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ison-Eating Healer RAW novel - Chapter (135)
135화
비수의 버프를 받은 첸의 움직임.
그건 가히 맹호 지세라 할 수 있었다.
하나 포이즈너라면 모를까.
첸이 아무리 강한 헌터라 한들 크룬이 단독으로 어쩔 수 있는 몬스터였다면 ‘9성’의 칭호를 부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츄륵.
잘려 나간 촉수의 단면에서 순식간에 새 살이 돋아난다.
그와 동시에 바닥에서 도사리고 있던 나머지 촉수들이 일제히 첸을 향해 날아들었다.
공중으로 도약해 회심의 일격을 가하려던 첸이 되려 반격을 당하는 형국이 되었다.
“!!”
첸이 기계 체조를 하듯 공중에서 몸을 빙그르르 돌려 촉수 다발을 피한다.
땅에 떨어진 뒤에도 촉수들은 유도탄처럼 그의 몸을 쫓았고, 첸은 하는 수 없이 뒤쪽으로 몸을 피했다.
쾅!!
저릿.
“?!”
첸의 몸이 한차례 크게 휘청인다.
분명 촉수가 몸에 닿은 적이 없거늘, 그는 예상치 못한 충격에 피를 한 움큼 토해 냈다.
의문의 공격은 우리가 서 있는 이쪽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다행히, 이 공격을 미리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파직.
“철완 아저씨……!”
강정현이 육철완을 보며 목소리를 높인다.
어느새 그는 방패 디바이스를 들고 우리의 앞에 서 있었다.
“크룬이 작정하고 공격을 하기 시작하면, 공격 범위 밖으로 충격파가 퍼집니다.”
아하.
그래서 놈의 고유 스킬이 ‘스플래시’였던 거구나.
“대단한데요? 저 첸도 쩔쩔매는 스플래시를 이렇게 단박에 막아 내시다니.”
내 칭찬에 육철완이 멋쩍은 미소를 짓는다.
“촉수가 내리친 곳과 거리가 멀수록 위력은 반감되기 마련입니다. 저 첸이라는 친구가 받은 충격파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지요.”
과연 그럴까?
육철완은 겸손하게 말했지만, 첸과 달리 뒤에 있는 팀원들은 미약한 진동조차 느끼지 못했다.
충격파를 사전에 감지해 기민하게 움직이고, 재빨리 방패 디바이스를 꺼내 팀원들을 보호한다.
‘S’티어급의 탱킹 능력이 아니고서야 지금과 같은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
“특훈의 효과가 나타나고 있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겸손한 육철완이지만 이 말까지 사양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짧게 고개를 끄덕인 뒤 뒤이어진 충격파를 말끔하게 막아 내었다.
랭킹전 이후로 가장 고생한 이레귤러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누구나 주저 없이 육철완을 지목할 것이다.
그는 진 박사에게서 받은 서큘레이터를 이용해 비수의 버프를 몸 안으로 욱여넣었고, 당연히 그 반작용에 시달려야 했다.
보통 사람, 아니 보통의 헌터라면 치를 떨며 진작에 그만뒀을지도 모를 수련법.
하나 육철완은 매일같이 식은땀을 흘려 가면서도 버프를 몸 안에 받아 넣었고, 이제는 정말 웬만한 ‘S’랭크 나이트에 밀리지 않는 양을 보유하게 되었다.
“다만…… 저 친구가 걱정이군요. 충격파는 딱히 회피할 수 있는 수단이 없을 텐데.”
오호.
우리를 지켜 주는 것도 모자라 눈앞의 첸을 걱정해 주기까지?
이래저래 듬직한 모습을 보니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뒤지게 냅두려구요. 어지간히 말을 안 들어야지.”
그러자 마리아와 강정현이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어허 이 사람들.
무슨 농담을 못 하겠네.
꽈르르릉.
첸이 위기를 감지한 듯 자신의 고유 스킬, 벼락검을 꺼내 들었다.
처음부터 벼락검을 꺼내 들지 않은 건 아마도 가지고 있는 에테르의 양 때문일 거다.
헌터마다 가지고 있는 양이 유한하다 보니, 결정적인 순간이 아니면 쓰기 싫었을 테지.
하지만 크룬은 첸이 힘을 아껴서 상대할 수 있는 몬스터가 아니었다.
누가 보더라도, 지금의 첸은 수세에 몰려 있었다.
스윽.
나는 방패를 들고 있는 육철완을 지나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헌터님?”
“딱 한 번만 도와주기로 하죠. 저 천둥벌거숭이 놈.”
쾅!!
촉수가 내리친 충격파가 또다시 지면 전체를 뒤덮는다.
나는 오른팔을 내민 뒤 프라셀에 명령을 내렸다.
‘리버스.’
우웅.
이쪽으로 향하던 충격파들이 마치 진공청소기처럼 프라셀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거리가 멀다고는 하나 육철완이 방패 디바이스를 통해서 막아야 했던 위력.
하나 프라셀은 용케도 그 충격을 고스란히 자신의 몸에 담아 내었다.
“어후, 사나운데.”
그러나 그 충격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프라셀의 안에서 휘몰아치는 기운 때문에 팔목이 찢겨져 나가는 것 같다.
‘오래 머금고 있을 양이 아니군.’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프라셀에게 명령을 내렸다.
‘뱉어.’
피슝.
그러자 응축된 충격파가 총알처럼 프라셀로부터 튕겨져 나간다.
-!
크룬의 커다란 눈동자가 이쪽을 바라본다.
신전만큼 커다란 눈알이 이쪽을 희번덕거리는 모습은 정말이지 기괴하기 그지없는 광경이었다.
“꿈에 나타날까 무섭네…….”
이번만큼은 비수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싶다.
콰직.
본인이 사용했던 충격파에 당할 줄은 몰랐던 듯, 크룬이 뒤늦게 촉수를 치켜들었지만, 한발 늦고 말았다.
무형의 충격파가 크룬의 눈동자에 확실한 타격을 입혔다.
대단할 것 없는 상처이기는 하나, 커다란 눈동자 표면에 미세한 스크래치가 발생했다.
“헌터님, 저기에……!”
“그래.”
강정현이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다.
등신이 아니라면 첸도 느끼고 있겠지.
무한히 재생되는 크룬의 촉수를 없애기 위해서는 눈동자를 박살 내야 한다.
촉수보다 더 단단한 눈동자를 부수려면, 지금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검기를 두르고 있는 칼날을 저 균열에 박아 넣어야 하는 것이다.
휘리릭.
이쪽의 도움 덕분에 크룬의 공격이 잠시 주춤했고, 첸은 간신히 충격을 갈무리할 수 있었다.
첸의 반대편 입술에서 다시 한줄기 선혈이 흘러내린다.
그러나 이번에는 내상 때문이 아니었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는 걸 깨닫고,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문 것이다.
파지지직.
벼락검의 전조 단계인 전류가 푸른색 검기 위로 덧씌워진다.
포니테일 머리를 휘날리며 크룬을 향해 달려간 첸이, 하늘 높이 자신의 칼을 치켜들었다.
꽈르르릉.
언제 들어도 참 현실감 없는 소리란 말이지.
쏟아지는 촉수의 빗속에서 첸이 몸을 회전시키며 몸을 날린다.
틈이 과연 보일까 싶었으나, 첸은 용케도 빈 공간을 찾아 촉수의 그물망을 뚫어냈다.
그리고는 기어코 백색의 벼락검을 크룬의 균열 속으로 박아 넣었다……!
콰악!
“……!!”
그와 동시에 첸의 기합 소리가 무너진 신전에 울려 퍼졌다.
“흐합!!”
파지지지직.
소리는 위력적이었지만 이전처럼 백색의 전격은 보이지 않았다.
기운이 다한 것이 아니다.
눈부시게 빛나던 번개들은, 모조리 크룬의 눈동자 안을 헤집고 있는 중이었다.
-……!
입이 없는 크룬은 특별한 소리를 내지 않는다.
하나 그 커다란 눈동자가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을 보니, 어지간히 고통스러운 듯 보였다.
파직…….
남아 있는 단 하나의 전류까지 몽땅 털어 넣은 첸.
이미 크룬의 눈동자는 본연의 색이 아닌 백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리고 곧, 사납게 생긴 홍채의 형태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사방으로 지랄 발광을 떨던 촉수들도 힘을 잃고 추욱 늘어져 버린 상태.
약간의 도움을 받았다고는 하나, 첸은 다시 한번 보스 몹급 마수를 단독으로 처치해 버렸다.
“저게 되네.”
비수가 어이가 없는지 이를 살짝 드러내며 웃었다.
“너만큼은 아니지만, 쟤가 가진 능력도 정말 대책 없이 강한데?”
“그러니까 사기를 쳐서라도 데려왔지.”
“착한 사기 인정합니다.”
나와 비수는 교활한 미소를 나눈 뒤, 첸 쪽으로 다가갔다.
“후읍…… 후…….”
어찌나 사력을 다했는지 첸의 호흡은 아직도 불안한 상태였다.
눈동자에 박아 넣은 칼을 채 빼지도 못한 채, 녀석의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부리부리한 눈매 사이의 안광은 여전히 강하게 빛나고 있었다.
“방금 그거…… 버프인가?”
“맞아. 여기 있는 비수가 네게 서비스를 좀 해 줬지.”
“…….”
무언가 할 말이 있는듯한 얼굴로 마리아의 치유를 묵묵히 받던 첸이,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진짜…… 끝내주네.”
“!”
첸의 말에 나를 포함한 동료들이 피식 웃었다.
솔직한 성격이 이럴 때는 편하군.
처음에 난리를 칠 때는 언제고, 이제는 마리아의 치유도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말과 행동 모두 ‘이레귤러’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그건 어떻게 한 거야?”
“응? 뭘.”
“크룬의 눈동자에 균열을 냈잖아. 표면이 엄청나게 단단하던데.”
“아……. 그거.”
나는 프라셀의 ‘리버스’ 기능을 설명해 주었고,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첸의 눈이 점차 크게 떠졌다.
“그런 게…… 가능해?”
진 박사가 만든 디바이스들은 시중에 나온 것들보다 몇 단계는 진일보한 제품들이다.
우리가 얼마 전에 열린 헌터 디바이스 박람회에서 다른 장비들을 소 닭 보듯 했던 것도 다 그 때문.
무기라고는 낡은 칼 한 자루가 전부인 첸에게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처럼 들릴 것이다.
“나중에 한번 같이 가든지. 어쩌면 네 벼락검을 극대화해 줄 수 있는 디바이스를 만들어 주실지도 몰라.”
“……나는…….”
첸이 무어라 말하려다가 도로 입을 다물었다.
짜식.
‘관심이 없다’는 말이 도저히 나오지 않나 보지?
그건 필경 거짓말일 테니까.
쿠궁.
첸의 치료가 다 끝나갈 때즈음, 지면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아니, 정확히는 흔들린다기보다 무언가에 의해 ‘작동’되는 느낌이다.
“우왓……!!”
강정현의 놀란 목소리가 신전 주변에 퍼지고, 그 아래로 사각형의 검은 공간이 생겼다.
“이건……!”
계단.
앞서 들었던 설명대로, 크룬을 제거하자 아래쪽으로 향하는 계단이 나타났다.
엄밀히 말하자면 지하 2층이 되겠지만 ‘지옥의 계단’에 지하나 B 같은 명칭은 없다.
이곳에서 말하는 층은 일반적인 층수의 개념이 아니라 ‘난이도’를 상징한다.
그 말은 곧, 아래로 내려가면 지금보다 더 무식한 놈들이 나타난다는 이야기다.
“얼마나 지났지?”
“30분.”
“늦었네. 독불장군 치유하느라.”
첸이 나를 향해 눈을 부릅떴지만,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보이는 걸 다 베라는 말은 취소야. 2층에서는 나서지 마.”
“감당할 수 있겠어? 2층은 지금보다 더 힘들 텐데.”
“감당?”
절로 새어 나오는 웃음을 굳이 참고 싶지가 않다.
첸이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는 걸 굳이 막거나 돕지 않은 이유.
그건 ‘이레귤러’의 실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다.
녀석이 우리를 처음에 불신했던 것처럼, 우리도 첸의 능력을 테스트해 보고 싶었던 것뿐.
첸은 1층에서 자신의 진가를 입증했고, 녀석 또한 우리가 가진 버프와 치유의 탁월함을 확인했다.
“서로 간에 검증이 끝났으니, 이제는 합리적으로 움직여야지.”
“합리적? 내가 싸우지 않는 게 합리적이라는 건가?”
“응. 너 지금 남아 있는 에테르도 없잖아.”
“……!”
솔직한 첸은 이번에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혼자서 보스급 몬스터를 둘이나 상대했는데, 기력이 남아 있으면 그게 신기한 일이다.
‘텅텅’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첸의 몸속은 비어 있는 상태일 것이다.
“쉬는 김에 나머지 동료들의 능력을 구경해 봐. 버프만큼 재밌을 테니까.”
전투에 나서지 말라는 말에 첸은 입맛을 다셨다.
이런 모습을 보면 정말 뼛속까지 무인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무인도 몸에 힘이 없으면 짐 덩이에 불과할 터.
첸은 순순히 내 말에 따르겠다고 했고, 나는 두 명의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2층에서는 두 분이 힘 좀 써 주세요.”
“네.”
“그럴게요.”
육철완과 강정현.
두 명의 이레귤러가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