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ferences for possessed people RAW novel - Chapter (290)
290화
바닥에 닿은 꽃송이는 빠르게 시들어 메말랐다.
명백한 불길함의 징조.
“……!”
어빅시니스가 휙 소리 나게 고개를 돌려 정면을 보았다.
정복의 천리안을 통해 전개된 지도에서 이변이 일어나고 있었다.
붉게 표시되었던 점 하나가 하얀색으로 바뀐다.
여기까지는 그러려니 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대략 1분 후.
“어?”
체통을 잃은 얼빠진 소리가 어빅시니스의 입에서 나와 버렸다.
옆에 있는 또 한 점의 색깔이 희게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1분 후.
“어어?”
하나 더.
“어어어?!”
또 하나 더.
“아니……?!”
이어서 30초 미만 단위로 주르륵!
“이, 이게 대체 무슨 일이더냐!”
어빅시니스는 크게 당황했다.
기껏 붉게 물들여놓은 북동쪽의 교회 거점들이 순차적으로 하나씩 다시 하얀 점으로 되돌아왔다.
그것은 마치 일렬로 세워둔 도미노가 무너지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실제로 무너진 것은 도미노보다 훨씬 엄청난 것이었다.
“잠깐, 여기는! 마법사들의 나라의 국경 부근인데?!”
마족의 포위진이 붕괴되자 검게 오염되었던 영역이 다시 본래 색깔을 되찾았다.
라그네이프 마도 공화국이 다시 인간들의 땅으로 되돌아갔다. 마족들 입장에서는 졸지에 2할의 점령지를 잃은 셈이다.
그제야 어빅시니스는 깨달았다. 세 개의 도시 교회를 공격한 것은 그녀의 시선을 끈 것에 불과했다.
그사이 교활한 인간들은 라그네이프의 국경 부근에 다수의 병력을 대거 투입하여 동시다발적인 토벌 작업을 감행한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 국경의 포위진이 무너진 양상을 보면 시간차가 거의 없다시피 하다.
교회의 숫자만큼 토벌대를 조직하여 일시에 움직였다고밖에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들에게 물량공세를 할 만한 여력이 있었다니!’
시작부터 성황청을 쓸어서 6계위 이상의 신성력 각성자를 거의 멸절시켜 버린 탓에 방심하고 있었다.
대대적인 역공은 충격이었지만, 지금 어빅시니스에게 더 중요한 사실은 따로 있었다.
인간들은 국경의 교회들을 일시에 탈환하여 라그네이프 마도 공화국을 되찾아갔다.
이것은 하르마게돈의 규칙에 정확히 의거한 전략적 움직임이다.
이 사실이 시사하는 바는 명백했다.
“설마…….”
보랏빛으로 물든 어빅시니스의 눈이 잘게 떨려왔다.
“인간들의 지휘관 중에 ‘정복의 천리안’과 같은 능력을 가진 자가 있단 말인가?”✠대략 10분 전.
라그네이프 마도 공화국의 국경을 이루는 헤겔릭스 산맥. 그 굽이굽이 펼쳐진 능선에 둘러싸인 작은 산골 마을이 있다.
그린월 마을.
원작의 시작 무대로서 ‘조각가의 아틀리에’ 던전이 버스트를 일으킨 곳이었다.
아일렛은 튜토리얼 기간이 끝나자마자 이곳으로 공간 전이해서 마을 사람들을 모두 교회 안으로 피신시킨 적이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해당 교회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상태였다.
관할 사제는 이런 염소 똥 냄새나는 마을 따위는 싫다며 도망쳐 버린 지 오래였고, 성황청은 오지 산간으로 새 사제를 발령해 주지 않았다.
수년간 예배 없이 방치된 교회에 마을 사람들은 발걸음을 하지 않았기에 결국 잡동사니 창고나 다름없어졌다.
뚝. 뚜둑.
그리하여 구멍 난 천장에서 비가 새고 거미줄이 여기저기 쳐져 폐가나 다름없어진 교회.
규모로 보나 외관으로 보나 별 볼일 없어 보이는 곳이다.
그러나 하르마게돈의 지리적 요충지였기에 어빅시니스는 이곳에 상당한 거물 악마를 보냈다.
백장발과 붉은 눈동자의 미청년이 실을 자아내며 탄식했다.
사실 그는 청년이라기엔 어폐가 있는 모습이었다.
탈의된 반라의 상반신은 석고 조각상처럼 아름다웠으나 하반신은 네 쌍의 다리를 가진 새하얀 거미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두 자릿수대의 마계 서열을 가진 거미 귀공자, 아라크논.
알비노 거미를 연상시키는 반인반주(半人半蛛)의 수컷 절지동물형 악마였다.
혼돈악 대신전의 대주교였던 그는 슬프게도 이름도 없는 폐교회를 담당하게 되었다.
본래 사용하지 않는 교회였으니 그가 전이되고 나서 인간의 그림자 하나 보지 못했다.
그래서 아라크논은 현재 내면의 살육 욕구를 해소하지 못한 채 얌전히 거미줄이나 잣게 된 불쌍한 처지.
덕분에 폐교회는 거미줄로 더욱더 을씨년스러워졌다.
대형 교회 하나씩을 꿰찬 다른 주교 놈들에게 질투가 났다. 아라크논 자신도 널찍한 무대에서 날뛰고 싶었다.
인간들을 독액으로 마비시키고 고치로 만들어서 매달아 천천히 죽음의 공포를 착즙하여 음미한다.
상상만 해도 짜릿했던 탓에 아라크논의 붉은 눈이 황홀하게 풀려갈 때였다.
쿵!
멀지 않은 곳에서 둔중한 진동이 전해져 왔다.
아라크논은 직감했다.
몽롱하던 눈이 광기로 번뜩이며 살육의 본능이 끓어올랐다.
마침 그가 있는 예배당 바깥의 복도에서 도란도란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첫 시작은 역시 여기인가.”
“응. 라그네이프와 인접한 곳은 아니지만, 그린월 마을은 은근히 4국의 중심이나 마찬가지인 곳이잖아.”
“그렇지.”
“아참, 아그네스에게는 설명이 필요하겠다. 테리 네가 할래?”
“성녀님, 이곳은 저희의 움직임을 어빅시니스에게 들켰을 때를 대비해서 점거해두어야 하는 곳입니다. 저희가 라그네이프에 활로를 뚫지 못하도록 어빅시니스가 포위진을 보수한다 치면 이곳이 기준점이 될 테니까요. 물론 어빅시니스가 방심하고 있어 준다면야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만.”
“네, 네, 아그네스. 네, 그렇죠. 이해한 대로예요. 재탈환하면 두 시간 동안 침입 금지니까요. 그 시간을 잘 이용해야 해요.”
인기척과 음성은 둘뿐인데 셋이서 대화하는 척하는 이상한 녀석들이었지만, 아라크논에게 먹잇감의 정신상태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유희거리가 제 발로 걸어 들어오는구나! 실컷 즐겨주마!’
다다다다닥!
아라크논의 네 쌍의 다리가 잽싼 발놀림을 펼쳤다.
벽을 타고 천장에 들러붙은 그가 숨을 죽이며 화려한 환영 인사를 준비했다.
마침내 문이 열리고 희생양들이 예배당 안에 발을 들였다.
‘이때다!’
배 속에서부터 끌어 올린 뜨거운 독액을 두 남녀의 머리에 분출하려던 그 순간.
쉬이이익!
순백의 빛줄기가 수직으로 솟구쳐 올라간다. 오러 블레이드가 아라크논의 복부를 정통으로 타격했다.
독액 대신 신음을 뱉어내며 거대한 거미의 몸체가 바닥으로 쿵 떨어졌다.
침입자들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말했다.
“역시 거미들이란.”
“천장을 좋아하지.”
분홍 머리의 여성과 은발의 남성이 각자 무기를 빼 들었다. 발검 같은 동작은 불필요했다.
각자의 손에서 빛이 형상을 맺더니 월장석처럼 희게 빛나는 낫과 검이 만들어졌다.
소환 무기. 그것이 두 침입자의 정체를 아라크논에게 증명한다.
망발에 돌아온 것은 두 인간 강자들의 협공이었다.
왼편에서 테실리드가 성검 리브라를 사선으로 세워 들었다.
왼손으로 받쳐 든 검면에서부터 신성 오러의 빛이 퍼져 나간다. 그대로 그가 자세를 낮추었다가 두 발로 땅을 박찼다.
오른편에서 아일렛은 성겸 리브릴리를 느슨하게 늘어뜨리듯 잡았다. 낫날 끝에서부터 정제된 오러가 타고 올라온다.
다음 순간, 그녀 역시 전광 같은 속도로 적을 향해 파고들었다.
아라크논의 좌우에서 참격이 쇄도해 온다.
서거거거걱!
두 무기가 각자 네 개의 다리를 긋고 지나갔다. 노린 분위는 단단한 외피의 틈새를 이루는 관절부.
그것이 가공할 파괴력을 가진 오러에 의해 절단당했다.
쿠우웅!
아라크논은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거대한 몸뚱이를 지탱하던 네 쌍의 다리가 모조리 파괴되어 무너져 버린 탓이다.
기동 불능의 적. 이제 마무리를 할 차례였다.
아라크논의 등 뒤로 넘어온 아일렛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가락을 튕겼다.
“신벌.”
하늘이 열렸다. 암운을 쪼개고 강하한 푸른 벼락이 교회의 천장을 완파시키며 징벌 대상에게 내리꽂혔다.
콰과과광!
폭발이 폐교회를 집어삼켰다. 깔끔한 철거와 함께 거미 귀공자는 잿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무기를 역소환한 두 사람이 각자 성기사 제복의 품을 뒤적였다.
“도착부터 처리까지 1분 32초 걸렸군.”
테실리드가 회중시계의 바늘을 살폈고.
“자, 이제부터 속도가 생명이야. 서두르자.”
아일렛이 공간 전이석을 부쉈다.
두 사람은 다음 장소로 이동했다. 사인화에 점령당한 채 검은 기운을 풀풀 날리는 또 다른 산골 마을의 교회가 나타났다.
비교적 느긋이 진입했던 전과 다르게, 이번에 두 사람은 최단 루트로 예배당까지 주파했다.
검은 유니수스가 자기소개를 요구했으나 돌아오는 건 시야를 수놓는 빛의 칼날이었다.
압도적인 화력으로 짐승형 마수를 녹이는 데 걸린 시간은…….
“1분 19초.”
“자, 다음!”
또 다음 타락한 교회로 이동했다. 교회 지하실로 달려가서 다른 작은 두개골들 틈에 파묻혀 있던 거대한 해골바가지 형태의 보스를 깨부쉈다.
“48초.”
“다음!”
지체 없이 다음 교회의 좌표가 새겨진 공간 전이석을 부쉈다. 이번에는 교회 뒤뜰에 있던 흉악한 거대 토끼형 보스를 두들겨 팼다.
“39초. 점점 약한 녀석들이 나와서 찾아가는 데 시간이 더 걸리는군.”
“좀 더 효율적으로 움직이자. 이다음부터는 세 군데씩 나눠서 다녀온 뒤 크레코 마을에서 합류하면 어때?”
“좋아, 아이.”
페어로 움직이던 두 사람이 갈라졌다. 그리고 각자 신벌과 신성 오러를 이용해 폭격을 한 뒤 약속한 장소에서 다시 만났다.
“거의 동시에 도착했군.”
“그러게.”
그렇게 아일렛과 테실리드는 헤겔릭스 산맥의 능선을 따라 이동하며 교회를 하나씩 탈환했다.
좌표가 새겨진 전이석을 오래전부터 준비해 두었던 아일렛이다.
정확한 공간 전이로 기동성이 확보되었고, 충분한 전투력이 뒷받침되었기에 게릴라전이 가능했다.
어빅시니스의 예상과 달리 대규모 병력 투입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저 두 사람이면 전략을 수행하기에 충분했다.
설령 어빅시니스가 국경을 공격하는 것을 알았어도, 새로운 포위진을 덧대어 구축할 틈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만큼 빠른 속도였다.
그리고 마침내.
“됐다!”
빙의자를 위한 특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