속한다.
남궁연 덕분에 상계를 경험한 구천현녀는 큰 깨달음을 얻는다.
그것은 하계, 선계, 상계의 삶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
인생만큼이나 득도(得道)의 끝도 무상했다.
그에 구천현녀는 남궁연의 감정을 애써 묻으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천겁을 감수하면서까지 연적하를 도왔고, 마침내는 수선계(修仙界)를 떠나 완전한 인간으로의 전생을 결심하기에 이른 것이다.
사실 지금의 구천현녀는 남궁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흔히들 눈을 마음의 창이라고 한다.
연적하는 구천현녀의 눈동자에서 격한 감정을 느꼈다.
지금의 구천현녀는 유년 시절이나 구주, 네 번째 하늘로 가기 전에 본 모습과 확연하게 달랐다.
과거 구천현녀는 무덤덤했고, 감정을 드러내야 연민이 전부였다.
그러나 지금은 마치 남궁연 같았다.
‘네 번째 하늘’에서 재회해 뜨거운 사랑을 나누던 그 남궁연 말이다.
그는 기쁘면서도 한편으로 목석 같던 구천현녀의 갑작스러운 변화가 마음에 걸렸다.
‘의심을 하면 없는 귀신도 만들어 낸다[疑心暗鬼]’고 하던가.
한순간 연적하의 머릿속이 전에 없이 복잡해졌다.
그때 한껏 들떠 있던 구천현녀가 조금은 실망한 얼굴로 물었다.
“왜 대답이 없느냐?”
“조금 미심쩍은 부분이 있어서요.”
“말해 보거라.”
“지금 문득 든 생각인데요. 구천현녀님의 전생이 연 누님이라면……. 창고에서 내가 만난 구천현녀님은 뭐죠?”
연적하는 여섯 살 때 남궁연과 구천현녀를 만났다.
구천현녀가 남궁연으로 전생했다면 둘 중 하나만 있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구천현녀가 진신(眞身)이라면 남궁연은 분신과 같다. ‘네 번째 하늘’에서 샤스트라 파라크티가 육화(肉化)해 루나 마일러스로 살았던 것을 생각해 보거라. 남궁연이 루나 마일러스의 이름으로 네 곁에 있을 때도, 샤스트라 파라크티는 존재하고 있었다.”
“아! 그랬군요. 그럼 루나 마일러스가 샤스트라 파라크티에게 돌아간 것처럼……. 혹시 연 누님도 구천현녀님에게…….”
“그러하다. 나와 남궁연은 하나가 되었다.”
“이제야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완전한 인간으로 전생하겠다는 건 어떤 의미입니까?”
“진신이 수선계를 떠나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겠다는 뜻이다.”
“왜죠? 지금까지 구천현녀님의 전생이 연 누님 하나만은 아니었을 텐데요. 왜 갑자기 불로장생을 포기하시겠다는 겁니까?”
“나는 남궁연의 몸으로 전생한 동안 까마득히 높은 상계의 삶을 경험하였다. 너 역시도 그러하겠지. 너는 이상하지 않더냐? 하계와 선계, 상계의 삶은 별반 다르지 않다. 하루살이의 삶이든, 인간의 삶이든, 신선의 삶이든……. 희로애락애오욕은 같았다. 다른 거라고는 턱없이 늘어난 수명뿐이었지.”
“…….”
그 말에 크게 공감한 연적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신도 ‘구주’나 ‘네 번째 하늘’에서 그녀와 같은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불멸자에게 영원한 건…… 장구한 시간밖에 없었다. 그 외는 모두 바람에 날리는 지푸라기처럼 가볍기만 하지. 운명도, 삶도, 사랑도……. 남궁연이 죽음을 각오하고 너를 찾아갔듯, 나 역시도 그러려는 것이다.”
연적하는 그제야 구천현녀를 이해할 수 있었다.
활화산 같던 남궁연이, 목석 같은 구천현녀의 심장을 녹여 버린 것이다.
돌이켜 보면 그것은 남궁연이 보인 변화와도 같았다.
남궁연은 항상 무심한 듯 살았지만, ‘네 번째 하늘’에서 다시 만난 그녀는 뜨거웠다.
생각에 잠긴 연적하를 응시하던 구천현녀가 또다시 입을 열었다.
“너는 나와 함께 필멸자의 삶을 살겠느냐?”
“예.”
연적하가 단호하게 답했다.
금석(金石)도 아니고, 인간에게 불로장생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모르겠다.
오욕칠정도 수백수천 번 거듭되다 보면 닳아 무디어지기 마련이다.
카마 데비아스와 우샤스 운드라에게서 천자마와 금사가 나온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자신이라고 먼 훗날 그들처럼 되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대답을 기다리던 구천현녀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순간 연적하가 구천현녀를 향해 한 걸음 나아가며 말했다.
“누님!”
“…….”
구천현녀는 갑작스러운 호칭 변화에 놀랐지만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녀의 그런 태도에 용기를 얻은 연적하는 구천현녀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구천현녀의 얼굴을 매만지며 연적하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정말 누님이셨군요.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습니다. 나도 득도라는 걸 해서 선계로 가고 싶었지만……. 아는 게 있어야 하지요.”
“힘들게 오지 않아도 된다. 내가 가면 되니까.”
구천현녀는 민망함을 무릅쓰고 화답했다.
그러자 감정이 북받쳐 오른 연적하가 구천현녀를 와락 끌어 안았다.
그에게 안긴 채로 가만히 어깨를 토닥이던 구천현녀가 속삭이듯 말했다.
“시간이 다 되었다. 환생한 나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게다. 그저 한 떨기 꽃으로 피어날 테니 나비처럼 나를 찾아오거라.”
그 말에 깜짝 놀란 연적하가 황급히 품에서 구천현녀를 떼어내고 물었다.
“찾으라고요? 어떻게요?”
“언법(言法)으로 약속해라. 반드시 나를 찾아 백년해로(百年偕老)하겠다고. 그럼 된다.”
연적하는 그다음은 묻지 않았다.
십전무후라 불리던 남궁연의 말이니 하라는 대로 하면 될 일이었다.
“공야자와 청불노의 제자 연적하의 이름으로 약속합니다. 완전한 인간으로 환생한 연 누님을 찾아내 백년해로하겠습니다.”
연적하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번에는 구천현녀가 그에게 입을 맞췄다.
깜짝 놀란 연적하가 눈을 부릅떴다.
그러나 달콤한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구천현녀는 마치 빨려들듯 뒤로 멀어져 갔다.
“누님! 누님!”
연적하가 달려갔지만 기이하게도 거리는 조금도 좁혀지지 않았다.
구천현녀가 점이 되어 사라지기 직전, 연적하는 필사적으로 소리쳤다.
“찾아갈게요! 누님이 어디에 있든! 내가 찾아낼게요!”
마침내 구천현녀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자욱하던 구름마저 흩어지자 작은 방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반짝이던 구천현녀경은 어느 틈에 더러운 녹 때로 뒤덮여 있었다.
망연자실한 얼굴로 서 있는 연적하의 귓가로 연정운, 연서연, 김미란의 음성이 차례로 들려왔다.
“정말이에요. 이상한 소리가 났다니까요.”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데?”
“그러지 말고 빨리 문이나 열어 봐요. 그거 도둑맞으면 안되잖아요.”
그제야 연적하는 아차 싶었다.
멀어져 가는 구천현녀에게 정신이 팔려 소리가 조금 새어 나갔던 모양이다.
연정운 일가가 방문을 열고 들어오면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다.
연적하는 재빨리 창문을 열었다.
그와 동시에 연정운이 방문을 왈칵 열어젖혔다.
이윽고 연정운이 짜증을 냈다.
“없잖아! 아무 소리도 안 들린다니까들.”
그러자 김미란이 놀란 얼굴로 창문을 가리켰다.
“창문! 창문이 열려 있잖아요. 아까는 분명히 닫혀 있었다고요. 어머! 그러고 보니 보자기도 풀려 있네. 누가 들어왔었네!”
그제야 연정운이 창문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하지만 마당에는 인기척이 없었고, 대문도 여전히 닫혀 있었다.
보자기로 구천현녀경을 다시 포장한 김미란이 연정운에게 다가가 속삭였다.
“당신 조카 방에 좀 가 봐요.”
“왜?”
“방에 있는지만 확인해 보라고요.”
그제야 연정운은 황급히 방을 빠져나갔다.
부모의 대화를 의아한 얼굴로 지켜보던 연서연이 김미란에게 물었다.
“적하를 의심하는 거예요?”
“외부인이라고는 그밖에 없으니까, 혹시나 해서 그러는 거야.”
“에이, 그건 아니다. 이 방에 훔쳐 갈 게 뭐가 있다고.”
김미란은 ‘저 청동 거울이 자그마치 6억짜리다’라는 말을 하려다 꾹 참았다.
그런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았기 때문이다.
잠시 후 작은 방으로 돌아온 연정운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자고 있더라고.”
“그럼 아니네요. 다행이다.”
김미란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유품 방과 연적하의 방 모두 이 층에 있는데, 창문으로 드나들려면 마당에 사다리를 놔야만 했다.
그런데 마당에 사다리가 없으니 연적하와는 무관한 일이라 볼 수 있었다.
부모의 대화를 지켜보던 연서연이 툴툴거렸다.
“거봐요. 내가 아니라고 했잖아요. 혹시 창문 열어 두고 깜빡한 거 아니에요?”
“그래, 창문은 그랬다 치자. 그럼 보자기가 풀어진 건 어떻게 설명할 건데?”
“도둑고양이?”
“내 딸이지만 머릿속이 참 꽃밭이야. 도둑고양이가 보자기를 풀고 청동 거울을 들여다봤다고? 차라리 거울 속에서 선녀가 나와서 돌아다녔다고 해라.”
“어? 진짜! 그랬을 수도 있겠네요. 거울에서 나온 선녀가 창문을 열고 하늘로 훨훨 날아간 게 아닐까요?”
“쯧쯧! 넌 몇 살인데 아직도 어릴 때 얘기를 하니. 헛소리 그만하고 가서 잠이나 자. 그리고 여보.”
뭔가 골똘히 생각하던 연정운이 고개를 돌려 김미란을 보았다.
“왜?”
“당신은 오늘 이 방에서 자요. 아무래도 찜찜해서 안 되겠어요.”
“알았어.”
큰 거래를 앞두고 불안했던 연정운은 순순히 처의 말에 따랐다.
다음 날 아침.
연정운 가족과 연적하가 식탁에 둘러앉았다.
중학생인 연시우는 일찌감치 등교를 하고, 평소와 같이 네 사람만의 식사다.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연정운은 식사 시간 내내 연적하의 눈치를 봤다.
“삼촌,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순간 연정운은 뜨끔했지만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없는데? 왜?”
“아까부터 자꾸 쳐다보는 것 같아서요.”
“아닌데?”
죄지은 사람처럼 전전긍긍하는 남편을 보다 못해 김미란이 나섰다.
“실은 어젯밤에 도둑이 들었었어요.”
“도둑요?”
연적하가 짐짓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그러자 김미란이 날카로운 눈으로 연적하를 살피며 말을 이어갔다.
“네, 시아버님 유품을 모아 둔 방에 누가 몰래 들어갔었더라고요.”
“설마…… 저를 의심하시는 건 아니죠?”
연적하의 말에 한걸음 뒤로 물러나 있던 연정운이 황급히 끼어들었다.
“아니야, 무슨. 우리가 왜 너를 의심해?”
연서연은 분위기가 이상해지자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제 방으로 쏙 들어갔다.
한순간 분위기가 싸해졌지만 김미란은 끝까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