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81
81화. 황실
“계획이 바뀔 수 있다? 이제 와서?!”
빛나는 은색 머리를 우아하게 땋아 올린 귀부인이, 푸근한 인상과 어울리지 않게 신경질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방 안 가득 울려 퍼지는 여인의 날카로운 목소리에도, 손바닥만 한 수정구 속 상대방의 목소리는 담담할 뿐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사정이 있습니다, 마마.]“이유도 설명하지 않겠다? 하, 내가 정말 우습게 보인 모양이야.”
좀 전의 목소리가 너무 컸다는 것을 자각한 것인지 여인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낮아졌지만, 그 안에서 묻어나는 분노는 오히려 더욱 강렬해진 듯했다.
그러나 수정구 안 그림자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저희 내부 문제라서 자세히 말씀드리기가 어렵습니다. 다만 큰 얼개는 그대로 가져갈 것이니, 결과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흥, 카룬의 일은 이미 들었다. 얼토당토않은 일을 벌여 놓고는 거하게 한 방 먹었다지? 거기다 이제는 몇 년을 준비한 계획을 시행까지 고작 석 달 앞두고 뒤엎겠다는 소리나 지껄이고 있으니……. 내가 네놈들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까?”
그 말에 그림자가 처음으로 움찔했지만, 그럼에도 목소리에 담긴 차분함만큼은 그대로였다.
[믿지 않으신다면, 이대로 계약을 파기해도 좋습니다.]“……뭐?”
까드득.
어처구니가 없어 절로 이가 갈렸지만.
[물론 그렇게 되면 저희 역시 안타까울 겁니다. 우리 대에서 이런 기회가 다시 오긴 쉽지 않을 테니까요.]이어진 목소리에는 여인도 쉽게 반박하지 못했다.
그 잘난, 증오스러운 아스란의 핏줄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이는 날이 과연 언제 또 있을까.
황태자의 결혼식이 아니라면 적어도 몇십 년간은 어림없는 일이었다.
여인은 자신도 모르게 움켜쥔 주먹을 부르르 떨며 물었다.
“……결과는 확실하겠지?”
[물론입니다. 계획이 다시 확정되는 대로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확실히 하도록 해. 네놈들이 ‘제국 황제’의 비호를 받으며 양지로 나올 수 있는 길은 이것뿐이니까. 그리고 그건 내 도움 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안심하십시오, 마마.]“다시 한번 경고하는데, 일방적인 통보를 참아 주는 건 이번이 마지막이야.”
상대에게 휘둘리기 싫은 마음에 부러 놓은 엄포.
그에 수정구 속 그림자가 대답하려던 찰나.
– 2황자, 5황자 전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방문 밖에서 기사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푸스스.
그 즉시 사라지는 수정구 속 그림자.
여인 역시 수정구를 품 안에 잘 넣고서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곧 방문이 열리며, 척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호리호리한 청년과 어린 소년이 함께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백금발에 황금안, 전형적인 아스란 황족 직계의 모습을 보이는 청년과 좀 더 진한 금발에 여인을 닮은 녹색 눈을 가진 소년.
“문안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어마마마.”
“오늘도 더 아름다워 보이십니다, 어마마마.”
그 말에 그녀의 얼굴에 자연히 웃음꽃이 피었다.
“오! 어서 오세요, 우리 황자님들.”
특히나 둘 중 작은 소년을 바라보는 여인의 눈빛은, 좀 전에 섬뜩하게 눈을 빛냈던 이와 동일인이라고는 생각지 못할 정도로 따스했다.
그에 소년은 미소를 지으며 여인에게 달려와 안겼지만, 청년은 그런 동생의 모습이 마뜩찮은 듯 살짝 미간을 좁혔다.
“어마마마, 티넬도 이제 열네 살입니다. 2년 뒤면 성년인데, 품 안의 아이처럼 다루시는 것은 아랫사람들 보기에도 좋지 않습니다.”
그 말에 여인의 얼굴이 슬쩍 굳어졌다.
“우리 로트 황자는 어릴 때를 기억하지 못하나 봅니다? 이 어미는 황자한테도 똑같이 대했습니다만, 그리도 헌앙하게 자라지 않았습니까?”
“그랬……던가요?”
청년, 2황자 로트 반 아스란이 모호한 표정을 지으며 쓴웃음을 짓자, 여인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달리 말하면 티넬 황자는 어쨌거나 성년이 아니니, 아직은 어미의 사랑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그렇지요, 황자?”
여인이 그리 말하며 품에 안은 자식을 내려다보자, 에메랄드빛 눈의 소년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어마마마! 제가 성년이 되어서 형님만큼 커지면, 그때는 제가 어마마마를 이렇게 안아 드리겠습니다!”
“어머, 듬직해라! 언제 이런 말을 할 만큼 자란 걸까요? 이 어미가 정말로 뿌듯합니다.”
동생과 친모의 화기애애한 대화를 지켜보던 로트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부모 자식 간에 사이가 좋아서 나쁠 건 없겠지.
‘그런데 내가 어릴 적에 어마마마께서 저리 다정하게 안아 주신 적이 있었……던가?’
가슴 한구석에는 약간의 찜찜함이 남아 있었지만, 애써 무시했다. 여기서 불편한 티를 내면,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주제에 한참 어린 동생을 질투하는 꼴로밖에 보이지 않을 테니까.
“어마마마, 죄송하지만 저희는 곧 가 봐야 합니다. 티넬도 교육 일정이 있고, 저도 나름대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요.”
그 말에 어머니의 표정이 다시 조금 굳어지는 것을 보면서도, 그는 그리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황족의 의무의자 원칙이었으니까.
“……어련하실까요. 우리 황자님들, 귀하신 분들이니 어미가 시간을 많이 뺏어서는 안 되지요.”
“형님, 저 조금만 있다가…….”
“안 돼.”
“히잉…….”
이제 어리광은 부릴 나이는 지나지 않았나?
때아닌 동생의 투정에 한숨이 나왔지만, 원칙은 원칙이다.
로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된다고 했다.”
그러자 5황자, 티넬 반 아스란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엄마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럼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어마마마.”
로트는 얼굴에 서운한 기색이 가득한 동생의 머리를 눌러 강제로 인사를 시키고는 그대로 돌아섰다.
“그러세요, 우리 황자님들.”
등 뒤에서 들리는 어머니의 쓸쓸한 목소리가 조금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낭비할 시간은 없었다.
황실의 대사가 코앞으로 다가온 지금, 그를 비롯한 황족들은 시간 단위로 일을 처리하며 움직여야 했으니까.
“형님…….”
“어리광 부리지 마라, 티넬. 요즘 학습 성과가 부진하다고 들었다. 아스란 황족의 명예에 먹칠할 생각은 아니겠지?”
아무리 어린 동생이라 한들 예외는 없었다.
그래서 더 단호하게 말했는데.
“……꼭 그래야 하나요?”
“뭐?”
“저야, 황금안도 없는 반쪽짜리 황자잖아요.”
침울한 얼굴의 동생이 뱉어 낸 말에는 그도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흠…….”
작게 한숨을 내쉰 뒤, 자세를 낮춰 눈높이를 맞추고 동생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러니까 더 열심히 해야지, 티넬. 황금안을 가져야만 뛰어난 황족이 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네가 보여 줘야 하지 않을까?”
“……제가요?”
“그래.”
“할 수 있을 리가…….”
“넌 할 수 있어, 티넬.”
로트는 불안하게 떨리는 동생의 눈동자를 보며 부러 힘주어 말했다.
그것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을까.
“……예, 형님.”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동생.
잡아 준 손에도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로트는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그 순간.
지나가던 일단의 기사들이 그들을 발견하고 일제히 군례를 취했다.
“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쿵.
“……황궁 내에서 마주쳤을 때는 약식으로 충분합니다, 그리웰 경. 저는 형님이 아니니까요.”
로트는 일제히 예를 표하는 이들 중 가장 선두에 있는 중년 기사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황족은 언제나 존중받아야 합니다!”
15년째 황실 기사단장을 역임하고 있는 이 금발 중년 기사의 태도는 완고하기만 했다.
그 때문에.
움찔.
애써 열등감을 지워 주려 했던 동생의 손이 다시 떨리는 게 느껴졌다.
조금 짜증이 치밀어 올랐지만, 제대로 예의를 갖추는 기사들을 타박할 근거도 없었다.
“됐습니다, 볼일 보시지요. 또 경이 직접 오신 걸 보니, 어마마마의 호출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정말 가지가지 한다.
아스란 황실이 기사보다는 마법사들을 우대하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
그 때문인지 현시대에도 황실 마탑에는 7서클 마도사가 둘이나 있었지만, 기사단에서는 초인이 나오지 않았다.
이런 기조가 백 년째 지속되다 보니 이런 꼴이 나오는 것이다.
‘황실 기사단장씩이나 되는 이가 황제 폐하나 황후도 아닌, 한낱 황비의 말에 따라 이리저리 불려 다니다니…….’
이미 관습처럼 굳어진 풍조라고는 하나, 여전히 보기 좋지는 않았다.
특히 기사단장을 가장 많이 호출하는 사람이 자신의 친모라는 사실이 로트의 심기를 더욱 불편하게 했다.
‘형님께 건의를 드려야겠어.’
아무리 오래된 관습이라 한들 원칙은 바로 세워야 원칙이니까.
로트는 그렇게 다짐하며 기사들을 지나쳐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동생을 자신의 궁으로 데려다주기 전에 먼저 만나야 할 사람을 찾아갔다.
“황태자 전하께 인사드립니다.”
“……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한발 늦게 자신의 뒤에 숨어 인사를 하는 동생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오, 로트! 뒤에는 티넬이냐? 많이 컸구나, 하하.”
환하게 웃는 형님 앞에서 굳이 동생을 지적하고 싶지는 않았다.
“일전에 말씀하신, 로히터와 발렌티아의 마찰에 관해서 보고를 드리러 왔습니다. 따로 듣고 싶다고 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그 말에 그 형님, 브레들리 반 아스란이 누구보다 진한 황금빛 눈동자를 빛내며 반문했다.
“그걸 네가 직접?”
“당분간 관내 정보 집단 업무를 볼 기간이거든요.”
“허, 역시. 사서 고생하는 건 여전하구나.”
“……형님도 제 나이 때 다 하셨던 일입니다.”
“나야 대충했지만, 넌 그럴 성격이 못 되잖냐. 또 빡빡하게 아랫사람들 굴리면서 원칙 얘기나 하고 있겠지. 그렇지?”
“……형님, 티넬이 다 듣고 있습니다.”
“어? 아하하, 뭐 어때. 네가 유별난 건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데 말이야. 안 그렇더냐, 티넬?”
끄덕.
차마 직접 대답하진 못 하고 자신의 뒤에 숨어 고개만 끄덕이는 동생.
그 모습을 보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거봐라, 티넬도 그렇다잖아? 어린 동생에게는 적당히 부드럽게 대해 줘.”
“……티넬도 벌써 열네 살입니다, 형님.”
“……아, 그래? 벌써?”
“관심 좀 가지시지요, 형님. 아무리 배다른 동생이라고 해도.”
그 말에 황태자의 뒤를 지키던 기사 익실란의 눈매가 험해지는 것이 보였지만, 로트는 개의치 않았다. 형님이 그런 말 정도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아하하하! 이거 미안하구나, 티넬. 내가 결혼식 때문에 요새 너무 정신이 없어서……. 사과의 의미로 이번에 네 생일 때 큰 선물을 주마. 어때? 괜찮지?”
형님도 티넬을 어린애 취급하는구나.
‘이래서야 원…….’
또다시 한숨이 나오려는데.
“……아, 열네 살인데 이렇게 대하면 좀 그런가?”
웬일로 형님이 자신의 마음을 읽은 듯한 모습을 보였다.
좋게 말하면 허례허식을 싫어하는 거지만, 나쁘게 말하면 상대에 따라 갖춰야 할 예의 내지는 태도를 모르는 형님께서 말이다.
“오……!”
네가 웬일이냐, 사람 됐네.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는 말을 눈빛으로만 전하는데, 그 따가운 시선을 느꼈는지 형님이 씩 웃었다.
“아, 최근에 티넬이랑 동갑인 녀석을 알게 돼서 말이야. 좀 괴리감이 드네.”
“예? 티넬과요?”
황태자와 직접 대면할 만한 귀족 소년이 최근에 입궁했던가?
로트가 맹렬하게 머리를 굴리는데, 브레들리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 밖에서 내 싸대기를 후려갈긴 녀석이 있었거든. 나 공중에서 몇 바퀴 돌았다니까?”
“……예?”
뭐라?
제국의 황태자 싸대기를 후려갈긴 미친 새끼가 있어?
그 말에 로트가 어이가 없어 입을 쩍 벌리고.
쿵.
기사 익실란이 신경질적으로 투기를 뿜어냈다.
물론 황자들의 시선이 몰리자 이내 고개를 숙이며 물러나기는 했지만 말이다.
“……크흠, 그 녀석이 티넬과 동갑이었거든. 더군다나 최근에 엄청난 소문의 주인공까지 되었더라고.”
소문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 말인즉, 멀쩡히 살아 있다는 뜻이다.
황태자의 뺨을 때린 역적이 살아 있다고?
이게 말이 되나?
“형님! 그런 방자한 놈을 그냥 두셨습니까!? 익실란 경, 자네는 대체 뭐한 건가!?”
로트가 울컥해 소리를 지르는데, 브레들리가 오히려 웃으며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괜찮아, 괜찮아. 내가 잘못했거든.”
“아,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리고 지금 들리는 소문을 보면 그래도 될 만한 녀석이야.”
“예?”
“너도 들어 봤을걸? 카룬의 일 말이다. 그 녀석이…….”
그렇게 한참 이어진 말에는 로트 역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광휘의 기사라면 크라켄을 물러가게 하고, 악마추종자를 때려잡았다는……. 허허, 그런데 열네 살이요? 제가 들은 소문과는 좀 다른데요?”
“아, 스무 살이라고 소문이 났더라고. 엘프 혼혈이라던가. 근데 그 얼굴은 좀……. 뭐, 나도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어. 내가 봤을 땐 분명 꼬마였거든.”
“그렇……습니까.”
황태자의 모르겠다는 말은 알 수 있도록 조사해 보란 뜻.
일이 늘어난 로트의 표정이 떨떠름해지는 가운데.
“씁, 그 녀석, 다시 한번 만나 봤으면 좋겠는데……. 지금쯤 어디 있으려나.”
독백과 함께 눈을 빛낸 황태자가 묘한 미소를 품고 동쪽 하늘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