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151
제150화
성대진과 함께 태평전을 나온 진천은 선휴각으로 향했다.
정맹이 자랑하는 십대명소 중 하나인 선휴각은 최고의 귀빈들만이 들 수 있는 장소였다. 보는 이의 각도에 따라 모양이 완전히 달라지는 구조로 인해 선휴각은 중원에서 가장 독창적인 건축물로 손꼽혔다.
전날 정맹을 방문하고 돌아온 고량과 차소영은 선휴각 주위를 몇 번이나 빙빙 돌며 시시각각 변하는 전각의 모습에 찬탄을 연발했다고 했다. 층마다 오색의 등이 내걸린 밤에는 더욱 아름답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외부만큼이나 특이하다는 내부를 구경할 수 없었던 아쉬움을 토로했다. 진천은 그들 연인을 대신해 선휴각 안쪽을 자세히 보아둘 참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런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선휴각이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진천과 성대진에게로 달려온 사십 대 무인이 행선지가 바뀌었음을 알렸기 때문이었다. 성대진에게 인사를 한 무인이 진천에게 말했다.
“맹주님께서 부르십니다.”
성대진과 헤어진 진천은 탄탄한 체격에 멋들어진 구레나룻을 기른 무인을 따라갔다. 저승사자 같은 성대진이 그에게서 떨어지자 사람들이 달라붙었다. 구레나룻 무인에게는 그들을 쫓을 권위가 없었다.
진천은 지척까지 다가와 그를 살피는 수백 줄기의 시선들을 담담히 받아냈다. 수의 차이는 있지만 창인에서 수년 간 일상적으로 겪었던 일이었기에 불편하기보다는 익숙한 느낌이 더 컸다.
그러나 맹주전으로 가는 경로를 가로막은 인파가 점점 불어나 보행이 어려워질 지경이 되자 성대진이 그리워졌다. 어디선가 지켜보고 있다가 그의 심사를 읽기라도 한 듯 군중을 뚫고 나타난 성대진이 단숨에 난제를 해결해주었다.
“셋을 셀 때까지 내 앞에 얼쩡거리는 놈들이 있으면 무광뢰(無光牢) 구경을 시켜주마.”
성대진의 입에서 ‘하나’가 나오기도 전에 이삼천에 달하던 군중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아무도 악명 높은 뇌옥인 무광뢰에 들기를 원하지 않았고 집법단주에게 실행의지가 있는지 궁금해 하지도 않았다.
“명색이 맹주의 사자라는 놈이 이렇게 칠칠맞아서야 쓰겠느냐? 쓸모없는 놈 같으니.”
성대진의 꾸중에 구릿빛으로 그을린 구레나룻 무인의 면상이 시커메졌다. 대놓고 반발을 하지는 않았지만 콧김을 뿜어내며 씩씩거리는 양이 성대진을 크게 어려워하지는 않는 듯했다.
진천은 의아했다. 구레나룻 무인은 상당한 내기를 발산했지만 절정의 경지로 판단하기에는 미흡한 바가 있었다. 진천이 보았던 용호들의 용모화에도 없는 인물이었다. 그런 이가 정맹 공식서열 십칠 위의 거물인 성대진 앞에서 뻣뻣한 태도를 보인다는 것은 기이한 일이었다.
단신의 성대진이 대뜸 손을 뻗어 구레나룻 무인의 코를 잡았다. 버티면 코가 뜯겨나갈 판인지라 구레나룻은 자세를 낮출 수밖에 없었다.
“무슨 짓입니까? 나는 맹주님의…….”구레나룻이 코맹맹이 소리를 냈다.
“무슨 짓? 짓? 네놈이 정녕 간덩이가 부었구나. 맹주전에 들면 똥개도 제가 호랑이인 줄 안다더니 딱 그 짝일세 그려. 이 거지발싸개만도 못한 놈이 맹주전 물을 먹더니 나와 맞먹으려 드네. 이놈아, 맹주를 들먹이면 네가 맹주의 손톱에 낀 때라도 된다더냐? 호가호위 신공을 쓸 참이면 아까 파리들이 몰려들었을 때 발휘했어야지 어디서 흰소리야? 내가 이 자리에서 네놈을 즉결처분 하더라도 맹주는 눈썹 한 올도 까딱하지 않을 게다. 그럴지 안 그럴지 확인해 볼까? 물론 너는 염왕전에서 알게 될 테지만.”
구레나룻은 성대진의 협박에 굴복했다.
“사, 살려주십시오, 성 단주님.”
“그럴 수야 없지. 너를 이대로 놓아주면 앞으로 온 맹의 어중이떠중이들이 기어오를 텐데. 일단 무릎부터 분질러주마. 나하고 눈높이는 맞춰야지.”
성대진이 걷어차지도 않았는데 구레나룻이 비명을 질렀다.
쓴웃음을 짓고 있던 진천이 말렸다.
“참으십시오, 어르신.”
구레나룻의 코를 그대로 잡은 채 성대진이 진천에게 고개를 돌렸다.
“내가 이놈을 봐줘야 하는 이유를 세 가지만 말해 보거라.”
“…….”
“어째서 말이 없느냐? 부러울 정도로 매끈한 혀를 가졌으면서. 네가 보기에도 이놈이 용서불가의 죄를 범한 것이렷다?”
성대진의 언행에서 권왕의 모습을 본 진천은 고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권왕에 따르면 성대진은 젊은 날 그에게 크게 혼쭐이 난 후 정맹의 인사로서는 ‘드물게’ 정파 무인다운 행보를 보였다고 했다. 집법단주라는 악역을 자처했지만 진천은 인명록에서 본 성대진의 과거행적을 통해 그가 원칙만 앞세우는 고집불통이 아니라 정이 많고 융통성도 상당한 인물임을 알고 있었다. 물론 명문대파 출신 특유의 권위의식과 배타성을 지닌 인물이기도 했다.
“그를 용서해주십시오, 어르신. 부탁드립니다.”
진천이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청했다. 성대진이 구레나룻의 코를 잡아당겨 그의 귀에 입술을 대고 속삭였다.
“네놈을 두고 근자에 여러 소리가 나오더구나. 맹주전에 들었다가 혀를 간수하지 못해 경을 치르는 놈들이 허다하다. 오늘 이 아이가 아니었으면 네놈도 다시는 두 발로 걸어 다니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을 게다. 은혜를 입었으니 감사의 예를 표해야지. 그게 사람의 도리다, 이놈아.”
성대진이 코를 놓아주자 구레나룻이 얼른 진천에게 허리를 접었다.
“저를 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어리숙한 구레나룻을 보며 진천은 성대진이 그에게 생존에 보탬이 되는 교훈을 내려줬음을 깨달았다. 진천이 구레나룻에게 답례할 짬을 주지 않고 성대진이 그의 어깨를 툭 쳤다.
“네 부탁을 들어주었으니 너는 내게 빚을 졌다. 가는 게 있으면 오는 것도 있어야 하는 법. 훗날 네 세상이 오면 반드시 갚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어르신에게 배운 관용의 덕을 잊지 않겠습니다.”
“그런 건 잊어도 된다. 내 말은 때가 되면 빚을 갚으라는 게다. 이자까지 쳐서.”
“…….”
쓴웃음을 짓는 진천을 올려다보며 성대진이 껄껄 웃었다.
정맹의 정중앙에 위치한 맹주전은 정방형의 오층 건물이었다. 지붕엔 오 장 높이의 삼각뿔이 솟아있었는데 아무도 그 용도와 의미를 몰랐기에 정맹 오대 수수께끼로 불렸다.
일만 평 넓이의 인공 호수 한 가운데 자리 잡은 맹주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동서남북의 방위에 하나씩 놓인 다리를 건너야 했다. 어떤 다리를 건너는지에 따라 입전자의 신분이 드러났다. 구레나룻은 진천을 정맹 최고위직만 사용할 수 있는 동교(東橋)로 안내했다.
다리를 건너 전각에 드니 바로 맹주의 집무실이 나왔다. 북천도왕 강운은 화려한 곤룡포를 걸치고 황금 태사의에 앉아있었다. 진천은 외조부의 모습이 낯설었다. 보름 전 삼보장 지하연무장에서 칙칙한 갈색무복을 입고 쌍칼을 휘두르던 이와 동일인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진천이 들어가자 강운이 말했다.
“물러들 가라.”
진천은 사방의 벽, 그리고 천장과 바닥에서 도합 여덟 개의 기운이 은밀히 이동하고 있음을 감지했다. 외조부의 호위대일 터였다.
“가까이 오너라.”
강운의 명에 따라 진천은 태사의 밑으로 가서 섰다. 외조부를 보기 위해 진천은 고개를 들어야만 했다.
측근들을 물리쳤음에도 목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강운이 기막을 치자 진천은 안심하고 인사를 올렸다.
“진천이 할아버님을 뵙습니다.”
강운은 응답을 주지 않고 진천을 쏘듯이 내려다보았다. 외조부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직시하며 진천은 오늘의 대화도 길지 않을 것임을 예감했다. 정파의 지존 북천도왕은 다변을 즐기는 성정이 아니었다.
“검왕을 어떻게 끌어들인 게냐?”
강운이 최고의 관심사부터 꺼냈다.
“권왕께서 그 어르신에게 삼보장에 오시기를 청했습니다. 검왕 어르신은 그 청에 응했을 뿐입니다.”
너무나 간단한 답변에 어이가 없는지 강운이 백미를 씰룩였다.
“그가 마련과의 전쟁에는 나서지 않는다는 말이더냐?”
“그렇습니다. 하지만 청컨대 할아버님만 알고 계십시오. 저희를 위해서 다른 이들은 모르는 게 좋습니다.”
진천을 응시하며 침묵에 잠겼던 강운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정심원의 판결을 재고해 달라고 들었다. 불가하다면 어쩔 테냐?”
진천은 그로 하여금 주안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한 조치가 외조부의 지시에서 비롯되었음을 짐작하고 있었다. 외조부는 그로써 마왕과 장왕으로부터 그를 보호하려고 했을 터였다. 외손자가 예뻐서가 아니라 원주 강가의 미래를 위해서.
“저는 반드시 마련과 싸워야 합니다, 할아버님. 그래서 큰 외숙이 남긴 죄업을 조금이나마 씻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나중에 제가 가문의 일원이 되더라도 정파 무림의 반감은 여전할 것입니다.”
“그럴 필요 없다. 무엇을 하든 반발은 따르는 법. 결국은 가진 바 힘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나는 전날 연이에게 했던 약속을 지킬 참이다. 너는 강씨(姜氏)가 될 것이다. 사대세가나 제 문파의 비난은 신경 쓰지 마라. 정파라 하나 강자존의 철칙이 사마의 무리보다 더욱 철저하게 지켜지는 세계이다. 압도적인 무력을 증명하면 아무도 진이의 과오를 두고 입방아를 찧지 못할 것이다.”
“죄송하지만 지금은 강가의 일원이 될 수 없습니다.”
강운이 태사의에서 벌떡 일어섰다.
“내 명을 거역하겠단 말이냐?”
외조부가 발하는 가공스러운 압기를 견디며 진천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아닙니다. 어머니는 제게 강호에 나가면 할아버님의 인정을 받아 가문의 일원이 되라고 신신당부했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꿈을 저버릴 수 없습니다.”
“하면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게냐?”
“저는 다만 시기를 늦추어달라는 것입니다, 할아버님. 지금 제가 가문에 들면 복잡한 문제가 생길 터이기 때문입니다.”
“복잡한 문제라니?”
“제가 속한 세평회는 이미 마련과의 전쟁에 돌입했습니다. 마련과 전선을 형성한 곳은 세평회 뿐입니다. 하지만 제가 공식적으로 가문의 일원이 되면 그들은 당연히 정맹도 적으로 삼을 것입니다.”
“그 문제라면 걱정할 것 없다. 마련과는 언젠가는 붙어야 할 터. 조금 앞당겨지더라도 상관없다. 정맹은 마련보다 강대하다.”
“외람되지만 그리 간단치는 않을 듯싶습니다. 이번에 검왕 어르신께서 삼보장에 드시는 것은 양날의 검입니다. 저희에겐 안전한 귀환처가 확보되겠지만 사벌의 경계를 불러일으킬 테니까요. 그들은 세평회가 마련과 대립해 그들에게 피해를 입히는 상황은 내심 반기겠지만 제가 정파 무림의 핵심이라 할 원주 강가의 혈족임이 드러나면 방관을 멈추고 적극적으로 개입할 공산이 큽니다. 예컨대 마련과의 연수를 시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 되면 곤란합니다. 사마 연합이 총 네 명의 무왕을 보유한 데 반해 정맹은 할아버님과 권왕 어르신 둘 뿐이니까요. 검왕 어르신은 당신을 건드리지 않는 한 누구하고도 싸우려 들지 않을 거라 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마련을 충분히 약화시키기 전까지는 정맹은 세평회와 거리를 두는 게 낫습니다. 그러니 분부를 유예해 주시길 바랍니다, 할아버님.”
홀린 듯 진천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강운이 태사의에 착석했다.
“그럴 듯한 소리다만 네가 마련과의 전쟁에서 목숨을 잃는다면 다 헛일이 아니더냐?”
진천이 입술을 깨물었다.
“저는 죽지 않을 것입니다. 기필코 마도를 타도하고 사벌을 멸해 정파 천하를 열겠습니다. 그런 연후 할아버님의 손자이자 어머니의 아들임을 당당히 세상에 알리겠습니다.”
“포부는 가상하나 의지와 각오만으로는 생존을 보장할 수 없다. 너는 강하기에 더더욱 위험하다. 마왕과 장왕이 최우선적으로 너부터 제거하려 들 테니까. 그러니 권왕과 검왕이 지키고 있는 주안에서 나오지 말고 무공수련에 전념하도록 해라. 이따금 삼보장을 찾아 네 성취를 확인하마.”
이야기가 원점으로 돌아가자 진천은 맥이 빠졌다. 그러고는 예감이 틀렸음을 알았다. 외조부와의 대화는 길고도 길어질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