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ven Lives Eight Lives RAW novel - Chapter 31
031
새빨간 사춘기.
*****
내 눈은 어둠과 안개를 뚫고 페노마를 정확히 포착했다. 피투성이와 흙먼지투성이가 된 머리. 앙다문 이빨과 반만 남은 머리카락을 보면 그녀가 원래 미녀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없었다.
“쿨럭! 커억!”
펜드라의 상태도 만만치 않게 심각했다. 고개를 숙이고 어제 먹은 음식까지 게워내고 있다. 광집중과 돌벽, 마력구, 대지 폭발까지 네 개의 마법을 한 번에 준비했고, 그 와중에 안개, 늪, 염력을 쓰니 몸에 무리가 온 것.
‘중급 학술원을 졸업한 정식 마법사라고 했지. 그래도 큰 거 하나, 작은 거 여섯 개가 한계인가. 르암인 수준을 대충 알 것 같군.’
삼사드는 열 개가 넘는 보조, 신체 강화 마법을 자기 몸에 걸고 적에겐 비슷한 수의 약화, 저주마법을 걸었다.
그러고도 여유가 남아 공격마법까지 썼으니, 르암인과 승천자의 재능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는 더는 설명이 불필요했다.
사람이란 게 한 번 없어 봐야 풍족했던 때가 얼마나 행복했는지를 깨닫는다던데, 내가 딱 그 꼴이었다. 검술 하나만 삼사드 수준의 반의반만 회복해도 페노마는 십초지적인데, 그게 안 돼서 이렇게 개고생하고 있지 않나.
‘쩝.’
나는 아쉬움을 삼키며 페노마에게 뛰어들었다. 나보다 몇 발 더 빨리, 코그린이 페노마의 지척에 접근했다. 혹시 내가 아닌 걸 알아챌까 봐 숨소리도 줄이고, 발걸음도 살금살금 걷는다.
하지만 페노마는 나든, 내가 아니든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녀가 땅바닥을 나뒹굴며 코그린에게서 멀어졌다. 그러곤 검을 휘둘렀다. 그녀의 문신과 검에서 붉은빛이 서렸다.
“먹어라!”
“헉?!”
과거의 기억이 떠오른 듯, 코그린이 기겁하며 옆으로 피했다. 하지만 페노마의 검에선 아무것도 나가지 않는다.
빠른 판단능력이 만들어 낸 페이크! 코그린이 얼굴을 붉히며 페노마에게 롱소드를 집어던졌다. 페노마는 그녀를 비웃으며 롱소드를 쳐냈다.
페이크까진 잘했는데 롱소드는 치지 말지 그랬냐. 왜냐하면, 뒤에서 피오드가 성난 황소처럼 달려들잖아.
“죽어랏!”
기회를 잡은 피오드 처음 세운 계획을 무시하고 검을 휘둘렀다. 스칼라 상급이라고 무시했지만, 그 정도만 되도 사람 따위는 일격에 세로로 쪼갤 수 있다.
“이······!”
페노마가 급하게 몸을 돌려 검을 휘두른다. 하지만 피오드의 검은 그녀의 검을 가볍게 쳐내고 오른팔마저 깊게 베었다.
바둥바둥.
페노마가 급히 일어서며 피오드한테서 멀어졌다. 하지만 피오드는 날렵한 움직임으로 페노마에게 뛰어들었다. 위에서 밑으로, 한 번에 머리통을 쪼개려는 심산!
오른팔은 못 쓰고, 피오드는 지척에 접근해있다. 무슨 수로 피오드의 검을 막을 건가.
그녀의 선택은 검을 왼손으로 고쳐 잡고, 망가진 오른팔을 내미는 것이었다. 오른팔에 새겨진 문신이 붉게 달아올랐다.
“또 연막이냐!”
피오드가 허튼수작 부리지 말라는 듯 일갈했다! 그가 콧방귀도 뀌지 않고 검을 내려쳤다.
‘안 돼!’
저러면 안 된다! 처음 계획대로 하는 척만 하고 물러나지 왜 괜히······! 나는 힘을 비축하느라 입을 열지 못하고, 피오드를 보며 눈썹만 꿈틀거렸다.
내 마음을 알았는지, 접근한 융이 크게 고함질렀다.
“안됩니다!”
“뭐···?”
피오드가 어리둥절해하며 융을 바라본 그 순간. 페노마의 오른팔이 폭발했다.
꽈앙!
오른팔을 제물로 바친 폭발의 위력은 대단했다. 피오드는 양팔이 부러져 저만치 멀리 날아가고, 융도 폭발에 휩쓸려 피부가 자글자글 달아올랐다.
그래도 세검을 쓴 것보단 못하다. 만약 저게 아까와 같은 위력이었으면, 피오드는 즉사, 융도 사경을 헤맸을 것이다.
“크으으! 으으으으!! 으으아악! 갸아악!!”
폭발이 가시자, 드러난 페노마는 오른팔이 어깻죽지까지 소멸했다. 그녀는 오른 어깨를 부여잡고, 피눈물을 흘리며 융에게서 멀어졌다. 아니, 왜? 융을 공격하지 않고?
나는 바로 눈치챘다. 페노마도 한계다! 대지 폭발은 그녀에게 외상 이상으로 심대한 내상을 입혔다.
“끄아아악!”
융도 그것을 아는지 악을 쓰며 페노마에게 달려들었다. 반 토막 난 검에 서린 푸른 오러가 뱀의 혓바닥처럼 두 갈래로 갈라져 페노마의 목과 상체를 노린다!
‘아······!’
융의 오러를 보고 난 속으로 탄식을 내뱉었다. 지금 그걸 두 갈래로 나누면 어떡하냐! 폭발을 우려해서 하나라도 통하라는 것 같은데, 그건 아니지!
‘피오드도 그렇고, 융도 그렇고 다들 왜 그럴까 진짜!’
할 수만 있다면 1분 전으로 되돌아가서 피오드부터 갈구고 싶다. 하지만 내 속마음은 속마음일 뿐이고, 전투는 계속해서 전개되었다.
“제발 좀 꺼져어어!!”
그녀는 입술을 피가 나도록 씹으며 외팔로, 익숙하지 않은 왼팔로 오러를 일으켰다.
오러의 수로는 페노마를 이기지 못한다. 아무리 외팔에 좌수검이라도 오러는 오러. 불완전한 오러 여섯 조각이 융의 오러 두 개를 깨부쉈다. 오러 조각 다섯 개가 사라졌지만, 하나가 남아 융을 노린다!
절체절명의 순간. 오러 조각이 융의 상체를 베기 전!
“이 개년이 날 속여!”
코그린이 드롭킥을 날렸다! 그것도 망가진 어깻죽지를 정확히 노리고!
상처 부위에 날린 드롭킥은 효과가 대단했다. 페노마가 ‘그르륵!’ 하는 소리와 함께 눈을 까뒤집었고, 그 즉시 제어자가 사라진 오러가 폭발을 일으켰다.
퍼엉!
오러는 삼인은 멀리 날려 보냈다. 융도, 코그린도 입에서 피를 줄줄 흘리며 정신을 잃었다. 하지만 페노마는 날아가는 순간에 정신을 차렸다.
“꺄아악! 아으아아아!!”
페노마가 비명을 지르며 맹인처럼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른다.
정신을 차린 게 아니라 고통 때문에 깨어난 거였네. 어깻죽지 맞아서 많이 아픈가 보구나.
“어디 있냐! 다 죽여주마! 그 애새끼! 너 혼자 숨어있는 거 다 안다! 어서 나와라!”
그래도 검사는 검사. 엄청난 고통에 머리가 마비돼도 내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건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그녀가 생명력을 끌어올려 오러를 마구 쏘았다.
피오드와 코그린, 융 기사 모두가 쓰러진 덕분에 오러는 그들을 맞추지 않고 저만큼이나 날아가 엉뚱한 집을 때려 부쉈다.
이거면 됐다.
은신과 암살은 나의 가장 큰 특기. 그다음이 인내심이다. 나는 폭발에 두 번이나 휩쓸리면서도 조심스럽게 땅을 기어서 페노마의 바로 옆까지 접근했다.
준비를 끝내고 벌떡 일어선다. 나는 연인에게 속삭이듯이, 그녀의 귓가에 달달한 숨을 불어넣었다.
“나 여기 있어.”
“허윽?!”
페노마는 급하게 몸을 돌렸지만, 이미 늦었다.
나는 아밍 소드를 양손으로 꽉 쥔 채 쥐불놀이를 하듯이 화려한 회전을 하며 페노마를 향해 베어 들어갔다. 검날 끄트머리에는 흰색의 빛 망울이 서려 있었다. 날 끝에 서린 빛을 보고 페노마가 경악했다.
“오, 오, 오··· 오러??”
페노마도 검을 휘둘러 마주 오러를 쏜다. 이렇게까지 궁지에 몰았는데 마나에 여유가 있다니, 정말 징하다. 그래도 오러의 강도가 불완전하다.
이러면 가능성이 있다. 나는 대놓고 폭발을 날리라는 듯이 손만 뻗으면 닿을 가까운 거리에서 페노마와 검격을 주고받았다.
챙! 채쟁!
한 호흡에, 열 번이 넘게 검을 주고받는다.
부족한 마나, 오러 컨트롤은 초능력으로 대신한다. 내 검에 맺힌 자그마한 오러 방울이 바쁘게 검날을 타고 왔다갔다하며 상대적으로 부족한 오러량을 보완해주었다.
“이, 이익···! 끄흑?!”
몇 번 검을 주고받는 사이에 페노마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약자에게서 뺏은 생명력을 회복, 마나 변환으로 쓸 시간도 없이 바쁘게 움직이자 망가진 신체에 바로 영향받는 것
‘아······. 머리 아파.’
나도 머리가 깨질 것 같이 아프다. 초능력으로 오러 압축을 대신하자 뇌가 비명을 내지른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무표정으로 사자검법을 사용한다.
상대가 쉴 틈을 주지 않는 화려한 맹공! 이것이 사자검법의 묘리이다.
흔들!
잠시 후. 고통, 내상, 과다출혈의 삼박자가 어우러지자 페노마의 몸이 흔들렸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불안정한 하체에 날리는 로우킥!
우지끈! 페노마의 왼 무릎에서 통나무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급히 입술을 깨물며 통통! 튀는 움직임으로 내게 멀어졌다.
‘통했다!’
나는 멀어지는 그녀를 확인하고 쾌재를 불렀다. 괜히 무표정을 보여준 게 아니다. 페노마는 안색 하나 변하지 않는 나를 보고 장기전을 예상했지만, 사실 장기전으로 가면 오히려 내가 불리하다.
전투는 무조건 단기전으로 끝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내게도 결정타를 준비할 시간이 필요했고, 고맙게도 저년이 알아서 시간적 여유를 주었다.
‘아까 내 가슴을 칼로 가를 때 하려던 거다. 어디 한 번 지금 맞아봐라.’
“후우~!”
호흡을 깊게 고른다. 마나는 묵직하게, 초능력은 재빠르게 회전한다. 나는 아밍 소드를 창처럼 꼬나 쥐고, 차지를 날렸다.
내 몸이 길쭉하게 앞으로 늘어났다. 아밍 소드 끄트머리는 환한 백광이 서려 있었다. 페노마는 겨우 시간을 얻다가 아까와는 다른 기세에 혼비백산하여 이를 악물고 마주 오러를 일으켰다.
페노마의 오러의 색은 아까와는 다른, 옅은 붉은색이었다. 오러를 쓰기도 힘들다는 증거!
불완전한 오러를 똑같이 불완전한 오러로 뚫을 수 있을까? 될지 안될지 모르면 한 가지 수를 더 부려야 한다.
나는 미리 오러를 쪼개서 아밍 소드 표면을 덮었다. 초능력을 이용해 오러를 길게 늘여서 검신을 장식한다. 그것은 마치 문신과도 같았다.
우웅!
아밍 소드 표면에 흰색의 문신이 그려졌다. 문신의 패턴은··· 흐트러졌지만, 중간보스의 창날에 새겨진 것과 똑같았다.
그것은 바로 생명력 폭발!
“어억?!”
문신을 보고 페노마가 괴성을 내질렀다.
‘너도 코그린하고 똑같네.’
다른 점은 페노마는 오러를 쓸 수 있었다. 그녀는 오러를 최대한 넓게 뿌려 다음에 있을 폭발을 대비했다.
폭발을 대비해 넓게 퍼진 오러. 그만큼 추가로 약해진 오러. 하지만······.
‘진짜? 정말로 이게 생명력 폭발이라고 생각해?’
상식적으로 내가 뭘 안다고 문신을 쓸 수 있겠냐. 하지만 생명력 폭발의 위력을 아는 페노마는 문신을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방어할 수밖에 없었다.
첫 만남에 대뜸 폭발을 사용했으니 더욱 밑을 수밖에 없으리라!
경험했기에 오는 실수!
문신의 위력을 알기에 할 수밖에 없는 방어!
페노마도 1초도 지나지 않아 기만을 눈치챌 것이다. 하지만 그 1초면 충분하다. 왜냐하면 1초가 지나기 전에 내 오러가 그녀의 오러를 뚫고 들어갈 테니까.
치지직!
흰색의 오러와 옅은 붉은색의 오러가 맞부딪치며 불똥을 일으켰다. 불똥이 일어나는 시간은 아주 잠시, 곧이어 흰색이 옅은 붉은색을 뚫고 안으로 파고들었다!
이거다. 이게 페노마의 약점이고, 마지막에 융이 오러를 두 갈래로 나눈 게 실수인 이유다.
페노마는 타인의 생명력을 갈취해서 마나의 순도가 낮다. 순도가 낮으면 오러의 수준도 약하다. 거기에 검법부터가 화려하게 사방으로 오러를 뿌리는 거니 안 그래도 약한 오러가 더 약해졌다.
그녀는 약한 오러를 양과 생명력 폭발로 보완했다.
즉, 페노마를 이길 방법은 화려한 공격과 초근접전을 벌여 쉴 틈을 주지 않고, 손해를 감수하여 한 점에 힘을 모아 때려 박는 것.
괜히 거리를 둬서 생명력 폭발이나 소낙비 같은 오러를 사용할 틈을 줘선 안 된다.
위험을 무릅쓰고 융에게 말을 전했으면 아까와 같은 일은 없었으려나. 아니, 융이 내 말을 믿지 않았을 수도 있다. 거지 꼬맹이가 익스퍼트한테 훈수를 두다니, 나라도 안 믿는다.
어쨌든 이젠 상관없는 이야기. 융이 못 하면 내가 직접 하면 되는 일이다.
파지지직!
흰색 오러가 옅은 붉은색 오러를 반 이상 파고들었다. 페노마가 실수를 깨닫고 오러를 일점에 집중시켰다.
여기에 마지막! 나는 이를 악물고 초능력까지 써서 페노마의 몸을 찍어 눌렀다.
“꺽!”
페노마의 몸이 흔들렸다. 오른 어깻죽지에서 피가 콸콸! 흘러나오고 기껏 집중한 오러가 희미하게 깜빡였다!
나는 오러에 힘을 불어넣으며 악을 썼다.
“여기까지 했는데 죽으라고 좀!”
푸욱!
마침내 흰색의 오러가 페노마의 가슴을 찔렀다. 그녀가 가느다란 비명을 질렀지만, 나는 멈추지 않고 팔을 끝까지 밀어 넣었다.
우두둑!
갈비뼈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손을 타고 흐른다. 몸이 앞으로 기울고, 얼굴이 지척에서 마주쳤다.
완벽한 심장 파괴! 페노마도 자신이 몇 초 후면 죽을 거란 걸 눈치챘는지 허탈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너, 너는··· 너는 대체 뭐냐.”
“네가 알 바야. 그냥 죽으라고.”
“저, 저택에 너 같은 놈은 없었······.”
“아, 그게 너였어? 꼼짝 말고 거기 있었으면 혼자 있는 나를 쉽게 죽였을 텐데 아쉬워졌네.”
“키킥! 너, 넌··· 네가 안 죽을 거라······.”
키득.
죽어가는 와중에도, 악녀(惡女) 페노마는 미소 지었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리는 왼팔을 들어 칼의 손잡이를, 내 오른손까지 함께 붙잡았다. 마지막 생명력을 끌어다 썼는지 떨어뜨리기가 힘들다.
우웅!
페노마의 왼팔이 붉게 달아올랐다.
“같이 죽자.”
최후의 생명력 폭발. 이 와중에도 나를 길동무로 삼겠다는 계획!
“킬킬킬!” 나는 웃었다.
좋다. 이건 아주 좋다.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는 마음가짐은 나를 더욱 즐겁게 만든다. 나 또한 그녀를 마주 보며 킬킬대며 웃었다.
페노마의 표정이 묘해졌다.
“즐겁냐. 미친놈아.”
나는 히죽 웃으며 답변했다.
“그래. 난 사춘기거든.”
웬 엉뚱한 말을 하느냐는 듯, 페노마의 얼굴이 구겨졌다. 하지만 이건 아주 중요하다.
내 나이 열한 살. 이제 사춘기가 와도 이상할 나이가 아니다.
여태까지의 삶은 약에 찌들거나, 나노머신으로 신체가 조작되거나, 마나로 육체가 개화했었다. 즉, 약하디약한 호르몬 따위에 영향받을 새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 삶의 션은 어떠한 혜택도 받지 못했다.
자연 그대로의 나약함을 간직한 션의 육체! 호르몬에 싱숭생숭해지는 것도 당연! 저택에 들어갈 때 흥분을 제어 못 한 이유가 그것이다.
나는 사춘기다! 아홉 살의 주박을 풀고, 열한 살까지 살아남아 드디어 사춘기를 겪을 나이가 된 것이다!
사춘기 션! 거시기와 겨드랑이에 털이 나는 션!
호르몬에 휘둘려 엉뚱하고 바보 같은 생각을 하는 성장기의 뇌! 내 정신에 새롭고, 혼란스러우며 어리석은 자극이 휘몰아친다!
여기서··· 나는 혼란을 통해 내가 살아있음을 느꼈다. 나는 살아있고, 그리고 죽지 않고 계속해서 살아갈 거다.
“그러니까 너 혼자 죽어라.”
나는 왼쪽 허리에 손을 대었다. 허리춤에는 바지를 뚫고 고이 보관된 숏소드가 있었다. 뜨겁게 달아오른 숏소드 손잡이가 왼손바닥에 느껴졌다.
회심의 미소를 짓던 페노마가 숏소드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 썅. 어디······.”
서걱! 말은 다 이어지지 못했다.
번개처럼 올려 벤 숏소드 날이 그녀의 목을 절반이나 갈랐다. 높게 쳐든 손에 힘을 빼자 반동으로 숏소드가 넓게 회전한다, 나는 다시 숏소드 손잡이를 잡았다.
한순간에 숏소드가 역에서 정으로 바꿔 잡혔다. 나는 그대로 반쯤 남아 덜렁거리는 페노마의 목을 내려쳤다.
뿌득!
목뼈가 베이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페노마의 목이 떨어졌고, 피분수가 높게 솟았다.
악녀 페노마의 최후였다. 그와 동시에 터지기 일보 직전이던 왼팔도 잠잠해졌다.
“아오~!”
나는 페노마의 죽음을 확인하고, 긴 숨을 내쉬며 아밍 소드를 뽑았다. 그러곤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초능력을 너무 써서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인중이 뜨끈해져서 슥- 닦으니 빨간 게 묻어나왔다. 초능력 과다 사용으로 코피까지 흘렸다!
“그래도 다 끝났으니 이제 좀 쉬··· 일······?”
이대로 쉬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게 또 내 인생이다.
페노마가 몬스터를 부른 지 1분. 다행히 영지는 절반 이상 타버렸고, 거기에 몬스터도 휩쓸려 전멸에 가까운 손해를 입었다.
하지만 거기에서도 죽지 않은 놈은 분명 있을 거고, 녀석들은 이미 죽고 없는 주인의 명령을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 여기로 달려오는 중 일 거다.
아직 쉴 때가 아니다. 나는 멀리 내던진 책을 다시 메고, 쓰러진 사인을 초능력으로 들었다. 섬세한 조작은 불가능하니, 짐짝처럼 덜렁이며 든다.
나는 호흡을 고르며 발걸음을 옮겼다.
“너, 너는··· 오··· 러를······.”
“아, 시끄럽고. 기절이나 해요.”
이리저리 흔들린 탓에 융이 눈을 떴지만, 뒷목을 때려 기절시킨다. 나는 어둠을 벗 삼아 울음이 들리지 않는 곳으로, 영지 밖까지 도망쳤다.
영지를 숨어서 나가는 도중, 불로도 가려지지 않는 격한 싸움의 흔적이 눈에 띄었다.
“저··· 건?”
땅바닥을 다 까뒤집은 폭발 자국은 페노마의 생명력 폭발과 똑같았다.
폭발 자국이 사방에 몇 개나 널려있고, 수십이 넘는 병사들, 몇 명의 기사들의 시체도 눈에 띄었다. 그리고 초반에 내가 보았던 문신 몬스터도 목과 사지가 베인 체 널브러져 있었다.
‘아까 저택을 뒤질 때 들린 폭발소리가 저거였군.’
나는 폭발로 너덜너덜해진 기사 시체의 문양과 피오드의 옷에 그려진 문양이 똑같은 걸 확인했다. 저기서 융과 피오드, 그리고 나머지 일행이 페노마와 중간보스와 격한 싸움을 벌인 것 같았다.
‘흠··· 정확하진 않지만 페노마 이년은 지네가 유리하다 생각해서 전투에서 빠지고, 저택 근처에 불을 지른 미친놈을 찾으러 혼자 온 거겠지.’
하지만 전투는 인간 측의 승리. 생존자는 겨우 넷이지만, 최고 고수인 융이 살아남았다.
전후사정은 대충 알았다. 나는 손을 뻗어 기사들의 검, 종자들이 들고 있던 물과 음식, 치료도구를 챙긴 뒤 영지를 빠져나왔다.
불에 정신이 쏙 빠진 머저리 몬스터들은 내 그림자도 찾지 못했고, 주인의 시체도 못 찾은 채로 밤새 무너진 영지를 배회했다.
032. 홀로서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