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e healer's hidden ending strategy RAW novel - Chapter 158
157화. 꽃 한 송이, 사탕 한 바구니 (4)
그가 귀애하는 최이안이 거의 패닉에 빠져서 수십 번을 불렀는데도….
사람이 넷이나 있는 작은 방에 침묵이 흘렀다. 그 누구도 정적을 깰 생각을 하지 못하고 저마다의 생각에 깊게 잠겨 들었다.
마석이 외부의 충격으로 응답하지 않는 일은 선례가 드문 일이다. 물론 나야 진예신의 일을 겪고 이 자리에 앉아있어서 그나마 덜하지만, 머리가 복잡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일단 진예신이 당했다는 독이랑 여기에 있는 이 약물이 비슷한 효과를 가지고 있는 건 맞겠지. 정화로 해결될 일이긴 했는데, 마석과 감응자의 관계를 생각하면 제법 영리한 짓을 벌였어, 풍월주가.’
더불어 저 약물과 독은 이 땅에 사는 사람들보다 저 멀리서 호시탐탐 멸망을 노리는 풍월주가 이 세계에 대해 더 자세히 안다는 점까지 확실하게 알려주는 징표기도 하다.
‘자존심 상하지만 내가 따라가기에는 아직 벅차.’
풍월주가 쌓아온 시간은 과도하게 많았고, 바쁘게 움직였다 해도 내가 그저 흘려보낸 시간도 꽤 되니까. 특히 처음 이 세계가 쌍월의 보석 세계라는 걸 알았을 때는 경황도 없었고, 내가 어떤 상황인지도 파악이 안 됐던 터라 상황이 흘러가는 대로 휩쓸렸었다.
당장 눈앞에 들이닥친 균열을 해결해야만 했고, 찾아온 기회를 잡아야 했으며, 일신의 무력을 향상하는 데에 최선을 다해야만 했다. 일단은 살아있어야 뭐든 할 수 있으니까.
‘그다음에서야 정보에 생각이 닿았지.’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고들 한다. 소설과 게임을 통해 내가 알고 있는 정보가 많다고 생각했지만, 풍월주의 행보에 비하면 새 발의 피라는 걸 깨달았다. 최소한 풍월주와 동등하게 대립하기 위해서라도 난 많은 걸 알아야만 했다.
협회에 자리를 잡으면서부터는 내가 접할 수 있는 정보의 양과 질이 아주 좋았기 때문에 차근차근 필요한 것들을 모았다. 가장 먼저 했던 건 협회 자료실에 있는 문서를 모두 읽는 일이었고, 두 번째로 했던 건 행운의 봄과의 대화였다.
‘솔직히 진예신을 제일 먼저 털어보고 싶었는데 말이야.’
멱살 한 번 잡아보려고 했는데 영 기회가 안 됐던지라 안타까울 따름이다. 물론 이번 달 내로 들을 얘기가 있어서 정식으로 면담 요청을 할 예정이라 곧 이뤄질 소원이지만.
여하간 내가 정보 수집의 대상으로 사람보다 마석을 고른 이유는 간단했다. 이 세계에서 풍월주만큼 오래 살았으며, 그만큼의 정보를 생생하게 말로 전해줄 수 있는 존재가 마석이기 때문이다. 특히 감응자와 계약한 마석은 계약자에게 거짓말을 하지 못하니까 아주 적절한 정보원이다.
‘특정 부분에 대해 입을 꾹 다문 것만 제외하면 행운의 봄은 착실하게 대답해주기도 했고.’
소소하게는 어떤 주문을 사용할 수 있는지부터 행운의 봄 본인의 이야기, 그리고 각종 분야에 대한 지식을 일상 대화를 나누듯이 끊임없이 교류했다. 개중에는 당연히 ‘마석’에 관한 부분이 대단히 큰 부분을 차지했는데, 내가 유난히 자세하게 봄에게 캐물었던 건 이거다.
‘마석과 감응자,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계약을 끊을 수 있는가.’
* * *
배드엔딩만 계속 보다 보면 사람이 오기가 생긴다. 제법 신선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공략도 무용지물이 되고, 애써 노력해봐도 분기점만 지나면 우수수 죽어버리는 캐릭터를 보면 이를 악물게 된단 소리다.
특히 나는 소설에서부터 꽤 아꼈던 조연 캐릭터가 있었는데, 못해도 걔만큼은 살려보려고 애썼기 때문에 더 악바리처럼 매달렸다. 그래서 알아낸 것은 굉장히 사소하지만, 소설과 게임 그 어느 곳에서도 나오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그게 바로 마석과 감응자 사이의 계약에 관한 것이다. 아무리 플레이어에게 불친절한 게임이라지만, 주된 무기로 사용하는 게 마석인데 알려준 정보가 너무 적어서 도리어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알아낼 방도가 없어서 게임을 할 땐 더 신경 쓰지 못했던 가설인데 모처럼 S급 감응자도 됐으니 당연히 물어봐야지.
그런데 봄이 질문을 들은 순간부터 울상을 짓는 게 아닌가!
“나랑 계약을 끊고 싶은 거야?”
“뭐?”
“나는, 나는 절대로 배신 같은 거 안 하는데…. 내가 배신할 것처럼 보였어?”
“잠시만, 봄아, 말이 왜 그렇게 되는 거야.”
당황해서 봄을 진정시켜보려 했지만, 봄은 전혀 들리지 않는지 울음이 잔뜩 섞인 목소리로 말하는 걸 넘어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내 소맷자락을 꽉 붙들었다.
“요한이는 이제 내가 싫어졌어?”
나는 그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는 버릇이 있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봤던 거였는데, 순식간에 마이너스로 치달으며 생각을 비약하는 봄의 모습에 몹시 당황했었다. 마석에 관해서는 특히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모르는 게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을 뿐인데.
“아냐,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 봄아. 울지 말고 진정해봐, 응?”
흐느끼는 봄을 끌어안고 연신 등을 토닥여주며 몇 번이고 봄을 좋아한다고 속삭여줬다. 내 어깨가 흥건하게 젖을 때까지 울던 봄이 간신히 진정한 건,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행운의 봄과 계약을 끊는 일은 없을 거라고 말했을 때였다.
“진짜루 나랑 계속 있어 주는 거지? 나랑 계약 안 끊을 거지?”
“당연하지. 나한테는 너밖에 없는걸.”
“그러면은 약속, 손가락 걸고 약속해줘.”
“그래, 그래. 자, 약속. 절대 계약을 끊지 않을 거고, 내 파트너는 평생 봄이 너야.”
“히히. 약-속!”
벌겋게 짓무른 눈가가 참 안쓰럽게 보이던 봄은 헤프게 웃으며 손가락을 걸고 좋아했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원했던 답을 해줬다. 이런 질문을 할 줄은 몰라서 그랬는지 봄은 전반적으로 약간 횡설수설 설명했지만.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왼손이 망가졌을 때 강제로 계약이 해지되지만, 이 경우에는 계약 파기가 불가피한 상황이라고 판단되기 때문에 마석과 감응자에게 페널티가 없다고 했어.’
그러니까 왼손이 일종의 계약서 같은 거라서 손상되면 알아서 계약이 끊어진다는 거다. 하지만 페널티는 없기에 다시 계약을 원할 경우, 오른손을 매개로 재계약이 가능하고, 대신 같은 조건으로 계약할 수는 없어서 새로운 약속을 걸어야 한다고 했다.
‘왼손은 마석이 사는 집? 땅? 그런 느낌이니까 다치면 문제가 생기는 건 예상했었어.’
대표적으로 계약이 해지되는 상황이 첫째, 마석이 깨진다. 둘째, 감응자 본인이 죽는다니까. 그보단 다른 경우가 있는지가 궁금했었던 터라 질문을 좀 더 자세하게 좁혀서 물어봤다.
“그것 말고 감응자든 마석이든 외상이 없는데도 계약이 끊어지는 경우는 없어?”
“으응, 그게….”
봄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우물쭈물 말했다.
“우리든 감응자든 어떤 쪽이든 약속을 어길 거 같다고 생각해버리면 깨져.”
“생각만으로?”
“아니이, 그 정도는 아니구. 그으, 음, 약속을 안 지키겠구나~ 확신이 들 때?”
“그러니까, 믿을 수 없다고 생각되면 이라는 얘기네.”
내 말에 봄은 눈썹을 찡그리며 사랑과 의심은 함께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며 오랜 격언에 빗대어 말했다. 창작물 속의 세계에서 있을 법한 낭만적인 설정이라는 생각과 약속을 조건으로 한 계약 관계이니 신뢰가 깨지면 해지되는 건 당연한 순서구나 하는 건조한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멍하게 생각에 잠겨있는데, 연신 내 눈치를 보던 봄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외쳤다.
“난 절대로 요한이를 의심하지 않을 거니까! 계약이 내 쪽에서 끊기는 일은 정말정말 없을 거야!”
“응, 믿어. 나도 마찬가지니까.”
“요한이 좋아! 최고야!”
반사적으로 한 대답에 봄이 본래의 발랄함을 되찾아 대롱대롱 매달렸고, 그 기회를 잡아 어화둥둥 봄을 얼러가며 갑작스럽게 계약이 해지됐을 때의 주의할 점까지 물어본 다음에서야 마석으로 되돌렸다. 그리고 복잡해진 머리 때문에 어릴 때도 안 났었다는 지혜열까지 나서 드러누웠었다.
‘맹목적인 애정과 신뢰…. 소설에서는 그게 마석의 기본적인 성질이라고 했지만, 봄이 안절부절못했던 걸로 봐서는 아닌 거 같았지.’
절대적인 파트너라고 생각했던 이가 별안간 계약을 해지하는 상황이 생긴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지만, 언제 닥칠지 모르는 미래기도 해서 속이 몹시도 시끄러웠다.
‘앞으로 전투가 계속 있을 텐데, 혹시라도 마석과 사이가 틀어지는 감응자가 나온다면 끝장이니까…. 그렇다고 내가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니 작전 세울 때 고려해야 할 점만 늘었어.’
그런 상황에서 경매장이 수면 위로 올라와서 내가 직접 작전을 짜는 수밖에 없었고, 신중히 처리한다는 명목으로 아예 마석 사용 금지를 계획에 집어넣어 버렸다.
갑자기 마석의 힘이 사라져도 무난하게 전투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고 싶었고, 나름 괜찮은 결과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연구소를 습격하러 간 진예신이 별안간 마석과 대화가 안 됐었다며 태연하게 웃기 전까지는 말이다.
* * *
‘물론 진예신은 계약이 해지된 게 아니라 독에 당해서 순간적으로 대화가 안 된 거라고 했어. 그 독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는 윤혜아의 보고를 기다려야겠지만, 적어도 확실한 건 있지.’
풍월주는 마석과 감응자 사이에 불신이 생기면 일방적으로 계약을 끊어낼 수 있다는 걸 안다는 것. 그리고 끈끈한 둘의 관계에 끼어들 수 있게 ‘마석과의 대화를 방해하는’ 방식을 택했다는 것.
‘최이안처럼 유달리 마석과 친밀한 경우엔 아주 타격이 커. 최이안을 가장 가까이서 봐왔던 쌍둥이 입에서 그가 패닉에 빠졌다는 단어를 쓸 정도면 미친 것처럼 이름을 불렀다는 것과 다름없으니까….’
평생 내 편이라고 말했고, 실제로 그럴 거라고 믿었던 자가 중요한 순간에 대답해주지 않을 때, 과연 감응자는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까. 글쎄, 최이안과 태양의 왕관만큼 돈독한 사이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공황이 올걸.
‘그리고 첫 번째 분기점이자 원래대로의 전개라면 올해 말에 일어나야 했을 그 사건. 게임에서는 일언반구도 없었지만, 저 독과 약물이 열쇠였을 거야.’
비밀리에 오염 상태를 조사하고 있던 윤혜아가 그 무렵부터 행방불명됐었고, 그 뒤를 이었던 심초연도 다음 해의 첫 달을 넘기지 못했다.
게임에서는 경매장이 이렇게 빨리 해결되지도 않았고, 진예신이 연구소에 잠입한 일도 없었으니까 자료가 부족했을 거다. 윤혜아는 독자적으로라도 알아보려 했을 거고, 풍월주는 그 틈을 타서 그녀를 판 위에서 치워버린 거다. 연이어 약물을 분석할 능력이 있는 심초연을 노렸을 테고.
‘매번 왜 배드엔딩만 나오는지 그렇게 찾아다녔는데, 한 번도 이 정보가 해금된 적이 없었어. 그러니 이유도 모르고 능력이 사라진 감응자가 나오고, 덕분에 게임 난이도가 급격하게 올랐다고 온갖 항의가 빗발쳤지.’
가장 중요한 아이템을 잠가놓았는데, 이후 벌어질 일을 어떻게 해결하란 말인가? 제작진과 작가는 게임을 정말 깨라고 만든 게 맞아? 이런 부류의 게임은 적어도 하나쯤은 ‘모두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의 엔딩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니었냐고.
불현듯 제작진과 작가를 향한 불만이 치솟아서 이 정적인 분위기도 환기할 겸 가볍게 숨을 들이켰다 내쉬며 심초연처럼 약물이 담긴 병을 손에 쥐었다. 주르르 따라오는 시선을 느끼며 지금 공개해도 되는 정보가 어디까지인지를 가늠했다.
‘사람 마음을 함부로 재단하면 안 된다지만, 쌍둥이는 몰라도 심초연만큼은 협회에 등 돌리지 않을 거야. 그렇다고 알려주기엔 풍월주가 걸려. 분명 독과 약물에 대한 정보가 새어 나갔다고 판단되면, 심초연을 해치우려고 손을 쓸 거란 말이지.’
협회 소속의 모든 감응자를 살려서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겠다는 생각은 꿈에도 꾸지 않았다. 창작물 속의 세계라고 동화처럼 다 좋게 끝날 리가 없잖은가. 이미 이곳은 현실이 되었는데.
그래서 이 세계가 온존하기만 한다면. 풍월주라는 거대한 악당을 퇴장시키기는 순간에 최대한 많은 사람이 살아있기만 한다면 괜찮은 해피엔딩이라고 만족하기로 한 지 오래다.
‘그래도 할 수 있는 건 해야지. 최소한 알면서도 방관할 필욘 없으니까.’
병을 살살 흔들어 찰랑거리는 약물을 눈에 담으며 내게 집중하고 있는 이들에게 운을 뗐다.
“마석과 감응자 사이의 계약을 일방적으로 깰 방법이 있다는 사실, 알고 계십니까?”
차근차근 대화를 나눠보자고. 내가 도달했던 지점까지 굳이 하나하나 알려주지 않더라도 스스로 알아챌 수 있도록, 그리고 그걸 알고 있다고 티를 내서는 안 된다는 점까지 체득할 수 있도록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