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 Man RAW novel - Chapter 651
상남자 651화
중학교 2학년 당시, 박원석은 반에서 키가 가장 크고 체격이 좋았다.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하얀 피부와 움푹 팬 보조개가 기억에 남았다.
지금은 어떤 모습이려나?
궁금한 마음에 유현은 1층 로비를 빠른 걸음으로 걸어 밖으로 나갔다.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 중에, 남들보다 한 뼘은 더 커 보이는 남자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박원석인 것 같은데, 보이는 옆모습은 유현의 기억과는 사뭇 달랐다.
피부가 검고 눈 밑이 퀭한 데다, 너무 말랐다.
유현이 긴가민가하며 다가가자, 남자가 먼저 손을 들었다.
“유현아! 여기.”
“어, 원석아.잘 지냈지?”
유현이 아는 척하자, 박원석이 건치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그럼.어떻게 넌 예전이랑 얼굴이 똑같냐? 여전히 잘생겼어.”
푹 팬 보조개가 선명하게 보였다.
유현이 기억하는 어린 박원석의 웃음 그대로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기시감이 드는 걸까?
꼭 과거에도 이곳에서 박원석을 만난 느낌이다.
“너도 웃는 모습이 똑같은데? 살은 좀 빠진 거 같고.”
“많이 빠졌지.하여튼 반갑다.진짜 너무 오랜만이야.”
“그러게.반갑다.”
덥석.
박원석이 유현이 내민 손을 잡는 순간이었다.
유현의 뇌리에 잊혔던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유현아, 돈 좀 빌려줄 수 있어?
그랬다.
과거 비슷한 시기에 박원석은 돈을 빌리러 왔었다.
무척 힘들어하는 표정인 터라, 유현은 마지못해 돈을 빌려줬었다.
말은 내뱉지 않았지만, 다시 찾아오지 않았으면 했던 기억이다.
그 이후에 어떻게 됐더라?
뭔가 중요한 기억이 있었던 것 같은데 떠오르지 않았다.
미간을 좁히고 있던 유현에게 박원석이 물었다.
“바쁜데 나 때문에 괜히 나온 거 아냐?”
“아니.여유 있어.그러지 말고 들어가서 잠깐 얘기나 해.”
“에이, 민폐지.그냥 지나가다 들른 거야.얼굴 본 걸로 됐어.”
박원석은 손사래 쳤지만, 유현은 그를 그냥 보낼 생각이 없었다.
그래선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차라도 한잔하자.반가워서 그래.”
“그래도 근무 시간이잖아.한성 빡빡한 거 뻔히 아는데, 뭐.”
“친구 왔는데 그 정도 시간은 내도 돼.나 안 잘리니까 걱정 마.”
“그런 게 아니라…….”
박원석은 주저하며 유현의 눈치를 살폈다.
무척 조심스러운 표정인 터라 유현은 기다려 줬다.
표정만 봐도 여기 오기까지 얼마나 고민했는지 눈에 보였다.
결심을 굳힌 듯 박원석이 유현을 불렀다.
“유현아.”
“응?”
“너 혹시 돈 조금 있어?”
“돈? 얼마?”
“아, 그, 그냥 30만, 아니 20만 원 정도? 내가 왜 돈을 빌리려고 하냐 하면…….”
박원석은 혹시나 유현에게 부담이 갈까 싶어 액수를 낮췄다.
그러곤 굳이 붙이지 않아도 되는 변명을 덧붙였다.
그냥 말해도 되는데.
유현이 바로 답해 주려던 순간, 말을 멈춘 박원석이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손에 쥐어진 휴대폰이 울리고 있었다.
유현이 미소 진 얼굴로 손짓했다.
“전화 받고 얘기해.”
“어? 어.미안.”
양해를 구한 박원석이 몸을 돌린 채 조용히 전화를 받았다.
“어, 원영아.오빠가 지금 회사에서…….”
말하는 뉘앙스를 보아하니 여동생의 전화인 모양이다.
그런데 왜 저렇게 눈치를 볼까?
유현이 고개를 갸우뚱할 때였다.
유현의 뇌리에 잊혔던 중요한 기억이 팍! 떠올랐다.
언제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지금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시기였다.
이곳에 낯선 여자가 찾아왔었다.
-오빠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 주셔서 무척 감사드립니다.덕분에 오빠가 마지막 가는 길에 웃으면서 갈 수 있었어요.
그녀는 유현이 버리는 셈 쳤던 돈을 돌려주며, 오빠의 죽음을 전했다.
그녀의 오빠가 바로 박원석이었다.
유현은 돈을 받으면서도 무척 씁쓸했던 기억이다.
박원석은 왜 그렇게 허망하게 떠났던 걸까?
사고였나?
아니면 아파서?
바짝 미간을 좁힌 채 기억을 더듬고 있는 유현에게 박원석이 말했다.
“미안.중요한 전화라서.”
“미안은 무슨.당연히 받아야지.그리고 원석아, 돈은 있는데 찾아야 해.”
“아…… 그럼 괜찮아.”
박원석은 거절의 의미로 알아들었는지 물러서려 했다.
유현은 바로 박원석의 팔을 끌었다.
“아니, 지금 줄 수 있다는 의미야.일단 돈부터 뽑아야 하니까 같이 좀 걷자.”
“어, 어.”
키는 멀대같이 큰데 몸이 깡말라서인지, 박원석은 쉽게 끌려왔다.
유현은 돈을 찾는다는 핑계로 박원석과 커피숍에 들어섰다.
얼떨결에 따라온 그는 무척 미안한 기색이었다.
“이렇게까지 시간 안 빼 줘도 되는데.”
“아냐.나 진짜 시간 많아서 그래.”
“그래도.”
“됐고.일단 돈부터 빌려줄게.”
봉투를 내민 유현은 주문한 커피를 받아 왔다.
그사이 액수를 확인한 박원석이 화들짝 놀랐다.
“50만 원? 이만큼이나 줘도 돼?”
“월급 나오면 갚는다며.그냥 넣어 둬.”
“고맙다.”
“조금 더 넣은 건데, 뭐.”
“내가 꼭 갚을게.잠깐만.”
박원석은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더니, 굳이 차용증을 써 줬다.
간략한 양식이었는데, 그래도 들어갈 건 다 있었다.
예전에도 이랬었나?
유현에게 주지 않았더라도 혼자 가지고는 있었던 모양이다.
여동생이 나중에 알고 찾아온 걸 보면 말이다.
유현은 열심히 쓰고 있는 박원석을 찬찬히 살폈다.
처음 볼 때부터 느꼈던 것처럼 안색이 무척 어둡고 눈 밑이 퀭했다.
광대뼈가 도드라질 정도로 얼굴 살이 쪽 빠져 있었다.
이것만 봐도 건강이 안 좋은 건 분명해 보였다.
살짝 열린 가방 안에 약 봉투가 보이는 터라, 유현이 물었다.
“원석아, 근데 너 건강은 괜찮아?”
“안 좋아 보여?”
“그냥.살이 좀 빠진 거 같아서.”
“아, 아냐, 그런 거.그냥 회사에서…….”
박원석은 아닌 척 주제를 돌렸다.
그가 숨기려 하는 느낌인 터라, 유현은 더 묻지 않고 그의 말을 들어 줬다.
이야기의 대부분은 서울에 상경한 그의 회사 생활에 맞춰져 있었다.
중소기업에 입사한 박원석은 회계 일을 도맡아 했다고 한다.
건재함을 알리려는 의도인지 몰라도, 그의 목소리엔 자부심이 넘쳤다.
“큰 회사는 아니긴 한데, 나 없으면 큰일 날 뻔한 적이 몇 차례 있었어.세무조사 제대로 막고, 새는 돈 찾아내서 숨통 트이게 한 것도 내가 한 거거든.”
“대단하네.”
“대단하긴.대기업에 있는 너한테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여기 있으면 너처럼 주도적으로 못해.시킨 일만 하는 거지.”
“주도적…… 이긴 했지.내가 아니면 안 되었으니까.”
박원석은 잠시 굳었던 표정을 펴고 다시 말을 이어 갔다.
그렇게 몇 마디 더 나눈 후, 그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현이 괜찮다고 해도 계속 눈치가 보인 모양이다.
자꾸 말끝마다 미안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오늘 시간 내 줘서 고맙고, 미안하다.”
“미안할 거 없다니까.”
“내가 꼭 갚을게.미안.”
“그래.그럼 그때 핑계 대고 또 한 번 보자.”
유현이 웃자, 박원석도 같이 미소 지었다.
박원석을 보낸 유현은 회사 앞 벤치에 앉아 옛 기억을 곰곰이 생각했다.
‘분명히 아픈 게 맞을 텐데…….’
박원석은 끝내 숨겼지만, 그의 안색은 심하게 안 좋았다.
약 봉투와 그 위에 그려진 병원 로고를 볼 때, 병이 있는 건 확실해 보였다.
물론 이로 인해 박원석이 죽음에 이르렀는지는 유현도 모른다.
사인에 대한 내용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 까닭이다.
이럴 때 물어볼 만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친구 강준기였다.
중학교 2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그는, 친구들 사이에선 마당발로 불릴 정도로 교우 관계가 좋았다.
당연히 박원석에 대해서는 유현보다 잘 알 터였다.
아니나 다를까, 유현이 전화해 묻자 녀석은 박원석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원석이가 유현이 너한테도 갔었냐?
“어.잠깐 얼굴 보러 왔던데?”
-또 돈 빌렸겠네?
“너도?”
-그렇지.돈 빌려준 애들이 한둘이 아니야.최근에도…….
박원석은 유현뿐만 아니라 다른 친구들에게도 돈을 빌린 모양이다.
강준기는 박원석이 회사 사정이 나빠져 잘린 것 같다는 추측도 덧붙였다.
이런저런 사정을 떠나 유현은 의아한 부분이 있었다.
“근데 너도 그렇고 다들 왜 돈을 빌려준 거야?”
-녀석이 박원석이잖아.
“원석인 거 알지.근데 왜?”
-유현이 너 기억 안 나? 원석이가 중학교 때 어땠는지?
“어땠길래?”
유현의 물음에 강준기가 혀를 찼다.
-이거 완전 노 양심이구만.원석이가 너 돈 잃어버렸을 때 우윳값도 내줬었는데.
“그랬었나?”
-그뿐만이 아냐.원석이가 우리 반 친구들 괴롭히는 애들하고 다 싸워 줬잖아.힘든 친구들 도와주고, 밥도 많이 사 줬고.또…….
강준기는 쉴 새 없이 박원석의 활약상을 뱉어 냈다.
흐릿하던 유현의 기억이 점차 개이며, 어릴 적 기억들이 선명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큰 키로 유명했던 박원석은 정의의 사도였다.
집이 부유해서인지는 몰라도 친구들을 살뜰히 챙겨 줬다.
유현도 꽤 많이 신세를 졌었다.
돈만 있는 게 아니라 의리도 넘쳤다.
그는 유현이 다른 학교 양아치들과 시비가 붙었을 때, 가장 먼저 달려왔었다.
유현이 축구하다 다리를 접질렸을 때는 집에 업고도 갔었다.
커다란 등이 무척 든든했던 기억이다.
중학교 3학년 때, 녀석은 전학을 갔다.
그 바람에 연락은 끊겼지만, 고마움은 진하게 남아 있었다.
‘어쩐지.’
왜 과거 주변을 안 챙기던 유현이 돈을 빌려줬는지 이제야 이해가 갔다.
죽음이라는 단어를 떠나, 박원석은 유현에게 큰 의미가 있는 친구였다.
생각을 정리한 유현이 짐작했던 바를 물었다.
“준기야, 근데 혹시 원석이 몸 안 좋은 거 아냐?”
-나한텐 그런 말 없던데? 왜?
“그냥, 살이 많이 빠진 데다 안색이 어두워 보이길래.”
-하긴.좀 야위긴 했더라.근데 그건 스트레스의 영향이 클 거야.
“왜?”
-아까 말했잖아.회사에 문제가 있는 거 같다고.뭐, 나도 정확히 아는 건 아니지만 말이야.
강준기가 아는 건 여기까지였다.
박원석도 아니라고 한 사항이다 보니, 더 캐묻기도 애매했다.
강준기를 통해 박원석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고 나니, 더 마음에 걸렸다.
유현을 찾아왔던 여동생의 말도 귓가에 계속 어른거렸다.
모르면 몰라도, 뻔히 알게 됐는데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병원에 찾아가서 확인해 봐?
가장 확실한 방법이지만, 박원석이 원치 않는 오지랖이 될 수 있는 게 문제였다.
“어떻게 할까.”
생각에 잠긴 유현 앞으로 박승우 과장이 지나갔다.
유현을 확인한 그가 깜짝 놀라 물었다.
“뭐야, 너 왜 여기 나와 있어?”
“과장님 기다렸죠.햇살도 좋은데, 앉았다 가세요.”
유현이 뻔뻔하게 말하며 벤치를 툭툭 치자, 박승우 과장이 어이없어 했다.
분명 따지는 듯한 얼굴이었는데, 행동은 또 달랐다.
“야, 나는 네가 앉으라면 앉는 선배가 맞지.”
“역시 멘토님이시네요.”
“그럼.커피도 마실래?”
자리에 앉은 박승우 과장은 한술 더 떠 들고 온 테이크아웃 커피도 건넸다.
“웬 거예요?”
“박 차장님이 외근 복귀할 때 하나 사 오라고 하더라고.”
“그럼 박 차장님 드려야죠.”
“됐어.그 양반은 카페인 중독이야.너무 마시면 안 돼.”
“하하! 감사합니다.”
깔끔한 정리에 유현이 웃음 지었다.
이렇듯 박승우 과장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한 선배였다.
덕분에 잠시 무거웠던 기분이 한결 가벼워진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