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rtist Who Paints Dungeon RAW novel - Chapter (299)
299
제299화
“…….”
그저 조용히 캔버스를 바라보는 유성운에 초상화가 물었다.
“이곳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어, 그냥 빙하와 눈뿐이야.”
“그럼 빙하와 눈이 있군요. 어떻게 생겼나요? 차갑다면 얼마나 차갑죠?”
“글쎄다, 정원은 계속해서 형태가 바뀌니까….”
유성운이 캔버스 속 설원을 응시했다.
“지금 모습도 어디선가는 봤을 수도 있겠네.”
가만히 보고 있자면 속이 울렁거렸다.
그의 정원이다. 그의 설원이었다. 눈이 아래로 내리고 위로도 내려 천지를 구분할 수 없는 차디찬 세계. 적막할 때, 혹은 그렇지 않을 때도 눈을 감으면 박동하는 심장 소리가 들려오는….
손가락 끝이 간지러웠다. 심장이 쿵쾅거렸다. 사지의 말단에서부터 시작되어 안구로 가득하게 몰려오는 열기와 초조함. 내가 무엇인가 놓쳐버린 것만 같은 기이한, 그리움.
“…굉장히 현실적이야.”
“과찬이십니다, 이런 물감 뭉텅이가 현실적이라니요.”
“확실히 실제 풍경과는 거리가 있겠지. 이건 사진이 아니니까.”
“유성운 씨의 말씀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림이라는 게 왜 존재하겠어?”
“객관적인 사실만을 찍어내는 사진과 달리 그림은, 감상을 남길 수 있죠.”
“그래, 감상. 감정. 마음. 그런 것들 있잖아.”
사진과 그림의 차이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림에는 시간과 정신이 담기고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그 이야기가 바로 세상 모든 예술과 작품을 귀하게 만든다.
“너도 내가 느끼는 것과 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나?”
“글쎄요.”
“어떻게 내가 느끼고 보았던 세상을 그렇게 그려낼 수 있지?”
“그것도 글쎄요.”
“너는 너무 모호해.”
그게 신비라는 친구들의 매력이긴 하다만.
“…확실히 현실적이라고 하긴 어려운 그림인데….”
유화 특유의 거친 자국이 남는다. 두툼하게 올라간 물감은 빠르게 굳어 툭 튀어나온다. 정밀한 묘사 따위는 없었다. 그저 나이프로 수정조차 않고 뭉근하게 찍어 누르더니 이런 광경이 나왔다.
언젠가 유성운이 제 설원을 보았던 때의 시선이었다.
“…현실 감각과 멀어져서 그런가.”
“멀어지셨습니까?”
“네가 너무 좋은 것만 먹여서 그래.”
“살이 찌셔야 할 텐데, 늘 마른 몸이라 안쓰러우십니다.”
“매번 말하지만 나는 마른 편이 아니란다, 지오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시선은 설원에 박혀 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하지?’
무의미한 의문이라는 걸 알면서도 생각하게 된다. 경탄하고 있었다. 사람을 닮은 사람의 자식이 만들어낸 얄팍한 작품에서 황량한 설원을 찾는다는 것이. 정녕 말이 되는 일인가.
내 정원이 그려지고 있다. 바로 저기에 있다. 껴안으면 끌어안을 수 있는 캔버스 위에….
“굉장히 부드럽게 그리네.”
툭 던진 말을 초상화가 흘려보내지 않고 받아주었다.
“눈은 부드럽지 않습니까?”
“그보다는, 서걱거린다거나… 차갑다는 감상이 먼저 아니야?”
“사람의 손길과 발길이 닿지 않는 눈은 포근합니다.”
“따듯하지는 않겠지만.”
“아무것도 닿지 않은 그 자체만이라면요.”
“맞아, 내 설원이 그래.”
사람이 드나들 수 없다.
‘그 안에서는 사실상 나도 사람이 아니고.’
그는 ‘정원사’일 뿐이다. 정원의 광경을 해치는 짓은 일체 허용되지 않는다. 유성운은 그 안에서 어떤 흔적도 남길 수 없었다. 사람으로서 눈을 밟은 자국이라든지, 얄팍한 온기라든지.
하늘과 땅을 구분할 수 없는 설원에서 유성운은 눈조차 녹일 수 없었다. 정원이 요구하거나 허락한 게 아니라면 말이다.
“…….”
기이한 감정이 샘솟았다.
“…이 광경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게 된 건 처음인데.”
“다른 정원사분들과는 공유하지 않습니까?”
“정원을 인간이 볼 수 있는 곳에 끌고 나오는 건 불가능한 일이잖아.”
“음….”
고개를 기울인 지오가 물었다.
“유성운 씨의 눈을 통해서도 볼 수 없습니까? 그것은 ‘인간이 볼 수 있는 곳’이라고 말할 수 없나요?”
“내 눈을 본다고 거기에 비친 정원까지 볼 수 있는 건 아마 너뿐일걸, 지오야. 오해하면 곤란해.”
뭐,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해는 한다만. 유성운이 내심 어색하게 웃었다.
‘인간 흉내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역시 지오의 단편적인 부분만 봐서 내릴 수 있었던 판단이었을까. 아직 내적으로는 미흡한 부분들이 있어….’
하지만 아주 당혹스럽지는 않았다. 이는 거대한 신비가 종종 헷갈리고는 하는 지점이다. 당신은 자연스럽게 해낼 수 있는 평범한 일이 인간들에겐 기적일 거라고 생각지 못하는 것이다.
신비가 자주 범하는 일반화의 오류라고도 볼 수 있었다. 본인은 된다고 남들도 다 그럴 거라 생각하는 것이. 이런 관점은 인간들로 하여금 상당한 괴리감과 함께 공포를 주기도 한다.
‘그래도 우리 초상화는 최소한 겉으로 보이는 건 잘하니까.’
의미 없는 자부심에 유성운이 빙글 무던하게 웃었다. 내 작품의 특별함을 느낄 때마다 기분이 좋아지는 건 큐레이터의 종특이었다. 그는 마저 설명했다.
“정원사는 제 정원이 얼마나 아름답든, 그걸 절대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없어.”
“기억을 그림이나 사진으로 뽑아내는 스킬도 있다고 하던데.”
“그런 스킬이 통하지 않는 대상인 데다가, 그런 식으로 뽑아낸다고 해서 내가 느낀 감정을 온전히 전달해 줄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유명한 관광지를 보았던 그 시간, 그 감정, 그 시선에 장소를 온전히 들고 올 수 없는 것처럼….”
“안타까운 일입니다.”
황홀한 눈밭의 티 없는 명암까지 그려낸 초상화가 물었다.
“선물해 드릴까요?”
“이런 선물은 사실 나에겐 의미가 없는데 말이지. 정원이 나와 한 몸을 쓰고 있잖아.”
“그렇다면 전시할까요?”
“어디에 전시를 하게?”
“피곤하지 않으십니까?”
“…아, 글쎄….”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하자, 아득한 검은 눈이 품고 있는 자애가 엿보였다. 깊이를 알 수 없을 만큼 지독하고 거대한….
“난 그냥….”
이 존재의 자애는 그 어떤 형태로든 나타날 수 있었다.
커다란 땅을 덮어 오는 무시무시한 해일도 한 손으로 치워줄 수 있을 것이고, 지독한 병마에 허덕이는 병자를 눈길 한 번으로 치료해 줄 수도 있었다. 그러니 ‘친구’에게 ‘선물’을 줄 수도 있는 것이다.
큐레이터는 그의 초상화가 무엇을 말하는지 깨달았다.
“…….”
자애로운 근원께서 이 피로한 정원사에게 무얼 보여주신 건지를 알았다.
“…아직은 괜찮아.”
역시 신비는 신비라는 거지.
심심풀이 수수께끼처럼 툭 던져주고 당장 답을 원하기엔, 너무 무거운 질문이지 않은가.
“이런 작품을 전시해 두면 사람들이 놀라 까무러칠걸.”
“까무러치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이 조금 더 혼란스러워지지 않을까.”
“그렇지도 않을 겁니다.”
“이해해 줘, 그릇이 이것밖에 안 되는 나약한 사람이라 그래. 그 정도로 네 작품은 너무 현실적이고 아름답거든. 심장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치명적이겠지.”
“과찬이십니다.”
“과찬이 아니라는 건 대체 언제쯤 인정해 주려나?”
아마 지구가 뒤집힐 때쯤?
“…나는, 글쎄… 감히 주제넘은 말이겠지만 지금도 괜찮다고 봐서….”
인간이라는 생물이 그렇지 않은가. 안정을 추구한다. 저 하나 변하는 것조차 두려워하는데 세상이 변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그건 일개 인간에게 너무 두려운 일이었다.
“지오야.”
“예.”
“지오의 초상화.”
“예, 듣고 있습니다.”
“지구를 대체 어떻게 만들고 싶어?”
“제가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럼 뭘 하고 싶은 거야.”
“제가 하고 싶은 걸 하고 싶습니다.”
“그게 뭔데.”
“유성운 씨도 알다시피….”
짙은 기름 냄새 나는 은색 통에, 지오가 나이프를 담갔다.
“식사하고, 낮잠을 자고, 친구들과 놀고, 그러다 다음 날 오후에 느지막이 일어나는 거죠.”
참으로 평화로운 이야기였다.
“오해하지 말아 주시겠습니까? 저는 단지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제 친구와 지인과 선하고 좋은 사람들에게 해가 되지 않는 걸 알고 있을 뿐이고요….”
무책임한 것 같기도 하고, 아득하기도 한 소리였다.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는데 제가 왜 망설여야 합니까?”
“사람들은 변화를 무서워하거든.”
“그 부분은 공감하기 어렵습니다.”
“너는 여러모로 특이한 사례니까 그럴 만도 해.”
인간이었던 ‘지오’들조차 그 한계를 훌쩍 넘은 사고방식을 보였다. 제 살을 깎는 희생을 숨 쉬는 것보다도 쉽게 여겼던 지오반니. 차원을 뒤엎어서라도 분노를 세상에 알린 아르지오.
그리고 서지오 미술 교사.
“선생님이라….”
“부르셨습니까?”
“…선생님?”
“예, 부르셨나요?”
“…….”
유성운이 초상화를 보았다.
학생도 제자도 아니었던 유성운의 부름에조차 초상화는 반응했다. 그의 나직하고 부드러운 되물음은 인간의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이럴 때마다 조금 무서워지는 것이다.
‘정해진 값에 따라 정교하게 반응하는 인형 같아.’
물론 그게 신비였다.
‘무서울 것도 없는데, 이것도 내가 한낱 별 볼 일 없는 인간인 탓일까.’
그들처럼 단지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수긍할 수가 없었다. 그 오묘한 규칙이 눈에 밟힐 때마다 등골이 오싹해지고 식은땀이 흐른다. 눈이 커지고 동공은 작아진다. 입꼬리는 올라간다.
그러니 아무리 생각해도 주현 씨는 인간이 아니게 될 운명이었다. 인간이 마땅히 반응해야 하도록 설계된 것에 반응하지 않는 자. 그리고 신에게 선택받은 자이지 않던가.
“…음….”
잡생각이 좀 긴 것 같은데.
“…너는 무슨 일을 한 걸까?”
“이 선생님에게 하는 질문인가요?”
“그래, 선생님.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겠어.”
“무슨 ‘짓’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을 것 같은데.”
“하지만 앞선 전례들이 있어서 말이지, 안 그래?”
지오반니도, 아르지오도 그 정신 나간 업적을 빚어냈다. 그들을 쐐기로 차원은 멸망했고 수많은 생명과 죽음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초상화는 그런 그들을 이용해 지구를 또다시 빚으려 한다.
‘본인은 아니라고 하지만….’
의도한 것이 아니라 말한다.
‘그렇다 해도 결과를 이미 알고서도 그렇게 행동한다면 의도한 것과 뭐가 다르지?’
유성운은 그 차이점을 알아낼 수 없었다.
“너 대체 뭘 한 거야?”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뭘 했길래 네가 첫 번째인 거냐고.”
왜 ‘서지오’가 초상화의 바탕이자 기본이 되는가. 어째서 그의 제자들은 지구의 수호자가 되었는가. 그리고 어째서 초상화의 형태를 한 신비로 되돌아왔는가.
스스로를 인간이라 착각하는 이 존재의 그 무수한 권능은 뭘 대가로 하였는지.
‘인간에서 근원이 된 걸까, 근원에서 인간이 된 걸까.’
정말 이상한 친구였다.
“…다시 말하는데, 이 작품을 전시하지는 말아줘.”
“그럼 제 방 창고에 들어가겠군요.”
“조금 마음 아픈 일이긴 하겠지만… 이런 게 길거리를 떠도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우리 설원이도 바깥 풍경이 보고 싶다는데….”
“어우, 진담인지 농담인지 모르겠어서 등골에 소름이 막 돋네.”
유성운이 품을 뒤적거렸다. 그는 사탕을 씹어 먹고서는 말을 이었다.
“네 의도가 뭔지는 알아.”
“딱히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만.”
“그래, 정원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면 정원사들의 부담도 한결 덜해지겠지. 어쩌면 크게, 넓게, 멀리 보았을 땐 그게 맞을지도 몰라. 근원의 존재를 알리는 것이….”
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대재앙으로부터 한 세기조차 지나지 않았어.”
아직도 한국 바깥으로 넘어가면 국가의 형태조차 띠지 못하는 구역이 더 많았다. 이제 아무도 그곳을 국가라 부르지도 않았다. 단지 오지일 뿐이었다. 이 세계는 이토록 위태롭다.
“이제 막 적응한 사람들에게 근원의 존재까지 알려 더 피곤하게 만들 필요는 없잖아?”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반응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어어, 그래. 그렇겠지.”
“다시 말씀드리자면 저는 그냥 전시를 하고 싶었습니다.”
초상화가 눈을 두 번 깜박였다.
“…유성운 씨의 설원이 너무 아름다워서요.”
“…너….”
유성운이 허탈하고도 떨떠름하게 웃었다.
“너, 너 진짜… 정원사의 마음을 후벼 팔 줄 아는구나….”
“제가 언제 그랬습니까, 이건 모함입니다. 너무 억울합니다.”
“아니, 좋은 의미로. 좋은 의미로 후벼 판다고.”
“긍정적인 어감은 아닌데.”
“사람마다 느끼는 건 다르지.”
조금 민망하기도 했다.
“네 ‘의도’가 그런 거였다면 나도 괜한 잔소리를 한 셈이네.”
이 초상화는 그를 단지 배려하고 있었던 것뿐이었다.
‘나 혼자만 이런 광경을 보지 않을 수 있도록 해주려고 했던 건가.’
확실히 그건 정원사의 아픈 지점이었다. 그들은 평생 외로운 사랑을 해야만 했다. 경애, 집착, 배려, 자비, 탐욕. 사랑이라는 이름하의 그 각각의 감정들을 결코 드러낼 수 없었다.
하려고 해도 못 한다. 보여줄 수 없고 존재하지 않는 광경이니까. 그들이 보는 것은 흔해 빠진 관광지나 아름다운 명소 따위가 아니었다. 실질적인 공간이 아닌 것이다. 그건, 정말로, 꽤나 힘든 부분이라….
“…….”
유성운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처음에, 정원사가 무슨 취급을 받았는지 알아?”
“대략 30년 전의 일인가요.”
“그래, 그때. 그리고 또 수많은 차원에서.”
“흠.”
초상화는 당연히도 정답을 이야기했다.
“미쳐버린 줄 알았을 것 같습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병자 취급이었지.”
그들은 ‘실존’하지 않는 것을 보고 듣고 느끼며 두려워한다. 또 그것에 홀려 끝내 사랑에 빠지고 만다. 그게 남들 눈에는 얼마나 끔찍한 광인으로 보였겠는가.
“우리가 정원을 보여줄 방법은, 그 존재를 증명할 방법은 오로지 우리 자신뿐이야. 우리의 눈. 모발. 체온. 육체의 변형 혹은… 드물게 체향이라든가.”
“확실한 증거가 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렇지, 방금 말했다시피 이건 ‘인간이 볼 수 있는 곳’이 되지 못하니까.”
이건 정원사들끼리도 마찬가지였다. 인간들끼리 서로의 눈을 본다고 그 영혼을, 그 내면의 신비를 볼 수 있겠느냔 말이다. 그런 편리한 권능 따위는 그 누구에게도 없었다.
그렇기에 ‘지오의 초상화’가 더더욱 대단한 것이었다. 그는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그 거대한 신비를 가늠할 수 있게끔 했다. 근원의 눈인 만큼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유성운이 설명을 이었다.
“하지만 정말로 이게 전부인걸. 그 이상 보여줄 수 있는 수단이 아예 없어. 우리의 한계 이상으로 힘을 내보이려고 해도 유일한 통로인 우리가 죽어버릴 뿐이고….”
“정원사들은 정원에 속하게 되면 죽음조차 얻지 못한다던가요.”
“그런 식으로 소멸해 버릴 수도 있는 거라서.”
참 억울하지 않은가?
“명백히 있는 대상을 누구에게도 알려줄 수가 없잖아.”
“피곤하시겠습니다.”
“그리고 외롭지. 이건 뭐랄까, 거의 정원사들의 직업병이야.”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십니까?”
“어… 미안하다고?”
요즘 예민해져서 그랬던 것 같다.
“하긴 네가 원하지 않는 변화를 강요할 리가 없는데.”
이 초상화는 의도하지 않았을 뿐 원하는 길을 걷고 있었다. 그게 꼭 지구를 갈아엎으려는 신성들의 모습을 닮아 두려웠던 것 같다. 사실은 그런 녀석이 아닌 걸 아는데도.
마음이 조금은 편해졌다.
“…….”
이 초상화와 친구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였을 때처럼, 나른한 감각이었다.
“…그럼 보여주기만 할 수도 있나? 사람이 방문하지 않을 수 있도록….”
“그건 당사자의 의사를 따져봐야 할 것 같습니다만, 그런 유성운 씨의 의견을 전달해 드릴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걸 원하십니까?”
“…….”
유성운이 물었다.
“이거, 작품 이름도 있어?”
“유성운 씨입니다.”
“아하.”
웃음이 나왔다.
“역시나.”
어째 너무 나를 잘 안다 했지.
* * *
그날 유성운의 집에는, 커다란 설원 그림이 하나 걸렸다.
“어우.”
“주현 씨, 이 멋진 그림을 보고 할 말이 그것뿐이야?”
“보기만 해도 어지러워지는 이런 위험 물품을….”
“지오 그림인데.”
“알맞은 위치에 장식해 두셨군요, 아주 좋습니다.”
“그렇지?”
변화도 나쁘지만은 않은 일이다.
“…사람 사는 집 같네.”
“이게요?”
“내가 감상에 빠지게 좀 둬봐.”
이 작품이 어디로 도망칠지는 모르겠다만.
아무튼, 유성운의 외로움이 한 조각 덜어진 날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