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forge the Streak RAW novel - Chapter 45
연록흔 – 45화
“왜, 듣기 역한가?”
가륜이 냉량하게 물었다.
“예.”
단정히 떨어진 답에 모두 놀랐다. 정작 말한 사람은 표정에 그다지 변화가 없으나, 곁에서 듣는 자로선 간이 떨어질 노릇이었다.
“남총에겐 영광될지 모르오나.”
빗물 돋기 전의 검남색 하늘처럼, 록흔은 마음이 무거웠다. 그러나 다박다박 제 할 말은 했다. 뺨으로 사금파리 같은 시선이 날카롭게 치고 들어와도, 눈썹 끝 하나 떨지 않았다.
“폐하의 중랑장으로서 수긍할 수 없습니다.”
록흔이 맑진 눈으로 보매, 가륜 역시 곧게 응시했다. 뉘 입이 연하게 닫히자 뉘 입은 비긋이 뒤틀렸다.
“농은 농으로 받아라. 상시 그러다간 뚝 부러진다.”
“하하, 폐하께선 저리 강직한 중랑장을 휘하에 두셔서 든든하시겠습니다.”
가륜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만혁 역시 흔연스럽게 굴었다. 그러나 여기서 일단락된 듯싶어도 앙금은 남았다. 록흔은 어두운 눈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마침, 희대 위에서 극의 시작을 알리는 북이 두어 번 크게 울렸다. 이어 조명이 수없이 돋았다.
삼면을 막은 희대는 배우들이 내는 소리를 크게 모아 객석까지 전달했다. 주간공연 시의 채광을 고려해 육량삼조란 복잡한 건축수법으로 지붕이엉을 높게 올려 그것만 봐도 장관이었다. 해가 진 지금은 넓게 늘어뜨린 이엉마다 수백의 광석이 꽂혀 발광했다. 작금 선루라 불리기도 하는 무대는 휘황하기 그지없었다. 극이라 함은 빛과 소리의 어우러짐이라 해도 좋았다.
다다당.
희대 아래, 조금 야트막하게 들어앉은 악붕에는 악사들이 모여 앉았다. 막 금을 쳐내니 오색으로 꾸민 상장문(등장문)이 열렸다. 정면과 좌우의 객석이 일순 조용해졌다. 나긋나긋 걸어 나오는 여인, 천녀인 듯 움직임이 가분했다. 바로 천라화였다.
“아아, 바람이 섧구나. 모란도 졌건만, 작약은 언제 피리.”
극명은 홍작약. 저마다 눈에 백리경을 대고 가희의 움직임을 좇았다. 전아한 노랫소리가 귀에 절로 스몄다.
“라화님…….”
가냘픈 탄성이 신루 어디선가에서 터졌다. 그와 동시에 천라화가 널따란 소맷자락을 펼쳤다.
멀리 장사가신 아버님, 이제나저제나 오실까?
흐드러진 모란도 없고, 심록은 짙어져 가건만.
소르드의 비단 없어도, 아버님은 무사하시기를.
달님에게 저 별님에게, 두 손 모아 빌어 보누나.
원정상인 홍철암의 외동딸 홍작약, 이스펠보다 더 먼 소르드로 장사 떠난 아비를 기다렸다. 걱정으로 사윈 양, 미희의 뺨은 적적하게 말랐다. 청아한 미성에 감정이 풍부해, 노래 가락마다 청중의 눈물을 자아냈다.
파랏!
하장문(퇴장문)이 젖히고 가희는 사라졌다. 그리고 상장문이 열리며 장면이 바뀌었다. 황량한 사막 위, 희대는 온통 모랫빛이었다. 땅 위에 얼굴을 비비며 애가 끓게 우는 사내, 희끗희끗한 머리칼이 두건 새로 빠져나와 모진 바람에 흩날렸다. 찰나, 없던 사내가 불뚝 솟았다. 그는 바위처럼 커다랬다.
“살려 주십시오.”
“정직하지 못한 자, 죽음뿐이다.”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구란 안에 메아리쳤다. 천정까지 다르르 울릴 지경, 그리고 웬만한 장정의 키만 한 대도가 높직이 치올려졌다.
“제발, 마지막으로.”
초로의 사내가 절규했다.
“무엇이냐?”
소르드 대상 카스란 역의 배우는 성량이 대단했다.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신루와 요붕의 휘장이 파르르 떨렸다.
“딸을 만나고 싶소.”
카스란이 음험하게 웃었다.
“그거라면 문제없다.”
희대 위, 검은 눈이 번쩍 빛났다. 그와 동시에 록흔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단단히 둘러쳐진 난관 쪽으로 몸을 내밀었다.
“과…….”
나머지 말은 차마 뱉지 못했다. 록흔은 제 눈을 의심했다.
바람 거친 소르드, 사람 또한 거칠다.
정직한 장사치에겐 은혜로운 땅이나, 배덕한 협잡꾼에겐 몸서리쳐지는 곳.
깨끗한 동전 한 닢, 더운 술 한 동이, 더러운 동전 한 닢, 더운 피 한 동이.
소르드에서 태어난 카스란 자이카르, 내뱉고 지키지 못한 일은 하나 없다.
표정이 있으나 없는 이, 한 겹 얇은……. 록흔은 속말을 중얼거렸다. 그때, 카스란의 눈이 신루를 향해 어둡게 빛났다. 일별, 둘의 시선이 첨예하게 얽혔다.
“홍작약을 잡아 와라!”
“예!”
사막의 군무. 사내들이 역동적으로 솟구치고 휘휘 돌았다. 모래폭풍이 광포히 일었다. 그리고 카스란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대체 뉘신가요, 사풍 닮은 그대는?
붉은 작약 하얗게 꺾는 카스란 자이카르.
어찌하여 저를 이리 핍박하시는 건지요?
부정한 아비가 어여쁜 딸을 두었기 때문.
카스란과 작약의 초대면. 그러나 희대엔 그림자만 있었다. 파리우리한 얇은 비단 휘장 너머, 스러진 처녀와 높이 솟은 사내는 윤곽만 남아 처량하게 거칠게 노래했다.
“장성의 화극을 꼭 봐야 한다더니, 저런 장면이라니……. 폐하, 소녀 가슴이 두근거립니다.”
소단이 들뜬 목소리로 조잘댔다. 휘장 너머의 일, 그저 그림자라 더욱 자극적이었다. 처녀는 몸을 비틀어 피하고, 사내는 바로 쫓아 여린 몸을 보듬어 안았다.
‘아니다.’
록흔은 난관을 움켜쥐었다. 손등에 핏줄이 파랗게 볼가졌다.
“엽렵한 놈.”
가륜이 날캄하게 웃었다. 록흔은 날파랍게 뒤돌아섰다.
“…….”
“네 짐작대로, 둘은 하나다.”
“허면, 폐하…….”
“그래, 가도 좋다.”
“존명.”
록흔이 재빨리 내려간 후, 소단은 제자리서 눈만 마냥 깜빡였다. 체격과 음성도 전혀 다른 둘이 하나라 하니 쉽게 믿을 수 없으나, 말한 사람을 봐선 믿어야 할 것도 같았다. 돌아보니 아비는 말없이 빙그레 웃기만 했다.
“설중랑장님, 정말 주연 배창이 한 사람인가요?”
“옹주 마마께서 지닌 무공 정도면, 이제쯤이면 알아채실 듯한데요.”
무진은 다시 시선을 정면으로 돌렸다. 록흔이 족치러 내려갔으니 느긋하게 기다리면 될 터. 진과 역시 크게 동요치 않아 홍작약에만 신경을 쏟았다.
탁탁.
봉익선의 끝이 의자의 팔걸이를 쳤다. 소단은 그 소리에 맞추듯 고개를 이리저리 갸웃거렸다. 무진이 치켜세우긴 했어도 여전히 모를 일, 그녀가 보기엔 둘은 전혀 다른 별개였다. 아무래도 인월에 돌아가면 스승님께 배움 달라 졸라야 할 모양, 붉은 입술이 금세 빼뚤어졌다.
“소단아, 그러니 어린애라 하는 거다.”
아비의 핀잔에 소단은 입만 더욱 빼물었다.
희방(희대 뒤 배우들의 공간)은 몹시 복작댔다. 여럿이 들고 나고 소품들이 바삐 옮겨졌다. 극의 전반이 거의 끝나가는 참, 록흔을 보고 사내 하나가 다가왔다. 얼굴에 허옇게 분칠을 한 것을 보니 그 또한 배우였다.
“이곳에 함부로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알고 있소.”
“꽃을 전하러 오신 거라면…….”
한눈에도 막무가내로 밀어낼 사람이 아닌 듯해, 사내는 조심스럽게 말꼬리를 사렸다.
“천라화를 만나야겠소.”
“곤란합니다, 이러시면.”
차락!
상장문을 가린 휘장이 세차게 들렸다. 막 카스란으로 분한 천라화가 열린 틈으로 들어섰다.
“다시 뵙습니다.”
겉은 카스란, 목소리는 홍작약. 록흔은 이율배반적으로 섞인 이를 바라보았다.
“제 방으로 가시죠. 다음 막까지는 짧은 공연이 있으니, 말씀 나눌 시간은 될 겁니다.”
말 지자마자, 천라화가 어느 휘장을 헤치고 몸을 감췄다. 록흔 역시 비밀스런 공간으로 따라 들어갔다.
“앉으세요.”
사방은 거울, 수많은 천라화가 각각의 면에서 움직였다. 그녀가 화장대 앞에 앉으니 수십이 함께 앉았다. 그리고 가희의 곁마다 록흔이 있었다.
“찾아오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셨는지요?”
천라화는 스스럼없이 옷을 벗었다. 풍만한 가슴이 하얗게 쏟아지고 가냘픈 어깨가 드러났다. 그리고 그녀는 명주수건을 들어 짙게 화장한 얼굴을 지웠다. 순식간, 사내의 각진 얼굴은 여인의 부드러운 얼굴로 변했다. 독특한 손놀림이라 록흔은 눈을 조프리고 보았다.
“홍작약의 애참함도 카스란의 광포함도, 모두 감명 깊었습니다.”
이내, 거울 속의 천라화가 붉게 웃었다.
“헌데 저를 찾으신 연유는요. 작약의 약속으로 오신 것 같진 않습니다만.”
거울 밖, 록흔은 천라화 앞에 섰다. 그리고 허상이 아닌 실체와 시선을 맞췄다.
“궁금한 게 있어 왔습니다.”
“무엇인지요?”
천라화가 곱다랗게 웃었다.
“주업이 노희구란의 배창입니까, 아니면.”
록흔이 잠시 말을 끊자, 천라화가 눈귀를 들어 올렸다.
“아니면, 몸이라도 파느냐 묻고 싶으신가요? 제가 논다니 계집으로 보이십니까?”
천라화가 벌떡 일어섰다. 퍼런 서슬에 옷이 완전히 흘러내렸다. 가슴이 묵직하게 출렁이니, 연홍빛 유실이 새뜻이 볼가졌다.
“앞서는군요.”
록흔이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섰다. 실긋 치올린 입귀에 은은히 퍼진 것은 미소였다.
“그럼…….”
“혹 의원이 주업은 아닌가 해서 말입니다.”
천라화가 눈을 크게 떴다. 붉은 입술이 야틈하게 벌어졌다.
“은녕건당에서 뵈었을 땐, 곽의원이었잖습니까?”
“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록흔은 가희의 얼굴을 한 손 가득 쥐었다. 그리고 엄지로 보드라운 뺨을 어루만졌다.
“천라화가 진짜인가, 곽아밀이 진짜인가…….”
천라화가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고운 눈이 사다리꼴로 이지러졌다.
“요지는 간단명료하지.”
찌이이익.
록흔이 거듭 발기매, 인피가 벗겨졌다. 손에 남은 건 무두질 잘한 가죽인 양 감촉이 좋았다. 거죽은 속이 비치지 않을 만큼만, 그 한도 내로 얇았다. 한 겹 아래의 얼굴은 카스란, 그리고 그 아랜 그가 익히 아는 얼굴이었다.
텅!
차그르르!
의자가 솟구쳤다. 벽면의 거울이 깨졌다. 은빛 파편이 수없이 쏟아졌다. 조각마다 록흔이 있고 아밀이 있었다. 산산이 분분이, 날카로운 것들은 사방을 마구 긁었다.
“처음부터 심상찮다 생각은 했습니다.”
“그래?”
“은녕에서 뵈었을 때, 피가 끓었지요.”
“어째서.”
“동류란 걸 알았거든요.”
펑!
차차차착!
바닥에 깔린 것, 공중에 뜬 것, 벽에 달린 것……. 차고 날카로운 것들이 동시에 날아올라 한 방향으로 꺾였다. 맵찬 칼바람에 공기가 예리하게 울었다. 그러나 그것은 찰나, 곧 사위는 조용히 가라앉았다. 가시 방망이에 태장을 당했대도 저런 모습은 불가할 터, 낱낱이 서 꼿꼿하게 달려드는 유리조각에 천정부터 휘늘어진 천라화의 무대의상이 갈가리 찢겼다.
“나와 같다?”
록흔은 크게 뻗었던 좌수를 갈무리했다. 맑진 눈은 진묵으로, 연한 입술은 직선으로……. 여태껏 어느 구석에도 담지 않았던 살기가 그 안에서 마구 뿜어져 나왔다.
“어차피 세상을 속이고…….”
뒷말은 신음으로 깨졌다. 아밀은 가슴을 움켜쥐고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선혈이 그의 입귀를 적셨다. 몹시 날파란 가격이라 다가온 기척도 없이 아픔만 크게 남았다.
“개수작 말고, 어디서 기인한 인피인지 말해라.”
말이란 것, 형체가 있다면 뚝 부러져 바드득 갈렸을 터. 록흔은 아밀을 언으로써 조졌다. 지금껏 제 자신도 이런 마음 가졌던 걸 몰랐을 지경, 그는 폭렬했다.
“짐작대로라면, 너도 발길 터.”
록흔은 삼각대를 거침없이 벗어 던졌다.
“좋습니다, 연중랑장님.”
아밀 역시 거짓으로 입고 있던 살가죽을 찢어냈다. 풍만한 유방이 떨어지고 탐스러운 겉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제가 이기면, 운기변검을 주십시오.”
록흔은 입귀를 팽팽히 당겼다. 열 손가락, 그 섬려한 끝마다 힘이 다르르 돌았다.
“진다면?”
“연중랑장님의 수하가 되겠습니다, 기꺼이.”
아밀이 야멸치게 웃었다. 사내이든 계집이든, 가죽을 덮든 덮지 않았든, 그는 분명 수려했다.
“그건 좀 생각을 해 봐야겠군.”
타그그그!
록흔은 손을 들어 문부터 막았다. 화장대가 크게 들려 육중하게 덮으니 나갈 곳은 뚫린 천정을 제외하곤 바이없었다. 이내, 밖에서 뉜가 문을 두드렸다. 괜찮나, 들어가겠다 말하는 걸 두 사람 다 사그리 무시했다.
“연중랑장님, 어쨌든 결판부터 내야겠지요?”
쉬이익!
옥토은섬(달)에서 내려온 천녀인 듯, 아밀이 두 팔을 전아하게 틀었다. 일순, 폭도 길이도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천자락이 높다랗게 솟구쳤다. 그것은 노호처럼 일어 록흔을 덮쳤다.
텅텅텅!
문밖에서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극의 후반이 시작된 모양, 록흔은 아밀을 할긋 보았다.
휘륵!
알록달록한 것들이 눈앞에서 남실거렸다. 보드레한 천은 뱀인 양 사행하며 몸을 꿸 듯 달려들고, 넓지만 좁은 방을 함부로 하볐다. 그것은 흐르는 강철, 닿는 곳마다 벽이 움푹움푹 팼다.
“잠시 보내 주랴?”
“됐습니다. 당신의 운기변검, 내내 탐이 났으니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지요.”
“배창 천라화는 버리고, 진신건당의 곽아밀로 남겠다는 거군.”
록흔은 맨손이었다. 그나마 온전한 것은 하나. 그는 왼손으로 아밀을 막았다.
“천라화는 져도 다른 꽃은 얼마든지 핀답니다.”
록흔은 픽 웃어 버렸다. 가당찮은 일, 흑백이 가려지지 않는다면 곽아밀은 천라화 이후 어떤 꽃도 피워선 안 됐다. 여러 박살 건과 관련 있다면 남은 평생은 옥에서 썩어야 옳았다.
“왜 검을 쓰지 않습니까?”
“권은 권으로, 검은 검으로.”
험하게 묻는 소리에 록흔은 유하게 대답했다.
“제가 권도 검도 아니란 말씀이온지요?”
“글쎄…….”
상대가 비웃듯 웃기에 아밀로선 화가 더욱 치밀었다. 그는 옷자락을 마구 늘였다.
차악!
도르르르륵!
“제가 타고난 근골이 허약해서, 어릴 적에 그 뉘도 무공을 가르쳐 주지 않았지요.”
팔에 감긴 것은 차라리 돌이라 해도 좋았다. 칭칭 둘러매 신경이 마르도록 옥죄니 욕이 절로 나올 만큼 아팠다. 록흔은 이를 윽물었다. 상하고 상한 것, 다시 거듭 상하니 머릿속이 하얘졌다.
우드득!
독한 소리가 어디선가 터져 나왔다. 록흔의 팔이 비정상적인 모양으로 뒤틀리는 듯싶었다.
“누구나 하는 것은 나도 해선 안 된다, 하여 얻은 게 바로 철라입니다.”
책에서 보던 것, 몸으로 체험하니 뼛속까지 와 닿았다. 쇠를 먹는 누에가 토해 낸 실로 짠 천은 갓난쟁이가 다뤄도 코끼리도 액살시킨다 했다. 제 스스로 생명을 지녀 한 번 붙든 것은 놓지 않으며, 한 번 섬긴 주인을 끝까지 따른다 전해지는, 굉잠의 올…. 그것이 바로 철라였다. 록흔은 팔에 감긴 것을 붙들고 아프게 시근댔다.
“젠…… 잔재주 따위…….”
오지게도 재수 없다, 한 팔만 죽으라고 다친다. 겉말과 속말이 달라 록흔은 불퉁스럽게 되뇄다. 그러는 와중에도 팔에 든 뼈가 죄 터지는 듯하고 힘줄은 다 졸아붙는 듯했다.
“제아무리 무공이 높아도, 이놈은 떼어 낼 수 없습니다. 붙들리지 않는 게 상책이지요.”
록흔은 어릴 적부터 ‘책에 들은 건 어느 정도 과장이다’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철라는 기록과 똑같았다. 그동안 닦아 놓은 모든 것들도 당랑 몰래 훔쳐 먹은 지신초도 소용없어, 조금 더 있다간 팔이 못 쓰게 생겼다. 산방 다락에 쟁여진 그 책, 쥐가 뜯어 먹은……. 그는 머리를 마구 쥐어짰다. 뭔가 생각이 날듯 말듯 갑갑하기 그지없었다.
“곧 그 팔은 잘라 내야겠군요.”
남 겁주는 건 항시 재미난 법, 아밀이 히죽 웃었다.
“가희에서…… 의원으로 바쁘시군.”
잇새로 거친 숨이 새어 나왔다. 지금의 록흔으로선 비웃는 것도 힘에 부쳤다.
“겪어 본 바, 무림 고수들도 별 게 아니었습니다.”
무어냐, 무어냐……. 록흔은 되뇌고 또 되냈다.
“철라는 제가 감은 것의 힘을 먹고 몇 배로 부풀리니, 몇 갑자고 나발이고 아무 소용이 없지요.”
뭐? 부풀려……? 뭔가 머리를 딱 치고 지나갔다. 록흔은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뭔가 어리마리 잡혔다. 실오리 하나가 뇌리에서 팔랑팔랑 날렸다.
“고오…….”
팔이 아프니 목구멍까지 아픈가? 록흔은 고통 속에서 간신히 소리를 냈다.
“어인 헛소리이신지요?”
아밀이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토록 노리던 것이 목전에 있으니 입귀가 마구 찢어졌다. 가지고픈 것이라 미칠 것만 같았었다. 이제나저제나 찾으려는 것이 제 발로 찾아와 이리 얌전히 갇혔으니 얼마나 기쁜지 몰랐다.
“부우…….”
머릿속 어느 한 구석에서 둑이 터졌다. 록흔은 나오는 대로 뇌까렸다. 딱히 무엇을 읊는다는 생각은 없었다. 그저 어릴 적 읽었던 책의 어느 한부분이 갑작스럽게 떠올랐을 뿐이다. 지금의 이건, 커다란 고통 속에서 반쯤은 미친 듯 풀어내는 소리였다.
누에야, 누에야, 굉잠누에야.
두리두리 부풀리고 부풀리다
무쇠 먹어 배가 아프거들랑,
‘아!’ 하고 주둥이를 벌려보렴.
거미줄 굵기만큼, 민들레 홀씨 무게만큼, 극심한 통증이 아주 조금 가셨다. 록흔은 저도 모를 노래를 이어 불렀다. 그러면서 어긋난 어깨를 조금 틀어 보았다. 그러다 그만 혀를 씹었다. 팔이 떨어져나가면 이렇게 아플까 싶었다.
“어미가 씹고, 아비가 씹어서. 날, 나알…….”
딱 거기였다. 더는 막혀서 나오지 않았다. 분명 의성어였는데 잘 쓰지 않는……. 록흔은 어깨를 움켜쥐고 쇳내 나는 침을 삼켰다. 먼 옛날, 쥐가 씹어 없앤 노랫말은 분명 조금 더 있었다.
“제법이시군요. 황제의 중랑장은 아무나 할 수 없다더니, 역시 그런가 봅니다.”
아밀이 빙글빙글 웃었다.
“시끄러…….”
쏘아붙이는 소리에 아밀은 철라를 바투 쥐었다. 일순, 요염한 눈이 야멸치게 빛났다.
“하지만 그렇게 아득바득 하실수록, 제 철라만 강해진답니다. 연중랑장님의 기운까지 제가 지니면 이제 천하에서 두려울 게 별로 없을 테지요?”
아닌 게 아니라, 왼손의 힘마저 빠지고 있었다. 늦지 않으려면, 그러려면……. 록흔은 그 뒷말을 생각하려 애썼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는 연중랑장님께서 상하는 건 원치 않습니다. 다만 제가 원하는 것은 하나…….”
“닥쳐, 이, 이대로…….”
질까 보냐? 뒷말은 채 못하고 록흔은 꺾인 팔을 비틀었다. 이미 오른 어깨는 탈골이 되었고, 가진 힘을 죄 빨리기 직전이었다. 저 얍삽한 놈, 기필코 꺾는다. 그는 왼손으로 오른손에 감긴 철라를 부듯하게 잡아당겼다. 그러는 동안에도 기는 쉼 없이 새어 나갔다.
“제가 이겼군요, 연중랑장님.”
그때, 무언가 록흔의 머리를 크게 치고 지났다.
어미가 씹고, 아비가 씹어서
날깃날깃 보들보들 어루만져
주둥이에 쏘옥 넣어 줄 테니.
록흔은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무엇이 시키는지 입술이 저절로 움직였다. 뇌리인지 귓전인지, 뉘 목소리가 가득 찼다.
빠득!
잡힌 팔이 가까스로 빠졌다. 록흔이 느끼기에 철라의 힘이 조금 더 줄어 있었다.
터르륵!
텅!
“크윽!”
괴뢰가 된 듯싶었다. 록흔은 주절주절 읊으며 손을 펼쳤다. 철라가 축 늘어지매, 그의 우수 역시 힘없이 처졌다. 일장에 아밀이 반대편으로 되게 나가떨어졌다. 그러나 굉잠의 올로 짠 천에는 여전히 힘이 남아 있었다.
고치야, 고치야, 굉잠고치야.
야물야물 야몽야몽 배불려서.
이 공간에 놓인 것은 셋이었다. 자신, 곽아밀, 그리고 뉘인가? 전음으로 들리던 것이 점차 음성으로 들렸다. 록흔은 어두운 구석을 보았다. 입매, 눈매, 기……. 분명 그였다.
까댁까댁 까물까물 졸립거든
배시시 입 벌리고 어여 자렴.
아이들이나 부르는 노랫말 같으나 철라를 재울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이었다. 소리가 꼬리를 사리매, 늘품 있는 입매가 비긋이 멈췄다. 그리고 굉잠이 까무룩 잠에 빠지듯, 철라도 휘늘어졌다.
“도와주련?”
흐린 날, 바람 없어, 우중충한……. 록흔은 잠록한 마음으로 그리 묻는 이를 보았다.
“아닙니다. 지금 받잡은 것도 송괴할 따름입니다.”
“정말 그러하냐?”
“예.”
어디서 어디까지 보았을까? 어디서 어디까지 들었을까? 그런 생각뿐이었다. 록흔은 흐린 눈으로 아밀을 보았다. 그러나 온 신경은 등지고 선 이에게 쏠려 있었다.
“곽아밀, 이것 외에 무엇을 더 보여 줄 텐가?”
“글쎄요, 연중랑장님.”
아밀은 비척비척 비트적거렸다. 그는 오직 록흔의 얼굴만을 보았다. 운기변검이란 건 스승에게서 말로만 듣던 것이었다. 얼굴색이 변하는 것도 대단하다 치는데 황제의 호분중랑장은 또 다른 얼굴을 덧쓰고 살았다. 몹시 탐이 나 애가 탈 지경, 아밀은 바르작거리며 손을 뻗었다. 저 아래에 진정 무엇이 있는지 보고팠다.
“어찌 그리됩니까? 청성의 소린조차 이루지 못한 것을.”
“그 이름 함부로 들먹이지 마라. 내 스승이시다.”
“예? 백 년 전의 극황 소린이 어찌해서…….”
록흔도 알았다. 젊은 나이에 죽은 소린에게 제자 따위는 없었으니 아밀이 놀라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지금 그 내력을 길게 이야기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여러 말 마라. 나를 꺾는다 했잖나?”
“어찌 그런, 그런 일이…….”
아밀이 무릎을 꿇었다. 축 늘어지며 철라를 움켜쥐는데 뭔가 수상했다. 그리고 연쇄반응이 일었다.
처덕!
쿵!
드르륵!
투우우욱!
희대 뒤엔 커다란 우물이 있었다. 천정에 연결된 도르래를 갈무리하는 곳으로, 때론 그곳에 고인 물이 음향장치가 되기도 하고 구름 의자를 실어 나르거나 소품을 위로 올려 보낼 때 쓰이기도 했다. 작금, 우물에 딸린 그 거대한 도르래가 수직으로 하강하고 있었다. 쇠바퀴가 철럭철럭 돌고 질긴 줄이 비명을 지르며 풀려 내려왔다.
타각!
줄 끝에 달린 것은 쇠로 만든 구름이었다, 신선 역을 맡은 이가 타고 올라 저 아래를 굽어보는. 하강지점은 정확히 록흔과 아밀의 머리였다.
“곽아밀!”
록흔은 비끌린 어깨 따윈 상관치 않았다. 아밀을 부여잡고 한쪽으로 끌어냈다. 넋이 나간 만큼, 아밀은 제 몸보다 배가 무거웠다. 그리고 비긋진 오른팔 역시 납덩이만치 버거웠다.
타아아아앙!
티익, 탁!
쇳덩이가 부딪히니 불티가 튀었다.
“곽아밀! 이봐!”
육감은 날이 서, 록흔은 이자가 악인은 아님을 알았다. 헛된 욕심으로 저를 볶고 세상을 볶았을 터. 그는 축 늘어진 사내를 한쪽으로 직직 끌어냈다. 은녕에서처럼 그 손이 몹시도 찼다. 곽아밀은 몹시 허했다.
“괜찮다.”
불쑥 돋은 목소리에 록흔은 뒤를 돌아봤다. 날캄한 시선과 마주치고서야, 그는 알았다. 가륜은 황제로서 관찰자로서 이곳에 계속 있었다. 작금의 상황은 마도굴이 열렸던 날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폐하…….”
록흔은 한숨처럼 부르고 더는 말을 못했다. 지금으로썬 운기변검을 지탱할 힘밖에는 없었다.
“엉망이군.”
방은 초토화되고 곽아밀은 나달해졌다. 록흔은 힘없이 웃으며 가륜을 향해 고개를 틀었다.
“죄송…….”
가륜이 어깨를 훔켜잡았나 싶었다. 그래서 뭔가 하는 마음으로 말을 하다 잠시 머뭇거렸다. 일순, 목전에서 뉘 눈이 반득댄 것 같기도 했다. 그리고 순간이었다. 잡힌 것은 여지없이 비틀어져 록흔에게서 말을 앗아갔다.
뚜둑!
“으윽!”
뼈끼리 부스대는 소리가 먼저인지 참으려다 겨우 뱉은 신음 소리가 먼저인지 알 수 없었다. 어깨가 작열했다. 불가항력, 록흔은 가륜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즉시 굵다랗고 힘찬 팔이 좁다란 등을 감싸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