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writing Filmography RAW novel - Chapter 74
73화. 격세지감이네요
『빌딩 숲』의 제작진과 배우들 중에서 안시현의 변화를 가장 먼저 눈치챈 건 바로 진광욱이었다.
공개 러브콜을 할 정도로 안시현의 연기에 관심이 많은 그였기에, 촬영이 시작되자마자 안시현이 연기 스타일에 변화를 줬다는 걸 대번에 파악한 것이다.
“후배님, 변신을 시도했네요?”
“미래를 위해 과감히 도전해 봤습니다. 제게 맞는 옷인지는 아직까지 잘 모르겠지만요.”
“잘 어울려 보여요. 공개 러브콜을 할 당시, 제가 기대했던 모습이기도 하고요. 기존의 연기 스타일이 정장이었다면, 지금은 편안한 트레이닝복 차림 같아요.”
“잘 어울린다니까 다행이네요.”
『빌딩 숲』 캐스팅 라인이 공개될 당시.
언론과 대중들은 안시현과 김진모가 맡은 배역을 보고서 의아함을 드러냈다. 일부 언론에서는 표기를 잘못한 게 아니냐고 문의까지 할 정도였다.
대학 졸업 후 3년 동안 취업에 실패하다 어렵사리 중소기업에 입사한 마케팅팀 계약직 직원이자, 매사에 낙천적이면서 성공을 위해 노력하는 이 시대의 평범한 청년 유성수.
서울대 출신에 완벽주의자 성향을 지녔으며, 다른 사람에게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의 보유자이자, 신입 사원임에도 때때로 좌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보여 주는 최민.
『빌딩 숲』 이전까지의 필모그래피만 놓고 보면 안시현은 최민이, 김진모는 유성수가 상대적으로 어울리는 배역인 게 사실이었다.
그럼에도 캐스팅은 반대로 됐다.
도박을 한 게 아닌, 최영만 작가와 진광욱의 냉정한 계산 아래 이루어진 캐스팅이었다.
김진석 대표는 현역 시절 어떤 배역이든 모두 자신의 스타일로 소화하며 많은 배우들의 존경을 받았다. 아버지의 연기 재능을 그대로 물려받은 김진모는, 데뷔 이후 줄곧 모든 캐릭터를 자신만의 스타일로 소화하며 호평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덕분에 김진모는 유성수와 최민, 둘 중 어느 배역을 맡더라도 잘할 거라는 확고한 믿음이 존재했다.
문제는 안시현이었다.
『너와 나의 시간』막바지에 보여 준 연기 변신 시도가 성공한다고 가정했을 때, 최민보다는 유성수 쪽이 안시현에게 잘 어울리는 옷이라는 판단이 섰다.
게다가 데뷔 이후 줄곧 전혀 다른 스타일의 캐릭터만을 소화해 온 안시현이, 정영빈과 어느 정도 이미지가 겹치는 최민을 선택할 리가 없다고 봤다.
실제로 안시현은 유성수가 아닌 최민을 맡아야 한다면 캐스팅을 거절할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유성수 캐릭터를 제대로 소화하려면 연기 변신을 시도해야 하는 것과 별개로, 정영빈과 이미지가 겹치는 최민 역을 차기작에서 바로 소화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다행히 안시현의 연기 변신은 성공적이었다.
후배 배우들에 대해 냉정한 평가를 내리기로 유명한 진광욱으로부터 새로운 스타일이 잘 어울린다고 칭찬을 받았으니 말 다한 거였다.
두 번째로 안시현의 변화를 눈치챈 건 김진모였다.
“오. 대본 리딩 때랑 분위기가 전혀 다른 걸 보니 작정하고 준비했나 보네? 24부작 주연 한번 해 보고 나니까 뭔가 느끼는 게 있었나 보다?”
“많이 느꼈지. 드라마 주연 맡는 게 보통 일이 아니더라고. 진짜 죽는 줄 알았었다.”
“이하동문. 체력 관리 잘하자. 연기를 못해서 욕먹는 건 내가 못한 거라 그렇다 칠 수 있는데, 체력 저하나 메소드의 후유증으로 내 연기를 제대로 못 보여 줘서 욕먹으면 너무 억울하잖아.”
“그런 꼴은 죽어도 못 보지.”
드라마 초반에는 준수한 연기력을 보여 주다가 후반에 가서 무너지는 케이스는 생각보다 많다.
체력 저하 및 다른 요인들로 인해서 배우가 연기에 제대로 집중을 못하면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굳이 멀리서 사례를 찾을 필요조차 없었다.
불과 몇 달 전, 『사랑하고 싶어』의 내부 논란과 시청률 저하의 영향을 받아 후반부에 연기력이 무너졌던 류성웅의 사례가 있지 않던가.
안시현은 그런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고 싶었다.
그래서 『너와 나의 시간』의 촬영을 마무리한 이후 몇 개월 동안 연기를 내려놓고서 푹 쉬었고, 6월이 되어서야 연기 변신을 시도한 것이었다.
메소드 연기의 후유증을 최소화하며 최선의 컨디션으로 『빌딩 숲』 촬영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워낙 대본이 좋은 작품이라 애착이 간 게 사실이다.
게다가 『빌딩 숲』은…….
‘입대하기 전 마지막 작품이니, 대중들에게 잊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야지.’
안시현과 김진모의 군 입대 전, 마지막으로 출연하는 작품이기도 했다.
* * *
안시현은 『형아, 동생』과 『너와 나의 시간』을 통해, 김진모는 『너를 부르다』의 성공으로 인해 주연 배우의 반열에 올라섰다.
『빌딩 숲』이 주연 배우들의 연기력 문제로 망하는 게 아닌 이상에야 주연 배우의 반열에서 다시 내려갈 일은 없다고 봐야 한다.
『빌딩 숲』에 캐스팅 된 이후.
안시현은 군 입대 문제를 놓고 고민에 빠졌다.
‘굳이 회귀 전처럼 나이를 꽉 채우고 나서 입대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장기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빨리 다녀오는 게 이득일 수도 있어.’
회귀 전의 안시현은 20대 막바지에야 김진모와 함께 입대를 했었다. 연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20대 내내 연기에 매달리며, 가능한 방법을 모두 동원해 최후의 최후까지 병역 의무를 미뤘었다.
하지만 이번 생에는 달랐다.
일찌감치 주연 배우의 반열에 올라섰기에, 좀 더 유연하게 병역 의무에 대해 고민할 수가 있게 됐다.
게다가 안시현은 병역 의무를 일종의 휴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2년 넘게 연기와 거리를 둔 이후, 다시 돌아와서 열정을 불태우는 그림을 그렸다.
실제로 병역 의무 이후 더욱 성숙해진 연기를 보여 주는 케이스는 제법 많다.
물론…….
‘아, 진짜 더럽게 가기 싫다.’
두 번째 입대를 해야 하는 안시현의 입장에선 진심으로 가고 싶지 않았지만 말이다.
솔직히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안시현의 사지가 너무 튼튼했다. 2급이나 3급도 아닌 1급 판정을 받은 마당에 어떤 방법을 찾아내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게다가 병역 논란으로 커리어에 흠집을 내고 싶은 생각 또한 없었고 말이다.
즐기는 것까지는 못해도, 피할 수 없으니 가장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기로 했다.
김진모와도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눈 결과.
“『빌딩 숲』 끝나고 몇 달 쉬다가 입대하자. 4, 5월 정도면 적절하지 않으려나?”
“괜찮네. 역시 빨리 해결하는 게 최선이겠지?”
“어차피 가야 할 군대, 최대한 빨리 다녀오는 게 좋지 않겠어? 2년 휴식기 가지면서 차분하게 차기작 준비한다고 생각하자.”
“오케이. 접수 완료.”
JM액터스와의 상의 끝에 안시현과 김진모는 2002년 4월에 입대를 확정 지었다.
따라서 이변이 없는 한 『빌딩 숲』이 입대 전 안시현과 김진모의 마지막 출연 작품이었다.
안시현이 작정하고 유성수 캐릭터를 구축하고 연기 변화를 시도한 건, 유종의 미를 거두고 입대를 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이를 위해 안시현은 촬영장 분위기를 좋게 유지하는 것에도 꽤나 신경을 썼다.
출연 비중이 큰 주연 배역을 맡았다는 건 그만큼 촬영장에 머무는 시간 또한 상대적으로 많다는 이야기다. 이들이 어떤 행동을 보이느냐에 따라 촬영장의 분위기가 결정되기 마련이다.
안시현은 다른 배우들과 무난하게 관계를 유지, 분위기를 띄우기보다는 해치지 않는 데에 집중했다.
반면 김진모는 특유의 친화력을 앞세워 분위기 메이커 역할을 자처, 대부분의 배우들과 빠르게 친해졌다.
단 한 사람.
류성웅을 제외하고 말이다.
대놓고 류성웅과 거리를 둔 건 아니다. 다만 다른 배우들을 대할 때와 달리 사근사근하지 않았고, 촬영을 위해 필요한 말만을 하는 정도였다.
안시현은 그런 김진모의 태도를 이해했다.
『나는 간첩입니다』 촬영 당시 선배 배우들이 없을 때만 시비를 거는 류성웅으로 인해 김진모는 적잖게 스트레스를 받았었다.
사과를 했다고 그때의 기억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안시현은 류성웅의 사과를 받아 줬지만, 김진모는 사과를 받아 주지 않았을 뿐이다. 촬영장에서 싫은 기색을 드러내지 않는 게 김진모가 해 줄 수 있는 최선이었다.
‘촬영 분위기를 해치는 건 아니니 상관없겠지. 모든 배우가 친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아이러니한 사실은, 김진모 다음으로 촬영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노력한 건 류성웅이란 것이었다.
특히나 류성웅은 단역 배우는 물론이거니와 엑스트라들까지 챙기는 훈훈한 모습을 수차례 보여 줬다. 선배 배우들 앞에서만 착한 척, 예의 바른 척 하던 과거와는 확실히 달라진 게 눈에 띄었다.
김진모는 그런 류성웅의 모습을 볼 때마다 진심인지 아닌지 헷갈려하는 눈치였지만 말이다.
‘촬영 다 끝나기 전에, 친해질 수 있으려나?’
* * *
11월 첫째 주.
8화의 촬영에 막 돌입한 시점에서, 『빌딩 숲』의 제작 발표회가 열리게 됐다.
제작 발표회 30분 전.
안시현이 개인 대기실에서 최창국 PD와 8화의 몇몇 신과 관련해 대화를 나누던 중, 한 스태프가 문을 열고서 고개만 살짝 들이민 채로 말했다.
“현재 81명 와 있습니다. 도합 125명이 참석할 예정입니다, 선배님.”
“많이도 오네. 준비 잘 해야겠다.”
“배우 분들 예상 질문 리스트 숙지 다 끝났습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아. 식당 예약도 방금 전에 했습니다.”
“할 거 다 했으면 좀 쉬어. 너 어제도 나랑 편집실에서 밤 샜잖아. 오늘 야간 촬영은 빠져.”
“아…… 그럼 푹 쉬고 아침 일찍 출근하겠습니다.”
“그래. 고생했다.”
할 말을 모두 끝마친 스태프가 문을 닫은 뒤, 안시현과 최창국 PD가 시선을 마주했다.
“격세지감이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11명의 기자 앞에서 제작 발표회를 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년도 더 된 일이네요.”
“그때는 참…….”
“분위기가 가라앉다 못해 맨틀 뚫고 들어가려고 했었죠. 박국영 선배님이 분위기를 띄워주지 않으셨다면 처참했을 겁니다.”
두 사람은 『너와 나의 시간』의 제작 발표회를 떠올렸다. 11명의 기자들 앞에서 제작 발표회를 했던, 철저하게 외면을 받았던 당시를 기억하니 절로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그때의 서러움을 있었기에 제작진과 배우들이 한데 뭉쳐서 『너와 나의 시간』을 성공시킬 수 있었다.
물론 두 번 겪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번에는 겪을 가능성이 없기도 했다.
‘캐스팅라인을 떠나서, MBS에서 작정하고 밀어주는데 기자들이 몰리지 않는 게 이상한 거지.’
MBS에서 『빌딩 숲』의 방영 2주 전부터 예고편을 광고하며 작정하고서 밀어주는 중이었고, 제작비가 부족하면 얼마든지 편성할 테니 최고의 결과물만 만들어 내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 마당이다.
기자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오히려 그게 비정상인 상황이 조성됐다.
그렇게 시작된 제작 발표회.
기자들로부터 첫 질문을 받은 건 안시현이었다.
“가장 먼저 안시현 배우님께 묻겠습니다. 『빌딩 숲』은 『너와 나의 시간』의 종영 이후 약 1년여만의 복귀작입니다. 방영 전부터 몇몇 인터뷰를 통해 작품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고 계신데요. 안시현 배우님은 『빌딩 숲』의 최고 시청률을 어느 정도로 예상하고 계신지 궁금합니다.”
“음. 기자님은 어느 정도로 예상하시나요?”
“캐스팅라인과 제작비 규모로 보면, 동시간대 1위는 무조건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 생각도 기자님과 같습니다. 구체적인 수치를 말하자면 현실적으로는 40%, 희망적으로는 50%까지도 노리고 있습니다.”
『너와 나의 시간』 제작 발표회 당시.
안시현이 최고 시청률 40%를 이야기했을 때 몇몇 기자들은 대놓고 비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지금은 그 누구도 비웃지 않았다. 심지어 일부 기자들은 안시현의 장밋빛 전망에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기까지 했다.
화려하고 탄탄한 캐스팅 라인, 넉넉한 제작비, 연출력을 인정받은 PD, 동시간대 KNC와 STS 월화드라마의 시청률 부진까지.
모든 조건이 『빌딩 숲』을 향해 웃어 주고 있었다.
예고편에서 보여 준 기대감을 충족시킬 수만 있다면, 16부작임에도 최고 시청률 40% 돌파는 충분히 가능할 거라고 전망했다.
심지어 몇몇 기자들은 그 이상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50%도 노려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