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forge the Streak RAW novel - Chapter 29
연록흔 – 29화
“예는 그 정도로 해 두고. 어찌 지냈소, 사촌형?”
“살펴 주시니 저는 잘 지냈습니다. 폐하, 근자에 좋은 일이 많았나 보옵니다.”
가조가 운을 뗐다. 그에 가륜이 손짓으로 의자부터 권했다. 언제 들었는지 손 빠른 궁녀가 차를 올렸다. 즉시 넓은 실내에 차향이 그윽하게 퍼졌다.
“좋은 일이라, 무얼 들었기에?”
가륜은 흔연스레 물었다. 얇게 뜬 눈매라 그 안은 가늠조차 불가했다.
“황후 간택에 대해 들었습니다. 드디어 대황룡에도 안주인이 생기니 좋고 기쁘지 않겠습니까?”
하여튼 빠른 자. 아직 정식으로 고한 바 없으니 재주가 좋다고 봐야 할지도. 서로에서 막 돌아온 주제에 바삐도 움직였다.
“글쎄, 과연 좋은 일일까?”
순순치 않은 어투에 가조가 눈만 발딱 들었다.
“사촌형께.”
가륜이 피그시 웃으며 말끝을 맺었다.
“황룡의 길사면 제게도 당연히 좋은 일이지요, 폐하.”
가조가 읍하며 함박 웃었다.
“그리 말하니 든든하군. 어떠신가, 서로국에는 별일 없나?”
“폐하께서 베푸신 은덕 입사와, 서로국도 무탈합니다.”
속내는 불투명했다. 가륜은 여느 황친을 대하듯, 가조는 하늘같은 황제인 듯 행동할 뿐, 둘 다 특특하고 맑지 않았다.
“오랜만에 본궁에 들렀으니 무척 바쁘겠소.”
은근한 비꼼, 가시 돋친 완곡함. 차라리 잘됐다 싶어 가조는 조심스레 일어섰다. 황제는 항시 만만찮았다. 하여 반긋히 바라보면 속이 켕겨 영 불편했다.
“폐하, 화급한 국정이온데 잠시나마 지체시켜 송구하옵니다.”
“그다지. 인사 나눌 여유조차 없을까? 괘념치 마오.”
“신 가조, 그만 물러가옵니다.”
놈이 용좌에 있는 한 황제 배알은 필수의 허례였다. 가조는 만면 가득히 웃음을 채우고 허리를 굽혔다.
‘그 자린 내 자리다.’
가조는 머리를 쳐들고 서서 속눈썹 새로 보았다. 놈은 지금 국정 처리에 여념이 없었다. 견물생심, 황제의 것이므로 저런 바쁨까지 탐났다.
“더 하고픈 말이라도?”
갑자기 떨어진 말에 가조는 지레 놀랐다. 반히 그어진 시선은 용의 것이었다. 그는 놈의 우위가 느껴져 혀끝만 사리물었다.
“아닙니다. 평안하십시오, 폐하.”
다아악!
문 닫히자마자 다른 생각이 돋았다. 가조는 장인태감이 들고 간 그림을 떠올렸다. 지금의 그는 고기 냄새 맡은 승냥이와 같았다. 황홀하게도 비린 무언가가 분명 어화서에 있었다.
진한 묵향, 텁텁한 물감 내, 붓 스치는 소리, 화구 부시는 소리……. 화사들이 각자 맡은 일에 여념이 없었다. 황제가 황룡의 박물지를 제작하라 명 내린 지 벌써 두 달째, 책장마다 자료가 빼곡하게 쌓였다. 서른여섯 지방에서 채록한 기이한 이야기, 그에 관한 삽화, 희귀한 동식물 표본과 그림……. 하나같이 열중하여 누가 드는지 나는지도 몰랐다.
슥, 슥!
가조는 가까이 다가가 굽어보았다. 화사의 손놀림은 빠르고 정확했다. 노란 종이 위, 나무의 정령이 금세 들어앉았다.
“그게 무언가?”
화사가 놀라 고개를 퍼뜩 들었다. 막 정령의 눈에 색을 입힐 참. 그는 조심스레 손을 거뒀다. 세필의 첨단이 푸르렀다.
“아, 칠왕야 오셨습니까?”
“기묘한 것을 그리고 있군. 무어냐 물었다.”
“화남성에서 나무꾼들이 보았다는 나무의 정령입니다. 연녹색 몸에 푸른 눈을 가졌다 하지요.”
“참으로 잘 그렸다. 헌데 어화감은 어디 계신가? 내, 좀 뵈러 왔는데…….”
“영감께선 잠시 출타중이십니다. 곧 돌아오신다고는 하였지만…….”
“아, 상관없네. 곧 오시겠지. 안에서 기다려도 되겠는가?”
본시 어화감의 집무실엔 아무나 들일 수 없었다. 더구나 지금은 황명 수행 중이었다. 그러나 상대가 황족인지라 일개 화사로서 딱 자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하소서, 칠왕야.”
“계속 수고하게.”
가조는 여유롭게 어화감의 방을 찾아들었다. 화사는 마뜩찮은 눈으로 그 뒷모습을 훑었다.
톡!
문을 열자마자 족자 하나가 발치로 떨어져 내렸다. 가조는 혀를 찼다. 어화감은 정리라는 건 당최 모르고 사는 모양, 종이더미가 방 안 곳곳에 위태롭게 쌓였다.
‘명화 일색이군.’
족자들이 휘휘 늘어져 엉켜 있었다. 새가 화지를 뚫고 나와 푸덕거릴 듯 생생한 조도, 황룡의 위대한 자연을 그대로 모사한 수려한 산수도, 그림인지 사람인지 분간이 안 갈 만큼 정교한 화상, 화려하게 꾸며진 길상문……. 서로 얽힌 모습이 남국의 풍광인 듯 이채로웠다.
‘저것인가…….’
가조는 잽싸게 눈을 굴렸다. 햇빛 잘 드는 창 아래, 곱게 말린 두루마리가 있었다. 잘 익은 황금빛 비단, 이태감이 품은 것과 분명 같았다. 그는 망설임 없이 다가섰다.
‘아니!’
그림을 펼친 순간, 가조는 가슴이 내려앉았다.
‘이럴 수가…….’
미인도. 채색 없이 먹의 농담만으로 표현했으나 가인은 고왔다. 가조는 열없이 바라보다 부산스레 그림을 말았다. 방주인이 오기 전에 나가야지 싶었다.
“칠왕야, 벌써 가십니까? 영감께서 잠시 후에 오실 텐데요.”
예의 화사가 물었다. 그러나 가조는 방금 본 것을 되새기느라 미처 대꾸하지 못했다. 그저 허위허위 밖으로 나갔다.
‘왜 저리 허둥댄담? 못 볼 것이라도 봤나?’
낯이 불붙은 듯 붉고, 하동거리는 양이 영 수상했다. 화사는 문선왕 가조를 힐끗 치어다보다 삽화로 눈을 돌렸다. 그는 정령의 풀빛 머리칼을 그리면서도 왠지 미심쩍어 고개만 갸울었다.
타닥타닥!
발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가조는 어화서를 지나서 가마 있는 곳까지 정신없이 내달았다.
“전하, 가십니까?”
“그래, 어서 가자.”
가조는 가마꾼들을 재촉했다. 그림 속의 여인, 떠올릴수록 조급해졌다.
‘필시 그 여인이다.’
태화성에 심어둔 정탐꾼에 의하면 황제가 여인 하나를 찾고 있다 했다. 미색은 초개처럼 아는 자가 그림으로 남길 정도면 비중이 몹시 클 터. 가조는 실실 나오는 웃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아하하하!”
가마 안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가마꾼들은 귀를 종긋 세웠다.
“뭐 하느냐? 왜 이리 더딘가!”
걸판진 웃음 끝에 호령이 떨어졌다. 가마 멘 사내들은 불땀나게 뛰었다.
쉬익! 쉭!
장성의 저자가 스쳐 날았다. 사람도 집도 한 덩이로 섞였다.
“전하께서 오신다!”
드디어 뇌희원. 붉은 지붕이 웅장하게 드러났다. 문지기가 정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가조는 가마에서 내리자마자 급히 안채로 뛰어 들어갔다.
“서린아!”
“전하, 이제 오셔요?”
화조문을 돋을새김한 문 새로 어여쁜 인영이 흘러나왔다. 나긋나긋 고운 여인은 가조의 첩이었다.
‘천우신조.’
서린은 미인도와 흡사했다. 영락없진 않으나 많이도 닮았다.
‘놈을 베는 검이 될지도…….’
앙천대소. 가조는 걸게 웃었다. 서린은 상냥한 얼굴로 가만 보기만 했다.
“무에 그리 기분이 좋으셔요?”
가조는 서린에게 이끌려 정원 가득한 복사그늘로 들어섰다. 봄꽃 냄새가 뇌희원에 가득했다.
“전하, 화차여요. 달금한 것이 좋사와…….”
서린이 꺾일 듯 가는 섬섬옥수로 잔을 건넸다. 차의 온기는 고스란히 가조에게 스몄다. 어여쁜 소매 끝에서 복사향이 가득 퍼졌다.
‘서린아, 널 장히 쓸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가조는 서린을 훑었다. 어린애처럼 해맑은 눈이 가장 먼저 닿았다. 그녀는 해바라기였다. 지금도 영문도 모른 채 수줍은 미소 지으며 제 사내만 보았다.
‘이젠 완전히 농익었군.’
삼 년 전, 서린은 아비의 관을 사기 위해 몸을 팔았다. 그리고 가조는 열여섯 어린 꽃을 꺾어 이때껏 취했다. 그러나 색향에 절었어도 순수는 사라지지 않아, 그녀는 항시 소녀다웠다.
‘내가 죽으라 하면…….’
가조는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서린은 맹목적인 사랑밖엔 몰랐다.
“서린아.”
“예, 전하.”
“내게 세상을 주련?”
난데없는 물음에 서린은 윤기 반드르르한 머리만 갸웃거렸다. 그리고 서늘한 눈으로 가조의 의중을 살폈다. 그러다 결국은 포기했다. 말간 동공에 가조를 품은 세상이 오롯이 담겼다.
“전하, 세상을 갖고 싶으세요?”
가조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지고 싶은 것이 하많았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을 터. 이리 아끼는 서린이라도 걸림돌이 되면 가차 없이 베고, 득이 된다면 타인에게 서슴없이 내줄 것이다. 문선왕 가조는 본시 그런 사내였다.
“저라도 전하의 꿈에 보탬이 된다면, 기꺼이 그리하지요. 저는…… 삼 년 전에 이미 죽었는걸요. 전하께서 거두셨으니 뜻대로 하셔요.”
너는 이다지도 유순하고, 이다지도 애참하여……. 가조는 서린을 덥석 들어 안았다.
“으응…….”
도톰한 입술에서 신음 소리가 약하게 흘렀다.
“저, 전하…….”
세상없이 고와 기필코 범해야 했다. 가조는 고개 숙여 저만 아는 입술을 찾았다. 이내 달금하고 유연한 살이 착 감겨들었다.
사아아아…….
만개한 복사꽃이 바람에 휩쓸렸다. 연홍빛 꽃비가 둘 위로 쏟아졌다. 서린의 옷섶 새, 가조의 손이 들어갔다. 굳게 여민 것이 벌어지자 박 속 같은 젖무덤이 드러났다.
“전하, 낮이어요. 누가 보면 어쩌시려고…….”
서린은 열 오른 입술로 달뜨게 속삭였다. 그에 가조는 혼탁하게 웃었다.
“여긴 내 집이다. 너는 내 계집. 아랫것들 또한 내 것. 누가 감히 나서랴!”
저 보얀 몸, 걸탐스레 탐한다. 가조의 이성은 성욕에 가리고, 눈은 이미 흐릿해졌다.
“너는 온전히 열어젖히면 될 뿐.”
가조는 턱으로 연약한 쇄골을 꾹 눌렀다. 그리고 공단 닮은 피부를 슥 핥았다.
“아앗!”
척추를 찌르는 감각에 비명이 절로 나왔다. 서린이 몸을 뒤트는 새, 인공의 허물이 벗겨져 나갔다. 매끈한 알몸에 꽃잎이 슬쳐 흘렀다. 가조는 어떤 것은 쓸어내고 어떤 것은 불어 버렸다. 나신이 하얗게 드러날수록 달금한 교성은 높아졌다.
“하아, 전하…….”
가조는 여체라면 진저리나게 알았다. 대부분 그러하듯 서린도 애태울수록 민감해졌다. 하여 느릿하게 핥고 빨았다. 그에 여인의 신음이 위태롭게 이어졌다. 그는 유륜인 양 덮인 복사꽃을 혀로 건드렸다.
“아윽!”
유두도 꽃잎도 모두 한입에 사라졌다. 희뿌연 가슴 끝이 아릿하게 물들었다.
“하악!”
기덕, 끼덕!
가조가 찍어 누르면, 서린이 흔들리고, 복숭아나무가 삐걱거렸다. 그리고 도홍빛 꽃보라가 일었다.
“흐윽!”
파고듦이 뜨거워지면 복사꽃은 더 심하게 떨어졌다.
우스스…….
턱, 터억!
홍조 묻은 꽃잎이 마구 흩날렸다. 접한 곳이 깊어질수록 분홍 융단은 두터워졌다. 복사나무 아래, 흐트러진 꽃빛깔이 몹시 고왔다.
“흐억!”
결정적인 순간, 가조는 폭발하려는 몸을 거둬들였다. 곧, 젖빛 얼룩이 꽃밭을 더럽혔다. 비록 호흡이 거칠고 심장이 말발굽처럼 뛸지라도 그는 이것만은 잊지 않았다.
‘이번에도…….’
서린은 가조를 그러안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온몸이 바숴지게 안겨도 흔적 따윈 남지 않았다. 다습게 품고 사랑하고픈……. 사모하는 만큼 아이를 가지고 싶었다. 하지만 불가했다.
‘몹시 서러운 아기라도…….’
혼자만의 꿈. 서린은 섧고 서글퍼 혀끝만 물었다. 촉촉이 젖은 눈귀에 연홍의 꽃잎이 살포시 내려앉았다.
***
석벽 위의 부접, 석벽 아래의 동시군단. 그 틈을 메우는 것은 눈보라와 수백 개의 목관들이었다. 대기는 쩍쩍 얼어붙어 성엣장마냥 날카롭게 섰다.
휘휙!
수연도가 휘돌았다. 검광이 파르랗게 퍼졌다. 시야를 허옇게 가린 것들이 금세 녹았다. 온풍이 맑게 돋아 물조차 말려 버렸다.
“한데서 고생이 많군.”
아래서부터 기인하는 목소리, 마상여의 것이었다. 아마 진즉부터 눈치챘으리라. 록흔은 곧게 굽어보았다.
“고적한 곳이라 사람 구경은 물 건너갔다 여겼거늘.”
슁!
마상여가 등에 멘 장창을 길게 빼 들었다.
“동시들과 온밤 보낼까 괜한 걱정 하였소. 허나 이리 반겨 주니 심심치는 않을 터.”
푸툭!
동태의 배를 딸 때 나는 소리와 흡사했다. 이미 동시 하나가 창의 첨단에 꽂힌 후였다.
‘거듭 죽이는군.’
이미 시신이라 통증 따윈 없다지만 실로 참혹했다. 마상여는 동시를 고기마냥 함부로 다뤘다. 그는 돌덩이만치 무거운 시체를 사뿐 쳐들어 휘휘 내저었다. 내둘리는 대로 살갗 조각이 비늘처럼 탁탁 튀어 올랐다.
“동시라면 그 영감도 일가견이 있을 테지.”
샤아이이익!
장창이 하늘을 긁고 올랐다.
타차앙!
얼어붙은 암괴에 창이 박혔다.
“가루가 될 때까진, 마음 놓지 말길!”
야수의 말이 지자마자 동시가 벌떡 일어섰다. 놈은 시퍼런 손으로 제 배에 꽂힌 것부터 뽑아 들었다.
탕그당!
천묘가 다르르 떨렸다. 패대기친 곳이 움푹 들어갔다.
퉁!
타당!
마상여가 언 땅을 힘껏 두드렸다. 그러자 동시가 석벽을 내리쳤다. 그것은 괴뢰, 주인이 부리는 대로 움직였다. 거듭되는 일격에 암벽이 굉음과 함께 갈라졌다.
“조심하시오, 연협. 상대는 마상여요. 동시들이 놈의 기운을 빌려 입었으니.”
칼바람이 록흔을 후려쳤다. 눈발은 석벽을 타고 올라 눈을 가렸다.
“접두!”
처음엔 그저 하나였다. 그러나 록흔이 수연도를 내그을 때마다 하나씩 늘어났다. 보얀 시계가 갈리면 동시의 퍼런 낯이 보였다.
“젠장! 접두, 어찌할까요? 명줄 붙은 이들도 아닌데, 그냥 부숴 버릴까요?”
일촉즉발, 창해가 몸을 크게 틀었다. 그 즉시 퍼런 주먹이 사방에서 날아왔다. 얼은 땅 이곳저곳, 홈이 깊게 팼다. 동시는 몹시 사나워 손에 사정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망자라 제 것이 아닌 의지일 뿐이었다. 록흔은 단호히 명했다.
“마상여가 머리다. 황명대로 반드시 생포하라.”
목소리 가닥가닥 선함이 그대로 배어나왔다.
“더불어, 시신에 상해 없도록 동시의 공격은 오로지 피한다. 유족에게 오롯이 돌려줄 터.”
부접 모두 고개를 깊이 꺾었다.
“마음 고우신 우리 접두, 알아서 모십죠.”
창해가 씩 웃었다. 잇새로 하얗게 샌 김이 즉시 얼음알갱이로 굳었다.
떨렁떨렁!
천묘의 추위는 혹독해 방울소리마저 언 듯했다. 그러나 진여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요령만 흔들었다. 그러자 동시들이 교란되어 이리저리 두리번댔다.
‘바숴질까 걱정이다.’
슈욱!
괴력 담긴 주먹 하나가 달라붙었다. 그에 록흔은 허리 꺾어 유연히 피했다. 즈윽, 저도 몰래 앙다문 모양. 이미 튼 입술이 빨갛게 터져 버렸다. 새하얀 얼굴에 피는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렸다.
‘묘한 냄새를 풍기는 젊은이로군.’
진여장은 록흔을 보느라 잠시 요령을 멈췄다. 강건한 무인의 틈새, 규명 못할 잔약함이 얼핏 스쳐 지났다. 어쨌거나 보기 드문 미청년임에는 틀림없었다.
우우우우…….
텅, 텅!
미약한 비린내나 동시들은 알았다. 생선에 파리 꼬이듯, 놈들이 몰렸다. 록흔은 손등으로 입술에 묻은 피를 스윽 훔쳤다. 대강의 어림으로 스물이 넘는 것 같았다. 행여 다칠세라, 부접 여섯이 철옹성마냥 저들의 우두머리를 에워쌌다.
“뒤를 부탁한다.”
“맡겨 주십쇼, 접두.”
언제나 그렇듯 부접들은 하나의 답을 했다.
“마령도사께선 절 도와주시겠습니까?”
“물론이오.”
흑천백설, 눈꽃 새로 그림자 둘이 하강했다. 현수제관, 널 헤치며 인영은 빛 쏘듯 내달렸다. 옛 그림에서 선인을 보는 양 그 둘은 정적이면서도 힘찼다. 날파란 유영에 관이 흔들리고 눈발이 은나비인 양 마냥 쏟아졌다.
텅! 텅!
설화 내리는 골. 명 끊긴 이들이 자연법칙을 어기며 움직였다. 사람의 형상을 지닌 것은 서른 남짓이나 생기 있는 것은 단지 아홉이었다.
“마상여!”
수연도가 눈발을 헤쳤다. 마침내 목적한 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즉시 록흔은 우뚝 멈췄다. 족장(발바닥)이 보송한 눈밭에 닿을락말락했다.
“적어도 애송인 아니로군.”
마상여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실체는 소문과 판이하게 달랐다. 구 척 거한, 오 척 왜인, 홍안백발……. 여러 정보 중에 맞는 것은 하나 없었다. 그러나 청의와 우수(오른손)의 갑만큼은 한결 같은지 목전의 사내 역시 그와 같이 차렸다.
‘빙수공인가?’
록흔은 사늘히 훑었다. 파문 후, 도명은 본래의 청수(淸水)에서 청수(靑手)로 변했다. 하여 맑고 푸른 마음은 간데없고 퍼렇게 언 손만 남았으리라. 그는 시선을 곧게 올렸다.
‘파륜.’
조각도라도 댄 듯 이마에 요조(음각)된 글자. 록흔은 소리 없이 읽어 보았다. 그러나 마상여는 쉽게 알아챘다. 사내의 눈귀가 야멸치게 찢겼다. 파문의 낙인, 그것은 놈에겐 유일한 약점이자 치부였다.
“내 앞을 막는 자, 용서 없다.”
마상여가 일갈했다.
위이이익!
진여장이 손을 펼쳤다. 소맷자락이 굵은 팔뚝에 휘감겼다. 한 말도 채 되지 않는 품이나 욕망은 하많아, 어린놈은 제 몸만 갉았다. 홍안은 빙긋 웃으며 눈바람을 휘휘 내저었다.
“허나, 청수. 연협의 뜻도 그러하고, 나도 이왕 손을 보탰으니…… 아무래도 오늘로써 자네의 운은 다한 것 같으이.”
그 즉시, 비웃음이 떨어졌다. 마상여가 수려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이기죽댔다.
“오합지졸이로군. 둘이서 덤빈다? 뭐, 각개격파도 나름대로 재미는 있지만.”
뭐라 하건 록흔도 마령도 눈 하나 꿈쩍 않았다.
“어떤가, 진여장? 돈푼 안 되는 시체 운송보단 나랑 손잡는 게 쏠쏠할 텐데. 누더기 걸치고 선인입네 하는 거 정말 역겹지. 고고한 척해도 뱃속에 오물이 한 바가지는 들었잖나.”
뒤틀린 자였다. 즉시, 록흔은 수연도를 거뒀다. 상대가 격이 낮으니 칼조차도 아까웠다.
툭, 투그르르.
투아앙!
석벽 위는 아수라장이었다. 부적을 떼지 않으면 몸이 부서질 때까지 싸운다 했던가? 마상여의 주술에 걸린 동시들, 명 따르느라 공격 없이 방어만 하는 부접들……. 서로 엉켜 싸우는 소리가 천묘를 울리고 흔들었다.
“장담하건대, 네 부하들 모두 죽는다.”
마상여가 쏘듯이 보았다. 그러나 록흔은 입귀 늘리고 넉넉하게 웃었다.
“물처럼 흘러가는 세상사. 둑은 고요하고, 여울은 들끓으며, 대해는 넓다. 때론 바위 만나 산산이 깨지기도 할 터. 장담은 이르지 싶은데.”
록흔은 수연도를 칼집에 재웠다.
“마상여, 나를 꺾는다면 금야로 한해 놓아주마.”
“금야?”
“포획이 소임이니 오늘은 놓아줘도 내일은 또 쫓아야지.”
단아한 미소였다. 마상여는 어연번듯한 적이 마음에 들었다.
“고용한 이가 누군가? 얼마를 받았지? 나와 손잡지 않겠나?”
“대의를 위해 일한다.”
연거푸 떨어지는 물음에 록흔은 짧게 답했다. 그리고 한 걸음 물러섰다. 석벽 위에서 기인한 바람이 하얀 빙벽을 타고 내렸다. 검푸른 머리칼이 보드랍게 부서졌다.
“협상 여지는?”
마상여가 한 번 더 물었다.
“전무.”
거절은 단호했다.
“좋다, 후회해도 이젠 늦었다.”
마상여가 우수의 철사장갑을 벗어던졌다.
샤릉!
얼음을 벼려 깎았을까? 시푸르뎅뎅한 손에선 찬바람이 퍼르르 몰려 나왔다.
“빙여석!”
파륜 두 글자를 가로질러 핏대가 섰다. 음각된 부분이 도드라지게 파래졌다. 마상여 안의 힘이 소용돌이쳐 올랐다. 줄기줄기 흐르던 것이 다발로 모여 오른손을 뚫고 나왔다.
파앙!
록흔 바로 뒤, 목관 하나가 한풍을 맞았다. 널은 급속도로 얼더니 무참하게 깨졌다. 제대로 맞았다면 그 역시 저런 신세를 면하지 못했을 터였다.
“연협, 받으시오!”
진여장이 노란 종이를 날렸다. 거기엔 온(溫)이라고 쓰였다.
닷!
검지와 중지 새, 종이가 들어앉았다. 즉시, 록흔은 목관 위로 몸을 날렸다. 설화 사이로 달빛이 창백하게 부서졌다. 빛의 틈새, 무인의 그림자는 신비롭게 움직였다.
“네 특기는 줄행랑인가?”
빙수공이 연타로 쏟아졌다. 마상여는 록흔을 쫓아 이 관 저 관을 마구 밟았다. 그들은 그네 타듯 관을 탔다. 진여장은 가만 바라보다 소매 아래로 손을 감췄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오늘 죽을 목숨이나, 이름이라도 알자.”
죽을 목숨? 웃음이 절로 나왔다. 록흔은 마도굴에서 사람의 명이 질기다는 것을 배웠다. 스스로 버리지만 않는다면, 어떻게든 살아지는 것. 하여 두려울 것이 바이없었다.
“통성명이라, 좋다. 난 연록흔이다.”
“연록흔? 그럼 네가?”
언젠가 들은 듯했다. 마상여는 그림자도 없단 협객을 아슴푸레 떠올렸다.
“네가 무영랑인가?”
“더러 그리 불린다만, 산 자에게 그림자가 없을까?”
록흔은 두 손을 가슴께로 모았다. 입가에서 미소가 피어올랐다. 손끝에는 힘이 몰렸다.
사삿!
검지와 엄지가 곧게 펴졌다. 즉시, 온의 부적이 매섭게 튀어 올랐다. 록흔이 목적한 바는 목전의 마상여였다.
스스스스!
노란 신부는 쑥쑥 커져 금세 연만 해졌다. 시시각각, 종이쪽은 크기가 변했다.
사아아…….
널따란 부적은 따뜻한 바람을 토했다. 온풍은 마상여의 한풍과 몽글몽글 섞여 안개로 화했다. 이내, 두터운 연무가 시야를 가렸다.
“잔재주에 눈속임이라!”
마상여가 씹어갈아 말했다. 어금니로 뭉갰는지 말마디가 까끄라기였다.
사악.
록흔은 차분히 손을 뻗었다. 그러자 머리칼마저 의지를 지닌 듯 곱게 내려앉았다. 더운 바람, 찬바람 섞여 부는 와중에도 한 올 흐트러지지 않았다. 일촌광음, 빛 하나가 움직였다.
파랏!
극강의 기, 구슬로 모여 곧게 뻗어 나갔다.
투억!
희뿌연 안개가 밝게 쪼개졌다. 빛덩이가 휘돌았다. 록흔의 강기는 적의 흉강을 뚫고 지났다.
“크헉!”
마상여가 가슴을 움켜쥐고 몸을 웅크렸다.
디릭디릭!
록흔은 여세를 몰아 움직였다. 손목, 발목, 목. 그는 삼목에 광휘 찬란한 포승줄을 감았다.
“으어억!”
절대 굴레, 절대 구속. 은사 백 겹을 꼬았다던가? 황제가 하사한 오랏줄은 연하면서도 질겼다. 록흔은 이리저리 요령 좋게 잡아챘다. 교묘한 매듭이라 바동거릴수록 더 옥죄었다. 마상여는 눈을 허옇게 뒤집고 격렬히 저항했다.
“쾌인쾌사.”
록흔이 백은포를 시원스레 잡아당겼다. 줄이 짱 하고 울었다. 은의 포승은 낭창낭창하나 몹시 억셌다. 만보고의 진기법보의 하나, 장진과는 혈룡검 아니면 결코 끊어낼 수 없다 했다. 그에겐 없는 물건인지 그리 말하며 눈을 빛냈었다.
“마상여, 상황 끝이다.”
한 손은 은사를 틀어쥐고, 다른 손은 부적을 거둬들이고……. 록흔이 낭랑하게 말했다.
“장담 말란 건 너였다, 무영랑 연록흔.”
“확실한 정황에는 장담 또한 미덕이다.”
흡사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 록흔은 씩 웃으며 오랏줄을 넘겼다.
“부탁드립니다.”
“걱정 마시오, 연협.”
진여장은 마상여를 끌고 천묘로 날아올랐다. 석벽 위는 여전히 소요했다.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아 시퍼런 살이 튀고 하얀 돌가루가 난분분했다. 록흔 역시 눈구름을 헤치며 암괴를 거슬렀다.
휘주 장성, 사시(오전 아홉 시부터 열한 시). 복사꽃이 지천으로 날렸다. 햇살은 다사롭고 대기는 아지랑이가 일어 어룽어룽했다. 흐드러진 봄, 록흔은 기가 차서 그저 웃어 버렸다.
‘눈비에서 꽃비라……. 일국이 다양도 하다.’
부접들 모두 상처투성이였다. 쳐내지 못하고 막기만 해대서 살갗 어느 곳 성한 데가 없었다. 명 따른 것은 기특하나 상한 것은 안쓰러웠다. 록흔은 눈 실긋이 뜨고 바라보기만 했다. 혈육은 아니나 하나같이 그만큼 가까운 이들이었다.
“접두께서 더 상하시고 저희 걱정만 하십니까?”
그 빛을 눈치챘는지 기리단이 나무라듯 말했다. 곧, 혈루마 두 마리가 머리를 나란히 하고 섰다.
“내가 무얼…….”
“빙수공에 상하신 거 다 압니다. 마령도사께서 주신 약은 잘 바르셨습니까?”
“어, 그럼…….”
“냉상에 잘 듣는다 하니 꼭 바르세요.”
걱정 담긴 꾸중에 홍조가 절로 돋았다. 걱실걱실 솟은 사내 여섯이 발간 볼 하나에 곰살궂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