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ving a Mercenary Unit from Bankruptcy RAW novel - Chapter 14
제 12 장. 용병대의 확장
오늘은 지현에게 매우 기쁜 날이었다. 그토록 기다리던 신입 회계사무원이 오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벌써 한 개 분대가 그들을 맞이하러 나갔다. 본부에 남은 용병들은 지현의 사무실을 개조해 회계팀 사무실을 만들었다.
가장 화색이 된 건 지현이 아니라 아디슬이었다. 자원했다지만 업무량과 책임감 때문에 늘 말린 청어 눈을 하고 다녔으나 신입에게 인수인계를 하라는 말에 갑자기 베테랑의 얼굴로 변했다.
신입을 당장 업무에 투입할 수는 없겠지만 행정병을 교육하는 것보단 쉬울 것이다. 이들은 이미 복식부기의 개념에 익숙하고 회계장부를 작성하는 법을 알고 있으니까.
발데마르는 회계사들을 환영하고자 파티를 준비했다. 상급 간부들만 소수 참여하는 조촐한 파티였다.
지현은 기다리면서 교본을 다시 한 번 점검했다. 꼭 필요한 내용은 최대한 채워 넣었다. 혹시라도 부족한 게 있다면 실무 교육 기간 동안 가르치면 됐다.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기를 한참, 오후 즈음에 분대가 귀환했다. 지현은 오랜만에 슈트를 입고 그들을 맞이했다. 업무용 정장을 입으니 좀 더 힘이 솟는 기분이었다.
“환영합니다. 네로 씨, 리카르도 씨, 파올로 씨.”
마차 문이 열리고 세 남자가 차례로 내렸다. 지현이 앞장서서 인사했다. 그리고 조금 당황했다.
“이거, 환대에 감사합니다. 지현 니오 용병대 총 재무관님.”
가장 먼저 내려 지현의 손을 맞잡고 인사한 사람은 마흔이 넘은 중년인이었다. 지현은 셋의 이름과 경력만 알았지 나이는 몰랐다. 분명 신입이지만 신용이 있고 학습에 의욕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했는데 연령대의 상태가?
그 다음에 내린 리카르도는 30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마지막에 내린 파올로가 가장 젊었는데 앞의 두 사람과 크게 다른 20대 초반 정도의 청년이었다.
물론 나이와 무관하게 업계에선 신입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그들의 행색도 심상치 않았다.
일단 가장 연장자인 네로는 번쩍이는 비단 셔츠 위에 벨벳으로 만든 타바드를 입었다. 심지어 셔츠는 값비싼 청색 염료로 물들였고 타바드는 외곽에 금실로 자수를 넣었다. 저 정도 의복이면 가격이 갑옷보다도 비싼데 그런 걸 입고 있는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업계 신입으로 들어온단 말인가?
리카르도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목재의 질감이 고스란히 살아 있는 새하얀 고급 지팡이를 쥐고 내렸다. 그 형태나 표면은 장인의 솜씨로 연마한 게 분명했다. 목재도 주변에서 흔하디흔한 너도밤나무나 가문비나무 따위가 아니라 은은한 흰빛을 내는 은사시나무였다.
파올로가 가장 수수했다. 그는 비단이나 벨벳으로 몸을 감싸지 않았다. 하지만 악수할 때 보니 왼손 약지에 낀 반지가 심상치 않았다. 금으로 만든 반지에 붉은 빛을 반사하는 보석이 박혔는데 손을 움직일 때마다 빛이 바뀌는 걸로 보아 그것도 예사 물건은 아니었다.
지현은 의문을 가슴 한편에 접어 두고 한 사람 한 사람과 눈을 마주치며 악수했다. 가벼운 인사를 마치자 발데마르가 그들을 이끌고 식당으로 향했다.
참여 인원이 적은 만큼 발데마르가 직접 주방을 지휘했다. 발데마르는 상대가 남쪽에서 올라온 이들이기에 니오나 하이틸란트의 요리보다는 노바 일레디온에서 배운 요리를 내놓았다.
식초와 기름을 발라 삶은 송아지 고기에 꿀로 절인 사과 등이 나왔다. 화덕에서 구운 돼지고기 위에 양파 초절임을 얹어서 내놨고 닷새 전부터 준비한 발데마르 비장의 소스가 제공됐다.
지현이 ‘어쩌면 그냥 진하게 요리할 구실이 필요했던 걸지도…….’라는 생각을 할 만큼 발데마르는 철저하게 준비했다. 지현이 호들갑을 떤 것도 발데마르를 움직인 구실이었지만.
“크하핫. 솔직히 시간이 부족했지만 가룸도 이 정도면 제법 괜찮은 맛이라오. 지현 양에게도 꼭 대접하고 싶었는데 그간 기회가 안 나서 만들지 못했지. 한 번 드셔 보시오.”
발데마르가 내놓은 비장의 소스는 발효시킨 어패류였다. 지현에게는 어딘지 향수를 자극하는 냄새가 났다. 깜짝 놀라 소스를 꺼내 맛을 보니 멸치액젓 같기도 하고 진간장 같기도 한 맛이 났다.
“발데마르 씨, 이거 대체 어떻게 만든 거예요?”
“아, 그거. 며칠 전부터 고약한 냄새가 나던 그거네요.”
힐다가 옆에서 끼어들었다. 힐다는 냄새만 맡아도 고역이라는 듯 코를 잡고 손을 휘휘 저었지만 지현은 오히려 한 숟갈 크게 떠서 자신의 접시에 덜고 스푼을 쪽 빨았다.
‘약간 깊은 맛이 부족하지만…… 이건 진짜. 아, 울면 안 되는데.’
“안 고약해요?”
“네? 아, 전 고향에 이 비슷한 요리가 많아서요. 여기선 절대 못 구할 줄 알았는데…….”
“이런, 그렇단 말이오? 말해 주었다면 내 진작 만들었을 텐데.”
“아니요. 저도 여기엔 없을 줄 알았으니까요. 완전히 같은 맛도 아니고. 그나저나 기름진데도 끝 맛이 쌉싸름해 개운하네요.”
“비밀의 허브를 첨가한 덕분이오. 레시피는 비밀이라 알려드릴 수 없소. 황실 조리장도 모르오. 크하하! 좀 더 숙성했다면 냄새도 덜 나고 맛도 더 깊었을 텐데 시간이 없어 아쉬울 따름이오.”
놀라는 건 지현뿐만이 아니었다. 버디어 상회에서 온 세 회계사도 맛을 보고는 깜짝 놀라 발데마르에게 물었다.
“세상에, 이제 가룸은 노바 일레디온에서밖에 안 나는 줄 알았는데.”
“이 요리를 준비한 사람은 대체 누굽니까? 유명한 요리사입니까?”
발데마르는 시식한 이들이 놀라는 모습에 더 만족하며 자신을 가리켰다. 회계사들은 더 크게 뜰 수 없을 때까지 눈을 크게 떴다.
그들이 보기엔 요리라고는 대충 꼬챙이에 고깃덩이를 꽂아서 불에 태우는 것밖에 못 하게 생긴 사람이었다. 그런데 대륙 전체에서 거의 실전되다시피 한 요리를 만들었다니 믿을 수 없었다.
“그보다 가룸을 알아보다니 댁들도 꽤 하는구려. 크하하!”
“예에, 버디어 콤파니아는 남해 항로로 동방과 무역하다 보니 운이 좋아서 접해 본 일이 있습니다.”
“노바 일레디온은 우리와 가까운 사이기도 하고 말이지요.”
“그거 더 놀랍군. 그대들은 분명 버디어 콤파니아의 신입 사원이라고 들었는데.”
“예. 경력은 길지 않습니다만…….”
그들은 찔끔하며 음식으로 눈을 돌렸다. 발데마르는 그런 이들을 날카로운 눈을 좇았다.
지현이 그런 발데마르의 옆구리를 톡톡 쳐 신호를 보냈다. 발데마르는 어깨를 으쓱이며 다른 요리 접시를 들어 지현 앞에 내놨다.
리하르트는 행복해 죽겠다는 얼굴로 돼지고기를 쓸어 먹었다. 하인리히가 옆에서 큼지막한 돼지고기 한 조각을 채와 양파 초절임을 얹고 지현에게 권했다. 고기의 간은 약하지만 새콤하면서도 달달한 양파의 향이 고기와 섞여 극상의 맛을 냈다.
“돈과 시간만 충분하다면 이 정도 요리쯤은 별 것도 아니라오.”
“이런. 예산을 좀 더 넉넉하게 드릴 걸 그랬나 봐요.”
금세 표정을 풀고 만면에 미소를 띠며 고기를 오물오물 씹는 지현을 본 발데마르가 너스레를 떨었다. 지현도 그런 발데마르에게 능청스럽게 응대했다.
“그것도 물론 좋겠지만 같이 못 먹는 녀석들을 더 불쌍하게 만들 것 같으니 사양해야겠소.”
파티에 참석한 사람은 게다를 제외한 다섯 백부장, 법관, 각 백부대의 선임 병장과 기수들뿐이었다. 특히 리하르트와 친한 병장과 병사들은 눈물을 삼키며 리하르트의 등짝을 두들겨 팼기에 리하르트는 등을 시뻘겋게 불태우며 식당에 들어와야 했다.
힐다 백부대에선 아스타가 힐다와 파트리샤에게 투덜거렸다. 각 백부장들도 비슷하게 부하들의 불만을 들어 줘야 했다.
지현은 그 말에 한숨을 쉬었다. 사실 돈 문제가 해결되어도 이런 고품질 요리는 발데마르만 만들 수 있고 다른 이들은 주방 보조에 가까우니 600명이라는 대 인원을 먹이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발데마르와 비슷한 수준의 요리사가 있다면…….
“이번 분기 영업 실적도 괜찮은 편이니 조만간 요리사를 고용해서 본부 전원이랑 제대로 먹어요. 발데마르 씨도 그러길 원하셨고.”
“그럴 수 있겠소?”
“분기 결산을 해 봐야 정확한 액수가 나오겠지만 지금까지 회계 장부를 보면 순조롭게 흑자예요. 이건 사실 절약보다는 토너먼트랑 파데슈타트 수입이 더 컸지만.”
“크게 벌어서 낭비하지 않은 게 어디겠소.”
“아무튼 정확한 예산을 뽑아 볼게요. 그나저나 구실이 필요한데 적당한 축제가 있을까요?”
“어디 보자, 리하르트. 가까운 축일 뭐 있더냐?”
용병대 파티 메이커는 역시 그인지 발데마르는 리하르트를 먼저 불렀다. 리하르트는 잠시 생각하다 곧 답을 내놨다.
“태양절이 한 달 쯤 남았슴다.”
“천신교 축일이던가?”
“그렇슴다.”
“어? 태양절이 한 달 남았으면 지금 재의 금욕 기간 아니야? 너 평소에 이맘때면 식사량 줄이고 그랬잖아.”
“아직은 아님다. 기간으로 따지면 지금은 사육제 기간임다.”
“사실 우리 용병대 내 개종파는 금욕 기간 동안도 전투력을 유지해야 해서 굶진 않지만.”
“이거 북쪽은 문화가 다르다는 게 이런 거로군요.”
용병들의 대화에 네로가 끼어들었다.
“뭔가 차이가 있소?”
“남쪽에선 사육제야말로 가장 큰 축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금식 전에 최대한 성대하게 노는 거지요. 태양절은 오히려 즐거움보단 엄숙함을 강요하는 느낌인지라.”
“그렇구려.”
작은 파티를 마치고 지현은 세 사람을 숙소로 안내했다. 자재 보관실을 방으로 급조한 터라 비좁았다. 세 사람이 개인 용품을 보관하는 공간과 누워 잘 공간을 합치면 끝이었다. 그럼에도 여기가 아니면 다른 용병들과 같은 내무반을 이용해야 했다.
안 그래도 회계 사무실과 지현의 개인실을 억지로 증설했던 터라 본부 내에 빈 공간이 거의 없었다. 업무 효율을 위해서 별채를 새로 지으려는 계획을 짰지만 준비할 게 많아 바로 착수하지 못했다.
“더 나은 방을 준비하지 못해 미안해요. 조금만 기다리면 별관을 지을 테니…….”
“괜찮습니다. 용병대에서 첫 시작으로는 아주 훌륭한 성이지요. 그렇지 않은가?”
연장자인 네로가 먼저 운을 떼자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파올로는 뚱한 표정이었지만 군말 없이 겉옷을 벗어 옷장 안에 넣고 자신의 짐들을 그 밑에 내려놓았다.
“그럼 업무는 언제부터 시작하면 됩니까? 아, 그 전에 교육부터 받아야겠군요.”
“오늘은 일단 쉬세요. 여독을 풀고, 내일부터 직무 교육에 들어갈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지현은 그들을 남기고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생각했다. 저들을 앞으로 어찌 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발데마르가 찾아왔다.
“지현 양. 새로 온 회계사들에 대해 나눠야 할 말이 좀 있소.”
“아, 안 그래도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요.”
“내 보기엔 그들은 신입으론 보이지 않았소. 지현 양도 당연히 그걸 느꼈을 거라 생각하오.”
“물론이지요. 나이는 그렇다 치더라도 의복이나 장신구를 생각하면 고작 월 400제니로 고용할 사람들이 아니에요.”
“역시 그리 생각하시는구려. 우려되는 건…….”
“저들이 기술만 빼먹고 도망치지는 않을지 걱정되는 거겠지요?”
“그렇소.”
“저도 처음엔 그런 걸 걱정했지만.”
지현이 잠시 말을 골랐다. 그러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런 목적은 아닐 거예요.”
“그리 단언하시는 이유가 있소?”
“물론이죠. 만일 내가 산업 스파이를, 그러니까 세작을 보내 기술을 빼돌릴 생각이었다면 저런 인선을 편성하진 않았을 테니까요.”
“흐음?”
“너무 티가 나잖아요. 용병대에 월 400제니 받으러 오는 사람들인데 입고 있는 물건이 연봉보다 비싸다니요.”
“그거야, 흠, 이상하긴 이상하구려.”
“노출에는 의도가 있는 법이지요. 더군다나 저 사람들은 우리가 모집한 게 아니라 버디어 콤파니아에서 특별히 뽑아서 파견해 준 사람들이에요. 콘타 씨의 신용과 명예가 걸려 있는데 그렇게 나올까요?”
“그거라면 그럴 수도 있다는 입장이라오. 사람이 이권 앞에선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 지현 양의 그 회계 기술이라는 게 그 정도의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소.”
“전 다르게 생각했어요. 사실 완전히 확신하는 건 아니고 앞으로 알아봐야 하지만요.”
“그렇구려.”
“계약 기간도 있으니 기술만 빼내서 도망치진 못해요. 하지만 계약서는 고칠게요. 만약에 대비해 기간을 좀 손봐야겠어요.”
발데마르는 만약의 경우에는 자신이 나서겠다고 못을 박고 지현의 사무실을 떠났다. 발데마르가 직접 나선다는 말의 무게에 지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아침, 용병들이 식후 훈련에 나서듯 회계사들도 식사를 하고 직무 교육을 위해 사무실에 모였다. 지현은 그들에게 교범을 내주었다.
“일단 콘타 씨에게서 여러분이 지금까지 썼던 회계 장부의 예시를 받아 봤어요. 제가 쓰는 것과 많은 면에서 닮아 있지만 세세한 부분에서 차이가 있으니 지금부터 그걸 가르칠 거예요. 아디슬 씨.”
“넵. 니오 용병대 본부 보조 재무관 아디슬입니다. 우선 교범의 목차부터 살피겠습니다.”
근대 회계 시스템에서는 회계 장부뿐만 아니라 재무제표라는 종합 보고서를 작성해 기업의 현재 상태와 자본 흐름을 알기 쉽게 나타냈다. 하지만 이들에겐 아직 그런 분화가 일어나지 않았고 회계 장부에 재무제표의 기능을 겹쳐 이용하고 있었다.
지현은 교범에 둘의 차이를 설명하고 나누는 이유를 저술해 놓았다. 재무제표를 분리된 보고서 개념으로 보고 있지 않을 뿐, 이들도 이미 회계 장부를 유사한 기능으로 쓰고 있으니 이해는 크게 어렵지 않을 것이었다.
“여러분이 지금 쓰고 있는 장부와 제 방식의 장부는 서식도 달라요. 이제부터는 이 장부의 서식을 익혀야 해요. 교범의 12페이지를 보면 예시가 있어요. 그리고 여기, 우리 용병대의 지지난달 회계 장부가 있으니 이걸 함께 보면서 배울 거예요.”
“예.”
세 회계사는 교범을 뚫어 버리기라도 할 듯이 집중해서 보았다. 그들의 놀라운 집중력에 지현은 미소 지었다. 배우는 자세가 좋으면 가르치는 이도 기분이 좋았다.
“으음, 재무제표와 회계 장부를 나누는 이유는 알겠습니다. 확실히 순이익만 따로 기록해 두는 것보다는 보고서 자체를 나누는 게 보기 좋겠군요.”
“버디어에서는 어디 보자, 원장에서 바로 순이익을 추출해서 기록했네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보고서의 양이 늘어나는 것보다는 하나에서 알아보기 쉽게 하는 편이 좋지 않습니까?”
가장 젊은 파올로가 이의를 제기했다. 지현이 답하기 전에 리카르도가 그런 파올로에게 답을 줬다. ‘순이익을 얻는다.’는 기능은 겹치지만 원장과 손익계산서의 역할은 같지 않았다.
지현은 파올로를 가르치는 리카르도를 보고 속으로 웃었다. 역시 이들 중에 진짜 신입은 파올로 한 사람뿐이었다. 네로와 리카르도는 단순히 경력이 있다 정도가 아니라 현장에서 직접 기업을 관리하는 매니저급의 인사인 게 분명했다.
“여러분의 이해가 빨라서 참 다행이에요. 그럼 간단한 테스트를 해 볼까요. 여기 이 장부를 보고.”
지현은 정리되지 않은 재작년 한 달의 장부를 두 권 꺼내서 그들에게 건넸다. 다들 그걸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걸 펼쳐 본 이들은 저도 모르게 눈 끝을 파르르 떨었다. 시간 순서대로 단순 기록한 단식 부기 장부였다. 두 번째 장부는 같은 달 영주가 용병대에 진 빚과 용병대가 은행에서 대출 받은 걸 기록한 장부였다.
“그걸로 분개장과 원장을 만드세요. 우리는 상품을 제작, 매입해서 판매하는 게 아니라 매입해서 다 소비하니까 구매는 바로 지출로 기록해도 돼요. 너무 오래돼서 전표가 없으니 그건 러프하게 처리하셔도 틀린 걸로 치진 않을 게요. 훨씬 편하고 좋지요?”
장부를 분개한다는 건 복식 부기로 고치는 행위였다. 원장을 만드는 건 그렇게 분개한 장부를 각 항목별로 정리하는 것이었다. 둘 모두 지현이 용병대에 자리 잡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이기도 했다. 프로에겐 업무의 시작이었지만 신입에겐 교육의 시작이기도 했다.
“예, 예에?”
파올로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헛숨을 내쉬었다. 방금 교범을 주고 간단히 예시 하나 읽게 한 다음 뭘 시킨단 말인가?
네로와 리카르도 또한 침중한 표정이긴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들을 보고 지현이 마저 말했다.
“당연히 교범과 장부를 보면서 작성하셔도 돼요. 못 하겠어요?”
“당연히 못 합니다. 아니, 애초에 가르쳐 주시지도 않으시고 책 보고 알아서 하라고 하시면…….”
“파올로 군.”
“네로 씨.”
네로가 뺨을 긁으며 지현을 바라봤다. 지현은 그런 네로를 마주 보며 싱긋 웃었다.
“할 수 있으시죠?”
“알겠습니다. 입사 시험이라 생각하고 해 보겠습니다.”
네로가 그렇게 말하자 파올로도 다른 말은 하지 못했다. 파올로는 입술을 씰룩이며 장부로 시선을 돌렸다.
지현은 아디슬에게 감독을 맡기고 이번 달 장부를 정리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네로가 깊은 숨을 내쉬며 깃펜을 내려놓았다.
“지현 재무관님. 완료했습니다.”
“굉장히 빠르네요. 훌륭해요.”
발데마르의 장부는 항목이 간략하고 그나마도 굉장히 적어서 애초에 분개할 거리가 많지 않았다. 그 덕에 지현도 용병대에 자리 잡을 때 처리 속도가 빨랐지만 그만큼 자료로 가치도 낮다는 게 문제였다.
대신 이렇게 시험을 낼 때 낮은 난이도 문제로 쓰기 편했다. 세상사 쓸모없어 보이는 것도 어딘가에는 쓸 수 있기 마련이었다.
지현은 세 사람이 내놓은 분개장과 원장을 보고 위에서 아래로 훑었다. 지현이 준 서식도 잘 지켰고 내용도 충실했다. 부채의 증감도 정확히 들어가야 할 곳에 들어가 있었다. 자신이 작성한 장부와 비교해도 합격점이었다.
“훌륭하네요. 기대한 대로예요. 네로 씨와 리카르도 씨는 아디슬 씨와 함께 교범을 계속 살피세요. 파올로 씨는 제가 직접 교육할게요. 파올로 씨, 이쪽으로.”
“예에, 재무관님.”
파올로는 여전히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지현은 파올로에게 옆자리를 내주고 자신이 방금 전까지 기입하고 있던 장부를 보여 주었다.
“파올로 씨는 회계학을 교육받으셨지요?”
“일단은 그렇습니다만.”
“하지만 현장 경험은 아직 적은 것 같네요. 그러니 현장에서 쓰는 노하우 위주로 가르쳐 드릴 거예요. 우선 이 장부부터 보세요.”
리카르도가 흘끗 지현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눈으로 말하듯 파올로와 지현을 번갈아 보았다. 마치 파올로를 가르칠 테니 대신 지현이 자신을 교육해 주길 바란다는 것 같았다.
“리카르도 씨, 집중하셔야죠.”
지현은 정수리에도 눈이 달린 것처럼 리카르도를 눈치채고 주의를 주었다. 리카르도는 화들짝 놀라며 다시 교범에 시선을 꽂았다.
회계 장부를 작성하는 법은 가르칠 게 거의 없었다. 네로나 리카르도는 질리도록 해 본 일 같았고 파올로 역시 경험은 적지만 철저히 교육 받은 것 같았다. 그 점이 지현을 아주 만족스럽게 했다.
장부 기입의 경험이 풍부한 이들인 덕에 지현은 간단히 몇 가지만 집어 주고 재무제표 작성법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네로와 리카르도도 조금씩 손이 꼬였다. 그럼에도 금방 익숙해져 지현을 기쁘게 했다.
“시산표에서 굳이 재무상태표와 손익계산서를 나누는 이유는 여전히 잘 이해가 안 갑니다만, 이 현금흐름표라는 건 정말 유용해 보이는군요.”
“아니, 이건 유용의 수준이 아니야. 혁신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군. 대체 이건…….”
네로는 현금흐름표를 보는 내내 탄식과 감탄을 멈추지 못했다. 리카르도도 크게 다르진 않았고 파올로 역시 얼마나 대단한지는 몰라도 기업에게 얼마나 유용한 물건인지는 알아 봤다.
“시산표는 장부를 검산하는 용도고 재무상태표와 손익계산서는 그 결과물이니까요. 시산표에서도 결과를 알 수야 있다지만 조금 복잡한 해석을 거쳐야 해요. 한눈에 들어오지 않지요.”
지현은 차분히 대답하고 현금흐름표 예시를 하나 더 보여 주었다. 지현에게 이건 꼭 필요하지만 동시에 없애 버리고 싶은 애증의 관계였다. 전문 회계사가 아닌 지현에게는 작성 난이도가 너무 높았던 것이다. 이제부터 이걸 가르쳐서 이들에게 넘길 수 있다니 행복하기도 하고, 또 어떻게 가르칠지 생각하니 답답하기도 한 그런 존재였다.
“그리고 완성된 현금흐름표를 볼 때는 좋겠지만 직접 작성하기 시작하면 여러분도 감탄만 할 수는 없을 걸요. 다른 의미로 감탄하게 될 거예요. 기대하세요.”
니오 용병대는 순이익을 많이 보면서도 정작 현금이 없어 대출을 받아야 했다. 시작부터 흑자 도산이 눈앞에 어른거리는 상황이었기에 지현은 힘들어도 현금흐름표를 만들어야 했다.
‘어떤 의미로는 현대 기업이나 그게 그거네.’
재무상태표나 손익계산서에는 계약서에 인장을 찍는 순간 이익의 발생으로 기록한다. 때문에 그것만 읽었을 때는 당장 용병대 안에 돈이 충분하다고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실상은 외상으로 넘겼기에 부대에 사업을 벌일 예산이 전혀 없을 수도 있다. 이걸 모른 채 예산을 짜면 부대 안에 현금이 고갈되고 병사들 월급도 줄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지는 것이다.
그런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작성하는 것이 현금흐름표였다. 순수하게 부대의 현금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기록하여 당장 실제로 쓸 수 있는 현금이 얼마나 있는지 알 수 있게 한다.
파올로는 자신이 배운 범위 밖에 있지만 실제 현금 상황을 알 수 있으면 좋겠거니 생각하는 정도로 끝났다. 하지만 네로와 리카르도는 달랐다.
그들은 지현의 예상대로 뼈대가 굵은 베테랑이었다. 본인들도 무역업에 종사하며 어음과 외상을 잔뜩 써먹었고, 여타 상회가 자사의 현금을 잘못 파악하다 어음을 막지 못해 도산하는 걸 여러 차례 목격했다. 그런 만큼 이것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아챘다.
“말씀대로 기대되는군요. 작성하는 법도 어서 배우고 싶습니다.”
“세 분 모두 너무 좋아하시네요. 빨리 배우고 싶다는 의욕은 확실히 알겠어요.”
“예, 물론입니다.”
지현이 입꼬리를 쭉 올렸다. 순간 세 사람이 움찔했다.
“크흠. 혹시 지현 재무관님께서 강습료를 원하신다면…….”
“천만예요. 직원 교육은 기업의 의무예요. 용병대에 필요해서 가르치는데 강습료를 받을 수는 없지요. 전 인턴 제도도 극혐하고, 아, 이건 못 알아들으려나. 아무튼 회계사로서 여러분을 도제로 받으려는 것도 아니란 말이었어요.”
“그렇습니까. 그러시다면 저…….”
‘대체 그 표정은 뭐란 말입니까!’
리카르도는 다음 말을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지현의 표정은 마치 맹금류가 먹이를 낚아채려는 순간처럼 날카로웠다. 입은 웃고 있는데 안광이 번뜩이는 게 무서웠다.
“지현 양, 요청하신 걸 다 만들어 왔습니다.”
“법관 씨, 들어오세요.”
딱 적당한 타이밍에 법관이 찾아왔다. 지현은 반색하며 그를 불렀다. 법관은 어젯밤 지현과 상의해 새로 만든 계약서를 들고 있었다.
“회계 기술에 대한 비밀 서약을 원하십니까?”
네로가 물었다. 그 또한 법관이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았다. 그렇기에 법관이 들고 있는 계약서의 내용을 지레짐작했다.
“천만에요. 그게 뭐 대단한 비밀이라고 서약까지 요구하겠어요. 저건 평범한 계약서예요.”
“대단한 비밀이 아니라니……. 재무관님은 속이 깊은 건지 얕은 건지, 아니면 그냥 대범하신 건지 모르겠군요.”
네로는 중얼거리며 계약서를 펼쳤다. 그들의 계약서에 일반적으로 들어가는 “천신의 앞에 거짓 없이 고한다.”거나 하는 식의 종교 관용어구나 여타 미사여구가 쫙 빠져서 문단을 읽는 건 쉬웠다.
첫 문단은 “니오 용병대(이하 사업주)와 네로(이하 근로자)는 다음과 같은 근로계약을 체결한다.”로 시작했다. 지현이 기억하는 표준근로계약서를 기준으로 작성한 계약서였다.
“보통의 계약서보다 꼼꼼하군요.”
“당연히 그래야지요. 계약서를 함께 살펴보면서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보세요.”
“만약 계약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어쩌시겠습니까?”
“작별을 고해야죠.”
“크흠.”
원래의 계약서는 버디어 상회와 법관이 상의해 작성한 것이었다. 지현이 작성한 표준근로계약서와 겹치는 내용도 많아 임금이 얼마인지, 담당 업무는 무엇인지, 근로 장소는 어디인지, 용병대의 회계 및 재정 정보에 대한 비밀 유지 따위의 문항이 있었다. 시대를 초월해 필수인 내용들이었다.
지현은 거기에 3년의 근로 기간을 추가하고 기간 만료 전에 서로 협의하여 연장이 가능하다는 단서를 달았다. 더하여 근로 시간과 휴무일을 명시했다. 일하는 입장에서는 눈이 갈 수밖에 없었다.
가장 중요한 건 마지막 조항이었다. 근로 기간 안에 적절한 후임자를 찾아 양성할 것을 명시했다.
본디 인력 관리는 기업의 의무지 근로자에게 부담시킬 일이 아니었다. 엄밀히 말해 독소 조항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회계 기술만 배운 뒤 떠나 버린다면 다음은 고소나 소송 대신 피 묻은 도끼가 횡행할 것이었다. 그렇기에 마지막 조항은 발데마르를 납득시키기 위한 장치이기도 했다. 애초에 산업 스파이에 대한 법률이 있었다면 이런 걸 만들 필요도 없었을 테지만 법이 그렇게 촘촘하진 못했다.
“흐음, 납득이 가지 않는 건 없군요. 오히려 우리에게 너무 유리한 조건이 아닐는지…….”
지현은 계약서를 오히려 근로자가 스스로 유리한 조건이라고 말하는 광경을 보고 참신한 충격을 받았다. 저 조건은 정말 최소한 중의 최소한만 지키는 거고 복리후생 관련 내용은 싹 빠져 있었다. 필수라고 할 수 있는 보험 관련 조항도 없는데 저렇게 반응하다니.
이 세계의 근로 의식을 보니 다시금 고향 생각이 났다. 거기도 기업이 근로자를 노예처럼 착취해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쓰다 버리는 게 예사였지만 그럼에도 사회는 시간이 흐르며 개선되고, 개선해 나가고 있었다.
‘이런 데서 또 놀라네.’
“재무제표에 대한 비밀 유지 조항이 없습니다만?”
“아, 그건 굳이 비밀로 할 것 없어요.”
“네? 아니, 진심이십니까?”
“오히려 널리 퍼뜨려 주면 좋겠는데요. 그러니까 그 교범을 필사할 거면 몰래 하지 말고 근로 시간 이후에 요청해서 반출해 가세요. 아까부터 교범 뚫어지겠네요.”
“아니, 아니아니아니아니아니. 잠시, 잠시 좀 생각을 정리해야겠습니다. 좋아요. 지현 재무관님. 제정신이신 건 맞으십니까?”
“너무 놀란다.”
“누구라도 놀랄 겁니다.”
지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디슬과 법관은 그런 지현을 보며 쿡쿡 웃었다. 세 회계사는 혼란에 빠져 엉뚱한 소리를 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이 계약서에 인장을 찍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기술도 가르쳐 주고 돈도 주고 근무 시간과 휴무일까지 챙겨 주다니요.”
“그럼 인장 찍으세요. 우리 지금 계약도 안 하고 직무 교육부터 시작해서 되게 어색하거든요.”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만, 이거 무슨 함정은 아닙니까?”
“함정이라니요?”
“그 왜, 안심시킨 다음 몰래 우릴 처리하려거나…….”
“용병대가 무슨 연쇄살인마나 암살자 집단인 줄 아세요? 의심하는 거야 이해한다지만 좀 화가 나는데요.”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솔직하게 말해 보세요. 네로 씨나 리카르도 씨는 애초에 신입도 아니고 베테랑이란 티를 팍팍 내면서 오셨던데, 혹시나 우리가 여러분을 세작으로 여기지 않을지 걱정해서 그런 거지요? 그래 놓고 정작 우릴 의심하면 무슨 소용이에요?”
지현의 질문에 두 사람이 움찔하고 떨었다. 지현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월 400제니밖에 안 되는 월급에도 여기 오기로 한 이유도 지금 보고 있는 교범 때문이겠지요. 콘타 씨도 새 회계 기술을 받아들이려면 신입이 아니라 매니저급부터 교육해서 위로부터 개혁을 생각한 거겠지요. 그것도 이해해요.”
“사실, 지현 재무관님이 지금 하시는 말씀이 다 우리가 생각하던 게 맞습니다. 그걸 알아봐 주시기 바랐던 것도 있습니다. 예.”
“그럼 서로 의심하는 것부터 해소해야지요. 여러분은 우리가 여러분을 의심한다고 생각하고, 우리는 여러분이 우릴 의심한다고 생각하면 합의점을 찾을 순 없어요. 순수하게 말씀드릴게요. 회계 기술은 딱히 비밀이 아니에요. 오히려 양측에, 더 나아가 전 세계에 표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나치게 멀리 보시는 게 아닌지요. 당장 대차를 쓰는 복식 부기만 하더라도 누탈로 지방을 벗어나면 쓰는 상회가 없습니다. 아니, 누탈로에서도 특히 상업이 발달한 공화국이나 쓰는 수준입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이 기술이 상회 경영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아는 만큼 경쟁 상회에 흘러들어 가는 건 철저하게 막고 싶습니다만.”
“거기까진 제가 신경 쓸 게 아니에요. 여러분이 그 기술을 다른 사람에게 전수하든 하지 않던 그건 여러분의 자유예요. 어쨌든 버디어 콤파니아에선 쓸 거잖아요?”
“예,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간섭하지 않는 게 여러분에게도 마땅히 좋겠지요?”
“그 또한 매우 그렇습니다.”
“그럼 여러분은 퇴사 전에 용병대의 후임 회계사에게 기술을 전수해 주시는 걸로 모든 의무를 다하는 거예요. 비밀 서약도 없고 기술 파기 같은 조건도 없이요. 여기까지 이해하셨으면 계약 내용에도 이견은 없는 거지요?”
“저, 물론입니다.”
“좋아요. 그럼 한 문구씩 소리 내서 읽고 서로 동의하는지 확인하고 인장 찍자고요.”
“으음, 그럼…….”
네로가 먼저 계약서를 들고 각 항목을 소리 내어 읽었다. 지현은 항목 하나가 끝날 때마다 각 단어의 정의를 하나하나 짚고 동의를 구한 뒤 다음 항목으로 넘어갔다.
마지막 항목, 후임 양성의 의무까지 세 사람 모두 동의의 뜻을 밝혔고 계약서에 인장을 찍었다. 지현도 발데마르에게서 받아온 용병대 인장을 찍었다.
“자, 진짜 한 식구가 된 걸 환영해요. 계약대로 서로의 의무를 다하길 바랄게요.”
“물론입니다. 물론…….”
“그럼 직무 교육을 계속하지요.”
행정병의 역할은 회계 장부까지였고 재무제표부터는 배운 바가 없었기에 여기서부터는 아디슬도 학생의 입장이었다.
지현은 열과 성을 다해 가르쳤다. 대학 시절 따 놓은 회계 관련 자격증을 걸고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했다. 그 노력이 통했는지 신입 직원들은 지현의 교육을 쭉쭉 빨아들였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요. 다들 퇴근하세요.”
“예, 감사합니다. 그리고 혹시, 오전에 말씀하신 대로 교범을 빌려 가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지요. 공부한다고 너무 무리하지는 마세요. 내일도 일해야 하니까.”
“예, 알겠습니다.”
지현은 그들을 내보내고 하인리히를 찾았다. 근무 시간이 끝났으니 체력 단련 시간이었다.
홀가분한 표정으로 운동에 열심인 지현을 보고 하인리히도 옅게 미소 지었다. 마음의 짐 하나를 덜어내니 몸의 짐을 푼 것처럼 편하게 운동할 수 있었다.
“슬슬 팔에 힘이 좀 세진 것 같기도 하고…….”
처음에는 10초도 매달려 있지 못하던 지현이 이젠 1분이 넘게 봉에 매달렸다. 지현이 오래 매달릴 수 있자 하인리히는 그대로 팔에 힘을 줘서 자신의 몸을 봉 위로 끌어당기도록 시켰다. 이른바 턱걸이라 불리는 운동이다.
처음에 지현은 한 번을 못 올라갔기에 폴카와 에이자가 지현의 발목을 잡고 체중을 받쳐 줬다. 팔에 힘을 주면서 허리 아래는 힘을 빼야 하는데 몸을 다루는 법을 몰랐던 지현은 굽혀야 할 팔꿈치는 안 굽히고 무릎을 굽혀 두 사람을 걷어차 버리기도 했다. 다행히 두 사람은 머리를 걷어차이고도 선선히 사과를 받아 주었다.
하인리히는 즉각 힘을 키우는 것뿐만 아니라 어떻게 쓰는지도 교육에 들어갔다. 긴장과 이완은 실전에서도 중대 사항이었다.
그런 강사들의 노력에 몸 쓰는 법을 몰랐던 지현도 나름 숙련이 됐다. 아직 불안하지만 턱걸이를 할 때 다리에 힘을 많이 뺐고 한 번 정도는 턱이 봉에 닿았다. 이 대단한 성과에 지현을 비롯해 훈련에 도움을 준 모든 용병들이 환호했다. 작지만 노력의 결실이었다.
성과가 보이자 지현은 훈련에 박차를 가했다. 노력과 보상이야말로 실력을 키우는 지름길이었다. 그리고 정한 길은 포기하지 않는 지현의 끈기가 지름길을 달리는 동력이었다.
“시험 삼아 이걸 들어 보시겠습니까?”
하인리히가 얇은 판자로 만든 방패를 건넸다. 훈련용으로 경량화한 방패였다. 지현은 그걸 들고 자세를 취했다. 1킬로그램 남짓할까. 손도끼보다도 가볍고 조종하기도 편했다.
“그걸로 자세 연습을 하고 차근차근 무게를 덧붙이겠습니다.”
지현은 방패를 들고 하인리히의 동작을 따라 했다. 이러는 시간이 새로운 놀이라도 되는 것처럼 즐거웠다.
일하고 나서 바로 운동을 하자니 피곤하기 그지없었지만 신기하게도 땀을 흘릴수록 더 몸이 편해졌다. 운동을 끝내고 뜨거운 물에 몸을 푹 담근 뒤 침대에 누우면 마치 몸이 침대와 하나가 되는 기분이었다.
가만히 누워서 숨에 집중하고 있자니 멈춰 있는데도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감각이 이마를 간질였다. 사지가 침대를 파고드는 듯, 침대가 몸을 집어삼키는 듯 묵직하게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보면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잠들었다. 일어나면 놀랄 만큼 체력이 회복돼 있었다. 한창 힘이 넘치던 10년 전, 고등학생 때도 못 느꼈던 체력이었다.
하지만 체력이 늘어도 아침에 일어났을 때 나른함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런 나른함을 날리기 위해 지현은 잠에서 깨자마자 비척비척 일어나 두 손으로 벽을 집고 그대로 만세를 하며 온몸을 벽에 밀어붙였다.
몸은 벽에 붙이려는 한편 팔로는 몸을 밀어내는 동작이었다. 발데마르가 가르쳐 준 기지개의 일종이다. 몇 차례 반복하면 몸에 열이 나면서 막 일어났을 때의 무겁고 나른한 감각은 사라지고 상쾌함만 남았다.
중요한 건 습관이었다. 지현은 일어나자마자 스트레칭을 하는 습관을 만드는 데 보름이나 걸렸다.
“흐아아암.”
지현은 스트레칭을 하고 아직 멍한 뇌에 신선한 산소를 공급했다. 그리고 세면장으로 향했다.
세면장에는 이미 상당수의 용병들이 등목을 하거나 양치를 하는 중이었다. 지현이 꽤나 부지런해졌다지만 아직 용병들은 못 이겼다. 지현은 아직 해가 떠야 깨는데 용병들은 박명이 이는 순간 벌떡 일어났다.
“재무관님 오셨습니까.”
“다들 좋은 아침이에요.”
지현을 본 용병들이 인사를 해 왔다. 지현은 한 사람 한 사람 마주 인사하며 빈자리를 찾았다. 지현을 본 몇몇 용병들이 대야를 비우고 깨끗한 물을 채워 주었다.
“고마워요.”
“별말씀을.”
현금을 확보한 지현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용병대 위생 환경 개선이었다. 화장실과 세면장을 대대적으로 개수했고 꺼져 있던 욕탕과 사우나에 불을 지폈다.
당연히 용병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생활에 밀접하다 보니 약간의 개선도 빠르게 체감할 수 있었다.
세수와 양치를 할 때마다 지현은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고 새삼 느꼈다. 작은 세숫대야에 쪼그리고 앉아 세수하는 건 불편했지만 그럼에도 소소한 행복이었다.
비누와 치약에도 따로 예산을 편성했다. 전에는 개인이 각각 조금씩 만들어 나눠 썼지만 이젠 재료를 대량으로 구입해 제작도 대량으로 했다.
니오식 비누는 지현에겐 꽤나 신선했다. 거품이 거의 나지 않고 상당히 물렁했다. 향은 거의 없다시피 옅었지만 그래도 비누로 씻고 나면 상쾌했다.
딱 하나 지현이 걱정하는 건 제한을 풀자 소비량이 어마무시하게 늘었다는 것이다. 주재료는 꿀과 마로니에 열매였고 둘 다 크게 비싼 물건은 아니었지만 역시 양이 많으니 재료비가 만만찮았다. 때문에 지현은 단가를 낮출 방법을 고민해야 했다. 일이란 놈은 하나 끝내면 둘이 늘어나는 게 꼭 신화 속의 뱀 대가리 같았다.
지현의 아침은 대체로 이런 식이었다. 일어나서 스트레칭을 하고, 볼일을 보고, 씻고, 방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는다. 그러고 나면 아침 식사 시간이었다. 이젠 입에 완전히 익숙해진 청어 양파 스튜를 먹고 크림 우유 쿠키로 입가심을 하면 잠시 휴식 시간을 가졌다.
시계라고는 본채에 딱 하나 있는 물시계가 전부였다. 그러다 보니 다들 시간 감각이 상당히 느슨했다.
몇 시부터 식사 시간, 몇 시부터 훈련 시간, 정확하게 정해진 건 없었다. 대충 시계 한 번 보고 하늘 한 번 보고 뱃가죽 상태 한 번 보고 ‘아, 이쯤이면 한바탕 뛰어야 쓰겠다.’ 싶을 때 연병장에 모여 훈련을 했다.
그런 사람들 사이에 있다 보니 지현 또한 시간관념이 꽤나 느슨해졌다. 여전히 용병대에서 시계를 가장 자주 확인하는 사람은 지현이었지만.
“지현 재무관님. 천신께서 보살피고 태양이 반짝이는 아침입니다.”
“네로 씨, 좋은 아침이에요.”
거실에서 니오식 장기인 네파-탈페를 두는 용병들을 구경하며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고 있자니 막 식사를 마친 네로 일행이 인사했다. 세 사람 모두 생글생글 웃고 있지만 눈꼬리가 미묘하게 처져 있었다.
“촛불같이 어두운 빛만 받으면서 책 읽으면 눈 나빠져요.”
“어이쿠, 바로 들켰군요.”
“티가 나네요.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피곤하면 학습 효율이 나빠져요. 또 저한테 들으면서 배우는 거랑 혼자 공부하는 거랑 느낌이 많이 다르잖아요.”
“심려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이거 몸이 달아서 기다릴 수 없더군요.”
“나이는 좀 먹었지만 여전히 여기는 불타고 있답니다.”
네로가 가슴을 탕탕 치며 리카르도의 말을 받았다. 파올로는 두 어른을 보며 한 마디 거들려다가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했다.
“실례했습니다. 그래도 밤에는 자는 게 좋겠습니다. 두 분도.”
“푸하하. 젊은이가 왜 그리 매가리가 없나! 그래서 방코를 계승하겠나!”
네로가 파올로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며 웃었다. 파올로는 비척거리며 힘없는 미소를 지었다.
“오늘 업무는…….”
“일단 좀 쉬면서 릴렉스하세요. 몸이 편해야 업무 효율도 높아요.”
지현은 그렇게 말하고 두 손으로 바닥을 받치며 기대듯 앉았다. 그 말에 세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지현을 따라 앉았다.
“좋은 아침이오, 지현 양. 오늘도 차 한 잔 드시겠소?”
“감사히 받을 게요.”
발데마르가 들고 있던 나무잔을 지현에게 건넸다. 잔에 코끝을 대니 쓰면서도 미묘하게 들큼한 향이 났다. 지현은 ‘아, 한약 냄새.’ 하고 어렴풋한 기억을 떠올렸다.
발데마르가 타 주는 차는 몇 안 되는 지현의 고향 냄새와 비슷한 물건이었다. 지현에게 익숙한 냄새가 아닌데도 마음을 착 가라앉히고 고향을 떠올리게 했다.
본래 발데마르가 마시는 차는 자작나무 향이 중심이었다. 하지만 처음 차를 줬을 때 지현이 옅은 당귀 향에서 아련한 무언가를 찾는 걸 보고 그 뒤부터 지현의 차에는 당귀를 더 많이 첨가했다.
“세 사람은 용병대 생활이 좀 어떤가? 지낼 만하던가?”
“아직은 확신할 수 없는 시간이었습니다만, 낙관하고 있습니다. 아, 그리고 용병 분들은 많이 깔끔하시더군요.”
“마로니에 비누는 참신했습니다. 북쪽은 아직 동물 비계로 비누를 만든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만드는 경우도 있고, 다 재료 구하기 나름이지. 동물 비계는 솔직히 냄새가 역해서 다들 꺼린다네.”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요리는 어떤가? 남쪽과 많이 다를 거라 생각하는데.”
“예에.”
세 사람 모두 말끝을 흐리며 뺨만 긁적였다. 차마 대놓고 ‘이게 음식이라고 먹고 사는 겝니까?’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첫날의 파티가 거짓말처럼 그 뒤로 본 음식은 죄 청어청어청어 양파양파양파였다. 이렇게 먹다간 몸이 양파 껍질처럼 벗겨질 거 같았다.
니오인은 도대체 청어를 얼마나 사랑하는 건지 식탁에서 청어가 빠지질 않았다. 가장 싸고 쉽게 구할 수 있는 단백질이 청어 아니면 대구인 만큼 어쩔 수 없다는 건 알겠지만, 정도란 게 있지 않은가?
말린 청어 껍질을 우려낸 청어 스튜, 청어 기름으로 절인 청어, 소금으로 간을 한 청어 구이, 청어 어포 등등, 식탁 위에 청어가 있는 건지 식탁이 청어인지 모를 지경이었다.
양파도 만만치 않아서 생양파, 양파 튀김, 양파 구이, 양파 스튜 등 청어 옆엔 반드시 양파가 있었다. 사실상 청어와 양파가 용병대 식탁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지현은 세 사람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문화권 사람이라면 처음 그 식탁을 봤을 때 문화 충격을 받는 것도 당연했다. 청어가 맛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청어를 그렇게 많이 먹으면 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다른 메뉴가 없는 건 아니었다. 용병들이라고 혓바닥이 마비된 것도 아니니 다양한 맛을 찾는 건 당연했다. 단지 비중의 문제였다.
“니오의 쿠키는 참 맛있더군요.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기회가 될 때마다 꺼내 먹고 싶은 맛이었습니다.”
“예, 참 훌륭하더군요.”
“그리고 맥주도. 그렇지?”
“아! 좋은 맥주! 영혼을 씻는 담수지요.”
“됐네. 억지로 아부할 필요 없으니. 그대들 입맛에 안 맞을 거라고 예상했어. 나야 동서남북 다 겪어 봤으니 당연히 알지.”
세 사람은 발데마르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 발데마르는 씩 웃으며 말을 마저 이었다.
“다만 세 사람만을 위해 식단을 만들 수 없으니 어서 적응하는 게 좋을 걸세. 그대들도 봐서 알겠지만 지현 재무관도 우리와 전혀 다른 곳 출신인데 우리 음식에 적응했네.”
발데마르는 짐짓 엄하게 말했다. 주위의 용병들도 발데마르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직후 발데마르는 자연스레 지현 옆자리에 앉으며 세 사람과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는 속삭이듯 말을 덧붙였다.
“그래도 정 힘들 때는 말하게. 자주는 힘들어도 내 특별히 힘이 나는 요리 정도는 해 줄 터이니. 지현 재무관에게도 그렇게 하고 있고. 그 정도 특전은 있어야 일할 맛이 안 나겠는가?”
세 사람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발데마르를 봤다. 발데마르는 손가락을 세워 입을 가리고는 고개를 돌렸다.
“이놈아, 거기 좌변이 뚫리고 있는데 왕을 그렇게 놓으면 어떡해. 주사위 눈이 좋을 때 확 잡아채야지.”
“아, 대장! 훈수 두지 마십쇼.”
“보기 답답해서 그런다. 주사위나 굴려라.”
발데마르는 세 사람에게서 눈을 떼고 지현이 구경하던 장기판에 끼어들었다. 오전 한때의 한가로운 시간이었다.
“자, 그럼 일하러 가 볼까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여러분처럼 배우기 좋아하면 세상이 마하의 속도로 발전할 텐데.”
“예? 마하?”
“아, 그런 게 있어요.”
“좋아, 오전 훈련이다! 가자 놈들아.”
지현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발데마르도 부하들을 불렀다. 곧 근무가 없는 본대의 용병들이 모두 모여 발데마르를 따라 연병장으로 나갔다.
“좋은 아침이에요, 폴카 씨, 에이자 씨.”
“늦어서 죄송합니다, 지현 재무관님.”
그사이 폴카와 에이자가 지현을 찾아왔다. 두 사람은 지현의 사환 겸 호위 역으로 업무 시간에도 늘 지현을 따라다녔다.
“그럼 어제 배운 것부터 복습해 볼게요. 일단 개념 정리부터.”
일견 학교 수업 같지만 어디까지나 직무 교육이었다. 지현은 가르치면서도 실제 업무를 병행했다. 아디슬이 보조 장부와 영수증, 계약서들을 꺼내 놨고 세 회계사는 그걸 분개해 전표와 원장을 만들었다.
“지현 재무관님, 여기 현금이 비는 것 같습니다만.”
“계약서를 다시 확인해 보세요. 그건 잔금이 아직 미지급된 거예요.”
“어디, 아, 찾았습니다.”
세 사람의 높은 학습 의욕 덕분에 일도 수월했다. 아직 회계 장부를 정리하고 검산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지만 이 정도라면 기대해도 좋을 정도였다.
“저번 달 장부는 다 정리한 거 같네요. 그럼 오후부터는 손익계산서를 만들어 볼게요.”
“이걸로 바로 만드는 겁니까?”
“아니요. 재무제표는 월 단위로 만들지 않아요. 더 오래된 장부로 만들 거예요.”
재무제표는 대부분 1년 단위로 묶어서 만들었다. 필요에 따라서 3개월 분기 단위로 만들기도 하지만 매달 만드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렇게 촘촘히 보면 거시적인 흐름을 보기 어렵고 무엇보다 그렇게까지 할 인력도 시간도 없다!
그동안 시간과 사람이 없어 지현이 손대지 못했던 업무도 조금씩 처리했다. 그러다 보니 오전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훈련 나갔던 용병들이 돌아오고 주방에 불을 지폈다. 곧 고소한 냄새가 건물 전체를 휘감았다. 점심시간이었다.
“식사하고 마저 하지요.”
“알겠습니다.”
지현은 식당으로 가려던 찰나 발데마르와 마주쳤다. 훈련이 꽤나 격했는지 머리를 풀어헤치고 수건으로 덮은 모습이었다.
“식사하러 가시오?”
“네. 발데마르 씨는요?”
“예산 때문에 할 말이 있었소. 식후에 하는 게 좋겠구려.”
“그럼 일단 가 볼까요.”
점심은 제대로 된 식사라기보다는 아침과 저녁 사이 허기를 때우기 위한 간식 같은 느낌이었다. 훈련 직후 먹는 식단이 이래도 되는 건가 싶을 만큼 단출했지만 그 대신 저녁이 푸짐했다.
볶은 콩과 귀리를 가루 내고 그걸 풀어서 만든 걸쭉한 죽에 넓고 납작한 빵과 물 탄 맥주 한 잔이 전부였지만 아침 훈련에 주린 용병들은 허겁지겁 먹어 치웠다. 의외로 먹고 나면 꽤 오랫동안 허기가 가셨다.
“힐다 씨, 좋은 아침이에요.”
“아침이라기엔 좀 늦지 않았어요?”
“그럼 좋은 오후?”
“식당 들어올 때는 일단 좀 닦아라.”
지현이 식사를 마치고 식당에서 나가려는 순간 입구에서 들어오던 힐다와 마주쳤다. 두 사람이 인사하는 사이 발데마르가 다가왔다. 힐다 역시 땀투성이였기에 발데마르는 힐다의 머리를 수건으로 덮어 주었다.
“고마워요.”
“그래서, 어떻더냐?”
“대장 생각대로예요. 올해는 생각 이상으로 일러요. 슈피그까지 완전히 다 녹았어요. 혹시 몰라서 리하르트보고 에른브루까지 다녀오라고 일렀으니 오늘 저녁까진 돌아올 거예요.”
“잘했다. 우선 식사부터 해라.”
“넵.”
힐다는 식당 안으로 들어가 배식을 받고 지현과 발데마르는 거실로 나왔다. 이미 병사들이 거실 여기저기에 퍼져 있었다.
지현은 적당히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날이 많이 풀린 덕인지 벽난로에 바싹 붙지 않아도 그리 춥진 않았다.
오후의 나른함에 지현은 벽난로 근처에서 자신도 모르게 꾸벅거렸다. 지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졸면 어지간히 깊이 잠들지 않는 이상 오후 업무 때 깨끗하게 깨기 힘들었다. 책임자 위치에서 업무 시간에 혼몽하게 있을 수는 없었다.
지현은 마구간으로 가서 슈바르츠를 찾았다. 에이자와 폴카가 지현을 따라 나섰다. 세 사람은 부대 안을 산책하며 머리를 환기했다.
산골짜기에서 불어오는 훈훈한 봄바람을 맞으니 한결 상쾌했다. 바람은 산에서 피어나는 온갖 풀과 나무와 들꽃의 냄새를 싣고 와서 지현의 코앞에 뿌려 주었다.
“슬슬 승마에도 익숙해지신 것 같습니다.”
“아직 멀었어요.”
폴카의 칭찬에 지현이 손사래를 쳤다. 폴카의 말마따나 슬슬 말을 타고 걷는 건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빨리 달리는 건 어려웠다.
애매하게 익숙해진 탓에 슈바르츠한테 완전히 맡겼던 전과 달리 엉뚱한 지시를 내려서 슈바르츠를 당혹하게 만드는 일도 종종 생겼다. 그럴 때마다 슈바르츠는 귀를 파르르 떨면서 뒤로 젖히며 불만을 토로했다.
“고생했어, 슈바르츠. 오늘도 고마워.”
등에서 내려온 지현이 슈바르츠의 턱과 목을 쓰다듬으며 당근을 한 조각 내밀었다. 슈바르츠는 목에 힘을 빼고 머리를 앞으로 쭉 내밀며 당근을 받아먹었다.
“들어가지요.”
“예.”
지현은 한결 시원한 마음으로 오후 업무를 준비했다. 부하 직원들은 이미 사무실에 돌아와 있었다. 다섯 사람이 막 업무를 시작하려는 찰나 발데마르가 사무실을 찾았다.
“무슨 일이신가요?”
“아까 하려던 얘기를 마저 해야겠소. 예산 관련 문제라오.”
“예산 편성에 문제가 있었나요?”
“아, 그런 건 아니라오. 다음 달 예산에 추가 경비가 필요할 거 같소.”
“일단 앉아서 얘기해요. 여기.”
지현이 발데마르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그리고 작성 중이던 예산 초안을 꺼내와 발데마르에게 보였다.
“발데마르 씨가 직접 요청할 정도면 본부 전체에 관련된 행사인가 봐요?”
“훈련이라오. 평시 훈련과는 차원이 다른 훈련인데, 본부의 연례행사기도 하오.”
“어떤 훈련이지요?”
“지옥 강습 훈련이라 부른다오. 비슷하게 가을에는 저승 강 도하 훈련이 있소.”
발데마르의 말에 아디슬이 갑자기 파르르 떨었다. 이름과 아디슬의 반응만 봐도 몹시 고된 훈련이란 건 알 수 있었다.
“두 개 백부대가 각각 이레씩, 도합 21일 동안 지속되는 훈련이라오. 몸과 마음을 한계까지 몰아붙이고 그걸 뛰어넘는 데 목적이 있소.”
“거의 한 달 내내 훈련인 거네요.”
지현은 기억을 더듬어 발데마르의 옛 장부들을 떠올렸다. 봄철에 식재료와 소모품 비용이 팍 뛰는 시기가 있었다.
“추가 경비로 반드시 구매해야 하는 건 뭐뭐가 있지요?”
“일단 식사라오. 훈련을 받는 백부대는 최고 중의 최고만 먹여야 하오. 아침 점심 저녁 식단에 생선과 고기를 가득 채우는 건 기본이거니와 호두, 개암을 잔뜩 사와 끊임없이 먹여야 하오.”
발데마르의 말에 지현은 현재 시세를 토대로 필요한 경비를 가늠해 보았다. 용병대는 평시에도 많이 먹지만 발데마르가 특별히 주문할 정도라면 훈련 기간 동안 정말 어마어마하게 먹어 치울 게 분명했다.
“특히 호두와 개암이 많이 필요하오. 단기간에 힘을 쥐어짜야 할 때는 역시 그 둘만큼 좋은 게 없더구려. 훈련의 강도가 강도다 보니 충분한 이상으로 먹이지 않으면 부상자가 발생하는 건 물론 사망자가 생길 수도 있소.”
발데마르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식단이었다. 지옥 강습 훈련과 저승 강 도하 훈련 모두 발데마르가 용병대장에 취임하고 나서 고안한 만큼 대륙 곳곳을 누빈 발데마르의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알겠어요. 최선을 다해 구해 볼게요.”
사상자 문제를 거론하자 지현은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한 설명 이후부터는 더 자세한 실무 문제를 논의했다.
발데마르가 구체적으로 일인당 얼마만큼의 식량을 지급하는지 알렸고 지현은 그걸로 예산안의 얼개를 짰다. 식량뿐만 아니라 기타 자재도 잔뜩 필요했다.
훈련 장소로 프랑켄도르프 전역을 누볐기에 프랑켄도르프 백작의 허가 또한 필수였다. 매해 두 차례씩 몇 년이나 반복된 행사이기에 프랑켄도르프 백작도 가벼운 대가만 받고 선선히 허가해 주었다.
“벌목 및 사냥에 대한 허가 비용이……. 이거 생각보다 비싸게 먹히는데요.”
“벌목과 사냥은 영주의 특권이라 비싸다오. 사실 허가해 주는 것도 우리가 힘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지.”
“그래도 너무 비싸요. 이건 좀 낮출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어요.”
“방법이 있다면 좋겠소.”
“찾아야지요. 그게 제 일인 걸요.”
지현의 말에 발데마르가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전문가 한 명을 고용하니 일이 편했다. 진작 법관의 충고를 좀 들을 걸 그랬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 그랬으면 지현을 못 만났을까? 그랬다면 뼈아팠겠군.’
어느 정도 논의가 끝났다. 발데마르는 하늘과 땅이 괜찮다면 보름 뒤에 훈련을 시작할 테지만 그사이 날씨가 변하면 훈련 또한 미룰 수 있다는 단서를 달았다.
발데마르가 떠나고 지현은 세 회계사에게 문제를 내주고 아디슬에게 대필을 맡겨 편지를 썼다. 가장 먼저 쓸 편지는 베겐도르프 시의 시장 및 상인 조합과 야드가르에게 보내는 거였다.
식량의 확보가 먼저였다. 600명이 7일 동안 하루 약 200그램의 호두와 개암을 먹어야 했다. 거의 1톤에 가까운 양이 필요한데 흔한 과일이라곤 해도 그만한 양을 구할 수 있을지 모를 일이었다.
고기도 문제였다. 일주일간 먹으려면 육포 아니면 훈제 고기가 답이었다. 하지만 둘 다 소금을 대량으로 쓰기에 가격이 비쌌다. 육포는 지방질을 제거해 단단하고 먹기 힘든데다 열량도 비교적 낮았다. 맛이 없는 건 둘째치더라도 말이다.
발데마르는 업체 선정부터 운송까지 다양한 문제를 회피하기 위해 베겐도르프 시의 상인 조합에 육포와 훈제 고기를 반씩 섞어 주문했다. 비용이 조금 더 비싸지지만 복잡한 일은 줄일 수 있었다. 하지만 지현은 되도록 훈련 기간 동안 신선육을 공급하고 싶었다.
편지를 쓰고 다시 회계 업무에 집중하고 있자니 이번에는 힐다가 찾아왔다.
“어서 오세요, 힐다 씨. 무슨 일이에요?”
“모레부터 닷새 동안 대장이랑 백부장 전원이 훈련지를 미리 점검하러 갈 거예요. 그거 경비로 올려도 될까요?”
“물론이죠. 용병대 전체를 위해 필요한 일인데요. 다녀와서 경비 신청서 주시면 제가 처리할게요. 그런데 상급 간부 전원이 다 나가는 거예요?”
“네. 부대에 상급 간부는 지현 양이랑 법관만 남을 거예요.”
“정말 중요한 훈련인가 보네요.”
“중요하긴 하지요. 위험하기도 해서 우리가 직접 발품 파는 거고.”
“그렇군요.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걱정 말아요.”
지현이 구축한 체계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는지 이제는 용병대 간부 누구 하나 의문 없이 술술 일을 처리했다. 재무관으로서 지현에게는 다행이었다. 지현이 제대로 된 시스템을 알린 지 고작 두 달인데 벌써 사람들이 적응했으니.
‘어디 보자, 그럼 이번 분기 예산안에 훈련 예산을 새로 짜고, 대신 이쪽 융자 상환은 다음 분기로 미뤄야겠네.’
현금을 어느 정도 확보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빚이 많은 용병대였다. 아직은 돈을 운용하는 게 살얼음판 같은 기분이었다. 쥔 돈을 까딱 잘못 배치하면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날 것이었다.
그래도 금융에 관해 좋은 소식이 없진 않았다. 하나는 하이틸란트의 법률이 복리 이자를 금지한다는 것이었다. 또 하나는 만기일을 넘기지 않는 이상 이자가 붙지도 않는다는 것이었다.
지현이 아는 현대식 융자에 비해 훨씬 헐렁하고 사용자에게 유리한 법률이었다. 듣자 하니 종교가 개입해서 그렇다고 했다.
대륙의 주도 종교인 천신교는 이자 자체를 없애고 싶었지만 은행을 없애 버리지 않는 이상 금융과 이자는 뗄 수 없는 관계다 보니 아예 없애진 못한 모양이었다. 한 번의 이자가 고리가 되는 반대급부도 있었다.
아무튼 이자 걱정 없이 원금만 갚으면 됐으니 용병대에겐 좋은 일이었다. 그런 배경 속에서 지현은 남은 기간과 금액의 크기를 기준으로 엄밀히 계산해 조금씩 빚을 줄이고 있었다.
한 번에 갚아야 할 금액이 너무 커서 현금을 빼기 힘든 빚은 일부를 갚으면서 재계약을 맺어 만기일을 갱신했다. 그런 식으로 용병대에 당장 옮겨 붙으려던 불은 어느새 멀찍이 떨어졌다. 여전히 불은 크지만 조만간 진화할 수 있어 보였다.
‘좋아. 다음 단계로 넘어가자.’
“아디슬 씨, 어제까지 분개장 꺼내서 확인해 보세요.”
“넵.”
“지금까지는 체계가 구축되지도 않았고 계산이 어려워서 부대 내 소비재를 일괄 지출로 취급했지만 이제부터는 아니에요. 재고 조사에 들어갈 거니까 다들 따라 오세요.”
“네에?”
“한참 전에 해야 했던 걸 시스템 만드느라 못 했던 거예요. 세 분은 이미 아시겠지만 원래 상품을 구입하면 지출로 적는 게 아니라 현금의 감소와 재고의 증가로 차대변이 일치해야 했어요. 단지 재고를 파악하고 장부를 다시 작성할 인력이 없어서 미루고 있었던 거지요.”
“알겠습니다.”
“앞으로 갑주와 병장기 사업을 시작하면서 용병대 내부 거래도 빈번할 거고 그만큼 재고와 현금의 변동이 잦을 거예요. 미리미리 알아 둬야 해요, 아디슬 씨. 제가 없으면 본부 재정 책임자는 아디슬 씨니까요.”
“넷!”
아디슬은 어깨에 얹힌 묵직한 무게감에 목을 빳빳하게 펴고 군례를 올리듯 대답했다. 지금이야 회계 및 경영에 아는 게 적다지만 앞으로는 지현의 보조이자 후임으로 교육받을 것이었다. 짊어진 무게만큼의 능력을 갖춰야 했다.
지현은 네 사람을 이끌고 먼저 아드니를 찾았다. 식료품 재고 관리는 주로 아드니가 맡았다.
“직접 창고를 보시겠습니까?”
“네. 그러면 더 좋지요.”
아드니가 휘하 병장을 불렀다. 병장은 창고 열쇠 뭉치를 들고 재무관 일행을 안내했다.
주방마다 작은 저장고가 있지만 부대 전체에서 사용하는 저장고는 별채였다. 다른 건물들과 달리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단층이고 문을 열자마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발밑을 조심하십시오.”
안내하는 병장이 문을 열고 먼저 들어가 초롱불로 주위를 밝혔다. 햇빛을 막기 위해선지 창문이 하나도 없고 캄캄하기 그지없었다.
지현은 안에 들어가는 순간 한기에 깜짝 놀랐다. 저장고 안은 한겨울만큼이나 서늘했다.
또한 창문 하나 없이 사방이 꽉 막힌 건물인데도 냄새가 역하지 않았다. 어딘가에 환기구라도 뚫려 있는지 내부의 공기가 신선했다.
“불을 밝히겠습니다.”
병장이 초롱 안에 있는 초를 꺼내 샹들리에의 초에 불을 옮겨 붙였다. 그리고 사슬을 당겨 샹들리에를 천장 가까이 올렸다. 어둑어둑하지만 사물을 분간할 정도는 됐다.
“식료품 재고는 매일 확인하시나요?”
“아니요. 사나흘마다 한 번씩 확인하고 재고가 부족하다 싶은 품목은 토마스 백부장에게 알려 사 옵니다.”
“좋아요. 그것부터 고쳐야겠네요. 지금 각 식료품 재고가 얼마나 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따로 기록하고 있진 않습니다. 그때그때 수량을 조사하고 바로 백부장에게 전달하는 식이라.”
“그거 아쉽네요. 그럼 재고 조사를 할 때도 정확히 얼마나 남았는지 조사하는 게 아니라 얼마나 남았는지 어림짐작하는 정도인가요?”
“예. 저희야 익숙해져서 눈대중으로 며칠 먹을 양인지는 알 수 있다 보니 보통 그렇게 합니다.”
“재고 관리를 하는 분은 모두 몇 분이세요?”
“저를 포함해서 아홉 명이 번갈아 가면서 합니다. 보통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창고에 들르게 되는 셈이지요.”
“알겠어요. 일단 나가지요.”
지현은 다음으로 비품 창고를 찾았다. 여기는 토마스 부대의 병장이 안내했다.
“비품 창고는 의외로 뭐가 많지 않네요.”
비품 창고도 식료품 창고와 크게 다르지 않은 반 지하 형태의 건물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창문이 있었다. 밧줄을 당기면 사방의 창문이 열리며 햇빛이 안으로 들어와 창고 전체를 밝혔다.
“사실 그렇게 필요한 게 많지가 않습니다. 건물 수리할 때 쓸 자재야 각 건물 안에 보관하고 장작은 건물 밖에 쌓아 두니 말입니다.”
톱이나 망치 같은 연장들을 비롯해 밧줄과 판재 따위가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병장기는 개인 용품이라 공용 공간에서 보관하질 않다 보니 비품 창고에는 무기나 갑주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지현이 훈련할 때 쓰는 방패나 목검도 여기서 나왔다.
“저 갑옷은 뭔가요?”
“아, 은퇴한 사람이나 전사한 사람의 유족이 부대에 기증한 물건들입니다. 갑주 자체가 비싸다 보니 흔한 일은 아니지만 종종 남기는 사람들이 있지요. 오래된 건 백 년도 넘었지만, 당장 갑옷을 망실한 사람이 새 걸 구하기 전까지 급하게 입는 용도로 씁니다. 몸에 맞으면 그냥 그대로 입고 다니지요.”
“그렇군요.”
갑옷의 종류와 양식은 중구난방이었다. 지현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철찰을 이어 만든 미늘 갑옷부터 처음 보는 양식의 사슬 갑옷까지 다양했다. 그런 갑주가 모두 합쳐 열여섯 벌이 있었다. 검과 도끼는 조금 더 많았다.
“이크, 이 칼은 진짜 300년 된 물건이네요. 이런 곳에 있을 게 아니라 본토로 보내서 제사용으로 써야 하는 게 아니려나.”
“그보다 이거 내구는 괜찮은 건가. 휘두르면 부러지는 게 아닐지…….”
“네? 300년이나요? 그걸 어떻게 알아보세요?”
“손잡이 끝에 달린 추 형태가 다릅니다. 요즘 나오는 건 이렇게 생기질 않았거든요.”
대강의 상황을 살핀 지현은 창고에서 나왔다. 앞으로 무장을 표준화, 규격화하면 저기 있는 무장들은 그냥 악성 재고일 뿐이었다.
철로 만든 건 재활용이 가능하니 녹여서 새 무장을 만들 때 쓰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그 물건들의 사연을 듣고 나니 그냥 없애기 아쉬웠다. 이걸 어떻게 처리할지는 아무래도 발데마르와 상담이 필요했다.
“일단 토마스 씨와 아드니 씨를 만나야겠어요.”
“예.”
지현은 두 백부장에게 정확하고 세세한 재고 조사를 요청했다. 두 사람 모두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지만 지현의 요청을 거절하지는 않았다.
곧바로 수십 명의 병사들이 창고에 투입됐다. 그들은 항목별로 나누어 수량을 조사하고 표로 정리했다.
재고 조사는 창고에 있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고 각 건물에 보관 중인 비품과 식료품까지 포함했다. 그런 만큼 금방 끝날 일은 아니었다.
지현은 그사이 회계사들을 이끌고 재무제표 작성법을 다시 교육했다.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났다.
* * *
“앞으로는 식료품을 쓸 때마다 여기 출납부에 기록하셔야 돼요. 아시겠죠?”
재고 조사를 마치고 그 결과를 보고서 형태로 전달 받은 지현은 그걸 두꺼운 책자의 맨 앞에 끼워 넣고 백부장들에게 보여 주었다. 거기에는 각 항목 별로 무엇이 얼마나 남았는지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수십 명의 병사들이 하룻밤을 꼬박 지새우며 고생한 덕이었다.
“이렇게 하면 각 식료품이 얼마나 남았는지 문서로 알 수 있으니까 사나흘마다 매번 재고 조사를 할 필요가 없어요. 게다가 재고를 한눈에 볼 수 있으니 구매를 계획할 때 훨씬 편리해지지요.”
“그건 편리하겠습니다. 그래도 재고 조사는 정기적으로 해야 하지 않습니까?”
“물론 말씀하신대로 정기적으로 재고와 출납부가 일치하는지 확인해야지요. 그 일만 전담하는 부서를 신설할 생각이에요.”
“뭐, 이해했습니다.”
“좋아요. 그리고 비품 창고에 있던 갑옷이랑 무기들 말인데요.”
“핸슨에게 들었습니다. 그걸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네. 제식 무장이 들어오고 나면 그 물건들은 남겨 두자니 자리만 차지하고 관리하려면 인력과 시간까지 들어요. 그렇다고 전사자의 유품이나 은퇴한 분이 기부하고 간 물건을 처분해 버리자니 그것대로 아쉽고, 어떡하는 게 좋을지 의견이 필요해요.”
“솔직히 가장 최근에 받은 물건도 한 십 년 넘은 거 같은데 이제 와서 그걸 찾을 사람이 있을 것 같지도 않습니다.”
“비상시를 대비한 여벌 갑옷이라고는 하지만 요즘 시대에 미늘 갑옷 입고 전쟁터 나갔다간 죽기 딱 좋지. 사슬 갑옷도 너무 얇아서 써먹긴 힘들겠던데.”
“철찰을 고정하는 가죽 끈이 죄 헤졌더라. 입으려면 보수를 해야 하는데 그럴 바에야 싸구려 기성 갑옷 하나 사는 게 더 빠르고 쉬울 거야.”
“그럼 그냥 처분하는 걸로?”
“선조의 혼이 깃든 물건이라고 생각하니 그러기는 좀 무서운데. 볼바라도 불러야 하는 거 아니야?”
“요즘도 볼바가 남아 있던가…….”
“그보다 개종파 녀석들이 싫어할 걸.”
볼바는 니오의 무당이었다. 그들은 떠돌아다니며 니오의 전사와 귀족에게 예언을 하거나 주술을 부려 저주를 푸는 일을 했다. 때로는 마법의 약과 마법의 직물을 직조해 주고 대가를 받았다.
천신교로 개종하는 사람이 늘면서 지금은 오랜 전통 정도로 취급됐지만 아직 볼바의 권위가 통하는 사람도 남아 있었다. 용병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녹여서 새로운 무기로 다시 쓰도록 하지.”
발데마르가 말했다. 개종파들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다른 이들은 어쩐지 꺼림칙한 표정이었다.
“솔직히 손질해도 쓰기 애매한 수준이다. 이 녀석들은 녹이 슬었는데 녹을 제거하면 사슬이 머리카락만큼 얇아질 거다. 미늘 갑옷은 말할 것도 없지. 그나마 쓸 수 있는 건 이렇게 세 벌 정도가 전부구나.”
“아무래도 좀 그렇지 않아요? 차라리 본토로 보내서 어디 야를 나리라도 돌아가시면 부장품으로 쓰는 편이 낫지 않을까요.”
“야를 나리들은 이런 거 안 보내 드려도 부장품으로 쓸 금은보화가 넘친다. 우리 용병대는 이런 거라도 녹여서 쓸 만하게 만들지 않으면 니들이 부장품이랑 같이 묻힐 수도 있는 거야.”
“그리 말하면 더 할 말은 없지요.”
발데마르의 말에 반박했던 힐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처음부터 크게 거슬린 것도 아니고 한 번 말해 본 걸로 선대에 대한 의리는 다한 셈이었다.
“도시에 팔 수 있으면 좋겠지만 이런 물건을 살 사람도 없겠지. 장인에게 200제니 정도 주고 맡기면 싹 녹여서 깨끗한 철로 만들어 줄 거다. 갑옷 열세 벌에 검과 도끼가 서른 자루나 되니 못해도 수백 파운드어치의 철이 나오겠군. 그건 본토로 보내자.”
“알겠습니다!”
“너무 아까워하지 마라. 이걸 남긴 사람들은 이렇게라도 용병대에 도움이 된다면 그걸 더 좋아할 게다. 그 정도 애정이 아니고서야 귀한 갑옷을 기증하고 떠날 리가 없지.”
“대장 말씀이 옳습니다.”
“좋아. 그리고 또 뭔가 정리할 게 있소? 지현 양.”
“아니요. 이 정도면 충분해요. 그리고 발데마르 씨랑 백부장 분들은 내일부터 사전 답사를 가신다고 했지요?”
“그렇소.”
“경비 걱정은 마시고 안전을 최우선으로 해 주세요.”
“꼭 그러리라. 크하하.”
자리를 파한 지현은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 회계 장부를 수정했다. 과거의 것을 수정하는 건 컴퓨터도 없는 세상에서 거의 불가능에 가까우니 최신 기록에 재고 조사로 얻은 정보를 끼워 넣는 식이었다.
“갑자기 용병대 자산 가치가 팍 뛴 느낌이네요.”
“사실 지금까지 저평가됐던 거지만 말입니다.”
창고에 있던 비품과 식자재를 다 합쳐 봐야 2만 제니도 안 될 금액에 불과했다. 용병대 전체에서 움직이는 금액에 비하면 턱도 없이 적지만 장부는 풍족해졌다.
“지현 재무관님. 설마 식료품 재고를 하나하나 장부에 기록해야 하는 겁니까?”
“아니요. 항목별 재고 상황은 이제 식료품 재고 출납부에 기록하니까 회계 장부에 일일이 기록할 필요는 없어요. 장부에는 식료품 계정 하나로 묶어서 쓰면 돼요.”
“다행입니다.”
녹초가 된 아디슬이 파들파들 떨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회계사들은 장부를 정리하면서 저희들끼리 이러쿵저러쿵 논의했다. 당일 장부를 다 작성한 그들은 한숨을 쉬며 완성한 원장을 지현에게 넘겼다.
“깔끔하네요. 역시 프로는 달라요.”
“하하. 과찬이십니다. 지현 재무관님에 비하면 졸속하기 그지없습니다.”
“천만에요.”
“그나저나 용병이라 그런지 먹성도 참 대단합니다. 하루 평균 식사비용으로만 2천 제니가 넘게 빠져나가다니요.”
“사람이 6백 명이나 되잖아요.”
“그렇다 쳐도 말입니다. 어지간히 유복한 자유민도 하루 식대가 3제니를 넘지 않는데 잔치도 아니고 평시에 그 정도를 먹다니 말입니다.”
식재료 중에 비싼 건 딱히 없었다. 오히려 최대한 저렴한 재료만 찾아서 먹었다. 고기는 저녁 식사 때만 제공했고 대부분의 열량은 곡물에서 얻었다. 단지 용병들이 많이 먹을 뿐이었다. 엄청.
“이 정도면 식대를 높여 받아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용병 개인의 식대는 계급 상관없이 매주 10제니였고 주의 마지막 날 일괄 지불 받았다. 계산해 보면 용병대는 매주 식대만으로 8천 제니 안팎의 손해를 보는 셈이었다.
원정이라도 나갈라 치면 식품비용은 증가하고 월급도 가산되니 손실이 그만큼 커졌다. 그 손실을 메우려고 원정 중에 식대를 높이지만 그러면 재정에서 손발이 꼬이는 사태가 빈번하게 발생했다. 장교는 관리가 어렵고 병사는 병사대로 식대에 불만을 가진다.
그렇기에 원정 비용 자체를 부대 예산에 편입시키고 식대와 월급을 고정하는 걸로 변경하는 중이었다. 아직 다른 부대까지 완전히 개변하진 않았지만 본부 부대를 시작으로 서서히 변모하고 있었다.
“식대를 높이는 건 용납할 수 없어요. 식대는 직원 복지 차원에서 유지해야 해요. 사실 지금보다 줄이고 싶은데 그러기에는 아직 용병대 재정이 안 좋아서 유지하고 있는 거예요.”
“복지가 뭡니까?”
“사기 유지라고 생각하세요.”
“과연. 이해했습니다.”
“니오 용병대야 충성심 높고 신의 성실하기로 유명하지요. 과연 잘 먹는 건 중요하군요. 또 하나 배웠습니다.”
“뭘 이런 걸로요. 버디어 콤파니아도 직원 대우가 좋은 걸로 유명하던데요.”
“버디어 가문에게는 그렇지만 말단 직원까지 이렇게 챙기진 않습니다. 니오 용병대로 치면 백부장 이상 급 간부만 대우를 받는 셈이라고 할 수 있겠군요.”
“그건 몰랐네요. 그럼 세 분 모두 버디어 가문인 거예요?”
“이제 와서 숨길 필요는 없겠지요. 네로 씨와 저는 가문의 방계고 파올로는 직계입니다. 콘타 씨의 조카지요. 네로 씨는 콘타 씨의 조부님의 둘째 여동생의 아들이고 저는 첫째 여동생의 아들입니다.”
“두 분 모두 콘타 씨의 숙부 격이네요.”
“가계도를 보면 그 정도에 위치하지만 엄밀히 말해 콘타 씨의 부친인 버디어 콤파니아 장과 직접 형제는 아닌지라 거리가 좀 있습니다. 사실 이곳에 오기 전에 있던 자리도 운이 좋아서였지요.”
“그럼 그만큼 실력이 빼어났던 거겠지요. 콘타 씨가 굳이 여러분을 보낸 이유도 알겠네요.”
“그리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네로가 눈을 내리깔며 대답했다. 뭔가 배후의 이야기가 더 있는 것 같지만 이제 인사만 나눈 직원의 개인사까지 들춰볼 지현이 아니었다.
“자자, 더 힘내서 고향에 돌아갈 때는 새 기술을 가져가셔야죠.”
“그렇습니다. 그나저나 새 기술을 이렇게 허허.”
“더 널리 알릴수록 좋다고 생각하는 게 제 입장이니까요.”
“뵐수록 저희가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생각이 멀리 가는 분이십니다.”
지현은 반년 이상 오래된 과거 장부들을 꺼내서 시산표 작성을 맡겼다. 사실 이제 와선 별 의미가 없는 자료였다. 지금은 용병대의 시스템이 전과 완전히 달라졌고 그 과정에서 지현이 이미 과거 자본 흐름과 예산 운용 방식을 잡아냈기에 굳이 옛것을 정밀하게 추적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바로 저번 반기까지 본부의 장부라면 이미 지현이 재무제표로 작성했다.
하지만 지현이 자리 잡고 이제 겨우 네 달 조금 안 됐고 행정병들이 회계 업무를 보기 시작한 지는 한 달 겨우 넘긴 시점이었다. 아직 새 체제에서 한 분기 기말 결산조차 할 때가 되지 않았기에 이들을 훈련시키려면 부득불 과거 자료를 문제지로 써야 했다.
“조만간 각 부대에서 새로 병사들이 올 거예요. 여러분은 그 새로 온 행정병들을 가르쳐야 하니 그 전에 회계 장부쯤은 숙련되어 있어야 해요.”
“예? 저희도 배우는 입장인데 여기서 가르치라고요?”
“아디슬 씨, 크게 어려운 건 아니에요. 아디슬 씨가 하는 업무를 그대로 전수하면 되는 거니까요.”
“그렇지만…….”
“물론 교재를 만드는 거나 이론 교육은 제가 할 거예요. 아디슬 씨는 병사들의 사수로서 직무 교육을 맡으란 말이니 놀라지 마세요. 회계사 분들도 마찬가지로 신입 교육 정도는 할 수 있겠지요?”
“물론입니다. 그 전에 용병대 서식에 익숙해지는 일부터 해야겠습니다만.”
“좋아요. 그리고 아디슬 씨는 본부에서도 추가로 행정병을 뽑을 거니까 혹시 추천하는 사람이 있으면 말씀하세요. 물론 본인의 의사가 가장 중요하지만요.”
“찾아보겠습니다.”
“좋아요. 그럼 다들 오늘은 그만하고 퇴근하세요.”
“예. 수고하셨습니다.”
직원들을 먼저 퇴근시킨 지현은 발데마르를 찾았다. 부대에서 가장 큰 훈련인 만큼 지현도 알아둬야 할 것이 많았다.
마침 발데마르는 백부장들과 회의 중이었다. 자리에 없는 게다에게는 편지를 보내서 상황을 전달해 뒀다.
“무슨 일이시오?”
“본부에서 가장 큰 훈련이라니 저도 그 과정을 좀 알아야겠는데요.”
“아, 그렇구려. 여기 옆에 앉으시오. 내일부터 정확한 지세를 알아야겠지만 일단 전의 훈련을 토대로 경로를 짜 보았소.”
발데마르는 지도 위 이곳저곳에 붉은 안료로 점을 찍어 놓았다. 출발지는 본부가 위치한 주크 산이고 첫 번째 목적지는 주크 산의 최고봉인 슈피그 봉이었다.
도보로 산을 넘어 숲을 관통하고 1차 물자 집적지에 도달하기까지 이틀. 약 40킬로미터의 험지를 완전 무장한 200명이 이틀 만에 관통하는 게 목표였다.
물자 집적소는 산을 우회한 다른 두 개 백부대가 미리 만들어 둘 것이다. 여기서 소비한 식량과 장비를 보충하고 다음 지역으로 이동한다.
다음은 평지를 이동하지만 그냥 행군이 아니다. 기습 대비 훈련으로 평지 곳곳에 숨어 있는 보조 백부대의 기습을 견뎌야 한다. 백부장들은 매복과 기습에 취약한 지형을 회피하거나 돌파하면서 이틀 안에 다음 목적지에 도착해야 한다.
다음 목적지는 류샤크 강의 지류가 흐르는 숲이었다. 거기서 용병대는 나무를 베어 즉석에서 배를 만들어야 했다. 한나절 만에.
이렇게 완성한 배를 하천에 띄워서 류샤크 강을 거슬러 올라 베겐도르프 시까지 닿는 데 하루의 시간이 주어졌다.
지현이 보기에는 엿새 동안 이동한 거리를 단 하루 만에 거슬러 올라오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해 본 사람들이 된다고 하는데 어쩌겠는가?
그렇게 베겐도르프에서 본부로 돌아와 다음 백부대와 교대하는 것까지가 훈련의 전부였다. 실제로는 이레가 아니라 여드레가 걸리기도 했다. 결국 여유 시간까지 합치면 한 달 내내 훈련이란 게 정확했다.
“이런 루트라니…….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맞나요?”
“할 수 있는지 여부 이전에 해냈소. 이것도 200명씩 단체로 움직이니 그렇지 내가 이 녀석들만 끌고 다닌다면 닷새 안에 해낼 수도 있소.”
그건 ‘발데마르 씨니까 되는 거 아닐까요?’라는 말이 목젖에 붙어서 달랑거렸다. 하지만 발데마르가 확신에 차 있고 바로 옆에서 힐다도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이는데 차마 그리 말할 수는 없었다.
“아무튼 루트는 알겠어요. 신선한 고기를 보급하기 어려운 이유도 알겠네요.”
빨리 상하는 돼지고기는 냉장 보관해도 사흘 이상 가기 어렵다. 상온에 둘 경우 아직 봄철이고 또 산이라 선선하다 하더라도 하루 안에 먹어 치워야 했다.
하지만 산에 고기를 배송하는 건 무리였다. 물자 집적소라면 모를까.
“그럼 식량도 사흘 치를 들고 다니는 건가요?”
“그렇소. 배낭에 숙영 장비와 공구, 무장, 식량 일체를 다 넣고 돌아다닌다오.”
“그거, 무게가 얼마나 되지요?”
“갑주까지 포함해서 대충 80파운드 좀 넘겠구려.”
40킬로그램이 넘는 무게였다. 지현은 그걸 들고서 산에 오른다는 말에 현기증이 났다.
어째서 발데마르가 잘 먹이지 않으면 사고가 난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조금이라도 체력이 떨어진다면 그대로 탈진해 죽을 수도 있는 훈련이었다.
“알, 겠어요. 첫 사흘 동안은 어떻게 해도 건조식품밖에 방법이 없겠네요.”
“그런 셈이라오. 그래서 견과류가 더욱 중요하오. 잘 말린 견과류는 같은 양을 먹어도 곡물의 배 이상 든든하니.”
“잘 아시네요. 저는 조금, 방법을 생각해 볼게요.”
방법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러려면 훈련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 이들의 조력이 필수였다. 지현이 생각한 방법이 가능한지 여부도 아직은 확신할 수 없었다.
“힐다 씨,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뭐든 말만 하세요.”
“그럼 혹시…….”
* * *
아침 일찍부터 발데마르와 다섯 백부장이 본부를 떠났다. 그들은 가벼운 차림에 손도끼, 건량과 물만 챙겨 산을 올랐다.
평범한 등산로는 괜찮았지만 사람의 발이 닿지 않은 깊은 산림에 들어서면서부터 일이 어려워졌다. 군을 움직이려면 최소한의 간격이란 게 필요했다. 때문에 이들은 경로 주변을 탐색하며 나무가 성기게 자란 곳을 찾았다.
“이번에도 작년 가을에 썼던 길을 쓰면 되겠습니다.”
“그래. 이쪽은 이상하게 식생이 덜 자라는구나.”
발데마르는 전에 왔던 길을 확인하며 산을 계속 올랐다. 중간에 급경사가 몇 차례 나왔지만 이들은 숨도 고르지 않고 산을 올랐다.
“여기가 가장 문제인데.”
용병대가 찾은 슈피그 봉을 넘는 길은 네 가지가 있는데 각각의 길이 계절과 날씨에 따라 쓸 수 있을 때도, 없을 때도 있었다. 지금 발데마르가 선 장소는 왼편으로 낭떠러지가, 오른편은 절벽이 솟아 있는 길이었다.
길의 너비는 제법 넓어 무장한 군인이 2열로 서서 걸어도 여유가 있었다. 바닥은 노출된 암석이지만 이따금 그냥 흙이 뭉쳐 있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 곳에서는 나무나 풀이 자라 그 뿌리가 구조를 지탱했다.
하지만 이따금 암석이 아닌데도 초목이 자라지 않은 곳이 나왔다. 그런 구간은 자칫 잘못 디디면 무너져 내릴 수도 있었다. 지금처럼 눈이 쌓였다가 녹은 뒤면 특히나 취약했다. 발데마르는 그런 구역을 유심히 살폈다.
“이번에도 이 길을 이용할까요?”
쓸 수 있는 다른 길은 봉우리까지 곧바로 오르는 길이었는데 경사가 15도가 넘는 수준으로 급했다. 그 정도 경사면 자칫 뒤로 넘어졌을 때 그대로 떼굴떼굴 굴러 내려갈 수도 있었다.
“조금 살펴보자. 정상까지.”
발데마르는 낭떠러지 바로 앞을 걸으며 안전을 확인했다. 자신의 체중이 어지간히 건장한 병사가 갑주를 입고 군장을 찼을 때와 같으니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기 편했다.
“항상 여기가 가장 걸렸는데.”
“상태가 어떻습니까?”
“갈수록 약해지고 있는 것 같구나. 역시 이곳은 이제 그만 이용해야 하려나.”
“저번 가을만 해도 괜찮았는데요.”
“그렇지. 그렇지만…….”
발데마르는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바닥을 손으로 집었다. 손가락에 힘을 주자 흙더미가 발데마르의 손아귀에서 스르르 흘러나왔다. 거친 흙이 아닌 고운 점토질이었다.
절벽이 오랜 세월과 비바람에 깎이고 있는 곳이다. 이런 과정은 본디 한 사람이 일생동안 보아도 눈치채기 힘들 만큼 느렸으나 이미 바위가 점토가 될 정도로 풍화가 진행된 곳이었다. 오히려 지금까지 이용한 게 용할 정도였다.
더군다나 정기적으로 사람이 다니며 지반에 부하를 준 것도 문제였다. 그렇다고 당장 몇 년 안에 무너질 리도 없고 오래 가면 수십 년을 더 갈 수도 있지만…….
“항상 만약을 생각해야 하지. 작년에도 같은 말을 했지만 올해는 뭔가 바뀐 게 많은 해다.”
발데마르는 그렇게 말하고 돌아섰다. 다섯 백부장이 그의 뒤를 따라 길을 내려갔다.
“이쪽 경사는 역시 만만치 않습니다.”
“한 명이 자빠지면 그 뒤에 있는 녀석들이 줄줄이 넘어질 거예요.”
“그러지 않도록 주의해야지.”
이쪽 경로는 정상까지 급경사가 이어졌다. 최소한 2킬로미터 거리를 걸어야 했기에 만만찮은 길이었다.
“도끼를 지팡이 삼아 짚고 다니고, 병장들은 대열 측면으로 빠져서 병사들 상태를 유의하며 걷도록 하지.”
“예.”
봉우리에 오르니 백부장들도 지쳤는지 숨을 골랐다. 발데마르는 주위를 둘러보며 크게 심호흡했다.
해발고도가 1킬로미터도 안 되는 낮은 산이었지만 정상에서 내려다본 풍경은 역시 각별했다.
정상은 식생이 전혀 자라지 않은 암석 봉우리였다. 일행은 거기서 일단 멈추고 식사를 했다. 병사들을 이끌고 오면 저녁 무렵에야 도착할 수 있는 거리를 오후에 도착했다. 가벼운 차림도 한몫했다.
“산짐승이 가장 걱정이었는데 의외로 보이질 않는군.”
“마수라도 한 마리 있으면 잡아갈 수 있었겠는데 아쉽네요.”
“아서라. 그런 거 잡아서 뭐하게. 고기도 맛없고 가죽 안 상하게 잡기도 어려워서 돈도 안 된다.”
“가죽 안 상하게 잡으면 그만이죠. 나랑 토마스가 후려치고 대장이 졸라서 잡으면 되잖아요.”
“그게 어디 말처럼 쉽더냐.”
“어지간한 마수보다 센 불곰을 목 졸라 잡은 양반이 그리 말씀하신들.”
“크흠! 슬슬 내려갈까.”
“아, 좀 쉽시다, 대장. 방금 올라왔소.”
헛기침하며 엉뚱한 소리를 하는 발데마르에게 토마스가 핀잔을 줬다. 발데마르는 무안한지 뒤로 돌아 체조나 하며 몸을 풀었다.
“이 길은 쓸 수 있어 보입니다.”
하인리히가 먼저 일어나서 내려가는 길을 확인하고 돌아왔다. 산을 넘어가는 길 또한 경사가 만만찮아 대규모 병력이 대열을 갖추고 이동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뿐이었다. 만일 그 길을 쓸 수 없다면 쓸 수 있을 때까지 훈련을 미뤄야 했다. 다행히 지금은 상태가 양호했다.
휴식을 취한 여섯 사람은 산을 내려갔다. 한참을 내려가자 완만하고 평탄한 노두가 나왔다. 중간 휴식 장소로는 탁월한 지형이었다. 200여 명이 쉴 수 있는 곳은 산에서 그리 흔치 않았다. 눈에 보일 때마다 변화를 확인하고 기록해야 했다.
“여기도 딱 좋군.”
바닥의 상태를 확인한 발데마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등산이 가장 위험하면서 가장 힘든 만큼 확인할 게 많았다.
“다음으로 가지.”
“네.”
산을 다 내려오자 해가 서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물자 집적소까지는 아직 한참 걸어야 했다.
해가 완전히 저물며 물감이 퍼지듯 파란 하늘이 붉은색으로, 다시 감색으로 변해 갔다. 캄캄한 밤하늘에 별이 반짝이자 일행은 별빛을 길잡이 삼아 나아갔다.
그렇게 걷고 있자니 저 멀리서 모닥불이 반짝이는 걸 볼 수 있었다. 눈에는 가까이 보이지만 정작 모닥불이 있는 곳에 닿을 때까지는 거의 한 시간을 더 걸어야 했다.
“어서 옵셔.”
모닥불을 지키고 있던 이는 리하르트였다. 리하르트의 주위에는 여섯 마리 말이 바닥에 누워 자고 있었다. 단 한 마리, 바우그만 다리를 꼿꼿이 세워 기다리는 중이었다.
“이 녀석들을 데려오느라 수고했다.”
“별말씀이심다.”
“말썽부린 녀석은 없고?”
“넷슴다. 다들 말 잘 듣고 얌전해서 쉬웠슴다.”
“그것도 너니까 할 수 있는 말이지.”
발데마르가 바우그의 턱을 쓰다듬고는 모닥불 옆에 앉았다. 발데마르가 자리에 앉으니 바우그 역시 그의 옆에 다리를 접고 앉았다. 그러곤 목을 쭉 빼서 커다란 머리를 발데마르의 무릎 옆에 뉘였다.
“바우그 녀석은 대장만 좋아하는 모양임다.”
“너랑도 꽤 친하지 않더냐.”
“그럼 뭐함까. 등에 태워 주지도 않던데.”
“크하하. 등에 안 태워 준다고 안 좋아한다는 건 아니다. 이 녀석 자존심이 오죽 세야지. 그보다 오는 길은 문제없더냐?”
“넵. 도적도 없고 바람도 잔잔하니 아주 좋았슴다.”
“그래. 훈련 날도 그러면 좋겠구나.”
발데마르는 천천히 바우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하품을 했다. 잘 시간이 넘었다. 게다가 긴 산행으로 피로했다.
“불침번은 아드니, 토마스, 랑기, 힐다, 저, 리하르트, 대장 순으로 정했습니다.
“고맙구나.”
불침번은 초번과 말번이 그나마 편한 자리였다. 하인리히가 무력과 연공을 생각해 순번을 짠 것이었다.
“그럼 다들 자고, 내일 보자.”
“안녕히 주무십쇼.”
바람이 살랑 일자 별이 한층 반짝였다. 초원에 드러누워 별을 보고 있자니 쌀쌀한 봄밤도 의외로 포근했다.
* * *
“프랑켄도르프 백작님으로부터 편지입니다.”
발데마르 일행을 배웅하고 업무를 시작한 지현에게 한 용병대원이 편지를 전해 주었다. 안 그래도 훈련 때문에 프랑켄도르프 백작과 상의할 일이 있어 편지를 쓰려던 참이었던 지현은 무슨 일인가 싶어 다른 이들에게 업무 지시를 내리고 먼저 편지를 펼쳐 봤다.
편지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파데슈타트 분쟁을 조기에 종결시키고자 종교의 권위를 빌린 걸 문제 삼는 것이다.
힐책이라고 보기엔 어조가 굉장히 약했고 그보다는 한탄에 가까웠다. 하이틸란트 제국이 종교의 그늘에서 벗어난 지 얼마 안 됐는데 세속 영주 간에 생긴 일을 종교의 권위로 막아서 골치 아프다는 투였다.
안 그래도 헬무트가 제국법도 아닌 사문화된 제국 전신의 법을 들고 오는 바람에 골치 아픈 황제였다. 여기에 종교까지 끼니 한 단어로 정의되지 않는 복잡한 감정이 들끓었다.
자연히 그런 감정은 동생인 하이티리히 국왕에게도 전해졌고 하이티리히 국왕은 원인 제공자인 니오 용병대와 친한 프랑켄도르프 백작을 압박한 것이다.
당연하지만 니오 용병대가 뭔가 잘못한 것도 아닌지라 책임을 묻거나 할 수도 없고 하소연 정도가 전부였다. 앞으로는 자중해 주고 권위가 필요하다면 차라리 자신에게 문의해 달라는 식이었다.
한편 강철 십자의 법 때문에 제국 군주들 – 특히 여성인 군주나 딸 또는 아내를 후계로 삼았던 군주들이 발칵 뒤집혔다. 이러한 군주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보내는 탄원서 때문에 황제와 선제후들은 최근 서류에 파묻혀 산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황제는 궁정의회를 소집했다. 프랑켄도르프 백작은 궁정의회에서 논의된 내용에 따라선 제국의회를 소집해 100년 만에 황금문서를 반포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곁들였다.
그 건이야 헬무트의 잘못이니 니오 용병대에게 따질 건 아니지만 ‘상황이 이러하니 당분간 자중해 달라.’는 나름대로 정중한 요청이었다. 만일 새로운 법을 제정한다면 틀림없이 종교 권력의 배제가 포함될 텐데 사소한 트집이라도 주고 싶지 않은 것이다.
지현은 편지를 다 읽고 이런 제국의 상황을 어떻게 이용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이 편지를 통째로 아우다 대주교에게 들고 가서 논의하는 것도 한 방법이었다. 제어할 수 없는 커다란 세력이 둘 이상이라면 둘끼리 싸움을 붙이거나 둘의 싸움을 중재하는 걸로 막대한 이득을 취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런 건 어디까지나 두 세력의 균형이 팽팽하고 둘 모두로부터 동시에 공격을 당하지 않을 완전한 중립 세력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두 조건 모두 지금 니오 용병대의 상황에선 애매했다.
‘이 건은 일단 법관 씨랑 상담하자. 그리고 프랑켄도르프 백작님은, 미안하지만 조금만 이용해 먹을게요.’
프랑켄도르프 백작이 황제와 국왕의 지시를 받고서도 강경하게 나오기보단 저자세로 숙이는 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었다. 지현은 그 이유를 이 편지와 연관 지어 생각했다.
황제가 절대 권력자가 아니라 여러 다른 파벌의 견제를 물리쳐야 하는 정치인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다. 당장 파데슈타트 분쟁은 가문 내의 다툼 정도가 아니라 황제파인 야드가르의 땅과 권력을 빼앗아 황제를 견제하려는 다른 가문의 정략으로 시작된 일이었지 않은가.
그렇다면 궁정의회라는 건 그런 파벌들이 집결하는, 정치가의 전쟁터인 셈이다. 특징이 있다면 이쪽은 입으로 하는 전쟁이 진짜 전쟁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 정도였다.
그런 걸 준비하면서 상시 동원 가능한 대규모 군사 집단과 사이가 틀어지는 건 황제로서도 피하고 싶으리라. 또 다른 면에서 생각하자면 뭘 동원했건 결국 황제파인 야드가르를 지킨 건 니오 용병대인 만큼 한 걸음 물러서는 것도 당연했다.
아무튼 지금 지현은 프랑켄도르프 백작에게 요구를 받는 게 아니라 요구를 할 수 있는 입장이었다. 그런 만큼 지현은 현 상황을 최대한 이용하기로 했다.
“여러분.”
“네, 재무관님.”
“여기 세베리 부대에서 보내온 지난 1년 치 장부가 있어요.”
“예.”
“세베리 부대는 엘라이히 잘츠슈타트에 거점을 두고 주로 지방 군주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국지 분쟁으로 수입을 얻어요. 잘츠슈타트의 지정학적 특성상 하이틸란트 제국에서만 의뢰를 받지 않고 누탈로의 여러 공화국과 공국으로부터도 의뢰를 받는 등 용병대 수익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부대예요.”
“알겠습니다.”
“용병대 개혁 이전 국지전 전담 부대 전체 의뢰의 3할 가까이를 담당한 부대기도 하지요. 다시 말해 본부 다음으로 최우선 개혁 대상이란 말이지요.”
“장부를 분개하고 계정별로 정리하면 되는 겁니까?”
“일단은 그러네요. 아마 하루 안에 끝나진 않을 거예요. 본부에서 장부 1년 어치를 정리하는 데 절 포함해서 열 사람이 정리해도 하루 꼬박 걸렸으니.”
“저희는 프로입니다. 맡겨 주시지요.”
파올로가 가슴을 쭉 펴고 말했다. 다른 회계사들은 그런 패기 넘치는 파올로의 모습에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현은 그런 회계사들을 보고 미소 지었다.
“의욕적인 모습이 마음에 들어요. 자, 여기 장부를 받으시고.”
회계사들은 지현의 미소가 어떤 의미인지 몰랐다. 그들은 어째서인지 끊임없이 나오는 장부책을 보고 점점 웃음을 잃었다.
“지현 재무관님? 분명 한 부대의 1년 장부라고 말씀하시지…….”
“맞아요. 여기까지가 딱 1년 치네요.”
안 그래도 발데마르의 장부와 비교도 안 되게 두꺼운 책인데 양도 많았다. 일단 본부와 달리 사상자 및 은퇴자가 많고 그만큼 신병 충원도 많았다. 자연히 자금의 출납이 잦은 것이다.
거기에 세베리의 꼼꼼함이 더해져 계정의 대분류가 본부와 차원이 다르게 세세했다. 본부였다면 식비로 몰아넣었던 항목도 식자재 구매인지 원정용 보존식 구매인지, 정기적 구매인지 부정기적 소모에 의한 보충인지 구분해 놓았다.
전리품의 관리도 대단했다. 전리품의 세세한 내용, 분류, 처분 과정까지 보조 장부로 기록해 놓았다. 포로의 경우에는 포로의 이름, 가문, 영지와 몸값으로 얼마를 받았는지도 기록했다.
지현이 생각하기에 세베리 부대는 자신이 손대지 않아도 지부장인 세베리가 알아서 고칠 것 같았다. 하지만 노하우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는 큰 만큼 정확히 진단해서 조언을 해 주면 더 빨리 더 큰 효과를 볼 수 있을 것이었다.
“본부에 있던 전체 용병대 장부보다 한 개 부대 장부가 더 두꺼운 게 말이 됩니까?”
“저도 좀 놀랐지만 말이 되네요. 발데마르 씨의…… 특급 정리 능력이라고 하지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게…….”
“돌아와서 확인해 볼게요. 저는 또 다른 용무 때문에 잠시 자리를 비워야 해서.”
“으음, 다녀오십시오.”
직원들에게 업무를 맡긴 지현은 그 길로 법관을 찾았다. 현 상황을 논의하고 백작에게 보낼 편지를 작성해야 했다.
“일단 제국의 의향은 알겠으며 심려를 끼쳐 미안하다는 내용으로 시작해야겠군요.”
“그렇지요. 그리고 협상을 최대한 부드럽게 이어 가고 싶은데요. 이쪽이 협상을 원한다는 것도 모를 만큼 자연스럽게.”
“먼저 요구하면 불리한 위치에 서게 되지요.”
“네. 그러니 상대가 원할 만한 걸 슬쩍 흘려서 먼저 요구하게 만들고 싶어요.”
“협상의 기술을 알고 계시는군요. 볼수록 놀랍습니다.”
법관은 일필휘지로 편지를 작성해 나갔다. 화려하고 장중한 인사말에 온갖 미사여구를 곁들인 내용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깃펜을 멈췄다.
“그럼 황제가 원할 게 무엇인지 생각해 볼까요.”
“그러게요. 생각나는 게 있나요?”
“몇 가지 찔러볼 구석은 있습니다만, 이거다 하고 바로 떠오르는 건 없군요.”
“발데마르 씨한테도 물어볼 수 있으면 좋았을 텐데.”
“발데마르 대장님이라면 황제파에 고용 우선순위를 준다든지 하는 식을 생각할 것 같군요.”
“과연 그럴지도.”
“하지만 그러는 건 안 됩니다.”
“당연하죠. 우리가 제국군이 될 것도 아닌데.”
두 사람은 잠시 말을 멈추고 고민했다. 지현도 당장 떠오르는 건 없었다.
한편으로는 니오 용병대가 제국 곳곳에 흩어져 있으니 각 용병대 지부를 허브로 한 유통망 건설 같은 계획이 떠오르긴 했는데 이건 황제에게 협상 요소로 쓰기보단 용병대 새 사업으로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하지만 정작 지금 생각해야 할 협상 요소 대신 다른 사업 아이템만 잔뜩 얻었다.
“제국군이 될 수는 없지만…….”
“네?”
“발데마르 대장님은 일레디온에서 ‘약속의 군단’으로 복무하셨습니다. 황제의 친위대이지요.”
“네. 그건 들어서 알고 있어요.”
“그리고 하이틸란트는 공식적으로 일레디온 제국을 계승한 국가입니다. 하지만 문화적으로 일레디온 제국에 비해 한참 부족하지요. 황제의 권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 그럼 발데마르 씨에게 노바 일레디온의 문화 같은 걸 황제에게…….”
“아니요. 그런 부문은 하이틸란트 황제가 발데마르 대장님보다 훨씬 쉽게 많이 접할 수 있습니다. 제국의 모든 귀족은 겪은 적 없는 일레디온에 향수를 느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만큼 그곳에 대해 알 수 있는 건 항상 수입하고 있으니까요.”
“그럼 어떤 방법이 있을까요.”
“권위에 마음이 쏠려 있는 사람일수록 의전에 집착하기 마련이지요. 니오 용병대에는 일레디온에서 황제 친위대로 복무한 사람이 수백 명씩 있습니다. 당연히 일레디온 황제의 친정도 참석해 본 사람들이지요.”
사람을 보내고 이익을 취한다. 지극히 용병다운 발상이었다. 하지만 지현의 의문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일레디온에 항상 관심을 두고 있다면, 하이틸란트 제국에서도 똑같은 의식을 따라 한 적은 없는 건가요?”
“약속의 군단을 모방한 적은 있지만, 진짜와 가짜의 차이는 큰 법이지요. 설령 겉보기엔 똑같더라도 지니는 무게감이 다르니까요.”
“그렇단 말이지요.”
지현의 말마따나 하이틸란트 제국에서도 역대 황제들은 니오인 친위대를 거느리고 싶어 했다. 현 황제가 니오 용병대에 눈독을 들이는 것도 같은 이유였다.
단순히 일레디온 제국의 권위가 탐나기 때문만이 아니었다. 본토 니오인과 외지에 정착한 니오인들로 구성된 약속의 군단은 용병 친위대임에도 목숨을 건 충성심이 대륙 전체에 유명한 군대였다.
황제가 살아 있는 한 어떤 적 앞에서도 결코 물러서지 않고 포기하지 않으며 항복하지도 않는다. “목적지는 황제의 곁이 아니면 용사의 전당”이라는 표어는 더 유명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제국의 핵심 귀족으로만 구성된 근위대조차 반란 일으키기를 밥 먹듯이 하고 믿었던 시민군이 황제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일도 종종 있던 제국이었다. 용병을 불러 놓았더니 제국이 아니라 용병대장의 명령에만 따르다 용병대장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는 일도 있었다.
이건 비단 제국의 문제만이 아니라 대륙의 어느 왕국, 어느 왕조나 겪는 일이었다. 하지만 약속의 군단은 300년에 걸친 역사 동안 단 한 차례의 반란도 일으킨 적이 없었다. 나라를 다스리는 자라면 누구든 탐낼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런 역사가 있기에 역대 용병대장들이 대체로 약속의 군단에서 복무했던 니오 용병대는 신용과 충성을 군율의 핵심으로 삼았다. 하지만 이들은 황제 친위대와 달리 본토를 향한 충성심이 너무 강해 다른 왕국들도 쉬이 영입하지 못했다.
특히 지금 대장인 발데마르의 카리스마가 지나치게 강하다는 게 가장 껄끄러웠다. 용병대가 그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있다 보니 자칫 영입했다가 발데마르가 반란이라도 일으키면 나라가 넘어가는 건 순식간인 것이다.
그렇다 보니 발데마르가 취임한 이후부턴 주변 국가들의 은밀한 유혹도 줄어들었다. 하이틸란트 제국만이 아직도 니오 용병대한테 러브콜을 날리는 실정이었다.
법관의 제반 설명을 들은 지현은 다시 고개를 갸웃거리게 됐다. 그렇다면 의전 활동에 용병을 부를 게 아니라 니오 용병대를 통째로 고용해서 친위대로 복무시키는 게 목표 아니겠는가? 고작 행사 한 번 차출되어 준다고 그렇게 큰 의미가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당연히 황제도 당장 니오 용병대를 친위대로 만들 생각은 갖지 않을 겁니다. 불가능하다는 건 스스로도 알 테니까요. 하지만 몇 가지 효과를 노릴 수는 있습니다.”
황권을 노리는 여러 가문들 사이 현재 니오 용병대와 가장 많은 접점을 지닌 게 황제 가문이었다. 근황군과 근위대를 제외하면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무력 집단이 현 황제의 권위를 세우고 황실과 친분을 과시한다는 건 그만큼 의미가 있었다.
더군다나 최근 니오 용병대와 마찰이 있었던 홀슈타인 가문과 바이젠부르크 가문의 준동을 억제할 수도 있었다. 각각 토너먼트와 실전에서 니오 용병대의 무력을 목격한 터라 니오 용병대와 껄끄러운 관계를 개선하기 전까진 무력 도발을 삼가고 싶을 테니까.
“니오 용병대의 경제 상황 개선도 한몫했을 겁니다. 이건 지현 양의 덕이군요.”
“네?”
“마인데르트 지부장의 말을 기억하십니까?”
“제국 은행이 니오 용병대를 노리고 있었다는 그 말씀이시군요.”
“원래 이런 정략을 먼저 알아채고 대비해야 하는 건 저였는데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자세히 조사를 해 보니 니오 용병대의 재무 상황은 이미 대륙 각지의 은행과 왕실에서 은밀하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무너질 기미가 보이면 빠져나가는 인원을 잡아채거나, 용병대를 통째로 사들일 계획이었겠군요.”
“바로 그겁니다. 하지만 최근 갑작스러운 대규모 편제 개편이 있었고 그 이후 급속도로 재정 상황이 안정되고 있다는 점이 알려지고 있더군요. 사실 회계사를 새로 영입했다는 것까지 이미 알 만한 사람은 알고 있을 정도입니다.”
“으음, 그건 사실 딱히 제 덕이라고 하긴 좀 부끄러운데요. 최근 큰 의뢰가 연달아 생겨서 그만큼 자금에 여유가 생긴 것뿐이라…….”
“천만에 말씀입니다. 지현 양, 자신을 낮추는 것도 그 자리에 걸맞게 하셔야 합니다. 지현 양이 부채 비율을 낮추고 악성 채무를 처분하신 덕입니다. 특히 여유를 두지 않고 신속하게 처리한 게 가장 컸지요. 용병대는 무너지기 직전의 절벽처럼 아슬아슬했으니까요.”
“그, 그런가요. 헤헷.”
법관이 계속 추켜세우니 지현도 참지 못하고 웃음을 흘렸다. 법관은 그런 지현을 보며 빙그레 미소 짓고 계속 말했다.
“아무튼 니오 용병대를 삼키려는 계획은 당분간 접어야 할 터이니 황제도 그 다음을 생각해야겠지요. 지금 황제는 행정 능력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그 말은 그만큼 생각이 빠르고 멀리 보는 시야를 가졌다는 뜻이지요.”
“그럼 이미 니오 용병대를 이용할 다른 방법을 고민하겠네요. 그럴 때 괜찮은 제안을 하면 보통은 받아들일 테고.”
“바로 그겁니다.”
“좋아요. 그럼 최대한 은근하고 돌려서 편지에 쓰는 게 좋겠어요. 예를 들어서 우리가 종교를 끌어들인 만큼 황제 폐하의 권위를 높여 드릴 방도가 있다거나 그런 식으로요.”
“하하. 최선을 다해 문장을 화려하게 꾸며 보겠습니다. 시간이 없으니 편지는 지급으로 보내지요.”
훈련 시작 전까지 백작의 답장을 받고 거기에 지현의 요구를 편지로 보낸 다음 그에 대한 답변까지 얻어야 했다. 시간이 빠듯했다.
그럼에도 지현은 일단 이 건에 대해 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잘되면 좋은 거고 안 되면 조금 비싸더라도 대가를 지불하고 처리하면 되는 일이었다. 해야 할 일은 산적해 있었다.
견과류를 구하는 게 가장 큰 난항이었다. 냉동 보관 따위의 기술이 아직 없는 세계였다. 가을에 수확한 견과류는 보통 3개월 이상 보존하기 어려웠다.
남은 견과류는 가을걷이 이후 창고에 껍질째 보관하는 물건들 정도다. 이런 물건들은 구하기도 힘들거니와 보관 창고의 비용만큼 가격이 높아진다.
도시의 창고에 상당한 양의 견과류가 남아 있었지만 가격이 상상 이상으로 비쌌다. 파운드당 3제니 가격이었으니 5킬로그램어치만 사도 돼지 한 마리를 살 수도 있는 가격이었다.
야드가르에게 문의를 넣었지만 아직 답변은 오지 않았다. 야드가르의 영토에 꽤 큰 규모의 호두 과수원이 여러 개 있어 운이 좋다면 저렴하게 공급받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요청한 거였다.
뿐만 아니라 갈리스토 주교에게 부탁해 근방에서 호두 과수 농사를 짓는 수도원들에도 조력을 요청했다. 수입처를 다원화해서 최대한 가격을 낮출 심산이었다.
그나마 곡물은 구하기가 쉬웠다. 부피를 최소화하기 위해 가루를 낸 곡물을 볶아서 보급하기로 했다. 보급하는 곡물은 보리와 귀리로 정했고 두 곡물 모두 호밀과 함께 서민의 주식이나 마찬가지였기에 저렴하게 대량으로 구할 수 있었다.
‘볶은 곡물 가루는 최소한 2톤이 필요하고 그러려면 대강 700제니 정도. 여기에 견과류 가격이 작년 기준으로 4천 제니 정도. 고기의 가격은, 만일 가능하다면 600에서 800제니 사이로 해결 가능하겠고. 호두 코스트를 낮추는 게 무엇보다도 급선무네.’
생각할 건 식량만이 아니었다. 운송을 용병들에게 맡겨서 인건비를 절감하더라도 운송의 준비 자체에 드는 비용도 만만찮았다. 수레의 정비 비용, 말의 먹이, 이동하면서 먹을 식량 등등.
지현은 머릿속에 들어 있는 걸 차곡차곡 정리하며 사무실로 돌아왔다. 세 회계사들은 여전히 장부를 쥐고 씨름하는 중이었다.
“다들 잘되고 있나요?”
“단식 부기를 쓴 장부 서식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내용의 정밀함으로 봐선 마치 노련한 상인이 작성한 것 같습니다.”
“콤파니아나 상회만큼 복잡한 건 아닙니다만 용병대 인원이 인원인지라……. 아무래도 정리하는 데 시간이 좀 많이 들겠습니다.”
역시 베테랑은 베테랑이었다. 그들이 장부를 정리하는 속도는 지현을 한참 웃돌았다. 지현은 그들이 어디까지 정리했는지 보고 깜짝 놀랐다. 저 속도면 세베리 부대의 장부를 모두 정리해서 시산표까지 작성하는 데 사흘이면 충분할 것 같았다.
‘와, 역시 밥 먹고 회계만 한 사람들은 다르네.’
“훌륭하시네요. 여러분의 의욕을 조금 더 고취하기 위해 잠시 쉬면서 이걸 보여 드릴게요.”
세 사람은 지현의 말에 펜을 내려놓았다. 지현은 저들에게 아직 보여 주지 않은 재무제표의 한 페이지를 펼쳤다.
“이건.”
“주석이군요.”
“맞았어요.”
“어쩐지, 꼭 필요한 게 없다는 생각을 계속 했습니다. 숫자만으로는 나타낼 수 없는 정보들이 많은데…….”
지현이 씩 웃었다. 역시 회계에 정통한 사람들다웠다.
“여러분이야 스스로가 작성에 숙련된 사람이라 재무제표만 읽고도 대강의 상황과 흐름을 미루어 알 수 있을 테지요. 하지만 정확하게 알기 위해선 주석이 반드시 필요해요. 특히 우리 용병대처럼 최고 경영자가 회계 분야를 잘 모를 때는 더 중요하지요.”
“하지만 회계 장부에 주석을 다는 거나 재무제표에 주석을 다는 게 큰 차이가 있을 것 같진 않습니다. 물론 주석이 있나 없나의 차이는 큽니다만.”
“주석이 왜 중요한지 안다면 다른 것과 연결해서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은 재무제표를 보고 왜 놀라셨지요?”
“으음, 그 양식이 기존의 상식과 통념을 부술 만큼 세련되고 편리해서였습니다.”
“주석도 마찬가지예요. 그냥 주석을 다는 게 아니라, 주석을 다는 방식에도 표준화된 양식이 있거든요.”
“예?”
“여러분. 여러분의 콤파니아는 큰 회사예요. 당연하지만 콤파니아의 장은 모든 회계 장부를 두고 결산해야 하지요. 그런데 네로 씨와 리카르도 씨가 써 놓은 주석의 서식이 같은가요?”
“그야 같은 가문인지라 비슷하긴 합니다만…….”
“똑같이 쓴다고는 말씀드리기 어렵군요.”
“재무제표가 회계학의 정점이라면 주석은 회계 실무의 완성이에요.”
자신만만하게 말하고 있지만 사실 지현도 회계학이 전공은 아니었던지라 그렇게까지 잘 아는 건 아니었다. 다행히도 지현은 모국의 표준을 알고 있었고 직업 특성상 그걸 아직 기억했다.
“여러분은 이미 재무제표를 보며 모든 재정의 현황과 흐름을 읽는 완성된 정보라고 생각했지요. 진짜 완성된 정보는 바로 이 주석에 있어요. 이걸 통해서 사실상 모든 재무 정보를 읽을 수 있게 만들어야 하지요.”
“수치로 양적 자료를 나타내고 주석으로 질적 자료를 나타낸다, 는 말씀이시군요.”
“맞았어요. 당연하지만 주석의 서식만 설명하고 넘어가진 않을 거예요. 각 항목을 평가하는 방법과 그 원리도 함께예요.”
회계 실력만 본다면 지현은 사실 세 회계사보다 떨어진다. 살아온 세월이 다르고 학습량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현은 혼자가 아니었다. 약 400년에 걸쳐 발달한 근대 회계학이 지현과 함께했다. 어떤 천재의 말마따나 지현은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타 있는 것이다.
“의욕이 좀 생기시나요?”
“이를 말씀이십니까. 허허,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회계사들이 장부를 작성하는 사이 지현은 새로 구상한 사업을 스케치를 했다. 차분히 앉아 글로 쓰면서 정리하니 당장 준비하면 곧 현실화가 가능한 사업도 두어 가지는 있었다.
하나는 니오 용병대를 일종의 물류 보호기지 역할로 사용하는 것이었다. 니오 용병대는 이미 정기 연락을 위한 통신선을 구축해 놓았기에 그걸 조금 확장하는 걸로 수익을 내는 것이다.
당연히 통신선이란 건 위성통신도, 광랜도 아닌 사람이 직접 움직이는 길이다. 사람이 오간다는 게 가장 중요한 사실이었다.
정기 연락 편으로 오가는 건 부대 현황이나 편지 같은 소소한 것도 있지만 회계 장부와 분배해야 할 수익금 같이 중요한 것도 있었다. 당연히 다수의 용병이 무장해서 움직였다.
이 정기 연락을 더 촘촘히 만들고 인원을 늘려서 행상인이나 정주상인들의 운송을 보호한다는 계획이었다. 여기서 저기까지 이동하는데 보호해 달라는 식의 의뢰와 달리 ‘정기적’이라는 사실이 중요했다.
이미 니오 용병대가 이동할 때 이런저런 사람들 – 여행객, 순례자, 행상인 등이 따라붙는 건 흔한 일이었다. 저번 소집 때도 보았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수익성은 없었다. 용병들은 어차피 가는 길이라는 식으로 그들을 이끌고 다녔고 대가를 받더라도 아주 적은 양이었다. 무엇보다 그런 식의 이동은 부정기적이었다.
‘노는 인력도 많으니까 바쁠 때는 그 라인을 일시적으로 끊거나 다른 라인에서 쉬고 있는 인력을 이쪽으로 돌리는 방법도 있으니까.’
지현은 수익을 극대화시키기보다 안정시키는 쪽에 집중했다. 한 번의 의뢰로 큰돈을 버는 것도 좋지만 수익 구조가 불안정한 게 늘 마음에 걸렸다. 의뢰가 있으면 큰돈을 벌겠지만 의뢰가 없으면 어디서 돈을 구한단 말인가?
행상인들이 정주상인이 되고 싶어 하는 이유도 알 것 같았다. 대륙 이곳저곳을 누벼 봤자 타이밍을 잘못 잡으면 허탕을 치는 일이 허다한 행상인보다는 수요처 근처에 자리 잡고 안정적으로 수익을 올리는 편이 훨씬 낫지 않겠는가?
같은 이치로 지현 또한 꾸준히 돈을 벌고 싶었다. 지현 본인 또한 프리랜서 컨설턴트였기에 불안정한 수익이 생활에 어떤 압박을 주는지 알았다.
‘그러고 보니 프리랜서의 어원은 용병이었다나. 의외로 같은 직군이었네.’
발데마르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보여야 했기에 지현은 스케치한 계획을 구체화해 나갔다. 한동안 사무실에는 사각사각, 펜이 종이 위를 스치는 소리만 났다.
* * *
떠오르는 해를 보며 발데마르가 시간을 가늠하고 잠들어 있는 여섯 간부를 깨웠다. 그들은 눈을 몇 번 깜빡이고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아으으윽. 장비 없이 야영은 역시 빡세네.”
풀밭에 대충 누워 잔 터라 새벽이슬에 몸이 축축하게 젖었다. 바닥에 깐 망토는 물을 흠뻑 머금었다.
맨바닥에서 자서 그런지 허리와 목도 뻐근했다. 하지만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자 펄펄 나는 용병들이었다.
“세수하고 출발하자.”
“넵, 대장.”
발데마르는 숙영지 인근의 수원지에서 떠온 물을 주고 서쪽을 바라보았다. 걸어서 하루 정도면 다음 목적지인 숲이 나왔다.
훈련 기간 중에는 거기서 간이 전선을 만들어 강을 따라 내려갈 테지만 지금은 그럴 인력도 없고 배를 만들 장비도 없으니 그냥 강을 타고 걸으며 주변을 살필 것이었다.
준비를 마친 간부들이 말에 올랐다. 발데마르의 신호에 맞춰 일곱 마리 말이 느긋하게 걸었다. 사람이 걷는 것과 거의 비슷한 수준의 느린 걸음이었다.
“여기는 여전하구나.”
“이만한 지대가 쉽게 바뀔 리가 없지요.”
“하지만 그것도 앞으로 몇 년일지 모릅니다. 프랑켄도르프 백작은 최근 의욕적으로 농노를 보내 개척촌을 만들고 있다고 합니다.”
“개척촌인가. 사람 사는 땅이 느는 건 좋지. 우리도 그렇게 개척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산림 개간 사업도 한창이니 주민 보호 목적으로 고용하는 일도 늘어날 것 같습니다.”
“그거 좋겠군.”
일곱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겉으로 봐서는 마치 야유회 중인 기사들처럼 보였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달랐다. 다섯 백부장은 저마다 소리 내어 말하지 않으며 매복에 유용한 포인트들을 찜하는 중이었다.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은 훈련 기간 동안 서로의 백부대를 기습하는 장소였다. 여기서 큰 피해를 입는 부대의 지휘관은 발데마르가 직접 조련한다. 기습당한 부대뿐만 아니라 기습을 한 부대도 반격을 당하면 똑같은 훈련 대상이 된다.
그런 만큼 다들 말하는 대신 자신만의 계획을 가슴 속에 품었다. 어디는 기습하기 용이하겠네, 저 경로로 이동하면 여기쯤에서 당하겠네 하는 생각이 머리를 꽉 채웠다.
그들의 머릿속으로는 이미 수십 차례의 전투가 지나갔다. 어떻게 기습할 것인가? 어떻게 방어할 것인가? 반격에 용이한 지형은? 반격당하지 않고 기습할 수 있는 지형은? 기습한다면 어떤 형태를 취할 것인가? 양동 작전? 기동전? 우회 공격?
발데마르는 말없이 주위를 매의 눈으로 살피는 백부장들을 보며 빙긋 웃었다. 경쟁은 성장에 훌륭한 거름이 되었다. 그저 과열되지 않도록 잘 지켜보는 걸로 족했다.
아침에 출발한 일행은 저녁 무렵에 숲에 당도했다. 숲 외곽에는 침엽수가 하늘을 뚫을 것처럼 자라 있고 안으로 들어갈수록 활엽수가 무성하게 가지를 펼쳐 붉은 햇빛을 가렸다.
“여전히 나무가 많군.”
“이 근처는 땅이 영 별로여서 사람도 안 사니 나무가 많을 수밖에 없지요.”
“가장 가까운 마을이 방목 농장이었던가. 여길 개간하려면 한참 걸릴 테니 한동안은 더 훈련지로 쓸 수 있겠구나.”
힐다는 주변을 둘러보며 용골로 쓰기 적합한 나무를 골라냈다. 배의 뼈대가 돼야 하므로 길이는 최소한 10미터가 넘어야 했다. 그런 큰 나무들 중에서도 특히 목질이 단단하며 조직이 치밀한 참나무를 썼다.
선체는 어떤 목재를 써도 좋았다. 참나무가 튼튼하지만 원체 무거운 나무라 가벼운 가문비나무를 선호하는 장인도 있었다. 탄성이 뛰어난 너도밤나무를 이용하는 사람도 많고 가공이 용이한 소나무도 인기 있는 목재였다.
물론 생목을 잘라 바로 가공해 만드는, 어디까지나 뗏목보다 조금 나은 수준의 ‘간이 전선’이기에 재료부터 그렇게 꼼꼼할 필요는 없었다. 적당히 타고 다니다 강물에 박살 날 정도로 약하지만 않으면 충분했다. 그럼에도 니오인과 배는 떼어 놓을 수 없는 존재인지라 각 백부장들은 배의 재료가 될 나무를 진지하게 살폈다.
“자, 살폈으면 슬슬 야영 준비나 하자.”
“넵!”
숲에서 불을 피우는 건 언제나 화재의 위험이 있기에 주변의 불쏘시개를 철저히 제거하는 게 중요했다. 리하르트와 힐다가 땅을 파는 사이 하인리히가 장작이 될 죽은 나뭇가지를 주웠다.
랑기와 토마스가 그사이 주변의 나뭇잎이나 잔가지 따위를 치웠다. 아드니는 한데 뭉친 낙엽을 골라내어 간이침대를 만들었다.
구덩이 안에 장작을 차곡차곡 쌓고 불을 지피니 숲의 으슬으슬한 추위도 한결 가셨다. 일행은 불을 중심으로 모여서 둥글게 누워 잠을 청했다.
생 풀밭에서 잘 때보다야 어설프지만 낙엽도 모았고 바닥도 나름 다졌기에 한결 편히 잠을 취할 수 있었다. 덕분에 이틀 연속으로 노숙이었음에도 아침의 피로가 한결 덜했다.
“강으로 가자.”
숲을 관통하는 지류는 폭이 5미터를 간신히 넘었고 수심은 2미터도 안 되는 작은 천이었다. 발데마르가 들어가면 간신히 걸어서 건널 수도 있는 정도였다.
“수심이 많이 줄었군.”
“이번 봄은 좀 유난히 가물었으니까요.”
“배를 띄우려면 고생 깨나 해야겠는데.”
보통은 어지간히 작은 배라도 이 수심에 띄울 방법은 없었다. 강에서 낚시하는 배라 할지라도 1미터 이상의 흘수를 가지는 법이라 얕은 시내에선 운행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니오의 소형선은 보다 얕은 수위에서도 얼마든지 항해가 가능했다. 이들은 그런 배를 타고 개울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정도로 얕은 강까지 거슬러 올랐다. 진실로 물 위에 ‘떠다니는’ 배였다.
물론 물이 얕고 폭이 좁은 만큼 배를 조종하기 힘들었지만 그 또한 훈련의 일환이었다. 발데마르는 강을 따라 말을 몰며 강의 상태를 점검했다.
하류로 내려갈수록 강폭은 조금씩 넓어져 류샤크 강에 닿을 무렵에는 좌우로 20미터 가까이 됐다.
두 강이 만나는 합류점에는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기에 발데마르는 신원을 밝히고 목책 안으로 들어갔다. 마을 역시 니오 용병대를 종종 봐 왔기에 발데마르와 바우그의 덩치만 보고 별 조사 없이 안으로 들였다.
“이 마을도 제법 커졌군.”
“류샤크 강 한복판에 세운 마을치곤 작은 거 아님까? 베겐도르프 시를 생각하면.”
“그런 편이지. 사실 훨씬 커졌어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백작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구나. 이런 마을이 여럿이니 어쩌면 관리할 여력이 부족한 거일지도 모르지.”
마을은 직접 수운 사업으로 수익을 거두기보다는 항행의 중계 지점으로 기능했다. 그것만 하더라도 큰 부를 창출할 수 있는 곳인데 이상하리만치 발전이 더뎠다. 주민들의 생계도 선박과 선원을 대상으로 하는 장사보다는 어업과 농업의 비중이 더 컸다.
발데마르는 어깨를 으쓱였다. 정치니 행정이니 그런 복잡한 건 그가 고민할 바가 아니었다. 제 용병대 하나 다스리는 것도 힘이 드는데 땅이니 사업이니 도시 설계니 그런 골치 아픈 것까지 생각할 이유가 있겠는가?
발데마르는 스스로 용병대의 대장이라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만약 어디 땅을 다스려야 했다면 몇 년 못 하고 남한테 맡긴 다음 훌훌 떠나 버렸을 것이다. 그 몇 년도 책임감에 억지로 버티는 거지 사흘 안에 도망칠 자신도 있었다.
물론 지현이 들었다면 “그건 일선 실무자가 할 말이고 발데마르 씨는 책임자라고요! 책. 임. 자!”라며 소리를 질렀을 거다. 실제로 발데마르를 비롯해 역대 용병대장들의 실책이 꾸준히 쌓여 위기를 만든 거였으니까.
‘경영이란 거 참 어려워.’
발데마르가 뜬금없이 한숨을 쉬자 주위 용병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발데마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마을의 남쪽 문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혹시 발데마르 대장님이신가요?”
“응? 그렇소만.”
“저기, 저, 그게…….”
막 마을을 떠나려는데 한 남자가 뛰어와서 발데마르에게 말을 걸었다. 발데마르는 남자의 얼굴을 한 번 보고는 누구인지 기억해 내려고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절 기억하십니까? 2년 전에 마을에 도적떼가 들었을 때, 대장님께서 저와 제 아내를 구해 주셨습니다.”
“흐음.”
발데마르가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해 봤다. 류샤크 강 지류에서 수적들이 뭉쳐 수운 물류에 차질이 생기는 바람에 프랑켄도르프 백작이 의뢰했던 일이었으리라. 거기까지 생각이 닿으니 기억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기사들로 잡으려 해도 기사들이 오면 배로 도망치는 바람에 번번이 놓쳤다. 조운선은 있어도 전함은 없었던 터라 조운선에 군인을 태워 제압해 보려고 했지만 선상 전투에 익숙하지 않았기에 혼쭐만 났다.
발데마르가 또렷이 기억하는 이유는 그 수적들의 방식이 오래 전 니오인과 같아서였다. 배를 타고 강을 누비며 약탈을 하고 적이 오면 배로 도망치는 방식.
니오인이 그런 약탈을 멈춘 지 200년이 넘다 보니 그사이 새로 생긴 도시와 마을은 그런 약탈에 대비가 부족했다. 역사가 깊은 도시를 찾으면 대 수상 전투 방비가 철저했는데 이 마을은 그렇지 않았다.
발데마르는 곧장 베겐도르프 시의 선착장에서 보관 중이던 니오 전함을 꺼내 단박에 수적들을 박살 냈다. 원래 배를 타던 민족과 강도질하려고 배를 탄 도적떼의 차이는 극명했다.
마지막 그들이 도망쳐 숨은 곳이 이 마을이었다. 그때 수적들을 완전히 소탕하기 위해 여기에 상륙했던 것도 기억났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도통 기억나질 않았다. 그때 마을 안팎을 뛰어다니며 잡은 도적이 열댓 놈인데 그사이 구해 준 사람을 하나하나 기억할 리 없었다.
“그런 일이라면 내가 아니라 백작께 감사해야지. 우린 그저 의뢰대로 처리했을 뿐인데.”
“그러나 제 앞에서 도적을 막아 주신 건 발데마르 대장님이셨습니다. 그때는 경황 중이라 미처 보답하지 못했지만……. 도저히 갚을 길 없는 은혜인 줄 알지만 어떻게든 보답하고 싶었습니다.”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보따리를 내밀었다. 발데마르는 말에서 내려 그가 내민 물건을 받아 들었다.
척 보아도 농노 수준만 간신히 벗어나 보이는 사람이었다. 보자기가 감싼 물건이 무엇인진 몰라도 발데마르에겐 대단찮은 게 분명했다. 그럼에도 발데마르는 그것을 받고 손을 내밀어 남자와 악수했다.
“그대의 성의는 고맙게 받도록 하지.”
“아, 아…….”
남자는 서 있질 못하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는 발데마르가 떠날 때까지 그 자리에 못 박혀 있었다.
“저러다 대장 숭배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요.”
“그런 소리 하지 마라. 살다 보면 또 잊고 살겠지.”
발데마르는 그리 말하며 남자가 준 보따리를 열었다. 나무 접시 위에 훈제 장어가 담겨 있었다. 힐다와 리하르트는 그걸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하고 많은 생선들 중에 하필 장어랍니까?”
“녀석들. 이것도 잘만 조리하면 별미다. 하지만 이건 킁킁, 아무래도 비린내를 제거하지 않고 바로 훈연한 모양이군.”
발데마르는 도로 보자기를 감싸고 안장의 다른 짐 위에 얹었다. 저녁 식사는 장어구이로 정했다.
하이틸란트는 물론 대륙인들은 생선을 그다지 즐기지 않았다. 대구와 청어는 잡아도 잡아도 계속 나타날 만큼 원체 어획량이 많아서 그럭저럭 먹지만 생선 요리의 가짓수는 많이 적은 편이었다.
민물고기도 지금처럼 강 주변에서 어업에 종사하는 마을이 아닌 이상 찾는 이가 적었다. 청어야 바다에서 낚아서 수운을 통해 내륙으로 공급한다지만 어획량도 고만고만한 민물고기까지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반면 발데마르는 대륙을 돌아다니며 온갖 요리를 맛보고 또 온갖 조리법을 배웠기에 ‘세상에 맛없는 재료란 없다. 요리사의 실력 나름이다.’라는 사상을 갖고 있었다.
이런 사상은 그의 세계관 곳곳에 영향을 미쳤다. 그의 용병술이나 열린 사고 등에도.
“용병이 의뢰를 가려 받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말이다, 이따금 이런 일에만 나서고 싶구나.”
“대장?”
“즐겁지 않더냐. 나는 기억도 못하는 이가 은혜를 입었다며 어려운 형편에 구한 걸 보자기에 싸서 주다니. 천금은 아니더라도 마음이 배부르지.”
힐다가 잠시 발데마르를 보더니 이내 푸하하 크게 웃었다.
“불의를 못 참는 정의의 용병이라. 그것도 참 좋겠네요. 대장이 그리 이끈다면 난 따를 거요.”
‘먹여 살릴 입이 적다면 그것도 괜찮았겠지.’
발데마르는 그런 생각하며 고개를 돌려 류샤크 강을 바라보았다. 강폭이 1킬로미터 가까이 되고 강 주변 습지는 그보다 더 넓었다.
수심도 5미터를 넘어서 어지간한 크기의 조운선도 운항이 가능한 엄청난 규모의 강이었다. 하이틸란트 제국 서부에서 가장 길고 가장 큰 강인만큼 당연했다.
“대장, 무슨 생각하심까?”
발데마르가 한참이나 말없이 강만 바라보니 리하르트가 물었다. 여전히 정의의 용병 같은 걸 생각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본토에서 말이다.”
“넹.”
“이 강으로 본토와 오갈 수 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발데마르의 말에 다섯 백부장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부대들이야 다르지만 본부는 류샤크 강과 맞닿아 있는 거나 마찬가지니 수운을 이용하면 보름이나 걸리던 니오 본토와 오가는 시간을 이레까지 줄일 수 있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야…….”
“하지만 하이틸란트 녀석들이 기겁을 할 걸요.”
“우리 배는 아무래도 생긴 것부터가 좀 특이하니까…….”
“솔직히 우리 쓰는 전선도 여까지 끌고 오느라 얼마나 고생했슴까. 전전 대장님이 사정사정해서 겨우 얻어낸 거라고 들었슴다.”
“그렇지. 후우.”
원체 니오의 배에 당한 게 많다 보니 제국 내륙까지 전선을 끌고 오는 건 허가가 안 나왔다. 그나마 하이틸란트에 본부를 두고 꽤 오랫동안 신용을 쌓았기에 본부에서 쓰는 배만 겨우 끌고 올 수 있었던 것이다.
방금 들른 마을의 예와 같이 제국 강변에 새로 생긴 마을들은 수상 공격에 취약한데 니오의 배가 정기적으로 들락날락거리는 건 아무래도 용납하기 어려웠다. 니오 용병대가 오랜 세월 신용을 쌓았더라도 그 배를 모는 게 다 니오 용병대 일원이란 보장도 없고 말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요청은 한 번 더 해 보자꾸나. 거 일일이 우리 배를 브레머하펜에 대 놓고 육로로 이송한다는 게 얼마나 귀찮은 일인지 알잖냐.”
“시도해 보는 건 좋습니다. 용병대 전체와 관여된 일이니 대장님께서 생각하실 문제기도 합니다. 하지만 먼저 요청하려면 제국에 많은 걸 양보해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인리히의 말에 발데마르가 관자놀이를 긁적였다. 하인리히의 말마따나 지금까지 수운으로 니오의 배를 운용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요청할 때마다 제국은 니오에 많은 것을 요구했다.
하이틸란트 선적의 배보다 높은 관세 정도는 애교였다. 니오 용병대의 전선을 하이틸란트가 군사적 용도로 전용할 수 있게 해 달라느니, 니오 선원을 징용할 권한을 달라느니 온갖 제약이 따라붙었다.
당연히 그런 조건을 들어줄 수는 없으니 다른 조건을 찾아 계약은 점점 밀렸다. 전전대 용병대장이 본부에서 쓸 전선을 들이는 데 성공한 것도 니오 본토와 하이틸란트를 잇는 핵심 항구의 연안 경비를 거드는 조건이었다.
“전에 했던 계약을 연장해서 아예 북해 해적들 씨를 말려 버리는 조건이라면…….”
“북해에서 어지간히 큰 해적들은 조상님이 싹 쓸어버린 지 오램다.”
“사실 북해에서 제일 큰 해적이야말로 조상님들이셨지만.”
“해적을 잡아서 노예로 팔아 치우셨다죠.”
“나도 알아. 그래도 쬐깐한 녀석들이 오글오글 거리잖아.”
“쪼매난 놈들은 추적하기도 힘들도 잡기도 힘들잖슴까.”
“후. 다른 조건이 뭐 있을지 모르겠다.”
한참 떠들던 일행은 다시 조용히 말을 몰았다. 발데마르의 머리에는 여전히 많은 생각이 오갔다. 발데마르는 문득 이 강에 소르를 묻었다는 생각에 침울해졌다.
잘못은 저질렀지만 나름 아끼는 부하였다. 발데마르보다 용병대 경력도 길고 전장에서 세운 무훈도 두 손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그까짓 체면과 자존심이 뭐라고 죽음을 택한단 말인가. 잘못을 인정하고 병으로 종군하며 새로 무훈을 세워 다시 올라선다면 그야 말로 타의 모범과 귀감이 됐을 텐데.
“지현 양한테 상의하죠.”
한참 착잡한 마음을 달래며 조용히 걷는데 갑자기 힐다가 말했다. 힐다의 말에 다들 고개를 들고 서로를 마주 보았다.
“거 배 움직이는 것도 다 돈인데 또 압니까? 지현 양이 기똥찬 해결책을 내 줄지.”
“그, 그것도 그렇지?”
“그렇슴다.”
“재무관과 상의한다는 건 좋은 생각 같습니다. 혼자서 답을 내놓지 못하더라도 여럿이 생각할 때 똑똑한 사람 하나가 더 있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좋아. 그럼 본부에 돌아가자마자 말해 봐야겠다.”
지현은 자기도 모르는 새에 또 일거리가 늘어나고 있었다.
* * *
“지현 재무관님. 세베리 부대 전년도 회계 장부는 모두 정리했습니다.”
세 사람이 완성한 장부를 네로가 정리해서 지현 앞에 내놓았다. 지현이 내주고 정확히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세 사람이서 4일 만에 정리한 걸 보고 지현은 적잖이 놀랐다.
“살펴볼게요.”
지현은 가장 위에 놓인 원장을 살펴봤다. 계정별 분류도 잘됐고 각 계정의 세부 항목도 알아보기 쉽게 정리해 놓았다. 역시 프로의 솜씨는 달랐다.
“다들 고생하셨어요. 이제 이걸 토대로 재무제표만 만들면 되겠네요.”
입으로 한숨을 쉬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얼굴을 보니 다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법했다. 분기 회계도 아니고 연간 결산을 세 사람이서 나흘 만에 해냈는데 지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영수증, 현금 없이 계약서와 장부만 맞춰 봐서 이 정도로 끝난 것이었다. 만일 지현이 제대로 각을 잡고 부대 회계 감사를 벌였다면 세베리 부대 간부들 전원과 본부 회계사 전원이 함께 폭사했을 것이었다.
지금은 세베리의 강직함과 전우애를 믿고 간략히 끝냈다. 물론 그렇다고 회계 감사를 안 할 생각인 건 아니었다. 좀 더 회계사 인력이 확충되면 본격적으로 모든 부대를 싹 털기 시작할 속셈이었다.
비단 횡령이나 절도를 잡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재무 관리를 대충하는 부대를 찾아내서 개선하기 위해서였다. 발데마르처럼 어디 구멍이 나도 설렁설렁 기워 가면서 부대를 운용하니 야금야금 돈이 새는 것 아니었겠는가.
“당장 완성하라는 얘기는 아니에요. 일단 다 작성하셨으니 주석에 대해 가르쳐 드릴 게요. 여기로 모여 보세요.”
지현의 부름에 회계사들이 언제 풀죽었냐는 듯이 벌떡 일어나서 지현의 곁으로 모였다. 아디슬 역시 지현의 옆에 앉아 지현이 꺼내 놓은 본부 재무제표를 바라보았다.
“여러분은 잘 정리하셨지만 여전히 이런 부분들이 지저분하다고 느껴지지 않으세요?”
지현은 각 계정의 세부 항목을 가리키며 말했다. 확실히 세부 항목은 종류가 많다 보니 한눈에 잘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저걸 안 쓰면 지출이 너무 러프하게 보였다.
“자, 여기 재무상태표를 보세요.”
지현이 시험용이 아닌 분기 보고용 재무상태표를 꺼내 보였다. 거기에는 계정 옆에 주1, 주2 라는 설명만 있을 뿐 세부 항목이 비어 있었다.
“이쪽 주석을 보시면 이런 식으로 세부 항목이 정리되어 있어요.”
보통 이쪽 세계의 회계사가 주석을 작성한다면 간단한 의견이나 첨언을 싣는 정도가 전부였다. 하지만 지현의 세계는 주석도 엄격한 기준과 통일된 서식이 존재했다. 그리고 지현은 그것을 이쪽 세계의 실정에 맞춰 손봤다.
지현의 주석에는 자산의 종류, 자산 증감의 발생원인, 채권의 경우 채무자가 누구인지, 장부에 기록된 건 얼마고 실제 납입된 금액은 얼마인지까지 나누어 기록해 놓았다. 어찌 보면 무미건조한 표였지만 그만큼 간결했다.
“당연히 이게 끝이 아니지요. 여기 기록한 분기에선 상황이 없어서 표기하지 않았지만 실제로 각 상황별로 써야 하는 것들이 달라요. 이쪽의 손익계산서를 봐 주세요.”
지현의 가르침에 회계사들의 엉덩이가 들썩였다. 당장이라도 실무에 적용하고 싶은 마음이 크리라.
이 정도 의욕이 있으니 각자 자신의 위치에 설 수 있었던 것이라고 지현은 생각했다. 어지간히 자기 일에 미치지 않고서는 위로 가기 힘들다는 게 동서고금을 막론한 사실이니까.
“재무관님. 발데마르 대장님과 백부장님들이 귀환하셨습니다.”
“아, 인사하고 올게요. 다들 잠시 쉬고 계세요.”
“다녀오십시오.”
쉬라고 말했지만 회계사들은 지현이 남기고 간 재무제표를 놓고 서로 토론을 시작했다. 지현은 그 모습을 보고 어깨를 으쓱이며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발데마르 씨.”
“오, 지현 양. 우리가 없던 사이 본부에 문제는 없었소?”
“네. 열심히 일만 했지요. 돌아본 곳은 어떤가요? 그쪽은 큰 탈은 없어 보이던가요?”
“안전상 문제는 없어 보였소.”
“그런데 다른 분들은요?”
“다들 씻겠다고 먼저 욕탕으로 향했소. 나흘이나 야지에 노숙을 했더니 다들 죽으려 하오. 크하하.”
“이런. 제가 괜히 붙잡았나 보네요. 이야기는 나중에 해도 되는데.”
“천만에 말씀이오. 나는 원래 보고부터 듣고 쉴 생각이었으니 일단 집무실로 따라오시구려.”
발데마르는 지현을 이끌고 자신의 집무실로 향했다. 법관과 병장들이 따라 들어왔다.
“일단 법관부터. 내가 없던 사이 부대 기강엔 문제없었나?”
“예. 여기 부대 출입 기록입니다. 외지인 방문도, 외출 중 사고도 없었습니다. 여타 보고서는 따로 작성해 두었습니다.”
“좋아. 그럼 그사이 용병대 의뢰는?”
“없었습니다!”
담당 병장들이 빠릿빠릿하게 군기가 든 모습으로 대답했다. 그걸 본 발데마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전령을 보내서 향후 한 달간 본부 의뢰는 제한된다는 안내문을 포고해 놓도록.”
“알겠습니다!”
“끝으로, 부대 재정 상황에서 특이 사항이나 보고할 게 있소?”
“우선 용병대 훈련 예산안을 작성했어요. 확인해 주세요. 그리고 추가적으로 용병대 전체를 대상으로 한 신규 사업을 생각해 놨어요.”
“그거 참 좋은 소식이군. 마침 나도 신규 사업 때문에 재무관의 지혜가 필요하오.”
발데마르는 오면서 나눴던 대화를 지현에게 알렸다. 수운을 이용하면 보다 대량의 물자를 더 빠르게 운반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역시 문제는 정치 알력이었다. 지현은 발데마르가 내준 숙제에 머리가 아팠다.
“좋은 의견이 있으면 말해 주시오. 그럼 간단한 보고는 이 정도로 하고 나도 좀 쉬어야겠소.”
“아, 네! 그럼 나중에 다시.”
발데마르가 떠났다. 지현과 법관은 남아서 지현의 새 사업 계획과 함께 발데마르의 숙제를 풀었다.
“지현 양이 새로 내놓은 물류 보호 사업은 이미 각 지방 군소 군주들도 시행하고 있습니다. ‘소금길’이라고 부르지요. 우리도 이용했던 가도의 상당수는 소금길이었습니다.”
“그렇군요.”
“하지만 발상 자체는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소금길은 치안이 확립된 대신에 통행세가 비싸거든요. 더군다나 소금길은 반드시 각 영지의 관문을 통과하는데 그러면 거기서 또 관세와 관문 요금을 내야 합니다.”
“어? 통행세가 그리 비쌌던가요?”
지현은 과거 장부를 기억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통행세 항목은 드물거나 액수가 적었다. 관문 요금도 마찬가지였다.
“니오 용병대는 이동에 면세나 감세 혜택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대공위 시대 당시 선대 용병대원들의 노고 덕분이지요.”
대공위 시대는 전란의 시대였다. 힘 있는 대영주와 선제후들은 온갖 사소한 트집으로 서로에게 전쟁을 걸었고 중소 영주와 도시들은 권리를 침식당했다.
무력 도발과 국지전이 횡행했고 용병대는 각 선제후의 요청에 언제든 출동해야 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영주의 관문에 걸려 멈추거나 거리가 멀다고 의뢰를 반려하기 일쑤였다.
처음에는 선제후들도 근처의 지부 부대를 고용하는 정도로 만족했으나 대규모 접전이 늘어나자 니오 용병대를 더 자주, 더 많이 부를 필요가 생겼다. 한 번 부르면 의뢰비의 서너 배도 너끈히 해내고 충성심은 또 얼마나 높은지 외상으로 불러도 묵묵히 잘 싸우니 용병을 모을 때는 니오 용병대를 더 자주 찾는 것도 당연했다.
지현은 들으면서 ‘뭐든 일장일단인 법이구나…….’ 싶었다. 그때 외상으로 일을 해서 많은 이권을 얻어냈지만 반면에 그때 진 빚 때문에 용병대가 휘청거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처음 시작한 건 현재 황제 가문인 바벤베르크 가문이었다. 그들은 니오 용병대 세 개 부대를 모으기 위해 선제후 가문 휘하의 모든 영주들에게 니오 용병대의 면세를 요구했다.
당연히 휘하 영주들은 반항했다. 하지만 바벤베르크 가문은 군사 보호 의무의 이행을 위해서라며 강행했다.
그리고 그 전투에서 결집한 1,800여 명의 니오 용병대는 단박에 적 주력인 4천의 혼성 군단을 돌파하여 양단해 버렸다. 각지에서 모인 바벤베르크 가문의 연합군은 둘로 나뉜 적 군대를 손쉽게 격파했다.
그 경험 이후로 선제후들은 니오 용병대에겐 감세와 면제, 우선 통행권을 부가했다. 니오 용병대뿐만 아니라 당시 이름깨나 날리던 규모 있는 용병대는 이러한 특권을 얻었다.
“이미 그런 혜택을 보고 있는 이상 수운 이용 쪽에서 어떤 혜택을 보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오히려 운하 이용 요금을 배로 걷지나 않으면 다행이겠네요.”
면세 혜택이 있는 이상 육로를 이용하는 쪽이 가격 경쟁력 면에선 더 뛰어날 수도 있었다. 강을 통하면 보급을 위해 중계지에 멈춰야 했는데 그때마다 관세를 낸다면 터무니없는 금액이 나올 것이었다. 애초에 배를 이용할 수 있게 해 줄지 여부도 문제였지만.
“니오의 전선이 아니라 일반 조운선을 이용한다는 조건이라면 어떨까요?”
“압박은 좀 덜겠지만 니오의 깃발을 게양한다면 사람들이 곱게 볼 것 같진 않군요.”
“이거 진짜 골치 아픈데요.”
“지현 양이 말씀하신 사업 쪽과도 연관이 깊습니다. 니오 용병대야 혜택이 있다지만 보호해야 할 상인들까지 그 혜택이 적용되진 않습니다. 결국 니오 용병대에 보호비를 지불하고 통행세까지 내야 한다면 평범하게 소금길을 이용할 겁니다.”
“으으…….”
기존의 업계에 새로운 사업자가 뛰어든다면 마땅히 이용자에게 기존 사업자보다 많은 혜택을 제공해야 했다. 기존 사업자들이 갖춰 놓은 인프라를 뛰어넘기 위해 그 정도는 필요했다. 그 와중에 기존 사업자의 견제를 이겨 내야 하는 건 당연했다.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은 아니었다.
“감세 없는 소금길 통행세는 보통 얼마나 하나요?”
“그때그때 다릅니다. 인두세로 걷기도 하고 상인의 경우엔 지닌 상품 값어치에 비율로 부과하기도 합니다.”
“만약 우리가 가도를 피해서 최단 경로만 이용한다면 경쟁력이 있을까요?”
“흐음.”
가도란 핵심 도시들을 잇는 길이었다. 자연히 A도시와 B도시 사이의 최단 경로란 A와 B를 잇는 가도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만약 A에서 C로 가고자 할 때 B를 경유하지 않는다면-.
“아주 먼 거리를 움직일 때는 이점이 있겠습니다만, 순례자도 행상인도 그렇게 먼 거리를 단번에 움직이진 않습니다. 용병대도 말로 사흘거리 이상은 보급 문제 때문에라도 도시를 거쳐야 합니다.”
“이거 참 어렵네요.”
“바로 답이 나오는 문제는 아닐 테니 당연합니다. 회계사들에게 물어 보는 건 어떻습니까?”
“네?”
“그들도 나름 상단을 경영하던 이들 아닙니까? 그들에게 묻는다면 새로운 발상을 줄지도 모르지요.”
“과연. 그러네요. 한 번 물어는 봐야겠어요.”
지현은 법관과 인사하고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왔다. 회계사들은 한창 지현의 장부를 낱낱이 흩어서 살펴보고 있었다.
“크흠, 오셨습니까.”
“원래대로 정리해 주시고요, 다들 잘 살펴보셨어요?”
“예. 감사히도.”
“다행이네요. 여러분이 배울 게 많아요. 저도 배울 게 많고요.”
“재무관님께서 말씀이십니까?”
“누군들 배울 게 없겠어요?”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골치 아픈 문제가 생겨서 말이지요.”
“재무관님께 골치 아픈 문제라……. 그거 참 대사로군요.”
지현은 재무제표를 정리하고 회계사들에게 당면한 숙제를 말했다. 회계사들도 듣고 딱히 떠오른 게 없는지 잠시 고민했다.
“수운을 이용하는 건 저희로서도 답을 내리기 어렵습니다. 특히 류샤크 강을 이용한 수운은 북해와 이어져 있어서 헌츠 연맹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거기에 새롭게 진출한다는 건…….”
“헌츠 연맹이요? 하이틸란트 제국의 영토가 아니었나요?”
“아시다시피 제국은 거대한 자치 지역의 연합체이지 않습니까. 헌츠 연맹도 그런 존재입니다. 류샤크 강변과 북해 연안의 자유시들과 세속 영주들이 모여 결성한 거대한 수운 상인 연합이지요. 역사는 이제 겨우 반백 년 정도 됐지만 북해에 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습니다.”
“루발라의 상인들도 뱃사람으로 유명하지만 북해에서만큼은 기를 못 폅니다. 노턴브리아와 교역을 틀려고 우리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그놈들이 양모 수출을 채가서 고생했습니다.”
“자세히 좀 듣고 싶네요.”
상인들 사이에서나 유명하지 용병대는 신경도 쓰지 않던 집단이었다. 그러나 헌츠 연맹은 북해에서 지배적인 영향력을 가진 세력이었다.
그들은 연맹 선적의 함선에는 면세 혜택을 주고 소속 도시들에게는 무역 특혜를 주는 등 연맹 내 상업 활성화에 온 힘을 기울였다.
그들은 특혜 도시에 연맹 조합원이 거주하는 특구를 설치하고 치외법권으로 이용했다. 그럼에도 군주들은 특구를 유치했을 때 얻는 이익이 컸기에 러브콜을 날렸다.
“수운 무역도 대부분 이들의 손에 있습니다. 혹시 수운을 이용하고 싶으시다면 황제보다는 이들을 찾으시는 편이 나을 겁니다.”
“베겐도르프 시도 연맹의 일원일까요?”
“그렇진 않습니다. 베겐도르프 시는 지나치게 내륙에 있지요. 그들은 대체로 해안가나 류샤크 강 하류에 있습니다.”
“그렇군요.”
“청어나 대구 가격도 그쪽으로 가면 좀 더 싸집니다. 청어야 원체 어획량이 많아서 가격차가 크진 않지만 그래도 관세가 있고 없고의 차이 정도는 있으니까요.”
“좋은 정보였네요. 조만간 한 번 들러야겠어요.”
니오 본토와 니오 용병대를 연계하는 계획이 다시 떠올랐다. 니오 본토에선 또 크누트가 무역 활성화를 위해 노력 중이었다. 수십 가지 발상과 생각이 한 점으로 모여들었다. 지현의 뇌리에 벼락이 쳤다.
‘본토에 특혜 도시를 유치하고 화물선을 연맹 선적으로 돌릴 수만 있다면!’
하지만 언제? 당장은 무리였다. 훈련도 있고 찾아 봐야 할 것도 많았다.
더군다나 내륙 연결망을 만들려면 수운만으로는 무리였다. 강이 이어져 있지 않은 지역도 많았으니까.
‘하나씩. 한 번에 한 걸음씩 나가자.’
지현은 꼬인 실타래를 푸는 심정으로 먼저 할 수 있는 것부터 찾았다. 지현의 몸은 하나니까.
“아, 지현 재무관님?”
“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지현을 파올로가 불렀다. 파올로는 뒷머리를 긁적이다가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왜 그러시죠?”
“저기, 저, 좀 허황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자신 있게 말씀하세요, 파올로 씨. 우리 중 누구도 파올로 씨의 생각을 속단하지 않으니까요.”
“네, 감사합니다. 그 니오 용병대는 면세 혜택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그럼 꼭 상인들을 보호해서 같이 데려갈 필요가 있습니까?”
“예?”
“그러니까 상인들이 직접 움직이면 관세나 통행세가 나오지 않습니까? 하지만 니오 용병대는 그런 게 없으니까, 상품을 니오 용병대가 직접 옮기면 상품에 관세가 안 붙을 거 아닙니까?”
“아, 아!”
지현이 화들짝 놀랐다. ‘용병’이라는 직종에 집중한 나머지 지현이 빼먹었던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상인들이 상품과 목적지의 상인에게 전하는 편지 한두 장만 써서 함께 보낸다면 사람이 움직일 필요 없이 상품만 니오 용병대를 따라 움직이니까 상인들은 시간도 절약하고 상품의 안전도 보장 받아서 좋고, 그, 목적지에 받아 줄 사람이 있을 때의 이야기지만…….”
파올로의 제안은 니오 용병대가 상인을 호위하는 용병의 역할에서 벗어나 상품을 직접 배송하는 집배원의 역할까지 겸하자는 것이었다. 지현은 그런 발상에 깜짝 놀랐다. 오히려 파올로가 지현보다 더 먼저 사고의 틀을 깼으니 말이다.
“훌륭해요!”
“네, 네?”
“정말 훌륭한 생각이었어요! 상품도 안전하게 보낼 수 있고 세금도 없거나 적어요! 정말 윈윈이에요! 아, 영주들이 싫어할 테니까 그쪽에 할 말도 준비해야겠네요.”
“정말, 그렇습니다. 파올로 군, 훌륭하군!”
“파올로 씨한테는 인센티브가 나갈 거예요. 만약 우리가 인력만 충분했으면 파올로 씨를 필두로 사업팀을 꾸리라고 했을 거예요.”
“그, 그 말씀은?”
“아, 하지만 우린 지금 회계사가 더 필요해요. 부하 직원의 아이디어를 뺏는 것 같아서 미안하지만, 이 건은 제가 직접 계획을 짜서 집행할 거예요.”
“예? 잘은 모르겠지만 알겠습니다.”
의욕적으로 펜을 잡는 순간 지현은 깨달았다. ‘아, 이건 죽을지도 모르겠는데.’라는 사실을.
용병대가 화물 배송을 맡으면 그만큼 상인들의 왕래가 줄어들 것이다. 관세라도 붙인다면 모를까 니오 용병대는 면세 혜택이 있으니 관세 수익도 줄어든다.
물론 한 번에 움직이는 물동량에 제한이 뚜렷한 만큼 전체 세액에 비해 낮은 비중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파이를 잘라 먹는 경쟁자는 눈엣가시이기 마련이었다.
니오 용병대를 향한 규탄과 성토는 기본이고 정치 수단을 동원한 압박도 예상할 수 있었다. 최악의 경우에는 니오 용병대를 상대로 한 세제 혜택을 전면 철폐하는 수도 있었다. 사업 추진 전에 협상이 우선돼야 했다. 이것만 하더라도 보통 일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니오 용병대는 대륙 전체를 대상으로 장사한다. 본부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부대는 아예 다른 나라에 위치했다. 그렇다면 중간에 통과해야 할 영지는 하이틸란트만 생각해서 될 문제가 아니었다.
“일단은, 하이틸란트 안에서만 시범적으로 도입해 보도록 하지요.”
지현은 목표를 축소했다. 그럼에도 여전히 어마어마한 수의 영지가 있었다. 돌파구라면 그들 나름대로 명령 체계가 잡혀 있다는 것 정도일까.
지현은 각 영주 개인과 협상하는 게 아니라 그들을 통솔하는 상위 영주들을 생각했다. 이 부분은 정보가 좀 더 많이 필요했다.
‘사업 준비하는 데만 몇 달 걸리겠는데 이거.’
수십 장의 편지가 오가고 지현이 직접 찾아가서 협상을 주도할 필요도 있었다. 아이디어는 아이디어로 존재할 때만 솔깃했다. 실무가 되는 순간 지현은 무겁게 가라앉았다.
정말 좋은 생각이긴 했다. 꼭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 용병대의 수익을 안정화하는 작업이었으니까. 단지 인력이 부족할 뿐이었다.
‘전체 재정 점검하고, 신입 교육하고, 사업 준비를 하면서, 어쩌구 연맹이랑 협상하면서 또 본토에서 쏟아질 문제까지 처리…….’
우선순위를 따져 가면서 일을 하자니 하나하나 중요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 더군다나 본토 쪽은 크누트가 엮여 있어서 어떻게 빼는 것도 힘들었다. 그나마 가장 우선순위가 낮은 게 바로 신규 사업이었다.
“자, 그럼 다들 다시 시작할까요.”
지현은 사업 계획은 잠시 미루고 회계사들을 가르쳤다. 상업 부문은 이들에게 맡긴다는 생각도 해 봤지만, 니오 용병대에 정착할 사람들도 아니고 각자 자기 상회가 있는 이들이었다.
지현 본인이야 집도 절도 없어 어디 떠나거나 용병대에 해코지도 못 하는 입장이었다지만 이들은 다르다. 이들은 기반이 단단한데다 유능하고 똑똑했다.
이들은 마음먹기에 따라선 용병대를 결딴낼 수도 있었다. 회계 업무만 맡긴다면 지현이 감시할 테지만, 그런 만큼 지현의 수비 범위를 벗어나는 일까지 맡길 순 없었다.
회계사들을 가르치며 일과를 끝낸 지현은 사업 계획의 아이디어만 갖고 간부들을 찾았다. 법관과 하인리히, 힐다가 지현의 소집에 응했다. 다른 간부들은 저마다 일이 있어 참석하지 못했다.
“오후에 말씀하셨던 그 사업 말씀이십니까? 각 지부를 잇는 물류 사업 건의.”
“그거랑은 다른 거예요. 발데마르 씨가 말씀했던 수운 이용 건이요.”
“아, 그거라면 내가 건의했어요. 아무래도 역시 항구부터 말 타고 오는 것보단 배를 이용하는 편이 빠르니까요.”
“듣자 하니 니오 본토와 여기 용병대 본부를 잇는 주요 해로를 차지하고 있는 집단이 있다면서요? 이름이 헌츠 연맹이었던가?”
“그렇습니다. 그들이 북해 항로에서 거의 독점적인 권리를 누리고 있지요. 본토로부터 하이틸란트에 들어오려면 반드시 그들의 항구 도시를 지나야 합니다.”
“거의 독점적이라는 말은 경쟁 상대가 있다는 뜻이겠네요. 니오도 그런가요?”
“그런 편입니다. 헌츠 연맹은 노턴브리아에 청어를 독점 공급하며 많은 혜택을 보고 있는데 청어가 원체 변덕이 심한 물고기인지라 청어 어장을 두고 충돌이 잦습니다.”
“청어 어장의 위치랑 어획량은 시시때때로 바뀌거든요. 한평생 바다만 보던 어부들도 엇차 하면 작년에 있던 어장이 사라지고 없을 때가 있어요.”
“청어 수출은 니오에도 중요한 산업입니다. 연근해 어장이라면 모를까 북해 곳곳에서 어장을 두고 갈등이 벌어졌지요.”
“니오뿐만 아니라 골플란트도 헌츠 연맹의 강대한 호적수입니다. 사실상 헌츠 연맹이 탄생한 이유도 골플란트 백작령 때문이었지요.”
“문제가 많이 복잡하네요. 일단 좀 정리해 볼게요.”
지현의 세계에서 두 개의 거대한 기업이 같은 분야로 시장 점유율을 놓고 싸우더라도 상대가 생산하는 부품을 자사의 제품에 넣는 일은 흔했다. 청어 잡이를 두고 다투는 두 세력도 다른 분야에서 합의를 도출할 수 있을지 몰랐다.
“일단 헌츠 연맹의 영향력이 어디까지 미쳐 있는지 알아야 해요. 혹시 아시는 분?”
“서쪽으로는 일단 노턴브리아도 그들의 영향권에 있습니다. 동쪽으로는 라시친의 일부 도시도 그들과 닿아 있다고 들었습니다.”
“라시친이면 니오랑도 연관이 깊어요. 거기 우리 친척들이 많이 살거든요. 아마 지금 그 동네 왕도 니오에서 넘어간 사람 후손이었지?”
“몇몇 가문은 아직 서로 연락하는 모양이더군요. 지금 이주해서 그쪽에 정착하는 사람도 꽤 있고.”
“발데마르 대장네 아버지 가문이 그런 쪽이었어요. 증조부 때 넘어갔다 조부 때 니오로 돌아온.”
“약속의 군단도 원래 그쪽에 정착한 니오인들로 구성됐다고 합니다. 중간부턴 본토인으로 많이 대체됐지만.”
지현은 종이 위에 선을 죽죽 그어 간이 지도를 만들었다. 힐다의 설명에 따르면 라시친을 관통하는 루트는 니오의 주요 무역로이기도 했다.
“그렇게 친하다면 무역에서 이점을 발휘할 수도 있겠는데요?”
“그러면 좋겠는데, 거기 사람들 뼛속까지 장사치라 만만치 않아요. 인심 같은 게 없거든요. 그 동네는 우리랑 기질도 다른지 무훈시의 주인공이 전사가 아니라 상인이에요.”
“더군다나 다른 문제도 있습니다.”
하인리히가 첨언한 더 큰 문제는 불과 몇십 년 전, 시기로 따지면 하이틸란트의 대공위 시대가 끝나고 거의 직후에 동쪽에서 온 외적의 침입을 받아 지역 자체가 초토화 당했다는 것이었다. 그 지역에서 가장 크고 무역을 주도하는 공국이었던 키푸스도 그때 망해 버렸다.
안 그래도 그 이전부터 무역이 점차 쇠퇴하고 있었는데 이 전쟁으로 남북을 잇던 무역로는 완전히 결딴나 버렸다. 니오인들도 키푸스를 통해 철해라 불리는 내해를 항해하는 무역로를 이용해 왔는데 키푸스가 망하며 그 루트가 끊긴 것이다.
지현에게도 안 좋은 소식이었다. 키푸스가 무사했다면 그곳을 관통하는 무역로는 헌츠 연맹과 협상에 중요한 수단이었을 것이었다.
“그럼 지금 연락이 닿는 건 아주 작은 소국들이거나, 그보다 더 작은 마을 단위 농촌이겠네요.”
“살아남은 국가도 있습니다. 현재 주로 연락이 닿는 곳은 우스트고로드 공화국입니다. 그리고 보다 남쪽으로 유목 민족의 위성국이나 다름없지만 바실리 공국도 남아 있습니다.”
“그럼 그 나라는 주로 뭘 해서 사나요? 그보다 그 사람들과 무역하는 게 경쟁력이 있나요?”
“물론입니다. 세력이 줄긴 했지만 조금씩 과거의 무역로를 재건하고 있습니다. 특히 수운을 통해 일레디온 제국과 최단거리로 연결되는 중요한 국가입니다.”
지현은 갑자기 너무 많은 정보가 들어와 어지러워지는 머리를 억지로 돌려놓았다. 일단 확실한 건 니오와 헌츠는 경쟁 관계이고 두 집단과 공통의 무역 대상이 있다는 것이었다. 아직 이름만 나온 노턴브리아까지 포함해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정말 이곳에서 지긋지긋하게 많이 들었던 그 나라의 이름이 또 나왔다. 일레디온. 대체 뭐 하는 나라인지 끼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 무역 루트는 유목민의 침공으로 망실했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망실했지만 재건했습니다.”
“처음부터 그것만 말씀하셨으면 됐잖아요! 이 장황한 얘기가 대체 무슨 소용이에요! 요점만 정확하게! 말이 샛길로 새지 않도록!”
“어, 알겠어요. 진정해요.”
“그럼 이 사람들 뭘 수출하고 수입하는지 알아요?”
“수출은 압니다. 우리와 똑같은 걸 수출합니다.”
“추운 북쪽 동네 살면서 구할 건 거기서 거기인 거죠.”
“그게, 뭔지만, 말씀해 주세요.”
“꿀, 밀랍, 가죽, 호박입니다. 사냥해서 얻을 수 있는 건 다 수출한다고 보시면 됩니다. 호박은 사치품으로 인기가 많습니다. 그 이외에는 남쪽과 동쪽에서 산 물건을 대륙 북부로 중계 무역합니다.”
지현은 지도 한편에 작게 꿀, 밀랍, 가죽, 호박이라고 썼다. 니오와 수출품이 겹쳐 버린다면 꽤나 골치 아픈 문제였다. 니오에서 저쪽으로 수출하기 어렵다는 뜻이니까.
그리고 그 말은 라시친 지역을 상대로 한 헌츠 연맹과 무역 경쟁에서 경쟁력을 지닌 카드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따라서 헌츠 연맹과 협상할 카드도 없었다.
“주로 수입하는 건요?”
“일단 공산품을 전반적으로 수입합니다. 그 이외에는 맥주를 많이 수입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식량을 많이 수입합니다. 청어도 주 수입 품목입니다.”
‘공산품, 맥주. 청어?’
“청어는 빠지는 곳이 없네요. 이곳 사람들은 청어만 먹고 살아요?”
“원체 많이 나오고 또 버릴 게 없는 녀석들이다 보니……. 괜히 별명이 바다의 밀이 아니에요. 우리야 좋아하기도 하지만 살려고 먹는 동네가 더 많아요. 교단에서도 먹으라고 권장할 정도거든요.”
“아무튼 알겠어요. 청어도 있단 말이죠.”
청어를 제외하면 나머지 둘은 니오에서 생산이 어려운 품목이었다. 공산품이라면 크누트와 상의해서 어떻게든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하이틸란트의 물량을 이길 수는 없었다. 제품의 품질도 장담하기 어려웠고.
“니오에 혹시 겹치지 않는 수출품은 없을까요? 진짜 중요해요 이건. 물론 애초에 그런 게 있었으면 여러분이 여기서 목숨 걸고 싸우지 않아도 됐겠지만, 혹시 모르잖아요. 여태 발견하지 못했던 걸 찾아낸다면 용병으로 국가를 부양한다는 그런 일은 없어질 수도 있어요.”
지현의 모습에 힐다와 하인리히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완전한 외지인인 지현이 저토록 절박한 모습을 보여 준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리고 가슴이 동했다.
“잠깐만 기다려 봐요.”
힐다가 갑자기 방을 박차고 나갔다. 정말로 잠깐 뒤에 힐다는 십수 명의 사람을 이끌고 돌아왔다.
어찌나 급하게 뛰었는지 힐다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사람들을 지현에게 소개했다. 본토에 있을 때 어떤 형태로든 외국과 접점이 있던 이들을 모은 것이다.
“당장 올 수 있는 녀석들은 이 정도고 찾아보면 더 있어요. 이 녀석들한테 물어보면 좀 더 정확한 걸 알 수 있을 테니까……. 적어도 나보단 나을 거예요.”
“힐다 씨, 고마워요.”
그런 힐다의 모습에 지현이 고개를 푹 숙여 인사했다. 힐다의 지시에 영문도 모르고 끌려 나온 이들이었지만 이내 상황을 파악하고 둥글게 모여서 난상토의를 시작했다.
많은 아이디어가 쏟아졌다. 귀족들의 사치품인 사냥용 매를 훈련시켜서 파는 것도 수익이 꽤 짭짤한 사업이었으니 그걸 확대하자는 이야기부터, 북쪽으로 하염없이 항해하면 나오는 사시사철 눈 덮인 섬에서 바다코끼리를 사냥해 그 상아를 잘라서 팔자는 이야기까지.
전자는 수요가 국가 간의 무역에 쓸 만큼 크지 않아 소용이 없었다. 후자는 야생 동물의 남획을 우려한 지현이 반려했다.
그리고 번갈아 저녁 식사를 하면서까지 토의를 계속한 끝에 마침내 가장 귀중한 정보를 찾아냈다. 니오에 많으면서 누구나 원하고 협상에 있어서는 와일드카드로서 작동할 수 있는 그런 상품의 정보를.
그런 편리한 게 세상에 어디 있겠나 싶었는데 의외로 있었다. 그리고 그 배후엔 크누트가 있었다.
철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가치 높은 전략 자원이자 온갖 공산품의 필수 재료인 철.
크누트가 철광을 개발하려는 건 지현도 알았지만 설마 이미 찾아냈을 줄은 몰랐다. 그 소식을 전한 건 얼마 전 광산 책임자로 발령받은 부모로부터 편지를 받은 병사였다.
크누트가 일단의 무리를 이끌고 사람이 살지 않는 먼 북쪽의 험지로 향하더니 노천광을 찾아냈다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막대한 규모의 광맥을.
눈과 흙만 걷어 내면 바로 철광석이 흘러나왔다. 지금까지 해안과 호수의 퇴적물을 녹여 간신히 몇백 그램씩 철을 얻어내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막대한 양의 철이 니오에서 흘러나오게 됐다. 모두들 왕의 기적이라며 크누트에게 찬사를 보내기 바빴다.
물론 광석을 캐려면 광산을 만들어야 했고 철을 만들려면 제철소를 짓고 마을을 형성하는 등, 바쁘고 골치 아픈 일이 될 것이었다. 광산이 꽤나 북쪽에 위치해서 사람이 살기 어려운 등 많은 문제가 있었다.
그럼에도 광산을 찾아낸 건 대단한 쾌거였다. 모든 산업이 원래 시작은 어려운 법이니까.
‘대체 크누트 씨는 그걸 어떻게 찾아낸 거지?’
크누트는 밑도 끝도 없이 자본만 투입하려는 게 아니었다. 그도 나름 믿는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지현은 크누트에 대한 생각을 고쳤다. 하지만 대체 무슨 수로 해낸 건지는 여전히 의문이었다.
‘이 무한한 우주 어디를 가건 붓다와 예수는 나온다니까. 항상 같은 시기 같은 장소에서 나타나지.’
문득 지현은 크누트가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무한한 우주 어디서든, 같은 장소…….
세세한 디테일은 다르지만 더 거시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예를 들어 행성의 형태나 구조 따위를 본다면 어쩌면 지현이 살던 세계와 크누트가 살던 세계, 지금 이곳 모두 거기서 거기처럼 생겼을지도 모른다.
일단 지현이 숨을 쉴 수 있고 낮과 밤의 길이도 비슷하며 기온도 거의 같다는 점에서 그런 가설은 더욱 힘을 얻었다. 크누트가 단번에 노천광을 찾은 것도 같은 이치로 이해할 수 있었다.
지현은 역사를 잘 알지 못했다. 경제사를 조금 배우긴 했지만 굉장히 오래 전이고 전공과 관련도 적어서 대부분 기억에서 지웠다. 하지만 일부분 아직도 기억하는 건 있었다.
‘어쩌면 이 세계에도…….’
자신의 고향과 같은 나라가, 그 나라의 역사가 이곳에도 있을 수 있었다. 그 주변국들도. 역사의 세세한 부분은 다르지만 어쨌든 지현의 세계에 있던 건 이곳에도 있을 수 있다는 얘기였다.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닮아 있을지도.’
그것도 이용할 수 있을지 몰랐다. 지현은 일단 자기 세계의 역사를 생각나는 대로 정리하고 그중 쓸 수 있는 걸 추려 낼 계획을 세웠다. 만일 자신의 생각이 옳다면 크누트처럼 아직 발견되지 않은 자원을 찾아서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지현 양?”
“아, 죄송해요. 생각을 좀 했어요. 철이 그렇게 많다면 확실히 유용하겠어요. 생산량이 얼마나 될지 혹시 아시나요?”
“감히 말을 못하겠습니다. 아버지 말씀으로는 백 년을 파내도 더 파낼 수 있을 만큼 광활한 규모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토양이 원체 척박하고 또 철광이라는 게 캐내기만 하면 전부가 아니잖습니까. 채굴하는 거야 노천광이라 좀 쉽다 치더라도 그걸 제련하는 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가족 중에 제련 관련 업종에 종사하시는 분이 있는 사람 없나요? 리하르트 씨는?”
“리하르트 병장이라면 목욕 중입니다. 불러 올까요?”
“다른 분들은요?”
“제 어머님이 대장장이십니다.”
“저도 아버지께선 야금장이…….”
사람이 모이니 정보도 모였다. 지현은 파편화된 자료를 모아서 현재 니오의 상황을 재구성할 수 있었다.
우선 크누트는 아주 의욕적으로 광산 개발을 추진 중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사람을 모아 광산으로 보내려는 등 도시 건설을 계획하는 건 물론 거기서 완성한 철을 수도의 대장간 – 사실상 수공업 공장으로 운반하기 위한 도로도 만드는 중이었다.
하지만 도로는 이제 착공했고 도시는 아직도 설계 중이었다. 지금까지 분명한 건 철광산을 찾았다는 것 하나뿐이었다.
거기에 사람을 거주시키려면 막대한 식량과 생필품을 공급해야 했다. 광산은 농사를 전혀 지을 수 없는 척박한 북쪽에 위치하기에 도시의 생존은 오직 외부의 지원으로 이뤄질 것이었다. 그러려면 인력을 엄청나게 투입하든가, 도로를 먼저 완성해야 했다.
크누트는 먼저 사람을 보내서 철부터 캐면서 도시를 지을 심산이었다. 도로도 우선은 인력으로 도시에 생필품을 공급하면서 동시에 건설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지현은 크누트가 너무 조급한 건 아닌지 걱정됐다.
“아무튼 니오의 경제 사정이 좀 나아지긴 하겠어요. 광부에 대장장이에 운송업까지. 일자리 창출은 확실하네요. 그런데 그 새로운 광산에서 수도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죠?”
“편지 받았던 사람 누구였지?”
“접니다. 최대한 도로를 이용해 북상한 다음 야지를 달리면 수도부터 나흘 거리라고 했습니다.”
“그건 기병 기준인가요?”
“승마와 수레를 이용한 속도입니다. 걷는 것보다야 빠르겠지만 기병만 모은 것보단 느립니다.”
“그렇군요. 아주 중요한 자료였어요. 고마워요.”
‘아무래도 좀 더 정확한 계획이 필요해. 자료도. 본토에 편지를 보내야겠다.’
협상에 쓰려면 철광석의 품질과 산출량, 철의 생산량을 각각 알아내야 했다. 물론 여기서도 이런저런 정보를 많이 들었지만 보다 엄밀한 자료가 필요했다.
“오늘은 이 정도면 충분하겠어요. 다행히 우리에게 협상 수단이 있었네요. 나머진 자료를 모아서 헌츠 연맹을 협상 테이블에 앉히면 되겠어요.”
일과 업무를 처리하고 나서도 쉬지 않고 저녁 늦게까지 토의를 계속했더니 피로가 몰려왔다. 지현은 하인리히에게 오늘 훈련은 빠지겠다고 통보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지현은 할 일은 많은데 왜 몸은 하나인지 탄식하며 그대로 잠에 빠졌다. 마치 침대가 몸을 빨아들이는 기분이었다.
* * *
“프랑켄도르프 백작의 답신입니다. 그리고 람부르크 백작 부인께서도 편지를 보내셨습니다.”
“좋은 소식이면 좋겠는데.”
지현은 편지의 봉인을 뜯고 프랑켄도르프 백작의 편지부터 펼쳤다. 당장 훈련이 모레인지라 여기에 안 좋은 소식이 담겨 있다면 훈련 일정이 다 틀어질 것이었다.
“재무관님?”
“다행이에요. 백작님이 수락했어요.”
지현이 프랑켄도르프 백작에게 요청한 건 대단한 일이 아니었다. 사냥과 벌목의 권리를 조금 더 저렴하게 주는 대신 니오 제식 갑주의 우선 구매권을 일정량 주기로 한 것이다.
역시 니오 용병대 본부와 가장 가까이 있는 귀족답게 정보가 빨랐다. 용병들이 베겐도르프 시나 인근 마을에 지나가듯 흘리는 소문도 꼼꼼히 확보하는 건지 제식 갑주의 정보를 빠르게 잡아냈다.
매달 최대 서른 벌로 대단한 양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주문하면 먼저 공급받을 권리를 따냈다. 솔직히 지현은 갑주 시장이 얼마나 커질지 몰랐기에 팔수만 있다면 좋았지만 생각 이상으로 니오라는 브랜드가 하이틸란트에 강하게 먹히는 것일지도 몰랐다.
“어쩌면 없어서 못 팔지도 모르겠어요.”
“그건 좋은 소식이군요.”
“그러게요. 그리고 어디 야드가르 씨는…….”
다음 편지는 더 좋은 내용이었다. 야드가르가 람부르크 영지 곳곳의 창고에서 견과류를 더 저렴하게 공급해 주기로 한 것이다. 거의 가을걷이철 수준의 가격으로 도시 시세보다 3분의 1 정도밖에 안 되는 수준이었다. 개중에는 호두나 개암보다 배는 비싼 아몬드도 섞어서 준다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편지 말미에는 게다가 계약이 끝나고 복귀하는 날까지 철저하게 치안을 다잡고 여남은 기사의 저항까지 봉쇄해 준 것에 대한 감사 인사가 담겨 있었다.
그리고 추신으로 ‘친애와 우정을 담아서’라는 문구를 달았다. 만난 시간은 짧지만 그때 나눈 대화가 움직인 마음의 거리는 길었다.
“훈련 관련은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네요. 그나저나 아디슬 씨, 지금까지 집행된 예산은요?”
“훈련비용으로 책정된 예산의 1할 정도가 선금으로 사용됐습니다. 계약서 내용대로라면 어…….”
아디슬은 서류에 파묻혀 있었다. 여기저기서 날아온 편지, 계약서, 증서들이 그의 앞에 쌓여 있었다. 그는 그걸 하나하나 살피고 정리하고 옮겨 적는 등 업무 지옥에 빠져 있었다.
지현이 그를 키우기로 작정했기에 생긴 일이었다. 이제 아디슬은 지현의 업무를 보좌하는 정도가 아니라 지현과 업무를 양분했다.
“찾았습니다. 람부르크 백작 부인께서 보내 주신 편지 내용까지 합해서 생각하면 원래 책정한 8할 정도로 마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견과류 단가를 낮춘 게 제일 컸습니다.”
“훌륭해요. 더 낮출 수도 있겠어요. 방금 프랑켄도르프 백작으로부터 확답을 받았거든요.”
“눼에에에에.”
마치 바람이 빠지는 풍선처럼 아디슬의 입에서 힘없는 대답이 새어나왔다. 아디슬은 지현으로부터 편지를 넘겨받고 내용을 살핀 후 노트에 옮겨 적었다.
“장부 기입하는 거 빼먹지 마시고요.”
“알겠슙니다아아.”
“힘!”
“넵!”
아디슬은 뺨을 세차게 때려 정신을 찾고 다시 서류를 정리했다. 그사이 지현은 회계사들이 작성하고 있는 세베리 부대의 포괄손익계산서를 함께 살폈다.
세 회계사들은 한 치의 실수도 없이 깔끔하게 재무제표를 작성했다. 처음에는 신병의 갑주를 사 주는 니오 용병대의 전통을 잘못 이해해서 비용을 어느 계정에 넣어야 할지 허둥거린 적도 있지만 지현이 몇 가지만 지적해 주자 곧바로 적응해서 재무제표 작성에도 막힘이 없었다.
‘이쪽은 진짜 손이 덜 가네. 신병들도 이렇게 이해했으면 좋았을 텐데.’
원래 업계에서 수십 년씩 경력을 쌓은 사람과 업계 경력은 고사하고 관련 직종 기초 교육도 안 받은 사람을 비교하는 건 어리석은 짓인 줄 알지만 그럼에도 마음으로 바라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각 부대로 보낸 행정병들은 이렇게 재무제표를 작성하는 건 고사하고 회계 장부를 틀리지 않게 작성하면 고마운 수준이었다. 기초도 없는 사람에게 실무만 가르치고 보냈지 않았는가. 그마저도 고작 한 달 조금 안 되는 직무 교육이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아디슬 씨는 잘하고 있는 거지. 후우우.’
다른 부대 행정병들과 동기지만 지현 바로 옆에서 일하다 보니 첫 제자이자 보좌관이자 후임이었기에 지현은 아디슬에겐 남다른 애착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더 잘 키워 주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다.
지현 혼자만의 욕심이라면 민폐겠지만 힘들어 하면서도 배우고 싶다는 욕망이 왕성한 아디슬의 모습에 지현도 절로 업무를 맡겼다. 그 결과 초죽음 상태가 하나에서 둘로 늘어났다.
“훈련 보상비 이외에 우수 백부대에 성과급을 지불하자는 제안을 발데마르 씨에게 전했는데 백부장 분들의 의견을 들어야 해요. 이쪽 안건이 통과되면 추가 예산 넣고 예산안 조정해야 해요.”
“네? 그냥 기본 예산안의 잔금으로 퉁치면 안 됩니까?”
“아디슬 씨. 재무 관련 업무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했지요?”
“무엇보다 철저하고 엄밀해야 한다고 하셨죠. 알겠습니다.”
“하하하. 재무관님은 상인이 아니라 깐깐한 행정관 같으십니다.”
“실제로 상인은 아니거든요. 그렇다고 행정관인 것도 아니지만.”
“이거, 실례했습니다. 허허.”
네로는 넉살 좋게 웃고는 다시 업무에 집중했다. 그렇게 다섯 사람 모두 일하는 와중에 누군가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세요.”
“지현 양, 베겐도르프 시에서 편지 왔어요.”
“힐다 씨. 어쩐 일로 직접 왔어요?”
“오면 안 될 건 없죠?”
“물론이죠. 그냥 좀 놀라서요. 바쁠 텐데…….”
회계팀이 바쁜 만큼 훈련에 들어가야 하는 백부장들 역시 훈련을 준비하랴, 부하들 챙기랴 정신이 없었다. 하인리히는 아예 며칠 전부터 얼굴도 못 마주칠 정도였다.
“이번 건 지현 양이 부탁했던 거예요. 내가 직접 확인했으니 걱정할 것도 없어요.”
“아, 그럼 원래 계획대로 가도 되는 건가요?”
“네. 시행할 녀석들도 다 찾아 놨고. 지현 양이 특별 수당까지 챙겨 준다고 했더니 실력도 안 되는 녀석들까지 하겠다고 나서서 선별하느라 고생했어요.”
“의욕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에요. 직접 보니 어땠어요?”
“실한 놈들로 골랐어요. 내가 직접 표식을 남겨 놨으니까 사기 칠 염려도 없어요. 혹시라도 우리한테 사기 치면 도시에선 장사 다 한 거죠 뭐.”
“힐다 씨도 참 바쁜 와중에 열심이세요. 고마워요.”
“이 정도로 뭘, 헤헤. 다 우리 좋겠다고 하는 일인데요. 그럼 나중에 봐요.”
힐다가 떠나고 지현은 편지를 확인했다. 훈련 중 신선육을 보급하기 위해 특별히 세운 계획이었다. 이것까지 잘 돌아가는 걸 보니 이번 훈련에서 지현이 계획한 건 모두 잘 풀린 셈이었다.
‘어디 보자, 38 곱하기 9 하면 342제니니까…….’
“아디슬 씨, 여기 편지 확인하시고 도시로 보낼 현금을 출납해 주세요. 에이자 씨, 손이 비는 전령을 불러 주시겠어요?”
“넵.”
아디슬은 지현이 준 편지를 읽고 금고에서 은화와 동전을 꺼냈다. 그사이 에이자가 전령을 데리고 왔고 지현은 그에게 현금을 맡기며 몇 가지를 지시했다. 특히 인장 찍힌 영수증을 필수로 받아 오라고 당부했다.
“고기값이 저렇게 쌀 줄은 몰랐습니다.”
“그러게요. 다행인 일이지요.”
“훈련 중에 신선육이라니, 상상도 못했습니다. 대장님이 허가해 주신 것도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발데마르 씨가요? 왜요?”
“대장님은 전장의 변화에도 민감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훈련 중에는 보급로 차단 상황을 가정한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지옥 강습 훈련에선 체력 저하가 죽음으로 이어질 수도 있어서 먹는 건 많이 먹게 해 주시지만…….”
연간 두 차례 있는 훈련은 최고 강도의 훈련이지 최악의 훈련은 아니었다. 최악의 훈련은 굶주리고 갈증에 시달리며 어떻게든 스스로 보급을 확보하는 훈련이었다.
열매를 따고 나무껍질을 벗기고 풀뿌리까지 뽑아 먹는다. 운이 좋으면 산짐승을 사냥할 테지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 모든 행위를 저항군 역할을 맡은 전우들이 방해하니까.
이 훈련은 이름조차 붙이질 않았다. 훈련을 받는 병사들이 이름을 부르는 것마저 꺼려해서 그렇다.
“많이 먹는 게 잘 먹는 건 아니잖습니까.”
“천만에요. 신선육을 보급하는 건 발데마르 씨도 가능하다면 하고 싶어 했어요. 아무튼 직원 생각은 각별한 분이니까요.”
“그렇습니까. 역시 대장님이십니다.”
“좀 더 좋아하라고요.”
“물론 좋습니다. 아하하.”
아디슬 역시 훈련 기간에는 회계팀에서 빠져 훈련에 나가야 했다. 본부 병력 중 누구 하나도 빠질 수 없는 훈련이었다. 예외는 없었다.
지현의 사환 겸 경호 역할을 하는 에이자와 폴카도 이 기간만큼은 빠졌다. 그동안은 각 백부대에서 차출된 인원들이 돌아가며 지현의 경호를 맡았다.
그러다 보니 아디슬은 훈련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점점 더 해쓱해지는 느낌이었다. 발데마르와 아드니의 배려로 훈련 준비에서는 빠졌지만 회계 교육과 업무로 쉬질 못 했다.
“아디슬 씨, 내일은 휴가 드릴 테니까 푹 쉬면서 체력 좀 채우세요. 이대로 일하다 훈련 나가면 쓰러질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그래도 이쪽 업무는…….”
“며칠 정도는 혼자서도 할 수 있어요. 이젠 혼자도 아니고 회계사들도 있으니 걱정 말고요.”
* * *
훈련 당일, 새벽같이 네 개 백인대 400여 명이 본부를 빠져나갔다. 순식간에 본부가 텅 비어 버렸다.
지현은 본채를 돌아다녀도 마주치는 사람이 거의 없는 상황에 적잖이 당황했다. 미리 알고 있어도 피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본채가 이렇게 컸던가.’
식당까지 가는 길이 유난히 먼 기분이었다. 식당에도 사람은 열 명 남짓밖에 없었다.
“지현 재무관님. 식사하러 오셨습니까?”
“아디슬 씨. 푹 쉬고 있나요?”
“넵. 여러 간부님들이 배려해 주신 덕분에.”
아디슬이 소속된 아드니 백부대는 3주차에 훈련 돌입이었기에 본부에 남았다. 이렇게 훈련도, 훈련 보조도 아닌 두 개 백부대가 돌아가며 각 주차마다 본부의 유지와 경비를 맡았다.
하지만 그런 병사들의 상황과 관계없이 지현의 일은 계속됐다. 지현은 본토의 크누트에게 편지를 보내 현 상황과 정보를 요청했고 각 지부 부대에게 각 부대를 연결하는 주요 도로의 자세한 지리와 인근 대영주들의 관계 자료를 요구했다.
베겐도르프 시의 상인 조합에게는 헌츠 연맹의 정보를 수배했다. 그리고 제국 은행을 통해 용병대의 도로 및 관문 이용과 물류 산업이 하이틸란트 경제에 미칠 영향을 평가해 달라고 부탁했다.
모든 문제가 각각의 것이 아닌, 하나로 모여들어 얽혔다. 풀기 위해서는 동시에 힘을 낼 수밖에 없었다.
라시친 지역의 공국과 공화국은 현재 헌츠 연맹과 무역을 거의 독점했다. 니오와 무역이 끊긴 건 아니지만 물동량을 비교하면 달과 태양만큼 차이가 컸다.
니오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서는 역시 대외 무역을 키워야 했다. 하나의 방법은 헌츠 연맹과 협상을 진행하면서 철 수출을 카드로 라시친 지역, 노턴브리아 지역의 무역량을 일정 부분 양보 받는 것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방법이 있었다.
‘근데 이건 크누트 씨가 싫어할 것 같고…….’
고민이 많은 지현이었다.
“그러고 보니 재무관님, 훈련이 끝날 무렵이면 본토에서 신형 갑주의 초도 물량이 오는 거 아닙니까?”
“아, 그러네요. 두 달 걸린다고 했고 그게 벌써 한 달 전이니.”
“완전 무장 한 세트당 가격은 정하셨습니까?”
“수녀님들한테 팔 때는 2천 제니로 책정했지요. 용병대에 판매할 때는 1,500제니 정도가 적절할 거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하면 외부에 한 벌 판매하면 나는 이익이 으음, 내부에 두 벌 팔았을 때 생기는 손실을 벌충할 수 있군요.”
“계산이 많이 빨라졌네요.”
“재무관님 밑에 있자니 자연히 됐습니다.”
“사실은 좀 더 엄밀하게 가격을 책정할 필요가 있어요. 대외 판매가도 좀 더 높일 필요가 있더라고요. 지금 갑옷 시장을 생각하니까.”
“품질은 직접 받아 봐야 알겠지만 발데마르 대장님께서 받은 갑주를 기준으로 생각한다면 지금보다 한참 높은 가격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건 정말 명품 갑주였으니.”
“다른 제품들 품질도 다 그 정도였으면 좋겠지만 사실 그건 어려워요. 아무리 열심히 만들어도 불량이 나오기 마련이니.”
“그건 본토 대장장이들이 알아서 처리해 주지 않겠습니까?”
“그쪽에서 눈치채지 못하고 넘어오는 것도 있겠지요. 사실 그런 한두 벌 불량보다 걱정되는 건 전반적인 품질이에요. 사람이 수작업으로 만들어야 하는데 일정한 품질을 유지할 수 있을지…….”
“장인들을 믿어 보십쇼.”
“그래야지요.”
지현은 아무래도 갑주를 많이 아는 용병들과, 직접 상업을 행하고 시장을 돌아다녔던 회계사들을 모아 함께 상의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 그럼 오늘도 열심히 해 볼까.’
지현은 사무실로 들어가며 마음속으로 기합을 넣었다. 회계사들이 지현을 반겼다.
* * *
“휴식!”
녹음이 푸르른 수목 아래, 햇빛이 나뭇잎 사이로 들어와 갈색 흙바닥에 모자이크를 그렸다. 그런 빛과 그림자의 모자이크를 밟으며 전진하던 용병들은 발데마르의 지시에 한숨을 내쉬며 제자리에 멈췄다.
용병들은 방패와 도끼를 내리고 허리에 찬 가죽 수통의 뚜껑을 열어 목을 축였다. 땀이 폭포수처럼 흘러 등도 가슴도 온통 젖어 있었다.
“쉴 때는 서코트를 제대로 걸쳐라. 봄이라도 아직 추운 날씨다. 자칫하면 쓰러진다.”
간부들이 돌아다니면서 서코트를 벗어서 배낭에 얹어 둔 병사들에게 지적했다. 간부들의 말마따나 걷는 도중에야 열이 올라 후끈했지만 멈춰서 쉬려고 하니 싸늘하게 한기가 돌았다.
병사들은 배낭을 풀고 허리에 찬 주머니에서 호두를 꺼내 씹으며 휴식을 취했다. 출발한 지 얼마 안 된 시간이라 그런지 아직은 체력에 여유가 있었다.
“척후조는 경계 이후 교대하고 휴식 시간을 충분히 가질 수 있도록 배려해라.”
“예, 알겠습니다!”
해가 저물기 전에 산봉우리 아래 야영 지점에 도달해야 했다. 산 너머의 숙영지까지는 최단 거리로 40킬로미터 남짓이지만 길이 있는 게 아니라서 고정된 루트를 이용할 수도 없었다.
때와 상황에 따라 굽이굽이 가다 보면 실제 이동 거리는 최단 거리에서 반절 가까이가 더 붙었다. 부지런히 걸어야 해가 떨어지기 전에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토마스, 하인리히. 병사들의 체력은?”
“아직은 여유가 있습니다. 부상자도 없습니다.”
“세 번째 휴식 지점은 물을 보충할 수 있게 냇가 쪽으로 옮겨야겠습니다. 생각 이상으로 날씨가 따뜻해서 그런지 땀을 흘리는 양이 예상보다 많았습니다.”
“알겠다. 그리하지.”
하인리히는 자신의 맥박이 안정된 정도로 휴식 시간을 가늠하고 발데마르에게 다시 출발할 때가 됐음을 알렸다. 발데마르의 호령에 병사들이 다시 짐을 짊어지고 앞으로 나아갔다.
“토마스. 대오 간격이 넓다. 병사들을 좀 더 좁히도록.”
“예!”
발데마르는 자신도 완전히 무장한 채로 움직이면서 수시로 대열의 전후를 이동하며 살폈다. 병사들은 발데마르가 자신의 옆을 지나갈 때마다 ‘역시 곰…….’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앞의 지시에 무작정 따라 걷는 게 아니었다. 이들은 항상 측면과 배후에서 적의 기습이나 야생 동물의 습격이 발생할 거라는 가능성을 품고 주의 경계하며 움직여야 했다.
특히 산병이 활을 들고 측면 기습을 가했을 때 몸 성히 살아남고 싶다면 앞뒤에서 걷는 동료들과 곧바로 방패를 앞세워 벽을 쳐야 했다. 그런 만큼 간격에 유의하고 늘 촉각을 곤두세워서 걸어야 했다.
지쳤다 해서 멍하니 걷고 있으면 간부들이 옆에 와서 정신을 일깨웠다. 단 한 순간도 긴장을 푸는 걸 용납하지 않으니 같은 거리를 걷더라도 피로가 서너 배씩 늘었다.
“식사 준비!”
출발하고 다섯 시간째, 발데마르는 이르지만 점심 식사를 지시했다. 부대는 원래 목표였던 좀 더 먼 곳의 샘 대신 가까이 있던 시냇가로 이동했다.
“토마스. 척후조를 시내 반대편으로 보내서 경계시켜라. 하인리히, 너희는 배후 경계다.”
“예, 알겠습니다!”
병사들은 시냇물로 수통을 보충하고 식사를 준비했다. 조리 기구까지 운반할 여력은 없으므로 즉석에서 모든 자연지물과 지혜를 짜내 식사를 만들어야 했다.
우선 옴폭한 바위를 찾아 사발 대용으로 썼다. 물과 곡물 가루를 섞고 손바닥만 한 휴대용 제빵 석쇠에 얹어 굽는 걸로 니오 전통의 얇고 넓은 빵을 만들 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기에 떨어진 나뭇가지를 주워서 끝을 뾰족하게 자르고 흐르는 물에 씻고 고기를 꽂았다. 고기를 꿴 꼬챙이를 불가에 꽂아 두고 잠시 기다리면 먹음직스럽게 기름을 뚝뚝 흘리는 꼬치구이가 완성됐다.
자그마한 소금통에서 소금을 한 자밤 집어 고기 위에 뿌리고 크게 한 입 베어 문다. 고기와 소금밖에 없어도 땀을 바가지로 흘린 이들에겐 극상의 맛이었다.
교대 척후조는 재빨리 식사를 마치고 여울을 건너 경계 중이던 척후조와 자리를 바꿨다. 척후조는 동료들이 미리 만들어 놓은 요리로 식사할 수 있었다.
모든 게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식사를 마치고 한동안 휴식 시간을 갖던 용병대는 발데마르의 지시에 다시 대오를 갖추고 모였다.
해가 머리 위를 지나가며 더욱 강한 빛을 내뿜었다. 용병들은 투구 아래로 쏟아지는 땀을 천으로 훑으며 계속 걸어 나갔다.
싸우는 것도 아니고 급하게 달리는 것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점차 숨이 가빠져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하지만 누구 하나 뒤쳐지거나 낙오하는 이는 없었다. 다들 묵묵히 발을 들어 앞으로 내딛을 뿐이었다.
그렇게 묵묵히 걷다 보니 저녁 전에 산봉우리 바로 앞의 가장 난관인 코스에 도착했다. 발데마르는 급경사에 접어들기 전 간부들에게 주의를 단단히 주고 병사들에겐 자세에 유의하라고 가르쳤다.
병사들은 방패 손잡이에서 손을 떼고 방패끈으로 팔뚝에 고정했다. 그리고 자유로운 두 손으로 도끼를 쥐어 도끼자루를 지팡이 삼아 행군을 계속했다.
절반쯤 오르니 헐떡이는 신음이 주위를 채웠다. 발데마르조차 이따금 한숨을 내쉴 정도였다. 아무리 심장과 폐가 튼실한들 수십 킬로그램의 장비로 전신을 짓누르며 고각도의 경사를 오르는 건 힘들었다.
“거의 다 왔다!”
그럼에도 발데마르는 직접 부하들을 살폈다. 간부들조차 지켜야 할 부하들을 돌보기 힘들어하는 판이었지만 그 와중에 발데마르는 비틀거리는 한 병사의 팔을 잡아 부축해 주기까지 했다.
“자, 도착이다!”
“허억, 허억, 아 미친 성문에 대고 도끼질한 기분이야…….”
“넌, 말이라도…….”
정상의 바위에서 병사들이 모로 퍼졌다. 병장들이 돌아다니며 그런 병사들을 일으켜 한자리에 모여서 쉬도록 했다.
체력 고갈이 가장 극심한 건 척후조의 병사들이었다. 남들보다 먼저 가야 하는 건 물론이거니와 척후라는 임무 특성상 정상까지 직선으로 움직일 수도 없었기에 체력 소모가 배는 됐다.
발데마르는 그런 이들을 바르게 앉혀서 물을 먹였다. 물을 마신 다음에는 견과류 주머니에서 최대한 많은 견과류를 꺼내 먹으라고 지시했다. 견과류는 다른 음식들에 비해 먹고 나서 힘을 내는 데 걸리는 시간이 짧아 이럴 때 가장 필요했다.
병사들은 피로를 토로하면서도 시키는 대로 일어서서 움직였다. 지치긴 했지만 아직 여력이 남아 있었다. 조금만 쉬면 금방 또 움직일 수 있으리라. 그러라고 평소에 부지런히 단련하는 것이니.
“올라오는 길보다 내려가는 길이 더 힘들 거다. 지쳤다고 몸에 힘 풀고 걷다간 순식간에 데굴데굴 구른다.”
“알겠습니다.”
발데마르의 계산대로라면 내려가서 숙영지에 도착하는 건 해가 저물기 직전일 것이었다. 일찍 도착해서 푹 쉬어야 내일도 차질 없이 훈련을 진행할 수 있었다.
“힐다가 남긴 표식이군.”
내려가는 길 중간에 척후가 나뭇가지에 묶여 있던 천을 들고 왔다. 보조 부대가 경로를 알리기 위해 남겨 놓은 것이었다. 천이 묶여 있던 나무에는 칼로 새긴 방향 지시가 있었다. 숙영지가 가까웠다.
“숙영지가 금방이다!”
“노래하자! 비알키의 옛 집을 노래하자!”
“누가 선창할 테냐!”
“「깨어나게, 일어서게, 벗이여! 포도주에 취하거나 아내의 말에 돌아서는 대신 곤둘의 전장에 나설 것이네!」”
하인리히의 말에 리하르트가 첫 구절을 뗐다. 그 직후 그의 휘하 병사들이 일제히 한목소리로 다음 구절을 읊었다.
“「우리 위대한 심장의 군주께서 후스카를에게 반지와 투구와 검과 빛나는 사슬 갑옷을 주셨네!」”
“「니오의 지도자가 대담하게 선택했지! 비열하게 도망치는 자에게 용기를 알리리라! 격렬한 전장에서 그에겐 믿음직한 전사가 필요하다네! 전사와 함께하는 왕에게 정복이 복종하리라!」”
목청을 키워 부르는 노래가 장기간의 산행으로 지친 다리에 힘을 불어넣었다. 심장은 더욱 거세게 뛰었고 뜨거운 피가 온몸을 돌며 곳곳에 힘과 끈기를 전달했다.
산의 해가 저물었다. 어둠이 내리는 와중에 그들은 노래의 거의 마지막 구절을 부르며 전진했다.
“「전장의 중앙에서 나는 시체들 사이에 서 있네! 내 몸도 쓰러지는구나! 나를 괴롭힌 자는 누구인가! 그는 어디 있는가!」”
그 순간, 그들이 미처 다음 구절을 부르기도 전에 그들의 앞에서 고성이 터져 나왔다. 높은 톤의 허스키한 여성의 목소리였다.
“「많은 전사를 잃었지만 나는 아직 여기 서 있구나! 강인함과 전사가 필요하다! 내 방패가 부서지고 조각나는 걸 너도 볼 것이니, 너는 전에도 그렇듯 다시 일어서 이제 싸울 것이다!」”
힐다였다. 힐다와 그의 부하들이 지친 용병대를 이끌었다. 병사들은 지쳐 늘어진 얼굴에 미소를 틔웠다.
“마지막 구절은 굳이 부를 필요가 없겠군.”
발데마르가 먼저 힐다와 악수했다. 힐다는 싱긋 웃으며 팔을 당겨 발데마르를 끌어안았다.
발데마르의 뒤로 200여 명의 병사들이 속속들이 숙영지에 들어섰다. 힐다 부대가 한 명 한 명 전우를 포옹하며 인사했다.
숙영지라고는 하지만 산중턱에서 비교적 넓고 평탄한 곳을 찾아 땅을 다져 놓은 것이 전부였다. 기다리던 이들도 힐다를 비롯해 스물 남짓한 사람들이 전부였다.
“고생했다, 힐다.”
“저희야 고생한 것도 없지요.”
“산짐승이나 마수는 없더냐?”
“멧돼지 몇 놈이 냄새를 맡고 다가왔다가 도망쳤어요. 잡았으면 저녁은 포식해도 됐을 텐데 말이죠.”
“넉살도 좋은 녀석.”
발데마르가 힐다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뒤로 돌아 지친 병사들을 살폈다. 다들 지치긴 했지만 체력을 완전히 소진하진 않았다. 광원만 확보한다면 이대로 밤새도록 걸어도 될 정도였다.
다들 웃으면서 목을 축이고 흙먼지를 뒤집어쓴 무기와 방패를 닦을 정도의 정신도 남아 있었다. 본부로 불려 온 전사답게 체력이 대단했다.
“일찍 잠들어라. 뜨는 해와 함께 산을 내려갈 것이다.”
“알겠습니다!”
“토마스, 하인리히, 경계조는 어떻게 편성했지?”
“척후조와 교대 척후조를 전후에 배치하고 체력을 고려해서 시간 순서를 짰습니다. 오늘의 경계조 편성입니다.”
“좋아. 너희도 그만 쉬어라. 힐다.”
“예, 대장.”
“지현 양이랑 했던 그건 어떻게 됐지?”
“이미 물가에서 대기 중이에요. 내일 아침 바로 준비해서 배급할게요.”
“잘했다. 녀석들이 좋아하겠군.”
“우리 차례 때는 저 녀석들이 고생해 줘야지요.”
“당연한 이야기를.”
“대장은 안 피곤해요?”
“이 정도로는 끄떡없다. 너야 말로 피곤하지 않더냐?”
“체력이 오죽 좋아야지요.”
“그러게 말이다. 다들 너 같았으면 훈련 강도를 더 높여도 됐을 텐데.”
“파하하. 불가능한 걸 바라시네요.”
발데마르의 농담에 힐다가 파안대소하고는 자신의 자리를 찾아 갔다. 발데마르 역시 잘 다져 놓은 풀밭 위에 자신의 서코트를 펼치고 누웠다. 땀을 흠뻑 흘려서인지 병사들 모두 순식간에 잠들었다.
발데마르 역시 별을 보며 눈을 감았다. 그 별들이 서쪽으로 흐르고 동쪽 산봉우리 위로 해기둥이 솟았다.
검은 하늘이 붉게 달아오르자 발데마르는 눈을 떴다. 경계병들은 여명을 보며 전우들을 깨웠다.
병사들이 일어나서 바닥에 깔고 잤던 서코트를 탈탈 털고 가벼운 체조로 몸을 일깨웠다. 그들은 문득 주위를 살피다 힐다를 비롯해 보조 부대원들이 사라진 걸 찾았다.
그들이 의아해하는 사이 나무 사이를 헤치고 힐다와 그의 부대원들이 양손에 고기를 수 킬로그램씩 쥐고 돌아왔다. 가장 먼저 그들을 발견한 리하르트가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와서 받아 가라, 놈들아! 오늘의 일용할 양식이다!”
힐다가 소리치자 가까이 있던 병사들부터 다가와서 고기를 한 덩이씩 받았다. 그들은 원래 고기를 감싸던 천으로 핏물이 새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새 고기를 포장하고 배낭에 얹었다.
살아있는 돼지를 통으로 사서 방금 도축한 것이었다. 한 마리의 돼지에게서 30킬로그램이 조금 넘는 고기를 얻었고 병사 한 명당 약 150그램의 고기가 배급됐다.
실전에서도 가축을 데리고 다니다 현장에서 도축해 먹는 방식이 흔하다 보니 보조 부대가 약간만 힘을 들이면 가능했다. 오히려 지현은 용병대가 지금까지 이런 방식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데 놀랐다.
“대장은 특별히 삼겹살만 뗐어요.”
“고맙구나.”
돼지 한 마리에게서 나온 고기를 부위 상관없이 무작위로 배급했지만 발데마르에겐 약간의 특혜가 주어졌다. 발데마르는 힐다에게 인사하고 자신의 몫을 챙겼다.
“아침 식사하고 바로 움직인다! 식사 준비!”
“예! 대장님!”
이틀째 완전히 동일한 식단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병사들은 군말 없이 먹었다. 배낭에 주렁주렁 매단 말린 양파를 씹으며 입가심하는 걸로 식사를 마친 이들은 다시 대오를 갖추고 모였다.
“그럼 다음 숙영지에서 보자.”
“고생하십쇼, 힐다 누님.”
“그래. 사고 치지 말고.”
산을 오르내리는 건 체력 검증 겸 단련, 산을 이용한 우회 전술의 연습 정도였다. 진짜 실전 같은 훈련은 산에서 내려간 다음부터였다.
이틀간 산을 뚫느라 소진된 체력으로 원거리 행군을 진행하는 동시에 대항군의 공격과 기습, 약탈로부터 자신과 전우를 보호하고 나아가 반격해서 물리쳐야 했다.
발데마르는 까슬까슬한 수염 자국을 쓰다듬었다. 전에 그가 말했듯 많은 게 바뀐 해였다. 이번 훈련도 뭔가 병사들이 평소보다 더 많은 걸 이뤄 낼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려면 일단 사고 없이 내려가야지.’
발데마르의 기대대로 병사들은 힘을 내어 산길을 내려갔다. 하룻밤 잠으로 사지에 쌓인 피로까지 풀 수야 없었지만 다시 움직이는데 문제는 없었다. 전쟁터 한복판에서 팔이 끊어질 듯이 힘들어도 무기를 다잡고 싸우는 그런 깡이 없다면 여기에 올 수도 없었다.
“가자!”
“예!”
“자, 긴장 풀지 말고, 이번에는 힐디브란드의 죽음을 노래하자! 누가 선창할 테냐?”
“「검에 맞아 쓰러지니, 우리의 운명이란 무엇인가!」”
니오인들이 다시 노래하며 산을 내려갔다.
* * *
“훈련은 어떻게 되고 있을까요?”
“큰 문제는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발데마르 대장님이 원체 안전에 신경 쓰시는 분인지라. 다들 죽을 것처럼 지치는 것만 빼면 크게 다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래야 할 텐데요. 아니, 죽을 것처럼 지치는 건 괜찮은 건가요?”
“애초에 지옥 강습 훈련이 아니더라도 보통 훈련은 지칠 때까지 합니다.”
“그건 그렇죠. 에효.”
지현은 각 지역에 요청한 자료가 오기 전까지 또 다른 일로 바빴다. 세베리 부대의 재무제표를 검토하고 그를 토대로 부대 자산 운용의 조언을 작성해야 했고 또 다른 부대로부터 속속들이 들어오는 장부들도 정리해야 했다.
회계사들은 안 그래도 빨랐는데 일에 익숙해지며 더 속도를 높였다. 보고 있는 지현조차 신기해할 정도였다. 역시 베테랑 전문가는 달라도 한참 달랐다.
더군다나 이들은 회계만 전문가인 게 아니라 기업 운용에도 전문가였다. 그런 만큼 지현도 편한 마음으로 조언을 구했다.
“재무관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네? 저를요?”
“그, 사실은 발데마르 대장님을 찾으셨는데 아드니 백부장님이 지현 재무관님께 보내라고 하셔서…….”
“아.”
본부에 고위 간부가 법관과 지현을 포함해도 네 명밖에 없었다. 군문이 아닌 업무 분야에선 지현을 찾을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은 있었다. 그렇기에 지현은 손님을 만나기 전에 아드니부터 만나기로 했다.
“우선 손님은 본채 거실로 모시고, 저는 아드니 씨를 먼저 만나 볼게요.”
“알겠습니다.”
“여러분, 잠시 다녀올 테니 그사이 분석 부탁드려요.”
“알겠습니다.”
아드니는 원래 자신의 사무실이 있던 건물에서 본채로 자리를 옮겨 발데마르의 대리 역을 수행하는 중이었다. 발데마르가 임명했기에 어지간한 업무는 그의 선에서 처리할 권한이 있었다.
“재무관님. 손님은 만나 보셨습니까?”
“아니요. 어떤 손님인지 먼저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아드니 씨를 먼저 찾았어요.”
“그러십니까. 베겐도르프 시의 부호입니다. 이름은 안톤이라고 하는데 상인 조합에서도 공산품을 담당하는 조합의 가장 큰 세력을 이끌고 있는 사람입니다.”
“아, 그 사람이라면 기억해요. 일전에 만난 적이 있었어요. 근데 그 사람이 무슨 일로?”
지현에게 그럴 듯한 인상을 남긴 사람은 아니었다. 다른 금고업자 조합이나 상인 조합과 달리 니오 용병대의 채권에도 시큰둥했던 사람이었다.
“우리 용병대로부터 구매하고 싶다는 것이 있어서 직접 찾아왔다고 합니다. 우리는 뭘 직접 팔아 본 경험이 없기에 재무관님 쪽으로 돌렸습니다.”
“아아, 그러면 이해가 가네요. 그나저나 뭘 사고 싶다고요? 채권은 아닌 거 같고, 신형 갑옷 세트인가요?”
“잘은 모르지만 우리가 도시에 팔려고 했던 거라고 하는데 그걸 일괄 구매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골동품이지 싶습니다만.”
“골동품, 아 혹시 자재 창고에서 나온?”
“그거 이외에는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최근 용병대에서 나와 도시로 간 건 그것뿐이니. 더 궁금하신 게 있으십니까?”
“아, 아니요. 고마워요. 바쁘신데…….”
“아닙니다.”
지현은 아드니에게 인사하고 거실로 향했다. 거실에는 짙은 갈색 머리카락을 짧게 깎은 40대 중후반 정도로 보이는 중년의 남성이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니오 용병대의 재무관 이지현입니다.”
“안톤입니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지현이 나오자 안톤이 일어서서 인사했다. 녹색 타바드의 테두리에 금실로 자수를 넣고 무릎 아래까지 오는 감색 가죽 부츠를 신고 있어 척 보기에도 부유함이 절절히 드러났다.
“우리 용병대로부터 구매하고 싶은 물품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네, 그렇습니다. 바로 이것들입니다.”
‘역시.’
안톤이 주머니에 들어 있던 물건들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녹이 슬어서 잘 빠지지도 않는 검과 자루가 썩어서 머리만 남은 도끼였다.
‘으음, 밝은 데서 보니까 좀……. 재고 관리 담당자를 빨리 뽑아야겠다. 신형 갑주랑 예비 비축 물자도 저런 식으로 놔뒀다간 큰일 나겠네.’
“분명 우리 용병대에서 나온 물건들이 맞네요. 하지만 실용성이 없어서 용도 폐기하고 재활용하기로 정한 물건인데 굳이 이걸 사고 싶으시다고요?”
“용도 폐기라고요? 맙소사, 이건 말입니다. 그냥 검이나 도끼 따위가 아닙니다. 이 칼자루를 보시라고요. 세상에 이런 섬세한 폼멜을 보셨습니까? 이건 400년 전부터 300년 전 사이에만 만들어진 형식입니다. 폼멜을 통짜로 만들지 않고 상단 가드와 하부 폼멜로 따로 만들어서 대갈못으로 고정했는데…….”
“자, 잠깐만요.”
“네?”
“일단은, 네 말씀하신 대로 그건 300년 전 물건이 맞아요.”
“제가 틀리게 봤을 리 없습니다. 게다가 분명 실전에서 이용했던 물건입니다. 만약 발데마르 장군 같은 분이 사용하셨던 물건이라면 역사적 가치까지 더해진단 말입니다.”
“어떤 분이 사용하셨는지는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지만…….”
“그거 안타깝군요.”
“보아하니 안톤 씨는 그, 소장 목적으로 물품을 구매하는, 그러니까 수집가이신 거네요?”
“수집가? 아, 네. 그렇습니다. 역사적인 무기와 갑옷은 빠짐없이 수집하고 있지요.”
“그렇다면 이해가 가네요.”
‘그나저나 이 세계에도 수집가가 있다니…….’
지현이 찾았을 때 이 세계에 박물관 같은 건 없었고 신전이나 수도원이 일부 미술관과 유사한 기능을 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당연히 전시 같은 일을 하는 집단이 없으니 수집하는 사람도 없으리라 지레짐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인간을 너무 쉽게 본 것이었다. 뗀석기를 휘두르고 뼛조각으로 화살촉을 만드는 시대에도 누군가는 그것들을 수집하고 소장하고 또 자랑했다. 무언가를 모아 보관한다는 욕구는 시대를 초월했다.
“이것들은 전부 저희가 베겐도르프 시의 대장장이 조합에 의뢰했던 상품이네요. 사실 고철값만 받고 그대로 소장하셔도 됐을 텐데요.”
“물론 저도 그러고 싶은 욕망이 컸습니다만…… 이런 가치 있는 물건을 그렇게 대충 처리하기에는 상인으로서 제 혼이 용서하지 않습니다.”
“그, 러시군요.”
“제가 대장장이 조합과 긴밀한 관계가 아니었으면 대장간에서 녹아 버렸을 겁니다. 이런 안타까운 일이 또 있겠습니까. 말 나온 김에 용병대에서 보관 중인 골동품이 더 있다면 매입하고 싶습니다.”
“무기뿐만 아니라 갑옷도 꽤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네. 아, 하지만 사슬 갑옷들은 대부분 제가 소장하기에는 큰 가치가 없었습니다. 아쉽게도. 가장 오래된 사슬 갑옷인 브린야는 한 벌뿐이고 나머진 다 후기형 호버크와 같더군요. 하지만 찰갑은 인상적이었습니다. 클라나비온과 유사했는데 이건 아마 니오가 일레디온 제국의 영향을 받은 게 아닐지…….”
지현이 알 수 없는 전문용어가 쏟아졌다. 안톤은 수집가일 뿐만 아니라 아주 심도 깊은 마니아였다.
“일단, 안톤 씨. 진정하시고요.”
“예.”
“안톤 씨가 아주 열정적인 수집가라는 건 잘 알겠어요. 당장 용병대 본부에서 처분하려는 상품은 지금 안톤 씨가 확보한 무기와 갑옷이 전부지만 각 지부의 재고까지 확인하면 더 나올 거예요.”
“그거 좋은 소식이군요.”
“물론 저희도 폐기해서 쓸 수 있는 철만 재활용하자는 입장이었으니 안톤 씨가 합당한 금액을 지불하고 매입하시겠다면 서로 좋은 일이에요. 가격은 서로 합의를 봐야겠지만.”
“그야 이를 말씀이십니까.”
“다만 재고의 처분에 관해서는 제 독단으로 지시할 수가 없어요. 용병대의 총대장인 발데마르 대장님에게 먼저 알려야 해요. 이 점 양해해 주셨으면 해요.”
“당연히 이해합니다. 그런데 발데마르 장군께선 어디 계신지?”
“훈련으로 외출 중이세요. 일단 전령을 통해서 소식을 전달할게요. 발데마르 씨의 재가가 떨어지면 그때 안톤 씨와 다시 협상하지요.”
“그럼 이 자리에서 결정하는 건 아닙니까?”
“네. 고철로 만들려던 걸로 생색내려고 한다는 생각은 하지 말아 주세요. 절차는 중요하니까.”
사실 니오 용병대에는 이런 상품 처리에 관한 절차 자체가 아직 존재하질 않았다. 지현에게 위임된 권한을 생각한다면 이 정도는 알아서 처리하고 사후 보고로 끝내도 될 법했다. 용병대의 자산을 사적으로 유용하는 것도 아니고 용병대의 이익을 증대하는 방향의 업무이니 말이다.
하지만 지현은 덜컥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이 지나치게 비대해졌다는 걸 느꼈다. 그렇기에 일단 멈춰서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처음 용병대에 자리 잡았을 때는 지현에게 아무런 권한도 없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반드시 간부진의 동의가 필요했고 예산을 작성해도 발데마르와 간부들 앞에서 설명하고 이해시키고 결재를 받아야지만 집행이 가능했다. 채권 처분 같은 일도 지현의 계획이었지만 발데마르를 이해시키고 허가를 얻었기에 비로소 진행이 가능했던 것이다.
부대 정비, 자금 집행 방식 개선 등 모든 일이 다 그렇게 흘러갔다. 하지만 업무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지현에게 재량권이 주어지기 시작했다.
지금도 예산 집행은 발데마르의 결재가 필요하지만 현금 출납의 권한 일체가 지현에게 넘어왔다. 더군다나 발데마르가 생각하기에 좀 애매하다 싶은 건 싹 지현에게 넘겼기에 지현에게 과도한 재량권이 주어진 것이다.
정착 초기에 지현이 가장 우려했던 일이었다. 아직 지현이 뭔가 문제를 일으킨 적은 없지만 시스템 자체가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현은 지금을 기점으로 개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재고품 처리는 그 시발점이 될 것이었다. 관련 책임자를 만들고 그에게 권한을 배분할 것이라 다짐했다.
“흐음, 절차는 물론 중요합니다, 흐으음. 알겠습니다. 며칠이나 기다려야 합니까?”
“이레 정도만 기다리시면 돼요. 그사이 물건이 어디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안톤 씨 이외에 구매를 원하는 사람도 없을 것 같으니 편한 마음으로 기다려 주세요. 우리 입장에서도 폐기하는 것보다야 매입을 희망하는 분께 파는 게 서로에게 이득이니 발데마르 대장님도 폐기하라는 지시를 강행하시진 않을 거예요.”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니오 용병대는 앞으로 무장 일체를 교체한다는 소문이 있던데 사실입니까?”
“소문에 민감하시네요. 네, 사실이에요. 니오 용병대는 무장과 갑주를 표준화하기로 했어요.”
“저기, 그럼 혹시 교체할 때 원래 쓰던 무장도 판매할 의향이 있으신지.”
“네? 지금 용병대가 쓰는 장비는 거의 대부분 최신형인데요.”
“꼭 오래되어야만 가치가 생기는 건 아닙니다. 누가 쓰던 물건인지도 중요하지요. 유명한 분일수록 좋습니다. 발데마르 장군께서 쓰던 장비면 최고지만 다른 분도 물론 좋고말고요.”
지현은 떡 벌어지려던 입을 간신히 막았다. 마니아의 사고는 지현의 이해와 많은 부분에서 달랐다. 하지만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사람들이라면 그를 이해할 것이었다.
“일단 그런 장비는 대원 개인의 것이라 제가 확답을 드릴 순 없고, 원하는 분이 있다면 대신 여쭤 봐 드릴 순 있어요.”
“아, 그렇다면 혹시 세겐 전투의 용장인 힐다 장군께 한 번 여쭈어 주시기 바랍니다. 딸에게 귀감이 되는 선물일 거라고 생각해서…….”
‘같은 취미가 아니라면 딸한테 갑옷이나 도끼를 선물해 봤자 민폐일 거 같은데요.’
지현은 프로답게 마음의 소리를 입으로 내는 대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안톤은 지현의 긍정에 만족하며 산을 내려갔다.
‘일단은…….’
대외 활동은 잠시 접어 두고 조직 개편안부터 짜야 했다. 지현은 사무실로 돌아와서 회계사들의 업무 처리를 확인하고 자리에 앉아 종이와 펜을 잡았다.
일단 자신의 업무 범위를 차근차근 줄여 나가기로 했다. 최종적으로는 자신의 업무를 경영 전반의 감시와 감독, 조언과 개선까지로 축소하고 실무진을 양성해서 회계, 인사, 조직, 재고관리 분야 등을 그쪽에 넘기는 걸 목표로 했다.
“재무관님?”
“네, 무슨 일이시지요?”
“일단 재무제표를 보고 할 수 있는 조언은 다 작성했지만 역시 부대 운용의 실무를 알지 않고서는 한계가 명확합니다.”
“올바른 지적이에요, 네로 씨. 조만간 각 부대에서 신입 행정병을 뽑을 건데 그때 간부도 불러서 확인하도록 할게요. 일단은 당장 재정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조언만 작성해 주세요. 아, 다 작성하셨다고 하셨죠. 그럼 이번에는 이쪽 라그나 부대를 처리해 주세요.”
“새 장부가 나올 때마다 서식이 들쭉날쭉하니 이거 참 괴롭군요.”
“발데마르 씨가 그렇게 쓱싹 정리한 것도 이해가 가지 않나요?”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닙니다.”
“허…….”
지현이 생각하기에도 역시 발데마르의 장부는 아니었다 싶었는지 별다른 말은 않고 다시 업무를 시작했다. 하지만 한 번 깨진 집중력은 쉽게 돌아오질 않았다.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거슬리며 집중을 방해했다. 종래에는 눈가를 찌르는 머리카락마저 거슬려서 일을 못 했다.
‘또 벌써 머리가. 하인리히 씨가 돌아오면 좀 다듬어 달라고 해야겠다.’
지현은 앞머리를 엄지와 검지로 비비 꼬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한숨 소리에 세 회계사가 문득 고개를 들고 지현을 바라봤다.
“아무 것도 아니에요. 아, 그 장부는 분개까지만 하세요. 다른 할 일이 있으니까요.”
“무엇입니까?”
“교육 준비요. 신입 행정병들이 곧 올 거예요. 전령한테 편지를 받은 게 닷새 정도 전이었으니까 가까운 부대는 곧 도착할 거예요.”
“그렇군요.”
의외로 행정병이 온다는 것에 부담이 없어 보였다. 원래부터가 베테랑이니 그런 건지 아니면 짧은 시간이지만 지현이 가르친 근대 양식의 회계 장부에 적응한 건지 모를 일이었다. 어렵다, 힘들겠다 빼는 것보다는 자신만만한 게 훨씬 나았다.
“가르치는 일은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기도 해요. 다른 사람한테 말하다 보면 자기가 알고 있던 걸 정리하게 되거든요. 여러분 자신도 성장하는 기회로 삼으세요.”
“훌륭하게 진리를 꿰뚫는 말씀이십니다.”
지현은 다시 집중되지 않는 머리를 어떻게든 굴리며 행정병 교육 자료를 점검했다. 한 번 가르쳐 본 경험이 있었기에 그 경험을 토대로 수정 보완하면 이번엔 더 잘 가르칠 수 있었다.
한 달도 안 되는 시간 만에 문외한이 회계 장부를 쓸 수 있게 만들었으니 이미 더 잘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할 만큼 훌륭하게 해낸 셈이었다. 하지만 경험은 그런 생각도 고치게 만들었다. 지금이라면 장부를 쓰는 건 물론이거니와 장부를 토대로 부대 재정 상태를 진단하는 것까지 가르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 의욕과 별개로 여전히 일이 손에 잘 안 잡혔지만.
‘다른 사람들은 지금쯤 뭘 하고 있으려나.’
* * *
“여기서부터 나는 관전으로 빠진다. 각자 자신의 역할에 맡게 최선을 다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이틀째 밤, 산에서 내려와 물자 집적소에 도착한 두 개 백인대에게 발데마르가 선언했다. 여기서부터 숲까지의 인솔과 책임은 온전히 두 백부장에게 넘어갔다.
“저도 힐다에게 공적을 뺏기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겠습니다.”
“수고했다, 게다.”
빠진다고는 했지만 아예 떠나는 건 아니었다. 발데마르는 바우그에 올라 두 백인대를 따라다니며 어떤 경로로 이동하는지, 대항군의 기습을 어떻게 막아 내는지 지켜봐야 했다.
게다와 그의 부하들은 바로 며칠 전까지 실전을 겪어 날카로운 상태였다. 하인리히와 토마스가 고전할 게 눈에 뻔했다.
“자, 그럼 우리도 이만 떠나지. 곧 다시 보자고. 토마스, 하인리히.”
“포로로 잡히기 싫으면 몸 조심해라.”
“거칠지 않도록 부탁하마.”
게다가 하인리히와 토마스에게 번갈아 포옹하고 떠났다. 한동안 부대에 정적이 감돌았다.
“하인리히, 힐다 대책은 너한테 맡긴다. 솔직히 조 추첨이 잘못됐어. 베르세르크 백부장 둘을 상대하라니. 정면으로 붙었다간 판판이 깨지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안심해. 힐다의 생각이라면 잘 아니까.”
“그 녀석도 너를 그만큼 잘 아니까 문제라는 거지.”
하인리히와 토마스는 우선 병사들에게 휴식을 지시했다. 어제 푹 쉬면서 어느 정도 체력을 회복했지만 이틀에 걸친 산행과 거친 잠자리로 최상의 컨디션은 아니었다.
특히 혹사당한 발이 문제였다. 하인리히는 병사들에게 발에 감은 붕대를 풀고 깨끗한 여벌 붕대를 감으라고 지시했다.
다들 단련된 만큼 아직 비전투 손실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장기 행군 시 발에 상처를 입고 탈락할 수도 있었다. 훈련이 훈련인지라 개인이 부상을 입었다고 그냥 빠질 수도 없었다.
부상자 한 사람의 발생은 병사 세 명의 손실이었다. 부상 정도가 심하거나 백부장이 독하게 마음먹고 부상자를 이탈시켜 버릴 수도 있지만 전우를 전장에 버리고 간 셈이니 매우 큰 감점 요인이었다.
“몸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있다면 바로 말하도록.”
“예, 알겠습니다!”
“리하르트, 이쪽으로. 에베!”
“넷슴다.”
“부르셨습니까!”
“토마스, 도프리도 불러.”
“그래.”
네 간부가 모여서 회의를 시작했다. 하인리히는 시작부터 힐다에 대한 이야기로 운을 뗐다.
“힐다는 오늘 밤 온다.”
“확신할 수 있어?”
“그래. 힐다라면 반드시 올 거다.”
“하지만 오늘은 첫날이야. 가장 경계가 심한 날인데다가 방금 보급 받고 충분히 휴식을 취하는 중인데.”
“힐다 누님이라면 오히려 그래서 들어올 검다. 그게 의표를 찌른다고 생각하니까.”
“맞아. 하지만 나와 리하르트가 있지. 힐다라면 거기까지 수가 읽히는 것쯤은 예상하고 있을 거야.”
“그 말은?”
“오늘 밤 야습에 오는 힐다의 부대는 양동, 뒤는 게다에게 맡길 거다.”
“소란만 일으켜 체력을 고갈시키고 격퇴하면 격퇴하는 대로 안심하고 잠든 새벽에 파상 공격인가. 과연 그럴 듯한데.”
“수비자로서의 이점을 살릴 만한 지형도 없습니다. 하인리히 대장님 말씀대로라면 수면 없이 대기하거나 지금이라도 움직여서 유리한 지형을 찾아야 합니다. 어느 쪽이건 부하들의 체력이…….”
“지형의 이점이라면 있어.”
“네?”
그들이 지금 서 있는 주변은 산자락에서 이어지는 구릉지였다. 정확히 위치한 포인트는 언덕의 골에 해당하는 평탄면이었는데 주변에 나무가 자라긴 하지만 조밀하지 못했다.
사격전을 벌인다면 언덕을 선점하고 나무를 엄폐물 삼아 활을 쏴 대겠지만 안전상의 이유로 활은 금지됐다. 아무리 실전을 가장한 훈련이라지만 한 사람이라도 죽으면 용병대 전체의 큰 손해였다.
“벌목 허가도 있으니 지금이라도 나무를 베어서 엄폐물을 쌓을까?”
“아니, 그러기에는 시간도 많이 걸리고 피곤하기만 해. 대신 이렇게 하지.”
하인리히의 지시에 따라 병사들은 이른 시간부터 잠을 취했다. 그리고 해가 저물고 날이 어두워지자 어둠을 장막 삼아 한 사람씩 부대를 빠져나갔다.
밤이 깊어지고 별과 달이 뜨며 새카만 하늘이 암청색으로 옷을 갈아입을 무렵, 힐다는 자신의 백인대 전원을 이끌고 하인리히와 토마스의 숙영지를 향했다.
“―같은 생각을 할 거란 말이지. 하인리히 녀석, 항상 작전 복기 때마다 내 머리 꼭대기에 있었지만 이번 건 예상 못했을 거다.”
힐다는 밤눈이 밝은 파트리샤와 소수 인원을 척후 부대로 앞세우고 키르스텐에게 분견대를 맡겼다. 본격적인 전쟁처럼 부대가 포진해서 이동했다.
하인리히의 예상과 달리 시선을 돌리기 위한 야습 정도가 아니었다. 야간에 벌이는 전면전 그 자체였다.
어둠 속에서 소수도 아닌 300명이나 되는 대부대가 서로 부딪치면 피아 식별을 못 하고 아군끼리 살상하는 사태가 발생할 것이었다. 힐다 역시 그걸 우려했기에 아군을 구분할 수 있도록 기름을 칠한 철판을 목에 걸도록 지시했다.
언뜻 달빛에 반사된 반짝임은 병장기나 갑주에 의한 것으로 착각하기 쉬웠다. 힐다 부대처럼 미리 인식표를 인지하고 그걸 예의주시하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구분하긴 어려울 것이었다.
그 결과 힐다 부대는 서로를 구분하지만 하인리히와 토마스 부대는 구분을 못하고 무차별 전투를 펼치게 만드는 게 힐다의 작전이었다. 힐다가 이 발상을 처음 내놨을 때는 그와 친한 파트리샤나 아스타도 입을 딱 벌렸다.
“백부장님. 언덕 위에 보초가 있습니다. 더 접근하면 발각될 것입니다.”
“발각돼도 상관없어. 하인리히나 토마스나 사전에 발견하면 막기 쉬울 거라고 생각하겠지. 그렇게 착각하도록 두는 것도 다 내 작전이다.”
“알겠습니다.”
400미터 가까이 접근하자 보초도 어둠 속에서 움직이는 수십 명의 군세를 발견했다. 보초는 급히 소리치며 본대에 소식을 알렸다.
“속도를 높인다!”
“힐다 백부대! 속보로!”
오른쪽 측면으로는 키르스텐의 분견대가 접근하고 있었고 한두 사람씩 떨어져서 어둠으로 위장해 보초의 눈을 속이며 접근하는 파트리샤의 척후 부대도 있었다. 힐다가 앞장서서 전열을 부수고 난전을 시작하면 그 다음부터는 일방적인 유린이었다.
“하인리히한테는 미안하지만, 훈련은 여기서 끝이야. 다음 훈련도 있으니 다치지만 않게 조심히 해 주자고.”
힐다가 웃으며 도끼를 다잡았다. 토너먼트 때 쓰던 날을 죽인 도끼였지만 쥔 사람이 힐다였다. 갑옷이 아닌 부위에 맞았다간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러질 것이었다.
“마침 하인리히 대장님도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옆에서 들린 목소리에 힐다가 번개처럼 도끼를 집어 던졌다. 힐다가 던진 도끼는 정확히 소리가 난 곳을 두들겼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도끼가 나무에 부딪쳤다. 도끼는 나무껍질을 벗겨 내고 바닥에 떨어졌다.
“하 씨, 여기까지 예측당한 거냐.”
“이렇게 다 끌고 오실 줄은 예측 못했습니다만.”
나무 뒤에서, 수풀 사이에서, 덤불 밑에서 사람이 기어 나왔다. 한두 명씩 나오나 싶더니 그 수가 서른 명 가까이 됐다.
백부대를 온전히 데리고 있었다면 문제없을 수였다. 하지만 지금은 난전으로 이끌기 위해 부대를 조각내고 여러 방향에서 이동시키는 중이었다.
“에베, 니가 날 막으려고?”
“저만이 아니라.”
“저희도 입니다.”
“아, 나……. 작정을 했네, 작정을 했어.”
에베의 등 뒤로 하인리히 부대의 베르세르크 두 명이 더 나타났다. 힐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베르세르크 사이에도 우열이 있다지만 힐다라고 동시에 세 명의 베르세르크와 싸울 순 없었다.
“다른 세 놈은?”
“운이 좋으면 키르스텐 경을 막고 있을 테고, 운이 없으면 본대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최선의 방어는 바로 공격이다. 하인리히는 애초에 얌전히 적을 맞이할 생각이 없었다. 기습에는 기습으로. 기습해 오는 적에게 매복으로 응수한다. 공수를 역전시켜 버리는 것이다.
힐다가 반드시 올 거라는 믿음이 없고서는 감히 시도할 수 없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하인리히의 예상대로 힐다는 왔고, 하인리히의 작전은 제대로 통했다.
“얘들아!”
“예, 대장님!”
“글렀다, 튀어!”
“네!”
“엇, 힐다 대장님!”
힐다의 지시에 휘하 병사들은 바로 몸을 돌려서 달렸다. 힐다만 에베를 견제하다가 마지막에 돌아섰다.
에베 부대는 쫓지 않았다. 지금 추격해 봤자 힐다가 부대를 정비하고 반격하면 수도 적고 피아 식별도 안 되는 에베의 부대가 훨씬 불리했다. 베르세르크 세 명이 힐다 한 명만 작정하고 노려서 쓰러트린다면 좋겠지만 그 전에 힐다의 부하들이 달려들 게 뻔했다.
“진짜 힐다 대장이 도망을 다 가네. 어떻게 이것까지…….”
“하인리히 대장님이 참 신통하지. 내가 이래서 우리 대장님을 못 떠난다니까.”
“항상 머리카락에 신경 쓰던데 사실 하인리히 대장님은 마법사인 게 아닐까요.”
“실없는 소릴 다 한다. 이것도 힐다 대장님을 그만큼 잘 아니까 가능한 거지, 다른 적이었어 봐라.”
“다른 적이었으면 다른 작전을 썼을 거다. 아무튼 지시하신 건 다 이행했으니 본대로 귀환한다.”
“예!”
에베의 매복 부대가 하인리히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본대라고는 하지만 인원은 에베의 매복 부대와 큰 차이가 없는 정도였다. 보급품을 수령한 곳에 남아 있는 이가 50명. 나머지는 30명씩 쪼개 총 다섯 곳의 예상 공격로에 잠복해 있었다.
에베의 부대에 가장 많은 베르세르크가 배치된 건 그쪽으로 힐다가 올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다른 부대는 각각 한 명씩 베르세르크를 나눠 배치했다.
“하인리히 대장님. 힐다 대장님은 일단 물러났습니다.”
“전투는 없었겠지?”
“물론입니다. 거기까지 대장님 예상대로였습니다.”
“그래. 아무리 너라도 힐다랑 정면으로 부딪치면…… 무사히 끝나긴 어려웠겠지.”
“저도 아니까 조심스럽게 말씀하실 필요 없습니다. 아, 그리고 예상 밖이라면 너무 많이 왔습니다.”
“너무 많다고?”
“네. 제가 본 사람이 우리 분견대보다 많았으니 어쩌면 힐다 백부대 전원이 온 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과연 힐다다운 호쾌함이군. 다 예측했다고 생각했는데 또 이렇게 의표를 찔리다니.”
“그래도 뭐, 큰 틀은 그대로지 않습니까. 어쨌든 힐다 대장님도 쫓아냈으니.”
“아니, 그렇지 않아. 토마스, 매복 부대를 불러들여. 여기서 떠나야 한다.”
“알았어.”
토마스가 전령을 보내는 사이 하인리히는 남은 이들을 불렀다. 그들은 수령한 보급품을 깡그리 짊어지고 모여들었다.
“힐다는 물러난 게 아니야. 합류한 거지. 힐다 옆에 키르스텐이 있었나?”
“생각해 보니 없었습니다. 아스타가 부관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파트리샤도 내보냈군. 백부대 전체를 끌고 온 게 확실해. 준비를 서둘러라!”
야간 행군을 대비해서 초저녁부터 병사들을 재웠다. 그럼에도 밤에 일어나는 건 수면 시간과 상관없이 피곤했다. 병사들은 축축 늘어지려는 다리를 놀려 하인리히의 지휘 아래 모였다.
“토마스, 매복 부대는?”
“도프리가 전령을 보냈다. 막 키르스텐과 조우했다고. 나머지는 지금 이쪽으로 오는 중이다.”
“동쪽으로 움직인다. 지체할 시간이 없어.”
“진짜로 야간 행군을 하게 될 줄이야.”
세 개 분견대가 하인리히의 지휘 아래로 복귀했다. 집결한 인원은 140명 남짓, 아직 60여 명이 돌아오지 못했다.
“토마스, 부대를 나누자. 먼저 100명을 데리고 떠나. 나는 분견대를 이끌고 합류하겠다.”
“합류 지점은?”
“제그로의 상수리나무에서. 만일 해가 뜰 때까지 내가 도착하지 못한다면 마누의 세 둔덕 아래에서 합류하지.”
“알겠다. 무운을 빈다.”
토마스가 병사들을 이끌고 떠났다. 만약 병사가 쪼개진 사이 힐다가 덮칠 때를 대비해 모든 베르세르크를 하인리히의 휘하에 남겼다.
“이런, 아무래도 늦은 거 같군.”
“대장님?”
“방패 앞으로!”
하인리히가 검을 뽑아 휘두르며 지휘했다. 달빛을 머금은 검이 새파란 빛을 뿜었다. 그 칼끝을 향해 병사들이 움직였다.
“도프리!”
“하인리히 백부장! 죄송합니다, 밀렸습니다!”
“손실은?”
“없습니다. 하지만 추격이…….”
“하인리히!”
도프리의 말을 자르며 힐다가 소리쳤다. 하인리히의 예상대로 키르스텐과 합류한 힐다가 그대로 매복 부대를 밀며 쳐들어오는 것이었다.
“힐다! 여전히 부대 운용이 호탕하구나!”
“나야 늘 그랬지! 그러는 너는 인마, 첫날부터 매복이라니!”
“네가 상대니까 당연하지!”
“너랑 비비고 산 게 몇 년인데 오늘은 제대로 놀랐다! 저번에도 이 정돈 아니었잖아! 아무래도 우리 좀 거리를 좀 둬야 하나 보다!”
“네가 그러면 너무 아쉬운데!”
힐다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리고 마침내 언덕 위로 그림자가 솟아났다. 하인리히의 지휘 아래 있는 부대원들이 마른 침을 삼켰다.
피로에 지치고 무거운 짐을 짊어진 채 힐다를 막을 수 있을까? 심지어 수마저 밀리는데?
“대장님. 토마스 백부장을 먼저 보낸 건 실수가 아닌가 싶습니다.”
“걱정 마라. 여기까지 다 예상했다.”
하인리히는 자분자분하게 말했지만 그의 부대 모두가 들을 수 있었다. 그의 한 마디가 긴장한 팔과 다리를 풀어 주고 마음을 부드럽게 했다.
병사들은 힘을 주어 방패를 다잡았다. 하인리히에게 방법이 있다. 그렇다면 자신은 그걸 믿고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면 된다.
어깨를 맞대고 선 사람에게서 사람에게로, 겹치게 쥔 방패에서 방패로 믿음이 전파됐다. 어깨는 무겁지만 방패벽은 단단했다.
“도프리 부대는 방패벽에 합류하라. 도프리, 너는 에베와 함께 움직인다.”
“별동대입니까? 힐다 백부장에게 얼마나 통할지 모르겠습니다.”
“방법이 있다.”
“알겠습니다.”
“리하르트, 깃발을 높이 들어.”
“분부대로 합죠!”
밤의 어둠 속에서 깃발은 그저 검푸른 그림자일 뿐이었다. 하지만 리하르트는 두 손으로 기를 높이 치켜들었다.
한편 언덕 위로 올라온 힐다 부대도 좌우로 병력을 펼치며 돌격 태세를 갖췄다. 힐다가 가장 앞에서 양손에 검과 도끼를 쥐고 앞으로 휘둘렀다.
“내가 간다, 하인리히!”
“환영한다, 힐다!”
“와아아아악!”
비명과도 같은 괴성을 지르며 힐다 부대가 언덕을 뛰어 내려갔다. 하인리히의 지휘를 받는 60여 명의 군인은 사람을 집어삼킬 듯이 세찬 파도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북해의 거친 바다처럼 힐다가 다가오고 있었다.
“받아 버려!”
“끄으윽!”
힐다가 가장 앞장서서 방패벽을 어깨로 두들겼다. 방패를 쥔 이들은 하마터면 그 충격에 뒤로 튕겨 나갈 뻔했다.
방패를 쥔 손이 저리고 방패를 받친 어깨가 욱신거렸다. 그러나 그들은 견뎠다. 서로 겹친 방패가 충격을 좌우로 나눴고 뒤에 선 전우들이 등을 받아 줬다.
“버텨라! 난전을 만들어선 안 된다!”
하인리히는 달려오는 힐다의 목에서 반짝이는 무언가를 봤다. 검이나 갑옷이 반사하는 빛은 아니었다.
하인리히는 그것이 피아 식별을 위한 것임을 직감했다. 힐다가 굳이 방패벽을 들이받는 데는 목적이 있을 테니까. 그렇기에 방패벽을 더욱 굳히고 난전을 피하고자 노력했다.
“파트리샤, 옆으로 돌아!”
“에베, 막아라!”
힐다가 도끼로 방패 모서리를 걸어서 당기며 소리쳤다. 그 지시에 파트리샤가 병사를 이끌고 방패벽 앞을 내달렸다. 하인리히 역시 곧장 대응했다.
“자, 다 예상했다면서! 이제 어쩔 거냐 하인리히! 버텨 봤자 못 이긴다!”
“아니! 버티면 이긴다!”
“뭐?”
“털어 내!”
“우! 아!”
병사들이 기합과 동시에 방패를 안으로 당겼다 앞으로 밀었다. 방패가 서로 겹쳐 있기에 모든 동작을 동시에 행하지 않으면 실행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힐다는 묵직한 중량 덩어리에 떠밀려 뒷걸음질 쳤다. 힐다뿐만 아니라 방패벽에 달라붙어 있던 병사들이 모두 그렇게 밀려났다. 부딪쳐 오는 힘은 한 사람이 방패를 미는 힘 정도가 아니었다.
“씁, 내가 이래서 우리 애들을 좋아할 수밖에 없다니까.”
서로 다른 두 백부대를 섞어 놨음에도 그 동작은 일사불란하기 짝이 없었다. 옆에 선 전우의 마음이 내 마음인 양 완벽하게 하나처럼 움직였다.
하인리히의 장악력도 장악력이지만 병사들의 의지가 무엇보다 대단했다. 단결력이라면 본부의 병사 중 누구 하나 꿀리는 이가 없었다.
“역시 니오의 전사답다! 그래서 그게 전부냐! 그 정도론 날 못 털어 내지! 방패 앞으로!”
“합!”
힐다 부대가 일제히 등에 비끄러맨 방패를 앞으로 내밀었다. 힘겨루기에 들어간다면 수가 많은 힐다 측은 점점 좌우로 넓게 펼칠 수 있을 테고 포위전이 되면 탈출로가 사라졌다.
하인리히 역시 그 사실을 잘 알았다. 그럼에도 하인리히는 침착하게 명령을 내렸다.
“간격을 좁힌다! 좌익 미속 후퇴! 원진으로 전환! 에베, 방패벽 안으로 복귀해라!”
“하, 알아서 들어와 주는구나!”
힐다의 방패벽이 점차 옆으로 늘어났다. 두 방패벽이 부딪치고 방패 위로 창과 도끼, 노성과 고함이 오갔다.
“힐다! 피가 머리에 쏠렸다!”
“걱정 마! 안 다치게 해 줄게!”
“그런 뜻이 아니야!”
“어?”
“측면을 봐!”
힐다와 하인리히가 대화하는 사이 아스타가 힐다의 어깨를 잡으며 외쳤다. 힐다는 휘두르던 창을 뒤로 당겼다.
“우리 지금 동그랗거든? 측면이 아니라 어느 방위인지 정확히 말해!”
“저쪽!”
“이런 제기랄…….”
복귀하지 않은 마지막 매복 부대였다. 그들은 돌아오던 중 힐다의 부대를 발견하고 합류한들 전세를 뒤집을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기다렸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힐다가 하인리히를 포위하느라 거의 전 병력을 여유 없이 방패벽에 투입했다. 그들이 기다리던 기회였다.
“아스타, 이쪽을 맡아. 저긴 내가 치운다. 키르스텐! 스무 명만 뽑아서 이쪽으로 와!”
“하하하! 힐다 백부장! 이 기회에 본부 베르세르크들 순위나 한 번 정렬해 봅시다!”
“내가 말해 줄까? 넌 내 아래야!”
힐다가 병사를 이끌고 매복 부대를 향했다. 하지만 팽팽하게 대치하던 곳에서 스무 명과 힐다라는 버팀목이 빠지는 순간, 대치가 무너졌다.
“토마스 백부대, 일어- 섯!”
“합!”
상단을 가리고 있던 이들이 일제히 한 걸음 물러났다. 그와 동시에 하단을 막는 병사들이 방패를 비스듬히 세우며 일어섰다.
상체로 가해지던 압력이 사라지면서 아래로부터 미는 힘이 가해지자 힐다 측 방패벽이 흔들렸다. 이쪽 또한 단합된 베테랑인 만큼 무너지진 않았지만 빈틈이 생기는 것까진 막을 수 없었다.
“에베, 길을 연다!”
“그 명령만 기다렸습니다.”
‘힐다, 키르스텐이나 아스타한테 맡기더라도 네가 여길 지켰어야지. 날 너무 수비적인 사람으로만 본 거 아니야?’
“하인리히 백부대는 나를 따른다!”
“구멍을 막아!”
여섯 베르세르크가 가장 앞에서 힘으로 밀고 나갔다. 아스타는 병력을 충원해서 막으려고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철판을 맨손으로 구겨 버리고 발차기로 방패를 부숴 버리는 초인이 아니고선 감히 도전도 못 하는 자리가 베르세르크였다. 본부에 있는 이상 모든 병사 개인의 용력이 대륙 규모로 봐도 우수한 건 사실이지만, 그런 이들 사이에서도 독보적인 존재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독보적인 존재가 여섯이나 모여 있었다.
에베가 방패를 걷어차자 아스타가 나동그라졌다. 서로 방패를 겹쳐 충격을 나누지 않는 이상 에베의 힘을 버틸 수 없었다.
“상처를 벌린다! 제압하는 것보다는 밀어서 넘어뜨려!”
하인리히가 검을 휘두르며 부하들을 독려했다. 그의 지시에 여섯 베르세르크가 좌우로 쪼개져서 힐다 부대를 압박했다.
힐다의 병사들은 정면의 방패벽을 막으면서 옆으로 오는 하인리히의 병사들도 상대하느라 손이 어지러웠다. 처음에는 방패벽 후열의 이들이 나서서 막으려고 했지만 후열의 지원이 사라지자 전면의 방패를 쥔 이들이 당하는 일이 발생했다.
“힐다! 도와줘!”
힐다는 다가오는 매복 부대를 착실히 때려눕히던 중이었다. 하지만 마무리를 짓기도 전에 본대가 무너지는 바람에 일순 혼란에 빠졌다.
아스타의 판단력과 장악력이 부족했다. 베르세르크라고 하더라도 힐다가 직접 지휘했다면 뚫고 나오는 것만큼은 막았을 것이었다.
‘아스타. 너는 나중에 특별 면담이야, 이 자식아!’
“파트리샤, 십 보 후퇴해서 재집결! 아스타, 원진! 키르스텐, 그 자식들 꽉 잡고 있어! 나트르! 밀어!”
힐다가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며 지시를 내렸다. 어둠 속에서도 전선을 정확히 파악하는 그 능력에 하인리히가 싱긋 웃었다.
“부대 간격을 좁힌다! 토마스 백부대, 집결! 리하르트, 우측의 병사들을 모아! 에베, 파트리샤를 잡아!”
거대한 덩어리가 네댓 조각으로 갈라지더니 서서히 두 개의 거대한 집단으로 다시 뭉쳤다. 하인리히와 힐다가 서로 마주 봤다.
“우리 아직 친구지?”
“파트리샤랑 아스타 돌려주면.”
“그냥은 줄 수 없지.”
“우리도 꽤 잡았는데.”
힐다의 뒤를 친 매복 부대는 열 사람 정도가 제압당했고 나머지 스무 명이 똘똘 뭉쳐 저항 중이었다. 두 집단 사이의 대치가 계속되는 가운데 힐다와 하인리히가 직접 나서서 협상에 들어갔다.
“초장부터 너무 거칠게 했어. 여기서 그만두자니 애들 눈치 보여.”
“그러게 좀 적당히 하지 그랬어. 시작부터 전 부대를 다 끌고 오다니.”
“이번 건 제대로 통할 줄 알았지. 그냥 여기서 훈련 끝내려고 했거든. 너도 이건 놀랐지?”
“사실은, 그래. 적당히 기습하고 게다한테 맡길 줄 알았는데.”
“그러려는 계획도 있었고. 그래서 어쩌지?”
“일단 이 정도만 해도 둘 다 점수는 꽤 땄을 거 같은데…….”
“끝내려면 명분이 있어야 하잖아. 포로 교환이라고 해도 서로 교환하고 바로 싸울 만한 거리인데.”
“으음, 우리 측이 잡은 사람은 일단 병장 세 명에 병사 열두 명 남짓이니까…….”
“우리는 베르세르크를 포함해서 병장 하나에 병사 아홉 명.”
상벌이 걸려 있다지만 진짜 전쟁도 아니고 어지간한 건 현장 지휘관의 재량으로 두루뭉술하게 넘어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하필 두 백부장이 성실하기로 으뜸인 사람들이었다.
발데마르가 지켜보고 있는 건 차차하더라도 실전을 상정한 훈련은 진짜 실전처럼 붙어야 한다는 게 두 사람의 지론이었다. 당연히 전후 정리도 실전처럼 행해야 했다.
“이렇게 하자. 일단 포로는 등가 교환을 하고.”
“그럼 우리 애들은 병장 둘하고 애들 몇 명이 남는데.”
“베르세르크를 병장 둘로 칠게.”
“쟤 일단 계급은 그냥 병사잖아.”
“베르세르크의 가치가 있으니까. 그 정도는 될 거야.”
“좋아, 그럼 누구누구 보내 주게?”
“파트리샤 빼고 나머지 둘.”
“파트리샤는?”
“우리가 데리고 있다가 두 부대가 적당히 멀어지면 풀어 주는 걸로.”
“으음, 전례가…… 아, 그래. 되긴 하겠다.”
두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소곤소곤 협상하는 사이 두 부대는 숨을 고르고 전열을 가다듬었다. 각자의 부관이 언제든 협상이 결렬되면 바로 다시 싸울 준비를 갖췄다.
“그럼 부대로 와서 데려갈 애들 골라.”
“하, 이것도 잘못 고르면 애들한테 눈치깨나 보이겠는데.”
“상황 설명 잘하고. 아스타랑 프리드한테는 내가 말할 테니까.”
“알았어. 그럼 그렇게 하자.”
두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하인리히의 진영을 향했다. 가는 내내 힐다는 시작부터 매복이니 뒤통수치기니 너무했다며 하인리히의 어깨를 두들겼다. 하인리히는 그 모든 걸 웃으며 받았다.
“아스타, 프리드. 너희 둘은 석방이다.”
“나는?”
“넌 나중에. 협상 수단으로 남을 거거든.”
“크, 하인리히가 보기엔 내가 니들보다 더 중한갑다.”
“왜 아니겠어.”
두 병장이 투덜거리며 힐다의 뒤로 가서 섰다. 에베가 두 사람의 무장을 챙겨서 돌려줬다.
“괜찮나, 아스타?”
“네가 힐다한테 걷어차였으면 괜찮겠냐?”
“그래서 방패 위로 찼지 않나. 하하.”
“어우 씨, 욱신거려.”
“몸조심하고. 훈련하다 다치면 미안하니까. 고트 녀석 볼 면목도 없고.”
“알면 좀 살살해.”
“다 골랐다. 너희는 우리 부대로 복귀한다.”
“예, 대장님!”
힐다는 병사들을 이끌고 부대로 돌아간 뒤 하인리히의 부하들을 풀어 줬다. 그리고 매복 부대가 지나갈 수 있게 길을 열었다.
“백부장님. 이러면 전투는 어떻게 합니까?”
“속행은 불가야. 파트리샤가 아직 잡혀 있고 밤도 너무 깊어졌어. 시작할 때 난전을 일으키지 못한 시점에서 반은 실패한 셈이었지만 이거 손실이 뼈아픈데.”
“그럼 후퇴를 지켜보는 조건으로?”
“그래.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지면 풀어 주기로 했어.”
“알겠습니다.”
하인리히 부대가 행군 대열로 변모하더니 언덕 너머로 사라졌다. 힐다는 휘파람을 한 번 불고는 부대에게 전투태세를 풀라고 지시했다.
“이제 어떡합니까?”
“한숨 자야지. 아침에 뒤쫓자고. 어차피 쟤들도 피로해서 멀리 갈 순 없어.”
“알겠습니다.”
“부대 휴식!”
“다들 잘 배우는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지현 재무관님의 교안이 훌륭한 덕입니다.”
군인들이 훈련을 받는 동안, 실무자들도 교육에 여념이 없었다. 가장 먼저 도착한 행정병 지원자 세 사람은 지현의 새 교안으로 처음 교육 받는 영예를 누렸다.
네로와 리카르도가 교육을 맡아서 지현의 부담이 한층 줄었다. 두 사람 모두 현장에서 후임을 교육한 경험이 풍부했기에 가르치는 실력도 뛰어났다.
막 대학을 졸업하고 실무 경력이 부족한 파올로만 교육에서 빠져 지현과 다른 업무를 처리하게 됐다. 파올로는 느닷없이 쏟아진 업무량 때문에 아디슬의 고통을 체험했다.
인력 상황에 맞춰 업무량을 조정했다지만 여전히 둘이서 처리하기에는 많은 양이었다. 아디슬도 휴가라 그가 담당했던 잡무까지 떠맡았기에 파올로는 죽상이었다.
그나마 현금을 직접 만지는 업무만큼은 지현이 전담했기에 그 부분의 부담이 덜하다는 게 다행이었다. 아직까지는 외부인 취급인지라 파올로에게 현금을 맡길 순 없었다.
아무튼 업무량이 무지막지한지라 파올로는 하루가 다르게 실무에 익숙해지는 느낌이었다. 매일 여덟 시간 동안 앉아서 장부 정리만 하고 있으니 빠르게 익숙해지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이번 교육 기간은 어느 정도로 보고 계십니까?”
“최소 한 달은 집중해야겠지요. 저 혼자였으면 어려웠을 텐데 두 분이 도와주셔서 충분할 거 같아요. 전에는 업무도 하면서 교육까지 하려니까 가르치는 게 힘들었거든요.”
“허허, 사람을 가르치면서 업무까지, 심지어 혼자 하셨다고요? 사실은 용의 환신이거나 그러십니까?”
“평범한 사람이에요. 평범한 사람. 그냥 필요하니까 어떻게든 땜질하는 식으로 한 거지요. 그래서 지금 오는 장부 상태도 이렇잖아요.”
“고작 한 달 안 되는 시간 동안 그렇게 교육 받은 사람이 이 정도로 해냈으면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만.”
본부에 온 건 예비 행정병만이 아니었다. 기존의 행정병들이 작성한 장부와 그걸 설명하러 부대 간부가 따라왔다.
행정병들은 자신들도 배운 게 적어 힘들고 바쁘면서 간부들에게 서류를 읽고 이해하는 법을 가르쳤다. 그 덕에 지현이 상황 설명을 듣는 데 할 고생이 많이 줄었다.
아직 어색하고 부족한 점이 많지만 그럼에도 아예 모르는 사람보다는 정보를 이끌어 내기 수월했다.
“그리고 예산안 작성 말입니다.”
“네, 지금까지 말씀하신 대로라면 잘 이해하고 계신 거예요. 꼭 처음부터 완벽하게 만들려고 하면 안 돼요. 작전도 실제로 실행하면 전황이 작전대로 움직이지 않잖아요? 예산도 똑같아요. 일단 큰 틀을 짜 놓되 자금 흐름에 따라서 유동적으로 수정할 수 있어야 해요.”
“과연, 이해했습니다. 명석한 설명이군요.”
‘군인들이란…….’
니오 용병대를 가르칠 때는 역시 다른 무엇보다도 군대의 비유가 잘 통했다. 이것도 몇 번이나 반복되니 이젠 이골이 났다.
“저번 달 지출은 예산이랑 어떤 차이가 있었는지 설명해 주시겠어요?”
“예, 일단 예정에 없던 은퇴자가 두 사람 나왔습니다. 예, 그 항목이 맞습니다.”
“무슨 일이었어요? 전투 중 사상은 아닌 거 같은데.”
“병이었습니다. 다행히 역병은 아니었지만 처음 발병했을 때는 부대를 불태우고 이주해야 하는지 지부장님께서 꽤 오래 고심하셨습니다.”
“세상에…….”
이쪽 사람들이 지현의 세계에 비해 대체로 과학 기술이 충분히 발전하지 않았고 이해도가 떨어진다고는 하지만 전염병이 무서운 줄도 알고 어떻게 방역해야 하는지도 알았다.
전염병이 돌면 전염되지 않은 사람들을 재빨리 빼내고 그 공간을 불태워 방역을 시도했다. 환자와 접촉하는 이들은 천을 여러 겹 겹치고 오줌에 적신 마스크를 착용하는 등 전염을 방지하기 위한 노력도 있었다.
“아무튼 두 사람이 그렇게 은퇴하게 돼서 신병을 받느라 돈이 나갔습니다.”
“은퇴하는 사람에게 돈을 따로 챙겨 주진 않나요? 연봉의 얼마라든지.”
“마땅히 우리는 떠나는 전우를 챙깁니다. 다만 부대에서 주는 건 아니고 전우들이 성의껏 돈을 걷어서 줍니다.”
‘퇴직금 비슷한 건 있지만 시스템도 명시된 액수도 없구나. 이건 개선해야겠는데. 조만간 발데마르 씨한테 요청하고 포고문을 보내자.’
본부 부대에선 아직 퇴직자가 나오지 않았기에 지현도 일에 치여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그래도 관습법 성격이나마 전우를 챙기는 식의 퇴직금이 있어 다행이었다.
‘퇴직금은 사업자라면 몰라도 직원은 반길 수밖에 없는 제도지. 그 사업자도 발데마르 씨니까 문제없을 거야.’
지현은 재빨리 퇴직금 항목 건의를 메모하고 다시 업무로 돌아왔다.
요즘 들어 처음 만난 게 니오 용병대여서가 아니라 발데마르가 있어서 다행이었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지현은 원래 세계에서는 꿈만 꾸던 경영을 이곳에서 하나하나 실현하고 있었다.
발데마르는 지현이 생각하기에 경영자로서 이상적인 마음가짐을 갖췄다. 물론 누적된 문제를 해소하지 못해 용병대의 재정 악화를 막을 수 없었지만 그건 자본 운용 능력의 부재였지 영업 능력이 떨어지거나 직원 복지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항상 직원을 가장 먼저 생각하고 또한 그렇기에 지현이 제안하는 무엇이든 진지하게 고민했다. 누구의 말도 무시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생각하는 그 태도는, 직위만 높은 범속한 사람들과 차원이 달랐다.
거기에 더해 사람을 적소에 배치하는 안목도 있고 한 번 믿음을 주면 끝까지 지원했다. 또한 본인의 능력마저 출중하여 나갔다 하면 막대한 돈까지 벌어 온다. 이보다 좋은 상사가 있을 리 없었다.
‘이제 경영 업무만 잘하면 진짜 완벽할 텐데.’
흠이 있다면 지현의 가르침을 피한다는 거 딱 하나였다. 그것도 본인이 강경하게 피한다기보다는 몸이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것에 가까웠다. 오히려 본인은 배우려는 의지가 있는데도 머리에 내용이 안 들어가는 느낌이랄까.
지현은 문득 졸음과 싸우던 발데마르를 생각하고는 쿡쿡 웃었다. 지현의 웃음에 행정병들과 부대 간부가 의아한 눈으로 지현을 바라봤다.
“아, 미안해요. 잠깐 다른 생각이 나서요. 이제 괜찮아요.”
“알겠습니다.”
지현은 다시 업무로 눈을 돌렸다. 원래 국지전 부대였으나 사냥 부대로 전환한 부대는 첫 한두 달 가량 적응기를 거치고 영업 이익을 내는 추세였다.
다른 전환 부대들도 대체로 유사했다. 그래프를 그린다면 뚜렷하게 전환기와 안정기로 구분이 가능해 보였다.
“사냥 부대는 정말 일감이 많은 모양이에요.”
“예? 아,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국지전보다야 사냥 의뢰가 훨씬 많은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야생 동물 정도면 지역 사냥꾼을 쓰면 되는 일 아닌가요? 이 정도로 의뢰가 많을 줄은 몰랐는데요.”
전환 부대들은 대체로 첫 달은 성적이 저조했지만 그 이후부터는 의뢰가 물밀듯이 몰려드는 양상을 보였다. 원래 사냥 부대였던 곳들에 비하면 아직 수익이 크지도 않고 부대에 따라 들쑥날쑥한 편차를 보이지만 국지전 부대였을 때보다 수입이 안정됐다.
“사냥 때문에 용병을 부를 정도면 마을 근처에 산짐승이 내려왔다 정도가 아닙니다. 사냥 전문이라 해도 용병은 사냥꾼이 아니라 군대니까요.”
“그 말씀은?”
“사람의 영역이 무리 짐승의 영역과 충돌하게 될 때가 보통입니다. 사람에게 밀려서 이주한 무리가 도로 인근에 영역을 잡고 행인을 습격할 때도 있습니다.”
“무리 지어 다니면 확실히 사냥하기는 더 어렵겠네요.”
“그렇게 되면 한두 마리 사냥한 정도로는 일이 끝나지 않습니다. 장기간 사냥에만 전념할 수 있는 군인들이 필요합니다.”
산짐승 한두 마리 사냥하는 정도라면 몰이꾼을 모으고 기사 몇 명 보내는 걸로 충분했다. 하지만 늑대나 멧돼지 같이 무리 지어 사는 짐승과 부딪칠 경우는 그렇게 일이 쉽게 풀리질 않았다.
늑대 무리는 사냥에 능숙했다. 단련된 기사라 하더라도 만만히 볼 적이 아니었다. 인간과 영역이 부딪칠 정도로 가까이 사는 늑대들은 인간을 학습했기에 말을 탄 기사의 힘도, 날카로운 무기의 위험성도 알았다.
늑대들은 어떻게 하면 말을 놀래서 기사를 떨어뜨릴 수 있는지, 어디를 물어야 갑주로 보호받지 않는 연한 살을 찢을 수 있는지도 알았다. 나이든 늑대가 어린 늑대에게 가르쳐 주기 때문이다.
또 무리 지은 사냥꾼이 얼마나 강한지 알았다. 그렇기에 사냥꾼 무리의 냄새가 나면 무리를 이끌고 도망치기도 했다.
그런 늑대 무리를 퇴치하려고 나선 기사는 며칠에 걸친 추적에 지쳐 저택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럼 늑대는 다시 마을을 습격하고.
늑대보다 더 문제가 큰 건 멧돼지였다. 늑대는 인간의 강함을 알기에 자신의 영역을 어지간히 깊이 파고들지 않는 이상 인간과 싸우지 않았다. 인명 피해나 가축 피해 이외에 재산 피해도 덜한 편이었다. 하지만 멧돼지는 달랐다.
이 저돌적인 짐승은 수십 마리씩 무리를 지어 살면서 나무뿌리부터 동물의 사체까지 안 먹는 것도, 못 먹는 것도 없다. 전투력도 높아 이들 무리와 마주치면 말을 탄 기사도 꽁지가 빠지게 도망쳐야 했다.
더군다나 자신의 영역에 인간이 들어와 살면 인간의 농작물과 가축을 자신에게 바친 공물로 취급했다. 농작물이 자라면 떼로 몰려와 긴 주둥이로 땅을 파헤치고 뿌리째 뽑아 먹어 치우는 것이다.
또 멧돼지는 결코 늑대보다 덜떨어지지도 않았다. 오히려 지능이 대단히 높은 편에 속했다.
사냥꾼의 공격을 피해 도망치는 척하다 무리와 함께 역공을 가하거나, 화살에 맞아 죽은 척을 하여 사냥꾼을 유인해 기습하는 경우도 있었다. 심지어 사냥꾼이 자신의 영역에 들어온 걸 냄새로 알고 무리와 함께 매복하다 습격하는 경우도 있었다.
머리의 가죽이 두꺼워 정면으로 쏜 화살은 박히지도 않고 튕겨 나갔다. 겨우 한 마리를 쏘아 잡았다 싶으면 분노한 수십 마리 멧돼지 떼의 맹진으로부터 살기 위해 도망쳐야 했다.
말을 타고 창을 꽂아 넣으면 잡을 수 있지만 어지간히 용맹한 전마라도 멧돼지 무리를 향해 돌격하라는 명령은 거부했다. 바우그처럼 겁을 상실한 말이 아니고서야 한 번 부딪치면 자기 다리가 부러질 게 뻔한 곳에 들이대진 않았다.
이럴 때 기사들이 찾는 게 바로 니오 용병대였다. 니오인은 짐승의 습성을 파악하고 그들의 영역을 철저히 분석했다. 덫을 놓고, 위장을 하고, 소리와 냄새로 무리를 몰아 창과 화살로 단박에 일망타진했다.
사냥에 능숙하기도 능숙하지만, 어지간한 기사가 철퇴로 두들겨도 오히려 성을 내는 야생 동물의 머리통을 단박에 쪼개 놓는 괴력의 소유자가 부대마다 하나씩은 꼭 끼어 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사냥의 제1철칙이 짐승과 정면에서 싸우지 말라는 것인데 니오인은 상황이 여의치 않다 싶을 때 정면으로 창을 찔러 멈출 수도 있었다. 덕분에 전략 선택의 폭이 훨씬 넓었다.
“여러모로 니오 용병대라서 가능한 일이네요.”
“바로 그겁니다. 내 자랑 같아서 참 낯 뜨거운 말이지만 이것도 우리니까 가능한 겁니다.”
“영주들도 시간 좀 들여서 수십 명의 사냥조를 짜고 노력하면 늑대나 멧돼지 무리를 몰아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릴 고용하면 더 빨리, 더 싸게 해결할 수 있지요. 그게 우리 용병대의 강점입니다.”
병사들이 껄껄 웃었다. 그걸 보고 지현도 따라 웃었다. 자신감이 넘치는 건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사람이 필요하다고 잘 살고 있던 야생 동물을 쫓아내는 것 같아 마음 한편이 찔리는 건 어쩔 수 없네.’
이 또한 생존경쟁이라. 지현은 그렇게 마음을 달랬다.
“아무튼 부대를 전환하고 나서부터 조금씩 수익이 늘어나는 건 좋은 일이에요. 전환 부대는 모두 저번 달부터 흑자로 전환됐네요.”
“예, 뭐. 사실 지금이 전쟁 비수기인 점도 한몫했습니다.”
다른 모든 일에 ‘철’이 있듯이 전쟁에도 그런 철이 있었다. 한겨울은 군대와 병량이 움직이기 힘들고 날씨의 변화로 인해 비전투 손실이 빈번하기 때문에 전쟁의 비수기였다.
농번기 역시 비수기였다. 농사와 상관없는 용병이나 상비군 등 전쟁 전문가만으로 군대를 꾸리더라도 아예 야지에서 회전을 벌여 결판을 짓지 않는 이상, 상대의 영토를 침범하면 농지에서도 싸워야 했다. 자칫하면 그 지역의 농사를 결딴낼 수도 있었다. 당연하지만 이런 짓을 저지르면 상급 영주나 황제가 간섭을 한다. 싸움 자체를 농지랑 먼 곳에서만 치르든지, 아니면 애초에 싸우질 말든지!
전쟁을 지휘해야 할 영주들 역시 농번기에는 할 일이 많았다. 사법, 입법, 행정의 분화는 고사하고 군인과 행정관도 분리가 덜 된 사회이기 때문이다.
당연히 영주가 전쟁한답시고 떠나 버리면 통치 시스템이 경직된다. 대리인을 세운다지만 대체로 대리인은 그렇게 뛰어난 행정가가 아니었다. 이따금 걸출한 오른팔을 찾아 그에게 싹 맡기고 본인은 전쟁만 하는 군주도 있지만 그런 자는 극히 소수였다.
지현은 그런 설명을 듣고 야드가르가 파종 기간이라 전쟁을 길게 끌기 싫어했던 것을 떠올렸다. 뿐만 아니라 농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을 전장으로 택했던 것도.
“역시 부대를 전환하길 잘했지요?”
“지부장님도 처음엔 탐탁지 않으셨던 모양이지만 지금에 와선 잘했다고 생각하십니다.”
“좋은 소식이네요.”
“다만, 그, 지현 재무관님에 대해서는 여전히 평가가 높지 않은 투의 말씀을 종종 하십니다.”
“네? 아니 왜요?”
“그, 미워한다거나 그런 건 아닙니다. 아무래도 재무관님은 외지인이기도 하거니와 아무래도 지부장들은 일은 늘었는데 재량권은 줄어들어서…….”
“아아. 그건 예상했던 일이지만, 역시 부대 사람에게 들으니 조금 쇼크네요.”
“결코 지현 재무관님을 폄훼한다거나 미워한다는 건 아닙니다. 그냥 조금 투덜대시는 정도입니다.”
간부는 지현의 반응을 보고 괜히 말했다 싶어 황급히 덧붙였다.
지현 역시 지부장급 인사의 반발은 예상했던 터였다. 성과를 보이면 바뀔 거라 생각했는데 아직은 갈 길이 먼 모양이었다.
사실 지현이 모른다뿐이지 전환 첫 달 동안 수익은 여전히 적고 업무량은 몇 배씩 폭증하는 바람에 기존 사냥 부대와 전환 부대의 장들끼리 모여서 지현을 축출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당연히 발데마르 역시 책임을 물어 해임당할 뻔한 위기였다.
그런 지부장들을 다독여 사태를 진정시킨 건 세베리였다. 세베리는 다른 지부장들 사이에 오가는 이야기를 가장 먼저 캐치하고 그들에게 서신을 보내 저간의 사정을 듣는 한편 가까운 지부장부터 직접 만나 면담을 가지며 그들의 불만을 억눌렀다.
세베리라도 혼자 여러 손을 막기는 버거워 시간을 번 정도에 불과했지만 그렇게 시간을 번 사이 어느 정도 홍보가 되면서 의뢰가 늘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불만이 사그라졌다.
부대원들이 만족하는데 지부장이 독단으로 발데마르에게 해임을 청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수익이 나는 만큼 큰 사고라도 터지지 않는 이상 지현을 향한 정치 공세도 없을 것이다.
“이따금 보이는 마수 사냥 의뢰도 있군요. 이쪽은 보통 단독 개체지요?”
“그렇습니다. 마수가 무리를 이끄는 경우도 있다고는 들었습니다만, 그러면 전쟁보다 더 큰 의뢰가 됩니다. 최소한 선제후 가문 수준의 대영주에게 상신될 정도입니다.”
“어, 그 정도로 큰 위험이었어요? 마수가 무리를 짓는 건가요?”
“아닙니다. 일반 짐승 무리인데 통솔자가 마수인 겁니다. 마수만으로 이뤄진 무리가 있었다면 영지를 버리고 도망쳐야 했을 겁니다, 하하.”
“마수가 통솔하면 얼마나 위협적이기에 그 정도로 평가가 상향 조정되는 거예요?”
“글쎄요, 저도 직접 본 일은 없지만 왕실에 기록이 남을 정도라고 합니다. 화산 폭발이나 가뭄, 홍수 수준의 재해로 취급하는데 마지막 기록에 따르면 용병 1천 명과 사냥꾼 200여 명을 풀어서 처리했다고 합니다.”
“세상에…….”
“사실상 일군을 지휘하는 장군과 싸우는 거나 마찬가지라는데 저도 그 기록을 직접 본 건 아니라서 모르겠습니다. 욘 백부장님 말씀으로는 인근 무리 짐승을 다 통합해서 늑대만 수백 마리였다나 뭐라나.”
“그건 듣기만 해도 무섭네요.”
“하하하. 요즘엔 마수가 나타나자마자 빠르게 처리해서 그렇게 대규모 문제가 되는 일도 없습니다. 인간의 힘이지요.”
“그렇군요. 다행이에요.”
마수를 잡는 데 출동하는 니오 용병대의 수는 아무리 많아도 백부대를 넘는 일이 없었다. 반대로 말하면 고작 한 마리를 사냥하기 위해 그 니오 용병대의 백부대 하나가 통으로 움직이는 셈이었다.
‘본부에서 사냥 의뢰 받을 때는 꼭 위험성을 확인하라고 하자.’
지현은 그렇게 다짐하며 다시 장부를 살폈다. 의뢰비용 이외의 수익은 사냥감에게서 나오는 부산물이었다. 전리품에 비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은 대단히 적었다.
국지전이라면 포로의 몸값, 무기, 갑옷이 기본으로 딸려 왔다. 멀쩡한 갑옷 한 벌만 건져도 이미 금화가 몇 개인데 거기다 포로의 지위가 높아지면 버는 돈도 어마어마하게 늘었다.
아주 드물지만 고위 귀족을 포획했다면 몸값을 받기도 전에 고용주가 더 큰 돈을 주고 사 가는 경우도 있었다. 이럴 때는 협상하기에 따라서 정말 무지막지한 금액, 거의 한 개 부대 1년 수익을 단박에 거둘 수도 있었다.
반면 사냥으로 얻을 수 있는 부산물은 가죽, 엄니, 고기와 내장, 뼈 정도가 전부였다. 그중 고기와 내장은 시장가가 없을 정도로 저렴해서 그냥 그 자리에서 먹어 치우는 게 대부분이었다.
‘이런 건 아쉽지만, 가죽도 꽤 값나가는 전리품이니까.’
아직 섬유 산업이 대규모로 발달하지 않았기에 가죽 역시 가치 있는 상품이었다. 과거 어떤 왕국은 사냥이 주산업이었고 주력 수출품 역시 가죽이었는데 그걸로 막대한 재화를 벌어들여 ‘가죽 더미 위에 지은 왕국’이란 별명을 얻었다.
여전히 철갑이나 포로에 비하면 대단찮은 수준이지만, 부가 수익을 낼 수는 있었다. 무엇보다 사냥 의뢰가 자주 있어서 부산물을 빼고도 수익을 거둘 수 있다는 게 더 중요했고. 개인 용병이라면 몰라도 기업인 이상 한탕주의는 멀리하는 게 좋았다. 확실한 건수라면 몰라도 기업 경영 자체를 도박이나 복권처럼 할 순 없으니까.
“아무튼 수익이 난다는 건 중요한 일이지요. 전리품 수익은 그때그때 들쭉날쭉하기도 하고. 그리고 지출은……. 급여, 세금, 임차료, 식대는 복리후생비고, 훈련비……. 아, 혹시 의뢰인이나 요인을 접객할 때 쓴 비용은 어디에 포함시켰나요?”
“잡무 비용으로 통일했습니다. 흔치 않은 일인지라.”
“이 장부에는 없는 건가요?”
“예.”
“음, 원래대로라면 접대비 계정으로 넣어야 하지만, 본부 이외의 부대에 본토 요인이나 귀족이 방문하는 일은 많이 드문가요?”
“거의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귀족이 방문하는 일이 없진 않지만 흔치는 않습니다.”
“알겠어요. 그리고 수선비랑, 운반비. 그나마 항목이 적어서 다행이에요.”
‘우으, 이걸 벌써 네 달째 하고 있지만 역시 컴퓨터 몇 대만 있었으면 좋겠다. 엑셀만 간신히 돌아가는 거라도 감사하겠어.’
일단 회계 서식을 통일하기로 했으니 접대비도 계정을 분리할 필요가 있었다. 앞으로 오는 행정병들에게도 이걸 가르치고 전파해야 했다.
앞으로는 용병대를 방문하는 손님을 접대하는 것뿐만 아니라 용병대가 직접 외부에 영업을 해야 했다. 잠재 고객을 상대로 선물을 보내거나 귀족에게 로비를 하는 등의 활동도 다 접대비에 포함될 것이다.
몇몇 부대는 이미 비슷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인근 토호와 귀족들에게 강한 힘을 보이는 한편 우호의 제스처와 가벼운 선물 등을 보내 인심을 장악하는 거다.
그저 강하기만 한 집단은 견제의 대상이 되기 쉬웠다. 발데마르만 하더라도 이미 여러 제후들에게 견제를 받고 있으니 이런 일은 영업에 좋지 않았다. 용병 일을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 업계에 몸담고 있는 이상 균형을 잘 지켜야 했다.
“그럼 이쪽은 이걸로 됐고. 판관비 내역에 감가상각은, 이건 안 가르칠 수도 없고 가르칠 수도 없고…….”
지현이 한탄을 섞어 중얼거렸다. 속으로 되뇌듯 버릇대로 혼잣말한 것에 불과했지만 그 말에 파올로가 마치 사슴처럼 귀를 쫑긋거렸다.
“그게 무엇입니까?”
“예?”
“방금 가치 무슨 비용이라고 말씀하신 게…….”
“아.”
순간 지현은 파올로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퍼뜩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방금 자신이 중얼거렸던 감가상각을 떠올리고는 애매한 웃음을 지었다.
‘감가상각이란 단어가 없으니까 뜻을 풀어서 번역됐나 보네.’
“회계 원리의 하나이긴 한데.”
“저는 완전히 처음 들어 보는 단어였습니다. 혹시 다른 장부처럼 저희가 알지만 단어가 다른 겁니까?”
“아마 아닐 거예요.”
감가상각 역시 근대 이후의 개념이었다. 상회가 있고 상품을 취급하는 이상 유사한 관행이나 경험적 계산 방식은 있어도 감가상각과 같은 체계가 있기는 어려웠다.
“좋아요, 파올로 씨만 가르쳐 드릴 수도 없으니 일단 행정병분들은 잠시 휴식 시간 가지고, 회계사분들은 모여 주세요.”
“넵!”
행정병들은 휴식 지시에도 흩어지지 않고 자리에 남았다. 복습을 하려는 의도보다는 지현이 무얼 가르칠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이걸 대체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천천히 하셔도 좋습니다.”
“아직도 뭔가 우리가 배우지 못한 새로운 개념이 남아 있는 모양이군요.”
“그게 아니에요. 가르쳐 드리긴 하지만 실무에 적용하기가, 으으……. 알았어요. 일단 들어 보세요. 여러분이 고향에 돌아가서 자기 상회에 이걸 적용할지 말지는 개인의 선택이지요. 하지만 당장 용병대에 적용하는 건 어려워요. 아니 불가능해요.”
“대체 무엇이기에 그러십니까?”
‘유가자산만큼이나 이 세계에선 쓸모없는 거요!’
……라고 말해 봤자 유가자산이 뭔지 모르는 이들이 알아들을 리가 없었다. 같은 이치로 감가상각이 뭔지 이들이 알도록 만드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다.
“후. 좋아요. 일단 순서대로 설명해 볼게요. 모든 가치가 있는 건 그 가치가 변해요. 제 말이 맞지요?”
“모든 것이 말입니까?”
“네. 모든 형태가 있는 건 형태가 변하기 마련이고 모든 값어치 있는 물건들은 언젠가 그 효용 가치가 떨어지기 마련이에요. 아 물론 보석이나 귀중품처럼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가치가 올라가는 경우도 있지만 제 말은 토지를 제외한 거의 모든 물건의 효용성은 시간이 지나면 떨어진다는 뜻이에요.”
지현은 말을 하면서 필사적으로 예시를 찾았다. 모든 물건이 가치가 떨어진다면 모든 물건이 예시가 될 수 있지만 미리 교육하려고 준비한 것도 아니고 머리에 떠오른 대로 말하는 지금 이들이 이해하기 쉬운 예시는 바로 생각나질 않았다.
“예를 들면 식료품!”
“아, 네.”
“식료품은 우리가 먹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썩어서 가치가 떨어져요. 그렇지요?”
“예, 물론입니다.”
“또는 갑옷이나 방패나 칼도. 누군가한테는 여전히 소장 가치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건 수집품으로서 그렇지 원래 기능을 하는 건 아니잖아요. 튼튼한 칼도 언젠가는 무디어지고 부러질 수 있고 갑옷도 망가질 수 있지요?”
“네. 일단 모든 물건의 가치가 언젠가 없어진다는 걸 말씀하시고 싶다는 건 알겠습니다.”
“좋아요. 거기가 시작이에요. 우리가 쓰는 모든 물건은 언젠가 가치가 없어져요. 물론 그건 상당한 시간을 요구해요. 새로 산 갑옷이 느닷없이 부서지지는 않지요. 전장에서 오랫동안 충격을 받아야 하지요.”
“그렇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갑옷을 살 때는 비용을 한순간에 지불한다는 거예요.”
“네?”
‘아차, 너무 빨랐다.’
지현은 머리를 정리하면서 말을 고쳐 나갔다.
“그러니까 갑옷을 구매하면서 금화 열 개를 줬다고 쳐 봐요. 그리고 만약 그 갑옷을 10년 동안 입어요. 그러면 갑옷의 효용 가치는 매해 금화 한 개 어치라고 할 수 있어요.”
“음, 헷갈리기 시작합니다.”
“괜찮아요. 원래부터 개념을 알지 않으면 누구나 헷갈려요. 다시 정리해 볼게요. 금화 열 개를 주고 갑옷을 사서 10년 동안 입는 건, 갑옷을 공짜로 사서 매해 금화 한 개씩을 지불하는 것과 동일해요.”
“어째서 그렇게 됩니까? 자본은 분명 갑옷을 구입하는 순간 빠져나갔잖습니까?”
“재무상태표를 쓸 때는 대변과 차변을 모두 작성하지요?”
“파올로 군. 꼭 현금이 빠져나가야지만 지출이 아니고 현금이 들어와야지만 수입이 아니잖은가? 그걸 말씀하시는 것 같네.”
“그래도 여전히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갑옷을 외상으로 사서 매해 금화 한 개씩 갚는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니요. 실제 자산의 이동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그보다는 편의를 위해서 가정을 기반으로 계산하는 아우우…….”
지현의 설명 능력이 떨어진다기보다는 생각의 기반이 너무 다른 게 문제였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어느 정도 공통의 기반을 가진 걸 설명했기에 지현의 설명을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이번 건 새로워도 너무 새로웠다.
지현은 진땀을 흘리며 설명을 고쳐 봤다. 생각해 보면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도 태반은 못 알아듣는 내용이었다. 회계사들이 못 알아듣는 것도 당연했다.
“자, 잘 보세요. 금화 열 개를 주고 갑옷 한 벌을 사서 10년 동안 입는다면 10년 동안 갑옷의 기능과 효용을 계속 누리고 있지만 그 비용은 없지요. 10년 전에 한 번 지불을 했기 때문이에요.”
“당연합니다.”
“이걸 기업, 상회나 용병대 규모로 키워 볼게요. 갑옷을 사는 순간 막대한 지출이 발생해요.”
“그렇습니다.”
“그럼 그걸 고스란히 재무제표로 옮기면 어떻게 되지요? 지출만 넣어서요.”
“당기이익이 적자가 되겠지요.”
“하지만 우린 갑옷이 있지요.”
“예. 그럴 경우 자본은 감소하고 대신 상품을 얻었으니 차대변을 더하고 빼서 그대로 남겠지요. 각 갑옷이 파손되어 영구히 망실하거나 외부에 판매해 수익을 거두지 않는 이상은 말입니다.”
“맞아요. 아주 정확하게 집었어요. 하지만 만약 이걸 판매하지 않고 우리가 10년 동안 입은 끝에 전량 폐기하게 된다면?”
“10년 후에 대폭 적자 상황이 되겠군요.”
리카르도는 자신의 상식선에서 모두 대답했다. 거기가 바로 지현이 제대로 설명해야 하는 부분이었다.
“맞아요! 그렇지요. 그런데 아니요, 그렇게 되면 안 돼요.”
“예?”
“아니, 지금까지 가르친 대로 하면 그게 맞기는 한데 현실과 조금 동떨어졌다는 거예요.”
회계사들은 도무지 지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했다. 지현은 종이 한 장을 꺼내서 그들 앞에 내밀고 거기에 선을 쭉 그었다.
“잘 보세요. 우리는 10년 동안 갑옷을 이용했어요. 갑옷 덕분에 부상자가 줄어들고 전투에서 승리하고 많은 수익을 거뒀지요. 그 과정에서 갑옷은 서서히 마모됐고요.”
선의 왼쪽 끄트머리에 옷 모양을 그린 지현은 선 위에 아홉 개의 사선을 그었다. 그리고 선의 오른쪽 끝을 향해 화살표를 그렸다.
“하지만 만약 10년 뒤 갑옷을 폐기하며 그걸 전부 손실로 기록하면 어떻게 되겠지요? 분명 10년 동안 꾸준히 수익을 냈음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 용병대는 대폭 적자를 기록하게 돼요. 왜지요? 갑옷이 사라져서. 과연 갑옷이 10년 만에 갑자기 뿅 하고 사라진 걸까요? 아니요! 10년에 걸쳐 효용을 다했기 때문이에요.”
지현은 각 사선으로 나뉜 열 개의 구간 위에 동그라미를 하나씩 그렸다. 그리고 갑옷 그림이 있는 왼쪽 끄트머리에 동그라미 열 개를 그리고 오른쪽 끝에는 X자를 열 개 그렸다.
“그렇게 되면 재무제표를 분석할 때 큰 실수를 하게 돼요. 적자가 났지만 원인을 알 수 없을 수도 있고, 아니면 갑옷의 손실을 원인이라고 표기하는 잘못된 인과 추론을 내놓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대신에!”
지현은 오른쪽 끝에 있던 X표를 모두 감싸는 커다란 원을 그리더니 대신 선 위에 있는 열 개의 동그라미 위에 X자를 하나씩 그렸다.
“대신 재무제표에 갑옷을 구매한 시점부터 매해 금화 하나씩 손실로 표기한다면 어떨까요? 10년이 지나 전량 폐기하더라도 지금까지 당연히 있었던 손실의 결과가 될 거예요. 당연하지만 이건 자산의 변동이 아니라 자본의 변동이에요.”
지현은 거기까지 설명하고 앞을 봤다. 세 회계사의 얼굴을 본 지현은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해 안 되시죠?”
“네에, 사실은 그렇습니다.”
“괜찮아요. 저도 그러니까. 하아, 이걸 어떻게 설명한담.”
‘내 입이 방정이지, 으휴. 왜 일할 때 아무도 듣는 사람 없다고 혼잣말하는 버릇이 생겨 가지고는!’
“일단 회계 원리상 장기간에 걸친 상품의 가치 하락을 한 분기에 몰아 적으면 안 된다는 말씀은 알겠습니다만.”
“거기까지 알면 다 안 거예요. 다행이네요.”
“그래서 그걸 장부상에 대체 어떻게 기입해야 합니까?”
“내 말이 그 말이에요.”
‘진짜 컴퓨터 갖고 싶다. 아니 최소한 내 스마트폰이라도 작동하면 거기다 싹 밀어 넣어 버리고 싶다.’
“재무관님. 질문을 좀 해도?”
“네, 네로 씨. 뭔가요?”
“지현 재무관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바는 알 것 같습니다. 상회 간부들은 물건의 수명이 다해 망실했을 때 장부상으론 이를 적는 순간 상회의 가치가 폭락한 게 되어 버린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요?”
“하지만 그걸 장부에 어떻게 기입할 것인가는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갑옷만 하더라도 10년을 간다는 걸 어떻게 보장합니까?”
“네. 그런 문제도 있지요. 감가상각은 실제 가치의 변동을 기록하는 게 아니에요. 편의를 위해 가정을 넣고 그걸 기입하는 거지요. 가정보다 빠르게 가치가 떨어져 버리면 그건 또 그거대로 기입하는 규칙이 있어요.”
“재무관님의 세계는 퍽이나 복잡한 체계를 갖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렇지……. 제가 말씀드린 적이 있던가요?”
지현은 딱히 자신이 외계인이라는 걸 숨기지 않는다. 그렇다고 떠들고 다니지도 않는다.
외계인이라는 아주 특이하고 특별한 위치는 지현에게 자유를 보장해 주는 전가의 보도였지만 지나치게 남용할 경우 언제든 지현을 구속할 수 있는 족쇄이기도 했다. 힘을 보태 줄 일가친척이나 동료는 죄 올 수도 없는 다른 세상에 있다는 뜻이니까.
지금은 용병대의 일원으로 활동해서 그런 문제가 어느 정도 해소됐지만 그렇다고 만나는 사람마다 자신이 외계인인 걸 설파하고 다닐 필요는 없었다. 기껏해야 다른 외계인의 정보를 얻기 위해 일부 상인들에게 알린 정도일까.
세 회계사에게도 자신이 외계인이라고 밝힌 적은 분명 없었다. 하지만…….
“이 늙은이는 코흘리개 시절부터 짠 바다 내음을 맡으며 살았고 그게 벌써 30년이 넘었습니다. 서쪽으로는 노턴브리아 사람도 만났고 동쪽으로는 술탄국의 라카프인도, 칸 제국의 무역상도 보았습니다.”
네로가 차분히 말했다. 파올로는 네로가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이 네로와 지현을 번갈아 보았다.
“하지만 가장 멀리서 온 사람은 노아리유-라는, 이거 참 발음하기 곤란한 나라에서 온 상인이었지요. 마치 지현 재무관님처럼 말입니다. 그 상인의 이름도 지현 재무관님처럼 발음하기 힘든 짧은 음이었지요.”
“그, 그 나라는 어디 있지요?”
“아주 멉니다. 사막의 무역로를 따라 1년을 넘게 가야 겨우 닿을 수 있는 나라라고 했습니다. 뱃길로 가도 거의 그 정도 걸리는데 여러 대륙을 빙빙 돌아서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
“가 보고 싶으십니까?”
“아니요. 괜찮아요.”
“아무튼 거기까지가 우리가 닿을 수 있는 세상의 전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니오인들은 서쪽에서 또 새로운 대륙을 찾았다는 전설이 있습니다만, 저는 그 사람들을 만나 본 적이 없어 모르겠군요.”
“그건, 제가 만나 본 어떤 사람들과도 닮지 않았다는 말씀인가요?”
“아니요. 제가 만난 누구보다도 귀티 나게 생기셨다지만 닮은 사람이 없는 건 아닙니다. 콕파스인들과도 닮으셨고 어찌 보면 라카프인과도 닮았고, 또 노아리유 사람과도 닮으셨군요. 생김새가 아닙니다. 재무관님은 물론 보기 드문 인종이지만 그게 아닙니다. 이것입니다.”
네로는 그리 말하며 자신이 들고 있던 재무제표를 지그시 눌렀다.
“비슷하다고는 말씀드렸지만, 이 기록법은 저희가 쓰는 것과 다른 차원에 닿아 있습니다. 저희가 경험을 토대로 표면만 따서 만든 누더기 같다면, 이쪽은 그보다 더 근원의 무언가를 기반으로 잘 짜인 설계로 지은 건물 같습니다.”
네로의 말에 리카르도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배우는 입장이었기에 그들은 기쁨과 환희로 가득 차 있었지만 기술의 수준만을 생각했을 때 이는 소름 돋는 물건이기도 했다.
“딱히 숨기거나 속이려던 건 아니에요. 말할 필요가 없었던 거지.”
“저 또한 그리 이해했습니다. 숨기려고 했다면 이런 걸 저희에게 보여 주시지도 않으셨겠지요.”
지현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이지 얕잡아 볼 수 없는 세상이었다.
지현이 가진 발달한 지식은 꼭 똑같은 세상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논리와 이해력만 있다면 어느 세상, 어느 시대의 누구든 이해할 수 있었다.
지현이 남보다 더 알고 있다고 거들먹거린 적은 없지만, 가르치는 입장이었기에 본인도 모르게 조금은 우쭐했던 모양이었다. 지현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자신을 다잡았다.
“말씀하신 대로 저는 다른 세계에서 왔어요. 이곳 말로는 슈틸나울트라고 하지요.”
“우리말로는 엑스테르민투스라고도 부릅니다. 하지만 말은 중요한 게 아니지요.”
“맞아요. 말은 중요한 게 아니지요. 처음으로 돌아가자면, 말씀하신 대로 이 회계 기법은 제 세계에서 고도로 복잡화된 기업의 관리를 목표로 만든 거예요. 그러다 보니 이곳에선 적용이 어렵거나 불가능한 부분도 있지요.”
“아아, 작성할 때마다 느꼈던 뭔가 어색했던 게 무엇인지 이제 알 것 같습니다. 뭔가 더 있어야 할 것 같으면서도 없고, 그러다 보니 왜 있는지 모를 부분도 있으면서 실무에선 또 완전히 적용이 되다 보니 기이했습니다. 저는 제 이해력이 부족해서 그런 줄 알았는데…….”
“빼야 할 만큼은 뺐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더 빼야 할 게 남았나 보네요. 미안해요. 리카르도 씨의 이해력은 문제없어요. 오히려 너무 뛰어날 정도라서.”
지현이 어색하게 웃었다. 회계 전문가도 아닌 지현에게 장부 기입 방식을 바꾸고 다듬을 정도의 능력까진 없었다. 서로 유기적으로 맞물려야 하는 회계학의 특성상 특정 부분을 그냥 빼 버리고 나니 전문가는 어딘가 이상하다는 걸 느낀 모양이었다.
“그래도 실무에 문제는 없지요? 그 어색한 부분은 여러분이 스스로 연구해서 다듬으셔야겠어요.”
“예에. 이거 참, 또 새로운 숙제를 주시는군요.”
“아니, 두 분 어르신 잠깐. 지금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지현 재무관님은 엑스테르민투스고 이건 다른 세상의 지식이라고요?”
“지금까지 뭘 들었나, 자네?”
“젊은이가 느리군, 그래.”
당연한 혼란을 겪는 파올로에게 당연하지 않게 침착한 두 베테랑이 면박을 줬다. 파올로는 억울하다는 듯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파올로 씨가 놀라는 게 당연해요. 하지만 그 엑스, 슈틸나울트라고 해서 제가 괴물이거나 엄청 대단한 존재인 건 아니에요.”
“희귀한 정도를 생각하면 신화적인 존재이신 건 맞습니다.”
“아무튼 저라는 개인을 보라는 말이지요. 여러분이 배우고 있는 것도 무슨 저주받은 지식이거나 한 게 아니라 여러분이 지금 쓰는 걸 조금 더 발전시킨 거랑 같은 거고요. 걱정할 거 없어요.”
“예에. 저도 배우면서 이게 악마의 지식이라거나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닙니다. 지현 재무관님도 그, 누구보다 인간적인 분이십니다. 물론이지요. 단지 조금 놀라서…….”
“이 정도로 놀라서 대양을 배경으로 장사하겠나, 자네?”
“젊은이가 담이 약하군, 그래.”
“아, 두 분 그만 좀 하십쇼.”
네로와 리카르도가 적절한 언변으로 분위기를 풀었다. 지현도 세 사람의 콩트에 함박웃음을 지었다.
“아무튼 알겠습니다. 오히려 대단한 기회라고 생각해야겠지요. 엑스테르민투스한테 직접 교육 받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되겠습니까?”
“좋은 자세일세.”
“이래야 우리 후계지.”
* * *
“힐다는?”
“저쪽 체력도 한계야. 다음 훈련을 생각하면 더 추격하진 않겠지.”
하인리히와 토마스는 숲을 앞두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틀 밤을 꼬박 지새운 강행군이었다. 힐다는 쉬려고 하면 꼭 어디선가 튀어나왔고 그때마다 부대는 급속 행군으로 이탈해야 했다.
거기에 더해 게다의 부대가 요소요소에 매복하고 있다 갑자기 덮치는 식으로 공격해 오니 부대의 피로는 한계를 넘긴 지 오래였다.
같은 니오 용병대라도 본부 인원이 아니었다면 벌써 수십 명이 탈락했을 것이었다. 아니, 본부 인원이라도 하인리히가 행군 강령을 세우고 부대를 세세하게 관리해서 버틴 것이었다. 지금까지 탈락 인원이 없다는 건 노력과 운이 합쳐서 만든 기적이었다.
“힐다 저거 괴물 맞다니깐. 아니, 어젯밤부턴 파트리샤랑 키르스텐마저 안 보이더만 왜 지는 펄펄 나는 건데?”
“아무리 소꿉친구라지만 그 말까지 부정하진 못하겠군…….”
하인리히도 한숨을 내쉬었다. 눈은 시뻘겋게 충혈됐고 걸을 때마다 다리를 후들후들 떨었다. 이미 체력이 아니라 악으로 걷고 있었다.
200명이 넘는 부대원 중에도 체력에 여유가 있는 병사는 이제 두 손으로 꼽을 정도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도착했다. 단 한 명의 낙오도 없이 목적지에.
일단 목적지에 도착한 이상 추격은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훈련이 다음 단계로 넘어갔으니 추격꾼 노릇을 하던 부대도 다음 훈련에 대비해 휴식을 취하러 돌아갔다.
“저번보다 훨씬 피로한 모습이십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번엔 하인리히 대장님과 토마스 대장님이 선발이시군요.”
“오랜만이네.”
숲 입구에선 숲지기 겸 사냥터지기인 킬리안이 기다리고 있었다. 눈가의 주름이 짙어지고 조금씩 갈색 머리칼에 흰 가닥이 섞이고 있는 중년인이었다.
비교적 누비 갑옷 위에 생가죽 코트를 걸치고 활을 비끄러맨 모습은 전형적인 사냥꾼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가 하는 일은 사냥꾼을 사냥하는 일, 밀렵꾼과 도벌꾼을 잡는 것이었다.
수렵과 벌목의 허가를 받았지만 혹시라도 니오 용병대가 주어진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게 그의 역할이었다. 동시에 오래 관리한 만큼 숲을 속속들이 알기에 니오 용병대에게 적절한 조언을 주는 역할도 겸했다.
“전에 왔을 때는 어디 있었나?”
“열흘 전쯤에 방문하셨지요?”
“몰래 감시했던 건가?”
“전혀 눈치 못 챘는데. 이젠 동물보다도 더 잘 숨는군그래.”
“그게 제 일이지 않습니까. 하하. 발데마르 대장께선 눈치채신 모양이지만 그냥 넘어가 주셨습니다.”
“그랬군.”
“일단 푹 쉬고, 숲은 내일 들어가자고.”
“알겠습니다.”
“다들 휴식이다! 모여서, 아 일단 모여서 땅 좀 고르고 나서 퍼져 자식들아!”
휴식 지시가 떨어지자마자 용병들은 끈 떨어진 꼭두각시 인형처럼 자리에 퍼졌다. 피로가 발끝부터 머리끝까지를 서너 차례 관통했다. 쉬는데 한시도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아직 해가 중천이지만 다들 서코트를 벗어서 머리를 덮는 등 어떻게든 햇빛을 가리고 잠을 취했다. 그 와중에도 하인리히는 앉아서 쪽잠을 자다가 일어나 부대를 확인하고 또 잠에 드는 등 편히 쉬질 못했다.
“하인리히, 움직일 수 있겠나?”
“아직은 괜찮아.”
거의 하룻밤을 그렇게 꼬박 쉬고 자고 먹는 데 썼지만 한계를 넘어서까지 몸을 몰아댄 여파인지 병사들 대다수가 여전히 손발을 가늘게 떨었다.
“힐다 녀석 적당히를 알아야지!”
“첫날 역으로 당한 것 때문에 열이 올라서 그랬을 거야.”
“에효. 이래서 애들이 배는 만들 수 있으려나.”
“노력해야지.”
두 사람은 부대를 스무 명씩 나눠서 숲에 들어갔다. 각 스무 명은 배를 만들고 타서 운용할 집단이었다.
만들려는 것은 돛도, 갑판도 없고 선창은 당연히 없는 뗏목에 가까운 배였다. 그렇다고 만들기 쉬운 건 결코 아니었다.
“킬리안. 전에 왔을 때 봐 둔 나무가 있긴 하지만 마침 자네가 있으니 묻겠네. 용골로 쓰기 적합한 참나무를 구하고 싶은데.”
“그러실 줄 알고 몇 개 봐 둔 게 있지요. 대신, 아시죠?”
“물론이네.”
킬리안이 병사들을 이끌고 소나무 숲을 지나 참나무 숲으로 이끌었다. 너무 늙지도, 어리지도 않고 높이도 적당했으며 구불구불하지 않고 바르게 자란 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용골에 딱 적합한 나무들이었다.
“매해 이렇게 새로운 곳을 안내 받아도 또 새로운 곳이 나온다는 게 숲의 신비야.”
“제가 잘 관리하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하하.”
“그래. 자네 참 대단하지. 놈들아, 일이다! 작업 개시!”
스무 명당 한 척씩, 총 열 척의 배를 만들어야 했다. 용병들이 즉시 도끼를 쥐고 저마다 점찍은 나무 옆에 달라붙었다.
“리하르트, 우린 저쪽이다.”
하인리히는 직접 스무 명을 이끌고 전에 왔을 때 점찍어 둔 나무를 찾았다. 참나무 숲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좋아, 베어라! 킬리안, 근처에 가문비나무 군락이 있나?”
“가문비나무는 조금 멀리 있습니다. 한두 그루야 이 근처에도 있습니다만.”
“알겠네. 그럼 대신 소나무로 해야겠군.”
“넘어간다!”
한 그루 나무가 쓰러지자 곧장 끌과 도끼를 쥔 사람들이 거기에 달라붙었다. 열 사람이 달라붙어 그중 일곱은 가지를 잘라 내고 나머지 셋은 끌을 써서 나무의 껍질을 벗겼다.
선박 건조에는 다양한 도구를 쓰지만 으뜸은 역시 니오인에게 가장 친숙한 도구이자 최고의 친구인 도끼였다. 도끼는 나무를 베고, 가지를 치고, 원목을 판자로 가공하고, 판자를 부드럽게 다듬는 데 썼다. 니오의 숙련된 조선공이라면 도끼 한 자루만으로도 능히 배를 지을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는, 그저 농담만이 아닐 것이다.
병사들은 순식간에 잔가지를 쳐내고 껍질을 벗겼다. 그들은 밑 작업을 끝내자마자 흩어져서 다른 나무를 베어 판자로 가공했다. 그사이 조선 조장과 그 보조병만 남아 용골을 다듬었다. 나무를 깎고 형태를 다듬어 좌우로 배의 몸통을 붙일 수 있도록 가공하는 것이다.
“몇 번을 봐도 저렇게 일사불란한 모습이 놀랍습니다. 영주님의 상비군도 저렇게까지 철저하게 움직이진 못할 겁니다.”
“우리야 살 비비고 살면서 합을 맞추는 걸 수년씩 하니 저 정도야 당연히 해내야지.”
서로가 서로의 역할을 명백히 알았다. 누가 어디로 언제까지 무엇을 전해 줘야 하는지도 알았고 그렇기에 최적의 속도로 작업이 가능했다.
“좋아, 식사하고 마저 하자!”
아침 일찍 시작했다지만 고작 반나절 만에 용골을 거의 완성해 간이 받침대 위에 얹었다. 전함은 고사하고 강에 띄우는 나룻배만 한 크기의 작은 배라고는 하나 터무니없는 속도였다.
“판자는 얼마나 모았지?”
“몇 그루 더 베어야겠습니다.”
“괜찮아. 충분한 속도다. 판재 가공 쪽 사람은 줄이고 대신 나무못이나 밧줄 같은 소품 가공에 사람을 더 쓰도록.”
“예, 알겠습니다!”
하인리히는 식사를 하면서도 지시를 내리고 다른 부하들이 짓고 있는 배의 상황을 확인했다. 다들 대동소이한 속도로 나가고 있었다. 딱 한 조만 원래 조선공의 딸이었던 조선 조장이 있어 작업 진척도가 미세하게 빠른 정도였다.
“후우, 한나절도 지나지 않았는데 곳곳에 용골이 세워진 모습이 장관입니다.”
“뗏목이나 마찬가지인 물건이네.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야. 애초에 한 번 쓰면 폐기해야 하거나 팔아도 재료비만 간신히 챙길 수 있는 물건이지.”
“그렇다 해도 말입니다.”
“잠깐 안 보인다 싶더니 그새 사냥이라도 하고 왔나 보군?”
“사냥터지기의 자그마한 특권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영주님은 마음씨가 넓으셔서 요래 작달막한 놈들 정도는 사냥해 먹어도 괜찮다 하시니 다행입니다. 다른 영주님들 중엔 사냥터지기도 사냥을 못 하게 하시는 분도 계신다는데.”
“프랑켄도르프 백작이 영주민에게 관대한 편이긴 하시지.”
킬리안은 하인리히의 옆자리에 털썩 앉아 잡아온 토끼를 손질했다. 하인리히는 손질과 요리를 거드는 대신 고기의 절반을 얻어 리하르트와 나눠 먹었다.
“수렵 허가가 났다지만 다들 사냥엔 별 관심이 없나 보군.”
“다들 배 만드느라 정신없는데 식사도 전에 사냥할 맛이 나겠어?”
“하지만 보급품도 이젠 말린 양파랑 곡물 가루뿐인데 저래서야 힘이 안 나겠어.”
“힐다 누님 덕분이지 뭐. 누님 무식한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쳇.”
“저녁엔 고기를 먹여야지. 킬리안, 붉은 사슴의 영역으로 안내해 주게.”
“어디 보자, 사람이 200명이니 잘 큰 수사슴 한두 마리만 잡아도 다 먹일 수 있겠습니다. 그 정도면 숲에도 큰 영향이 없겠지요.”
“솔직히 낸 비용에 비하면 아깝다는 생각이 많이 드는군.”
“대신 벌목을 많이 하시잖습니까. 하하. 다만 무슨 일이 있어도 암사슴은 안 됩니다. 짝짓기 철이 지나서 지금 만나는 암사슴은 대부분 임신했을 테니.”
“알고 있네. 리하르트, 토마스와 에베, 도프리를 불러. 다섯이서 사냥에 나선다.”
“알겠슴다, 하인리히 대장님!”
리하르트가 장난스럽게 대꾸하고 세 사람을 불렀다. 다섯 용병들은 갑주를 벗고 도끼와 투석구만 든 가벼운 차림으로 킬리안의 뒤를 따랐다.
“이 동네 사슴들은 우리 동네 사슴들보다 덩치도 작고 사납지도 않아서 마음에 듭니다.”
“고기도 연하고 냄새도 역하지 않아서 맛있지.”
“우리 동네 사슴이라. 엘크는 사슴이라고 부르기엔 조금……. 그놈들은 뿔 달린 말이나 소에 가깝지.”
“성난 엘크가 죽자고 돌진하면 불곰도 도망칠 거다. 멧돼지보다 더 위협적인 놈이야.”
“발데마르 대장은 돌진하는 엘크를 피하면서 옆구리에 창을 꽂아 잡은 적도 있었습니다.”
“대장은…… 이따금 사람으로 분류하기 어려우니 그렇다 치자. 에베, 혹시라도 시도하지 마. 대장이 아니었으면 죽었어, 그건.”
“저도 그 정도는 압니다.”
여섯 사람이 소곤소곤 담소를 나누며 숲의 깊은 곳으로 향했다. 중간 중간 마주치는 풀과 나무에 난 흔적을 타고 사슴의 위치를 가늠했다.
킬리안의 인도도 있었지만 하나같이 타고난 사냥꾼인 니오인, 그중에서도 고위 전사만 모인 조였기에 원시림을 뚫고 걷는 것도 수월했다.
“쉿. 저 앞이다.”
하인리히가 누구보다 먼저 사슴의 기척을 읽었다. 그는 초목이 성긴 저지대에 위치한 작은 샘에서 물을 마시고 있는 수사슴 무리를 찾았다.
“저놈이 우두머리군.”
하인리히가 사슴 무리를 관측하다 한 마리를 집었다. 가장 덩치가 크고 뿔이 두꺼운 사슴이었다. 외견뿐만 아니라 모든 사슴의 중심에 서서 다른 사슴들을 지휘하듯 까딱거리는 태도로 보아 무리의 중심이 분명했다.
일행은 접근을 멈췄다. 인간을 비롯한 포식자들이 타고난 사냥꾼이라면 사슴은 타고난 도망꾼이었다. 함부로 접근했다가는 사슴의 예리한 감각에 걸려 놓치고 말 것이었다.
“목표는?”
“우측 외곽에 있는 뿔이 유난히 꺾인 놈으로 하지. 저 덩치면 못해도 300파운드는 할 테고 그럼 고기도 200파운드는 건질 수 있을 거다.”
“마음에 드는군. 뿔이 꺾인 놈이니 이제부터 ‘벤트’라고 부르자.”
“다들 목표 확인했지?”
“좋아.”
“에베, 너는 나와 함께 왼쪽으로 돈다. 리하르트, 오른쪽으로 돌아서 놈들을 몰아.”
“킬리안, 활과 화살을 빌려주게.”
“여기 있습니다.”
“도프리, 한 방에 정확하게 맞춰야 한다.”
“염려 마시죠. 제 솜씨 아시지 않습니까.”
“물론이지.”
“사슴 떼가 날뛰면 위험할 수도 있다. 각자 엄폐 철저히 하고. 하인리히, 목표를 놓치면 안 된다.”
“걱정 마.”
“좋아, 도프리가 쏘는 순간 나와 리하르트가 사슴 무리를 몰 테니까 정확하게 노려야 한다. 작전 개시.”
여섯 사람이 좌우로 흩어졌다. 도프리와 킬리안은 표적으로 삼은 벤트를 정확히 노리기 위해 나무 좌우로 움직이며 각도를 쟀다.
“여기가 좋겠군.”
사슴 무리는 인간들의 접근을 눈치채지 못했다. 특히 벤트는 애초에 부여 받은 임무가 외곽 경계였는지 안쪽으로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그 덕에 도프리는 수월하게 벤트를 노릴 수 있었다.
도프리는 시위에 화살을 걸고 숨을 크게 들이켰다 살짝 내쉰 직후 멈췄다. 그리고 두 손을 앞뒤로 당겨 활을 크게 당겼다.
텅-! 오른손을 떼며 왼손을 앞으로 크게 미는 순간, 시위가 활대를 때려 서슬 퍼런 소음을 냈다. 그 소리에 사슴들이 일제히 귀를 쫑긋 세우며 고개를 들었다.
퍽! 꾸어어어!
눈치를 챘을 때는 이미 화살이 벤트의 옆구리를 꿰뚫은 뒤였다. 벤트는 화살이 박히는 순간 비명을 지르며 얼굴이 향하던 방향으로 정처 없이 내달렸다.
벤트의 달음박질에 흥분한 사슴들이 따라 달리려고 했다. 그 순간 리하르트와 토마스가 괴성을 내며 투석구로 돌을 흩뿌렸다. 한두 개의 조약돌이 사슴의 엉덩이를 맞췄을 뿐, 유효한 공격은 아니었다. 애초에 목표는 타격이 아니었다.
무리의 대장이 엄청난 성량으로 고함을 쳤다. 그 순간 사방으로 흩어지려던 사슴들이 일제히 리하르트와 토마스의 반대쪽으로 내달렸다.
화살을 맞은 벤트는 갈피를 못 잡고 홀로 갈팡질팡하다가 무리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출발도 늦었고 화살이 정확히 내장을 맞혔기에 빠르게 달릴 수 없었다.
“흡!”
숨어서 대기하고 있던 하인리히가 긴 도낏자루로 자신의 옆을 지나가려던 벤트의 옆구리를 찔렀다. 통증에 숨이 턱 막힌 벤트는 비명을 내지르며 풀 위로 미끄러졌다.
그 직후 줄기 위에서 기다리고 있던 에베가 뛰어내리며 벤트의 등에 올라탔다. 네 발을 놀리며 다시 일어서서 달리려던 벤트는 갑작스럽게 등에 가해진 충격과 무게에 다시 주저앉았다.
“창이 있었다면 고통 없이 보내 줄 수 있었을 텐데.”
“이 훈련에 창까지 짊어질 여유가 있는 놈 따윈 없었습니다!”
에베가 그렇게 소리치며 도낏자루를 벤트의 목에 걸고 뒤로 당겼다. 숨이 턱 막힌 벤트는 곧 눈을 까뒤집고 쓰러졌다.
“잡았습니까?”
벤트가 쓰러졌을 때 도프리와 킬리안이 뛰어왔다. 킬리안은 하인리히의 옆에 서더니 곧장 허리춤에서 화살 한 대를 꺼내 시위에 걸고 앞을 향해 겨눴다.
사슴 무리의 대장이 인간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검고 깊은 눈동자가 서로를 마주보았다.
킬리안은 지금 쏠 것인지 말 것인지 망설였다. 만일 사슴이 돌진해 온다면 정면으로 쏘는 화살은 단단한 두개골에 튕겨 나갈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게 되면 자칫 자신이 사슴의 뿔에 받혀 크게 다칠 수도 있었다. 그러기 전에 결정해야 했다.
물론 옆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돌진하는 사슴이 도끼에 맞아 곤죽이 될 확률이 훨씬 높았다. 어느 쪽이건 필요한 이상으로 동물을 죽이고 싶지 않았다.
사슴은 한동안 심후한 눈으로 인간들을 바라보다가 이내 머리를 돌려 무리를 이끌고 떠났다. 킬리안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군. 대장을 잃으면 저 사슴 무리가 포식자에게 많이 취약해졌을 거야.”
“예. 정말 다행입니다.”
그사이 벤트가 에베의 손에 절명했다. 리하르트가 벤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약식으로 기도를 올렸다.
“좋아, 일단 피부터 빼고 옮기자.”
“예!”
하인리히가 단검으로 사슴의 목을 베었다. 그 즉시 에베와 도프리가 사슴의 뒷다리를 밧줄에 묶고 나뭇가지에 매달았다.
그렇게 10여 분간 피를 빼내는 사이 일행은 사슴을 운반할 수단을 준비했다. 작은 사슴이었다면 적당히 등에 들쳐 매고 옮겼겠지만 여기 모인 용병 두 사람 만큼의 무게가 나가는 사슴이었다.
그렇기에 일행은 굵고 단단한 나뭇가지를 찾아서 엮었다. 피를 다 뺀 사슴을 내려서 나뭇가지에 묶고 하인리히와 리하르트, 토마스 세 사람이 어깨에 짊어졌다.
“대장님, 저기.”
“에베, 도프리. 사슴의 피 냄새를 맡고 포식자들이 올 수도 있다. 곰이라도 오면 위험해. 너희는 킬리안과 함께 주위를 경계해.”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동료의 도끼도 등에 매고 자신의 도끼를 다잡은 채 좌우를 경계했다. 킬리안이 앞장서서 길을 열었다. 다행히 일행은 배를 건조 중인 곳까지 포식자를 마주치지 않고 돌아왔다.
“어이, 대장 왔다!”
“와아아아! 사슴이다!”
“우린 안 보이나 보네.”
토마스의 투덜거림에 하인리히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사흘 동안 힐다에게 시달렸는데 먹는 것마저 허술했던 터라 신선한 고기를 보고 눈이 돌아가는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이거 해체할 동안 작업에 열중해라! 저녁은 사슴 고기로 축제를 벌인다!”
“그거 잘됐군. 나도 한 자리 끼어 볼까?”
“이제 오셨습니까.”
“힐다가 너무 깊이 쫓는 바람에 돌려보내는 시간이 좀 걸렸다. 경쟁심도 좋지만 지나쳤어. 감점이다.”
“힐다가 들으면 많이 속상해하겠습니다.”
“본인 빼면 죄다 녹초가 될 때까지 몰아붙였으니 어쩌겠어. 실전이 아닌 훈련이니까 평소보다 무리한 건 알아. 또 힐다랑 너 사이도 알고. 그래도 지나쳤으니까.”
“우리가 굳이 골려 줄 필요도 없겠는데.”
토마스가 기운차게 말했다. 하인리히는 미미하게 어깨가 쳐졌다.
“배는 잘 만들고 있는 모양이고 책임자들이 병사들을 위문할 거리도 찾아왔군. 그나저나 여기서 정육할 셈이냐? 물이 없으면 곤란할 텐데.”
“고기가 200파운드는 족히 나올 텐데 건조 작업 중인 병사들을 더 빼긴 어렵습니다. 현장에서 분배하고 정육에 참여한 사람들만 따로 씻고 올 셈이었습니다.”
“나름 타당한 생각이구나. 그럼 어디 솜씨 좀 볼까.”
발데마르가 앉아서 지켜보는 사이 정육 솜씨가 빼어난 용병 두 명이 차출되어 왔다. 그들은 사슴을 나무에 매달고 단검으로 능숙하게 해체했다.
배의 제작은 순조로워 저녁 무렵에는 용골을 완성해 좌우로 살을 붙이기 시작했다. 사슴의 사체 또한 사슴 고기와 그 이외의 부산물로 깔끔하게 나뉘었다.
“고기 분배하고 식사 준비하자.”
“예!”
“좋아, 사냥에 나섰던 여섯과 정육하느라 고생한 둘은 이리 와라. 너희는 특별히 내가 먹여 주마.”
병사들이 각자 자신의 몫을 받아 가고 나자 발데마르가 여덟 사람만 불러 모았다. 그는 작업을 지켜보는 틈틈이 모은 허브와 식용 나무껍질, 산딸기 열매 등과 함께 남은 곡물 가루와 양파, 사슴 고기를 모두 요리했다.
“가죽은 어떻게 합니까?”
“도시에 팔아서 군자금에 보태야지. 아드니랑 게다 밑에 피혁공 출신이 있으니 녀석에게 맡기면 될 거다.”
“알겠습니다.”
사슴의 뼈와 고기로 국물을 내고 허브로 향을 첨가한 스튜, 돌판에 구운 구이, 다진 고기와 곡물 가루를 뒤섞은 반죽으로 만든 고기 파이까지 아주 호화로운 식단이었다. 고기를 나뭇가지로 꿰서 굽고 있던 병사들은 차원이 다른 냄새가 퍼지자 눈이 돌아갔다.
“다른 녀석들 눈초리가 무섭슴다.”
“내 걸 탐낼 게 아니라 평소에 요리 배웠어야지.”
사실 다들 각자 일에 바빠 요리까지 배울 틈이 없었다. 설령 당번 차례가 되더라도 대량 생산이 가능한 정해진 조리법을 따라 만들어 뿌리기만 하면 그만이니 딱히 요리 솜씨가 향상될 기회가 없었다.
“고기는 구했지만 기타 식량은 이걸로 끝입니다. 원래 숲 입구에서 추가 보급을 받았어야 했습니다만.”
“일정이 좀 바뀌었어. 내일 새벽까진 보급품이 올 테니 걱정 마라.”
“알겠습니다.”
고기를 풍성히 먹은 병사들은 의기충천하여 다시 건조 작업에 들어갔다. 원래는 선체를 붙일 때 철 대갈못을 박는 게 정석이지만 그런 소모품까지 챙기지는 못했기에 나무못으로 판자를 겹쳐 이었다.
목질이 부드럽고 적당한 탄성도 지녀 휘어서 고정시키는 게 가능했다. 생목을 썼기에 더욱 유연하고 그만큼 복잡한 교차 구조를 만들기도 용이했다. 대신 보존성과 내구성을 희생했지만 원양 항행용이 아니었기에 문제없었다.
외피를 조립하고 나선 송진을 가열해 판자 틈새 곳곳에 발랐다. 접착제 겸 방수 코팅이었다.
겉을 완성했다면 다음은 뼈대를 붙일 차례였다. 보통의 건축과 순서가 반대였지만 니오의 배에는 이게 보통이었다.
하지만 뼈대를 넣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외피를 완성했을 무렵에 이미 땅거미가 저물고 있었고 이내 숲에서 빛이 사라졌다.
“나머지는 내일 새벽에 한다. 오전 중에 출항이 가능하도록 힘내자. 다들 취침 준비!”
간부들은 경계병 순번을 정해 배부하고 병사들은 배를 만드느라 다져 놓은 땅에 하나둘 누웠다.
발데마르는 병사들이 잠에 드는 사이 홀로 횃불을 들고 건조 중인 배들을 살폈다. 하루 사이 스무 사람이 부족한 재료로 급조한 배치고는 하나같이 훌륭했다.
배의 표면도 매끄럽게 잘 다듬었고 판자가 무리 없이 이어지도록 모양을 잘 냈다. 어긋나기 쉬운 좌우 형태도 잘 잡았다.
뼈대를 붙이지 않아도 이대로 물에 띄울 수 있는 수준이었다. 물론 아직 추진 장치도 안 달았기에 물에 뜨기만 할 뿐이겠지만 그 정도만 해도 대단했다.
“수고했다.”
발데마르는 나무 둥치에 기대 기절하듯 잠든 하인리히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그 옆에 앉아 잠을 청했다. 아침이 되면 훈련의 막바지를 볼 수 있을 것이었다.
달이 저물고 해가 뜨기 직전인 어두운 새벽, 게다의 부대가 마지막 보급품을 가져 왔다. 고작 두어 끼 해결하는 게 전부인 수준으로 가볍고 부피가 작아 운송도 쉬웠다.
“순서가 반대였으면 철저히 괴롭혀 줬을 텐데 당하기만 해서 아쉽군.”
“그건 또 다음 훈련 때 하자고.”
토마스는 투덜거리면서도 게다와 팔뚝을 맞부딪치며 교차하여 작별했다. 하인리히도 게다와 인사하고 그들을 배웅했다. 떠나는 게다 부대를 보며 하인리히와 토마스는 다시 힘을 내 선박 건조를 지휘했다.
뼈대를 먼저 건조하고 그 위에 살을 붙이는 배는 뼈대가 선체를 받치고 고정한다. 그런 만큼 배가 받는 충격은 물론 배를 추진하는 힘까지 감당하기 위해 무거운 뼈대가 필요했다.
반면 니오 특유의 배는 튼튼한 선체를 먼저 만들기에 뼈대가 굳이 무거울 필요가 없었다. 배에 가해지는 힘을 분담하는 정도의 역할이었기에 두 사람이 뼈대를 잡아서 번쩍 드는 것도 가능할 만큼 가벼웠다.
병사들이 완성한 뼈대를 배 안으로 옮겨 지정된 장소에 끼웠다. 미리 요철을 만들어 놨기에 정확하게 맞물렸다. 그들은 뼈대를 배에 끼운 후 준비한 송진을 바르고 풀에서 얻은 섬유를 엮어 만든 끈으로 마감했다. 배가 완성된 것이다.
“대장님, 스벤 조 완성했습니다.”
“그림 조도 막 완성했습니다.”
사방에서 조선 조장들이 보고를 해 왔다. 거의 비슷한 시간에 열 척의 배를 완성했다.
“좋아, 배에 짐을 싣는다! 이동 준비!”
배를 완성한들 당장 이곳에는 물도 없고 배를 띄울 수도 없었다. 배를 띄우기 위해선 우선 물이 있는 곳까지 가야 했다.
“이동 준비!”
“방패 거치!”
보급 물품은 전부 배의 중심부에 실었다. 그리고 배의 가장자리, 노와 노의 사이마다 선원들의 방패를 거치했다.
“이거 참 다시 한 번 장관을 보게 되는군요.”
킬리안이 감탄했다. 배 한 척마다 스무 명의 사람이 달라붙더니 이내 어깨와 등으로 배를 받쳐서 들어올렸다.
“선두는 내가 연다! 내 뒤를 따르라!”
하인리히는 가장 앞의 배를 짊어졌다. 그의 구호에 맞춰 병사들이 더욱 힘을 내 배를 옮겼다.
3미터가 조금 안 되는 폭, 13미터 겨우 넘길까 말까 한 길이의 소형 보트였다. 짐을 싣고 나면 사람들이 다닥다닥 붙어서 노만 저을 수 있는 크기인 것이다. 그럼에도 상당히 묵직했다. 스무 사람이 짊어졌기에 겨우 들 수 있을 만큼.
가늘고 긴 선체 덕분에 나무 사이를 통과해 숲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하인리히는 킬리안의 도움을 받아 부대를 개천까지 이끌었다. 마침내 물을 만난 용병대는 환호성을 내질렀다.
“좋아, 순서대로 배를 내려라!”
병사들이 좌우로 물러나며 조심스럽게 배를 내렸다. 어느 한쪽이라도 반대쪽과 합이 안 맞으면 사고가 날 것이었으나 누구도 그런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
최선두는 배를 내리자마자 물가로 밀었다. 배를 밀다 그대로 탑승하자 출렁이며 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런 물을 맞으며 니오인들은 크게 웃었다.
배가 기우뚱거리며 물을 밀어냈다. 혹 파도가 친다면 뱃전을 뚫고 물이 들어찰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니오 용병대는 당당히 노를 잡았다. 그 정도가 뭐 대수란 말인가? 지금도 먼 북쪽의 동포들은 똑같은 형태의 배를 타고 폭풍우를 뚫고 다니는데.
첫 번째 배가 물에 뛰어들자 순서대로 열 척의 배 모두 물에 떠올랐다. 하인리히는 뱃고물에 서서 키를 잡았다. 대장답게 그의 역할이 가장 중요했다.
“목표 베겐도르프 시! 하인리히 백부대, 출항하라!”
“흐읍, 하! 흐읍, 하!”
구호에 맞춰 용병들의 팔뚝이 팽팽하게 부풀었다. 땀에 젖은 근육이 오전의 햇빛을 받아 번들거렸다.
물살을 타고 천천히 흐르던 배가 곧 힘차게 전진했다. 배는 점차 빠르게 달려 종래에는 10노트에 달하는 속력을 냈다. 대기를 가르며 날아가는 화살처럼 배가 물을 갈랐다.
이 속도를 유지한다면 베겐도르프 시까지 서너 시간이면 충분했다. 하지만 유일한 동력원은 인력이고 추진 장치는 돛도 없이 노뿐인지라 실제로는 그렇게 장기간 속력을 유지할 수 없었다.
하인리히는 뒤따라오는 배와 부딪치지 않을 거리를 확보했다고 생각한 시점부터 속도를 늦췄다.
배의 간격은 중요했다. 너무 멀어지면 서로를 지원할 수 없고 너무 가까우면 충돌 위험은 물론 서로 만들어 낸 물살에 항해 효율이 떨어졌다.
하인리히는 류샤크 강에 닿을 때까지 5에서 6노트 정도의 속도를 유지했다. 다섯 명씩 교대로 쉬며 체력도 안배했다.
교차점에 닿자 마을 주민들이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노를 잡지 않은 병사들은 마주 손을 흔들며 인사를 받아 주었다. 매해 두 차례씩 오가는 길이다 보니 이제는 마을의 명물과도 같았다.
“속도를 높인다!”
류샤크 강과 접하는 순간 하인리히가 키를 틀어 방향을 잡으며 외쳤다. 두 강이 접하는 순간은 배가 휩쓸리기 쉽기에 힘을 최대한 발휘해야 했다.
쉬고 있던 이들을 포함해 전원이 노에 달라붙었다. 하인리히는 뱃머리가 반대쪽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키를 붙들었다.
이를 악물고 땀을 흘린 보람이 있었다. 배는 강을 거슬러 오르는 방향으로 머리를 돌렸다.
강폭이 충분히 넓었기에 더 이상 일렬로 이동할 필요가 없었다. 하인리히의 수신호에 뒤쪽의 배들이 속도를 높이며 하인리히의 배를 따라잡았다. 그렇게 하인리히의 좌우로 두 척씩 배가 섰다. 넓게 펼친 화살표 모양으로 열 척의 배가 섰다. 그들은 그렇게 강을 가르며 내달렸다.
배를 몬 지 다섯 시간이 지나자 병사들의 몸은 땀과 고통으로 젖었다. 아무리 번갈아 쉬었다 해도 흐르는 강을 거스르며 노를 젓는다는 건 힘든 일이었다.
첫날의 산행보다 단기간에 더 많은 힘을 필요로 했다. 병사들은 터질 것 같은 심장, 끊어질 것 같은 팔 근육에 더욱 힘을 불어넣으며 배를 앞으로, 앞으로 몰았다. 다시 한 번 한계를 넘을 때였다.
“베겐도르프 시가 보인다! 이제 금방이다, 힘을 내라 니오 용병대!”
“으아아, 합! 으아아, 합!”
병사들이 노를 쥔 손에 힘을 줬다. 아귀가 찢어질 것 같아도 다시 한 번!
선착장에 다다를 무렵, 하인리히는 예전과 다른 것을 찾았다. 니오의 방패를 등에 맨 두 여성이 선착장에 있었다. 특히 왼쪽에 선 사람은 하인리히에게 너무나 친숙한 벗이었다.
“힐다! 지현 양!”
“어서 오세요! 하인리히 씨, 모두들 고생하셨어요!”
하인리히는 물론 병사들 모두가 화들짝 놀랐다. 하마터면 노를 멈출 뻔했다.
그들은 배를 나루에 댄 후 자신의 짐을 짊어지고 상륙했다. 나와 있는 건 지현과 힐다뿐이 아니었다. 힐다 부대의 십수 명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형제자매의 손을 잡아 끌어올리고 안아 주었다. 땀에 절고 힘이 없어 몸을 기대와도 상관없었다.
“고생했다, 하인리히.”
“힐다, 지금은 몸이…….”
“치워, 자식아.”
“고맙다.”
하인리히는 손을 내저으며 말리려다 이내 힐다에게 몸을 맡겼다.
“이거 성대한 환영식이구려.”
마지막 배, 토마스의 배에 타고 있던 발데마르가 지현과 힐다를 보며 싱긋 웃고는 힐다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시장에게 요청해서 공관을 빌렸어요. 이미 저녁이 늦었고 다들 지쳤을 테니 일단 거기서 푹 쉬고 내일 아침 부대로 복귀해요.”
“지현 양의 혜안은 항상 한발씩 앞서가는구려. 시장은 어떻게 설득했소? 돈이 많이 들었을 텐데.”
“돈은 전혀 안 들었어요. 단지 우리의 가치를 상기시키고 약간의 아이디어를 제공했어요.”
“웅?”
“아무튼 매수나 협박은 아니니까 안심하세요.”
“알겠소. 그럼, 놈들아! 우리 보물 재무관이 네 녀석들을 위해 쉴 곳을 마련했다고 한다!”
“와아아아아!”
“훈련은 끝났다. 수고했다. 하인리히, 토마스.”
발데마르가 두 백부장의 어깨를 툭툭 두들기며 말했다.
“그리고 다른 녀석들은 이제 시작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