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datory Soul RAW novel - Chapter 84
-84-
야만족 놈들은 왕녀를 납치해 오겠다고 호언했다.
선왕을 가까이서 모신 만큼, 왕궁 내부 구조를 훤히 꿰뚫고 있으니 충분히 가능하다는 것이다.
대신 분명 추격을 해올 테니, 사막까지 병력을 이끌고 나와 달라고 제안했다. 중간에서 합류하자는 계획이었다.
참으로 어리석게도 오베르데 변경백은 그러겠노라 약속했다.
변경백 쪽으로 추격대를 돌려놓은 후, 자신들은 왕녀를 데리고 빠져나가겠다는 속셈인 줄도 모르고 말이다.
순혈주의자들이 인간을 얼마나 우습게 생각하는지 알지 못해 벌어진 일이었다.
변경백은 제가 당장 모을 수 있는 병력들을 전부 끌어다가 사막으로 향했다.
난데없이 국경을 넘자는 말에 기사단장이 결사반대했으나, 변경백은 강하게 밀어붙였다.
야만족 따위, 제대로 상대한다면 자신의 용맹한 병사들이 응당 물리칠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러나 행군을 시작하자마자 변경백은 후회했다. 한시라도 빨리 왕녀를 품에 안고 싶다는 생각에 직접 나섰건만, 사막은 녹록지 않았다.
멀리 나가봤자 접경지에서 깔짝거리며 야만족들을 상대했던 일이 전부였던 변경백이었다. 사막에 며칠씩 머무르기는 처음인 것이다.
하는 일 하나 없이 시종들이 받쳐주는 대로 실려 가는데도, 그는 번갈아 찾아오는 더위와 추위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오늘 밤도 그러했다. 은은한 별무리가 강처럼 흐르는 밤하늘은 장대한 구경거리였으나, 변경백은 막사 안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구질구질한 사막의 모래 따위, 이제 보기만 해도 신물이 올라왔다. 그는 연신 욕설을 짓씹으며 억지로 잠을 청했다.
얼마간 선잠에 빠져있었을 때였다.
“……?”
변경백은 번쩍 눈을 떴다. 막사 안이 서늘했다.
뜨끈하게 불을 올려놓았던 화로는 싸늘히 식었고, 하나 켜놓고 잠들었던 등불도 깜깜히 꺼져있었다.
한 가닥 불길함이 피부 위를 스쳤다. 변경백은 스르륵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캄캄한 막사의 어둠 속에 잠겨 있다가, 벌떡 일어나 바깥으로 도망가려던 때였다.
“크억!”
뒤통수를 내려치는 충격과 함께 그는 정신을 잃었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변경백은 딱딱한 나무의자에 앉혀진 채로 온몸이 꽁꽁 묶여있었다.
눈도 가려져있어서, 자유로운 것은 입뿐이었다.
밧줄에 묶여 피가 통하지 않는 팔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몸을 꿈틀거리니 앞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변경백은 바짝 마른 입술로 다급히 외쳤다.
“누구냐! 돈이라면 얼마든지 줄 테니…….”
얼굴에 덮여있던 자루가 걷혔다. 인상을 확 찡그렸던 변경백은 아연히 눈을 끔뻑였다.
“그간 격조했군, 오베르데 변경백.”
남자가 거만한 얼굴로 변경백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본디 무소식이 희소식인 법인데 말이야. 왜 쓸데없는 헛짓거리를 벌여서 내가 나서도록 만드나.”
“네, 네놈, 이샤칸……!”
그는 재빠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딘지 모를 단출한 막사 안이었다. 왕녀를 납치하려 했는데, 되레 자신이 납치당한 것이다.
기막힌 노릇이었다. 변경백은 분노에 차 부들부들 떨었으나, 묶인 채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악에 받쳐 몸만 들썩거리는 그 앞에서 이샤칸이 한가롭게 말했다.
“한데 오늘 그대와 대화를 나눌 이는 내가 아니라서.”
막사 문이 걷히며 한 여인이 안으로 들어섰다. 환한 은빛을 본 순간, 변경백은 눈을 크게 떴다.
햇빛과 물을 잔뜩 받아먹어 만개한 꽃과 같이 싱그러운 얼굴이었다.
표정 없이 그늘졌던 눈빛은 훨씬 선명해져서, 보라색 눈동자가 자수정을 박아 넣은 듯 도드라졌다.
인형처럼 정교하게 아름답던 그녀의 생기 넘치는 모습이 낯설었다. 화사한 복숭앗빛 뺨을 한 그녀가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오베르데 변경백.”
변경백은 넋 나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왕녀님?”
* * *
소풍 가듯이 오베르데 변경백을 납치하러 가자고 꼬여내는 남자의 행태는 황당함을 넘어선 것이었다.
레아는 당연히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납치해서 뭐 하게……?”
“선물을 주는 것이지.”
이샤칸은 태연하게 답했다.
“네가 원한다면 죽일 것이고. 살려놓길 바란다면…….”
그는 긴 눈매를 접어 웃으며 속삭였다.
“또한 그리할 것이고.”
장난스럽게 반짝이는 금빛 눈동자를 바라보던 레아는 깨달았다.
그가 굳이 이 시점에 변경백을 건드려가며 얻어내려는 것은 참으로 단순했다.
레아의 신뢰였다.
당장 왕비를 건드리진 못하니, 자신이 지켜줄 수 있다는 증거를 내보이기 위해 때마침 걸려든 변경백을 본보기 삼는 것이었다.
에스티아 정벌을 앞둔 상황이었다. 무엇 하나 섣부르게 건드려서 좋을 것이 없건만, 이샤칸은 조금도 머뭇거림이 없었다.
레아가 죽여달라 하면, 그는 진실로 변경백의 목을 잘라 가져다주리라.
하지만 쉽게 죽이고 싶지는 않았다. 변경백이 저지른 짓에 비해 죽음은 너무나 값싼 대가였다.
죽이기 전에 골수까지 뽑아서 이용해먹고 버려야 했다.
“…….”
레아는 눈앞의 변경백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문득 레아를 살폈다.
그리고 이샤칸과 레아를 번갈아 보았다. 변경백의 눈빛이 꿈틀거렸다.
“……설마 야만족과 정을 통하신 겁니까?”
믿기지 않는다는 듯 던진 질문에 레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대답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변경백이 버럭 외쳤다.
“비천한 짐승새끼하고……!”
격렬한 움직임에 묶어놓은 나무의자가 삐걱거렸다. 하지만 단단하게 묶인 밧줄은 살갗을 파고들 뿐이었다.
“저놈이 뭐 하던 놈인 줄은 아십니까!”
변경백은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말했다.
“노예새끼였습니다.”
“……!”
레아는 저도 모르게 이샤칸을 돌아보았다. 이샤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금색 눈동자는 살짝 가라앉아 있었다.
흔들림을 확인한 변경백은 더욱 기세 좋게 물어뜯었다.
“무식한 싸움질로 왕관을 썼다고 진짜 왕이라도 된 줄 아는 천것입니다. 주제도 모르는!”
변경백의 말이 이어질수록 이샤칸의 눈동자는 조금씩 어두워졌다. 그에게 드리운 그림자는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이었다.
놀라서 이샤칸을 바라보던 레아는 주절대는 변경백의 목소리에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에스티아의 왕녀로 돌아오십시오.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여기서 나가기만 하면…….”
찰싹, 살이 부닥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변경백은 멍하니 있다가, 옆으로 돌아간 고개를 천천히 되돌렸다.
레아는 욱신거리는 손을 말아 쥐었다. 어찌나 힘껏 뺨을 때렸는지 손바닥이 얼얼했다.
“주제를 모르는 건 그쪽이지요.”
변경백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끔뻑였다. 레아는 앞으로 한 걸음 내딛었다.
사박 소리와 함께 옷자락이 스쳤다. 살며시 허리를 숙이자 얼굴이 가까워졌다. 변경백이 헉 하고 숨을 참았다.
레아는 눈을 내리깔고 말했다.
“그간 모두를 감쪽같이 속여 왔더군요.”
“……그게 무슨.”
“영웅놀이는 재밌었나요?”
변경백의 입술이 황망히 벌어졌다. 뚝뚝 끊어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놀이라니, 내가, 서부 변방에서 모래먼지를 맞아가며 희생한…….”
아무래도 정신을 덜 차린 것 같았다. 한 대 더 때려주려던 레아는 제 손이 발갛게 부어오른 것을 보았다.
멈칫하는 사이, 얌전히 지켜보고 있던 이샤칸이 앞으로 나섰다. 그는 레아가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커다란 손이 가볍게 뺨을 후려쳤다.
“으억!!”
철썩, 살갗이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변경백은 의자에 묶인 채로 휙 날아가 막사 구석에 처박혔다.
“아, 이런.”
이샤칸이 느긋하게 한마디 했다.
“힘 조절이 쉽지 않군.”
레아는 얼른 변경백을 살펴보았다. 목이 꺾여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살아있었다.
이샤칸이 구석에 박혀 꿈틀거리던 변경백을 끌어와 다시 막사 한가운데 앉혔다. 변경백은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다.
부어오르기 시작한 얼굴에서 침이 줄줄 흘러내렸다. 서부를 호령한다는 변경백치곤 추하기 짝이 없는 꼴이었다.
“아직 쓸모가 있어서 이 정도로 끝내는 거예요, 변경백.”
레아는 변경백 앞에 검붉은 포도주가 담긴 잔을 들이밀었다.
무엇을 넣었는지 알 수 없는 수상한 술잔을 내밀며 건조하게 말했다.
“마셔요.”
죽기 싫으면.
덧붙인 한마디가 싸늘했다. 변경백은 발작하듯 외쳤다.
“나, 날 죽일 순 없습니다!”
“왜 못할 거라고 생각하죠?”
보라색 눈동자에는 머뭇거림이 조금도 담겨있지 않았다. 변경백은 별수 없이 잔을 들이켰다.
레아는 그가 끝까지 마신 것을 확인한 뒤 말했다.
“명령에 불복종하면 즉시 죽음에 이르게 되는 묘약이에요.”
“그런, 말도 안 되는……. 들어본 적도 없는 것을…….”
“목숨 걸고 시험해보시든지요.”
“…….”
입만 벌리고 있는 변경백을 내려다보며, 레아는 턱을 치켜들고 말했다.
“앞으로 나를 위해 첩자 노릇을 해줘야겠어요, 변경백.”
* * *
이제 레아는 에스티아를 위해 움직이지 않는다.
쿠르칸의 왕비가 되기로 결심한 레아에게 오베르데 변경백은 아직 살려둘 가치가 있는 존재였다.
정벌을 앞둔 현시점에서는 특히 에스티아 내부에 쿠르칸의 세력을 한 명이라도 더 심어놓을 필요가 있었다.
특히 세르디나가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르는 지금, 레아는 수도 상황을 좀 더 자세히 살피고 싶었다.
어차피 장례식도 있고 하니, 변경백이 수도로 올라갈 핑곗거리는 충분했다.
하여 그를 눈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변경백이라면 쿠르칸들이 매수해놓은 어느 귀족보다도 훨씬 깊게 파고들 수 있으리라.
넋이 나간 변경백을 버려두고 이샤칸과 함께 막사 바깥으로 나왔다. 쿠르칸들이 간단히 묵례하며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은 변경백을 적당히 정리하고 돌려보내줄 터였다.
잠시 막사 쪽에 시선을 던졌던 레아는 이샤칸을 돌아보았다. 그는 레아의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부어오른 손으로 그의 손가락을 살짝 그러쥐었다. 그러자 이샤칸이 픽 웃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런 묘약도 있었나. 처음 들어보았는데.”
“거짓말이었어.”
“…….”
과대평가하고 있던 겉껍질을 벗겨내고 나니, 변경백의 그릇이 정확히 파악되었다.
이만한 거짓말에도 분명 넘어갈 거라고 판단한 것이다.
쿠르칸 주술사들이 묘약을 만든다는 사실도 알고 있으니, 변경백은 절대로 레아의 말을 시험해보지 못할 것이다.
그는 그럴 만한 용기가 없는 자였다.
잠시 말문이 막혔던 이샤칸은 이내 헛웃음을 흘렸다.
“네가 노예상 노릇까지 했었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하고 있었군.”
이런 것쯤이야 레아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다. 사실 변경백과 나눈 대화보다, 다른 것이 훨씬 더 신경 쓰였다.
하지만 차마 선뜻 물어볼 수가 없었다.
레아가 모르는 이샤칸. 왕위에 오르기 전, 이샤라는 이름으로 불리었을 그의 과거.
생각해보면 이샤칸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것이 없었다. 누구보다 깊게 연결되어있는데도 말이다.
갑자기 어떤 거리감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재미없는 이야기야.”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이샤칸은 묘한 웃음을 머금고서 말했다.
“그에 비해 네가 이야기를 듣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는 까다롭지.”
“뭘 물어볼 줄 알고…….”
“내 과거가 궁금한 것이잖아.”
“……궁금해.”
레아는 망설이다가 부탁해보았다.
“이야기해주면 안 될까?”
“안 돼.”
단호한 거절에 눈을 크게 떴다. 이샤칸은 부은 손을 끌어다가 손등에 입을 맞췄다. 휘어진 눈웃음과 함께 속삭임이 떨어졌다.
“너는 이미 다 알고 있어, 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