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177
186. 애증의 혼란(1)
그날 저녁부터는 한결 여유가 생겼다.
언론에서 리먼 브러더스의 새로운 주인으로 등장한 유서준을 취재하겠다고 북새통을 이뤘지만 유서준은 인터뷰를 거절했다. 준비되지 않은 인터뷰 남발은 자칫하면 독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이었다.
직책을 맡은 신선영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다. 그녀는 당분간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SJ 투신 사장 직위도 곧 물러나야 할 것이고.
김현아는 오랜만의 미국행이었기에 예전의 친구를 만나러 나갔다.
강재민은 곧바로 홍콩으로 돌아갔다. 홍콩법인은 향후 리먼 브러더스의 아시아 지점으로 지위가 바뀔 것이지만 지금 당장은 리먼 브러더스를 인수한 모기업이다. 당연히 엄청난 양의 후속 작업이 필요했다. 강재민 역시 바쁠 수밖에 없었다.
이래저래 유서준은 한가해졌다.
그제야 그는 뉴욕에서 있었던 인수작업의 전반적인 진행을 재검토하고 향후 계획을 수립했다. 호텔 창밖으로 보이는 뉴욕 거리의 풍경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객실로 배달시킨 커피의 맛도 음미 됐다.
긴 인생 설계도 사실상 모든 기초가 끝났다. 2027년을 맞아 전투를 치를 교두보를 확보했다. 안으로는 SJ 증권이 밖으로는 리먼 브러더스다. 리먼 브러더스는 그때쯤이면 SJ 투자은행으로 이름이 바뀌어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는 이 두 곳을 열심히 키우기만 하면 된다. 무려 700조의 상품을 보유하던 예전 규모의 리먼이라면 아시아 한두 국가의 금융위기 정도는 가볍게 처리 가능할 것이다.
유서준이 커피를 음미하여 객실에서 유유자적한 시간을 보낼 때였다.
객실 손님이 왔다는 벨이 울렸다.
등장한 것은 송예은이었다.
그녀는 하늘색 계열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여전히 치마 길이는 매우 짧았다.
유서준은 반갑게 맞았다.
이제는 송예은이 근무하는 회사의 오너로 신분이 변경되어 관계가 다소 이상해졌다.
“으히히, 다시 축하드려요.”
송예은이 싱그러운 웃음과 함께 그에게 달려와 안겼다.
유서준은 그녀를 가볍게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예은이의 공이 참으로 컸어. 리먼의 내부 사정을 알려주고 그때그때 필요한 코치를 해줬잖아. 이 은혜 잊지 못할 거야.”
“피이, 말로만?”
송예은이 귀여운 표정으로 투정을 부렸다.
유서준은 웃음을 머금으며 그녀를 이끌었다.
침상에 나란히 앉아 대화를 주고받았다.
“전 솔직히 인수 못 하실 줄 알았어요. 리먼 이사진도 FRB도 영국 바클레이스에 호의적이었거든요. 그런데 그걸, 킥킥.”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우와, 그 순간 그런 마법이!”
송예은이 다시 환호성을 터트렸다. 아마 유서준의 마지막 승부수를 뜻한 것으로 보였다.
“어차피 난 인맥도 얕고 해서 인사권 있어 봐야 제대로 쓰지도 못해. 다행히 이사진에서 신망 있는 사람으로 뽑아줬으니 그걸로 만족해야지.”
유서준은 10년 후를 생각하고 있었다. 급하면 모든 것을 망치는 법이다. 이것이야말로 그가 투자 세계에서 철칙으로 삼아온 것이다.
“샘 샘, 오늘 내부 직원 이야기를 들어보니까요.”
유서준은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내부 직원의 여론이 사실상 가장 중요했다.
“어제보다 동요가 많이 줄어들었어요. 어제는 모두 이직을 고민하고 짐을 언제 싸야 하나 이런 고민만 나눴거든요. 그런데 오늘은…….”
송예은이 그를 빤히 쳐다보며 고운 입술을 우물거렸다.
“오늘은 분위기가 달라졌어요. 오늘 회장으로 거명된 고든 이란 분이 사내에서 꽤 존경받는 데다 그분이 고용 안정을 최우선으로 입에 올렸거든요. 결정타였어요, 하하.”
유서준이 의도하던바 그대로였다.
“다만 임금이 높은 스타 파트너 몇 사람은 어쩔 수 없이 회사를 떠나게 될 것 같아요. 사실상 당분간 인센티브를 받기 어렵다고 볼 때 임금 삭감을 감내하기 힘들 테니까요.”
함께 할 수 없는 몇몇은 어쩔 수 없다. 가능한 이직하는 자의 수를 줄이는 게 목표일 뿐이다.
“샘이 존경스러워요.”
송예은이 연신 그를 칭찬했다.
유서준은 웃음만 머금었다.
송예은이 그에게 몸을 기대며 물었다.
“다른 사람은 모두 어디 갔어요?”
“나만 빼놓고 모두 바쁘더라. 이상하게 내가 제일 한가해. 하하.”
유서준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토닥였다.
송예은이 따라 웃으며 다시 질문했다.
“샘, 내일은 뭐 하실 예정이어요? 한국에는 언제 돌아가요?”
“일단 여기에서는 떠날 거야. 내 절친인 구인혁이 부근에 있어서 온 김에 만나보고 돌아갈까 생각 중이야.”
“흐음, 현아 언니도 같이요?”
송예은이 김현아의 거취를 입에 올렸다.
“구인혁 아내가 현아 친구야. 그래서 같이 가기로 했어.”
구인혁은 뉴욕에서 약간 북쪽에 위치한 매사추세츠주에 있는 MIT에 있었다. MIT에서 박사 학위를 마치고 대학 내에 있는 물리연구소에서 연구하고 있었다. 지금도 가끔 타임머신에 대해 진행 상황을 메일로 보내오기는 하지만 다른 연구로 바쁜 모양이었다. 현실적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연구를 할 수 있는 환경은 쉽지 않다.
현아와 함께라는 말을 들은 송예은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물론 유서준은 그녀의 낯빛이 변한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송예은이 슬쩍 눈을 들어 유서준의 눈치를 봤다.
내일 일정에 대해 고민하는 유서준을 본 그녀는 갑자기 그의 품으로 안겨들었다.
유서준은 깜짝 놀라 그녀를 끌어안았다.
송예은의 입술이 그의 입술에 마주치며 두 사람은 침대 위로 무너졌다.
유서준은 그녀를 밀어내려 했으나 송예은은 막무가내였다.
그녀의 입술이 강하게 그를 압박했다.
유서준은 힘이 쭉 빠지며 침대에 드러누웠다. 가볍지만 않은 키스가 한동안 이어졌다.
이윽고 상체를 일으킨 송예은이 몽롱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유서준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송예은의 눈빛은 평소와 달랐다. 그를 갈구하는 욕망이 느껴졌다.
“샘, 안아줘요.”
송예은의 입에서 끈적끈적한 말이 새어 나왔다.
유서준은 매우 당황했다. 그녀와 가까웠고 허물없이 지내기도 했지만 이런 식으로 발전할 줄은 몰랐다. 더구나 그는 유부남이고 상대는 아직 결혼 전인 처녀다.
송예은의 하늘색 원피스가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녀가 몸을 뒤틀며 원피스를 빼내자 파란 레이스의 브래지어만 걸친 상체가 곧바로 눈에 들어왔다. 그 아래로는 마찬가지로 파란색의 삼각팬티가 고개를 내밀었다.
“예…… 예은아.”
유서준이 만류하려고 손을 내젓는 찰나 송예은이 그에게 안겨 왔다.
유서준은 그녀를 살짝 밀어내며 말했다.
“예은아, 난 아내가 있어. 이건 아냐.”
송예은은 그의 손을 거부하며 더욱 몸을 밀착시켰다.
“싫어요. 현아 언니랑도 그런 사이잖아요.”
유서준은 그녀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그녀의 눈에 김현아랑 그렇고 그런 사이처럼 비쳤던가.
유서준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현아랑은 그런 사이 아니다.”
“거짓말! 거짓말 말아요.”
송예은이 몸부림치며 다시 유서준의 입술을 찾았다.
다시 격렬하게 입을 맞추던 그녀는 상체를 일으키더니 브래지어를 풀었다.
유서준은 몸을 일으키며 그녀를 꽉 끌어안고 더는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는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예은아, 우린 이런 사이 아니다.”
“왜요? 선생과 학생으로 만나서요?”
“그게 아니라 넌 앞으로 결혼도 해야 하고…….”
“이 동네는 그런 거 신경 안 써요. 그리고 저도 이제 결혼할 나이 한참 지났어요.”
송예은이 유서준을 뚫어지라 쳐다봤다. 그녀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유서준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송예은이 한숨을 내쉬었다.
“샘, 저를 싫어하시는군요.”
“그럴 리가 있니.”
“아뇨, 다 알아요.”
송예은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그를 노려보다가 자신의 옷을 찾았다.
멍한 표정을 짓고 그녀를 바라보는 유서준을 향해 송예은이 울음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고등학교 때 현아 언니 이야기를 들으면서 얼마나 부러웠는지 몰라요. 하지만 일단 기다렸어요. 아직 어렸으니까. 그런데 그다음엔 다른 여인이 가까이 있더군요. 지금 현재의 부인 말이어요. 결혼 소식을 들었을 땐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했어요. 그런데 그게 쉽지 않았어요.”
송예은이 그를 빤히 쳐다보며 하소연했다.
“왜 저는 항상 첫째도 아니고 둘째도 아니어야 하죠? 현아 언니에게는 다정하게 대하면서 전 왜 그렇게 대해주지 않아요?”
“그게 아니야.”
유서준은 변명하려 했다.
송예은이 자신의 옷을 대충 주워들고는 그를 노려보았다.
“샘, 미워요.”
유서준이 말릴 틈도 없이 송예은이 후다닥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는 넋이 나간 채 문만 바라보고 있었다.
**
다음날 유서준과 김현아는 케임브리지로 떠났다.
대서양 연안에 자리한 케임브리지는 보스턴과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바로 북쪽에 있다.
케임브리지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두 대학이 있으니 바로 하버드와 MIT였다.
구인혁은 MIT에서 연구원 생활을 하고 있었다. 흔히 말하는 박사후과정(Post Doc.)인데 주변 다른 곳에서 그를 스카우트하고자 노력 중이었지만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그의 기인 같은 특이한 행동은 여전했다. 가장 특이한 부분이 바로 돈과 관련한 경제적인 부분이었다. 그는 연봉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보다 자신에게 주어지는 여가시간을 더 소중히 여겼다. 그렇다고 그 시간을 유흥으로 소모하지도 않았다. 항상 혼자서 사색하는 시간으로 사용했다.
오직 유서준만이 그가 그 시간에 무슨 고민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아마 그는 혼자서 타임머신을 고민했을 것이다.
구인혁과 이지은이 사는 곳은 케임브리지의 작은 아파트였다. 인구 10만의 작은 도시인 케임브리지에는 대학생 부부를 위한 아파트가 많았다.
구인혁은 대학생이 아닌 직장인이었음에도 여전히 대학생이 몰려 있는 곳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굳이 번듯한 저택에서 살기를 목표로 하지 않는 그다웠다.
네 사람이 만나니 과거에 처음 미팅을 했던 그때의 분위기가 절로 났다. 그들은 옛날 대학 시절로 돌아가 이야기꽃을 피웠다.
밖에서 저녁을 함께 먹고 늦은 시각이 되어서야 집으로 들어갔다.
작은 방 셋에 부엌이 달린 소형아파트였다.
“집이 좁아서 불편할 거야.”
구인혁의 아내 이지은이 집안으로 안내했다.
“좁긴, 한 가족이 살기 딱 좋지. 하하.”
구인혁은 웃음을 터트리며 두 사람을 맞았다. 외형에 신경 쓰지 않는 그의 성격이 여실히 나타났다.
집안 사정도 비슷했다. 비교적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지만 유독 구인혁이 사용하는 서재 방은 각종 책이 널려 어지러웠다. 이지은이 황급히 책을 한쪽으로 치웠다.
건넌방에서 깜찍하게 생긴 초등 저학년 여자아이가 등장했다.
유서준과 김현아가 놀라는 사이 여자아이가 꾸벅 인사를 했다.
“내 딸, 구은서. 아마 세라랑 같은 나이일 거야.”
구인혁이 소개를 했다.
구인혁보다 엄마인 이지은을 많이 닮은 아이였다.
유서준은 딸 구은서를 보면서 세월이 많이 흘렀음을 실감했다. 반면 김현아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자신 생각에 다소 우울해졌다.
간단한 안주와 함께 맥주가 나왔다.
그들은 웃음을 터트리며 건배를 했다.
리먼 인수에 관한 일화가 다시 나왔다. 구인혁과 이지은이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
유서준은 이 모든 것이 구인혁 덕분이라며 경제적으로 도울 일이 있다면 꼭 말해달라고 했지만 두 사람은 웃으며 사양했다.
물론 구인혁 덕분이란 말의 의미는 유서준과 구인혁 당사자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몰랐다. 구인혁은 아내인 이지은 앞에서 일체 다이어리를 입에 올린 적이 없었으니까.
이런저런 이야기로 떠들던 그들은 밤이 깊어지자 양쪽으로 나뉘었다.
유서준은 구인혁과 서재에서 이야기를 시작했다. 바로 다이어리에 관한 내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