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idden second life of the soldier RAW novel - Chapter (128)
128화
칼테르 요새의 성벽은 그 어느 때보다 분주했다.
“다들 빨리 움직여! 발리스타 전부 장전시켜!”
“볼트 전부 보급해!”
루퍼스의 정예병들부터, 생존한 루포르 기사단원들.
델토로 남작의 기사와 병사들. 그리고 칼테르 요새에서 상주하던 병력까지.
전부 총동원되어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투석기의 무게추를 올려서 밧줄의 장력을 팽팽하게 당겼고, 발리스타에는 화살과 포탄을 장전해두었다.
그렇게 요란하게 움직이던 이들을 침묵하게 만드는 것이 있었으니······.
둥─ 둥─ 둥─
북소리였다.
군대의 진군을 알리는, 우렁찬 북소리 말이다.
그리고 지금, 칼테르 요새에 다가올 군대라 한다면 단 하나밖에 없었다.
코하르펜의 뜻을 따르는 반역도들의 군대가 요새 앞에 당도한 것이다.
루퍼스를 죽이기 위해서 말이다.
삐이이익─
날카로운 그리핀의 울음소리가 반역도들의 군대임을 다시금 확인시켜주었다.
“······.”
루퍼스는 요새의 성벽 위에 서서, 다가오는 군세를 바라보았다.
“진군 속도를 높였군.”
예상보다 3시간 정도 이른 시간이었다.
그리핀 부대가 높은 하늘에서 선회 중이었다.
하지만 칼테르 요새의 성벽과는 일정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발리스타를 경계하는 건가.’
아마도 지난번 포탄의 공격을 받은 뒤, 경계하는 듯했다.
놈들이 드높인 깃발 속 붉은 새가 눈에 띄었다.
마누스 왕가를 상징하는 깃발이었다.
반역도이면서 국기를 높게 세우는 모습에 루퍼스의 시선이 싸늘해졌다.
꾸국.
루퍼스의 손아귀가 성벽의 벽돌을 움켜쥐었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것만 같았다.
“······델토로 남작.”
“예, 저하.”
“제이드는?”
“······아직입니다.”
옆에 선 델토로 남작의 말에 루퍼스는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칼테르 요새는 거대한 암석을 깎아서 만들었다.
그 자체로도 빈틈없었으며 주변 지형 역시 험준하여 포위할 수 없는 구조였다.
즉, 놈들이 공격할 수 있는 곳은 성문이 있는 남쪽 성벽뿐이었다.
하물며 성벽 부근 역시 높은 절벽이 양쪽으로 자리 잡은 협곡 지형이었다.
‘정말 수성에 완벽한 요새로군.’
천혜의 요새.
그 말이 정확하다고 루퍼스는 다시금 떠올렸다.
저들과 전투를 벌이더라도 쉽게 함락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뿐.
전장의 판도를 뒤집을 만한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했다.
루퍼스가 원하는 건 죽음을 지연시키는 게 아닌, 왕도를 탈환하는 것이었으니.
루퍼스는 성벽의 북쪽을 바라보았다.
넓은 암석산 아래로 깎아지르는 절벽, 그리고 울창한 숲이 저 멀리 보였다.
거인의 대수림이라 부르는 험지.
그곳에서 오고 있을 사내를 떠올렸다.
항상 전장을, 위기를 뒤집어 버리는 그 사내가 이번엔 무엇을 선보일지 기다리면서.
‘부탁한다. 제이드.’
* * *
마누스 남부.
마레오 공국과 마주 보는 국경지대가 있는 곳이었고, 왕성이 위치한 수도에서 가장 먼 곳이었다.
그렇기에 코하르펜의 입김이 가장 느슨하게 닿는 곳이었다.
펠레스 성의 내성.
회색 돌로 지어진 회의실에는 열 명의 남녀가 앉아 있었다.
이들은 각자 오래전 왕성에서 근무했거나 연이 있는 이들이었다.
“루퍼스. 그의 생존이 확인되었습니다. 동부의 칼테르 요새에 있다는군요.”
가장 먼저 입을 연 건 불거진 눈을 가진 중년, 엔시오 백작이었다.
한때 마누스 왕성의 내무대신이자 왕성의 대소사를 관리했던 사내다.
건강이 악화하여 노쇠 하자 사직하여 고향으로 내려온 지 언 4년.
‘그사이에 파국이 될 줄은 몰랐거늘.’
엔시오 백작은 슬쩍 고개를 들어 이들의 반응을 살폈다.
그의 오른쪽에 앉은 여인은 무덤덤했고, 왼쪽에 앉은 노인은 크게 반응했다.
“루퍼스 저하께서 살아 계신다면······ 코하르펜, 놈을 죽여버려도 문제가 되지 않겠군.”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이 서늘한 눈빛을 빛냈다.
노인의 이름은 에큐리오.
전 왕실 기사단장이었고, 죽은 에퀘르의 친형이었다.
엔시오 백작은 에큐리오가 내뿜는 기세에 흔들리는 찻잔을 들었다.
‘은퇴한 뒤에도 기사들의 육성에 매진했다더니······.’
얼굴의 주름과 호호백발이 된 모습과 달리 에큐리오의 몸은 여느 기사들과 다르지 않다.
오히려 더욱 정정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오러 마스터라는 경지에 다다르지 못한 게 저 정도라니.
그때 무덤덤하게 앉아 있던 여인이 에큐리오를 보며 입을 열었다.
“에큐리오.”
“죄송합니다. 이 노야가 실수했군요.”
곧장 기세를 거둔 에큐리오가 여인을 향해 공대했다.
“이해한다. 에큐리오, 자네의 심정은 잘 알고 있네.”
“아닙니다. 그 누구보다 상심이 심하실 텐데.”
화려한 장신구로 치장한 중년의 여인이 공감한다는 듯 말했다.
말아 올려 묶은 적색의 머리칼은 그녀의 핏줄을 짐작게 했다.
“코하르펜, 어리석은 내 오라비는 야욕이 심했지. 그게 이 지경까지 올 줄은 몰랐다만.”
루시아.
승하한 루브릭 2세의 누이이자, 루퍼스의 고모였으니까.
“루퍼스가 살아있다면, 그 아이를 도울 방법은 없나?”
“1천에 가까운 병력이 공격을 준비한다고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병력 차가 심하다 보니······.”
엔시오 백작은 말을 흐렸다.
툭. 툭.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린 루시아가 고민하곤 말했다.
“내가 용병을 고용할 수 있다. 적어도 일천의 용병은 고용할 수 있겠지.”
“내전은 지양해야 합니다. 페르딤과의 전쟁이 멈춘 것도 얼마 되지 않지 않았습니까. 내전의 피바람이 분다면, 이 나라의 존망은 더욱이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이 노야의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루시아의 의견에 엔시오 백작과 에큐리오가 반대했다.
그녀가 코하르펜의 반란에 무사할 수 있던 이유.
동시에 그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이유는 하나다.
그녀가 마레오 공국의 비(妃)였기 때문이다.
마누스의 왕녀였던 그녀가 마레오 공국의 공왕과 혼례를 치른 지 20년.
이제는 타국의 왕비인 루시아였기에 그녀는 남들의 이목을 피해 몰래 마누스 왕국에 들어온 상황이었다.
그런 그녀가 병력을 이끌고 모습을 드러낸다면 정치적 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걱정하지 마라. 이전부터 준비한 대리인이 있으니. 그자를 통해서 움직일 생각이네. 그보다 자네들은 어찌할 것이냐?”
“저를 따르는 80의 기사가 루퍼스 저하께 합류할 것입니다.”
루시아의 말에 에큐리오가 자신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를 향해 엔시오 백작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코하르펜······ 그자의 병력도 만만치 않습니다. 게다가 에퀘르 경을 쓰러트린 정체불명의 기사를 거느리고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오러 마스터를 살해한 엄청난 강자.
그가 코하르펜의 휘하에 있다.
그것만으로도 코하르펜에게 반기를 들려고 하는 자들의 심기가 꺾이고 있었으니.
그게 기사라는 존재의 무게였다.
“그 씹어먹을 놈은 내가 직접 잡을 것이오!”
쿵!
에큐리오가 테이블을 내려치며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엔시오 백작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게다가 코하르펜은 왕성을 점거하지 않았습니까? 모두 아시지 않습니까. 왕성 성벽에 ‘피닉스의 결계’가 있다는 것을. 그게 정상 작동하는 이상, 아무리 군세를 모아도 그 방어막을 뚫지 못할 텐데요.”
“······.”
“······.”
엔시오 백작의 말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이들 하나하나가 왕성과 연이 있던 만큼 왕성의 결계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여기 있는 모두가 군세를 모아 결집한다 해도, 루퍼스 저하께서 무사해야 하는 것 아니오? 루퍼스 저하의 신변에 문제라도 생긴다면, 더 이상의 명분은 없지 않소?”
“지금 당장 저하를 도와줄 방법이 없는 이상······.”
그때 시종장을 역임했던 한 백작이 조심스레 의견을 내었다.
“제이드, 그자가 루퍼스 저하를 돕고 있다는데, 그 용병대가 시간을 버텨주지 않겠습니까?”
엔시오 백작은 그 말에 작게 숨을 내쉬었다.
“후. 그래봐야 기사도 되지 못한 천한 용병 아니오? 그자가 무얼 해보든 크게 달라질 건 없지 않겠소?”
제이드.
그 전쟁영웅의 이름은 전쟁 때부터 심심찮게 울려 퍼졌다.
지어낸 이야기처럼 대단한 업적들이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는 일개 용병.
나라의 운명이 걸린 거대한 흐름에 저항할 수 있는 권력을 지닌 자는 결코 아니었다.
아무리 간절하다고 해도, 그런 자에게 기대를 걸 수는 없었다.
그때, 회의실의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 걸어들어왔다.
“신의 있는 자들이 모두 여기 모여 있었군.”
푸른 로브를 둘러쓰고 한 손에는 푸른 수정구가 꽂힌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그 모습에 루시아와 엔시오 백작이 눈을 크게 떴다.
“듀크마? 왕실 고문 마법사께서 여긴 어떻게······?”
왕실 마법사의 고문을 맡았던 듀크마.
그는 분명 은퇴하고 푸른 마탑으로 가지 않았던가?
그리고 푸른 마탑은 글레바 백작의 영지 안에 있어서, 연통을 넣지도 못해 초대하지 못했을 텐데······.
“이제는 그저 떠돌이 마법사일 뿐이네.”
끌끌 웃는 듀크마의 지팡이를 짚은 오른팔과 다르게 반대편 소매가 허전했다.
“······어떻게 되신 겁니까?”
5서클이라는 경지에 도달한 그가 어째서 한쪽 팔을 잃었단 말인가.
듀크마는 웃음을 멈추고 정색하며 말했다.
“푸른 마탑이 글레바 백작, 아니 이젠 후작이던가? 그녀의 손아귀에 들어갔네. 나는 마탑을 탈퇴하고 빠져나왔지만, 다른 이들은 아니네. 글레바 후작에게 굴복하여 그 악녀의 명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지.”
푸른 마탑은 사실상 글레바 후작에게 장악당했다.
그 이야기에 회의장이 웅성거렸다.
탕! 탕!
지팡이로 바닥을 두드린 듀크마가 좌중을 둘러보며 이야기했다.
“이 늙은 마법사의 눈이 멀어 가고 있지만, 아직 세상의 흐름을 꿰뚫어 볼 수 있다고 자신하는바······ 그 누구도 이 풍파를 막아낼 수 없다네. 이게 현실이지.”
루퍼스가 이 전쟁에서 살아남을 가능성은 없다.
“차라리 마누스를 포기하게. 이곳을 떠나 후일을 도모하는 편이 좋을 것이네.”
늙은 마법사의 속뜻을 알아차리지 못할 사람들은 없었다.
* * *
데릭과 로빈에 이어 하나둘씩 대원들이 시험을 끝내고 빠져나왔다.
놀랍게도 대원들은 전원이 시험에 통과했다.
그로써 각자 새로운 기술이나 무구를 가지고 나왔다.
대원들은 각자가 시험에서 벌어진 일들을 내게 자랑했다.
“그러니까 제이드. 밀림에서 수십 마리의 고블린들이 나를 쫓았는데······.”
“에이, 그거보단 커다란 골렘 세 마리를 내가 집어 던진 게······”
로빈과 데릭이 내 뒤에서 몇 번이고 한 이야기를 계속했다.
“흐흐, 이 창 좀 보라고. 아주 아름답지 않아?”
“그게 뭐가 이쁘다고. 내 신발이 더 멋질걸?”
그 뒤에선 브룩과 롭이 각자 얻은 무구, 아티펙트를 자랑하며 뽐내고 있었다.
황토색의 투창은 무려 자동 회수 기능이 달려 있었는데, 브룩이 언제 어디서 던지든 원하기만 하면 제 주인에게 돌아오는 기능이 달려 있었다.
허공에 던진 창이 다시 사라지며 브룩의 손에서 생성되자, 드렌트가 침을 흘리며 탐냈고, 브룩이 ‘우레를 부르는 피뢰창’과 바꾸자고 하자 드렌트는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롭의 노란색 부츠는 몸을 가볍게 만들어주는 아티팩트였고, 수색대원으로 활약하는 롭에게는 찰떡이나 다름없는 기능이었다.
통통한 롭이 백덤블링을 하며 재주껏 뛰어다니는 모습은 신기할 정도였다.
그 모습에 숲지기, 엘리아는 대단하다는 듯 손뼉을 치며 감탄했다.
“대단하구나. 이렇게 많은 아이가 한 번에 시험을 통과할 줄이야.”
“그럼요. 누가 저 녀석들을 키웠는데요.”
나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엘리아에게 농담했다.
“과연······ 그럴지도 모르겠구나.”
그런데 엘리아는 정말 그렇게 믿는 건지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내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다.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이곳에 남는다면 수련을 도와줄 수는 있겠다만.”
“이제 가야 합니다. 지금 당장 해야 할 일들이 있어서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곳에서 대원들과 수련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하지만 일단은 마누스의 내란부터 정리해야지.
“아쉽구나. 이렇게 빨리 갈 줄이야.”
“나중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후후, 그 약속 잊지 말거라.”
내 말에 미소를 지은 엘시아가 손짓했다.
그러자 호수를 둘러싼 나무 일부가 벌어지며 길이 생겨났다.
“이곳을 따라 나아가면, 들어온 곳으로 곧장 돌아갈 것이란다.”
“편의에 감사드립니다.”
나는 곧장 대원들과 위즐, 그리고 마리온을 데리고 빠르게 숲을 빠져나갔다.
로프를 타고 절벽 위로 올라간 우리는, 곧장 칼테르 요새로 향했다.
그리고 목격했다.
“세상에, 제이드! 저것 봐!”
“그래. 보인다.”
칼테르 요새 너머에서 남쪽 성벽 포위한 군세를.
“······다시 전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