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ven Horses Gate RAW novel - Chapter 300
299. 거인의 걸음 (2)
시월은 느리게 초원을 걸었다. 멀리 오른편으로 광대한 흥안령 대산맥이 아스라이 눈에 들어왔다.
문득 옛 생각이 떠올랐다. 사막에서 월문주 백문보에게 구해진 후 흥안령 잠룡동에서 월문의 비밀 병기로 키워지던 때 칠랑들은 이 초원에서 마적들을 사냥했었다.
그때는 그것이 정도(正道)를 행하는 협행이라 생각했지만, 사실 그 일은 백문보가 칠랑에서 살인을 익숙하게 만들기 위해 준비한 잔혹한 수련일 뿐이었다.
그 초원에 다시 서자 감개무량한 시월이다.
동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애초에 천산을 향해 함께 출발했던 시월 일행은 장성에 채 이르기도 전에 길을 달리했다.
금가장과 이가검문의 후퇴 방향이 다르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천산 인근에서 뿔뿔이 흩어진 의천무맹 천산 원정대에 대한 천마궁과 마도 세력의 추격전은 사방에서 이뤄지고 있었다.
그래서 시월과 무광도 길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금가장은 황하를 향해 남하하고, 이가검문은 요동 방향으로 대 사막을 횡단해 퇴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광은 시월에게 부리와 함께 가라 했지만, 시월은 끝내 부리를 무광 곁에 남겨 놓았다.
천마궁이 보았을 때 십대천문이자 무림 제일의 재력 가문인 금가장은 변경 요동의 십팔장문인 이가검문보다 훨씬 먹음직스러운 사냥감이기 때문이었다.
비록 금가장이 후방에 머물러 있었다고 해도 금가장주를 잡는 순간 천마궁은 막대한 재물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천마궁은 당연히 이가검문보다 금가장 추격에 집중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무광 곁에 부리를 남겨두고 시월은 장성을 넘어 대 고비 사막 동쪽의 초원을 따라 홀로 올라왔던 것이다.
사막 인근에 도착해서도 의천무맹의 패배 소식은 여러 곳에서 들을 수 있었다.
하물며 사막에 접한 초원에서 양을 치는 유목민조차도 그 소식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가검문의 행적을 찾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넓고 넓은 대 고비 사막에서 한 줌 모래알도 되지 않는 이가검문 문도들을 찾는 것은 사실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래서 시월은 사막으로 들어가 이가검문의 문도들을 찾는 대신 그들이 사막을 건너면 반드시 도착하게 될 흥안령 서쪽 초원 근방을 배회하고 있었다.
후우웅!
사막으로부터 사풍이 불어왔다. 시월은 천으로 얼굴을 가린 채 사풍이 불어오는 사막을 바라봤다. 그리고 한순간 그의 몸이 가볍게 떨렸다.
“그일까?”
시월이 중얼거렸다.
사풍에 밀려오는 것은 모래 알갱이만이 아니었다. 떨쳐 버릴 수 없는 무거움, 혹은 수증기를 가득 머금은 먹구름이 멀리서 몰려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이 자연이 만들어내는 현상이 아닌 사람이 만들어내는 기운이란 것을 시월이 알고 있었다.
이런 거대한 기운을 사막의 바람에 실어 보낼 수 있는 자는 천하에 오직 한 명, 천마 석제밖에 없을 것이다.
과거 천마후로부터도 이런 기운을 느꼈었지만, 지금 사풍에 밀려오는 이 마기는 그 당시 천마후에게서 느꼈던 기운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다.
“그자가 왜 이곳으로 왔을까. 아니, 왜 이곳까지 왔을까. 의천무맹 원정대를 궤멸시켰으면 다시 천산으로 돌아갈 줄 알았는데…….”
시월이 한숨을 쉬며 말꼬리를 흐렸다.
이가검문 문도들을 돕기 위해 달려온 시월이지만, 대 고비 사막을 지나 흥안령 입구에서 천마 석제의 기운을 만날 거라고는 전혀 예상치 못했었다.
“어쨌든 쫓는 자가 있다면 쫓기는 자도 있다는 뜻이겠지.”
시월이 천마 석제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는 힘껏 땅을 박차고 몸을 날렸다.
쿠오오!
정신없이 몰아치는 사풍 속에서 일단의 인물들이 낙타를 끌고 사막을 달리고 있었다.
이런 사풍이 불면 사막 여행자들은 잠시 모래 구릉 아래에서 사풍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바람에 휩쓸려 알 수 없는 곳으로 날아가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사막을 달리고 있었다.
“서둘러라! 이제 곧 흥안령이다. 흥안령에 도착하면 잠시 쉬어 갈 수 있을 것이다!”
모래바람에 휩싸인 일행 속에서 사람들을 독려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 말에 힘을 냈는지 일행의 속도가 좀 더 빨라졌다. 하지만 그래도 모래바람보다는 빠를 수는 없어서 한순간에 모래바람이 그들을 덮쳐 사람들의 모습을 감춰버렸다.
후우웅!
어느 순간 다른 방향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런데 다행히 이번에는 모래를 몰아오지 않는 청량한 바람이었다.
그건 곧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 사막이 아니라 북쪽의 초원이거나 혹은 동쪽의 흥안령 대산맥이라는 뜻이다.
“후욱!”
“후우…….”
새로 불어온 바람에 모래바람이 밀려나자 사막을 횡단한 사람들이 저마다 숨을 크게 쉬며 맑은 공기를 들이마셨다.
“서둘러 산으로 들어간다!”
맑은 바람에 잠시 숨을 고르는 사람들을 무리의 우두머리가 독려했다.
며칠째 씻지도 못한 채 찌는 듯한 사막을 횡단해오느라 걸인 같은 모습을 한 이가검문의 장주 이장춘이었다.
모래바람 속에서 사막을 횡단한 사람들은 이장춘과 함께 천산 원정에 나섰던 이가검문의 문도들이었는데, 떠날 때 삼십여 명에 이르던 문도의 숫자가 지금은 십여 명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자가 정말 이곳까지 오겠습니까?”
서두르는 이장춘에게 이가검문의 오랜 가신 한풍검 화충이 물었다.
그러자 이장춘 대신 그 뒤쪽에서 여전히 얼굴을 천으로 감싸고 있던 노인이 대답했다.
“그는 이미 도착했네.”
순간 노인의 말에 숨을 고르던 이가검문의 문도들이 파랗게 질렸다.
“그게 정말입니까?”
이장춘조차도 놀라서 노인에게 되물었다.
그러자 노인이 천천히 얼굴과 머리를 가렸던 천을 풀어내며 말했다.
“모습을 보이지 않고도 자신의 왔음을 알릴 수 있는 존재란 그리 흔치 않소. 더군다나 이렇게 시야가 트여 먼 곳까지 볼 수 있는 곳에서는 더더욱 그렇소. 이제 곧 그가 도착할 테니 문주께서는 문도들을 데리고 서둘러 산으로 들어가시오.”
얼굴을 드러낸 노인, 검옹 천복이 서쪽 사막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말했다.
그러자 이장춘이 두려운 얼굴빛을 보이며 말했다.
“그가 왜 우리를 따라왔을까요. 천무문과 지황문이 아니더라도 아직 그 수장이 건재한 십대천문이 여럿 있는데…….”
“아마도 이가검문이 아니라 날 따라온 걸 것이오. 그러니 문주는 안심하고 산으로 들어가시구려. 내가 그와 담판을 짓겠소. 싸움은 우리 둘만의 것이고, 이후에는 이가검문을 추격지 않을 거란 약속을 받아내겠소.”
“…하지만 어르신!”
“살 만큼 살았고, 천마 정도의 고수와 대결하다 죽는 거라면 무인으로선 영광스러운 죽음일 것이오.”
“안 됩니다. 절대 어르신 혼자 죽음의 길로 들어서게 놔둘 수 없습니다.”
“문주, 문주가 남아 있으면 난 마음껏 싸울 수 없소. 그러니 이 늙은이의 마지막 부탁을 들어주시오!”
검옹 천복이 강요하듯 부탁했다. 이장춘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안절부절못했다.
그러자 검옹 천복이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또 모르지 않소. 최선을 다한다면 내가 그의 검 아래서 살아남을 수 있을 지도.”
“…알겠습니다. 그럼 죄를 짓겠습니다. 산으로 간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이장춘이 이가검문의 문도들에게 명을 내렸다.
그러자 이가검문의 문도들이 주춤거리다가 이내 흥안령 산비탈 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 * *
후우웅!
이번에는 다시 모래바람이 불어 흥안령 쪽에서 불어오던 시원하고 맑은 바람을 밀어냈다.
하지만 앞서 불었던 모래바람과는 사뭇 달라서 사람의 시야를 가리지도 이동을 방해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그 모래바람을 타고 오듯 검은 무복을 입는 인물이 부드럽게 검옹 천복 앞으로 다가섰다.
“역시 기다리고 있었군.”
검은 무복을 입은 자, 천마 석제다.
무인치고는 작은 체구, 그럼에도 철광석처럼 단단한 몸 때문인지 전혀 작게 느껴지지 않는다.
사막을 건너느라 천으로 얼굴을 가려 눈과 조금 드러난 코의 모양으로는 나이를 짐작할 수 없다.
“그대가 날 따라오는 것 같아서 말이오.”
검옹 천복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맞아. 난 그대를 따라왔지. 지황문주 그 어리숙한 자의 목을 자르고 나서 더 이상 이 싸움에 흥미가 없어졌었지. 그래서 천산으로 돌아갈까 했는데, 그대가 천마후을 막고 이가검문 사람들을 지켰다는 소식이 들리더군. 그래서 걸음을 돌렸지. 그동안 상대다운 상대를 못 만나 무료하던 차였는데, 천마후를 막았다는 그대를 두고 어떻게 천산으로 돌아갈 수 있겠는가.”
천마 석제가 마치 재미있는 놀이를 앞에 둔 아이처럼 눈가에 웃음기를 만들며 말했다.
“그러리라 짐작했소. 그런데 좀 버겁구려. 천마후를 이긴 것도 아니고 그저 이가검문이 물러날 시간을 번 것뿐인데…….”
“그렇다고 천마후에게 패한 것도 아니니까. 나와 한 번쯤 겨뤄볼 만하다고 할 수 있지.”
승부 따위는 거론할 바가 못 된다는 듯 천마 석제가 말했다. 그러자 검옹 천복이 고개를 끄떡였다.
“마다하지 않겠소. 다만… 날 베거든 이가검문 문도들에 대한 추격은 이쯤에서 멈춰 주시오. 내가 힘껏 그대와 놀아드릴 테니.”
“후후후, 그야 뭐, 어려운 일이 아니지.”
천마 석제가 웃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그러자 검옹 천복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검문 식구들이 안전하다면 내게도 이 대결은 큰 선물이오. 현 무림에서 천마를 상대했다는 무인을 찾아볼 수 없는데 내가 그 당사자가 될 수 있으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소.”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군. 내 그럴 줄 알았어. 천마후에게 그대에 대해 들었을 때, 놓칠 수 없는 상대라 생각했거든. 자! 그럼 시작해 볼까?”
나이로 따지만 오히려 검옹 천복이 더 많을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천마 석제의 하대는 마치 당연한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검옹 천복 역시 그런 천마 석제의 말투에 어떤 불만도 없는 듯 보였다. 그는 오로지 천마 석제와의 대결에 집중하는 듯했다.
스릉!
검옹 천복의 검집에서 검이 흘러나왔다.
툭!
검이 빠져나간 검집이 그대로 메마른 땅에 떨어졌다. 검집을 버린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천마 석제를 상대하는 검옹 천복의 모습은 비장했다.
“목숨 따위 신경 쓰지 않겠다? 더욱더 마음에 드는군. 천마궁에서도 그대와 같은 고수는 찾아보기 힘들어.”
스릉!
천마 석제가 검옹 천복의 태도를 칭찬하며 마주 검을 빼 들었다.
그러자 검옹 천복이 발로 메마른 땅을 스치듯 차며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천마 석제는 자신과의 거리를 좁히는 검옹 천복을 무심히 바라볼 뿐 피하거나 혹은 먼저 공격할 기척을 보이지 않았다.
검옹 천복과 천마 석제의 거리가 오 장 안쪽으로 좁혀졌을 때, 검옹 천복이 머리 위로 검을 들어 올리더니 흩뿌리듯 천마 석제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파파팟!
검옹 천복의 검이 허공을 가르며 수십 개의 검기를 만들어냈다.
그 검기들이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처럼 천마 석제를 중심을 반경 사오 장 안으로 몰려갔다.
아무리 빠른 신법을 지닌 자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검기의 그물망, 검옹 천복이 노년에 깨달은 검의 정수가 그 일검에 담겨 있었다.
천마 석제는 소나기처럼 자신을 향해 내리꽂히는 검기들을 즐거운 눈으로 응시했다.
“아름답구나!”
천마 석제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동시의 그가 검을 들어 올리더니 앞으로 쭉 내밀었다.
쿠오오!
천마 석제의 검에서 달덩이 같은 빛무리가 일어났다.
카카캉!
천마 석제가 만든 눈부신 검광에 부딪힌 검옹 천복의 검기들이 사방으로 부서져 나가기 시작했다.
슥!
검옹 천복의 검기를 하나하나 부수면서 천마 석제가 검옹 천복을 향해 무겁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