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untess's Shield Protects the Kingdom RAW novel - Chapter (3)
제3화
인생을 살다보면, 누구나 반짝이는 때가 반드시 온다.
그때를 버티며 기다릴 것인지, 아니면 포기하고 다른 선택을 할 것인지.
그 선택을 제대로 한 자와, 제대로 하지 못한 자의 옳고 그름은 당장 알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나, 아주 때때로. 그 옳고 그름을 바로 알 수 있는 경우도 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촤르르르르르르르!!
이윽고, 기구에 양각되어 있는 문양이 서서히 멈추었다.
독수리, 독수리, 독수리.
삼독수리. 중박이었다.
‘뭐, 어쨌든 당첨이니 또다시 리트라이 기회를 얻을 수 있겠군.’
“세상에, 저 꼬마 또 터졌어!!”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저 꼬마 지금 벌써 몇 번째 트라이인 거야?”
“그, 글쎄… 한 다섯 번은 넘은 거 같은데.”
“다섯 번은 무슨! 내가 아까부터 봤는데 한 열 번은 당첨이겠구만! 대체 뭐야? 왜 저 꼬마만 자꾸 터져?”
“이게 말이 돼? 이거 조작 아닌가?”
몇 번이나 요란하게 당첨을 터뜨리자, 나를 구경하고 있던 이들 사이에서 서서히 수군거림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자, 슬슬 부를 때가 되었는데. 언제 부르려나.’
나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은 척, 슬롯이 뱉어낸 칩들을 모아 카운터에 킵(keep)하며 생각했다.
공기가 변하고 있었다.
도박장에서는 조금씩, 내가 도박장과 짜고 판을 쓸어가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는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당연했다. 나라도 그럴 테니. 당첨자가 거의 없던 판에 갑자기 홀연히 나타난 어린놈이 잭팟이란 잭팟은 홀로 다 터뜨리고 있었으니 의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은 한스 역시 마찬가지.
한스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 뛸 일일 것이다.
그런 만큼 지금 상황을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카운터에 칩을 적립하고 있던 내게 가드가 조심스레 다가와서 속삭였다.
“저, 손님. 혹시, 괜찮으시다면 저와 함께 가시지 않겠습니까?”
“무슨 일이죠?”
“저희 도박장의 운영자께서 손님을 잠시 뵙고자 하십니다. 귀한 분으로서 정중히 모실 테니, 혹시 잠시만 시간을 내어주실 수 없으실까요?”
“이봐요, 가드.”
“예, 말씀하시지요, 손님.”
“가드에게 영광의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예?”
“전, 바로 지금입니다.”
나는 그 말을 끝으로 가드를 뒤로한 채 머신으로 걸어갔다.
아직, 판돈이 모자랐다. 고작 이 정도로는 한스에게서 그 귀물을 이끌어낼 수 없으리라.
좀 더 판돈을 쌓아야 했다. 절대로, 과거에 잃었던 돈에 대한 앙갚음 때문은 아니었다. 절대로.
* * *
내가 가드의 뒤를 따라 움직인 것은 잭팟을 세 번이나 더 터뜨리고, 가드가 거의 울기 직전이 되고, 도박장의 사람들의 분위기가 슬슬 험악해질 때쯤이었다.
가드는 내가 자신을 따라 움직인 그때부터 극진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나를 5층 집무실로 인도했다.
똑똑똑-.
“장주님, 손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들어오시게.”
문을 열고 들어가자, 쥐꼬리 수염을 달고 있는 중년의 신사가 정신없이 펜대를 놀리며 쌓여 있는 서류를 결재하고 있었다.
한스는 가드를 거들떠도 보지 않고 있었지만, 가드는 정중히 목례를 한 후 뒷걸음질을 치며 조용히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사각, 사각.
정적 속에서, 한스가 펜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적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사각, 사각. 뚝.
마침내, 서류의 마지막 장에 기입하는 것을 끝으로.
한스가 펜을 내려놓고 나를 향해 일어섰다.
“하하하, 손님을 모셔오라 해놓고 실례를 범했습니다. 시급을 다투는 사안이라 급히 결재를 해야 해서 다소 늦어졌네요. 앉으시지요.”
나에게 자리를 권한 한스가 직접 차를 우려내어 나의 앞에 정중히 내려두었다.
“필라도르 왕국의 곡창지대에서 난 보리를 우려 내린 차입니다. 천한 것들이 마시는 것이라, 귀한 분의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네요.”
귀한 분이라. 역시, 내가 누군지 파악하고 있었다는 말이다.
“목만 축일 수 있다면 다 똑같죠. 한데, 절 왜 따로 부르신 건지.”
“하하하, 성격이 급하시군요. 저희 도박장의 귀빈이신 삼공자님께서 오늘따라 맹활약을 하고 계시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축하도 드릴 겸, 기구에 대한 이런저런 부탁도 드렸으면 해서 도련님의 귀한 발걸음을 요청드렸습니다.”
말인즉슨, ‘돈이란 돈은 알아서 갖다 바치기 바빴던 흑우가 갑자기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고 들었다. 좋게 말할 때 슬롯머신 그만해라.’라는 거였다.
“도박장에서 도박을 잘한 게 이렇게 따로 조용히 볼 일인가요? 나 참, 두 번만 돈 땄다가는 대가로 목이라도 따이겠습니다.”
딸칵!
나의 답변이 영 시큰둥하자, 한스가 잔을 내려놓은 채 자세를 바로 하며 말했다.
“삼공자님! 이것은 보통 문제가 아닙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삼공자님께서 갑작스레 노골적으로 잭팟만 터트리시니 도박장의 신뢰성을 의심하는 이들이 급격하게 많아지지 않겠습니까? 가문의 ‘중요 관계자’이신 공자님의 정체라도 알려지는 날에는 반텐 영지의 주요 수입원 중 한 축을 흔들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
‘당장 그만두지 않으면 네 정체를 까발리겠다. 그럼 너도 재미없을걸?’이라는 협박을 참 멋지게도 한다.
물론, 씨알도 먹히지 않을 협박이지만.
“글쎄요, 장주님께서 걱정하시는 게 정말 가문이 일궈온 도박장일까요?”
“예?”
“장주님께서 걱정하시는 것이 자신의 자리는 아니냐는 말씀입니다.”
“그게 무슨….”
“에이, 왜 이래요, 장주님. 우리 까놓고 얘기합시다.”
아직 나이도 어린 내가 이리 노골적으로 치고 들어올 것은 예상치 못했는지, 한스가 잠시 말을 잃은 틈에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말을 이어갔다. 음, 향기롭군.
나는 엄지와 검지를 동글게 말고 손을 흔들며 한스에게 물었다.
“장주님 말씀대로 가문의 ‘귀한 분’이자 ‘중요 관계자’인 제가, 왜 이렇게 도박장에 와서 대놓고 깽판을 치고 있을까요?”
살랑살랑.
내 거친 손길에 따라 한스의 눈빛도 불안하게 흔들렸다. 평정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내 눈에는 흔들리는 속내가 훤히 보였다. 이래서 뒤가 구린 놈들은 털어먹기가 쉽다니까.
“분명, 한스는 제가 열 살이었던 무렵부터 도박장의 장주로 임명되었었죠. 도박장의 운영은 최대 2년으로 알고 있는데… 왜 한스는 5년이나 지난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걸까요? 흠, 흥미롭군요.”
삐질삐질.
한스의 이마에서 한 줄기, 두 줄기 서서히 땀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한스, 입은 아니라고 하지만 몸은 솔직한걸?
“그만.”
한스가 내 말을 막은 채, 무표정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불경스럽게도 그 표정에는 가문의 직계에 대한 공경이 조금도 존재하지 않았다.
“좋습니다, 삼공자님. 제가 졌습니다.”
한스가 두 손을 휘저으며 내 말을 막고 패배를 시인했다.
“삼공자님께서는 일공자님이나 이공녀님과 다르게 재능이 없는 분이라고 들었는데, 이제 보니 소문과 다르게 뱃속에 능구렁이가 가득한 분이셨군요.”
나는 한스를 바라보면서 잇몸을 보이며 웃었다.
“어이쿠, 칭찬 고마워요.”
내 능글맞은 반응에 피식 웃은 한스가 소파에 몸을 기댄 채 내게 물었다.
“뭐, 좋습니다. 삼공자님의 반응을 보니, 이리 요란하게 사고를 치신 게 전부 저를 보기 위해서 그러신 것 같은데. 보아하니 제 모가지를 치려고 오신 건 아닌 것 같고. 원하시는 게 뭡니까?”
음, 똑똑한 놈들과 대화하는 건 이래서 편하다. 하지만.
“에이, 촌스럽게.”
원하는 걸 먼저 얘기하는 건 하수다.
“‘뭘 원하는지’가 아니라, ‘뭘 해줄 수 있는지’를 적극적으로 제시하셔야죠. 알 만하신 분이.”
내 말에 한스는 곤란하다는 듯이 팔짱을 끼더니, 하나씩 하나씩 좋은 안을 제시(?)해왔다.
“이번 달에 판돈으로 들어왔던 필라도르 흑우… 아니 귀족분께서 거셨던 미스릴 도금 방패를 드리겠습니다.”
미스릴 도금 방패라. 음, 나쁘지 않다. 조그만 저택 하나 정도는 살 만하겠군. 하지만 고작 그걸 받으려고 그 생쇼를 벌인 게 아니다.
“에이.”
“그럼, 5국 연합에서 들어온 상인이 걸었던 반지형 아티팩트는 어떠십니까? 무려 2서클 마법을 3개나 메모라이즈할 수 있는 귀한….”
마법사가 아닌데 마법을 쓸 수 있는 아티팩트들은 분명 귀하다. 그것도 3개나 메모라이즈가 된다면, 수도의 알짜 위치에 큰 저택도 능히 살 만하겠지.
“좀 더 씁시다.”
“…그럼 2개를 다 가져가시면 어떻습니까?”
“아우, 한스 목숨값이 꽤나 싸네요. 몰랐네, 몰랐어.”
그 후로도 한스는 온갖 물품들을 제시했지만, 나는 초지일관 ‘No’를 주장했다. 애초에 내가 원하던 그 물건이 끝까지 안 나왔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두 가지 이유로 상당히 놀랐다.
첫 번째는 끝까지 그 물건을 안 내놓는 한스의 독함에.
두 번째는 끝도 없이 나오는 귀중품 목록의 향연에.
‘이 새끼, 그동안 도대체 얼마나 많은 물건을 꿍쳐둔 거야?’
놀란 나의 마음과 별개로, 계속해서 퇴짜를 맞은 한스의 이마에 기어코 혈관이 살포시 올라오기 시작했다.
“…외람되오나, 삼공자님. 제가 가진 물건들은 이게 전부입니다. 혹, 따로 원하시는 물건이라도 있으신지요.”
대충 이 정도면 호주머니에 숨기고 있는 것도 파악이 되었을 테니, 나 역시 본론을 꺼냈다.
“우와, 한스. 생각보다 독종이네요. 끝끝내 시치미를 떼네.”
“그게 무슨….”
“생각해봐요, 한스. 소문을 들어 알겠지만, 내가 지금 그런 물건들 가져봤자 어디다가 써요? 예쁜 쓰레기지, 그냥.”
그러니, 그것들은 지금 내게는 하등 쓸모가 없는 물건들이었다. 물론 나중에는 쓸 만한 부분이 있을지 모르니 기억은 해두겠지만.
“그럼, 삼공자님께서 원하시는 건 대체 뭡니까?”
“아아, 뭐 별건 아니고.”
난 쑥스럽다는 듯이 뒤통수를 긁적였다.
“뭐, 아시다시피. 제가 몸이 좀 허약하잖아요? 거, 약으로 쓸 만한 물건이나 하나 주시면 좋겠네요. 예를 들면-.”
내가 말을 끌자, 한스의 눈이 급속도로 흔들렸다.
오케이, 빙고.
있구나.
“다 자란 만드라고라라든가, 그런 것 있잖아요? 보약으로 지어 먹으면 이 사람한테 참,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하하하.”
편안한 마음으로 이야기하는 나와는 달리.
한스의 표정은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로 무참히 구겨지고 있었다.
분노.
당황.
놀람.
이 모든 게 섞여 있는 표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까.
나는 단연코 ‘지금의 한스 같은 표정’이라는 말 이상으로 적절한 표현을 찾지 못할 것이다.
제법 긴 시간 동안 말이 없던 한스는, 쥐어짜듯이 입을 열어 오리발을 내밀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시다시피 만드라고라는 워낙 귀한 물건이라… 그런 귀물(貴物)이 한낱 도박장에 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무언가 오해가 있으신 듯합니다.”
“우와, 흉해라.”
“……!”
“아차차, 실례. 죄송합니다. 마음속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그만.”
나는 소파에 푹 기댄 자세를 바로 하며 한스를 직시한 채 말했다.
“장주님, 우리 시간 아깝게 이러지 맙시다. 내가 왜 저 하늘만큼 쌓은 칩을 계속해서 모아놓은 건지, 왜 지금껏 슬롯머신이 도입되는 순간까지 계속해서 돈을 잃어준 건지. 유능한 장주님이라면 모를 수가 없을 텐데?”
“……!”
사실 계속 돈을 잃었던 것은 진짜 잃었던 거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잃을 예정이었지만.
최소한 지금의 한스가 느끼기에는, 이 순간을 위해 그간의 모습을 연출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리 말씀하셔도, 없는 것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하. 계속 모르쇠로 나오시겠다?
“정말 끝까지 가보자는 겁니까? 이러면 재미없을 텐데. 물론 ‘그’에게 제공해야 하는 상품이라 최적의 타이밍을 재는 거야 이해한다만. 아끼다 똥 되는 거보다는 좋을걸요?”
“……!!”
한스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이 사람, 유능하다고 들었는데 생각보다 표정을 못 숨긴다.
“…대체, 어디까지 알고 계신 겁니까?”
지금 저 말을 하는데도 표정이 착 가라앉은 것이, 어째 영 수상했다.
“글쎄, 그건 제 장사 밑천이라 말씀드릴 수는 없고. 아무튼 지금 당장의 위기라도 넘기는 것이 현명하지 않겠냐는 말이죠. 지금이라도 솔직히 내놓으면 ‘그’나, 장주님에 대한 내용은 가문에 입도 벙긋하지 않을 테니. 약속하죠.”
나를 빤히 바라보는 한스의 표정이 점차 불온해진다.
“…삼공자님께서 제시한 방법보다 더 ‘효과’적인 해결책이 있을 듯한데. 한번 들어 보시겠습니까?”
흠. 왠지 듣고 싶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나의 생각이 어떻든 간에, 한스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저벅, 저벅.
집무실 안으로 가드들이 들어왔다. 한두 명이 아니라, 인의 장벽을 칠 수 있을 정도로.
“호오, 이게 장주가 말한 ‘효과’적인 방법인가?”
나는 더 이상 존대를 하지 않았다.
“앞으로의 위협 요소 자체를 없애버리는 것. 그 이상 가는 ‘효과’적인 방법은 없을 테니까요.”
“실패하면 부작용이 꽤 클 텐데?”
“도박장을 책임지는 이가 확률이 높은 도박에 베팅하는 것은 본능이나 다름없는지라.”
“자신은 있고?”
“삼공자님 얘기야 유명하죠. 무능한 벌레… 어이쿠, 이런. 죄송합니다. 덜 여문 애송이 정도는 저희 가드들이면 충분히 ‘처리’할 수 있습니다. 유능한 친구들이거든요.”
“흠, 과연. 도박장의 장주다운 베팅. 훌륭하다.”
“과찬의 말씀을. 짧은 시간이었지만 즐거웠습니다. 뭐, 좀 번거롭게 되었습니다만. 삼공자님의 ‘처리’는 ‘그분’께서 알아서 해주실 테니, 아무 걱정 마시고 편히 가시길.”
한스는 더 이상 내가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닌 듯 나를 뒤로한 채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뻐어어억!
한스의 뒤로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어이쿠, 여러분. 아무리 하찮은 벌레라고 해도 명색이 이 대지를 다스리는 가문의 직계. 그래도 부드럽게 ‘처리’ 부탁드립니다.”
팔랑.
한스는 가드들에게 교살(絞殺)과 같은 온건(?)한 ‘처리’를 요구했다. 어쨌든 잠시나마 자신을 열 받게 했던 삼공자가 아닌가. 최소한 두들겨 패서 처리하기에는….
철푸덕!
“……?”
한스는 자신이 말하기가 무섭게 서류에 튄 붉은 액체에 눈살을 찌푸렸다. 아니, 부드럽게 처리하라고 말한 지 몇 초나 지났다고 자신의 서류에 피가 튄단 말인가?
눈살을 찌푸리며 가드들을 향해 한 소리 하려던 한스의 망막에, 예상과 조금, 아니 많이 다른 그림이 잡혔다.
피투성이에 차마 눈 뜨고 보기 힘든 모습은 맞았다.
하나, 그 대상이.
‘처리하려던’ 벌레가 아니라, ‘처리할’ 가드들이 피투성이라는 점에서.
조금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