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ling life of a regressed top star RAW novel - Chapter 160
159. 제피르의 현실 방문 >
주전자 군을 위한 전용 방석은 고급 비단으로 만든 것이었다. 테두리에 자수까지 새겨진, 척 보기에도 값비싸 보이는 물건이었다. 그 방석 위에 주전자 군이 얌전히 놓여 있었다.
주전자 군이 걸고 있는 꽃목걸이의 꽃은 시든 송이가 하나도 없었다. 뜨거운 물을 자동으로 끓이는 주전자 군인데도 꽃이 상하지 않은 게 신기했다.
“꽃목걸이에 보존 마법을 걸어 놨어.”
“네?”
“그리고 여기 이 작은 보석 목걸이 보여, 정원사 씨?”
“네, 보여요.”
“화 속성 목걸이야. 불에 해를 입지 않게 해 주는 거.”
범인은 굳이 알아볼 필요도 없었다. 해나한테서 풀려난 엘프 단장이 자랑스럽게 어깨를 펴고 자신이라고 티를 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태주는 이 쓸데없이 능력 좋은 엘프가 해 놓은 재능 낭비 현장에 할 말을 잃었다.
“주, 주전자 군이 참 잘 지내고 있었군요.”
“크흠. 그렇지요? 이것 보시겠습니까?”
“뭔데요?”
“주전자 군. 한 바퀴 돌아보세요.”
“오! 오오! 도는 것도 가능했어요?”
“흐흐. 주전자 군에겐 숨겨진 재주가 아주 많답니다.”
해나는 어느새 주전자 군의 주위로 다가가 재주를 구경하는 정원사 씨를 보고 혀를 찼다. 쓸데없이 재주 많은 엘프와 주전자에, 거기에 호응하는 정원사 씨까지. 할 일도 참 없다 싶었다.
그녀는 이제 박수까지 치며 주전자 군을 응원하는 둘에게서 시선을 돌려, 오랜만에 들른 요정 숲을 둘러봤다. 엘프 단장이 있던 곳이라 그런지 나름 깔끔하게 정돈된 모습이었다. 물론 정원사 씨가 매일 돌보는 과실수들보다는 못 했다.
“요정 숲에 온 김에 향신료를 좀 따 갈까.”
“해나, 향신료 딸 거야?”
“호호호. 그럴까 해, 희 아가씨. 슬슬 보충할 때가 되기도 했고.”
“그럼 희가 안내할게.”
“오! 그럼 부탁해 볼까.”
“이히히.”
해나와 희는 향신료를 따러 간다는 말을 남기고 숲 안쪽으로 향했다. 태주는 그런 둘에게 자신은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알렸다. 안 그래도 엘프 단장에게 선물할 게 있어서, 기회를 엿보는 중이었는데, 운이 좋았다.
“단장님, 여기요. 이거 받으세요.”
“오! 찻잎입니까?”
“네. 마음에 들어 하셨다고 들었어요. 정원의 나무를 회복시켜 주셔서 고마워요.”
“하하하. 뭘 이런 걸.”
겸양의 말을 하는 중이었지만, 단장의 손은 빛살처럼 빨랐다. 그는 태주가 준 차 유리병을 주변의 누가 볼 새라 바로 받아서 마법 주머니 안에 잽싸게 챙겨 넣었다. 그렇지 않아도 태주가 블렌딩 한 허브 티가 아쉬웠는데, 딱 좋은 선물이었다.
“주전자 군은….”
“크흠. 정원사님. 주전자 군에게도 휴가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휴가요?”
“네. 일상을 벗어나. 피로도 풀고 새로운 것들도 경험하는 그런 휴가 말입니다.”
단장은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말투로 태주에게 의견을 말하고 있었다. 그가 새로운 경험이라고 말하면서 방석과 목걸이를 가리킬 때, 태주는 고개를 끄떡이고 말았다. 찻주전자 전용 방석과 목걸이를 소유하는 것이 새로운 경험이라는 데에는 태주도 이견이 없었다.
“그렇네요. 그럼 언제까지?”
“휴가는 장기죠.”
“아, 네. 장기 휴가요.”
“예. 그래도 너무 길면 정원사님께서도 보고 싶으실 테니, 한 삼십 년 정도만 휴가를 주시지요.”
“켁. 삼십 년이요? 삼 년이 아니라요?”
사실 태주가 생각하기엔 삼 년도 긴 것 같았다. 그러나 엘프 단장은 당연히 그 정도는 휴가를 줘야 한다는 얼굴이었다. 태주는 언젠가 들었던 엘프의 수명을 떠올려 봤다. 평균 수명 400년. 그중 삼십 년이면 그들에겐 장기 휴가일 것 같긴 했다.
“그렇게 하세요.”
“하하하. 역시 마음이 넓으시군요.”
주전자 군이 혹시라도 해코지를 당하고 있으면, 바로 데려갈 텐데. 예상과 다르게 너무 잘 지내고 있었다. 삼십 년이라는 장기 휴가이니, 현실 시간으로 쳐도 십오 년이었다. 사실상 선물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태주는 정원의 나무를 살려 준 엘프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매우 컸었다. 그래서 비록 무척 아끼는 주전자 군이었지만, 엘프한테 약간의 은혜를 갚은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물론 엘프 단장에게 속은 걸 모르니까 하는 생각일 뿐이었다.
‘크흐흐. 역시. 순진한 정원사는 속여야 제맛이지. 대체 어떤 엘프가 30년이나 장기 휴가를 간다고. 길어야 10년인데.’
*
다시 정원으로 돌아온 태주의 표정이 밝았다. 만족할 만큼 향신료를 딴 해나도, 신나게 요정 숲을 헤집고 온 희도 마찬가지였다.
“희, 아칸한테 열기구 주문했어?”
“응. 조금 기다려야 한대.”
“그렇구나. 마법 함정이 꽉 차기 전에 완성되면 좋겠는데.”
“히히히. 태주, 아칸이 희 거는 빨리 만들어 준대.”
“와! 진짜?”
“응.”
아칸이 빨리 만들어 주겠다고 장담했으니, 근시일 안에 새로운 열기구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희가 좋아하는 별똥별 수집을 재개할 수 있었다.
기분 좋은 소식을 들은 태주는 콧노래를 부르면서 정원 일을 했다. 과실수 수확은 금방 끝났다. 되살아난 과실수들은 아직 제대로 자리 잡지 않아서 수확할 것이 많지 않았다.
작물 수확 일이 줄은 대신 태주는 연못 정원 꾸미기에 신경을 쏟고 있었다. 그는 시간이 날 때마다 찍어 둔 꽃의 모종을 사다가 연못 정원 곳곳에 심고 있었다. 그 일을 어느 정도 한 후엔 연못 사이로 지나갈 돌길을 만들었다. 태주는 매일 시간을 들여 길을 낼 자리에 먹색 대리석 조각 타일을 깔고 있었다.
“혼자서 하니까, 진짜 오래 걸린다.”
“응. 그래도 예뻐, 태주.”
“하하하. 고생스럽긴 한데, 만드는 보람은 있어. 희, 돌길 완성될 즈음에는 꽃도 전부 필 것 같아.”
“히히. 예쁘겠다.”
“응. 그때 되면 여기서 같이 놀자.”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둘을 바라보는 못마땅한 한 마리가 있었다. 태주가 깜빡 잊고 요정 숲에 데려가지 않은 태산이였다. 태산이는 자신이 정원 순찰을 나간 사이, 태주와 희가 자신만 두고 어딘가에 다녀온 것에 조금 화가 난 상태였다.
태산이는 살금살금 기척을 죽이고 둘의 주위를 돌았다. 그러다 낮은 화초 속에 몸을 숨기고 둘을 한 번에 골려 줄 기회를 엿봤다. 태산이가 기다리던 기회는 금방 찾아 왔다.
-두다다다.
-풍덩!
“억!”
“꺄하.”
“냥냐아냥.”
푸헥! 느닷없이 물벼락을 맞은 태주가 기침을 거하게 했다. 허리가 굽혀질 정도로 크게 기침을 한 태주가 겨우 자세를 잡고 섰다. 그는 벌게진 눈으로 물벼락을 뿌린 원흉, 태산이를 노려봤다.
“이놈 자식.”
“크르르릉.”
“헐. 화는 형이 내야지. 네가 왜 크르릉이야?”
“태산이 화났대.”
“이런. 희, 괜찮아? 다 젖었잖아.”
태주가 날개까지 푹 젖어서 힘겹게 나는 희를 손바닥 위로 올려 줬다. 희는 그의 손바닥에 앉아서 연신 날개를 털어 댔다.
“태주, 태산이는 자기만 놓고 가서 화가 났대.”
“아! 어쩐지. 뭔가 허전하더라니.”
“크릉.”
태주는 태산이가 물을 뿌리는 심술을 부렸지만, 화를 내지 못했다. 자신과 떨어지는 걸 아주 싫어하는 태산이를 깜빡 잊어버렸다. 얼마나 서운했으면 이런 심술을 부리는 건지, 그는 도저히 태산이에게 화를 낼 수 없을 것 같….
“이놈 자식. 당장 안 뱉어! 빨리 뱉어! 금붕어 죽는단 말이야. 물지 마.”
“크릉.”
“어디 가? 이태산! 이놈! 내 금붕어 내놔.”
-두두두두.
“악! 이놈 자식. 잡히기만 해 봐!”
다행히 태산이는 흠뻑 젖은 상태라 바닥에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태주는 물려간 금붕어가 걱정돼서 필사적으로 그 흔적을 따라갔다. 태산이 녀석은 그를 놀리는 것처럼 일정한 간격을 두고 앞서갔다.
그렇게 둘이 술래잡기를 하며 도착한 곳은 미로 속에 있는 달빛 연못이었다. 태주는 그 앞에 선 태산이 모습에 녀석이 하려는 짓을 바로 알아차렸다.
“안 돼. 하지 마. 이놈.”
-퐁!
“악! 여기에 금붕어를 풀면 어떻게 해.”
“냐아앙.”
-다다다다.
태산인 그를 놀리듯 커다란 잉어가 가득한 연못에 손바닥보다 작은 금붕어를 그대로 빠뜨려 버렸다. 다급한 표정을 지은 태주가 연못으로 달려들었다. 다행히 금붕어는 살아 있었다.
그는 금붕어가 죽지 않았다는 안도감을 느낄 새도 없이 바로 달음박질을 쳤다. 창고에서 별똥별을 잡을 때 쓰던 채를 가져올 생각이었다. 팔뚝만 한 잉어가 가득한 연못이었다. 잉어들이 금붕어를 해치기 전에 어서 건져 내야 했다.
“아아악! 이태산!”
“어머! 정원사 씨.”
창고로 달려가는 도중 해나가 그를 불렀지만, 대답할 겨를이 없었다.
태주는 우여곡절 끝에 겨우 금붕어를 건져 낼 수 있었다. 금붕어를 건져 내서 무사한 걸 확인하고 나자,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이 심술꾸러기 자식. 오늘은 정말 혼을 내야겠어요.”
“호호호. 정원사 씨, 힘내. 그래도 호랑이인 태산이가 금붕어를 죽이지 않은 것은 칭찬해 주라고.”
“그건 그렇죠.”
물론 혼을 내는 것도, 칭찬하는 것도 태산이 녀석을 찾아내야 가능한 일이었다. 숨바꼭질에서 승률 0%를 기록하는 중인 태주에겐 두 가지 모두 쉽지 않아 보였다.
정원의 해가 지고 달이 높이 떠오른 시각 태주는 오두막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요정 숲에 다녀오느라 점심도 못 챙겨 줬는데, 태산이 녀석이 한밤중이 다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이 녀석이 정말. 저녁도 안 먹고 어디 있는 거야.”
“호호호. 정원사 씨. 주방에 태산이 먹을 걸 차려 놨으니, 그만 안으로 들어오라고.”
“고마워요. 해나. 어휴. 정말이지.”
해나는 어느새 화를 내는 것도 잊고 태산이 걱정에 한숨을 쉬는 정원사 씨를 보고 고개를 저었다. 태산이가 매번 그의 애를 태우는 걸 이제는 알아차릴 만도 했는데, 정원사 씨는 여전했다.
“냐아앙.”
“태산이, 너. 어디 갔었어? 형 걱정했잖아.”
“냐앙.”
“저녁도 안 먹고. 못된 녀석.”
제 주인의 화가 풀릴 시간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태산이 녀석이 슬그머니 나타나서 다리에 몸을 붙였다. 정원사 씨는 화를 내려던 것은 까맣게 잊고 그런 녀석을 안아 들었다. 그는 그 자세 그대로 어디 상한 곳은 없나, 태산이의 상태를 확인하기 바빴다.
*
다음 날. 태주는 일찌감치 정원 일을 마치고 상점을 둘러보고 있었다. 제피르를 현실로 데려가는 날이었다. 그는 제피르가 현실에서 쓸 물건을 모두 사갈 생각이었다.
“정원사 씨 전원주택인가를 벌써 다 지었어?”
“안은 다 꾸미지 못했지만, 건물은 다 지었어요. 담도 둘렀고요.”
“그래? 제피르가 같이 가도 문제는 없는 거지?”
“네. 이젠 같이 현실에 다녀와도 괜찮아요.”
“호호호. 정말 잘 됐어. 제피르가 오래 기다렸는데.”
해나의 말대로 제피르는 정말 오래 기다려 줬다. 작년 여름부터였으니, 현실 시간으로 거의 10개월을 기다렸다. 이제라도 약속을 지킬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크기 조절 마법이 걸린 마구(馬具) 외에 뭐가 더 필요할까요?”
“과일을 챙겨가야지. 제피르가 좋아하는 초코체리하고 혹시 모르니, 건 사료하고 다른 야채도 좀 챙겨가 봐.”
“그래야겠어요. 아! 몸이 커지는 주문서도 몇 장 사야지.”
“호호호. 정원사 씨. 그건 잘 숨기는 게 좋겠어.”
“아무래도 그렇죠?”
작은 조랑말로 위장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해나도 마찬가지였다. 제피르는 현실로 가면 일반 승마용의 커다란 말로 위장하게 될 거로 예상하는 듯했지만, 태주도 해나도 현실적으로 그건 무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리 강력한 위장 기술이라지만, 한 뼘 남짓한 제피르를 커다란 말로 바꾸는 건 무리일 것 같단 말이지.’
태주는 구매한 물품들을 태산이 목줄에 잘 챙겨 넣었다. 태산이는 어제 심술부린 게 미안했는지 오늘은 온종일 얌전하게 굴었다. 태주가 그 모습에 기특한 녀석이라고 폭풍 칭찬을 한 것은 덤이었다.
정원에 저녁노을이 지기 시작했다. 태주가 항상 현실로 돌아가는 시간이었다.
그는 제 품에 안긴 태산이와 제피르를 보고 빙긋 웃었다. 스토커 때문에 본의 아니게 옮기게 된 집이었지만, 제피르와의 약속을 지키게 된 것은 마음에 들었다.
정원 입구를 통과하자, 귀환을 확인하는 메시지 창이 떠올랐지만, 태주는 ‘예’를 선택하지 않았다. 갑자기 제피르가 현실을 마음에 안 들어 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들어서였다.
태주의 품에 안긴 태산이가 빨리 돌아가자며 멈춰 선 그를 재촉했다. 그는 성질 급한 호랑이의 성화에, 걱정은 일단 미뤄 두고 귀환을 선택했다.
“제피르?”
“히힝.”
“헛. 험험.”
“냐앙.”
‘세상에 제피르. 너무너무 귀엽잖아.’
태주는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서 폰을 쥐었다. 제 몸을 살펴보느라 바쁜 제피르의 사진을 찍을 생각이었다. 제피르가 현실로 와서 좋은 점이 하나 더 생겼다. 사진을 찍어서 언제든지 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찰칵.
“히잉.”
“아! 이건 사진 찍는 거야. 보여 줄까?”
“히이히잉.”
“자. 여기 크림색 망아지, 큼. 여기 제피르야.”
화면 속엔 밝은 크림색 털의 작은 망아지가 찍혀있었다. 체고가 1m도 채 되지 않는 귀엽고 사랑스러운 망아지였다. 태주는 있는 인내심, 없는 인내심 모두 끌어모아서 제피르를 안고 싶은 걸 참고 있었다. 자존심 센 제피르가 망아지로 위장하게 된 것에 상처를 받았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각다각.
“제피르? 괜찮아?”
“히잉.”
“움직이는 데 문제없어?”
“히잉.”
태주의 걱정이 무색하게 제피르는 망아지로 바뀐 것도 괜찮은 것 같았다. 침대에서 내려서 이리저리 바닥을 걸어보고 폴짝 뛰어도 봤다. 그 모습에 이상이 없는 걸 확인한 태주가 바로 자동카메라를 작동시켰다.
그는 제피르의 첫 나들이라는 기념비적인 사건을, 빠짐없이 모두 기록해 둘 생각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