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Man RAW novel - Chapter 415
상남자 415화
유현은 유쾌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안 그래도 네 생각 했는데, 딱 전화가 걸려 왔네?”
-웬 내 생각?
“내가 너무 놀고먹는 거 같아서 말이야.”
-하하.네 덕분에 좋은 환경에서 잘하고 있잖아.그리고 별로 할 일도 없어.
먼 타지에서 맨땅에 회사를 만드는 일이 절대 호락호락할 리가 없다.
미국은 지금 밤일 텐데, 회사 전화로 거는 것만 봐도 그의 처지를 알 수 있었다.
그럼에도 기분 좋게 웃는 친구에게 유현이 가볍게 답했다.
“그래.그럼 믿고 내가 더 열심히 놀게.”
-푸하하.그래.근데 그게 가능하겠어? 신 전무님 기사 보니까 거기도 태풍이 불겠던데?
“윗사람들이야 난리지.밑에선 똑같아.”
-하긴.당장은 체감이 안 되겠지.근데 조금만 있으면 확 느낄 거야.방향성이 완전히 달라졌잖아.
현진건의 예측에 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과연 천재의 눈에는 지금 어떤 풍경이 보일까?
유현은 과거 통신 칩 하나로 세계를 뒤흔든 후, 미국으로 건너가 IT 생태계까지 뒤바꿔 놓은 현진건의 생각이 궁금했다.
“그러지 말고 진건이 네 얘기 좀 해 봐.궁금하네.”
-어떤 거?
“회사는 어떻게 되고 있어?”
-회사는…….
JK통신은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칩 디자인 회사로 자리 잡았다.
정확히 하면 차세대 스마트폰에 들어갈 통신 모뎀 칩을 개발 중이었다.
지금 통신 칩 시장을 독점하고 있는 퀄컴을 넘어서는 걸 목표로 삼았다.
-퀄컴은 LTE 시장도 독점하게 될 거야.그래서 우리는 주력 모델을 4G로 잡고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어.
“그럼 지금 개발하는 건 3G용 테스트 모델이야?”
-디자인하는 것과 양산하는 건 완전 다른 이야기니까 테스트는 해 봐야지.투자 자금도 나름 넉넉히 있고.
“괜찮네.”
과거 유현이 JK통신에 신세를 졌던 건 5G 통신 모뎀이었다.
즉, 지금의 현진건은 과거보다 몇 년은 더 빨리 현장에 투입됐다.
이 나비효과가 어떤 결과를 만들어 낼까?
유현이 잠시 생각에 잠겼을 때 현진건이 한마디를 툭 던졌다.
-유현아, 근데 한성은 반도체 안 해?
“왜?”
-결국 통신 칩도 모바일 AP에 탑재될 거야.
“맞아.”
유현이 순순히 인정하자 현진건의 목소리가 켜졌다.
-모든 칩이 하나가 되면 미세 공정이 더 중요할 거고, 당연히 앞으로 반도체 시장이 뜰 수밖에 없어.
“아무래도 그렇겠지.”
-농담이 아니라 신화 반도체 인수 못하냐? 향후 스마트폰 시장 패권을 잡으려면 한성도 반도체를 가져야 해.
이 녀석 봐라?
유현은 현진건의 말을 들으며 헛웃음 지었다.
기반도 없는 녀석이 유현이 생각하고 있는 바를 정확히 집어서였다.
현진건의 미래 예측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앞으로 그렇게 되지 않을까? 신 전무님도 고민하고 있는 거 같더라.”
-그래.그럼 다행이고.아, 그리고 너 아마존이란 회사 알지?
“그럼 알지.온라인 유통 업체잖아.”
“거긴 어떻게 생각해?”
유현이 질문을 던졌다.
지금 이 시점에서 아마존이라는 회사는 온라인 마켓, 그중에서도 인터넷 책을 공급하는 업체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매출은 크지만 매년 적자를 기록하다 보니, 망할 가능성이 높은 회사라는 인식도 컸다.
하지만 현진건은 전혀 다른 의견을 냈다.
-이번에 아마존이 우리 건물에 있는 스타트업을 인수했어.아마존은 온라인 웹 서비스 쪽을 강화할 거야.클라우드 컴퓨팅 업체가 되는 거지.앞으로 스마트폰 세상에선…….
자신의 관심 분야가 나와서인지 현진건은 침을 튀기며 말을 이었다.
유현은 흥분한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코이라는 물고기를 떠올렸다.
어항 속에 있을 때 5센티미터 정도의 작은 물고기는, 바다에서 크면 100센티미터가 훌쩍 넘게 자란다.
세상의 크기에 따라 성장의 정도가 달라지는 셈이다.
이른 나이에 세계를 경험한 현진건의 모습이 꼭 바다로 나간 코이와 같았다.
유현은 느낀 바를 있는 그대로 말했다.
“진건아, 너 미국 진짜 잘 간 거 같아.”
-네 덕분이지.너 아니었으면 기회도 못 잡았어.
“쓸데없는 공치사는 됐고, 곧 미국 갈 테니까 그때 보자.”
-오케이.귀빈 대접 준비하고 하고 있을게.
이런 농담도 할 줄 아는 녀석이었나?
유현은 몇 마디 더 기분 좋게 주고받은 후 통화를 마무리했다.
통화가 끝난 휴대폰 화면 위로 현진건의 이름이 깜빡였다.
현진건.
넓은 세상을 일찍 만난 천재가 깨어나고 있었다.
이건 유현도 예상치 못했던 전개였다.
“앞으로 일이 꽤 재밌게 흘러가겠네.”
유현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사업부장 발표 이후, TV 그룹은 대대적인 개편에 들어갔다.
그룹 목표와 전략을 수정함에 따라 영업마케팅 담당과 스태프 부서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동시에 개발, 생산 계획을 전면 재점검했다.
그룹장 주관 개발, 생산, 품질의 주요 간부를 소집한 회의가 잡힌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그룹 전체가 뒤집어졌다.
유현은 그 이야기를 1층 커피숍에서 TV팀 김영신 대리로부터 전해 들었다.
“지금 그래서 TV 내부는 난리야.TF에 대한 원성도 자자하고.”
쪼오옥.
시원한 커피를 빨아들인 유현이 물었다.
“그래서 이 팀장님이 잘 안 보이는 거군요.”
“정신이 하나도 없겠지.그룹장이 그렇게 난리를 치니 말이야.”
유현은 답을 들으며 김영신 대리가 산 조각 케이크를 떠먹었다.
치즈가 듬뿍 든 케이크라 그런지 꽤나 풍미가 좋았다.
유현을 힐끔 본 권세중 대리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김영신 대리에게 물었다.
“윤 차장님이랑은 요새 좀 괜찮으세요?”
“아, 전에 말다툼한 거? 뭐, 별거 아냐.남자가 그 정도 깡은 있어야지.”
“다행이네요.윤 차장님 성격 거칠단 소문이 모바일에도 퍼졌거든요.”
옆에 있는 유현은 먹고만 있고, 장준식은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도와주는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김영신 대리의 분위기를 맞춰 주기 위해 권세중 대리가 고군분투했다.
“사실 윤 차장이 좀 강하긴 하지.예전에 과장 밑으로 전부 소집해서…….”
“헉.대단했네요.”
영업팀 송호찬 차장과 비교하면 별거 아니었지만, 권세중 대리는 박수를 짝 치며 놀란 척했다.
“그리고 윤 차장이 일을 할 때…….”
“저런, 힘드셨겠어요.”
들어 보면 과거 함께 일했던 성웅진 차장보다 훨씬 사람을 덜 피곤하게 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럼에도 권세중 대리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동조했다.
그런 권세중 대리의 활약 덕분에 김영신 대리는 조금 더 편하게 말했다.
“후배들 앞이라서 하는 말인데, 사실 회사 생활이라는 게…….”
“맞아.”
장단을 맞춰주자 어느새 다리도 꼬아져 있었고, 등도 기댄 채였다.
“내가 지금껏 기획한 TV가 말이야…….”
결론은 하나였다.
그가 없었으면 지금의 한성 TV 패널은 없을 정도의 영웅담도 함께했다.
다른 사람 앞에서 강해 보이고 싶은 게 당연한 심리라, 유현은 딱히 태클을 걸지 않았다.
그 정도 자부심을 갖는 건 그리 나쁜 건 아니었다.
그리고 커피 사 주고 케이크 사 줬으면 그 정도는 말해도 된다.
그렇고말고.
유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김영신 대리의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흘려들었다.
어느새 김영신 대리의 영웅담은 회사를 넘어 사회로 향하고 있었다.
그때, 유현의 귀를 확 잡는 말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클라이밍이요?”
놀란 반응을 보이는 유현의 모습에 김영신 대리가 신이 나서 말했다.
“어.대학교 때 암벽등반했었지.내가 우리 회사 클라이밍 동호회 초기 멤버이기도 하고.요 앞 실내 암벽장 사장도 아는 형이 운영해.”
“헉.그렇군요.정말 대단하십니다.”
유현이 엄지를 치켜들자, 김영신 대리는 어깨를 더 으쓱했다.
“뭐 이런 걸 가지고.사실 클라이밍이라는 게…….”
김영신 대리의 말이 이어질수록 유현의 얼굴엔 화색이 돌았다.
그런데 어쩐지 권세중 대리의 얼굴이 어두워 보이는 느낌이다.
한 템포 느린 장준식은 갑자기 변한 분위기를 맞추려 고개를 이리저리 저어 댔다.
김영신 대리의 설명이 어느 정도 끝난 무렵이었다.
짝.
박수를 친 유현이 다짜고짜 말했다.
“대리님, 오늘 퇴근하고 바로 실내 암벽장으로 갑시다.가르침을 주십시오.”
“뭐?”
풉.
유현의 말에 김영신 대리의 눈이 휘둥그레졌고, 권세중 대리가 커피를 뿜었다.
유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더 밀어붙였다.
“생각났을 때 바로 실행해야 합니다.아, 저녁은 제가 사겠습니다.”
“아니, 그게 아니라 퇴근을 빨리할 수가…….”
“걱정하지 마세요.오늘 어수선해서 빨리 퇴근해도 됩니다.”
“윤 차장님이 허락을 안…….”
“윤 차장님은 별로 신경 쓰지 않으신다면서요.제가 말씀드릴까요?”
“…….”
김영신 대리가 대체 뭐 이런 놈이 있나 싶은 표정을 지을 때였다.
고개를 돌린 유현의 시야에 담배를 피우고 오는 윤병관 차장이 들어왔다.
유현은 주저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윤 차장님.”
“허억.”
뒤늦게 윤병관 차장을 발견한 김영신 대리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몸을 돌렸다.
조금 전 깡 이야기를 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낯빛은 완전히 사색이 되어 있었다.
그는 설마 하며 귀를 쫑긋했다.
유현의 입에서 말도 안 되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윤 차장님, TV팀은 오늘 빨리 퇴근 안 합니까?”
“왜?”
“김영신 대리님이랑 저녁 먹으려고요.차장님도 함께 하실래요?”
미친놈이다.
저건 진짜 미친놈이다.
김영신 대리는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그런데 돌아오는 답이 더 황당했다.
“내가 너랑 밥을 왜 먹어.됐어.김 대리랑 먹어.”
화를 낼 줄 알았더니 밥을 먹으란다.
“에이, 그때 밥 한 번 사 주신다고 했잖아요.”
“카드 줄 테니까 그걸로 사 먹든지.”
“감사합니다.”
심지어 짠돌이 윤병관 차장이 카드까지 내밀었다.
김영신 대리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
윤병관 차장이 떠나고 난 후였다.
정신이 돌아온 김영신 대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윤 차장님랑 전부터 알던 사이야?”
김영신 대리도 파티션 건너에서 벌어지는 마찰을 본 터라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현 상황을 이해할 방법이 없었다.
“아뇨.TF에서 처음 뵀어요.”
“그럼 왜…….”
“아, 이 카드요? 정말 밥 사기로 했거든요.”
유현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지난 발표가 끝난 후.
임준표 부사장과 악수를 한 윤병관 차장이 잔뜩 고무된 표정으로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물론 의례적으로 뱉은 말일 뿐이었지만 말이다.
“그렇구나.”
“좀 까칠해서 그렇지, 둥글둥글한 면도 있더라고요.”
유현이 빙긋 웃자, 김영신 대리가 중얼거렸다.
“둥글둥글.”
정신적 충격이 상당한 듯, 김영신 대리는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날 저녁.
유현은 한성타워에서 두 블록 위에 위치한 실내 암벽장에 갔다.
물론 껌딱지처럼 붙어 다니는 권세중 대리와 장준식도 함께였다.
“알록달록하네.”
유현은 벽에 붙은 색색의 홀드를 보며 감탄했다.
“이런 곳은 처음입니다.”
장준식의 말에 유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마찬가지야.준식아, 내가 여기 왜 데리고 왔는지 알지?”
“네.새로운 걸 해 봐야 창의성이 올라간다고 하셨습니다.”
“고럼, 고럼.”
죽이 잘 맞는 두 사람을 보며 권세중 대리가 한숨을 쉬었다.
“에휴.”
그리고 잠시 후.
그 한숨은 비명으로 바뀌었다.
“으악.”
벽에 매달린 권세중 대리가 부들부들 떨자, 그 아래에서 푹신한 매트를 밟고 있던 김영신 대리가 호통을 쳤다.
“권 대리, 팔 안 닿는다고 포기하지 말고, 어깨를 밀면서 더 위를 잡아.”
“모, 못하겠습니다.”
“회사 생활도 그렇게 포기할래? 인생도 그렇게 접을 거야?”
김영신 대리는 암벽등반하는데 회사를 넘어 인생까지 들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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