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guish Guard in a Medieval Fantasy RAW novel - Chapter (254)
중세 판타지 속 망나니 경비조장-254화 (완결)(254/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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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비대장 아론 -완결-
“후우······.”
아방느 길드의 길드장 호벤은 숨을 애써 억누르며 긴장을 조절했다.
“뭘 그리 긴장하십니까.”
옆에서 들린 목소리에 호벤은 인상을 찡그렸다. 토끼 귀 간비였다.
“긴장이 안 되겠나. 그 캐서딕에 가는데!”
호벤은 들뜬 목소리를 숨기지 못했다. 캐서딕이 어떤 곳인가. 전설적인 영웅 풀푸츠가 있는 곳이었다.
더불어 아론 제국의 수도였고, 세상의 모든 것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 캐서딕이었다.
그런 캐서딕을 가는 것만으로도 벅찬데, 심지어 지금 호벤은 길드장으로서 영웅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어찌 떨리지 않을 수 있을까! 지금도 당장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걸 억지로 참는 중이었다.
“그거 다 허황된 이야기 아닙니까. 무슨 신이 어쩌고···, 제국이 어쩌고···.”
호벤은 영웅 풀푸츠의 격언대로 녀석의 머리를 냅다 후려쳤다. 얻어맞은 간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봤다.
“캐서딕은 명실상부 대륙의 중심이다. 말조심해야 한다. 풀푸츠 황제의 소문을 잊은 것이냐!”
호벤은 놈을 다그쳤다. 풀푸츠에 대한 소문은 한둘이 아니었다.
대부분 영웅적인 면모에 대한 것들이지만, 그중에는 다소 살벌한 이야기도 제법 있었다.
가령 손으로 사람 목을 뜯는다거나, 악마를 입으로 뜯어 먹는다거나, 사람으로도 부족해서 오크나 용을 따먹는다- 같은 소문들이 있었다.
“······그래도 결국, 이름만 바뀐 거 아닙니까.”
“신분제가 폐지됐잖아.”
“그래봤자 귀족이었던 놈들은 여전히 떵떵거리지 않습니까. 황제도 남아있고.”
맞는 말이었다. 제국이 세워지면서, 신분에 대한 변화가 대대적으로 이루어졌지만, 귀족은 여전히 귀족이었다.
그에 간비처럼 말하는 이들이 제법 있었다. 결국, 똑같은 거 아니냐고. 호벤의 생각은 달랐다.
“신분제가 있는 것과는 다르지. 지금은 차이가 안 느껴지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선이 흐릿해질 거야. 그리고 풀푸츠 황제가 성군인 것은 자네도 알고 있잖나.”
간바가 이내 입을 꾹 닫았다. 풀푸츠가 전에 없는 성군이라는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때, 마차가 덜컹하고 멈췄다.
“여기서부터는 내려서 가야 한답니다!”
마부의 외침이 들렸다. 그에 호벤은 마차 문을 열고 내렸다.
마부의 말처럼 그들의 앞쪽으로 마차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세워져 있었다. 대륙은 캐서딕으로 통한다는 말이 와닿았다. 생전 사람이 이렇게 많은 걸 처음 마주하니 괜히 들떴다.
구시렁거리던 간비도 입을 쩍 벌리며 연신 여기저기를 구경했다.
저 멀리 거대한 성벽이 보였는데, 그 모습이 범상치 않았다.
‘영웅!’
투구를 써서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떡 벌어진 어깨와 거대한 덩치는 누가 봐도 영웅이었다.
그리고 저게 영웅이 아니라면, 저렇게 많이 배치될 리가 없었다.
영웅을 흠모하는 호벤이 보기에도 석상의 수가 지나치게 많았다.
심지어 그 하나하나가 얼마나 생동감이 넘치는지, 당장 살아 움직일 것만 같았다. 석상뿐만 아니라 그 끝에 있는 성문도 영웅 모양이었다.
성문이 꼭 영웅의 가랑이로 들어가야 하는 모양새였다. 다만, 그 조각이 워낙 뛰어난지라 이상한 느낌조차 들지 않았다.
그렇게 석상들을 구경하다 보니 금세 시간이 지났다. 이내 검문을 받을 수 있었다.
“저는 아방느 길드의 길드장 호벤입니다.”
“길드? 2 실버는 받아야 할 것 같은데?”
어딘지 멍청하게 생긴 경비대원의 말에 호벤은 눈을 구겼다.
통행세. 당연한 거지만, 영웅이 있는 캐서딕에서도 이런 일이 있을 줄은 몰랐다.
“어이, 브릭. 지금 뭐 하는 거야.”
그때, 눈이 쭉 찢어진 경비대원이 다가왔다. 그 사내는 손가락에 멋들어진 철을 끼고 있었다.
호벤은 작게 안심했다. 그래, 영웅이 있는 캐서딕에서 통행세라니-.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아방느 길드잖아. 3 실버라고. 문장을 아직도 안 외웠나?”
눈이 찢어진 사내의 입에서 나온 말에 호벤은 눈을 찡그렸다.
말리는 게 아니라, 금액을 측정하는 거라니-? 심지어 그 금액이 의외로 합당하여 더 어이가 없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던 게 분명했다.
“영웅의 수도에서도 통행세를 받는단 말이오?”
호벤은 자신도 모르게 삐딱하게 말했다.
다른 곳이었다면 그냥 넘겼겠지만, 이곳은 호벤이 흠모하는 영웅의 수도였다. 영웅의 면을 깎는 행위를 넘길 수 없었다.
“3 실버가 많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방느 길드의 수입이······.”
사내의 입에서 나온 정확한 수치에 호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찌 일개 경비대원이 길드의 수입을 알고 있단 말인가.
“그걸 어찌···. 아니, 금액이 문제가 아니라, 통행세라는 것 자체가 이해되지 않다는 것이오.”
말을 뱉은 호벤은 아차- 싶었다. 주변의 분위기가 굳었다. 경비대원들의 얼굴이 찡그려졌다.
그때-.
“무슨 일이야. 풀. 차례 밀렸잖아.”
옆에서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등장한 사내에 호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렇게 잘생긴 사내가 있다니-!
“아, 대장. 아방느 길드에서 나왔는데, 통행료를 못 내겠답니다.”
‘···대장? 대장이 왜 검문을 직접 보고 있지?’
호벤은 자기 상황을 깨닫고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니, 못 내겠다는 것이 아니라, 영웅이 머무는 수도에서 통행세를 받는다는 것에 잠시 놀란 것뿐입니다.”
“놀랐다?”
왠지 모르겠지만, 사내가 때릴 것 같았기에 호벤은 슬쩍 뒤로 물러났다.
“그게 아니라···. 그··· 영웅의 그 찬란하고 위대한 명성에 흠이라도 생길까 봐 걱정하는 것뿐입니다. 제가 영웅을 워낙에 존경하는 터라, 말을 함부로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호벤은 황급히 제 잘못을 인정했다. 굳이 긁어 부스럼 만들 필요가 없었다.
“오오-. 영웅이랍니다. 대장.”
브릭이라 불린 사내가 키득거렸다. 풀이라는 사내는 헛기침하며 고개를 돌렸다.
잘생긴 사내가 그쪽을 흘끗 보고는 혀를 찼다.
“통행세는 경비대의 전통이자 신성한 규칙이다. 검문하는 경비대가 이를 받으면서 그대들의 안전을 보장해주는 의미를 지닌 것이지. 그런 고귀한 전통에 불만이 있는 것인가?”
사내의 말이 의외로 타당하여 호벤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상황을 깨달은 호벤은 주머니에서 10 실버를 꺼내 사내에게 건넸다. 사내의 눈이 조금 커졌다.
“전통을 존중한다는 의미입니다. 제가 경솔했습니다.”
“오, 좋은 놈이었군. 아우로 삼고 싶을 정도야.”
사내가 시원하게 웃으며 호벤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위축되게 만드는 덩치였다.
“아방느 길드면··· 노바가 말한 곳이군. 그래, 10 실버나 받았으니 특별히 안내해주지. 어이, 풀, 브릭 잘 지키고 있어라.”
호벤의 어깨를 잡은 사내가 안쪽으로 향했다.
“대장, 늦지 않게 오셔야 합니다!”
뒤쪽에서 들린 말에 사내가 손을 가벼이 저었다.
호벤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그런 생각은 성문을 지나치자 사라졌다.
“와아-.”
감탄이 절로 나왔다.
저 멀리 보이는 거대한 마탑부터 시작하여, 하얀빛이 풍기는 고고한 교단, 그리고 활기차게 웃으며 뛰어다니는 사람들까지-.
길드장으로서 대륙 곳곳을 방문했던 호벤으로서도 낯선 모습이었다.
사내는 익숙한 듯 앞장서서 걸었다. 잠시 멍때리던 호벤은 황급히 따라붙었다.
“아론! 이것 좀 먹어봐요!”
지나가던 이들이 사내를 붙잡고 빵 같은 것들을 내밀었다.
‘······아론?’
호벤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물론, 아론은 흔한 이름이었다만, 아론 제국의 수도에서 아론이란 이름을 지닌 건 다소 희한했다.
“더럽게 맛없네. 해나한테 배워라.”
사내는 다 받아먹으면서도 툴툴거렸다. 다소 거친 언사였다만, 정작 그를 준 이들은 깔깔 웃었다.
사내는 캐서딕에서 유명한지, 계속해서 사람들이 붙잡았다. 갑자기 술 마시기 대결을 했으며, 뜬금없이 아이들과 놀아주기도 했다. 사내는 틱틱거리면서도 연신 웃고 있었다.
···자신을 까먹은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였다.
그건 아닌지 거대한 내성에 들어섰다. 내성도 제법 멋들어졌다.
다만-.
‘외성에 비하면 너무 초라한데?’
본디 자신을 중심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기에, 지도자가 기거하는 내성이 더 크고 단단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황제가 기거하는 내성이 오히려 초라하다니-.
‘···성군. 성군이다.’
자신보다 제국민을 위한다니-. 어찌 저런 황제가 있단 말인가. 호벤은 깊게 감동했다.
갑주를 두른 이들이 내성 문 앞에 즐비했다. 호벤은 괜히 긴장해서 손을 달싹였다.
사내는 아무렇지 않게 그들에게 다가갔다.
“사생아 제곱···. 아니, 제이스는?”
“예? 아, 치안관님 말씀입니까. 안쪽에 있습니다.”
“이 새끼 또 농땡이 피지?”
“음···. 잘 모르겠습니다.”
“잘 모르면 병사 생활 끝나냐?”
“예?”
“농담이다. 좆뺑이쳐라. 빨리 안 오고 뭐 하냐. 쇼펜하르츠.”
“저는 호벤······.”
말을 듣지도 않고 안쪽으로 향하는 사내에 호벤은 황급히 따라붙었다.
사내는 내성에서도 거리낌 없이 움직였다. 그런데 그를 막기는커녕 다들 분분히 인사를 올렸다.
‘도대체 이 사내는 누구······.’
호벤의 의문이 풀리기 전에 거대한 문에 도달했다.
그 앞을 지키고 있던 기사들이 사내에게 경례를 올렸다.
가벼이 고개를 끄덕인 사내가 문을 열었다. 생각보다 단출한 내부가 보였다.
끝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왕좌가 있었고, 그 위에 한 중년의 대머리 사내가 앉아 있었다.
어딘지 피곤이 가득한 낯이었다.
‘···저 대머리는 누구?’
“황제 저하를 뵙습니다.”
그때, 사내가 정중하게 인사를 올렸다. 그에 호벤은 황급히 냅다 엎드렸다. 황제라니-.
‘아무리 소문이 과장된다지만, 이건 너무 심한 것 아닌가···.’
호벤은 실망한 속내를 애써 삼켰다.
“아론, 그대가 이곳에 왔다는 건 이 자리에 앉겠다는 뜻이겠지?”
황제의 말에 호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저게 무슨······.
“저는 개새끼라 앉을 수 없습니다.”
“아직도 그걸로 꽁해있는 건가.”
사내의 대답에 황제가 급격하게 숨을 몰아쉬었다. 꼭 화를 참는 사람처럼-.
“선약이 있어서.”
감히 황제에게 가벼이 말한 사내가 물러났다.
경을 칠 거라 짐작했지만, 대머리 황제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를 뿐이었다.
그 살벌한 분위기에 호벤은 황급히 머리를 박았다.
“존귀하신 대륙의 지배자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허례허식은 됐네.”
황제가 파이프 담배를 뻐끔뻐끔 피우며 말했다. 대머리인 데다가 몸도 제법 좋은 터라, 어디 뒷골목 깡패 같은 느낌이었다.
지레 놀란 호벤은 말을 이었다.
“제국민을 생각하여 신분제 폐지라는 결단을 내리신 것도······.”
“그렇게 하면 황제가 없어질 줄 알았으니까! 젠장 맞을! 왜 오히려 더 잘 되는 것인데!”
황제의 거친 언사에 호벤은 눈을 끔벅였다.
“됐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아방느 길드에 관한 이야기는 많이 들었네. 우리 밑으로 들어오게. 잘 대해주겠네.”
방금까지 그 모습이 거짓이라는 것처럼 황제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 과정이 너무 생략된 게 아닐까 싶었지만, 상대는 황제였다.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자세한 서류는 추후에 보내겠네.”
황제가 가벼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왠지 모르겠지만, 호벤은 캐서딕에서 근무하게 됐다. 일을 열심히 할 것 같다는 이유였다.
그때, 문이 열리고-.
“아버지-. 오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누이는 칸나 생일 파티에 참석한다고 갔고-. 저도 참석할 생각인데, 아들 어깨 좀 올라가게 왕관 좀······.”
비열하게 생긴 사내가 들어왔다.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옷을 잔뜩 입은 사내가 황제에게 어설픈 예를 표했다.
“자네가 황태자지만, 내 아들은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아! 개 좆! 같은! 아론!!”
갑자기 황제가 발작하듯 거친 욕을 하기 시작했다.
호벤은 황제가 ‘아론’이라는 저주에 걸렸다는 소문이 거짓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
‘늦었군.’
– 후우···. 오늘치 업도 끝냈다.
업을 무슨 운동처럼 말하는 오만에 혀를 차며 걸음을 재촉했다.
칸나 생일 선물을 챙기느라 다소 늦었다.
이윽고 해나네 술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주변은 이미 익숙한 놈들로 붐볐다. 그 앞에 산처럼 쌓인 선물에는 각양각색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안쪽에서 신나는 노래와 왁자지껄한 웃음이 연신 터지고 있는데, 들어가지 않고 서 있는 세 명이 있었다.
“오셨습니까.”
“왔나.”
벤과 발하르칸, 다섯 장자 스카타프였다. 번듯하게 차려입고 머리에 기름까지 바른 셋은 들어가지 않고 쭈뼛거리고 있었다.
“안 들어가고 뭐 해?”
벤이 슬쩍 고개를 숙이고 스카타프가 내 시선을 피했다. 그런 둘을 곁눈질한 발하르칸이 대답했다.
“남자끼리 들어가면 처량할 것 같아서, 같이 들어갈 여인을 물색 중입니다.”
“발하르칸!”
“형님!”
발하르칸의 대답에 벤과 스카타프가 발하르칸을 노려봤다.
‘홍대도 아니고···. 헌팅이라니.’
어이가 없어서 혀를 찼다.
벤은 황제 직속 친위대의 대장이었고, 발하르칸은 제국 기사단의 단장이었으며, 스카타프는 제국군의 장군이었다.
외모도 멀끔한 놈들인데, 여기서 같이 갈 여자나 찾고 있다니-. 참 쓸데없는 놈들이었다.
“나는 같이 가자고 하는 여인이 많았다. 단지 너희들 불쌍해서 같이 있는 것이지.”
다섯 장자 스카타프가 특유의 말투로 부정했다. 벤이 괜히 스카타프의 어깨를 두드렸다.
“주군이 좀 알려주면 안 됩니까?”
그때, 발하르칸이 물었다. 나머지 둘도 관심이 없는 척하면서 곁눈질했다.
“뭘 알려줘? 여자?”
“예, 주군은 부인이 다섯이나 있지 않습니까.”
발하르칸의 말에 나는 잠시 눈을 찡그렸다. 부인이 다섯이라니-. 또 무슨 소문이 퍼진 건지 짐작조차 안 됐다.
“잘 생기면 돼.”
내 대답에 셋의 얼굴이 동시에 굳었다. 나는 똥 씹은 얼굴이 된 발하르칸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저쪽의 여인들은 어떤가? 수가 맞지 않나.”
“좋군. 아까는 내가 갔으니, 이번에는 발하르칸이 가지.”
“‘그대에게 나와 함께할 기회를 주겠다’라고 말하는 건 좋지 않더군. 참고하게.”
뒤에서 들리는 대화에 나는 놈들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할 것이라 확신했다.
“대륙을 구한 영웅-, 악신을 죽인 영웅-, 그 이름도 멋진 아··· 풀푸츠!”
문을 열자, 흥겨운 노랫소리가 가득 퍼졌다.
전보다 더욱 거대해진 술집의 중앙에 무대가 있었는데, 거기에 악단이 있었다.
대륙 각지에서 모인 음악가들이 연주 중이었는데, 그 중심에는 해슨의 아들이 지휘하고 있었다. 여전히 형편없는 솜씨였다.
술집 안은 사람으로 가득했다. 다들 웃고 떠들며 술잔을 시끄럽게 부딪쳤다. 나를 발견한 놈들이 분분히 인사를 올렸다.
“아론! 여기에요!”
안쪽에서 해나 목소리가 들렸다. 테이블에 익숙한 얼굴들이 둘러앉아 있었다.
그중 해나가 손을 붕붕 흔들며 불렀다. 나는 주변 놈들을 물리면서 안쪽으로 들어갔다.
“늦었네요?”
“어디서 술이나 퍼마셨겠지.”
“노바, 말을 조심해야지. 그래서 네가 아직-.”
“아직 뭐!”
셀레나의 말에 노바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셀레나는 대답 없이 부드럽게 웃었고, 노바의 눈이 가득 찡그려졌다.
“좋은 날에 싸우지 좀 말아요.”
해나가 둘을 중재했다. 셀레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고, 노바는 깊게 심호흡했다.
“그래, 오렌지.”
“···뭐!”
노바의 격렬한 반응에 낄낄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칸나는?”
“저쪽에서 비비안이랑 준비 중이에요.”
고개를 돌리니, 2층에서 방방 뛰고 있는 비비안과 칸나가 보였다. 나를 발견한 비비안이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칸나는 공중에 붕 떠 있었다.
‘또 사고 치겠군.’
마주 손을 흔들어줬다. 그때, 해나가 슬그머니 내 손을 잡았다.
그를 본 노바가 발작하듯 일어났다. 노바는 ‘계약’을 운운하며 목소리를 높였고, 셀레나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노바와 셀레나가 편을 먹은 것처럼 해나를 추궁했지만, 해나는 줄곧 여유로웠다.
그때-.
“우욱.”
조안나가 대뜸 구역질했다.
그에 순간 싸늘한 침묵이 내려앉으며, 내 쪽으로 시선이 쏠렸다.
“조안나! 얌전한 고양이가 지붕에 먼저 오른다더니!”
“아론! 아무리 그래도 조안나를···!”
격렬한 반응에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케이크 좀 적당히 먹으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끄윽-.”
내 지적에 조안나가 시원하게 트림했다. 그에 나머지 얼굴이 펴졌다.
관심이 흩어졌을 때,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요?”
해나가 작게 물었다. 나는 뒤쪽을 가리켰다.
“인사 좀 하고 오게.”
“너무 많이 마시지 말아요.”
적절한 핑계였는지, 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안도하며 자리를 벗어났다.
‘차라리 위선이랑 싸우는 게 낫지.’
– 동의하네.
오만의 공감에 낄낄 웃으며, 다른 테이블로 향했다.
“대장, 오셨습니까.”
풀이 고개를 까닥거렸다. 그 옆에는 베르만과 켈이 앉아 있었다. 둘은 각자 품에 아기 하나씩 안고 있었는데, 둘 다 눈 밑이 굉장히 퀭했다.
“조장, 오셨습니까.”
“조장이 아니라 대장이라니까. 켈.”
“어쩌라고 나는 조장이라 부를 거다.”
베르만과 켈이 어김없이 티격태격했다. 애를 낳아도 그대로였다. 작게 혀를 차면서 맥주를 내밀었다.
“출산 축하한다.”
“조장도 곧 아닙니까. 흐흐흐.”
켈이 입에서 침을 흘리며 웃었다. 베르만도 따라 웃었다. 둘의 웃음이 굉장히 음침했다.
“그래도 기쁩니다. 가끔 아론이 한밤중에 울거나, 똥을 지리거나 할 때는 빼고 말입니다.”
베르만이 말을 덧붙였다.
‘아론이 똥을 지린다니-.’
켈이야 그렇다 쳐도, 베르만까지 제 딸의 이름을 아론이라 지었다.
애초에 제국 이름이 아론인데, 뭐라 하겠냐마는-.
“우리 아론은 그래도 똥오줌은 가린다고. 로사를 닮아서 눈도 이쁘고.”
“우리 아론은 어제 구르기를······.”
저런 대화를 듣고 있을 때면, 내 이름을 허락해준 게 후회되곤 했다.
“···염병한다. 딜런은?”
“황태자 입장 준비 중이랍니다.”
풀이 2층을 가리키며 말했다. 비비안이 활짝 웃으며 다시 손을 흔들었다. 그 뒤로 황금 몽둥이를 휘두르는 딜런이 보였다.
그때, 연주가 커지면서 중앙으로 익숙한 얼굴이 올라왔다. 브릭과 대장이었다.
“전설적인 부자의 동전 꼽기 쇼를 지금 시작합니다-!”
브릭과 어깨동무한 대장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브릭은 여전히 투덜거렸지만, 저항하지 않고 같이 코에 동전을 넣기 시작했다.
둘은 최근 기록인 은화 열네 개에 잠시 주춤했다. 술집이 조용해졌다. 이어서 한 개가 더 들어갔고-.
“은화를 열다섯 개 넣은 브릭의 아비!”
새로운 전설에 환호가 가득 울려퍼졌다.
나는 내가 집중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황급히 고개를 흔들었다.
사이좋게 인사를 올린 둘이 내려갔다.
그다음은 단출한 복장의 브라이튼이 성서를 들고 중앙 무대로 올라왔다.
‘아무리 그래도 교황인데, 술집에서 축복이라니···.’
아무렇지 않게 기도를 시작하는 브라이튼에 어이가 없었다. 그 시끄럽던 술집이 단번에 조용해졌다. 갑자기 분위기가 회당으로 변했다.
“교황님! 짧게! 짧게!”
그 뒤에 있던 블리안 추기경이 황급히 소리쳤다. 칭찬 자판기가 추기경까지 오르다니, 브라이튼의 세뇌에 가까운 예배는 강력했다.
브라이튼이 작게 헛기침하며 성서를 접었다.
“가장 어두웠던 시대는 지나갔네. 아직은 어둡지만, 버티고 또 나아가다 보면, 태양이 떠오르는 것처럼 점차 밝아질 것을 확신하네. 장담하네. 그러니 포기하지 말게나. 새로운 시대의 탄생을-.”
브라이튼이 따스한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눈을 찡그렸다. 오늘 새벽 예배 안 간 것 때문인 듯했다.
“존나 축하하네.”
브라이튼의 입에서 어색한 욕이 나오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신나는 음악이 다시 흘렀다.
작게 기도한 브라이튼이 무대에서 내려왔다.
“아론 명예 추기경, 명예 교황이 되기 싫으면 예배 빠지지 말게나.”
내게 다가온 브라이튼이 괴상한 경고를 했다. 그에 대충 끄덕이자 브라이튼은 한 번 더 ‘명예 교황’ 협박을 하고 칸나에게 향했다. 브라이튼은 칸나에게 이쁘게 꾸며진 성서를 건네주고 자리를 떠났다.
교단 쪽은 아직 완전히 마무리가 안 되어서 바쁘다고 들었다.
나는 인사하러 오는 이들을 맞아주며 맥주를 홀짝였다. 해나 쪽 눈치가 보였기에 더욱 열심히 악수했다.
“대장, 이것도 드십쇼. 마샤가 싸준 겁니다.”
어느새 내려온 브릭이 생선 빵을 내밀었다. 어디서 꾸리꾸리한 냄새가 난다더니-.
“이번에 기르튼 산맥이 열렸는데, 거길 통해서 라즈벳이 브링턴 왕국으로 여행을 가자고-.”
붉은 재앙을 이용해서 기르튼 산맥을 시원하게 열었다. 덕분에 마샤의 생선 빵 가게가 더욱 잘 되고 있었다.
“그러니까 하기 전에 엄지를 입에 물고 숨을 들이마시면, 기운이 난다고. 내가 용한 용병한테 들은 이야기라니까.”
시끄러운 이야기가 이어졌다.
나도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며, 술잔을 계속 부딪쳤다.
“흐흑-. 나는 우리 대장이 너무 불쌍해. 아내가 다섯이라니-. 어찌 그런 끔찍한 일이-.”
술 취한 브릭이 나를 붙잡고 절절하게 울었다. 대성통곡을 하는 바람에 재웠다.
“내가 늦었군.”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품에 아기를 안은 스왈로이츠였다. 아기를 안은 폼이 제법이었다. 전과 달리 스왈로이츠의 눈에 독기가 없었다.
스왈로이츠 옆에는 예의 그 중년 여자 마법사가 있었다.
여자 마법사는 여기 테이블은 여자 금지란 브릭의 말에 밝게 웃으며 물러났다. 해방된 표정이었다.
문득, 엄마가 많으면 육아도 쉽다는 딜런의 주장이 떠올랐다. 나는 고개를 젓고, 스왈로이츠를 반겼다.
“이야, 이거 마탑 대통령 스왈로이츠 아니야.”
“대통령? 정식 명칭은 통합 마탑주네.”
스왈로이츠가 농담을 재미없게 받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 품의 하얀 아기가 나를 보며 손을 쥐었다 폈다. 나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대단한 마법사 가문이 탄생하겠군.”
초대 통합 마탑주 스왈로이츠와 북부의 겨울이라니-. 내 중얼거림에 스왈로이츠가 고개를 저었다.
“알레이나는 마법사가 되지 않을 걸세.”
스왈로이츠의 대답에 볼을 긁적였다.
벽을 넘은 자, 북부의 겨울에게 마법의 길을 못 걷게 할 거라니-. 어이가 없었지만, 이해 못 할 건 아니었다. 마법사는 결핍 속에서 태어나니까.
다만, 마법을 위한다며 비비안의 심장을 뽑으려던 스왈로이츠가 그런 말을 하니 괜히 기분이 묘했다.
심지어 놈은 통합 마탑주인데도, 마법사의 수를 줄일 거라는 계획을 실행 중이었다. 스왈로이츠는 자신이 말한 평등을 위해 노력 중이었다.
“그래.”
짧게 대답하자 스왈로이츠가 아이를 보며 코를 찡그리듯 웃었다.
별로 웃어본 적 없는 놈이기에 미소가 다소 어색했다. 다만, 전보다는 훨씬 부드러웠다.
그때, 무대에서 빛이 쏟아졌다.
빠밤-. 악기 소리가 시선을 끌었고-.
허공에서 대뜸 칸나와 비비안이 등장했다. 요즘 내 골머리를 가장 아프게 하는 칸나의 공간 이동 마법이었다.
멋들어진 옷을 입은 둘이 나란히 손을 들었다.
빠밤-! 화려한 등장에 좌중이 순간 조용해졌다.
쏠린 이목에 칸나는 턱을 삐쭉 들며, 손을 유려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손을 따라 허공에 그림이 그려졌다. 마나 그 자체를 움직이는 듯-.
“북부의 겨울이 칸나에게 마법의 본질을 알려준 이후로 칸나의 마법이 눈에 띄게 늘었네. 이제 나도 알아보기 힘들 정도니까.”
스왈로이츠가 품의 아기를 달래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굳이 스왈로이츠의 설명이 없더라도 알 수 있었다. 칸나가 종종 공중에서 등장했으니까.
그때, 칸나의 시선이 내게 꽂혔다. 칸나는 비비안처럼 활짝, 아주 밝게 웃었다. 나이에 걸맞은 웃음이었다.
칸나가 손을 튕기자-.
수많은 내가 쏟아졌다.
불로 된 나, 번개로 이루어진 나, 얼음 나, 물로 된 나, 그중에서도 제일 멋진 건 찬란하게 빛나는 것으로 이루어진 나였다.
“마법사가 아닌 이들도 마나를 볼 수 있게 하다니-. 역시 칸나야.”
다양한 내가 연속으로 쏟아졌다.
그것들은 각자 다른 걸 표현했다.
숲속으로 떨어진 놈부터 시작해서, 용병대에서 웃고 떠드는 놈, 탈출하는 놈, 용을 탄 놈, 경비대가 된 놈-.
마지막에는 웃으며 즐거워하는 놈이었다.
따분하지만, 제법 괜찮은 이야기였다.
신난 칸나가 다시 손을 휘둘렀고-.
순간 공간이 크게 일렁였다.
무언가 거대한 짓을 시도한 듯한데, 실패한 듯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칸나가 약간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금세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자 수많은 내가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를 따라 사람들이 일어나 흔들었다. 인도 영화 마지막 장면에 나올 법한 모습에 낄낄 웃었다.
“천재 중의 천재인 칸나가 마나의 사랑을 받는 자의 끝없는 마나를 사용하고, 북부의 겨울에게 마법의 본질까지 배웠다니. 나중에는 정말 자네를 만들어 낼지도 모르겠군.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마법의 본질까지 어길 수는 없을 텐데···. 어이구, 일레이나야 괜찮다. 아비- 여기 있다.”
감탄을 뱉어내던 스왈로이츠가 우는 아이에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그거 똥 싼겁니다. 갈아줘야 합니다.”
“아니야, 배고픈 거야. 여기 맥주 좀 먹이면-.”
옆에서 보던 베르만과 켈이 이런저런 훈수를 뒀다.
‘···나를 만들어 낸다.’
스왈로이츠의 말에 뭔가 놓친 게 있는 듯한 간질간질한 느낌이 들었다.
모든 게 끝났기에 넘겼지만, 씨앗에 대해서 의문이 남긴 했다.
다들 나름의 업적을 세웠지만, 그게 씨앗으로서 역할을 한 것이라 말하기는 어려웠다.
그때, 칸나가 내게 쪼르르 달려왔다. 이제 제법 커서 꼬맹이라고 부르기 모호한 키였다. 칸나는 그 투명한 보라 눈동자를 나를 올려봤다.
“이번에는 실패했지만, 언젠가는 꼭 성공할 거예요!”
도대체 무엇을 성공한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잠시 칸나를 응시했다.
나를 데려온 건 신은 아니었다.
오만이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 단언했다.
그렇다면-.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이 겹치고 얽혔다. 의식이 한곳으로 쏠렸다.
칸나는 북쪽의 씨앗이라 불리던 북부의 겨울에게서 마법의 본질을 배우고, 동쪽의 씨앗인 비비안의 마나를 다루고, 남쪽의 씨앗인 나와 붙어있었다.
더불어 칸나가 펼치는 모든 마법은 항상 내 형상이었다. 모든 게 맞물리며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칸나였군.’
훗날 누구도 도달하지 못한 경지에 이른 칸나가 과거의 날 데리고 왔다는 결론.
확실하지 않았지만, 그런 느낌이 들었다.
순간, 온갖 기억이 지나갔다.
밤잠을 설치게 만드는 끔찍한 기억들이 많았지만-.
“자! 다들 착석! 황태자 딜런 납시오!!”
풀푸츠가 쓰고 있어야 할 왕관을 쓴 딜런이 황금 몽둥이를 붕붕 휘두르며 건방진 걸음걸이로 내려왔다. 본인은 진지했지만,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웠기에 웃음이 크게 터졌다.
“······아빠?”
칸나가 자신이 뭔가 잘못했는지 걱정하는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래, 고맙다.”
나는 웃으며 가져온 선물을 건넸다.
악마의 파편을 모아서 넣은 다음, 그 위에 세계수를 덧댄 검이었다. 이걸 만들기 위해 스왈로이츠부터 엘프, 드워프, 용까지 모두 동원했다. 지팡이 기능까지 내재된 중세 기술의 정수였다.
이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갔는지 계산도 안 될 정도였다.
– 저기에 절망의 악마 조각을 넣지 않았나?
선물을 받고 팔짝팔짝 뛰는 칸나를 보며 끄덕였다.
“와아-! 이거 완전 책임! 이 가득 담긴 지팡이인데요! 완전 이쁘다! 칸나야, 잃어버리지 않게 단단히 책임! 져야겠어! 책임! 은 중요하니까! 혹시라도 잊으면 안 되잖아!”
비비안이 나를 노려보며 칸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자 비비안이 내 멱살을 잡았다.
***
“나는 황태자-. 딜런-. 아론을 제낄 남자-.”
딜런의 술주정에 끌끌 웃으며 맥주를 홀짝였다.
다른 놈들은 이미 전부 쓰러진 뒤였기에, 술집이 조용했다.
그때, 문이 열리고 덩치 큰 놈들이 들어왔다. 베르문트와 달루스였다. 부인이 도망쳤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인지, 둘은 의외로 잘 어울렸다.
“이거 벌써 다 쓰러졌나.”
베르문트가 거칠게 웃으며 내 앞에 앉았다. 아직 경비대 갑주가 어색한지 달루스가 다소 불편하게 앉았다.
“별일 없었지?”
나는 놈들 몫으로 따로 빼둔 맥주 통을 밀어주며 물었다.
“당연하지. 전설적인 영웅 아론이 외성 경비대장으로 있는 곳에 무슨 일이 있겠나.”
베르문트가 웃으며 맥주잔을 내밀었다.
“미안하게 됐네. 약속은 못 지키겠어.”
달루스가 질린 농담을 던지며 웃었다.
나는 남은 맥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녹지 않은 얼음 덕분에 맥주는 여전히 시원했다.
맥주를 깔끔히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는가?”
다시 잔을 채우던 달루스가 물었다. 달루스는 경비조장으로 합류하며 묘하게 표정이 늘었는데, 아직은 어색했다.
“출근해야지.”
해가 떴으니 출근할 시간이었다.
그리 말하니, 산책 이야기를 들은 강아지처럼 쓰러져 있던 놈들이 주섬주섬 일어났다.
교육해둔 보람이 있었다. 나는 손가락을 튕겨 차가운 물을 딜런의 얼굴에 부었다.
“화··· 황태자 딜런에게 감히! 무엄···. 헤헤.”
발작하며 일어나던 딜런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출근할 시간이다.”
다들 어기적거리면서 따라 나왔다.
하수도를 설치한 덕분에 특유의 구린내가 아닌 상쾌한 공기가 나를 반겼다.
“어이, 딜런. 문은 잠그고 나왔지?”
“풀 형님이 마지막으로 나온 거 아닙니까?”
“아무리 결혼이 별로라지만, 꼭 둘이 같이 살아야 하나?”
브릭이 풀과 딜런을 보며 혀를 찼다. 풀과 브릭은 대륙을 흔들 사업을 구상한다며 같이 살고 있었다. 궁상맞았다.
“조장, 이렇게 퍼마셨는데, 꼭 출근해야 합니까?”
얼굴을 잔뜩 찡그린 켈이 투덜거렸다. 켈이 말할 때마다 술 냄새가 가득 풍겼다.
“꼬우면 네가 대장 하던지.”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켈은 투덜거리면서도 따라왔다. 다른 놈들도 어기적거리긴 했지만, 주섬주섬 붙었다.
“대장, 검이 없으십니다.”
취기가 남아 얼굴이 딸기가 된 베르만이 말했다.
그에 허리춤을 보니, 놈의 말대로 검이 없었다. 칸나와 놀아주면서 풀었는데, 놓고 온 듯했다.
“어이, 켈. 검 좀 빌리자.”
“아! 진짜! 저번에 빌린 장미 우산도 안 주지 않았습니까! 안 됩니다! 이거 로사가 사준 거란 말입니다!”
발작하는 켈에 낄낄 웃었다.
주저 없이 자신의 검을 내미는 베르만에 손을 휘저었다. 필요 없었다.
고개를 드니,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적당히 선선하여, 경비 서기 좋은 날씨였다.
“오늘도 좆뺑이치자고.”
– 나도 업뺑이 쳐아겠군.
딜런은 기지개를 켜는 아론의 뒤통수를 보며, 주먹을 꾹 쥐었다.
딜런은 포기하지 않았다.
언젠가 꼭 제낄 것이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