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guish Guard in a Medieval Fantasy RAW novel - Chapter (253)
중세 판타지 속 망나니 경비조장-253화(253/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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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론 개XX
짝짝짝짝!
한스는 무너지는 신을 보며, 남은 손으로 거칠게 제 어깨를 두드렸다.
기침이 연신 쏟아졌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열심히 두드렸다.
아론이 보여준 건 한스의 기대 그 이상이었다.
혼자서 위선에게 향했던 것도, 그를 위해 오만이 내려온 것도, 결국 위선을 잡는 것까지-, 어느 하나 기대를 저버리는 것이 없었다.
“끄윽-.”
옆에서 공기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죽음의 기사가 황실 기사 간부의 목을 밟고 있었다. 그 주변으로 시체가 즐비했다.
한스는 아론을 돕는 방법 중 늘 그렇듯 최선의 수를 선택했다.
흑마법사들이 만든 죽음의 기사를 챙겼다. 사활을 걸었던 건지 운명이 인도한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죽음의 기사는 역작이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었다.
거기에 핸드릭스의 시체를 먹이고, 붉은 재앙이 있던 곳에서 주워온 사도까지 먹였다. 이것저것 다 쑤셔 넣으면서 조금 고장 난 듯했지만, 한스의 고려 대상은 아니었다.
결국, 꽤··· 아니, 굉장히 쓸만한 죽음의 기사가 탄생했고, 그를 이용하여 황제의 친위대를 처리했다.
꽤 힘든 전투였다. 위선이 일어난 순간부터 예언이 전부 어그러진 터라, 설레는 긴장으로 가득한 짜릿한 시간이었다.
여하튼, 아론이 황제에 도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고, 이내 만족할 만한··· 아니, 그를 가뿐히 뛰어넘는 짜릿함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때, 붉은 피와 살점 사이로 떨어지는 아론이 보였다. 힘을 전부 사용한 듯 거칠게 떨어지고 있었다.
한스는 잠시 죽음의 기사를 응시했다. 처음에는 놈이 아론에 대한 살의가 짙다고 생각했지만, 놈은 아론을 죽이고 싶어 하는 것 같지 않았다.
어떻게 하다 보니 죽음의 기사 안에 아론에 관한 것들이 잔뜩 들어간 모양새가 됐다.
그런 둘을 마주하게 하면, 아론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또 어떤 선택을 할까.
이미 마지막에 도달한 건 알고 있었다만, 욕심을 부리는 건 어쩔 수 없는 본능이었다.
한스는 죽음의 기사를 챙기고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떨어지던 이들이 순간 멈췄다. 단순히 아론이라면 이렇게 했을 거라 생각했기에 행한 일이었다.
고대 마법을 연달아 사용한 탓에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인가.
한스는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었다.
다시 손가락을 튕겼다.
그에 둘이 사라졌고-.
수십 구의 시체만 덩그러니 남았다.
***
신이 사라지자, 그를 이루고 있던 것들이 힘을 잃고 떨어졌다.
그를 이루고 있던 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떨어졌다.
그나마 신이 눕혀진 상태였기에 다행이었다만, 그래도 위험한 건 매한가지였다.
그때, 떨어지던 이들이 전부 움직임을 멈췄다. 아주 찰나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충격이 분산됐다.
이내 다시 떨어지며 뒤엉키고 비명이 터져 나왔다.
뒤쪽에서 밝은 빛이 다시금 쏟아졌다.
브라이튼이었다. 브라이튼은 전보다 더욱 밝아진 빛을 가득 뿌리며 달려갔다.
무리하는 듯 얼굴의 핏줄이 터지고 몸이 바들바들 떨렸지만, 기도를 멈추지 않았다.
다른 사제들도 서둘러 그를 따라 기도를 시작했다.
수도로 향하기 전, 브라이튼에게 예배라는 이름으로 받았던 특훈이 빛을 발했다.
브라이튼에게서 시작된 창연한 하얀 빛이 사제들을 타면서 넓게 퍼졌다.
그렇게 이어지며 덩치를 부풀린 빛은 그 상대를 가리지 않고 모두를 포용했다.
제국군이든, 반란군이든 상관없이 모두에게 깃들었다.
빛에 닿은 이들의 상처가 아물기 시작했다.
“···기적.”
누군가 중얼거린 말이 점차 넓게 퍼졌다.
방금까지 그 끔찍한 신과 맞서던 상황인 터라, 그 간극이 더욱 크게 와닿았다.
이내 성자라는 단어가 입에서 입으로 옮겨갔다.
“일단! 대피가 우선입니다! 자칫 큰일 날 수도 있으니, 다들 붙어서 사람들을 꺼냅시다! 기사- 아델라-를 따르시오!”
그때, 금발의 여기사가 갑자기 우렁차게 소리치며 뛰어나갔다.
그 외침에 정신을 차린 이들이 목소리를 더욱 높였다. 각자 거친 언어로 명령을 하달했다. 겹쳐진 이들을 구하라고-.
정신을 차린 제국군도, 방금까지 검을 겨누던 반란군도 다들 들고 있던 무기를 던지고 엉킨 이들에게 향했다.
어느새 다가온 마법사들까지 합세하자 상황이 한결 수월하게 풀렸다.
특히 그중에서 보라 머리의 여자아이가 발군이었다. 아이의 손짓에 사람들 수십씩 공중으로 떠올랐다.
다소 거칠었지만, 상황이 급한 터라 어쩔 수 없는 듯했다.
그렇게 모두가 열을 올릴 때, 오히려 그들을 밟고 전진하는 이가 있었다.
“조안나! 아무리 갑옷을 벗었다고 해도 사람을 막 밟고 다니면···.”
조안나는 조헬리아의 말을 무시하면서 제일 안쪽으로 향했다.
아까 신이 무너지는 순간, 조안나는 언뜻 아론을 봤다.
아론이 저기에 깔린다고 죽을 것 같지 않았지만, 일단 아론부터 찾을 생각이었다.
조안나는 거치적거리는 이들을 뒤쪽으로 던졌다.
“조안나! 사람을 그렇게 던지면······ 받네?”
뒤쪽을 흘낏 본 조헬리아가 조안나를 도왔다. 사람을 계속해서 던졌다. 도중에 도망가는 이들도 있었지만, 잡아서 던졌다.
그렇게 계속 파고들었다.
팔이 움직이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찾았지만-.
아론은 없었다.
승리했다-!
뒤쪽에서 뒤늦은 환호가 터져 흘렀다.
조안나는 허전한 바닥을 보면서 입술을 씹었다.
***
···음.
나는 뻐근함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다가 마주한 모습에 작게 침음성을 흘렸다.
위선을 잡았으니,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그리 대단한 걸 기대한 건 아니었다만-.
그래도 살기를 줄기줄기 뻗어대는 검은색 기사는 좀 아니지 않은가.
‘체형이 낯익은데.’
그 덩치가 굉장히 익숙했다. 어디서 본 것처럼-.
더불어 그 풍기는 기운이 만만치 않았다.
왜 저런 게 있단 말인가. 위선이 마지막 수를 숨겨둔 건가. 참 좆 같은 놈이었다.
욕과는 별개로 놈을 살피면서 내 몸을 확인했다. 의외로 몸 상태는 좋았다. 누가 치료라도 해준 것처럼 멀끔했다.
다만 업이 하나도 없었다.
– 네가 그렇게 퍼부었는데, 남기를 원하나?
책망하는 오만의 목소리에 작게 혀를 찼다. 속이 좁은 놈이었다.
그에 혀를 찼다. 만약 저놈이 기사에다가 오러를 다룬다면-.
‘···이제 오러는 못 다루지 않나?’
오러의 중심인 위선을 제꼈으니, 아마 오러를 사용 못 할 것이다.
심지어 내 바로 앞에 검까지 있었다. 마치 집으라는 것처럼 다소곳하게 놓여 있었다.
톡톡. 나는 놈을 응시하며 칼자루를 잡았다. 놈은 막지 않았다.
그때, 옆에서 기침 소리가 났다. 그에 고개를 돌리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한스였다.
잘생긴 얼굴이 시체처럼 새하얗게 질려 있었고, 입가에서는 붉은 피가 줄줄 흘렀다. 숨소리도 미미했다.
‘곧 죽겠군.’
뭘 했는지 모르겠지만,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모습이었다.
놈은 덜덜 떨면서 고개를 들어 나를 응시했다. 어울리지 않게 눈이 또렷하고 반짝였다.
캐서딕에서도 대뜸 공간 이동으로 나타났다고 하더니, 놈이 나를 이곳으로 데려온 듯했다.
한스가 입을 달싹거릴 때, 돌연 옆에서 서늘한 감각이 느껴졌다.
이미 대비하고 있던 나는 검을 돌려 그를 받았다.
가볍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오러가 없으니 쉬울 것이라 짐작했다. 그런데 놈의 검이 내 예상과 달랐다.
단단하고 피 냄새가 가득 풍기는 검이었다. 철저하게 실용적인 검-. 낯익은 검이었다.
“에단.”
정체를 깨달은 나는 입술을 씹었다.
지옥에서 기다리겠다더니-, 인내심이 부족한 듯했다. 아니면 이곳이 지옥이거나.
주변에 이해 못 할 언어로 가득했지만, 지옥처럼 보이지 않았다. 위선의 내부에 있던 터라 오히려 천국처럼 느껴졌다.
거칠어진 에단의 검이 대답을 대신 했다.
검을 나눌수록 확신이 들었다. 놈은 에단이었다.
어찌 에단이 저기 있단 말인가.
다만, 사도에 먹혔던 검의 주인을 생각해보면 마냥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선례가 있었다.
어찌 됐건, 에단이 다시금 나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그래, 한 번으로는 부족하지.’
나는 텁텁한 혼잣말을 하며 검을 받았다. 죄책감이 엄습했지만, 그렇다고 죽어줄 순 없었다.
놈의 검이 빠르게 따라붙으며 더욱 날카로워졌다.
언제 봐도 놀라운 재능이었다. 간단히 천재라는 단어가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놈.
다만, 검의 주인도 제꼈던 나였다.
아무리 에단의 재능이 뛰어나도 이제는 줄일 수 없는 간극이 있었다.
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에, 놈의 검을 차례로 받아넘겼다.
“지옥에서 기다리겠다더니-. 성질이 급하군.”
대화를 시도했지만, 놈은 묵묵히 검을 움직일 뿐이었다.
그 사이에 놈의 검이 계속해서 성장했지만, 내게 닿진 못했다.
“이렇게 있으니 옛 생각이 나는군.”
나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원래도 놈은 나를 이기지 못했다.
그 성장 속도가 굉장히 빨랐기에, 마지막에는 거의 질 뻔했다만-.
“너는 검이 너무 고집스러워.”
제국의 것을 조금이라도 받아들이면 나을 텐데, 비쟌트로의 것만을 고집하는 게 놈의 족쇄였다.
놈은 매몰되는 쪽이었고, 나는 어떻게든 똥 밭이라도 구르는 쪽이었다. 똥 밭에 구르는 놈이 이길 수밖에 없었다.
그때, 돌연 녀석의 검이 일변했다.
맹수의 것처럼 거친 검술-.
누구의 것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으드득. 이를 갈았다.
왜 여기서 핸드릭스의 검술이 나오는 건가.
에단이 핸드릭스에게 검을 배웠을 리가 없었다. 그러니 좋은 의미는 아닐 것이다.
놈의 검이 계속해서 거칠어졌다. 불 규칙이라 까다로운 검술이 연속으로 이어졌다. 알고 있는데도 상대하기 제법 까다로웠다.
매번 행하기만 했지, 실제로 당하니 제법 난감했다. 내가 알고 있는 검술이었다만, 손이 어지러워졌다.
‘그래, 한 번은 아쉽지.’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줬다.
과정이 어찌 됐건 결국 핸드릭스도 내 손에 죽었다.
이제 와서 주저하는 건 위선일 뿐이었다. 그 위선도 내가 죽였다.
‘많이도 죽였군.’
그때, 또다시 놈의 검이 일변했다. 이번에는 늘어나는 폭이 굉장했다. 정돈된 느낌이 더해졌다. 검술이 한결 정숙해졌다.
이번에도 익숙한 검이었다.
‘또 너냐. 검의 주인···.’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다만, 웃음과 별개로 긴장이 올라왔다.
에단, 검의 주인, 핸드릭스까지 더해졌다니-. 나한테 죽은 이들이 도원결의라도 맺은 듯하여 어이가 없었다.
각각 검술의 정점에 이른 검의 주인과 핸드릭스였다. 거기에 에단까지 더해졌다니-. 아주 끔찍한 조합이었다.
심지어 나는 지금 오만의 힘을 다룰 수 없었다.
순전히 검술의 대결이었다.
휘몰아치듯 쏟아지는 놈의 검은 그 기세가 각각 달랐다. 마치, 셋과 동시에 싸우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다만-.
“쉽지 않지? 워낙 자기주장 강한 노인들이라.”
스스로 엉클어지는 놈의 검에 나는 쓰게 웃었다.
애초에 검술의 극에 이른 둘이었다. 각각 성향이 뚜렷한 검을 묶기 위해서는 둘의 개성을 누를 만한 힘이 있어야 했는데, 놈에게는 그게 없었다.
물론, 그 검술을 모르는 이라면 속수무책으로 당했지만, 나는 둘의 검술을 완벽하게 알고 있었고 심지어 둘의 융합도 이뤄냈다.
내게는 허점투성이의 엉성한 검술로 보일 뿐이었다.
시간이 주어진다면, 에단이 그 빛나는 재능으로 내가 모르는 중간을 찾아낼 수도 있었지만, 그럴 생각은 없었다.
핸드릭스 쪽으로 치우친 녀석의 검을 검의 주인 것으로 받고, 이어서 검의 주인의 검술로 녀석의 목을 겨눴다.
그 찰나의 순간에 녀석의 검이 빠르게 틀어지며 비스듬히 교차했다.
그러자 서로의 목을 겨누는 우스꽝스러운 모양새가 됐다.
내 목을 노리는 녀석의 검을 쳐내고 공격을 이어갈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나는 놈이 내 목을 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단순히 나에 대한 정이 아니라, 남겨진 백성 때문이었다.
저 꼴이 된 놈이 으뜸별을 할 수 없을 테니, 놈은 나를 벨 수 없었다.
놈에게 시간을 주듯 검을 길게 끌었다.
꺾이듯 거칠어진 핸드릭스의 검술로 시작하여, 검의 주인 검술을 더한 검이 펼쳐졌다.
놈의 검은 내 목을 겨눌 뿐 움직이지 않았다.
재능과 별개로 에단의 성격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다. 형제들 사이의 끝없는 경쟁이 성장 환경이었으니, 응당 그럴 수밖에 없었지만-.
내 목에 검을 겨누는게 놈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표현이었다.
“믿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너를 배신하지 않았다. 비쟌트로 왕국의 백성들을 악마에게 먹인 건 에이버리가 독단적으로 벌인 짓이고, 그에 대한 벌은 내렸다.”
놈이 믿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도 쏟아냈다. 애석하게도 가벼워지기는커녕 오히려 무거워졌다.
놈의 투구가 달그락거렸다. 묘하게 끄덕이는 것처럼-.
놈의 검이 살짝 움직였다. 놈이 검면으로 내 목을 두드렸다. 돌이라도 삼킨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졌다.
차라리 조금이라도 긁었다면-.
나는 이기적인 중얼거림을 삼켰다.
그 이유가 어찌 됐건-.
“미안하다.”
내가 놈을 이용한 건 사실이었다.
진작했어야 할 사과였지만, 목줄을 가득 찬 나는 그를 생각할 수 없었다. 당시에는 에이버리의 짓임을 알지도 못했고.
목을 날리기 직전에 하는 사과가 무슨 의미가 있겠냐마는-.
덩그러니 떨어진 검은 투구가 작게 들썩였다. 통통 튕기는 투구를 보며 혀를 찼다. 그 아래로는 굵직한 뼈가 자리해 있었다.
잠시 그를 보다가 기침 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이제 당신이 으뜸별이랍니다. 으뜸별의 책임을 다하라고-. 스승은 완성한 검술을 보여줘서 고맙다고 했습니다, 역시 자신의 검술이 최고라는 말도······.”
한스는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가벼이 말했다.
나는 한스 앞에 가만히 쭈그려 앉았다. 한스의 총기 어린 눈이 나를 응시했다.
톡톡, 가만히 칼자루를 두드렸다.
놈은 곧 죽는다.
굳이 죽일 필요는 없었다.
“그래, 너도 아우였군.”
작게 끄덕였다.
역시 아우와는 늘 끝이 좋지 않았다.
“보여주신 것에 대한 보답입니다.”
한스가 좋은 술을 선물한 놈처럼 말했다.
보여줬다는 건, 놈이 말한 예언에 관한 것인 듯했다. 놈은 광적으로 집착하는 성향을 보였으니-.
죽였던 놈들을 한 번 더 죽이는 게 보답이라는 것에 혀를 찼다. 확실히 정상은 아니었다.
물론, 이 좆같은 곳에서 제정신인 놈들이 몇이나 있겠냐마는 놈은 그중에서도 유별났다.
다만, 애석하게도 나는 두 번 죽이며 위안을 얻었다. 놈이 전해준 말이 목줄을 조금 느슨하게 했다. 느슨한 목줄이 더 오래감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럼 이유를···.”
한스가 거칠게 기침하며 말끝을 흐렸다. 이제 목소리가 안 나오는 듯 뻐끔거렸다.
나는 놈을 잠시 보다가 입을 열었다.
대장말고 남에게 말하는 건 처음이었기에,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에 천천히 말을 꺼냈다.
사실 나는 다른 세계에서 왔다. 그렇기에 네 예언에 부합하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놈의 눈이 그 세계에 관해서 묻는 듯했다. 자신이 모르는 세계가 있다는 것에 눈이 커진 것 같았다.
나는 그를 보며 거기에서 예언은 돌팔이 취급받는다고, 거기에는 신 같은 것도 없다고 말했다.
그러자 한스가 환하게- 정말 밝게 웃었다.
예전 친절한 한스처럼, 혹은 여행을 기대하는 아이처럼 들뜬 미소를 지었다.
마치, 자신이 그곳으로 갈 것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어쩌면 그럴 수도 있었다.
그쪽에서 하나 왔으니, 이쪽에서도 하나 보내야 하지 않겠나.
“거기서는 속옷 훔치지 말고.”
한스가 달싹거렸다.
나는 놈의 숨이 멎을 때까지 가만히 지켜봤다.
놈의 움직임이 멈추며, 주변 가득했던 괴상한 문자들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진짜 끝이군.’
나는 지긋지긋한 검을 뒤로 던졌다.
괴상한 문자들이 무너지는 광경은 제법 멋들어졌다.
생각보다 시간이 꽤 걸린다고 생각할 때쯤, 공간이 흩어지듯 사라졌다.
이내 청량한 공기가 폐로 가득 들어왔다.
감았던 눈을 뜬 나는···.
‘이게 뭐지?’
거대한 석상을 보고 눈을 찡그렸다.
무슨 관광 명소에나 세워져 있을 법한 거대한 석상이 세워져 있었는데, 그 모습이 낯익었다.
‘······나잖아?’
그 주변을 보니, 잔재가 가득 쌓여 있었다. 어딘지 정리된 듯한 느낌이었다. 많은 이들이 달라붙어서 치우고 있었다.
그에 나는 시간이 제법 지났음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한스 녀석이 무너지면서 무슨 문제가 생긴 듯했다.
주변에 있던 아이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아이는 작은데도 품에 돌을 한 움큼 들고 있었다.
아이의 눈이 찢어질 것처럼 커졌다. 아이는 나와 옆의 석상을 번갈아 봤다.
“······영웅은 죽었다던데!”
아이의 외침에 주변의 이목이 쏠렸다. 다른 이들의 반응도 비슷했다.
내 얼굴을 모른다고 해도, 저 석상의 구현이 너무 완벽했기에 몰라볼 수가 없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잠시 고민하다가-.
양손을 번쩍 들었다.
“부활했다-.”
전과 비교할 수 없는 열띤 환호성이 크게 울려 퍼졌다.
그 격렬한 반응을 보니, 소문이 좀 과하게 퍼질 듯했지만-.
‘풀푸츠가 알아서 하겠지.’
이제 남은 건 풀푸츠 담당이었다.
나는 반짝이는 아이의 눈을 보며 시원하게 웃었다.
그때, 저 멀리에서 뛰어오는 놈이 있었다.
“······혀어어어엉니이이이임!!!”
딜런이었다. 눈물을 줄줄 흘리며 달려오는 놈에 나는 낄낄 웃었다.
그 난리통에도 안 다쳤는지 멀쩡했다.
참으로 질긴 새끼였다.
“뭐 하러 여기서 기다리냐.”
내 물음에 녀석이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헤헤···, 제가 지옥까지 보필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놈의 부르튼 손과 등에 멘 곡괭이를 보며 혀를 찼다.
그러다가 녀석이 내 눈을 슬쩍 피하는 게 보였다.
‘뭔가 있군.’
나는 묻지 않고 손을 풀었다.
그러자 입꼬리를 씰룩대던 딜런이 이실직고했다.
“형님이 싸우는데, 형님의 최측근이자 차기 황태자! 딜런이 어찌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를 돕기 위해 뛰어가는데, 느낌이 쎄한 놈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냅다 후려팼는데, 갑자기 놈이 이상한 힘을 써서! 내 단검을 호로록! 날리는 거 아닙니까! 그런데 제가 누굽니까! 아론의 아들! 황태자! 딜런 아닙니까?! 냅다 달려들어서 놈의 종아리를 팍! 그러자 놈이 악! 그 틈에 머리끄덩이를 잡아서 주먹을 면상에 팍!”
딜런이 온몸을 휘두르며 실감 나게 설명했다.
‘···느낌이 안 좋다고 일단 팼다고?’
어이가 없는 이유였지만, 딜런의 눈빛은 한없이 진지했다. 심각한 문제라는 듯한 눈이었다.
“놈도 만만치 않은 거 아닙니까! 그 와중에 주먹을 날리는데, 제가 허리를 푝! 접어서 피한 다음에 면상에 다시 무릎을 팍! 그때부터는 개싸움이었습니다. 기어코 쓰러뜨리자, 놈이 엉엉 우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더니 대뜸 자신이 황제라고 막 우기는 겁니다! 소리치고! 그래서 내가 네가 황제면 내가 황태자다! 이러니까! 놈이 꼴깍꼴깍 넘어가다가-. 자신이 숨겨둔 보고가 있으니, 거기에 같이 가자고! 이러는 거 아닙니까?”
설명이 제법 실감 나고 재밌었다. 그에 나는 굳은 입꼬리를 올리며 끄덕였다.
“그래서 갔더니! 정말 휘뚜루! 마뚜루! 인 거 아닙니까! 막 황금이 좌아아아아악-! 고급스러운 무구가 쿠우우우우-! 휘황찬란한 것들이 진짜 잔뜩 쌓여 있었습니다! 그를 보더니 쭈그리고 있던 놈이 대뜸 어깨를 세우고 호탕하게 ‘이제 내가 황제인 걸 알았느냐?! 고개를 조아려라!’ 이러는 거 아니겠습니까?”
나는 볼을 긁적였다. 황제가 그사이에 탈출이라도 한 듯했다. 거기에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황제가 나갔으면, 좀 귀찮아지겠는데.’
넓은 대륙에서 숨으면 찾을 방도도 없었다. 생각지 못한 문제였다.
“그래서?”
“예? 제꼈습니다.”
딜런이 뭐 그런 당연한 걸 묻냐는 듯, 제 목을 쓱쓱- 그었다.
놈은 이어서 제 엉덩이를 흔들며, 황제를 제낀 딜런 노래를 불렀다.
이게 대단한 새끼인지, 그저 제끼는 것에 미친 새끼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그 보고는?”
“아, 이쪽입니다. 황제를 죽이는데, 놈이 무슨 수를 썼는지 무너지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에 나는 딜런의 부르튼 손과 등에 멘 곡괭이의 이유를 깨닫고 낄낄 웃었다.
딜런은 나를 찾고 있던 게 아니라, 무너진 보고를 복구하는 중이었다.
그래, 딜런은 이런 새끼였다.
“가자. 그럼.”
“그··· 제가 찾았는데 비율은······.”
손을 비비는 딜런에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손가락을 한 개 들었다.
개샊-. 입을 달싹거린 딜런이 방끗 웃었다. 그 어색하게 웃는 눈가에 고인 눈물을 보며 나는 낄낄 웃었다.
제국이 무너진 걸 메꾸려면 돈이 많이 들 것이다. 거기에 줄 생각이었다.
“그래, 십 분의 일이라도 받는 게 어디냐! 그것만으로도 최고 부자라고! 가자! 황제를 제낀 딜런! 이제 시작이다!”
나는 금세 기운을 차리고 엉덩이를 씰룩거리는 딜런에게 ‘십 분의 일’이 아니라 ‘백 분의 일’이라는 걸 말해줘야 하는지 잠시 고민했다.
딜런이 조금 더 행복하게 놔뒀다.
***
‘음.’
풀푸츠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눈을 가늘게 떴다.
반란이 성공적으로 끝난 지 시간이 제법 지났다. 그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인 건 아론의 실종이었다.
풀푸츠는 그 신이란 것을 실제로 보지 못했지만,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신의 손짓 한 번에 수백 명이 사라질 정도로 거대한 존재였단다.
아무튼, 그 과정에서 홀로 신을 잡은 아론이 실종되었다.
그로 인해 발생한 문제가 한둘이 아니었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아론의 공백이었다.
신을 향해 혼자 달려들어, 기어코 신을 잡아내고 제국을 무너뜨린 아론은 영웅이었다. 이견의 여지가 없었다.
그건 앞으로 대륙이 사라질 때까지 영원히 기억되고 회자될 것이다.
‘···근데 그게 왜 나냐고.’
풀푸츠는 입술을 씹었다.
현재 제국이 무너지면서 대륙에 공백이 생겼다. 그 기간이 길어질수록 다른 마음먹는 것들이 일어날 가능성이 컸다.
제국이 있기 전의 왕국에 대한 역사를 생각해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셀레나는 그를 관리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지도자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아론이 없으니, 그건 풀푸츠가 맡을 수밖에 없었다.
뜬금없이 지도자라니-. 심지어 제국의 공백을 채워야 한단다.
풀푸츠는 당연히 거절하고 싶었지만, 아론이 없는 이상 풀푸츠가 그 자리를 채워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대륙이 다시 피로 물들 게 분명했으니.
아론이 사라진 뒤에 셀레나는 상당히 무섭게 변했다. 원래도 조금 무서운 느낌이었다만, 조금 더 삭막해졌다.
물론, 누구도 아론이 죽었다고는 생각 안 했다. 또 어디선가 뭔가를 하고 돌아올 거라 확신했다.
그건 풀푸츠도 마찬가지였다. 그에 풀푸츠는 임시라는 걸 명시하고 그 자리를 받았다.
딱히 달라진 건 없었다.
대부분 셀레나를 통해서 해결됐고, 적절한 이를 자리에 배치하는 게 전부였다.
잠을 거의 자지 못했지만, 어떻게든 헤쳐나갈 수 있었다.
영웅의 소문에 이끌려 찾아온 이들이 자신을 마주하고 실망하는 반응도 제법 익숙해졌다.
문제는 아론이 한 달이 될 때까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준비 끝나셨습니까?”
늠름한 갑주를 입은 아델라가 정중하게 물었다. 아델라는 전장에서 군중을 이끌었다고 영웅 대접을 받는 중이었다. 다만, 그리 기쁜 얼굴은 아니었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아론의 실종이 한 달이 되어가니 분위기가 제법 서늘했다.
왠지 모르겠지만, 풀푸츠는 눈치가 보였다.
정작 그 업적을 달성해낸 이들이 저런 분위기인데, 자신이 거기에 대고 싫은 소리를 어떻게 하겠는가.
“소식을 더욱 크게 부풀려야 합니다. 대륙 어디에 있더라도 들릴 정도로. 아, 브링턴 왕국 쪽에서도 반응이 왔습니까?”
“예, 처음에 거절했지만, 비비안이 용을 타고 다녀오니 수락했습니다.”
‘그건 협박······.’
노바와 셀레나의 대화에 아찔해졌지만, 거기에 대고 뭐라 할 수 없었다.
확실히 대륙의 구심점을 정해두는 건 중요한 일이었다. 다소 과한 손속도 어쩔 수 없었다.
그 구심점이 풀푸츠의 소중한 캐서딕이라는 게 문제였지만.
풀푸츠는 창문을 보고 눈을 질끈 감았다. 안 그래도 지나치게 컸던 캐서딕이었는데, 사람들이 몰리면서 이제는 감당할 수 없는 크기였다.
늘 자신밖에 모른다는 마법사들이 영웅을 칭송한다며 적극적으로 개입한 결과였다.
더불어 엘프나 드워프 같은 이종족들도 소문을 듣고 찾아와서 눌러앉기도 했고.
“카르잔 쪽도 완전히 들어왔습니다.”
카르잔의 두목인 단테가 눈을 빛내면서 말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프레드릭 길드와 영웅 아론 상단의 합병도 순조롭습니다. 아예, 이름을 아론으로 바꾸는 것도···.”
때를 타서 크기를 더욱 부풀려 명실상부 제일의 길드가 된 프레드릭 길드가 대뜸 아론 상단과 합병한다고 하지 않나-.
“교단의 설립에 대해서 논의할 게 있다. 따로 부지를 지으라고 했는데, 그렇게 되면 아론 명예 추기경이 더 게을러질 것이다. 작게 만들더라도 캐서딕 안에 지어야 한다.”
교단의 본단이 세워지고 있질 않나.
“마탑의 지대도 부족하다. 하나로 뭉친 터라 더욱 넓은 지대가 필요하다.”
으아아앙! 스왈로이츠가 품에 안은 아기를 달래며 말했다.
마법의 본질을 봤다며, 색은 의미가 없다면서 통합된 마탑이 생겨났고, 만장일치로 스왈로이츠가 그 마탑주로 뽑혔다.
역사에 남을 정도로 아주 거대한 마탑이 지어지고 있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캐서딕에.
아무튼, 캐서딕은 전에 없을 정도로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그를 막을 방도도, 명분도 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왜 내가 황제?’
풀푸츠는 자신이 입은 화려한 옷을 매만지면서 중얼거렸다.
지도자가 필요한 건 동의했다.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론이 돌아올 때까지 임시였다. 그런데 즉위식이라니-.
그 전에 아론이 돌아올 거라 생각했다만, 놈은 오지 않았다.
풀푸츠가 정말 왕관을 쓸 위기였다.
자그마한 캐서딕에서 소소하게 여생을 보낼 생각인 풀푸츠였다. 황제가 될 생각은 전혀, 절대 없었다.
상황은 알겠다만, 여기서 멈춰야 했다.
“저 셀레나, ······아무리 그래도 내가 황제가 되는 것은 좀 그렇지 않나?”
풀푸츠는 셀레나의 날카로운 눈초리에 찔끔 놀라 목소리를 최대한 낮췄다.
“그래야 아론이 올 겁니다.”
셀레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풀푸츠는 잠시 그 말을 되새겼다.
“······내가 황제가 돼야 아론이 돌아온다는 건가?”
가벼이 고개를 끄덕이는 셀레나에 풀푸츠는 침음성을 흘렸다.
왠지 모르겠지만, 명예를 붙여 책임 없이 권리만 누리던 아론이 떠올랐다.
‘···아무리 그 아론이라도 그렇게까지 할까.’
풀푸츠는 회의적이었다. 아무리 그 아론이라도 황제를 떠맡기 싫어서 안 올 리가 없었다.
무슨 사정이 있어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풀푸츠는 필사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한시 빨리 황제를 공표하지 않으면, 아론이 기껏 구한 대륙이 다시 혼란에 빠질 겁니다. 멍청하고 욕심만 많은 인간이니까.”
이어진 셀레나의 날카로운 말에 풀푸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지금 구심점을 잡아두지 않으면 불순한 자들이 고개를 들 것이 분명했다. 지금 순간에도 자그마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으니.
셀레나의 말은 타당했다.
다만-.
‘···그게 왜 난데?’
물론, 그 이유는 풀푸츠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뭐라 더 말할 수가 없었다.
‘아론이 돌아오면···. 끝날 것이다. 다 끝날 거야.’
그리 중얼거렸지만, 그게 아닐 것을 풀푸츠는 알고 있었다.
풀푸츠는 쏟아지려는 눈물을 억지로 참으며 일어섰다.
이왕 할 거면 빨리 해치우는 게 좋았다.
그래, 잠시 황제 자리를 맡는 것뿐이다.
“아, 이쪽으로 가셔야 합니다.”
아델라가 문으로 향하려는 풀푸츠를 막아섰다. 그 가리키는 방향이 이상했다.
“···저쪽은 용의 둥지 아닌가?”
“예, 황제로서의 위엄을···.”
아델라가 이런저런 설명을 이어갔지만, 풀푸츠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그러니까 나한테 지금 용을 타라는 건가?”
자신을 보며, 뭐 그런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듯 끄덕이는 이들에 풀푸츠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건 악몽이 분명했다.
풀푸츠가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용에 탄 뒤였다.
“긴장하지 않아도 돼요! 붕붕이는 착하니까!”
뒤에 앉은 비비안이 위로했지만, 풀푸츠는 들리지 않았다.
아득한 높이도 문제였다만-.
‘뭔 사람이 이렇게 많이···.’
그 넓은 캐서딕을 가득 채운 이들에 풀푸츠는 이를 꽉 다물었다.
어찌나 사람이 많은지 대륙에 있는 이들이 전부 모인 것처럼 보였다. 그와 더불어 실시간으로 올라가고 있는 건물들까지-.
여기가 캐서딕인지 수도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아니, 수도도 이 정도로 크진 않았다. 거기에다가 저 멀리에 위치한 거대한 붉은 용까지-.
어디 전설에나 나올 법한 광경이었다.
왜 캐서딕에 이런 시련이······.
그때, 거대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스카라는 덩치 큰 사내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 목소리가 얼마나 큰지 높이 있는 풀푸츠에게도 들릴 정도였다.
“대륙을 희롱하든 악하디악한 신을 직접 손으로 찢어발기고-, 단신으로 악의 수도를 박살 냈으며-, 용의 할아버지이자, 붉은 재앙의 주인이며-.”
이런저런 거창한 수식어가 길게 늘어났지만, 정신을 반쯤 놓은 풀푸츠에게 들리지 않았다.
“아론 제국의 황제! 존귀한 지배자 풀푸츠 1세!!”
거센 환호가 일어났다. 순간 정신이 아찔해졌다.
콕콕 찌르는 비비안에 정신을 차린 풀푸츠는 손에 든 검을 들었다.
무슨 짓을 한 건지 검에서 밝은 빛이 가득 뿌려졌다. 영롱한 자태였지만, 풀푸츠는 순간 크게 휘청였다. 그를 비비안이 잡아줬는데, 거친 바람에 그 드레스가 살짝 펄럭였다.
‘···아론?’
전부 보이지 않았지만, 비비안의 가슴에 그려진 그림은 아론이 분명했다.
“······짜잔!”
비비안의 어색한 손짓에 풀푸츠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짜잔이라니- 지금 이게 무슨······.
“아론 제국에서는 신분의 고하가 없을 것이며-! 모두가·········.”
주절주절 또 떠들고 있을 때, 풀푸츠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를 썼다.
왜 비비안의 가슴 부근에 아론이 그려져 있단 말인가.
“존귀하고 고귀하며 만인을 굽어살필 풀푸츠 1세의 말씀을 듣고 가겠습니다!”
그때, 비비안이 어색하게 웃으며 마도구를 내밀었다.
결혼도 하지 않은 딸의 가슴에 아론이 그려져 있다는 건 굉장히 심각한 문제였지만, 일단, 즉위식이 우선이었다.
그에 풀푸츠는 어떻게든 정신을 잡고 마도구를 입에 가져다 댔다.
풀푸츠는 기대하듯 올려보는 좌중을 둘러봤다.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이런 순간이 올 것이라 상상도 못 한 풀푸츠였기에 말문이 턱 막혔다.
‘내가 황제? 왜? 아니, 내가 왜?’
그때 군중의 끝, 성문 쪽에 거대한 수레가 눈에 들어왔다. 뭐를 실었는지 터질 것처럼 거대한 수레가 줄을 이어서 서 있었다. 이제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그 옆에 익숙한 얼굴이 있었다.
아론이었다.
정말 자신이 황제가 되자 나타난 아론이 마치, 남 일이라는 듯 즐겁게 웃으며 박수 치는 모습을 보자-.
풀푸츠의 이성이 끊어졌다.
“아론- 이 개새끼야!!”
역사에 기록된 황제의 첫 마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