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enge Costs Interest RAW novel - Chapter (199)
복수에는 이자가 붙는다 외전 19화 <무엇이든 적당히>(199/200)
외전 19화 <무엇이든 적당히>
2024.02.15.
웰스는 예상대로 레본의 명소가 되었다. 예상대로 비비안의 공이 컸다.
웰스의 식단으로 바꾼 지 석 달 만에 그녀는 예전의 날씬했던 몸매를 되찾았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웰스는 비 오는 날, 시인과 화가들의 주된 모임 장소가 되었다.
“비가 오는 날은 손님들이 백화점 개점 전에 줄을 서 있습니다.”
짐 베이커는 그런 광경이 신기했던 모양인지 레아에게 열변을 토했다.
하지만 레아는 유독 날씨가 흐린 날에 손님이 몰리는 이유가 이해됐다.
커다란 통창 밖으로 흩날리는 빗방울과 회색빛의 도시, 우산을 쓴 채 거리를 걷는 사람들은… 운치 있는 풍경이니까.
“사장님, 여기 준비됐습니다.”
짐 베이커가 황궁으로 보낼 음식을 포장하여 가져왔다.
오늘은 레아가 테런과 함께 황궁에 가는 날이기에 직접 비비안에게 가져다줄 참이다. 때마침 테런도 도착했다.
“황후께서 자신감을 되찾아서 다행이야.”
테런은 레아의 손에 든 음식을 가져간 대신 제 신문을 그녀의 손에 전해 주었다. 레아는 바로 신문을 펼쳐 비비안의 기사를 읽었다.
‘비비안 황후, 예전의 아름다움을 되찾다?’
그녀 덕분에 웰스의 판매율이 높아져서 좋긴 하지만 마음 한편으론 씁쓸하기도 했다.
황후는 감히 살찔 자유조차 없는 존재라는 반증 같았기 때문이다. 세상의 눈이 매 순간 궁으로 향하고 있다. 그것이 황족과 유명인들의 운명일 테지.
“이번에 확실히 결판을 낼 거다.”
궁으로 가는 차 안에서 테런은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덕분에 레아는 상념에서 빠져나올 수가 있었다.
“무슨 결판이요?”
“곧 로메리카 대통령 부부와 상공회의소 회장이 방문하지 않나? 환영 꽃다발을 누가 전할지 결판을 내야지.”
“그런 것을 누구와 결판을 내요?”
“누구긴, 황제지.”
“아……!”
보통 이런 행사가 있으면 엄마들이 치맛바람을 날리며 요란을 떤다고 하던데. 테런과 황제는 그 반대였다.
자존심 센 두 남자가 아주 오랫동안 팽팽하게 줄다리기하고 있으니까.
레아는 갑자기 두통이 밀려왔다. 테런이 이토록 열성적인 아버지일 줄이야.
레아는 황궁에 도착하자마자 황후궁으로 재빨리 움직였다.
한데 그 와중에도 테런의 근엄한 표정이 너무 웃겨서 하마터면 소리 내 웃을 뻔했다.
모르는 이가 본다면 나라에 우환이 생겨 황제와 급한 논의를 하러 온 줄 알겠지.
‘황제 폐하와는 독대를 하겠지. 다행이야.’
황제와 옥신각신하는 광경을 두고 보기는 정말 힘들 성싶었다. 한데 시종장이 달려왔다.
“쿠르투아 공작님, 공작 부인, 폐하께서 귀빈실로 모시라는 명이 있으셨습니다.”
“혹시 다 같이……요?”
“그렇습니다, 공작 부인.”
‘젠장맞을!’
하마터면 입 밖으로 욕을 내뱉을 뻔했다.
로메리카 대통령이 대단한 사람인 것은 알겠지만, 겨우 5초 정도 걸리는 꽃다발 주는 일로 이렇게 다툴 일인가. 상상만 해도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 * *
예상대로 귀빈실은 소란스러웠다.
우선 네 명의 아이들이 다 모여서 떠드는 바람에 귀가 다 먹먹할 지경이었다.
“카를, 벨라! 셰익스피어의 희곡 중의 하나를 골라서 독후감을 써 오라고 했는데, 다했느냐?”
황제 칼의 엄한 목소리에 황자와 공주는 기가 고개를 푹 숙였다.
이 모습을 본 테런은 미세하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세상이 바뀌었는데 셰익스피어라니! 쯧쯧.’
테런은 나직하게 혀를 찼다.
“킬리언, 일레나!”
“네, 아버지.”
테런의 부름에 두 아이는 공손히 대답하며 그에게로 다가왔다.
“로메리카의 대통령은 어떤 분이지?”
“로메리카 10대 대통령으로서 과학자 출신이며 노예 해방이란 큰 업적을 세우신 분입니다.”
킬리언이 조곤조곤 말하자, 황제의 얼굴이 굳었다.
“그럼, 이번에는 일레나가 말해 보렴. 로메리카의 대통령 부부가 우리 루베크 제국을 방문하는 목적이 무엇인지 말이야.”
“로메리카는 정치, 산업, 의학, 사회 등은 매우 발달했으나 문화나 예술 특히 역사가 짧은 탓에 교육에 공을 들이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 부분을 탐방하러 오시는 게 아닐까요?”
“하! 우리 킬리언과 일레나는 누가 가르쳐 주지도 않았는데도 이렇게 스스로 찾아서 공부합니다.”
테런은 황제가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비비안이 레아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진짜예요?”
“그럴 리가요? 테런이 애들을 얼마나 잡았게요.”
“칼도 요즘 매일 애들을 잡고 난리랍니다.”
두 여자는 남편들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왜 저렇게들 로메리카 대통령 부부한테 제 아이들을 선뵈지 못해서 안달일까?
레아는 진심으로 두 남자의 진짜 속내가 궁금했다.
“왜들 저러는 걸까요?”
“쓸데없는 경쟁심이에요.”
“단순한 경쟁심이라고요?”
하긴 테런은 자신이 가진 지위를 내세우거나 체면을 차리는 남자는 아니었다.
또한 명예를 위해 행동에 제약을 두는 남자도 아니었다. 하지만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긴 하지.
황제가 로열 로이스를 샀다는 말에 그날 밤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울 정도였으니까. 아무래도 이 영양가 없는 경쟁을 끝내야 할 듯싶었다.
“저기, 제게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레아의 말에 테런과 칼의 대화가 뚝 끊겼다. 두 남자는 일제히 반짝이는 눈으로 레아를 보았다.
“카를 황자님과 일레나와 한 쌍, 킬리언과 벨라 공주님과 한 쌍. 이렇게 나누는 건 어때요?”
“어머! 너무 좋네. 황실과 귀족의 화합을 과시할 수도 있겠어요.”
비비안이 곁에서 호응해 주는 바람에 테런과 칼은 토를 달지 못했다.
테런도 레아의 의견이 마음에 드는지 고개를 끄덕였고 칼은 비비안의 도끼눈에 어쩔 수 없이 수긍했다.
이렇게 로메리카 대통령에게 꽃다발을 주는 아주 단순한 행사 하나가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완벽하고 깔끔하게 매듭지어진 건 아닌 듯했다.
그때 비비안은 레아를 향해 윙크했다. 이번에는 남자들의 속을 뒤집어 놓자는 뜻처럼 전해졌다.
“공작 부인, 내가 애를 넷이나 낳았더니 피부 탄력이 떨어졌어요. 이 일을 어쩌죠?”
“저도 마찬가지예요. 황후님.”
“내가 아는 귀부인은 남편이 변한 아내의 모습에 실망하여 바람이 났대요.”
“어머! 너무 끔찍한 일이네요.”
레아와 비비안의 대화에 테런과 칼의 얼굴이 바짝 굳었다.
언제 아이들의 일로 투덕거렸냐는 듯이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황후님, 사라한테 들은 얘기인데 뱀의 독으로 처진 피부를 탱탱하게 만드는 시술이 있답니다.”
“그래요? 나도 아주 신박한 미용법을 들은 게 있어요. 늪에 사는 거머리를 잡아서 얼굴에 올려놓으면 그것이 피부에 나쁜 피만 쏙쏙 뽑아 먹는대요. 좀 징그럽긴 하지만 한번 하고 나면 십 년은 젊어진대요.”
“황후님, 우리도 당장 할까요? 사람 일은 아무도 모르잖아요. 우리가 살찌고 늙으면…….”
레아와 비비안의 시선이 남자들에게로 향하자 테런과 칼은 창백한 얼굴로 웃었다.
두 남자는 여자들의 대화가 한심하다고 여겼는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거세게 도리질했다.
“비과학적이고.”
칼이 말문을 떼자 테런이 다리를 꼬며 답했다.
“야만적입니다.”
“아잉! 테런, 젊음과 아름다움에는 혹독한 대가가 필요한 법이잖아요.”
“난 허락 못 해. 지금도 아주 아름다워.”
“비비안도 쓸데없는 데 시간 쓰지 말도록 해.”
“아, 단순히 화동 노릇을 하는 것일 뿐인데 일국의 황제와 제1 귀족이 나서서 신경전을 벌이는 건 쓸데 있는 일이고 예뻐지려는 여자의 욕심은 야만적인 겁니까?”
비비안이 정곡을 찌르자 두 남자는 그제야 헛기침하며 말문을 닫았다.
“황후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여자들의 욕망은 끝이 없죠. 그러니 무엇이든 적당히 해야 하는 겁니다.”
레아도 비비안의 편을 도왔다.
“황후님, 염려 마셔요. 폐하와 공작은 위엄이 넘치시고 품위가 있으시니, 이번 귀빈 접대도 잘 해내실 겁니다.”
쐐기를 박는 말에 모두 숙연한 분위기였다.
속된 말로 그만 나대라는 일종의 경고랄까.
테런과 칼은 두 여자의 욱하는 성질을 모르지 않기에 여기서 멈춰야 함을 눈치채고도 남았을 것이다.
* * *
테런은 공작저로 돌아가는 내내 레아의 손을 잡은 채 놓지 않았다.
“사실이야?”
그가 나직한 어조로 물었다.
“뭐가요?”
“나는 그레이스가 어떤 모습이어도 상관없다는 소리야. 바람피울 마음은 전혀 없다는 말이지.”
그 복잡한 와중에도 자신이 했던 말이 마음에 남았던 모양이다. 정말로 테런이 그럴 것 같아서 했던 말이 결코 아닌 것을.
“사랑은 변하지 않아도 사람은 바뀔 수 있잖아요.”
“그레이스는 그런가? 내가 살찌고 늙으면 바뀔 수도 있단 소리야?”
“아뇨. 테런은 여전히 근사해요. 소름이 돋을 정도로.”
레아의 말에 테런은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뭐야, 이 남자 또 나한테 반한 거야?’
이러면 사람 가슴이 마구 두근거리는데……. 이왕 칭찬한 김에 불 한번 당겨 볼까.
“당신이 날 바라보면서 걸어올 때 뭐랄까, 당신은 마왕 같아요.”
‘으……! 마왕이라니, 너무 나갔나.’
레아는 꾹 참으며 말을 이어 갔다. 그래도 테런의 기분을 띄워 주려고 시작한 것이니 확실하게 하자 싶었다.
“사람을 압도하는 강한 기운에 난 당신한테 사로잡힌 한 마리의 작은 새…… 같달까요?”
‘미쳤어. 이런 유치한 말을 남발하고……! 아니지, 처음이자 마지막이니까.’
비위에 안 맞아도 꾹 참고해야지. 결국 내가 테런을 미치도록 사랑하는 건 변함없으니. 이런 민망한 상황을 무마할 방법은 딱 하나밖에 없다.
테런이 레아에게 뜨겁게 입 맞췄다. 역시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이렇게 서로의 숨결에 파묻는 게 현명했다.
테런이 지쳐 떨어져 나가려 할 때마다 레아는 그의 목덜미를 잡아끌었다. 유치한 말장난은 여기까지만.
그렇게 레아는 공작저에 도착할 때까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어느 때는 백 마디 말보다 기나긴 입맞춤이 즉효일 때가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