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ychology of Deficiency RAW novel - Chapter 9
외전 1
국내 최고의 기업이라 일컬어도 무방한 신양 전자. 이제 막 삼 년차에 접어든 재경 팀 서해민 사원은 매일 똑같이 굴러가는 회사 생활에 점점 권태를 느끼고 있었다.
해민은 로비에 있는 사내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테이크아웃해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출근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는 터라 엘리베이터 안 공간도 널널했다. 덕분에 타 부서 직원들의 대화까지 전부 엿들을 수 있었다.
“회장님 외손자 말야. 오늘부터 출근하는 거지?”
빨대 끝을 입에 물고 수혈하듯 커피를 들이켜고 있던 해민이 흠칫 놀랐다. 사레가 들릴 뻔한 걸 가까스로 삼켰다.
“그렇겠죠? 상반기 공채 신입들 첫 출근 날이니까. 그나저나 과장님은 인사 팀장님한테 뭐 들은 거 없으세요? 회장님 손자 어느 부서로 들어간대요? 여기저기 쑤셔 봤는데 다들 모른다던데요.”
“안 그래도 그거 때문에 전부 긴장 상태야. 인사 팀장은 엊그제 저녁까지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면서 입 벙긋 안 하더라니까. 제발 우리 부서만 아니었음 좋겠다. 다 늙어서 신입 눈치 보느라 진 빼고 싶진 않은데.”
“보통 재벌 3세들 보면 경영 전략 팀이나 총무 팀 같은, 핵심 부서부터 시작하지 않아요?”
“그럴 거면 굳이 공채로 들어왔을까? 입사 통지 돌리고 나서야 알음알음 소문이 퍼진 건데……. 다들 면접 볼 때까지만 해도 까맣게 몰랐다니까. 하, 나 그때 뭐 실수한 거 없었겠지?”
때마침 띵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들의 뒷모습이 점점 멀어졌다. 해민은 혼자 덩그러니 남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오늘 아침 한결과의 대화를 곱씹었다.
‘오늘부터 점심 같이 먹을 수 있겠다. 그렇죠?’
아직 잠기운을 털어 내지 못한 해민의 입에 직접 만든 볶음밥을 떠먹이며 한결이 내뱉은 말이었다. 해민은 그가 먹여 준 밥을 오물오물 씹다가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눈을 크게 떴다.
‘아, 맞다. 너 오늘부터 우리 회사 출근하지?’
‘아, 맞다? 지금 아, 맞다라고 했어요? 그걸 잊고 있었다고?’
한결은 해민의 턱 끝을 쥐고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그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진득하게 눈을 맞춰 왔다. 그제야 새하얀 셔츠를 걸쳐 입은 그의 상체가 시야에 들어왔다. 평소엔 편한 홈 웨어 차림으로 출근하는 해민을 배웅하던 한결이었으나 오늘만큼은 달랐다. 아니, 오늘부터는 다르겠지. 해민이 배시시 웃으며 그의 셔츠 단추를 하나하나 채워 주었다.
‘무슨 소리야.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지.’
‘……뻔뻔하긴.’
해민이 널찍하게 펼쳐진 그의 흉근을 손바닥으로 쓰다듬자, 한결은 눈초리에 세운 날을 거두며 입을 맞춰 왔다. 쪽, 쪼옥. 담백한 입맞춤이 몇 차례 쏟아지고, 더욱 농도 짙은 키스로 이어지려는 순간이었다. 해민은 몸을 뒤로 무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그런데 왜 말 안 해 줘?’
‘응, 사랑해.’
‘그거 말고.’
‘다른 말이 뭐가 더 필요해요.’
‘어느 팀으로 가는지 정해졌을 거 아냐.’
‘모르는데?’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알겠지.’
‘벌써부터 낙하산 취급? 텃새도 적당히 부리자, 자기야. 이래 봬도 회장님 입김 없이 당당하게 공채로 입사한 사람한테 해도 너무하다고 생각 안 해요?’
‘내가 언제 텃새를 부렸다고…….’
그는 구시렁거리는 해민의 입에 볶음밥을 함빡 욱여넣었다.
‘이것 봐. 또 나만 설레지.’
‘나도 설레.’
영혼 없는 해민의 대답에 한결은 기가 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쏟아 냈다.
‘약속해요. 오늘 점심 나랑 같이 먹는다고.’
‘출근 첫날인데 팀원들이랑 같이 먹어야지.’
‘약속해요.’
‘아니면 입사 동기들이랑 친해지는 시간을 가져 봐.’
‘약속해.’
‘…….’
‘약속.’
허리를 꽉 끌어안고 집요하게 물어 오는 탓에 해민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회장님의 외손자이자 오늘 첫 출근한 신입 사원인 한결과 단둘이 밥 먹는 모습을 보면 누구나 의심할 테고, 그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 그럴싸하게 둘러댈 말을 생각해 놓아야 했다. 학부 선후배 관계여서 반가운 재회를 기념하던 차였다고 변명하는 게 가장 낫겠지?
재경 팀 업무만 해도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팔자에도 없는 비밀 사내 연애까지 해야 했다. 신경 쓸 게 늘어나긴 했지만 회사에서도 한결을 볼 수 있다는 건 해민에게도 기쁜 소식이었다. 사무실로 향하는 해민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해민 씨! 그 얘기 들었어?”
자리에 앉기 무섭게 윤 대리가 달려와 물었다. 사내 소식에 귀가 어두운 해민에게 언제나 새롭고 놀라운 소문을 물어다 주는 걸 즐기는 그녀였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그다지 놀랍지 않았다.
“회장님 외손자가 이번 공채로 입사했다는 거요?”
“어? 아네…….”
해민이 여상하게 되묻자, 윤 대리의 얼굴이 시무룩해졌다. 그녀의 한 자락 유희를 짓밟았다는 죄책감에 해민은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며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윤 대리가 아무리 빨리 이 소식을 전해 주었더라도 해민보다 빠를 순 없었을 거다.
“네. 어쩌다 알게 됐어요.”
“그럼 우리 팀으로 올 수도 있다는 건…….”
그건 미처 몰랐다. 말문이 막혀 윤 대리를 빤히 바라보자, 그녀의 눈동자가 반짝 빛났다.
“그건 못 들었구나!”
“우, 우리 팀으로요……? 왜요?”
“팀장님이 인사 팀에 인력 충원 요청하셨대. 신입 중에 회장님 손자가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하셨던 거지.”
해민은 바싹 마른 입 안을 커피로 축이며 미간을 좁혔다. 곰곰이 생각하다가 엘리베이터에서 엿들은 타 부서 직원의 말을 참고해서 대답했다.
“설마 우리 팀으로 올까요? 어차피 나중엔 총괄 경영으로 올라갈 테니까 인사 팀에서 총무나 경영 쪽으로 보낼 것 같은데.”
“음……. 하긴. 다들 그렇게 생각하더라. 그래도 혹시 몰라. 회사 자금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파악하는 덴 우리 부서가 딱이잖아? 나는 우리 팀으로 왔으면 좋겠어.”
다들 눈치 보고 싶지 않아서 그를 피해 가려는 게 느껴졌는데, 윤 대리만큼은 예외였다. 저야 물론 한결과 가까이 있고 싶으니까 같은 부서에 배정되어도 아무 상관없다지만, 그녀는 대체 왜? 해민은 목 끝까지 치민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물었다.
“왜요?”
“엄청 잘생겼대.”
“아…….”
윤 대리의 얼굴에 혈색 좋은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업무 과다로 피골이 상접해 있던 지난날의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자기도 이제 슬슬 회사 일 질릴 때 되지 않았어? 누구나 가슴 속에 사직서 하나씩 품고 사는 거잖아. 하루에 열 번도 더 꺼내 던지고 싶다가도 통장 보면서 꾹 참는 거지. 근데 잘생긴 신입이 들어오면 열 번 꺼내고 싶던 게 한 서너 번으로 줄어들지 않을까?”
제법 설득력 있는 논리였다. 해민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상상하며 막연한 불안감을 느꼈다.
만약 윤 대리가 한결을 좋아하게 된다면? 같은 팀 안에서 삼각관계가 펼쳐져 세 사람 모두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해민은 딱딱하게 굳은 입꼬리를 애써 끌어 올렸다.
“근데 윤 대리님, 올해 안에 결혼하신다면서요.”
“갑자기 그 얘기가 왜 나와? 결혼은 현실이고, 잘생긴 신입은 이상이지. 설마 내가 회장님 손자한테 눈독 들일까. 재벌가 며느리 되는 게 더 끔찍해.”
아, 다행이다. 해민은 속으로 중얼거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어수선한 분위기가 가라앉고, 각자의 자리에서 맡은 업무에 집중력을 쏟아부을 때쯤이었다.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해민은 분주하게 다가오는 발소리를 듣고 고개를 올렸다. 사무실 입구에서부터 인사 팀 직원의 뒤를 따라 들어오고 있는 남자는 다름 아닌…….
“안녕하십니까. 오늘부터 재경 팀에서 일하게 된…….”
고한결이다.
“……고한결입니다.”
매끄러운 광택이 흐르는 고급 슈트, 외제 차 한 대 값을 훌쩍 능가하는 명품 시계, 한 올 흐트러짐 없이 단정하게 쓸어 올린 헤어스타일과 수려한 얼굴에 걸린 여유로운 웃음까지.
굳이 묻지 않아도 그곳에 모인 사람들 모두가 속으로 확신했다.
‘쟤구나, 회장님 외손자가.’
해민이 아는 고한결은 생각보다 단순했다. 첫 출근이니까 제가 가진 옷 중 가장 그럴싸한 옷을 골라 입고, 가장 아끼는 시계를 차고, 가장 잘 어울리는 헤어스타일을 한 것뿐이다. 주변에서 회장 손자니 뭐니 떠들어 대는 건 전혀 괘념치 않아할 게 뻔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던 해민의 시선도 한결에게 다다랐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던 건지 해민과 눈이 마주친 한결의 눈매가 사르르 휘어졌다.
“잘 부탁드립니다.”
심장이 덜컹, 요동치는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재경 팀장이 한결의 앞으로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나야말로 잘 부탁해요.”
해민은 재경 팀장의 미소 뒤에 감춰진 울적한 심정을 쉬이 읽어 낼 수 있었다. 인력을 충원해 달라고 했지, 새파랗게 어린놈을 모시게 해 달라고 한 적은 없는데. 이 장소에 있는 사람들 중 해맑은 낯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고한결과 윤 대리뿐이었다.
윤 대리는 팔꿈치를 세워 해민을 쿡 찌르더니 속삭였다.
“얼굴 복지 최고.”
풉, 웃음이 터져 나오는 바람에 해민은 황급히 손등으로 입가를 가렸다.
회사에 있는 시간을 제외하면 한결과 한 몸인 것처럼 붙어 있었지만, 회사에서까지 그를 마주할 수 있다는 건 해민에게 희소식이었다. 업무 때문에 스트레스받을 때마다 사람들 몰래 사진첩에 저장해 놓은 한결의 사진을 보면서 마음을 다독이곤 했다. 그런데 제 시야 안에 고한결이 있고, 언제든 고개를 돌리면 그를 볼 수 있다니. 윤 대리의 말마따나 얼굴 복지가 아닐 수 없었다.
문제가 있다면, 그와의 관계로 인해 구설수에 오르내리지 않도록 언행을 조심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남 눈치 보는 법이라곤 모르고 제멋대로 살아온 고한결이 과연 조심해 줄지는 모르겠지만.
* * *
“원래는 이러지 않아요. 각자 점심 식사 따로 하고, 커피 한 잔씩 따악 마시다가 점심시간 끝나자마자 칼같이 사무실에 복귀해서 바로 업무 돌입하거든? 오늘은 우리 신입 사원이 오셨, 아니, 왔으니까 특별히 이렇게 자리를 마련한 거라고. 회식 강요? 어휴, 그런 거 정말 없어요. 우리 팀이 얼마나 자유로운 분위기냐 하면…….”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설렁탕 한 그릇을 각자 앞에 두고 재경 팀장의 연설이 이어졌다. 본인은 요즘 트렌드에 맞게 워라밸과 팀원들의 개인 시간을 존중해 준다는 게 요지였는데, 무려 오 분째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회장 손자에게 어필하기 위한 겉치레였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그가 다른 약속이 있을 땐 점심시간을 자유롭게 누릴 수 있었으니까. 나머지는 오늘처럼 그의 입맛에 맞는 식당에 다 함께 모여 주린 배를 움켜쥐고 연설을 들어야 했다.
해민은 열기가 식어 가는 설렁탕을 빤히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먼저 수저를 들었다가는 장유유서를 들먹이는 훈계까지 덧붙여질 게 뻔했기에 꾹 참았다. 팀원들이야 이제 익숙해져서 내성이 생겼다만, 오늘 처음 이런 경험을 하게 된 한결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서 눈을 굴려 옆을 바라보았다.
“……!”
그러자 곁눈질로 해민을 훔쳐보고 있던 한결과 눈이 마주쳤다. 못마땅한 듯 눈꼬리를 뾰족하게 세우고 있을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웃음을 꾹 참고 있는 그는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왜 웃어?’
해민은 손을 둥글게 말아 입을 가리고 그에게 입만 벙긋거렸다.
한결이 테이블 아래로 손을 뻗었다. 그가 무릎 위에 올려져 있던 해민의 손을 쫙 펼쳐 제 허벅지 위에 올리더니, 손가락을 세워 손바닥에 무어라 적기 시작했다.
‘조…… 좋…… 아서……? 좋아서?’
이게 좋나? 먹지도 못하는 음식을 앞에 두고 쫄쫄 굶고 있는 이 상황이 어떻게 좋을 수가 있지?
해민이 슬쩍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흘겨보았다. 한결은 입꼬리를 팽팽하게 당기며 표정을 갈무리했으나, 그의 새빨개진 귀 끝이 시야에 걸렸다. 귀엽기도 하고 기가 차기도 해서 피식 웃음이 샜다.
“…… 해민 씨, 왜 웃지?”
“네?”
화들짝 놀란 해민이 고개를 들었다. 셔츠 소매까지 걷어붙이고 얘기하던 재경 팀장이 미심쩍다는 눈빛으로 해민을 바라보고 있었다. 말문이 막힌 해민이 둘러댈 말을 떠올리려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근데 이거 언제 먹을 수 있습니까? 다 식었는데.”
이번에는 모두의 시선이 한결에게로 꽂혔다. 정녕 고한결이라서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경악으로 물든 팀원들의 눈동자가 재경 팀장과 한결 사이를 쉼 없이 오갔다. 한결이 씩 웃자, 떨떠름한 기색을 미처 지우지 못한 재경 팀장이 수저를 들었다.
“어? 아, 먹…… 먹어야지. 다들 안 먹고 뭐해? 어서들 들어요.”
그제야 다들 허겁지겁 수저를 들고 뚝배기에 밥을 말았다. 잠시 긴장했던 해민도 안도의 숨을 흘리며 국물을 떠먹었다.
“아 참, 고한결 씨도 한국대 나왔댔죠?”
그의 맞은편에 앉은 남 대리가 넉살좋게 말을 붙여 왔다. 한결은 제법 깍듯하게 예의를 갖추며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전공이?”
“경영입니다.”
“오? 해민 씨도 한국대 경영 아니었어?”
“맞아요.”
해민이 고개를 끄덕이며 여상한 말투로 대답하자, 호기심으로 일렁이는 눈동자 여러 개가 모여들었다.
“그럼 둘이 원래 알던 사이? 아, 워낙 대형 학과라 잘 모르려나? 학번은 다르죠?”
“원래 알던 사이 맞습니다. 학번은 다르지만 친하고요. 제가 입사 준비할 때 선배님한테 도움 많이 받았습니다.”
한결의 대답에 해민은 멋쩍게 웃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도움을 줬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가 이번 공채에서 떨어졌다고 해도 언젠가는 신양 그룹에 입사했을 텐데. 제가 해 준 거라곤 자기소개서 첨삭과 면접 때 나올 만한 질문을 추려 준 것뿐이었다.
“이야, 오늘 처음 본 사이라고 해도 믿겠는데? 우리 해민 씨는 얼굴에 감정이 잘 드러나지 않아서 말이죠.”
“우리…… 해민 씨……?”
한결이 어금니를 으득 맞물자 턱 근육이 불거졌다. 남 대리가 내뱉은 친근한 호칭에 놀란 건 해민 또한 마찬가지였다. 해민은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남 대리와 한결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테이블 아래로 그의 손을 꽉 맞잡았다.
“내가 서해민 씨 직사수였거든요. 재경 팀 일 내가 다 알려 줬는데. 해민 씨, 그렇죠?”
한결의 눈에서 불꽃이 튀는 걸 미처 발견하지 못한 남 대리는 언제나처럼 털털하게 웃으며 해민에게 물었다. 해민은 그렇죠, 라고 대답하면서 그의 손을 움켜쥔 손에 힘을 실었다. 한결이 충동적으로 무슨 말을 꺼낼지 몰라 이성을 다잡아 주기 위해서였다.
“우리 해민 씨……. 우리, 해민…… 씨…….”
한결은 남 대리의 말을 작게 되뇌며 해민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가늘게 좁아진 눈매 사이로 새카만 눈동자가 단단하게 빛났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연신 흘렀다.
“나도 한국대 출신이거든. 사내 동문회도 있는데 이제 고한결 씨도 거기서 볼 수 있겠네요.”
남 대리의 말이 이어졌으나, 한결의 뜨거운 눈빛을 견디다 못한 해민은 시선을 피하며 설렁탕을 연거푸 입으로 가져갔다.
“체하겠다. 천천히 먹어요.”
나지막한 한결의 목소리가 귓가로 파고들었다. 더없이 따뜻하고 다정한 말투는 평소와 다름없었기에 해민은 별다른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이미 사회생활에 찌들대로 찌들어 눈치가 하늘을 찌를 정도로 성장한 팀원들은 묘한 분위기를 귀신같이 감지했다.
“두 사람 진짜 친한가 보다.”
“네, 친해요.”
한결은 남 대리를 향해 씩 웃어 보이며 재차 강조했다.
“그것도 엄청나게.”
해민은 극심히 몰려드는 피로감에 머리가 지끈 아파 오는 걸 느꼈다. 한결과 같은 부서에서 일하게 되어 기뻤던 건 아주 찰나였다. 더욱 신경을 곤두세워야 할 날이 머릿속에 선하게 그려지는 바람에 밥이 어느 구멍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 * *
“아, 바빠 죽겠는데 진짜. 복사 용지 다 떨어졌어요! 누가 좀 가져다주…….”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리던 윤 대리의 시선이 정확히 한결에게 꽂혔다.
“고한결 씨, 할 일 없죠?”
해민이 보내 준 매뉴얼 파일을 숙지하고 있던 한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서 가져오면 됩니까?”
“비품, 하아……. 비품실 어딘지 모르죠?”
“알려 주시면 되죠.”
그가 눈웃음을 치며 느긋하게 대답하자, 윤 대리는 잘생겨서 봐준다, 속으로 중얼거리고는 해민에게 손짓했다.
“해민 씨, 신입한테 비품실 좀 알려 주고 올래? 내가 지금 너무 바빠서. 부탁 좀 할게.”
“네, 그럴게요. 고한결 씨, 따라오세요.”
“고마워. 가는 김에 영업 2팀 들러서 이것도 좀 전해 주라.”
해민은 윤 대리가 건넨 서류를 받아 들고는 앞장섰다. 성큼성큼 다가온 한결이 나란히 옆에 서서 걸으며 장난기 어린 웃음을 지어 보였다.
“여전히 걸음 빠르시고.”
“너 비품실 어딘지 알잖아. 왜 모른다고 했어?”
“선배야말로 알잖아요. 왜 모른 척 시침 떼고 그러지? 이해할 수가 없네.”
비상계단으로 향하는 한갓진 복도 귀퉁이, 비품실 팻말이 달린 낡은 철문을 열자 듣기 싫은 마찰음이 들려왔다.
“사이즈별로 좀 넉넉히 챙겨 가자.”
뿌옇게 일어나는 먼지를 손으로 휘저으며 해민이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뒤따라 들어온 한결은 문을 쾅 닫고 비스듬히 기대어 섰다.
불규칙하게 쌓여 있는 상자를 발로 툭툭 밀며 용지를 꺼내는 해민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감상하다가, 등 뒤로 손을 뻗어 잠금 버튼을 눌렀다.
가늘고 여린 어깨에서부터 한 줌이나 될까 싶은 허리로 떨어지는 선이 그의 음심을 자극했다. 스커트에 감싸인 굴곡진 골반에 시선이 다다르자 입 안이 바싹 말랐다.
해민의 뒤태를 보며 다른 사람들도 저처럼 음흉한 생각을 품었을 거라고 생각하자 부아가 치밀었다. 아무리 애인이라지만 옷차림까지 간섭하는 건 월권이라고 판단해 말을 아꼈다. 그러나 심사가 뒤틀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해민의 등 뒤로 다가간 한결이 두 팔로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가느다란 한숨이 해민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한결아, 여기 회사야.”
“머지않아 내 소유가 될 회사지.”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아흣.”
한결이 이를 세워 해민의 귓바퀴를 콱 깨물었다. 그가 귀 뒤 여린 살에 뽀뽀 세례를 퍼부으며 속삭였다.
“좋아하는 거 같은데.”
“좋긴 뭐가, 흣, 좋아? 전혀 아니야.”
“왜 나 피해 다녔어요?”
“내가 언제…….”
해민은 두 뺨을 붉히며 입을 틀어막았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걸 보니 여태 피해 다닌 거 맞구먼 뭘. 요 며칠 회사에서 해민은 눈에 띄게 제 시선을 피했었다. 말을 섞어 볼 요량으로 이것저것 물어보면 다른 팀원에게 넘기거나, 참고하라며 사내 메신저로 파일을 보내 주는 게 다였다.
그동안 한결은 애가 타서 죽을 지경이었다. 집에서는 또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저를 대했기에 뭐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 미묘한 간극에 혼자서만 속을 끓였다.
“다른 사람들한테 들킬까 봐?”
아랫배 언저리를 배회하던 커다란 손이 슬금슬금 올라와 해민의 가슴을 꽉 움켜쥐었다.
“흐읏, 하지 마, 좀……!”
“왜요. 여기선 들킬 일 없으니까 상관없잖아.”
해민이 노골적으로 주물러 대는 그의 손을 떼어 내려 손목을 붙들고 허리를 비틀어 보았지만, 그럴수록 하반신이 더욱 밀착해 왔다. 바지를 뚫고 나올 듯 팽창한 한결의 아랫도리가 느껴졌다.
“가만히 좀 있어 봐요. 허리를 하도 흔들어 대니까 좆이 딱딱해졌잖아.”
그의 뜨거운 숨결이 목덜미에 닿았다. 부드럽고 폭신한 입술이 여린 살갗에 문질러질 때마다 해민은 새어 나오려는 신음을 참으려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게 누가 티 나게 피해 다니래요? 서운해서 눈물 날 뻔.”
한결의 반대편 손이 이윽고 스커트 아래로 파고들었다. 오금을 지나 허벅지를 타고 올라온 손은 비부와 근접한 안쪽 살을 주무르며 흥분을 돋웠다.
문 너머 복도에서 직원들의 말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어서 그의 손길을 뿌리치고 벗어나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은밀한 유혹에 몸이 달았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체온이 뜨거워졌다. 고한결과 맞붙어 있음에 더욱 그러했다.
“이제 안 그럴게. 응? 이제 안 피해 다닐 테니까 제발 좀 놔줘.”
“알았어요. 근데 나도 놔주고는 싶은데…….”
금세 속옷이 척척하게 젖어 들었다. 한결의 손끝이 얇은 천 아래 도드라진 음핵을 무심하게 건드리는 바람에 뜨끈한 애액이 울컥 쏟아졌다.
“아무리 봐도 지금 즐기는 거 같단 말이지. 남들이 볼지도 모르는 이런 아슬아슬한 상황을 기대했던 거예요? 그동안 내가 서해민 취향을 너무 몰랐나?”
“아니, 아니야. 그런 거.”
해민이 끙끙거리며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한결은 한쪽 입꼬리를 씩 말아 올리며 해민을 돌려세우더니, 애액으로 젖은 제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이래도 아니야?”
수치스러움에 낯 뜨거워진 해민은 울고 싶었다. 해민이 한결을 홱 쏘아보며 그의 가슴팍을 밀어내자, 꿈쩍도 않는 그가 낮은 웃음을 흘리며 입술을 포개어 왔다. 꽉 맞다문 입술 사이를 가르며 파고든 혀가 입천장을 간지럽히고 달뜬 숨을 앗아 갔다. 입 안이 온통 고한결의 향으로 가득 찰 무렵, 맞물린 입술이 서서히 떨어졌다.
해민이 심각한 얼굴로 아랫입술을 깨물자, 한결은 히죽 웃으며 허리를 굽혀 해민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미안, 미안. 다음부터는 집에서만 놀릴게.”
“너 진짜 죽일 거야.”
“이왕이면 침대에서 죽여 줘요.”
한결의 셔츠 카라 안쪽에서 반짝이는 무언가가 보였다. 해민의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와 같은 것이었다. 알아채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니까 반지를 빼고 다니라고 했더니, 한결은 족쇄를 그렇게 쉽게 푸는 사람이 어디 있냐며 목에 걸고 다녔다.
가슴 한쪽이 뻐근해져 오는 걸 느낀 해민은 차마 그의 질 나쁜 장난을 나무랄 수 없었다. 화가 나는 일이 있어도 금세 풀리고, 한결의 얼굴만 봐도 실없는 웃음이 새어 나왔으니까. 아무래도 중증이 확실했다.
* * *
밤 9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이었다. 퇴근 직전에 시재 오류를 발견한 해민은 두 눈을 질끈 감고 한결에게 메시지를 보냈었다.
[나 오늘 야근. 먼저 집에 가 있어.]파티션 너머로 강렬한 시선이 쏟아지는 게 느껴져 고개를 들었을 때, 한결이 주인 잃은 강아지 같은 표정으로 해민을 바라보고 있었다.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끝날 때까지 기다리겠다는 의지가 확고해 보이기에 재차 메시지를 전송했다.
[퇴근하자마자 집 가서 밥 먹고 싶어. 저녁 준비해 줄 수 있지?]한결은 아직 신입인지라 맡은 업무가 많지 않았다. 해민의 일을 도와주는 것도 한계가 있을 터였다. 굳이 기다렸다가 같이 퇴근하는 것보다는 한결을 먼저 집에 보내 놓고 마음의 짐이라도 덜어 내는 게 나았다.
그녀의 속내를 읽어 낸 한결은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사무실을 나섰다. 그는 해민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수십 번도 더 뒤를 돌아보며 미련을 남겼다. 해민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한결을 향해 얼른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으아, 드디어 끝났다.”
세 시간 만에 오류를 잡아내고 완벽하게 작업을 마친 해민은 빠르게 자리를 정리하고서 회사 건물을 빠져나왔다.
한결과 함께 살고 있는 아파트는 사옥에서 도보 십 분 거리였다. 해민은 입사와 동시에 오피스텔 보증금을 빼서 아버지에게 송금했다.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는 메시지도 함께 덧붙였다. 그 후로 연락처를 바꾸고 부모와 연을 끊고 산 지도 어언 몇 년이 흘렀다.
한결이 회사 근처에 집을 구해 들어와서 같이 살자고 해 준 덕분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아니었다면 고시텔을 전전하거나 은행에서 거액을 대출받아 원금과 이자 상환에 허덕이고 있었겠지.
그때를 떠올리자 새삼 눈물이 찔끔 나올 뻔했다. 신세 지고 싶지 않아서 밀어내기도 했었다. 그러나 한결은 서늘해진 얼굴로 잡생각 좀 집어치우라며 일갈했다. 언젠간 헤어질 생각이라 거리를 두는 거 아니냐며 의심에 의심을 거듭했고, 그 때문에 먼저 두 손 두 발 든 건 해민이었다. 서로 좋은 감정만 나누기도 아까운 시간에 하릴없는 의심을 불릴 필요는 없어서였다.
단지 안으로 들어선 해민은 우뚝 솟은 고층 아파트를 올려다보았다. 고한결과 함께 지내는 보금자리. 여유를 누리며 편히 쉴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매일 다투는 부모님 사이에서 눈치 볼 일도 없었고, 언제 짐을 빼야 할지 몰라 불안했던 기숙사나 오피스텔과는 급이 달랐다. 이제껏 몸을 누인 곳 중 가장 집다운 집이라고 볼 수 있었다.
‘고한결 보고 싶다.’
가슴이 벅차올랐다. 발걸음이 빨라졌고, 해민은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자마자 닫힘 버튼을 연타했다. 오늘처럼 막중한 업무에 치여 정신없이 하루를 보낸 날은 그를 향한 감정이 더욱 깊어졌다.
띵,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가 멈추었다. 느리게 열리는 문 틈새로 비집고 달려 나와 현관 앞에 섰다. 도어 록 위로 올렸던 손이 잠시 머뭇거렸다. 해민은 찰나의 고민 끝에 도어 록이 아닌 초인종으로 손을 가져갔다.
현관 안쪽에서 경쾌한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렸다.
“왔어요?”
반가운 기색을 띤 한결의 얼굴이 시야에 꽉 들어찼다. 어젯밤에도 보고, 아침에도 보고, 회사에서 내내 봤는데도 왜 이렇게 설레는지 모르겠다. 쌓인 피로가 전부 녹아내리고 세상이 환해지는 기분이었다.
현관에 멀뚱히 서서 그를 바라보고만 있자, 한결이 고개를 갸웃 기울이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또 이러네.”
그가 손으로 입가를 슬쩍 가리며 웃음을 삼키더니 양팔을 벌린다. 한결의 너른 품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리 와요.”
해민은 저만을 위해 준비된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의 목을 끌어안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은은한 체향이 깊숙이 스며들었다. 한결이 해민의 등을 토닥이며 귓가에 속살거렸다.
“나 보고 싶었지?”
끄덕끄덕.
“매정하게 꺼지라고 해 놓고.”
“……꺼지라곤 안 했어.”
먼저 가 있으라고 했지.
“가끔 떨어져 있는 것도 괜찮은 거 같네.”
흠칫 놀란 해민이 가슴팍에 파묻었던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뭐? 안 돼.”
“떨어져 있어야 내 소중함을 느끼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나한테 매달리고 응석도 부리는 거지.”
단단함으로 무장하다가도 가끔 이렇게 무너져 내릴 때가 있다. 뜨거운 감정이 예고 없이 울컥 치밀어 오르고, 갈 곳을 잃어 헤매는 어린아이가 된 것만 같을 때. 대기업 사원이나 어른이라는 이름을 전부 집어 던지고 목 놓아 울고만 싶을 때.
그럴 때마다 한결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지금처럼 커다란 손으로 등을 쓸어내리고 머리에 뽀뽀를 퍼부었다.
고한결이 있는 집에 그와 함께 머무는 가장 평화로운 순간.
“나 다녀왔어.”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머리 위에서 잔잔하게 흩어졌다. 언제나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가 귓등을 두드렸다.
“수고했어요.”
“배고파.”
“얼른 밥 먹자.”
해민을 가뿐하게 안아 든 한결이 신발을 차례로 벗겨 주었다. 주방으로 향하는 동안 해민은 제 엉덩이를 사정없이 주무르는 나쁜 손길을 쳐 내야 했다.
“밥부터 먹고, 좀.”
“날 먹는 건 어때. 밥보다 내가 더 맛있는데.”
하. 해민은 헛웃음을 쏟아 냈다. 그럼에도 능글맞은 웃음을 걸치며 달라붙는 한결의 머리를 꼭 끌어안아 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밥은 먹을 거야.”
* * *
퇴근 후 그들의 일상은 단조로웠다. 함께 저녁을 차려 먹고, 세면대 앞에 나란히 서서 거울을 보며 양치를 했다. 거울 속에서 눈이 마주칠 때마다 한결은 해민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간지럼을 태웠다. 유독 옆구리가 민감한 해민은 웃음을 쏟아 내며 그를 밀어냈고, 그럴수록 한결은 더욱 달려들었다. 결국 양치고 뭐고 몸이 동해 한바탕 일을 치르고 나면, 그는 해민의 나신을 꼼꼼히도 씻겨 주었다.
나른해진 몸 위로 한결의 커다란 티셔츠 한 장을 걸쳐 입고 욕실을 나섰다. 젖은 머리를 털며 거실로 나가자, 소파에 앉아 리모컨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한결이 보였다. 해민은 오도도 달려가 그의 옆자리에 풀썩 앉았다. 그는 씩 웃으며 해민을 끌어안아 바짝 붙어 앉게 했다.
“보고 싶은 영화 있어요?”
“네가 보고 싶은 거.”
“오늘은 제발 끝까지 좀 보자. 중간에 꾸벅꾸벅 졸지 말고.”
빔 스크린에 환한 불이 들어왔다. 웅장한 사운드와 함께 영화 타이틀이 떠올랐다.
“네가 아직 신입이라 일이 별로 없어서 잘 모르나 본데. 하루 종일 계산기 두드리면서 머리 굴리는 게 얼마나 피곤한 일인 줄 알아?”
“……그런 건 별로 알고 싶지 않아요.”
“그러면서 왜 하필 재경 팀으로 온 거야?”
해민의 맨허벅지를 쓰다듬던 한결이 이윽고 그 위에 머리를 기대고 소파에 길게 드러누웠다. 해민은 스크린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그의 머리카락을 살살 매만졌다.
“선배가 영업 팀에 있었으면 영업으로 갔겠지. 기획 팀에 있으면 기획으로 갔겠고.”
“부서도 네 맘대로 정할 수 있어서 좋겠다.”
“서해민 부서도 내 맘대로 정할 수 있는데. 나한테 잘 보이는 게 좋을 거예요.”
무심하게 대꾸하는 한결에게 괜한 심술이 일었다. 가끔 이렇게 그와의 간극을 실감할 때가 있었다. 그가 입사하고부터 그 빈도수가 점점 더 늘어났다.
이를테면 구내식당에서 같이 점심을 먹을 때마다 그를 눈짓하며 수군거리는 직원들을 볼 때, 팀원들한테 미친 듯한 업무량을 떠맡기는 재경 팀장이 그 앞에서는 쩔쩔매는 모습을 볼 때, 회사 로비에서 마주친 임원진이 그에게 반갑게 알은 체를 해 올 때.
그럴 때마다 아, 얘가 정말 회장님 손자가 맞구나, 느껴지면서 등골이 오싹해지는 거다.
해민은 스크린을 바라보면서도 영화에 통 집중할 수가 없었다. 재벌들은 기업 간의 이익을 위해 정략결혼도 하고, 뭐 그런다던데. 한결도 어느 날 불쑥 정혼자와 결혼해야 한다며 저를 떠나는 건 아닐까, 아니면 제가 그의 정부로 남게 되는 건 아닐까. 그런 초라한 상상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후,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내가 고한결보다 나은 게 뭐가 있지.’
집안이 대단한 것도 아니고, 업무 능력이 월등히 뛰어난 것도 아니고, 앞길이 창창한 것도 아니고.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고, 밥시간이 되면 밥 먹고, 또 다시 책상에 앉기를 반복하면서 늘어난 건 뱃살뿐이었다.
뱃살……. 직장인의 무게였다.
해민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시선을 떨궜다. 그러고는 통통하게 부푼 아랫배를 감추고자 숨을 헙 들이켰다.
스크린을 보며 누워 있던 한결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고 해민을 향해 돌아누웠다. 그는 침울해진 해민의 얼굴을 흘끗 올려다보더니 손을 올려 해민의 턱 끝을 쥐었다.
“졸지 말랬다고 시위하는 건가? 왜 똥 씹은 표정이지?”
“몰라도 돼.”
짧게 대답한 해민은 다시 힘주어 숨을 집어삼켰다. 한결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좁히며 뺨을 긁었다.
“왜 그래요?”
“뭐가.”
“왜 숨을 안 쉬냐고.”
치부를 들킨 것만 같아 미간을 슬쩍 찌푸렸다. 그렇게 티가 났나. 결국 참았던 숨을 훅 터뜨리자, 홀쭉했던 배가 오동통 부풀어 올랐다. 머쓱해진 해민은 입꼬리를 팽팽하게 당기며 표정을 갈무리했다.
“아, 알았다.”
한결의 한쪽 입꼬리가 씩 말려 올라갔다. 그와 동시에 그의 손이 티셔츠 안으로 파고들었다. 맨살갗을 쓰다듬다가 짓궂게 아랫배를 조몰락거리는 손길이 이어졌다.
“이거 때문이었어요?”
매일 마주하는 한결의 몸은 정성 들여 조각한 것처럼 완벽하기 그지없었다. 크고 작은 근육으로 꽉 짜인 몸은 한 치의 지방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런 고한결이 티셔츠를 들추며 제 살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어느 누가 부끄럽지 않을 수 있을까. 해민의 입술이 쀼루퉁하게 모였다.
“하지 마.”
“뭘 하지 마.”
“내 몸에 손대지 마.”
“허?”
기가 차다 못해 황당해진 한결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는 해민을 쑥 들어 올리더니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방금 그 말 존나 서운한 거 알죠?”
해민은 말려 올라간 티셔츠를 끌어 내리며 드러난 몸을 가리기에 급급했다. 그녀가 입을 굳게 다물고 뾰족해진 눈초리로 한결의 얼굴을 흘끗 쏘아보았다.
“볼 거 다 본 사이에 뭘 또 새삼스럽게 가리고 그래. 응?”
그는 해민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으며 야살스럽게 속삭였다. 그러면서 한 손으론 해민의 양 손목을 결박해 등 뒤로 고정시켰다. 그러더니 티셔츠 위로 도드라진 정점을 향해 입술을 내렸다.
유두 주변 얇은 천이 온통 그의 타액으로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이를 세워 잘근잘근 씹어 대는 통에 정신까지 혼미해졌다. 꼼짝할 수 없어진 해민은 새어 나오려는 신음을 참으려 안간힘을 써야 했다.
“나, 흐읏, 내일부터 저녁 안 먹을래.”
해민의 단단한 각오에 한결은 푸스스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양새가 꼭 비웃는 것처럼 비쳐졌다. 지 몸은 완벽하다 이거지. 눈썹을 한데 모은 해민이 다시 한번 각오를 다졌다.
“살 뺄 때까지 너랑 섹스도 안 할 거야.”
“살을 빼고 싶으면 운동을 해야지. 안 먹는다고 그게 되겠어요?”
운동이라면 질색이었다. 체력을 길러 보겠다고 출근 전에 한결을 따라 아파트 헬스장으로 내려간 적이 있었다. 고작 한 시간 운동했을 뿐인데 하루 종일 병든 닭처럼 시름시름 앓고 나선 더욱 운동이 싫어졌다. 운동을 할 바엔 차라리 식욕을 참는 게 나았다.
해민이 고개를 세차게 젓자, 한결이 눈꼬리를 축 늘어뜨리며 서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왜 싫어. 응?”
“힘들단 말야.”
“힘은 좀 들어도 우리 둘이서만 할 수 있는 운동도 있잖아. 왜 자꾸 딴생각해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해민은 이마를 맞대고 집요하게 따라붙는 한결의 시선을 피하며 아랫입술을 질끈 물었다. 그가 말하는 운동이 무엇인지 깨닫고 난 후에 찾아온 민망함이 온몸을 달구었다.
“해민아, 너도 그거 좋아하잖아. 아주 좋아서 환장을 하면서.”
한결은 결박하고 있던 해민의 손을 쥐고는 제 고간으로 가져갔다. 트레이닝팬츠 아래로 두툼하게 일어난 윤곽이 느껴졌다.
해민은 홀린 듯 그의 성기를 쓰다듬으며 잠시 고민했다. 섹스할 때마다 소모되는 칼로리가 엄청나다고 어디선가 듣긴 했다만…….
해민이 뜸을 들이며 머뭇거리고만 있자, 참다못한 한결이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 뜨며 말했다.
“내가 나 살쪘다고 몸에 손도 대지 말고 섹스도 하지 말자고 하면. 그냥 내버려둘 건가? 선배는 그럴 수 있어요?”
해민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살찐 고한결은 상상조차 되지 않았지만, 그가 그랬다면 아마도…… 지금 고한결이 하는 짓과 똑같이 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싫어. 절대 그냥 안 내버려둘 거야.”
“아, 그러니까.”
그는 원하는 대답을 들어 반색하며 해민을 소파 위에 길게 눕혔다.
“허튼 생각 좀 하지 마요. 지금처럼 밥 잘 챙겨 먹으면서 내 옆에 있어 주기만 하면 되는데 그게 고민할 거리나 되나?”
품 안으로 파고드는 한결을 끌어안으며 해민은 입 안에 담아 두었던 걱정거리를 조심스레 끄집어냈다.
“내가 너보다 잘난 게 하나도 없잖아.”
“…….”
“회장님이 돈 봉투 주면서 너랑 헤어지라고 하면 어떡해…….”
푸훕, 한결의 잇새로 웃음이 터졌다. 미간을 긁적이며 고개를 든 그가 해민과 길게 눈을 맞춰 왔다.
“드라마 써?”
“…….”
“나 인간 만들어 줘서 고맙다고 돈 봉투 쥐여 주는 게 더 말이 되겠는데.”
그가 온 얼굴에 뽀뽀 세례를 퍼붓는 통에 해민은 차마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우리 윤 여사가 널 모를 거 같아?”
“나, 나를 아셔? 아신대?”
한결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손자랑 같이 사는 사람이 누구인지 이미 알아보고도 남았겠지. 맘에 차지 않았다면 진즉 둘 사이를 찢어 놨을 거고. 무엇보다 한결의 할머니인 윤옥경 여사는 손자의 연애사에 관여할 정도로 한가하지 않았다.
“신파 찍을 일은 없으니까 그딴 걱정할 시간에 어떻게 하면 날 더 사랑해 줄 수 있을지 고민해 봐요.”
* * *
오랜만에 회식이 잡혔다. 명목은 신입 사원 환영회였지만, 물 만난 물고기처럼 신이 난 건 재경 팀장뿐이었다.
“나 때는 말야, 한 시간 반 전에 출근해서 사무실 정리해 놓고, 팀장님 오시기 전에 미리미리 취향에 맞게 커피 딱 세팅해 놓고, 어? 그리고……. 아하하. 요즘 나 때는, 이런 말 쓰면 꼰대라고 한다던데, 내가 꼰대인가? 아이고. 나이 들면 다 이렇게 된다니까, 참.”
팀원들은 적당히 대꾸하며 잘 익은 고기를 입에 넣었다. 해민 역시 한결이 직접 구워 앞접시에 덜어 주는 고기를 씹어 먹으며 육질을 음미했다.
한결은 그 모습을 뿌듯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양손에 집게와 가위를 들고 너무 티 나지 않게 해민에게만 고기를 한두 점씩 더 몰아 주고 있었다.
저야 물론 남들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전부 해민의 입으로 넣어 주고 싶었지만, 주변 눈치를 살피는 건 오로지 해민을 위해서였다. 혹여나 저와의 관계가 들통나서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될까 봐.
같은 테이블에 앉은 팀원들은 직접 고기를 구워 먹는 재벌 3세가 신기한지, 오물오물 고기를 씹으면서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한결을 바라보았다. 어설픈 실력으로 아까운 고기를 태워 먹을까 걱정했건만, 그는 생각보다 숙련된 손짓으로 고기를 앞접시에 배달해 주었다.
한결이 딱딱 소리 나게 집게를 부딪치며 씩 웃었다.
“왜 다들 그런 눈으로 보세요?”
순수하게 묻는 그의 목소리에 해민도 맞은편에 앉은 사람들의 안면을 살폈다. 그때 윤 대리가 두 눈을 반짝 빛내며 한결에게 대답했다.
“신기하니까 쳐다보지. 우리가 언제 회장님 손자가 구워 주는 고기를 다 먹어 보겠어요. 아니, 왜 그런 소문도 있잖아. 어떤 재벌은 감방에서 라면을 처음 먹어 봤다고.”
한결은 순간 멍해졌다. 뭐 그딴 머저리가 다 있지? 그럼 감방 가기 전까지는 가정부가 차려 주는 밥만 처먹었다는 건가? 해민이 만들어 준 인스턴트 떡볶이를 가장 좋아하는 한결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어느 집안 자식일까. 제가 아는 기업가 자식들 중 감방에 들어갔던 놈들을 추리며 범위를 좁혀 갔으나 좀처럼 답이 나오진 않았다. 소문이라니까 그저 소문일 수도 있고, 뭐.
“그럼 한결 씨는 닭발 먹어 봤어요? 무뼈 말고 통닭발.”
사람 놀리나?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한결은 미간을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그러다가 옆에 놓인 소주병을 집어 들었다. 다른 때였다면 그냥 무시하고 말았겠지만, 옆에서 저를 지켜보고 있는 해민을 의식해서 한 행동이었다.
“윤 대리님, 한 잔 받으세요. 신양 그룹 총수 손자가 술도 따라 줬다고 자랑하셔야죠.”
넉살 좋게 받아치는 한결 덕분에 깔깔 웃은 윤 대리가 다급하게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인증 샷 찍어야지.”
그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찰칵, 찰칵, 여러 각도에서 사진을 찍어 댔다. 만족할 만한 사진을 건졌는지 흐뭇한 표정으로 액정을 쓰다듬다가 소주병을 들었다.
“한결 씨도 한 잔 받아요. 아, 소주는 안 하려나?”
“그럴 리가요.”
대학 다니는 내내 퍼마신 게 소주인데…….
한결의 잔을 채운 윤 대리가 비어 있던 해민의 잔에도 소주를 채웠다.
“해민 씨도 고기만 먹지 말고 같이 짠, 하자. 응? 윤 대리 소원! 오늘 같은 날엔 같이 좀 마셔 주라.”
“아, 저는…….”
몇 해 전, 한결과 편의점 앞에서 술을 마시다가 필름이 뚝 끊긴 후로 해민은 적당히 술을 멀리해 왔다. 이미 두어 잔 받아먹은 터라 이제 음료수만 마시려고 했는데, 윤 대리의 애원을 못 본 척하기에는 조금 난감한 상황이었다.
슬쩍 한결의 눈치를 살피다가 그와 시선이 부딪쳤다. 한결이 피식 웃으며 어깨를 가까이 붙여 왔다. 그러고는 해민에게만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오늘은 나 있으니까 맘껏 마셔도 돼요.”
뜨거운 숨결이 귓가를 지그시 내리눌렀다. 왁자지껄한 사람들 틈에서 오롯이 둘만 남은 것만 같은 이상야릇한 기분에 휩싸여 두 뺨이 발그레 붉어졌다.
밀담을 나누는 두 사람을 지켜보던 윤 대리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어머, 어머. 두 사람 뭐야? 사귀어?”
제가 생각해도 의심을 살 만한 상황이었다. 해민이 무어라 항변하려 입을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마땅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였다.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팀원들까지 윤 대리의 말을 듣고 그들에게로 시선을 모았다.
“으응? 해민 씨 남자 친구 있다고 하지 않았어? 반지 있잖아, 반지!”
“네, 맞아요. 저 남자 친구도 있고, 반지도 있어요. 여기.”
해민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네 번째 손가락에는 여전히 반짝이는 반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한결이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며 말을 보탰다.
“아아, 다들 한 번도 못 보셨어요? 서해민 선배 남자 친구.”
“한결 씨는 봤어? 뭐야, 그럼 둘이 사귀는 건 아니고?”
“당연히 아니죠. 선배 남자 친구가 너무 잘나서 저는 감히 쳐다도 못 보겠던데.”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지, 깜짝 놀란 해민이 그를 홱 쏘아보며 입을 벙긋거렸다.
‘입 안 다물어?’
“네. 입 안 다물어요. 잘난 걸 잘났다고 하지, 뭐라 해.”
한결은 어깨를 으쓱하며 여상하게 대꾸했다.
“한결 씨가 이렇게 말할 정도면 얼마나 잘났는지 너무 궁금하다. 그렇게 잘생겼어? 키 커? 언제 한번 보여 줘, 응?”
“안 돼요. 꽁꽁 숨겨 놓고 저만 보겠다고 하던데. 선배, 그렇죠?”
해민이 어금니를 으득 물며 눈초리를 날렵하게 세웠다. 주위 시선을 온통 저에게 꽂히게 만들어 놓고 실실 웃으며 속 편하게 고기를 집어먹는 한결이 퍽 얄미웠다. 젓가락을 쥔 손에 힘이 실렸다.
“네에, 저만 볼 거예요. 평생.”
그 순간, 한결이 집고 있던 고기를 툭 떨어뜨렸다. 뭐 때문에 놀랐는지는 몰라도 그는 입술을 살짝 벌린 채 해민을 빤히 바라보았다. 팀원들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를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안 봤는데 해민 씨 소유욕이 아주 장난이 아니네.”
“방 안에 묶어 놓고 못 나오게 하고 있는 거 아니야? 이야, 상여자네.”
“알았어, 알았어. 앞으로는 절대 보여 달라고 안 할게?”
소란스러운 틈을 타 한결은 해민의 귓가로 입술을 갖다 대고 빠르게 속살거렸다.
“나 존나 설렜어.”
“…….”
“지금 섰는데 어떻게 책임질래요?”
해민은 그를 밀어내고는 손으로 연신 부채질을 해 댔다. 찬물을 아무리 들이켜도 얼굴에 오른 열은 쉬이 가시지 않았다.
“저 잠시 화장실 좀.”
바람이라도 쐬고 오면 열기가 가라앉을까 싶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결은 장난기 어린 웃음을 걸친 채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다녀와요. 난 지금 일어나기 곤란한 상황이라.”
저게 진짜……!
해민은 할 수 있는 한 가장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꽉 움켜쥔 주먹을 그에게 보여 주었다. 그래 봤자 한결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진한 얼굴로 눈썹만 들썩일 뿐이었다.
* * *
재경 팀장을 필두로 팀원들이 주는 술잔을 곧이곧대로 받아 마시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꽤 흘렀다.
한결의 신경은 줄곧 비어 있는 옆자리에 쏠려 있었다. 돌아올 때가 됐는데 왜 아직도 안 오는 건지. 손목에 걸친 시계를 흘긋 내려다본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식당을 빠져나와 화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여자 화장실 문은 활짝 열린 채였다. 아무도 없다는 뜻이었다.
“어딜 간 거야.”
미간을 흠씬 구긴 한결이 재킷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며 건물 밖으로 나왔다.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길모퉁이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는 해민과 남 대리가 보였다.
남 대리는 한결에게서 등을 보인 채로 서 있었고, 그와 마주 선 해민의 표정만이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왔다. 남 대리가 손짓을 동원하며 무어라 얘기하자, 해민은 난감하다는 듯 웃으며 제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한결은 해민에게 시선을 고정하고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쉬기를 반복했다. 당장 달려가 무슨 얘기 중이냐고 캐묻고 싶었지만, 해민의 얼굴을 보니 대충 알 것도 같았다. 이 상황에서 제가 끼어들면 해민은 더욱 난처해할 테니까 충동을 꾹 억누르며 주먹을 질끈 쥐었다 펴기를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몇 분이 흐르고 나서야 해민은 남 대리의 어깨 너머에 있는 한결을 발견했다. 해민의 투명한 눈동자가 크게 요동쳤다. 남 대리가 해민의 시선을 따라 몸을 돌렸다. 차갑게 가라앉은 한결의 눈과 마주친 그가 화들짝 놀랐다가 하하 웃었다.
“고한결 씨, 언제부터 나와 있었어요? 담배 피우려고?”
“담배 안 합니다.”
한결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는 그들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해민이 떨리는 눈동자로 한결과 남 대리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남 대리는 해민의 어깨를 가볍게 툭 치며 말했다.
“그럼 나 먼저 들어가 볼게요. 긍정적으로 한번 생각해 보고 말해 줘.”
한결의 얼굴에선 어떠한 감정도 묻어나지 않았다. 그는 허둥지둥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남 대리를 쓰윽 바라보고는 다시 해민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남 대리가 터치한 해민의 어깨 부근으로 손을 가져갔다.
“얻다 손을 대, 저 씹새끼가.”
조용히 읊조리는 그의 목소리에 해민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혹여나 누가 볼세라, 한결의 손을 잡아끌며 어두컴컴한 골목길 어귀로 그를 데려갔다.
좀처럼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 곳으로 접어들자마자 한결이 해민에게로 바짝 몸을 붙이며 낮게 내리깐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얘기 했어요?”
얼핏 들으면 일상적이고 단조로운 말투였지만, 그에게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해민은 금세 알아챌 수 있었다. 고한결은 지금 여상한 척을 하고 있는 거다. 해민도 최대한 아무것도 아닌 척 말을 아꼈다.
“별말 안 했어.”
“별말 아닌데 네 표정이 그래?”
“내 표정이 뭐…… 어떤데?”
“고백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난감해서 어쩔 줄 몰라 하던데. 아니야?”
전혀 아니었다. 그가 왜 이런 착각을 당연하게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서, 해민의 만면에 당혹스러운 기색이 스쳤다.
화장실에서 얼굴에 물을 끼얹고 잠시 바람을 쐬러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심란한 얼굴로 담배를 피우고 있던 남 대리가 그녀를 발견하고는 재빨리 바닥에 꽁초를 비벼 껐다.
큰 걱정거리가 있는 것 같아 계속 피우셔도 상관없다고 말하자, 그는 한숨을 푹 내쉬며 마른 얼굴을 쓸어내렸다.
‘해민 씨, 혹시…… 옥 장판 안 필요해?’
‘네? 옥 장판이요?’
‘아니, 그게, 후우…….’
남 대리는 회사를 다니면서 부업으로 옥 장판을 팔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자세한 속사정은 모르겠지만 꽤 넉넉한 월급을 받으면서도 옥 장판 영업을 하는 걸 보니 돈이 많이 필요한 듯했다. 근로 계약서에 부업을 금지하는 조항은 없으나 직장 동료를 대상으로 영업한 사실이 발각되면 징계는 면할 수 없을 터였다.
‘해민 씨가 고한결 씨랑 많이 친하다고 하니까 이런 말 꺼내기가 조심스럽긴 해. 한결 씨한텐 얘기하지 말아 줘……. 근데 이 옥 장판이 진짜 물건이야. 그냥 옥 장판도 아니고 게르마늄 옥 장판이거든.’
상품에 대한 설명이 길어질수록 해민은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이름만 옥 장판이지 사실상 옥으로 만든 게 맞는지 확인해 볼 방법도 없고, 그 효능조차 검증된 바 없다는 걸 뉴스 기사로 접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남 대리가 저를 부하 직원으로서 많이 아껴 준다지만 피땀 흘려 모은 돈을 허공에 날리고 싶진 않았다. 딱 잘라 거절할 수 있는 매정한 성격은 못 되기에 그에게 붙잡힌 채로 십여 분 동안 이야기를 들어 주고 있었다.
“지금 무슨 생각해요? 날 앞에 두고 딴 새끼 생각 해?”
“한결아, 네가 지금 무슨 오해를 한 모양인데, 그런 거 정말 아니고…….”
“아니면 뭔데요.”
고백받은 게 아니라 옥 장판 구매를 권유받았다는 말은 차마 꺼낼 수가 없었다. 남 대리가 한결을 콕 집어 그에게 말하지 말라고 부탁까지 한 마당에 어떻게 사실대로 얘기할 수가 있을까. 그와 가까운 사이인 걸 알면서도 저에게까지 영업해 댄 걸 보면 금전적으로 꽤 어려운 상황임을 유추할 수 있었다.
한결의 귀에 들어가면 인사 팀에까지 이 얘기가 흘러 들어갈지도 모르고, 그럼 징계를 받게 될 지도 모르고…… 이제껏 제게 잘해 준 남 대리에게 괜한 원망을 사고 싶진 않았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긴 뭘 긍정적으로 생각하래, 씨발. 선배 설마 지금 딴생각하는 거 아니죠?”
해민은 초조해하는 한결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지그시 눈을 맞추었다. 그 어느 때보다 차분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한결아, 너 나 못 믿어?”
“아니? 내가 선배를 못 믿을 게 뭐가 있어.”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해해?”
“…….”
“다른 사람들이 나한테 무슨 말을 했건, 나한테는 너뿐이라는 게 가장 중요한 거 아니야?”
한결의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해민에게서 이런 말이 나올 줄은 전혀 짐작하지 못한 듯했다. 해민은 싱긋 웃으며 그의 목에 두 팔을 둘렀다. 그를 끌어안으며 조용히 속삭였다.
“뭐해. 키스 안 해 주고.”
그 말을 듣자마자 한결은 머릿속에 퓨즈가 뚝 끊어지는 걸 느꼈다. 그는 거침없이 해민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턱을 쥐어 입을 벌리게 하고 그 사이로 뜨거운 살덩이를 밀어 넣었다.
그가 해민의 입 안을 사정없이 헤집으며 깊숙한 곳까지 침범했다. 그의 머리카락 사이로 해민의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그렇지, 그딴 게 중요한 게 아니지. 다른 사람이 무슨 말을 했건 네 마음이 오롯이 날 향해 있다는 게 중요한 거지.
가파른 숨을 섞는 동안 한결의 불안함이 점차 가라앉았다. 질척이는 타액 소리가 어두운 골목에 갇혔다.
해민은 그와 고개를 교차할 때마다 불규칙한 숨을 잇새로 흘려보냈다. 한결의 오해야 나중에 풀어 주면 되는 거고, 지금은 평소보다 거칠고도 짙은 입맞춤에 집중하고 싶었다.
제 허리를 끌어안은 한결의 손아귀에 악력이 실리는 게 느껴졌다. 그는 지금 이보다 더 깊은 관계를 원하고 있었고, 그건 해민도 바라는 바였다.
입술이 잠시 떨어진 틈을 타 해민이 야릇한 목소리로 그의 욕망을 부추겼다.
“우리 도망갈까?”
한결이 해민의 아랫입술을 길게 깨물어 당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른 가서 가방 챙겨 나와요.”
엉덩이를 톡톡 두드리는 손길에 해민은 씩 웃으며 재빨리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한결은 휴대폰을 꺼내 대리 기사를 호출했다. 목적지는 여기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호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