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therworldly Illusion Hunter RAW novel - Chapter 55
53화. 지친 마음
협회에서 나온 뒤.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안윤승 헌터를 부르는 것이었다.
“형님! 무슨 일이십니까!”
“어, 별건 아니고. 밥이나 같이 먹자.”
그다음에 도착한 곳은 한 식당.
아직 저녁때라고 부르기에는 애매한 시간이라 그런지 마침 사람도 적었고.
“너 돼지고기 좋아하지? 많이 먹으렴…….”
“헉! 감사합니다.”
뇌물도 준비됐으니 이제 슬슬 말을 꺼내야겠다.
슬쩍.
나는 잘 구워진 고기 요리를 윤승에게 밀어주며 넌지시 전했다.
“그런데 윤승아.”
“넵!”
“내가 요즘 고민이 하나 있는데.”
“네네.”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어쩌다 보니 정하성한테 살해당하게 생겼거든?”
땡그랑!
그 말을 듣고 안윤승은 들고 있던 젓가락을 손에서 놓쳤다.
나는 조용히 수저통에서 새 젓가락을 꺼내주고 다시 말을 이었다.
“일단 들어봐. 아직 죽은 건 아니니까.”
말투는 담담했지만, 솔직히 미치고 팔짝 뛸 일이었다.
EX급 게이트에서의 만남이 이렇게 발전될 줄 누가 알았나?
하여간 사람을 미지의 게이트에 묻어버리려 들다니. 정하성도 참 너무하다.
내가 뭘 했다고!
‘기껏해야 위증 좀 하고, 몬스터 어그로 좀 떠넘기려 했고, 정하성이 피땀 흘려 클리어한 게이트 보상을 유용하게 쓰고 있을 뿐인데.’
어. 생각보다 이유는 충분한가?
“여하튼.”
일단 본론으로 돌아와서.
“조언이 필요해. 너 상위 헌터잖아. 정하성에 대해 뭔가 아는 거 없어?”
“갑자기 그렇게 말씀하셔도.”
“모쪼록 둥글게 해결하고 싶어서 그래.”
안윤승은 한참을 얼빠져 있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애당초 상상이 잘 안 가는데요. 다른 헌터도 아니고…. 그 정하성이요?”
“무슨 뜻이야?”
“전 말도 아직 못 붙여봤어요. 원체 무미건조한 사람이라서요. 어찌 보면 형님이랑 결이 비슷한데요.”
으음. 그가 잠시 목을 울렸다.
“누구랑 사적으로 다툰다기보단, 가끔 게이트 공략 관련해서 열을 올릴 뿐이라.”
윤승은 혼자 중얼거리다가 이내 조심스레 말했다.
“서로 오해가 있는 거 아닌가요?”
“흠.”
“정하성이 남을 죽일 만큼 화를 내는 것도 말이 안 되고, 형님 같은 정중한 분이 그런 큰 원한을 샀다는 것도 말이 안 되는데…….”
마침내 객관적인 시선의 개입이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정상적인 사고가 돌아갔다.
“그런가?”
이제 와서 차분히 생각해보니, 내가 정하성의 제안을 좀 곡해했나 싶기도 하고?
‘쓸데없이 인간불신으로 예민해져 있었나.’
나는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그간의 걱정이 그릇된 착각이었음을 천천히 인정했다.
“네 말을 듣고 보니 그러네. 하긴 한국의 랭킹 1위가 나 같은 F급에게 감정을 쏟을 리 없지.”
그러자 안윤승이 가볍게 웃는다.
하하하.
“뭐, 형님. 어쨌든 앞으로도 그런 걱정은 하실 필요 없을 거예요.”
나는 능숙히 젓가락을 다루면서도, 시선을 흘긋 들어 올려 윤승을 주시했다.
“정하성 헌터도 섣불리 싸움을 걸긴 부담스러울 테니까요.”
“뭐?”
“예전에 백의 미로 때 일 있잖아요. 그런 사건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쪽도 형님을 경계하지 않겠어요?”
나는 조용히 그의 말에 집중했다.
“원래 헌터끼리 싸운다는 게 그래요. 사람은 몬스터랑 달라서 능력을 숨긴 경우가 많으니까.”
“오호.”
윤승은 어깨를 으쓱하며,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 각성자가 뭔가를 감추고 있다……. 상대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상 쉽게 마찰이 일어나진 않죠.”
충분히 있을 법한 이야기다.
그러고 보면 일전의 공원 사건도, 그 암살자가 표적을 멋대로 강자로 착각해 싸움이 벌어지지 않았지.
“그렇구나.”
삐링.
그리고 이 순간, 김기려의 휴대폰에서 알림음이 울렸다.
“뭐예요? 문자?”
“어, 응. 잠깐 답신 좀.”
나는 말없이 이쪽을 물끄러미 보는 시선을 알아채고 말했다.
“왜? 궁금해?”
“아, 아니. 그게…….”
“별거 아닌데.”
이어진 건 흔쾌히 공개된 문자 메시지함.
(7일 전)
[기려 씨, 식사 안 하셨으면 오늘 점심이나 같이 할래요? 제가 좋은 한정식집을 아는데요!] [죄송합니다. 지금 경찰 조사로 바빠서….](4일 전)
[안녕하세요! 어느덧 날씨가 선선해지고 있네요. ^^ 문득 기려 씨 생각이 나서 연락해봤어요. 혹시 식사는 하셨나요?] [방금 먹었어요](1분 전)
[김기려 헌터님! 오늘은 뭐 해요~~? 설마 이 시간에 벌써 저녁 먹었다고 할 건 아니죠?ㅎㅎㅎ] [네 지금 지인이랑 돼지갈비 먹는 중]“그냥 안부 연락이야. 요즘 종종 문자 보내시더라.”
나는 휴대폰 화면을 보여준 뒤 별생각 없이 느긋하게 식사에 집중했는데, 왜인지 안윤승이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문자를 보낸 이가…. 서에스더라고 저장되어 있네요?”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
여름이 끝나갈 무렵.
요즈음, 한국의 헌터 사회는 작은 감기몸살을 앓고 있다.
“게이트가 또 늘었어요.”
지난번 EX급 던전의 출현을 전후로.
전국적으로 게이트 발생 빈도와 난이도가 급상승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A급이야? 대처 가능한 길드는?”
“네오 시스터즈도 한국마탑도 이미 주력팀을 모두 공략에 내보낸 상태입니다.”
“아오, 그럼 역시 그 헌터밖에 없나.”
하지만 이곳이 어떤 나라던가.
한국은 좁은 땅덩어리에 비해 많은 S급을 보유한 국가. 따라서 어느 정도 이번 사태에 대처할 수 있었다.
“1위한테 연락해!”
즉, 어떤 헌터가 활약하고 있다는 소리인데.
-띠링♪
이어서, 온몸에 피를 뒤집어쓴 남자가 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A급 게이트?”
정하성은 지친 얼굴로 중얼거렸다.
방금 막 게이트를 끝내고 나왔더니 또 출동하라니.
“기사님, 차에 시동 걸어요.”
“아, 대표님. 피가…….”
하지만 그는 묵묵히 다음 행선지로 향했다.
괴물을 사냥하는 것.
그것이 헌터가, 자신이 맡은 일이었으니까.
“어차피 피는 또 튈 건데 그냥 가죠.”
그렇게 정하성의 과로 상태는 누적되었고.
다음 날.
정하성은 경매장에서 공수한 체력 회복 포션을 식도에 들이부었다.
이것이 그가 잠을 못 잔지 딱 40시간이 지난 무렵이었다.
그렇다면 S급 헌터가 이렇게 갈려 나가는 사이.
외계의 대마법사는 무얼 하고 있을까.
“휴우!”
이야기는 다시 돌아와서.
이곳은 김기려가 사는 마포구의 한 원룸.
그곳에 서 있는 금발의 남성은 뿌듯한 얼굴로 외쳤다.
“드디어 끝났다.”
한창 고생 중인 모 헌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사실 김기려도 요 몇 시간 동안 바쁜 일과를 보낸 참이었다.
이 육신이 가진 중대한 결점을 하루라도 빨리 고쳐야 했거든.
“수정이 잘됐는지 한번 확인해볼까?”
오늘의 성과는 이와 같았다.
●역치 이상의 통각 발생 시 신호 차단
꽤 장황한 문장이다. 따라서 더욱 간단히 설명하자면…….
“완벽하군!”
김기려는 오늘부로 ‘고통 내성’을 습득했다.
통각을 모조리 없애버리면 문제가 생기니, 일정 수위 이상의 아픔이 발생할 때만 그것을 무효로 돌리는 기작을 추가한 것이다.
‘제법 과거의 육체와 가까워졌어.’
이제 고통은 두렵지 않다!
사실 이 개조는 예전부터 필요성은 인지했지만 귀찮아서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그런데 웬걸.
이거 정하성 때문에 불에 한 번 타보니 정신이 번쩍 드는 거다.
더는 미뤘다간 조만간 쇼크사로 죽겠다 싶었지.
“작열통이 어떤 느낌인지 알게 되다니. 이런 데이터는 굳이 수집하고 싶지 않았다고.”
기려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오랜 시간 집중해서인지 제법 피로했다.
‘휴, 오늘은 이만 쉴까. 벌어둔 돈도 있겠다. 배달 요리라는 것에 도전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
그런데 그때.
그의 예리한 감각에 무언가 스쳐 지나갔다.
마치 어둡고 거대한 파도가, 자신이 선 방향으로 밀려 들어오는 느낌.
“어.”
마력의 흐름을 눈치챘을 땐 이미 한발 늦은 상황이었다.
이내, 귀를 찢는 폭음이 원룸을 울렸다.
콰광—!!
쿠르르르…….
삐뽀, 삐뽀, 삐뽀…….
김기려는 바짝 얼어붙어 정면을 바라봤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소리가 너무 가까운 곳에서 들렸는데?’
다행히 방은 멀쩡했지만 어쩐지 형용할 수 없는 불안감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김기려는 슬리퍼를 신고 다급히 복도로 달려나갔다.
그러자, 가장 먼저 보이는 풍경은.
“허.”
건물이.
건물이 날아갔다.
“허허.”
김기려는 폭격을 맞은 듯 깎여나간 건물 오른편을 보고 실소했다.
철골과 박살 난 시멘트가 보인다. 그야 자신이 사는 304호를 제외하고 옆 라인이 완전히 무너져내렸으니까.
“이런 X발…….”
소리를 듣고 나온 주민은 하나가 아니었다.
이어서 복도에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렸다.
불안정해진 건물이 무너지기 전에 당장 여기에서 나가라. 도망쳐라.
모두가 그리 외치고 있었다.
“별 개같은 행성이 다 있네.”
8월 하순경 발생.
수많은 피해자를 낼 던전 브레이크 테러의 시작이었다.
***
피난 준비는 어렵지 않았다.
어차피 귀한 물건이라고는 이게 다니까.
‘마도구만 들고 가자.’
나는 수면 향로를 소중히 끌어안고 길을 나섰다.
그 외에도 회복약, 보호 팔찌, 반사경 등을 챙겼지만 하나같이 부피는 크지 않았다.
“음.”
그런데 문제는 이제부터 어디로 대피하느냐인데.
“뭐야, 왜 전화가 먹통이지?”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안윤승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었지만, 휴대폰이 말썽을 부렸다.
웅성웅성.
“전화가 안 돼.”
“다들 통화 중이라 그런가?”
“어떡해…….”
저 행인들의 말을 들어보니 이건 나만 겪는 불편은 아닌 모양이고.
‘일단 사람들이 도망치는 곳으로 따라가 볼까?’
멍하니 있을 시간은 없었다.
대체 무슨 사고가 터진 건지 이 순간에도 거리 곳곳에서 몬스터가 활보하고 있었으니까.
“꺄아아아아악!”
“도망쳐요!”
“누구 각성자 없어?”
괴성을 지르며 쏘다니는 익룡 형태의 괴물들. 또는 사람들.
흩날리는 잔해. 피. 연기.
몬스터가 등장하자 평화롭던 현대의 풍경은 순식간에 전쟁터와 다름없는 몰골이 됐다.
다들 누구 하나 다른 이를 걱정해줄 겨를 없이 도망치기 바쁠 뿐.
나는 그런 아비규환 속에서 정신없이 내달렸다.
덕분에 가까스로 대피소를 찾을 수 있었다.
지구인들은 위급 상황 때 전철역을 방공호로 쓰는 모양이다.
‘다들 지하철로 모이네?’
하지만…….
‘엇!’
도착한 전철역은 이미 대피 중인 시민으로 만원이었다.
게다가 더 이상 사람을 수용할 수 없다며 입구의 헌터들이 가로막기까지.
“썩을!”
김기려의 망할 뇌가 지금이라도 지구의 대피 요령을 떠올려주면 참 고마울 텐데 말이다.
아쉽게도 전혀 짚이는 바가 없다.
‘여기에 계속 있다간 사람에 치여 죽겠어.’
나는 어쩔 수 없이 다른 방안을 모색했다.
자리에 멈춰 서서 감각에 날을 세우니, 각양각색의 마나가 느껴진다.
각성자들의 체내 마나.
지면에서 솟아오르는 외부 마력.
그리고, 게이트 생물들의 움직임.
‘결국 혼자 도망쳐다니는 수밖에 없나.’
나는 숨을 고르고 이동을 시작했다.
원래는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몬스터가 없는 곳을 골라 다닐 작정이었다.
“음?”
하지만 어느 정도 여유를 되찾고 나니 더욱 좋은 방법이 떠올랐다.
“저쪽에 저거……. 설마 그 사람인가?”
이내 도착한 한 골목.
나는 고요한 거리에서 북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육안으로는 상황이 잘 보이지 않지만, 마력을 감지해보니 이제 확실해졌다.
저 건물 너머에 정하성이 있다.
“마수가 활보하는 상황에, 눈앞에 나타난 S급 헌터라.”
이런 혼잡한 때. 한창 바쁠 양반에게 치근덕거릴 생각을 하니 순간은 죄책감도 들뻔했지만, 본디 죽기 일보 직전인 외계인에겐 양심이 불필요한 법.
뭐, 어차피 김기려의 몸에 들러붙어 있는 것도 일종의 기생이니까…….
“기생충 짓은 내가 또 전문이지.”
나는 눈을 빛내며 정하성의 기운을 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