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e healer's hidden ending strategy RAW novel - Chapter 16
15화. 가두어진 봄 (6)
황색 등급 균열에 긴장할 이유가 없어서 그런지 대놓고 촌극을 벌이는 둘을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뱀이 이쪽을 주시하지 않아 본의 아니게 여유로웠다.
그때 영원이 부리나케 나한테 달려오더니 내 어깨를 붙잡고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말하고 싶은 건 아니었거든! 너도 알아둬! 마석이랑 감응자는 어디 한 군데는 똑 닮게 되어 있어. 보통은 외모야, 알겠어? 다른 부분은 서로 다르다고! 아니, 잠깐만. 닮은 게 있어서 계약했다가 맞나?]문득 자기가 말하다 말고 갸우뚱 고개를 기울이는 영원이었다.
자신의 성격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지는 건 좋지만, 내 어깨는 그만 잡았으면 좋겠다.
그나저나 영원의 눈물 말을 따르면 행운의 봄이 실체화하게 될 경우, 어딘가는 나를 닮은 모양이 있다는 뜻인데 그다지 반가운 소식은 아니다.
외모야 뭐 못 봐줄 정도는 아니니까 넘어가겠는데, 빈말로도 내 성격이 좋은 건 아니거든. 게다가 나 같은 인간을 닮아서 뭐에 쓰려고.
보기보다 대화하는 걸 좋아하는 신여월의 마석답게 영원의 눈물은 내 시큰둥한 대답에도 끊임없이 입을 놀렸다.
[아, 몰라. 어차피 이미 계약한 지 오랜데 알게 뭐람. 아무튼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면 말이야. 네가 계약한 봄이는 되게 다정하고 순한 성격이거든. 다친 생명을 두고 보지 못하는 편이라서 주된 능력이 치유기도 하고 말이야. 계약자 보는 눈도 엄청 까다로워서 다른 S급이 다 계약할 때까지도 남아 있어서 걔가 누구를 고를지 우리끼리 내기도 했었다?]“그렇습니까.”
“예에….”
내가 행운의 봄과 계약한 건 당장 어제였는데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가. 그리고 무슨 말이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다.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말은 두서도 없고 의식의 흐름대로 그저 흐르기만 할 뿐이었지만, 저런 사소한 말에서도 건져낼 건 충분했기에 귀 기울여 듣기는 했다.
[희망이가 다 보고 듣고 있을 거라 자세히는 못 말해주는데, S급끼리는 사실 대충 알고 있었어. 봄이가 왜 계약 안 하고 오래 버티고 있는지. 걔가 예전부터 말하던 이상적인 계약자가 있었는데, 그게 뭐냐며, 악! 아파! 당기지 마!]“뭐어, 잡담은 예까지만 하고 본론으로 돌아가 볼까.”
[놔봐, 아, 좀 놔달라니까? 말 안 할게! 조용히 있을게!]희망이? 어쩐지 마음에 걸리는 이름을 잘 기억해두고 다시 시작된 눈앞의 촌극을 구경했다.
신여월이 내 어깨에서 알짱거리던 ‘영원의 눈물’의 목덜미를 낚아채서 머리를 꽉 누르더니 볼을 인정사정없이 잡아당겼다.
그러고는 얌전히 있으라며 제 옆에 세웠다.
벌게진 티도 안 나는 볼을 문지르면서 험하게 다루지 말라고 한참을 투덜거리던 영원이 둘이 대화하라는 듯 입을 꾹 다물고 얌전히 섰다.
신여월이 착하다며 머리를 쓱쓱 쓰다듬는 걸 보면서 나도 얌전히 할 말을 정리했다.
슬슬 은신 효과가 끝날 때가 다 되어가니 움직이는 편이 좋다.
“우선, 여기가 그림 속이라는 건 알고 계실 것 같은데, 맞습니까?”
“그래. 재미난 걸 몇 번 봤지.”
“그럼 어떤 것들이 그림일 것 같습니까?”
“그렇다는 건 그림이 아닌 진짜 살아있는 것이 있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맞느냐?”
“어떨 것 같습니까.”
“이런. 쉽게 알려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구나.”
신여월의 목소리에 경쾌함이 덕지덕지 붙었다.
역시 수수께끼를 좋아하고, 빙빙 돌려 말하는 걸 사랑하는 사람다웠다.
“어디 보자. 우선 하얀 은방울꽃은 전부 먹물로 변했으니 그림이겠고, 아직 가보지 못한 저 골짜기도 여기서 보니 먹으로 그린 선과 닮았으니 그림이겠구나.”
“그렇습니다.”
“뱀이 꼬리로 쳤는데 모양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던 정자도, 먹물에 스며들어 까맣게 변한 땅도 그림일 것이고.”
“완성된 그림끼리 부딪쳐봐야 변하는 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 뱀까지도 그림이 맞다.
내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황홀하게 미소를 지은 신여월이 발로 땅을 두 번 두드렸다.
먹물 한 방울 보이지 않고 그저 민둥한 흙바닥이 드러난 곳. 주변에 여전히 흰 은방울꽃이 피어있고 수풀이 우거져서 더 유별난 곳.
아이온의 특성에 따라 민감하게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깨끗한 곳’.
훔친 것은 색이 있는 꽃이요, 숨은 곳은 이 땅이다. 공통점은 ‘살아 있다’는 것.
어찌나 머리도 좋고 눈치도 빠른지.
신여월이 그 모든 것을 알아챘는지 의미심장하게 눈웃음을 쳤다. 속에 능구렁이를 열댓 마리는 품고 있는 사람이지만, 같은 편이니 그저 든든하다.
“좋구나. 그럼 내가 물어볼 건 하나지.”
둥둥 떠 있는 꽃을 신여월이 손에 쥐었다. 은방울꽃을 든 고전적인 미인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그림이었다.
“진짜는 어디에 있느냐?”
꽃을 그렇게 만지작거리면서 뭘 또 물으시는지. 하지만 확답을 원한다면 못 해줄 것도 없다.
“정자 밑, 연못 가장 깊은 곳에.”
신여월이 손가락을 딱 튕겨서 꽃을 다시 내 앞으로 보내줬다. 꽃을 조심히 보석함에 되돌려 넣고 있는데 살짝 흥분으로 들뜬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어찌 이런 것들을 알고 있었는지는 내 묻지 않으마.”
“감사합니다.”
“거기에 특별히 네 기록을 열람할 수 없도록 보안 등급을 높게 걸어주마. 대신.”
그 말에 반사적으로 내 손등의 계약 문장을 한 번 봤다가 신여월과 똑바로 눈을 마주했다.
협회장은 화사하게 웃으며 활시위에 화살을 세 개나 걸었다.
투명한 막이 덧씌워진 신여월의 새카만 눈동자에 거대한 뱀이 기어 오는 모습이 비쳤다.
“네가 행운의 봄을 밖으로 불러내는 날에 나와 이야기를 좀 하자꾸나. 단둘이서.”
제일 끝 단어에 방점을 붙이며 신여월이 화살에서 손가락을 뗐다.
쐐액! 바람을 가르며 화살 세 대가 내 볼 근처를 스치고 뒤로 날아갔고, 난 대답보다 먼저 지팡이를 휘둘러 주문을 읊었다.
“자연의 가호 발동.”
균열에 들어오기 전에 윤혜아에게 그랬던 것처럼 신여월을 대상자로 지정해서 가호를 먼저 씌웠다. 그리고 협회장의 뒤쪽으로 몸을 내뺐다.
무시무시하게 기어 오던 뱀은 화살 세 대를 몸에 꽂고서도 기어 오는 속력을 줄이지 않았다.
가호는 가호고, 방어막은 또 별개인 법.
뱀의 공격을 전열에서 막아줄 탱커가 현재 없으니 보호막을 다룰 줄 아는 내가 움직여야 했다.
나는 얼른 충격을 상쇄할 수는 있을 정도의 두께로 나와 신여월의 정면에 보호막을 한 번 더 쳤다.
“판단력 합격.”
“그걸 대놓고 말씀하시면, 윽.”
쾅! 여유롭기 그지없는 신여월의 말에 대꾸하다가 이를 악물었다.
쨍그랑 유리 깨지는 소리를 내며 보호막이 사라졌고, 내 배를 누가 후려친 것처럼 배 속이 진탕이 됐다.
울컥 입 밖으로 나오려는 구역감을 참으며 보호막이 사라진 정면을 노려봤다.
온몸으로 보호막에 부딪힌 뱀이 순간적으로 몸을 움칫하는 게 보였고, 신여월은 결코 그 순간을 놓치는 어수룩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화살집에서 화살을 꺼낼 시간조차 아까웠는지 바로 아이온을 뭉쳐 다소 투박한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연속으로 세 발을 쏘면서 신여월은 화살의 행방을 보지도 않고 크게 뒤로 발돋움해서 뱀과 거리를 멀찍이 벌렸다.
정직하게 뒤로 물러난 것이 아니라 내 반대편 대각선으로 뛰어서 자리를 잡은 터라 가만히 있던 난 덩달아 뱀에게서 멀어진 꼴이 되었기에 가만히 상황을 예의주시할 수 있었다.
날카롭지 않아도 강하게 날아간 화살이 저마다 뱀을 꿰뚫으며 땅에 박혔다.
뱀이 크게 울부짖으며 커다란 몸을 뒤틀었다. 땅이 여기저기 뒤집히면서 먹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하얀 번개처럼 화살 하나가 까만 하늘을 가르며 뱀의 눈으로 박혔다.
[죽일 거다! 아아아, 죽일 거야!]뱀은 줄줄 검은 물을 흘리면서도 무지막지한 살기를 내뿜었다.
어디까지나 균열의 침입자는 우리였기에 뱀의 감정에 동화된 균열 내부의 아이온이 묵직하게 내려앉았지만, 무서운 기분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신여월 쪽으로 꿈틀대며 뱀이 기어가는 모양새가 징그러웠다. 피가 아니라 먹물이라는 걸 아는데도 비린내가 나는 듯했다.
“영원아.”
[네네, 갑니다요.]협회장의 다리 근처에 맴돌고 있던 영원의 눈물이 빛으로 흩어지며 활로 스며들었다.
은은하게 반짝이는 활을 가로로 든 신여월은 화살을 걸지 않은 채로 줄을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그를 중심으로 바람이 휘몰아치며 옷자락이 펄럭였다. 고고한 학 한 마리가 날개를 활짝 펼친 것만 같았다.
“딱히 쓰려던 생각은 없었는데, 이 주문보다 가짜에 쏟을 시간이 더 귀하니 어쩔 수가 없구나.”
신여월의 나긋나긋한 말씨에 머리 반쪽이 시커멓게 물든 뱀이 주둥이를 쩍 벌렸다. 날카로운 이빨과 갈라진 혓바닥 사이에 동그란 구슬 같은 게 보였다.
파직 정전기가 튀고 있는 구슬은 척 보기에도 평범한 물건은 아니었지만, 신여월은 전혀 개의치 않고 입을 열었다.
그래서 나도 위험을 무릅쓰고 빠르게 주문을 외웠다. 저걸 여기서 못 얻고 나갈 수는 없었다.
[민들레 홀씨 되어 나는 것을 보니 내 사랑도 날아갔나 봅니다.]분명히 내가 말한 문장이고, 내가 직접 입술을 움직이는데도 산 자의 목소리라고 느껴지지 않는 께름칙함이 거기에 있었다.
내 목소리가 아닌 그저 어떠한 울림과도 같은 것.
그건 굉장히 기묘한 느낌이었다.
마석이 건네주는 주문을 간단한 명칭으로 불러낼 수 있는 것과는 달랐다.
그게 단순히 게임에서 스킬 버튼을 누르면 변화가 일어나는 간단한 일이었다면, 장비에 속한 주문은 좀 더 마법 같은 신비로움이었다.
하지만 그런 느낌을 계속 느낄 여유도 없이 랩이라도 하는 것처럼 빠르게 속삭인 덕분에 아슬아슬하지만, 신여월의 주문보다 먼저 주문 영창을 끝마칠 수 있었다.
후딱 베레모에 달린 녹색 술 장식을 뜯어내 구슬 쪽으로 던졌다.
내 손을 떠난 허공에서 술 장식이 자취를 감추기가 무섭게 신여월의 주문도 끝이 났다.
[겨울 골짜기에 노닐던 학은 어딜 갔는지 잔설만이 남았구나.]한 줄 시 같은 문장에 응한 것은 활이 아니라 화살이었다. 단순한 화살의 모양에서 벗어나 새의 모양새로 아름답게 빛나는 것이 번쩍이는 구슬 위를 스치며 뱀의 목구멍에 박혔다.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뱀의 몸이 위로 펄쩍 뛰었고, 신여월의 작은 휘파람에 화살을 감싸고 있던 학이 얼음 결정으로 화했다.
오월의 봄에 어울리지 않는 거대한 뱀 얼음상이 황폐해진 땅 위에 덩그러니 섰다가 이내 흔적도 없이 흩어졌다.
‘과연 S급 장비 고유 주문. 무시무시하네.’
혀가 절로 내둘러지는 위력이다. 반짝거리는 얼음 결정이 공기 중에 서서히 녹아드는 모습을 보며 왼쪽 손등을 꾹 눌렀다.
옅은 초록빛으로 감싸인 작은 구슬이 손바닥에 감겼다. 찌릿찌릿한 전기가 손 전체를 넘어 팔을 관통했지만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성공이었다. 무사히 회수한 구슬을 도로 마석 보관함에 집어넣고, 테슬이 돌아온 베레모를 다시 똑바로 쓴 후, 태연하게 협회장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새 활에서 빠져나온 영원의 눈물이 신여월에게 어서 끝내고 나가자며 칭얼거리고 있었다.
“그래, 슬슬 숨도 가쁘니 나가자꾸나.”
대체 어디가 숨이 찬 건지 모르겠는 신여월과,
[맞아. 우리 고생 많이 했으니까 나가서 오후 내내 자자!]대체 무슨 고생을 했는지 도무지 모르겠는 영원의 눈물과의 대화를 끊으며 끼어들었다.
둘의 대화에 전혀 공감할 수 없지만, 빨리 나가자는 말에는 찬성이라서 정자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 정자 밑에 헌화하면 끝납니다.”
“헌화? 이런. 이미 죽은 자가 주인이었군. 그럼 이제 우리가 할 일이 없는 건가?”
“아닙니다. 있습니다.”
내 대답에 신여월이 의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가 금방 흥미로 눈을 빛냈다.
바로 무슨 일이냐고 물어볼 줄 알았지만, 신여월은 더는 내게 묻지 않고서 정자로 날아갔다. 그 뒤를 바짝 쫓아가면서 알 수 없는 불안에 잠시 몸을 떨었다.
‘대화로 성불시키면 되는 건데 괜찮겠지?’
대화 방식이 무력만 아니면 된다, 무력만.
신여월이 무력을 선호하는 지도자가 아님을 뻔히 알고 있는데도 무언가가 자꾸 신경이 쓰였다.
손톱 옆에 잘라내기에는 너무 작은 거스러미가 일어난 것만 같은 미묘한 거슬림이었다.
원인 모를 초조함은 이러다가 지원군이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균열에서 나가지 못하면 어떻게 하냐는 쓸데없는 걱정까지 이어졌다.
한없이 복잡한 심경으로 정자에 발을 디뎠을 땐, 이미 신여월이 정자와 그 주변을 매의 눈으로 탐색한 후였다.
괜히 영양가 없는 고민 탓에 속도가 늦어졌다고 생각하니 나 자신에게 짜증이 났다.
물론 그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어수룩한 짓은 하지 않고 신여월이 던지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여기, 이 부분이 다른 곳과 다르구나.”
신여월이 정자의 기둥 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섬세한 은방울꽃 조각이 새겨진 다섯 기둥과는 달리 꽃 없이 넝쿨만 새겨진 기둥이었다.
황색 균열이라 공략 방법과 그 단서를 찾는 것이 퍽 쉬운 편이라도 한눈에 파악하는 건 아무래도 내공이 필요한 법이다.
나야 이미 좌표까지 외웠다지만, 금방 단서를 찾아내는 신여월이 대단하기는 했다.
“그렇습니까?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이제 모르는 척을 하기엔 내게 보여준 것이 많지 않으냐?”
신여월이 코를 찡긋하며 짓궂게 물었다. 난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어깨를 으쓱이고는 보관함에서 꽃을 꺼냈다.
이유를 묻지 않겠다고 한 건 신여월 본인이었고, 내가 아는 신여월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허언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뻔뻔해져도 괜찮다.
게다가 이미 난 협회 소속이 되었고, 신여월이 대놓고 내 뒷배가 되어주겠다고 의향을 비친 것이나 다름없으니 이대로 밀고 나가도 나쁜 선택은 아니다.
물론 단둘이 대화를 하는 날이 올 때까지 마음의 준비는 좀 해야겠지만.
‘어차피 거창한 이유로 협회에 협조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세상을 구한다거나, 힘없는 자들을 돕는다거나 하는 의로운 마음은 없다. 안정적인 직장이 생겼으니 적당히 일하겠다는 세속적인 마음도 아니다.
이곳이 내가 좋아했던 게임과 소설의 세계고 여전히 등장인물들을 아끼고 있지만, 단지 그뿐이다.
내게 중요한 건, 내 사람들이다. 두 번 다시 못 볼 줄 알았던 친구 두 놈과 나를 저들의 자식처럼 여겨주셨던 그의 가족들.
그들과 멀쩡하게 살 수 있다면야 다른 이들이 날 어떻게 보던 별로 상관없다.
애초에 이 세계로 넘어오기 전에도 달갑지 않은 시선은 익숙하게 받았다.
‘조금 귀찮아지지만, 그 정도는 감수할만하지. 걸린 목숨이 몇 개인데… 전부 지키려면.’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신여월의 시선을 의식적으로 무시하면서 정자에 가까이 다가갔다.
이 건축물도 먹물로 이루어진 그림이지만, 특수한 처리가 되어 있어서 특성이 다른 아이온이 닿아도 터지거나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한 번 생겼던 예외가 두 번이라고 못 생길 이유가 없어서 나 자신에게 가호를 얇게 두르고 올라섰다.
낮은 계단 위, 신여월이 지목한 다소 심심한 기둥 옆에서 난간 바깥쪽으로 꽃을 던졌다.
하늘하늘 흔들리며 떨어지던 꽃이 수면에 닿자마자 본래는 선택지로 존재했던 문장을 입 밖으로 꺼냈다.
“뱀은 죽었습니다.”
잠잠하던 수면 아래서부터 거품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둥둥 떠 있던 꽃을 흰 포말이 집어삼키고, 아래로 끌려가는 걸 보면서 말을 덧댔다.
“당신의 복수는 이루어졌으니, 이제 족자를 불태워주십시오.”
잠잠해졌던 수면이 요동치다가 정자를 전부 덮을 정도로 커다란 물기둥이 솟아올랐다.
물그림자로 사람이 비쳤다. 신여월이 화살통에서 화살을 꺼내 빙글빙글 돌리다가 내 앞을 가로막고 섰지만, 난 오히려 신여월의 팔을 잡고 뒤로 당겼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거대한 물기둥 앞에서 나는 바로 무장을 해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