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signing and Healing in Another World RAW novel - Chapter (235)
사표내고 이계에서 힐링합니다-234화(235/236)
외전 10화
하이엔은 잠깐 고민하다 이수를 방으로 불렀다.
“응, 우리 예비 부인! 어쩐 일로 부르셨소.”
“그게 말이지… 이거.”
하이엔이 양피지를 내민다.
당연하게도 이수는 읽을 수 없었다.
“이게 뭐야?”
“아까 네가 준 서신이야. 그걸 읽었는데….”
“응.”
“아무래도 차원문이 열린 것 같아.”
“…뭐? 어디에. 어디로 통하는데?”
“차원문은 네 바로 옆에 열려있어. 어디로 통하는지는 나도 모르겠고.”
젊은 날의 이수는 조이스 블룸을 실제로 만난 적이 없었다. 그러니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했다.
“누가 보냈는데?”
“그것도 좀 이상한 게. 조이스 블룸이라고 적혀 있어.”
“조이스 블룸?”
조이스는 흔하진 않지만 이쪽에서도 사용하는 이름이었다. 당장 세스의 첫째 딸만 해도 이름이 조이스니까.
그런데 성씨가 블룸?
그렇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잠깐만. 생각 좀 해 보자.”
이수와 하이엔은 침대에 나란히 걸터앉았다.
‘조이스 블룸?’
언젠가 꿨던 악몽 속에서 자신을 찾아왔던 소녀. 그녀는 분명 제 이름이 조이스 블룸이라고 했었다. 우연일까?
“나 잠깐 지하실 좀 다녀올게.”
“응.”
또 다른 차원문이 열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수는 지하실로 달려가 차원문을 살폈다.
차원문은 그대로였다.
“와… 뭐지?”
이수는 하이엔의 방으로 돌아갔다.
“하이엔. 살짝 내다 봐봐. 뭐가 보이는지.”
“응.”
하이엔이 차원문 앞에 섰다.
긴장한 표정이었다.
차원문 너머로 얼굴을 슬쩍 내미는 하이엔.
지켜보던 이수는 몸을 떨었다.
하이엔의 머리만 댕강 잘려 나간 모양새였다.
‘예전에 하이엔도 팔이 잘렸다며 기겁했었지.’
왜 그랬는지 이해가 간다.
고개를 다시 들인 하이엔이 이수를 응시했다. 상기 된 표정이었다.
“네 고향의 언어가 보여! 자동차랑 도로. 그리고 영등포역이라고 쓰여 있었어!”
“영등포역? 자세히 얘기해 봐.”
“그러니까 바로 앞에 길이 있고 자동차가 보이고. 빨강색이랑 초록색으로 된 마법등이 보였어. 길 건너편에 영등포역이라고 크게 적혀 있었고.”
그간 한글 공부 열심히 하더니.
보람이 있는 건가?
아니면 하이엔도 차원문 버프를 얻게 된 건가?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도 잠시.
‘근데 저 차원문이 나랑 같은 시간대에 열려 있는 건가? 만약 다른 시간대라면… 만날 수 없는 거잖아.’
“하이엔. 일단 옷부터 갈아입자.”
“응?”
“이 옷 입고 넘어갈 순 없잖아.”
“응!”
하이엔은 예전에 이수가 들여온 바지 정장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잘 들어. 빨간색 초록색 마법등이 보인다고 했지? 그거 신호등이거든? 그러니까 나가서 길 건너지 말고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어.”
“어쩌려고?”
“어딘지 알 것 같아. 내가 그쪽으로 갈게. 만약 운이 좋다면… 어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영등포역 근처는 번화가다.
그나마 인적이 드문 새벽 시간 접선을 시도하기로 했다.
***
새벽 2시.
이수는 택시를 타고 영등포역으로 향했다. 30분이 길게만 느껴졌다.
‘제발.’
하이엔과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왜 갑자기 차원문이 열렸는지.
조이스 블룸은 누구이며, 어떻게 이수의 꿈에 나타났으며, 하이엔에게 차원문을 열어주었는지.
의문투성이였지만 지금 중요한 건 딱 하나. 하이엔을 만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횡단보도 건너로 영등포역이 보이는 곳은 한 곳뿐이다.
“여기서 세워 주세요.”
이수는 택시에서 내려 곧바로 주변을 살폈다. 익숙한 옷가지가 보였다. 하이엔이었다.
“말도 안 돼.”
이수는 하이엔에게 다가갔다.
하이엔이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수?”
“말도 안 돼!”
이수는 하이엔을 끌어안았다.
하이엔이 품속에서 중얼거렸다.
“근데 너 원래 이렇게 생겼었나?”
“….”
두 사람은 택시를 타고 다시 성수동 집으로 이동했다. 택시 안에서는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택시 기사가 이상하게 생각할지도 모르니까.
택시에서 내린 하이엔은 우두커니 서서 이수를 바라보았다.
‘얼굴이 뭔가 다른데? 머리색도 다르고….’
이수는 차원문의 버프로 외모가 조금 변했던 터였다. 아주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지만, 이질감이 느껴질 만도 했다.
“이수 맞지?”
“이수 블룸 백작 맞으니까 자세한 건 들어가서 얘기하자.”
“응!”
“근데 한국말 할 줄 알아?”
“아니. 그냥 되는 것 같아.”
“다행이네.”
조이스 블룸은 차원문을 여는 주문식에 언어 습득 버프를 살짝 끼워 넣어 주었다. 차원문 마법사는 자연스레 언어를 습득하지만 다른 이들은 그렇지 못했다. 주문식에 따로 넣어 두어야 했다.
주문식 안에는 추가 능력뿐 아니라 제한 사항도 넣을 수 있었다. 즉, 이수의 차원문 주문식에는 외모 변형, 언어 습득 능력이 포함되어 있었고. 물건 이동에는 제한이 걸려 있는 셈이었다.
하이엔의 외모는 그대로였다.
은빛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
함께 돌아다니려면 준비물 몇 가지가 필요할 것 같았다.
“여기가 내 고향 집이야.”
“우와…”
하이엔은 홀린 듯 창가로 걸어갔다.
서울시의 야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공중에 떠 있는 기분이야.”
이수는 하이엔의 등 뒤로 가서 그녀를 살포시 안았다.
“진짜 어떻게 이런 일이 있지?”
항상 꿈꿔왔던 일이다.
하지만 진짜 현실이 되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이엔이 뒤돌아서서 이수를 바라보았다.
“네 고향에 관해 공부를 해 둬서 다행이야. 사진으로도 보고 잡지에서도 보고. 그래서 뭐랄까… 덜 무서운 것 같아.”
“앞으로 그럼 너도 이쪽 세계를 계속 오갈 수 있는 거야?”
“아니. 한 달. 딱 한 달이래.”
그럼 날짜를 잘 봐둬야지.
잘못했다간 하이엔이 이쪽 세계에 갇혀버릴 수도 있으니까.
“잠깐만 있어 봐.”
이수는 방에서 휴대폰을 들고나왔다.
“한 달이면 대충 30일. 불안하니까 최대 25일로 잡아야겠다.”
“나 이제 어떡해?”
“어떡하긴. 25일간 여기서 나랑 휴가를 보내야지!”
꿈인지 생시인지 누군가의 농간인지.
따지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주어진 시간은 딱 한 달.
최대한 알차게 시간을 보내자.
어찌 된 영문인지는 그 후에 따져도 충분하다.
‘고민한다고 해결되는 문제도 아니고.’
이수가 차원문의 주인이 된 지도 7년. 지금은 엘프와 마법이 있는 세계의 영주 아니던가. 처음 차원문이 열렸을 때보다 받아들이기 훨씬 수월했다.
“나 잠깐 가서 코르키한테 얘기 좀 하고 올게.”
“뭐라고?”
“적당히 둘러대야지.”
“음… 포탈을 타고 여행을 다녀온다고 해. 엘프 몇 명이랑 함께 갈 테니 걱정 말라고 전하고.”
이수는 ‘큽’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거짓말을 할 때면 늘 마음이 불편했는데. 이젠 하이엔이 공범이라니. 뭔가 재밌는 상황이었다.
“알았어. 곰방 다녀올게. 집 구경하고 있어.”
“응!”
이수가 떠나고 하이엔은 혼자 남겨졌다.
하이엔은 고개를 돌려 주변을 쭉 훑어보았다. 생소하면서도 익숙한 광경이었다.
‘이수가 보여준 사진이랑 똑같아.’
두근두근.
하이엔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방으로 직진했다.
‘이게 냉장고라고 했지?’
조심스레 냉장고 문을 연다.
하이엔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있다. 복숭아 맛 맥주!’
빠각!
꿀꺽꿀꺽.
하이엔은 캔맥주를 따서 단숨에 들이켰다.
“캬아!”
입안에서 톡 터지는 탄산에 하이엔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차가운 캔맥주를 손에 쥐고 탐방에 나선다.
‘화장실이 어디냐….’
방문을 하나하나 열어 보던 하이엔은 꿈에 그리던 그것! 비데와 마주했다.
‘그사이에 이수가 돌아오진 않겠지?’
문을 닫고 비데에 앉는다.
옷은 그대로 입은 채였다.
“우와우와! 따뜻햇!”
옆에 보니 버튼 여러 개가 정렬돼 있었다.
“탈취, 건조, 세정. 이쪽 사람들은 진짜 깨끗하구나?”
비데만 있다면!
시녀의 도움 없이도 편하게 용변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삑.
삐빅.
버튼을 조심스럽게 눌러본다.
“세정. 어떻게 세정이….”
푸슈웃!
이윽고 엉덩이에서 축축한 기분이 들었다.
“꺄아악!”
황급히 일어섰지만 늦었다.
바지는 소변을 지린 것처럼 젖어있었다.
똑똑.
똑똑!
설상가상으로 밖에서 이수가 문을 두드린다.
“하이엔! 괜찮아? 하이엔!”
“으응. 괜찮아!”
하이엔은 문을 열었다.
이수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질문했다.
“왜.”
“그게… 비데에 앉아봤다가 옷이 젖어버렸어.”
이수는 하이엔의 엉덩이를 슬쩍 살피곤 심각한 표정으로 얘기했다.
“다 큰 어른이 옷에다 쉬하면 안 되지!”
“야! 이씨!”
이수는 킥킥대며 드레스룸으로 튀었다. 하이엔도 엉거주춤한 자세로 이수를 뒤쫓았다.
“뭐야. 여기가 옷방이야?”
“응.”
“텅텅 비어 있잖아!”
“이쪽엔 잘 안 넘어오니까. 옷이 별로 필요 없거든.”
이수는 오버사이즈 티셔츠를 한 장 꺼내 하이엔에게 건네주었다.
“이걸로 갈아입어.”
“코르키는 뭐래?”
“그냥 청혼했고, 승낙했고, 그래서 단둘이 여행을 좀 해야겠다. 그랬더니 엄청 좋아하더라고.”
“다행이다.”
“우리 이만 자자. 그래야 내일 씬나게 놀지.”
“응.”
이수는 하이엔을 게스트룸으로 안내했다.
“여기서 자.”
“나… 딴 데서 자면 안 돼?”
“요놈요놈. 나랑 자고 싶었고만?”
장난 섞인 이수의 말에 하이엔이 정색했다.
“아, 아니? 저기 밖에 예쁜 풍경 보면서 자고 싶어서 그러는 것이다!”
“화내니까 더 수상하잖아.”
“아니라고!”
이수는 이부자리를 챙겨 거실로 나왔다. 통유리 앞에 토퍼를 깔고 이불을 정돈한다.
방에서 옷을 갈아입던 하이엔이 소리쳤다.
“이수! 옷이 너무 야하다! 좀 더 긴 원피스는 없느냐?!”
아 참.
깜빡했다.
이수는 다시 방으로 들어가 추리닝 바지도 한 벌 꺼내 주었다. 하이엔은 뭐가 그리 부끄러운지, 쪼그리고 앉아 헐렁한 티셔츠 안으로 맨다리를 숨겼다.
“이거 내 옷이라 많이 클 거야. 그러니까 대충 입고 바짓단을 접어 올려.”
“내가 입을 만한 옷은 없어?”
“나 혼자 사는 집에 여자 옷이 있다면 이상하지 않을까…?”
“…혹시 내가 올 줄 알고 숨긴 거 아냐?!”
의심 그득한 눈초리를 보내는 하이엔.
이수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뭔 소리야.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옷이나 갈아입으세요! 엉? 내일 같이 쇼핑하자. 알았지?”
“응.”
결국 하이엔은 무릎까지 내려오는 티셔츠에 바짓단을 돌돌 말아 올리곤 등장했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웠다.
“오구오구. 잘 어울리네.”
“놀리는 거야?”
“아니. 진짠데?”
하이엔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쪼르르 달려와 토퍼 위에 앉았다.
“고마워. 이부자리 펴 줘서.”
“오냐! 그럼 푹 자. 좋은 꿈 꾸고.”
“저기 있잖아.”
“응?”
“같이 과일 맥주 한 개씩만 마실까? 네 고향에 온 첫날이니까. 그러니까 기념하고 싶어서.”
“좋지.”
빈 깡통이 쌓여가고.
결국 두 사람은 거실에서 함께 잠들었다.
***
다음 날 아침.
이수는 일어나자마자 갈색 가발과 갈색 미용 렌즈를 주문했다.
업체에 직접 전화해 퀵배송을 부탁했으니, 하이엔이 일어나기 전에 받아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고급 승용차도 렌트해 두었다. 그래야 이동 중에도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을 테니까.
이수는 소파에 앉아 자고 있는 하이엔을 바라보았다.
‘살다 보니 별의별 일이 다 있다. 그치, 하이엔?’
하이엔은 점심 무렵 눈을 떴다.
그래봤자 고작 6시간이나 잤으려나?
동이 트고 나서야 잠들었으니까.
“굿모닝.”
이수는 암막 커튼을 걷었다.
눈 부신 햇살에 하이엔이 미간을 찌푸렸다.
“나 배고파. 속도 조금 아파.”
“얼른 씻고 나가서 해장 하자. 쇼핑도 하고. 콜?”
“응.”
이수는 하이엔을 안방 욕실로 데려갔다.
이쪽에는 욕조가 딸려 있었다. 아무래도 샤워기보단 욕조가 편할 테지.
“그럼 씻고 나와. 머리는 수건으로 감싸고. 내가 말려 줄 테니까. 이건 머리 감는 비누, 요건 몸 씻는 비누. 알겠지?”
“응.”
“치약은 칫솔에 짜 놓을게. 양치도 하고.”
하이엔은 생각보다 수월하게 샤워를 마쳤다.
그래도 아직은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이 어색했다.
이수는 드라이기로 하이엔의 머리카락을 뽀송뽀송하게 말려 주었다.
“이거 에르만으로 가져갈래.”
“드라이기? 이거 쓰려면 전기가 필요해. 에르만에서는 쓸 수 없는 물건이야.”
“히잉….”
“마법으로 만들면 되잖아. 왜 우리 여름에 시원한 바람 나오는 캡슐 있지? 그걸 따뜻한 바람으로 바꿔서 어떻게 하면 되지 않을까?”
“응! 울카노한테 얘기해 봐야지.”
가발로 은빛 모발을 감추고.
우여곡절 끝에 컬러 렌즈도 착용했다.
하이엔은 거울을 보며 싱긋 웃었다.
“갈색 가발 오랜만이다. 라우도렌에 살 때는 매일 썼는데. 나 어때?”
“예뻐.”
“그럼 우리 쇼핑해?”
“그러자.”
“너 여기서도 돈 많아?”
난데없는 질문에 이수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
“응. 나 여기서도 돈 많아.”
이수의 대답을 들은 하이엔은 굉장히 행복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