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ferences for possessed people RAW novel - Chapter (9)
9화
“야, 너 도련님이랑 무슨 대화했어?”
어제오늘 일로 독이 바짝 오른 넬리가 날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나는 치마를 툴툴 털고 일어났다.
“뭐야, 넬리. 설마 나한테 시비 걸려고 여기까지 온 거야?”
“내가 먼저 물었잖아! 도련님이랑 무슨 이야기 했냐고! 무슨 이야기를 했기에 도련님이 날 봐도 못 본 척하고 그냥 지나가?!”
왜 이 진상이 그 망나니에게 집착하는지는 모르겠으나 내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안 알려주지.”
“야! 이게 진짜!”
성질을 못 이긴 넬리가 한 손을 들었다.
손찌검인가 싶어 움찔했는데 멱살이 잡혔다.[‘세계를 구축하는 언령’이 신도의 위기에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없어 눈만 부라립니다.]그사이 넬리가 얼굴을 부담스러울 정도로 들이밀며 으르렁거렸다.
“어쩐지, 갑자기 차 시중 드는 법을 배우겠다고 할 때부터 알아봤어! 너도 도련님이 목적인 거지?”
“뭐?”
“꿈도 꾸지 마! 못난이 주제에!”
“…….”
얘가 이딴 황당한 소리를 하는 이유가 뭘까 추측해 보았다.
‘이 진상이 그 망나니를 좋아해?’
그러나 좋아한다는 순수한 말로 퉁치기에는 넬리의 눈에 담긴 세속적이고 전투적인 빛이 너무도 짙었다.
그때였다.[‘세계를 구축하는 언령’이 눈에 힘을 풀고 기대감에 찬 미소를 짓습니다.] [‘만상의 혼돈을 감시하는 눈동자’가 눈을 반달꼴로 만들며 빙의자의 역량을 가늠합니다.]응? 갑자기?
아마도 전지적 시점으로 지켜보고 계실 신님들의 반응이 심상찮았다.
마침 넬리의 어깨 너머를 향하고 있던 내 눈에 뭔가가 비쳤다.
‘오호, 과연.’
두 신이 웃은 이유가 이해되었다.
“야, 대답 안 해? 뭘 실실 웃고만 있어?”
“아, 미안, 넬리. 그러니까 네가 하고 싶은 말은, 네가 지금 도련님을 꼬셔서 팔자 피려는 목적이니까 나한테 방해하지 말아달라는 거야?”
“그렇지! 멍청이 주제에 말귀를 제대로 알아들었네?”
그 순간 이쪽으로 다가오던 두 사람의 발이 우뚝 멈췄다.
나는 모르는 척 넬리와 계속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런데 넬리, 아무래도 그건 좀 힘들지 않을까? 도련님은 귀족이고 우리는 평민이잖아.”
“흥, 그게 무슨 상관이야! 지금 마님도 평민 출신인데, 나라고 다음 백작 마님이 되지 말란 법 있어?”
어디선가 작게 숨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아직 살짝 부족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악의 주둥이를 긁었다.
“어머, 그게 말이 되는 소리니? 누가 그래? 네가?”
“우리 엄마가 그랬다, 왜!”
넬리의 의기양양하고 낭랑한 음성이 온실 텃밭 가득히 울렸다.
좋아. 이것으로 충분하다.
빙긋 웃는 나를 보고 넬리가 움찔했다.
“뭐야? 너 왜 그렇게 음흉하게 웃고 있어?”
“뒤를 봐.”
“히, 히이익! 마, 마님! 아, 아가씨!”
야차 같은 귀기를 뿜어내는 백작 부인과 그녀의 손을 잡고 온 무표정한 딸이 그곳에 있었다.
스산한 음성이 들려왔다.
“아, 그래……. 백작 부인 자리가 만만해 보였구나……? 내가 평민 출신이라……?”
“마, 마, 마님, 그, 그런 뜻이 아니오라……!”
“뭐, 그래……. 그 나이의 어린애들은 치기 어린 말을 할 수도 있지……. 그런데…… 너한테 그런 말을 가르친 게 네 어미라고……?”
“그, 그건……!”
빠져나갈 구석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넬리가 사색이 되어 벌벌 떨었다.
백작 부인이 목에 핏대가 서도록 외쳤다.
“당장 둘 다 짐 싸들고 백작성에서 나가!”
서슬 퍼런 노성에 넬리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버렸다.
“마, 마님……. 흐, 흐앙! 우아아앙!”
“다 큰 게 귀엽지도 않게 울고 있어! 집사!”
결국 집사까지 불러 넬리를 끌어냈다.
완고한 태도를 보건대 백작 부인이 퇴출 명령을 번복할 일은 없을 성싶었다.
이로써 하녀장 모녀가 정리되었다. 뿌듯하다.[‘만상의 혼돈을 감시하는 눈동자’가 조무래기 악역을 간단하게 해치운 당신을 보며 역시 S급 판정을 받을 만하다고 인정합니다.]아니, 정말. 그거 내가 가진 등급이 아니라 이 세계의 생존 난이도라니까요?
백작 부인과 그녀의 딸은 여전히 온실을 떠나지 않은 상태였다.
여전히 분에 겨워하는 백작 부인에게 위로차 토마토라도 건네볼까 고민하던 때였다.
백작 부인의 딸…… 그러니까 이름이 비안카 길레트던가.
비안카가 무심하다 못해 냉랭하게까지 느껴지는 표정과 음성으로 말했다.
“무시하시고 좋게 생각하세요, 어머니.”
“후우, 비아. 엄마는 이게 좋게 생각할 부분이 있는 일인지 모르겠구나.”
“하녀장은 전부터 채용 비리와 물자 횡령으로 문제가 많은 인사였어요. 이번에 내쫓게 되었으니 백작성에 좋은 일이죠.”
“아, 내가 방금 쫓아낸 애 엄마가 하녀장이었어?”
“……모르셨나 보군요. 하녀장이라 손쓰기 힘들었는데 마침 이렇게 정리하기 좋은 구실이 생길 줄은 몰랐네요.”
말을 마친 비안카가 내 쪽을 힐끗 곁눈질했다.
나는 모르는 척 토마토 바구니를 끌어안았다.
“저어, 그럼 마님, 아가씨. 저는 이만 주방으로 돌아가보겠습니다.”
“그래, 그러도록 하렴.”
“아니, 잠깐.”
백작 부인과 비안카의 말이 엇갈렸다.
“왜 그러니, 비아?”
“저 아이, 아일렛 로델라인의 처우에 대해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요.”
응? 난 뭐 잘못 안 했는데 왜?
백작 부인도 나와 같은 의견인지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 비안카가 내 앞으로 가까이 다가오더니 미소 지었다.
조금 전까지 무심하기 짝이 없던 백작 영애가 지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표정에 잠시 놀랐을 때였다.
귓가에 충격 발언이 터졌다.
“이 아이를 제 놀이 친구로 삼고 싶어요.”✠길레트 백작 영애의 놀이 친구. 사용인들의 입에서 입을 타고 도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것은 극한 직업이었다.
비안카 길레트는 딱히 까탈스럽게 굴지도, 남에게 해코지를 하지도 않는 조용한 성정이었다.
그러나 도통 속내를 알 수 없는 무심한 표정과 냉랭한 태도 탓에 비안카는 무섭고 어려운 백작 영애로 통했다.
오죽하면 비안카 앞에서 백작 부부 내외도 쩔쩔매고 망나니조차도 슬금슬금 피할 정도였다.
이제까지 방계의 여자아이 여럿이 비안카의 놀이 친구로 동원되었으나 사흘이 멀다 하고 울며 뛰쳐나갔다.
비안카가 배웅이라도 할라치면 놀이 친구는 유령을 본 얼굴로 기겁을 하며 도망쳤다고 한다.
도대체 열 살짜리 백작 영애의 방에서 무슨 무서운 일이 벌어지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런데 내가 그걸 직접 확인하게 생겼다.
다음 날 오후부터 나는 주방일을 면제받는 대신 비안카의 놀이 친구라는 업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후우, 이 뒤에 백작가의 숨은 실세가 있다.’
아름답게 양각된 나무 아치문 앞에서 나는 심호흡을 했다. 약간 던전에 입성하는 기분도 들었다.
노크로 허락을 구하고 문을 열었다.
“왔어, 아일렛 양?”
혼자 책을 보고 있던 비안카가 먼저 인사했다. 표정이 없고 음성이 차가워서 그렇지 상황만 보면 나름 살가웠다.
“안녕하세요, 아가씨.”
“응.”
인사도 했으니 이제 실무에 들어갈 차례다. 중세 판타지 세계관의 10세 귀족 영애는 무엇을 하고 놀 것인가.
아는 바가 없어서 쭈뼛거리는데 다행히 비안카가 먼저 말을 꺼내주었다.
“책을 읽으면 돼.”
비안카가 테이블에 잔뜩 쌓인 책들을 손짓했다. 아무거나 골라잡으라는 듯이.
책만 읽으면 되나?
내가 고뇌하는 표정을 짓자, 비안카가 아차 싶은 기색으로 물었다.
“혹시 글을 모르니?”
“아뇨. 알아요.”
빙의자 서포트 시스템의 지원을 받아 완벽한 공용어 구사가 가능했다.
비안카는 역시 지식인을 아빠로 둬서 그럴 줄 알았다며 납득했다.
본격적으로 책 제목을 살폈다. 책들은 문학, 역사, 사회, 정치, 경영, 신학 등 각 분야를 총망라하고 있었다.
‘열 살이 읽기엔 수준이 너무 높은데?’
혹시 이것이 바로 놀이 친구를 죄다 쫓아낸 비결인가.
의심을 하며 비안카가 읽고 있는 책을 힐끔 보았다.
음……. 제목이 ‘던전 신소재를 이용한 고부가가치 사업의 전망’인 것을 보니 딱히 나를 괴롭히려는 건 아닌 듯했다.
내가 고른 것은 문학이었다. 전생에 웹소설 애독자였기도 하고, ‘용사인 내가 마왕을 꼬신 건에 대하여’라는 제목이 좀 흥미로웠다.
“카우치로 가서 읽어. 편하게 누워서 봐도 돼.”
“와아, 감사합니다.”
어차피 나는 귀족 영애도 아니었으니 비안카의 배려를 냉큼 받아들였다.
내 침대처럼 배를 깔고 드러누워서 책을 펼쳤다.
‘이거 의외로 순수 문학이었네?’
사락사락, 책장을 넘긴 지 삼십 분쯤 지났을 때였다. 나는 문제를 느꼈다.
“우음. 저기, 독서 중에 죄송한데요, 아가씨.”
“왜?”
“책 바꿔도 될까요?”
“그래.”
무심한 대답과 달리 주의 깊은 관찰의 시선이 뺨에 달라붙는 것을 느꼈다.
이번에 내가 집어 든 것은 가장 대표적인 신학 서적, 즉 성경이었다.
비안카가 물었다.
“성경? 왜 그걸 골랐지?”
“성경에 대한 이해 없이는 문학을 이해하지 못할 것 같아서요.”
종교 문화는 예술에 소재적 토대를 제공한다.
얼마나 많은 미술, 음악, 문학 작품들이 종교를 기반으로 만들어져 대중 의식에 파고들었던가.
신의 존재에 대한 논란이 첨예하던 전생조차 그랬다.
하물며 세렌트라 대륙은 신의 증거인 신성력이 존재하는 세계관이다.
종교 문화가 세속에 주는 영향력은 전생보다 훨씬 더 클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용마꼬’를 잠시 접어두고 성경책을 집어 들었다.
전생의 메이저 종교들을 섞어놓은 것 같긴 하지만, 이참에 제대로 알아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비안카가 약간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게 보였다.
“학습이 필요한 부분을 스스로 파악해 내다니…….”
“아가씨?”
“아, 아니야.”
혼자 뭐라 중얼거린 비안카가 후다닥 책 속에 얼굴을 파묻었다.
빙의자를 위한 특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