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lent Jincheon RAW novel - Chapter 49
제48화
사흘 후 아침 일찍 백도방주 오재현이 다시 삼보장을 찾았다.
그와 여상구가 충돌할 것을 염려한 진천은 둘이 만나기 전에 오재현을 데리고 서둘러 삼보장 밖으로 나갔다. 주안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보연천(寶淵川)의 인적 드문 갈대밭에서 진천은 오재현과 밀담을 나누었다.
오재현은 지난 삼 일 동안 백방으로 애를 써 보았지만 절정의 무위를 가진 용병의 포섭에 실패했다고 알렸다. 눈이 뒤집힐 정도의 거금을 제시해도 상대가 마령 문가임을 알고는 하나같이 등을 돌리더라고 했다. 오재현이 성과물을 들고 올 거라 기대하지 않았기에 진천은 실망도 없었다.
“이제 어떡하면 좋겠느냐?”
마음고생이 심했는지 십오 일 전 오인결에서 보았을 때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대웅처럼 피골이 상접한 오재현을 냉정한 눈으로 바라보며 진천이 대답에 뜸을 들였다. 오재현은 애가 닳았다.
“금강권과 철곤귀는 우리 편에 합류하기로…….”
진천은 오재현의 말을 끊었다.
“아직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오재현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들은 너를 따르지 않더냐? 부디 힘을 써다오. 그들이 나서지 않으면 구인결에서의 승리는 서산의 일출보다 확률이 낮을 터, 제발 도와다오. 본방이 먹여 살리는 수천, 수만 식솔의 운명이 네게 달렸다.”
오재현의 애원에 진천은 헛웃음이 났다.
구인결을 통해 백도방의 지배권을 획득하더라도 마령 문가는 제거나 축출의 대상을 수뇌부로 한정할 게 분명했다. 진천은 애당초 전면전이 발생할 시 애꿎은 이들이 입을 피해를 염려했기에 소인결을 제안했던 것이었다.
진천이 며칠간 고민한 결론을 내놓았다.
“마령 문가와 다시 협상하십시오.”
오재현의 낯빛이 암울해졌다.
“말하지 않았더냐? 못을 박았다고. 그들은 결코 구인결을 양보하지 않을 게다.”
“하지만 방식에는 변경의 여지가 있잖습니까.”
“연승전(連勝戰)을 하자는 말이더냐?”
“그렇습니다.”
진천의 대안을 머릿속으로 따져 보던 오재현이 미심쩍다는 눈빛을 보였다.
“오히려 더 불리하지 않겠느냐? 그들에겐 창천도군(蒼天刀君)이라는 절대 패가 있다. 그 혼자서 우리 전부를 감당한다고 해도 하등 놀랄 일이 아닐 터, 나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렵다.”
“어차피 이대로는 승산이 희박합니다. 그러니 우리로서는 어떻게든 판을 흔들어야 합니다.”
“그들이 수용할까? 틀림없이 웬 수작이냐고 의심부터 하고 볼 텐데.”
“맞습니다. 연승전을 제안하면 그들은 틀림없이 우리 측 출전자들의 명단을 달라고 요구할 것입니다. 귀 방에서 창천도군급의 강자를 포섭했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못할 테니까요.”
“허장성세를 부리자는 말이더냐? 우리에게 창천도군에 필적하는 거물이 있는 것처럼? 그래서 위험 부담을 느낀 문가가 구인결을 포기하고 합당한 보상을 받는 선에서 마무리를 짓도록 유도할 셈이더냐?”
“아닙니다. 이 수단의 목적은 창천도군의 불참을 확실히 하자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제시한 명단을 보면 그는 위신 때문에라도 직접 나서기 어려울 것입니다. 강호에서는 오 방주님이 도화각주님보다 상수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외람되오나 마령 문가엔 창천도군 말고도 오 방주님의 위명을 능가하는 도호(刀豪)가 두 사람이나 더 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굳이 최강의 칼을 내보내지 않더라도 구인결에서 승리하리라 자신할 것입니다.”
그제야 진천의 의도를 이해한 오재현은 한껏 고무되었다. 마령 문가는 도화각주와 하남신룡의 진정한 무위를 모르고 있었다. 그들의 허를 찌르면 형세 역전이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었다.
“네 말대로 하마.”
진천과 오재현은 구체적인 협상안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말미에 오재현이 심중에 담아 두고 있던 근본적인 질문을 꺼냈다.
“만에 하나 창천도군이 친히 구인결에 나서면 어쩔 셈이더냐?”
진천이 입술을 깨물었다.
“최선을 다할 수밖에요.”
표정 변화에 따라 흉터들이 구더기처럼 꿈틀거리는 오재현의 면상이 굳었다. 진천의 말은 대책이 없다는 뜻이었다.
* * *
진천은 삼보장으로 돌아왔다.
대문 근처에서 서성거리고 있던 여상구가 그에게 다가왔다.
“너구리가 왔었다고?”
자기를 빼놓고 오재현을 상대한 진천에 대한 책망의 심사가 담긴 음성이었다. 진천은 싹싹하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형님.”
“츳, 아쉽구먼. 목은 따지 않더라도 혼찌검을 내 줘야 했는데. 늙은 너구리 주제에 감히 아우님을 부리겠다는 망상을 품다니.”
고소를 지은 진천이 의형에게 오재현과 협의했던 내용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했다. 여상구가 짤막한 감상을 밝혔다.
“자네 수읽기대로 됐으면 좋으련만.”
오재현이 알면 기가 막힐 노릇이겠지만 진천은 마령 문가가 연승전 방식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라 예측했다. 하지만 오재현을 속인 것은 아니었다. 응수타진의 목적이 어디까지나 마령 문가의 일인자인 창천도군 문찬경(文燦慶)의 참전을 막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백도방 측의 최강자가 일수천비 오재현이라면 마령 문가는 역설적으로 창천도군을 내보내는 데 부담을 느낄 터였다.
비무의 승자가 계속해서 다음 상대와 겨루는 연승전은 일대일 대결의 승수를 합해 최종적으로 승패를 결정하는 다승 방식보다 출전자들의 부상 위험이 월등히 높았다. 패배자들이 다음 출전자를 위해 상대방을 악착같이 물고 늘어지는 탓이었다. 어느 쪽이든 승리가 확실시된다면 마령 문가로서는 구태여 가문의 최정예들이 상할 우려가 큰 연승전 방식을 택할 까닭이 없었다.
여상구가 물었다.
“아직도 창천도군이 나올 가능성을 반반으로 보는가, 아우님.”
진천은 솔직히 대답했다.
“절반보다는 약간 높을 것 같습니다, 형님.”
“우리가 본격적으로 소문을 퍼뜨려도 말인가? 자신이 불참해도 마령 문가가 구인결에서 패배하는 불상사는 없을 거라 자신할 터인데 위신이 깎이는 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그 자존심 강한 위인이 나오려고 할까?”
“허 노야에 따르면 마령 문가는 토끼 한 마리를 잡는 데도 전력을 다하는 호랑이 부류라고 했습니다. 다승 방식이었다면 그들은 십중팔구 창천도군을 내보냈을 것입니다. 일 승이 보장된 셈이니까요. 하지만 연승전이라면 고민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연승전을 수용하면 승률은 더 오르겠지만 가문을 대표하는 존장의 명예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겠지요. 그렇더라도 절반 이상의 가능성을 기대하긴 어려울 듯싶습니다.”
“그런데 말일세, 아우님. 그들이 연승전을 받아들일뿐더러 창천도군을 일장으로 내세우면 만사휴의가 아닌가? 그는 홀로 구연승을 거두고 승부를 종결시킬 수도 있는 도백(刀伯)이라네.”
“아마 그러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행여나 결사적으로 달려드는 백도방주의 암기에 부상이라도 입은 상태에서 형님을 상대하면 변수가 발생할지도 모르니까요. 마령 문가가 설령 연승전을 수용한다고 해도, 그리고 창천도군이 출전한다고 해도 마령 문가는 그를 마지막 보루로 남겨 둘 공산이 매우 큽니다.”
“그렇겠구먼. 여하간 우리는 그의 출정을 기정사실로 여기고 준비하는 편이 낫겠구먼.”
“맞습니다, 형님. 얕은수로 창천도군의 출전 확률을 떨어뜨리고자 하나, 그래 봤자 팔구 할에서 오륙 할로 내린 것뿐입니다.”
여상구가 진천의 어깨를 두드렸다.
“기운 내세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지 않던가? 뜻밖의 패를 얻었으니 자네 분석대로라면 우리의 승산도 이제 사 할은 되지 않은가? 일 할이라면 어떻게든 극복할 수 있을 걸세.”
진천의 입술 끝에 쓴웃음이 걸렸다.
‘뜻밖의 패’는 가린을 의미했다.
가린은 며칠간 친해진 대웅의 꼬드김에 넘어가 어젯밤 구인결에 참전하겠다고 선언했다. 진천은 그에게 전후 사정과 위험 요소를 충분히 설명한 후 다시 의사를 확인했다. 가린의 답은 여전히 ‘가린은 나간다.’였다.
사흘 전 진천이 여상구를 맞이하며 자리를 비운 틈을 타 가린과 비무를 치른 고량은 대경실색했다. 가린은 바윗돌도 부수는 그의 주먹에 정타를 허용하고도 끄덕도 없었다. 가린의 갑피(甲皮)는 거북이 등딱지보다 단단했다. 때마침 진천이 달려가 말리지 않았다면 고량은 가린에게 잡혀 큰 곤욕을 치렀을 터였다.
대웅은 가린에게 그의 쇠몽둥이가 통하는지 시험해 볼 생각이 없었다. 대신 무림과 무인들에 대해 가르쳐 준다는 구실로 그에게 붙어 친분을 쌓았다. 싸움에 임해서는 야수처럼 흉포해지지만 평상시엔 유순한 소 같은 가린은 살갑게 구는 대웅과 금세 친해졌다. 대웅이 땅바닥을 상대로 보여 준 무력행사도 한몫을 했다.
실전에 터무니없이 약한 대웅은 가린에게 실전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구인결이라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부추겼다. 가린은 대웅의 바람대로 미끼를 덥석 물었다. 하지만 가린을 자신의 대(代)출전자로 삼으려던 대웅의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그의 속셈을 알아차린 노미현이 덫을 놓았기 때문이었다.
‘이번 소인결에서도 강호를 경동시킬 대활약을 기대한다’는 노미현의 말에 대웅은 앞뒤 재보지도 않고 자기만 믿으라며 큰소리를 쳤다. 그러고는 곧바로 후회했지만 이미 엎지른 물이고 깨진 도자기였다.
“오늘 가린을 내 거처로 데리고 갈까 하네만, 아우님.”
여상구의 말에 진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드립니다, 형님.”
구인결에 나서려면 가린은 준비가 필요했다. 도검불침의 신체를 가졌으나 절정의 도객들이 휘두르는 칼에도 온전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여상구는 봉천 장원의 지하 연무장에서 가린에게 특별 훈련을 시킬 계획이었다. 주변 고루거각의 시야에 잡히는 삼보장에서는 비밀 병기인 가린뿐만이 아니라 그의 진실한 무위도 노출될 우려가 다분했다. 가린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여상구도 선강(扇剛)을 일으켜야 했다. 그가 강기를 자유자재로 운용하는 초절정의 고수임을 마령 문가에서 파악하도록 둘 수는 없었다.
“철곤귀는 현아에게 맡기게나, 아우님. 그 아이가 잘 조련할 걸세. 자고로 여색에 홀린 자들은 사내다움을 과시하기 위해 없던 힘도 내는 법이라네. 더욱이 그 황당한 울렁증만 아니라면 그 겁쟁이 녀석은 현재의 무력으로도 충분히 일 승을 챙길 재목이 아닌가.”
여상구와 노미현이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연인 사이가 아니라 단순한 친인지간임을 알게 된 대웅은 환호작약했다. 진천은 그가 너무 노골적으로 노미현에 대한 연심을 표출해 걱정스러울 지경이었다.
진천에게서 대꾸가 없자 여상구가 말을 이었다.
“겁쟁이가 제 몫을 해 준다면 결국 금강권이 구인결의 성패를 판가름할 결정적인 패가 되겠구먼. 그 아이를 믿음세. 주안철권의 아들은 마령 문가의 젊은 칼잡이들을 꺾음으로써 자신이 용호가 될 자격이 있음을 증명할 걸세.”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진천은 의형이 고량의 승리에 대해 회의적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맞장구를 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입니다, 형님. 기실 그가 아니라 제가 문제지요. 상위의 용호들을 감당해 낼는지 모르겠습니다. 형님을 뒷받침할 수 있어야 할 텐데 걱정입니다.”
여상구가 정색했다.
“농담이라도 그런 소리 말게, 아우님. 누가 뭐래도 우리 편의 수장(首將)은 아우님일세. 나나 다른 이들은 아우님이 부리는 장졸(將卒)에 불과하네. 그런 의미에서 최종 출전자 역시 아우님이 되어야 하네. 설사 마령 문가에서 창천도군을 내보내더라도 말일세. 그러마고 약속해 주게나.”
진천은 낯빛을 바로 했다.
“알겠습니다, 형님.”
여상구의 이마를 가로지른 주름이 물결치듯 움직였다. 그가 기분이 아주 나쁘거나 반대로 아주 좋을 때만 나오는 현상이었다.
“부디 자신들이 무림 최고의 명문이라고 거들먹거리는 마령 문가 칼잡이들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주게나. 이 노형은 기적을 보고 싶구먼.”
서른 살 어림으로 보이는 여상구에게 ‘노형(老兄)’이란 자칭은 허리가 꼬부라진 노파가 걸친 색동옷처럼 어색했다.
호언을 삼가는 진천을 지그시 바라보며 여상구가 중얼거렸다.
“쓸 만한 패가 딱 하나만 더 있으면 좋으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