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the Game as a Barbarian RAW - chapter (587)
587화 오리지널 (4)
트롤 석상 옆에 열린 포탈을 타고 들어온 공간.
이곳이 어디인지 확인하는 것에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신발 밑창을 뚫고 들어오는 냉기.
투명한 유리처럼 하얀빛을 반사하는 얼음 벽.
‘…빙하굴이네.’
곰아저씨를 만나고, 노아르크 출신 플레이어였던 젠시아를 살해하기도 했던 그 장소.
다만 감회가 새롭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야 아까 폭군 타룬바스를 잡으러 들어왔을 때 이미 다 느낀 감정이니까.
‘아무튼, 그럼 1층 균열이라는 건데…….’
덕분에 표본이 늘었다.
핏빛 성채에 진입 시, 아주 극악의 확률로 히든 보스인 캠보르미어 공작이 출현했던 것처럼.
몇몇 균열엔 히든 보스가 있는 것일지 모른다.
내가 지금부터 잡아야 할 수호자 트롤 또한 그런 케이스 중 하나일 테고.
“일단 얼굴부터 보고 생각하자.”
시작 지점에 가만히 멈춰 생각 정리를 끝낸 나는 걸음을 옮겨 통로를 지나쳤고, 머지않아 좁은 길목이 넓어지며 거대한 공동이 모습을 드러냈다.
일단 트롤은 보이지 않았다.
‘역시… 보스 방도 조금 차이가 있구나.’
보스가 등장하기 이전에 서둘러 주변 지형을 쓱 훑어보며 눈으로 탐색했다.
캠보르미어가 등장한 핏빛 성채에 데스나이트 대신 관짝이 놓여 있었듯.
이곳에도 바뀐 부분이 있었다.
얼음 기둥에 갇힌 아이스 오크 삼 형제.
보스전 직전에 에피타이저처럼 나오는 이놈들이 없는 건, 폭군 타룬바스도 마찬가지였지만…….
‘뭔 일이 있었던 거야 여기서는.’
얼어붙은 공동에 시체들이 가득하다.
팔과 다리가 찢겨지고, 짓뭉개져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모습의 사람 시체들이 산처럼 쌓여있다.
다만, 이들이 ‘제국 병사’임을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피로 얼룩져 변색된 깃발에 새겨진 문양 덕이다.
도플갱어의 숲에서도, 백인대장 드레드피어와 사투를 벌인 그 동굴에서도 보았던 그 문양.
‘제국군은 무슨 안 끼는 곳이 없네.’
지구로 치자면 영국 같은 건가?
아무튼, 공동에는 제국군의 시체 말고 몬스터의 사체들도 존재했다.
아이스 오크, 서리늑대, 예티 등.
빙하굴에서 출현하는 몬스터는 물론, 전혀 연관이 없던 개체들도 곳곳에서 보였는데…….
‘저건 타룬바스 아닌가……?’
오리지널 빙하굴의 수호자인 폭군 타룬바스로 추정되는 시체도 찾을 수 있었다.
원래 걔가 갖고 다니던 몽둥이는 보이지 않는 상태—.
꺼걱, 꺼걱.
뭐야, 어디서 난 소리야.
정적 속에서 피어난 이질적인 소음에 주변을 두리번거리기도 잠시, 머지않아 나는 소리의 근원을 발견할 수 있었다.
꺼걱, 꺼걱.
공동 중심부에 자리한 유난히 큰 시체산이 흔들거린다.
청각에 집중해 보니 그 안에서 또 소리가 났다.
꿀꺽—
이번에는 무언가를 삼키는 듯한 소리.
의문을 느끼며 해당 방향으로 가까이 다가가던 찰나였다.
[그아아아아아앍—!]시체산 아래에 덮여 있던 무언가가 괴성을 터트리며 몸을 일으켰다.
***
5m가 훌쩍 넘는 체구.
입 밖으로 튀어나온 흉악한 크기의 송곳니.
일반적인 트롤보다 훨씬 더 크다는 점만 제하면 녀석은 트롤의 특징을 전부 갖고 있었다.
‘뭐, 피부가 검은색이긴 하지만…….’
나는 피부색에 뭔 말만 해도 인종 차별 주의자로 몰려가는 현대에서 서식했던 K-바바리안.
고로, 피부색보다는 다른 것에 더욱 집중했다.
‘몽둥이도 들고 있네.’
한 손으로 사람의 팔쪼가리를 들고서 간식을 먹듯 아그작거리는 녀석은 다른 손에 몽둥이 하나를 들고 있었다.
원래 폭군 타룬바스가 들고 다니는 몽둥이였다.
아, 참고로 정식 명칭도 있다.
No. 9712 ‘설원의 몽둥이’.
한참 뒷번호인 아이템답게, 평타 딜에 냉기 딜이 묻는다는 간단한 효과만을 지닌 둔기류 무기.
쿠웅-!
들고 있던 ‘간식’을 한 입에 꿀꺽 삼킨 녀석이 이내 위협적으로 나를 향해 한 걸음 내디딘다.
다만, 나는 침착하게 대화를 시도했다.
“나는 얀델의 아들 비요른이다.”
쿠웅-!
공격 의사가 없음을 표하며 말을 걸자, 녀석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나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한다.
[그읅……?]설마 이번에는 대화가 통하는 건가?
그런 기대가 무참히 박살나는 것에는 1초면 충분했다.
[그아아아아앍—!]이름을 밝혔을 뿐인데, 어째선지 흉포한 괴성을 내지르며 돌진하기 시작한 트롤.
기대가 컸던 만큼 아쉬운 마음도 컸다.
“하…….”
역시 말이 안 통하는 건가.
사람 팔다리를 씹어먹고 있는 걸 보고 대충 그러지 않을까 싶기는 했는데…….
뭐, 그래도 포기하기는 이르니까.
후우웅-!
휘둘러지는 몽둥이를 날렵하게 피하며 재차 대화를 시도한다.
혹시 모른단 생각에 이번엔 고대어로.
[진정해라. 나는 너랑 싸우고 싶지 않다.] […….] [내 이름은 얀델의 아들 비요른—.] [그아아아아아앍-!]에라이.
이것도 안 돼?
그럼 이제 남은 게 얼마 없는데…….
“그아아아아아앍-!”
이후 놈의 언어로 말을 걸어보기도 했지만, 여전히 대화는 통하지 않았다.
따라서 나는 최후의 수단을 꺼냈다.
라프도니아어도, 고대어도, 녀석이 뱉는 말로도 말이 통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었다.
몸의 대화를 시도하는 수밖에.
퍼억-!
무지성으로 달려드는 녀석의 턱주가리를 망치로 후려쳤다.
그야 분노조절 장애를 가진 이들은 현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으니까.
그들이 가진 특징처럼, 이번에도 명확한 힘의 차이를 보여 주면 녀석이 좀 정신을 차리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호소인은 아니었나보네.’
혹여나 한 방에 뒈질까 우려해 [휘두르기]도 쓰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녀석은 오히려 더 분노하며 내게 달려들었다.
생명의 불꽃이 꺼지기 전까지 공격성을 표출하는 보통의 몬스터들과 동일한 행동.
‘오케이, 그럼 대화는 깔끔하게 포기.’
메인 목표는 달성이 불가능하다 판단한 나는 부가 목표에 집중했다.
바로 녀석에 대한 정보를 모으는 것인데…….
후우웅-!
그때 놈의 몽둥이가 파공음을 자아내며 허공을 가로지른다. 그 과정에서 무기에 빛이 어린다거나, 번개가 뿜어져 나오는 식의 화려한 이펙트는 일절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니, 그렇기에 적어도 나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휘두르기]?’
트롤 녀석이 [휘두르기]를 사용했다.
못내 당황스럽지만, 머리는 침착하게 이 현상의 원인이 무엇인지 도출해냈다.
‘상위 변이종…….’
빙하굴의 트롤은 상위 변이종이다.
그래서 타 개체의 정수를 사용한다.
뱀파이어 캠보르미어가 나이트플라의 [고통분담]을 쓴 것처럼, 이놈은 오우거의 스킬을 쓸 수 있는 것.
물론 중요한 건 이게 아니다.
‘……와, 진짜 있었구나.’
아주 오래전부터 갖고 있던 호기심이었다.
오우거의 힘과 트롤의 재생력. 이 두 가지를 가진 몬스터가 있다면 어떤 느낌일까.
지금 그 상상 속의 몬스터가 현실화 된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생각보다 별거 없네.’
차라리 오우거가 트롤 정수를 갖고 있는 구도면 모를까.
그 정반대인 트롤은 예상보다 싱거웠다.
음, 정확히는 내가 너무 강해졌다고 해야 하나?
실제로 첫 균열에서 마주친 게 캠보르미어가 아니라 이놈이었다면 그날부로 비요른 얀델의 여정은 끝이 났을 것이다.
‘그럼 슬슬 확인해 볼까.’
이후 나는 차근차근 딜을 넣어가며 트롤의 전투 방식 전체를 탐구했다.
최대한 정보를 모아가야 이후에 도전할 이들이 편해진다는 판단.
물론 그럼에도 전투는 금방 끝났다.
한 30분 정도 걸렸나?
마지막에 동굴이 어두워지며 트롤의 쿨타임이 사라지는 것만 빼면 딱히 주의할 점은 없을 듯했다.
「타락한 짐승 키르뒤를 처치했습니다.」
「상위 변이종 처치 보너스. EXP +1」
「수호자 처치 보너스. EXP +3」
이윽고 트롤의 머리를 망치로 깨부수자 포탈이 열렸고, 늘 그랬듯 무지개 정수는 쳐다보지도 않은 채 밖으로 나왔다.
***
트롤을 잡고 나온 뒤, 일단 미확인 수호자들 중 5등급에 해당하는 녀석들을 전부 처치했지만 딱히 소득은 없었다.
대화가 가능했던 것은 캠보르미어 공작뿐.
‘뭔가… 분명 뭔가 이유가 있을 거 같은데…….’
암만 고민을 해도 그럴듯한 가설조차 나오지가 않는다.
왜 그 아저씨는 말이 통했던 걸까.
다른 미확인 수호자들과는 도대체 어떤 부분에서 차이가 있었던 걸까.
그냥 운?
알 수 없지만, 나도 이쯤에서 비밀 파헤치기는 끝내고 공략을 재개했다.
미뤄놨던 3층 균열인 백색신전을 클리어했다.
[…….]이상한 일이지만, 백색신전에서 등장한 종말의 기사는 인게임에서 뱉던 대사조차 치지 않고 내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공략에 도움이 될 만한 장비들을 빌려 도전한 4층 균열도 마찬가지였다.
[너, 희도··· 날 죽이러, 온 거야······?]원래라면 그런 대사를 쳐야 했을 도플갱어는 아무런 말없이 보스전을 시작했다.
아, 참고로 보스전의 구도는 원형과 달랐다.
내외부에서 동시 공략을 해야 하며, 도플갱어가 팀원으로 바뀌는 그 기믹은 솔플일 때 어떻게 될지 궁금했건만.
‘이딴 걸… 깨라고 만들어 뒀다고?’
녀석은 나로 변신해 싸웠고, [자가복제]를 이용해 수적 우위를 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절망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도플갱어는 넘버스 아이템을 복사하지 못하니까.
아이기스의 장벽.
크라울의 악마분쇄자.
두 개의 핵심 코어 아이템은 물론이고, 인간형 몬스터의 카운터 아이템인 ‘황야의 무법자’.
그 외에도 밖에서 빌려온 수많은 장비들.
그것들을 극한까지 활용한 끝에 나는 도플갱어를 처치할 수 있었다.
한 7시간 정도 걸려서.
「도플갱어를 처치했습니다.」
「수호자 처치 보너스. EXP +3」
원래 어떻게든 막아내야 하는 도플갱어의 봉인은 진작에 해제됐고, 그 상태로 [결정화] 패턴만 총 13번을 보았다.
녀석들의 숫자가 얼마나 늘어나든 풀세팅을 끝낸 나에게는 딜이 아예 박히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전략.
‘어우씨… 진짜 뒈지는 줄 알았네.’
밖으로 나온 나는 도플갱어와의 전투 과정을 모두에게 공유했고, 7시간이나 싸웠다는 말에 모두 말문을 잃어버렸다.
내 치열한 전투가 인상깊었는지, 다행히 도전을 해보겠다며 객기를 부리는 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입을 떡 벌리며 감탄할 뿐.
“도플갱어의 정수……. 탐이 나지만, 역시나 포기해야겠구려.”
“혼자서 잡을 수 있는 종류의 마물이지 않소.”
“나는 4층 이상의 균열 수호자를 혼자서 잡는 게 가능했다는 것부터가 놀랍소.”
“그런데… 남작께서는 이번에도 정수는 드시지 않은 것 같군?”
아, 마지막에 들린 의문은 나도 고민했던 부분이었다.
도플갱어 정수의 밸류는 아주 높은 편이니까.
어떤 직종이 먹든 꽤 유용하게 쓸 수 있다.
하지만…….
‘칸이 부족해.’
내가 두 명이 되어봤자 얼마나 강해지겠는가?
분신술을 쓸 때 넘버스 아이템까지 복사가 되는 것도 아닌데.
게다가 [자가복제]는 아멜리아가 먹은 [이중통치] 같은 정수까지 먹어야 시너지가 나기에 쿨하게 포기했다.
‘앞으로 뭐가 나올지 모르는데 무조건 한 칸은 비워놔야지.’
아무튼, 도플갱어와의 격전을 펼친 후로는 그냥 쭉 늘어져 쉬며 하루를 보냈는데, 탐사군의 분위기가 굉장히 특이했다.
“오오! 돌아왔군! 다행일세!”
“시, 신관님! 상처 좀 봐주십시오!”
도전을 택한 탐험가들은 밤낮없이 포탈을 드나들며 열정을 뽐냈고, 기사와 신관, 그리고 마법사들은 한 걸음 물러나 각자 할 일이나 하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그야 얘네는 경험치도 정수도 필요가 없으니까.
학문적인 열정을 가진 마법사들이 그나마 현 사태에 관심을 갖는 듯하지만…….
“남작님께서도 내일이면 황금 유적에 도전하시겠지요?”
“예, 그럴 겁니다.”
“궁금하구려……. 과연 황금 유적은 어떠할지. 그리고 저 닫힌 문 너머에는 뭐가 있을지 말이오.”
그런 마법사들은 내 행보를 기다릴 뿐, 이미 클리어가 끝난 석상에는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렇게 휴식을 취하며 보낸 다음 날.
「황금독니 칼피온을 처치했습니다. EXP +6.」
「수호자 처치 보너스. EXP +3」
아침 식사를 끝낸 나는 예정대로 4층 균열인 황금 유적에 도전했고, 약 3시간 만에 클리어를 하고 돌아왔다.
다만, 도플갱어 때처럼 긴박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저 탱커의 숙명이었을 뿐.
‘하… 공격 스킬 마렵네.’
[휘두르기]와 악마분쇄자.그나마 이 두 개가 있어서 어찌저찌 잡기는 했지만, 칼피온의 껍질을 하나하나 벗기고 있자니 필연적으로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이번엔 인간형 몬스터도 아닌지라 황야의 무법자로 딜 뻥튀기도 불가능했고.
‘…그래도 탱커라서 잡은 거긴 하지만.’
사실 RPG 게임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다.
잘 큰 탱커는 상성만 맞는다면 다른 클래스들이 잡지 못하는 보스를 혼자 잡는 게 가능하다.
아, 물론 시간 제한이 없다는 전제하에.
‘그럼 미확인 수호자를 제하면 이제 5층만 남은 건가…….’
내 시선이 5층 수호자들에게로 향하자 사람들의 이목이 모이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호기심 어린 시선이었으나. 아나바다의 멤버들 같은 경우엔 살짝 긴장한 듯한 눈빛이었다.
“분명… 5층 균열부터는 포탈이 두 개 열렸지?”
“그렇소이다. 얀델 남작이 과연 누구와 균열에 들어가려 할지가 궁금하구려.”
나는 주변을 쭉 둘러보았다.
“…….”
무표정한 아멜리아와 기대하는 눈빛의 에르웬.
‘얘는 뭐 소풍이라도 가는 줄 아는 건가?’
미샤의 경우에는 긴장한 표정이었고, 아이나르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시선을 피했다.
왠지 오늘따라 더더욱 의욕이 없어 보였다.
거, 어차피 데려갈 사람은 이미 정해뒀구만.
터벅, 터벅.
나는 사람들을 지나쳐 한 사람 앞에 멈춰섰다.
“아루아 레이븐.”
“……네?”
자신이 선택될 줄 전혀 예상하지 못한 표정이지만, 긴 말은 필요 없었다.
“네가 필요하다.”
무려 5층 수호자 정수 아닌가.
당연히 시험관에 담아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