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ife of an actor of a former idol RAW novel - chapter 35
방송국의 일은 생각보다 더 힘들었다. 각오? 각오야 하고 들어왔지. 그렇지만 이렇게 사람을 도토리 굴리듯 굴릴 줄 몰랐지. 한국에서 영화나 드라마를 만든다는 건, 결국은 사람을 갈아서 만드는 것. 조연출로 구른 드라마 판에서의 6년은 수명이 갈려 나가는 것과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언젠가는 자신의 드라마를 만들 수 있다는 것. 연출을 할 수 있다는 것. 그 희망으로 버티고 또 버텼다. 그러나 오랜 시간 유지되었던 단막극이 폐지되었을 때는 정말 멘탈이 붕괴되는 것 같았다.
일반적인 KBC 드라마국 PD가 데뷔하는 과정은, 조연출로 현장을 구르다가 단막극으로 연출 데뷔 또는 선배 PD들의 작품에 B팀 연출로 들어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아침 드라마, 주말 드라마를 시작으로 미니의 기회를 잡아 드디어 메인 연출이 되는 것이다.
일단 단막극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으로 버텼는데, 수익성이 떨어지는 단막극이 폐지되어 버린 상황에서 데뷔까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면서도 몸은 착실하게 현장을 굴렀다. 그리고 2년 만에 다시 단막극이 부활했다. 데뷔의 기회가 온 것이다. 선배들이나 동기들보다 빠른 기회였지만 그는 잘하고 싶었다.
그는 차근차근 준비를 시작했다. KBC쯤 되는 방송국에는 단막극이며 미니시리즈의 시놉시스와 대본이 말 그대로 넘쳐 난다. 매년 공모전을 열고 작가들을 인턴이란 이름으로 묶어 두지만 결국 단막극이나 미니시리즈로 제작되는 건 그중에 한 줌. 그중에서 보석을 찾아야 한다. 자신의 데뷔작을. 날마다 현장을 구르면서도 시나리오와 대본을 읽는 것을 멈추지 않았고, 몇 개의 대본을 숨겨 뒀다.
형수를 닮아 예쁘기 그지없는 막내 조카마저 시나리오를 쓰겠다고 문창과가 있는 예고로 진학했을 때, 그는 확신했다. 이건 피에 뭔가 흐르고 있다고. 조카 혜선 역시도 자신과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으니 놀랄 것도 아니었지만.
그리고 눈이 좋은 그의 조카가 발견한 신인 배우에게는 눈을 반짝일 수밖에 없었다. 조카가 보고 있던 방송 화면에서 그는 찾았다. 자신이 숨겨 둔 대본 중에서도 가장 맘에 들었던 작품의 주인공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안돼. 삼촌. 쟤는 안 돼.”
무언가를 직감했는지, 조카가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가? 뭐가 안 되는데?”
“내가, 내가 쓸 거야. 쟤 주연인 작품 내가 쓸 거야. 그러니까 삼촌은 안 돼.”
어렸을 때 장난감을 빼앗으며 놀릴 때와 꼭 닮은 얼굴로 말하는 조카의 얼굴을 보며 피식 웃고 말았다. 쟤는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나 알고 있나? 고삐리인 네가 언제 글을 써서 쟤 주연으로 작품을 쓸 거냐. 내가 먼저 잘 키워 놓을 테니 너는 나중에 주연으로 쓰렴. 하긴 묘하게 창작욕을 불러오는 마스크이긴 했지.
정연진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현장을 구르며 친해진 동갑내기 캐디 박민혜에게 부탁을 하니 금방이었다. 이미 프로필이 들어와 있다고. 우선 연기가 어떤지부터 확인해야 했다. 국어책 읽기 정도의 연기력만 아니라면야. 그리고 받아 본 연기 영상은 퍽 만족스러웠다. 실제 연기를 봐야겠지만 시간을 여유롭게 준다면 가능할 듯싶었다.
잘생긴 거야 영상으로 봐서 알았지만, 실물이 더 좋았다. 방송 기술은 점점 더 좋아지고 있는데도 저 얼굴을 제대로 못 잡아 내네. 아니면 권 PD가 실력이 없거나.
TV 화면에서 볼 때도 느꼈지만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얼굴이었다.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 어린 녀석이 벌써 배우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네. 요모조모 뜯어보고 있는데, 너무 쳐다봤나, 싶은 순간에도 녀석이 눈을 피하지 않더라. 어쭈, 요놈 봐라 싶어서 더 열심히 봐 줬다.
연예계에서 살아남으려면 보통의 정신력으로는 불가능하다. 욕심도 있어야 하고 근성도 필요하다. 그래서 정연진의 싹은 어느 정도인지 보기 위해 도발을 좀 해 봤다.
“정연진 군을 캐스팅하고 싶은데, 조건이 있습니다.”
“네. 어떤 조건인가요?”
신인이라면 자신을 캐스팅할 힘을 가진 PD한테 이러기 쉽지 않은데, 당돌하게 눈도 피하지 않고 답하더라. 그래서 조금 더 도발을 해 봤다. 연기를 못하면 바꿔 버릴 건데 자신 있느냐고. 그러자 녀석의 대답은 더 당돌했다.
“해 봐야죠. 열심히 준비할게요. 그런데 PD님 기대 이상이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임정욱은 한 방 먹었다 느꼈고, 그냥 크게 웃었다. 정연진이 어떻게 준비를 해 올지 기대를 하며.
제대로 준비하고 싶었기에 프리 과정을 꼼꼼하게 살피는 와중에도 정연진과의 미팅은 가장 중요했다. 주인공이 어떻게 캐릭터를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분위기가 바뀔 수 있기 때문에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는데 정연진의 해석은 임정욱을 놀라게 할 만했다.
“첫 화면과 엔딩은 가장 행복한 가족의 모습이 나오잖아요. 그러니까 전체적으로는 따뜻한 느낌인데 조금 위화감이 드는? 그런 느낌으로 봤어요. 대본에는 없지만, 방을 일부러 어지럽힌다거나 뭐 그런 거요? 엄마는 그런 거에도 화내지 않고 웃고. 지금까지는 그런 일이 없었지만, 일상 자체가 너무너무너무 행복한 가정의 모습이요.”
정연진이 해석한 대본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즐거웠다. 자신의 연출 방향과 비슷한 면도 있었고 다른 부분도 있었지만, 해석 자체가 흥미로웠다.
“그러니까 곱씹어 보면 만들어진 것처럼 느껴지는 모습은 어떠냐는 거지?”
“네. 그린 듯이 행복한 가족이나, 지나치게 행복하고 밝은 표정의 수호. 뭐 그런 거요. 다시 보면 위화감을 느낄 정도로요.”
“그래. 그러면 수호의 투병 회상이 나왔을 때 더 선명하게 대비가 되겠지. 괜찮네.”
솔직히 좀 놀랐다. 자신과 같은 환경에서 자란 것도 아니고, 이제 갓 연기를 시작했다고 하는데, 대본 해석이며 캐릭터 만들어 내는 게 베테랑 뺨치더라. 큰 그림을 보는 시야까지. 연출에도 재능이 있나? 저 얼굴에 춤도 잘 추고 연기도 잘하는데 설마 노래도 잘하진 않겠지? 큰 기대는 하지 않고 가볍게 물었다.
“너 노래는 어때? 노래도 좀 하니?”
“노래요?”
“응. 이거 한번 들어 봐. 엔딩곡으로 정해진 건데, 이대로 가는 것도 괜찮겠지만, 수호의 목소리로 직접 부른다면 좋을 거 같은데.”
산울림의 을 틀어 줬더니, 한참을 진지하게 듣고 있던 정연진이 고개를 들고 말했다.
“좋은 노래네요.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니, 꼭 부르고 싶어요.”
뭐야, 노래도 잘하는 거야? 무수히 많은 연예인을 보아 왔지만, 이런 녀석은 없었던 것 같은데. 신이 있냐? 쟤 만들 때만 정성을 기울인 거냐. 이렇게 재능을 몰아주는 건 반칙이지. 그런 생각을 하며 정리를 하는데 일어나던 정연진이 어퍼컷을 날렸다.
“아, 참 PD님. 저 머리 삭발할까 하는데요. 모자만으로는 느낌이 안 살 거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제대로 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오늘은 임정욱, 자신의 완패였다. 그것도 기저귀 갈아 주며 키운 조카와 동갑인 데뷔도 못 한 신인 녀석에게. 데뷔작을 위해서 삭발까지 하는 배우라니. 그것참 기분 좋은 패배였다.
임정욱은 첫 촬영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 방송국으로 온 커다란 택배 상자를 받았다. 뭐가 온다는 연락이 없었는데 생각하며, 보낸 이를 확인했는데 정연진이었다.
상자를 열자 그 안에는 이라는 이름표가 붙은, 감독 의자가 들어 있었다. 손으로 쓴 편지와 함께.
[감독님의 데뷔를 축하합니다.앞으로 이 의자와 함께 좋은 작품 많이 만드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좋은 작품에서 연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게 주셔서 고맙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건승을 기원합니다. ― 정연진 드림]
조연출로 현장에서 구르는 동안 자신은 어쩌면 타성에 젖어 있었을지도. 어쩌면 조금은 마모되어 드라마에 발을 들이던 그 순간을 잊은 건지도 모르겠다.
열심히 준비했지만 진짜 준비가 잘되었나. 그리고 편지를 다시 읽으며 다짐했다.
연기 준비만으로도 쉽지 않았을 텐데 노래도 부르고, 자신의 데뷔까지 신경 쓰는 신인 연기자 정연진. 내 꼭 너한테는 지지 않겠노라고. 임정욱은 정연진의 선물을 바라보며 결투 선언을 했다.
그리고 시작된 첫 촬영은 정말 대결처럼 이루어졌다. 이거 네가 할 수 있겠어? 해 보죠, 뭐. 도발과 응수. 신인 PD와 신인 배우는 그렇게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지면 큰일이라도 난다는 듯이 싸우듯 촬영을 이어 나갔다.
“연진아, 한 골 제대로 넣으면 그거 풀샷으로 멋지게 넣어 줄게.”
골이야 넣으면 좋은 거고, 아니어도 대충 편집으로 좋은 그림만 만들면 된다. 설마 농구도 잘하겠니, 레이업이라도 성공하면 좋겠지 싶었는데 정연진은 씨익 웃더니, 멀찍이서 3점 슛을 성공시켜 버렸다. 모니터해 보니 정말 좋은 그림이 나왔다. 편집을 하면 더 괜찮게 보이겠지. 그런데 왜 자꾸 지는 것 같은 느낌이지?
병원에서 무전으로 통신을 하는 내용이 많아서, 세트 촬영이 많았는데, 정연진의 요청에 의해서 오열하는 씬을 가장 먼저 촬영하게 되었다. 그 감각을 잡고 내내 다른 장면을 이어 나가고 싶다는 요청이었다.
액션 사인을 받은 정연진이 눈을 뜨더니, 한참을 멍하니 무전기만을 바라보고 조용히 입을 뗐다.
“아빠. 미안.”
그러곤 피식 웃음을 지었다.
“24살의 아빠는 엄마 때문에 마음이 좀 많이 아프겠지. 그지? 첫사랑이라는 게 그렇다잖아. 이루어지지 않는거. 많이 아플 거야. 그치만 내가 태어나 지금까지 아빠가 힘들었던 것만큼은 아닐 거야.”
조용조용 이어지는 독백은 수호가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 많은 것을 상상하게 했다.
“아빠도 좋은 사람 만나. 그러면 금방 괜찮아질 거야. 힘내. 힘내, 아빠. 행복해야 해.”
행복해야 한다는 말을 점점 작아지면서 마치 주문처럼 이어졌다. 정연진이 무전기를 손에 쥐고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봤다. 마치 눈물을 참으려는 듯이. 그렇지만 살짝 눈을 감는 순간에, 또르르. 눈물이 그림처럼 흘러내렸다.
“미안. 미안해. 정말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정연진의 목소리가 조금씩 커졌다. 끊임없이 미안하다 외치면서 몸을 숙이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미안하다는 말만을 반복했다.
세트장은 고요했고, 정연진의 통곡 같은 소리만이 계속해서 울려 퍼졌다.
정신을 가장 먼저 차린 건 조연출이었다. 임정욱의 팔을 살짝 건드리며 말했다.
“형. 컷하셔야죠.”
여전히 정연진의 오열은 이어지고 있었다. 그제야, 임정욱이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컷.”
열연.
그야말로 열연이었다. 감정을 쏟아붓는 연기를 잘한다고 해서 연기 잘하는 게 아니라는 소리는 누가 했나. 임정욱 본인이 그렇게 말했던가. 개소리였다. 그냥 잘하는 배우는 다 잘하는 거였다. 진짜 타고났네, 타고났어.
그리고 임정욱은 직감했다. 자신은 데뷔작에서 자신의 페르소나를 찾았는지도 모르겠다고. 아니, 찾았다. 그의 페르소나를.
* * *
[잡담] 정소년 단막극 나오나봐.jpg첨부파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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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J예고 다니는데 우리학교에서 촬영하는거 봄
단막극인거 같고 제목은 들립니까오버
정연진 실물 진짜 장난 아니더라
우리학교 예고라 아이돌도 있고 연습생이랑 연극과애들도 많고 그래서 잘생긴 애들 많이봤는데
얘는 독보적으로 잘생겼음
키도 훨씬 크고 180 넘는 거 같은데 얼굴 진짜 작음
비율도 미쳤음
┖ 와 진짜?
┖ 역시 소속사빨이 대단하다 벌써 푸시들어가는 거야?
┖┖ 솔까 저 정도 얼굴이면 밀어줄만하지 ㅋㅋㅋㅋ
┖┖┖ 배우할거면 연기를 잘해야지 데뷔먼저라니 안봐도 뻔하네 발냄새
┖┖┖┖ 무슨 걱정이냐 ㅋㅋㅋ 바다면 뜰때까지 밀어줄텐데 거기 그거 잘하잖아
┖ 면봉인데도 잘생긴거보이네 나도 실물 한번보고싶다
┖ 그래서 언제 방송하는데?
┖┖ ㄱㅆ) 그건 모름 촬영하는 거만 봣어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컷. 오케이. 고생하셨습니다.”
임 PD의 마지막 컷 사인으로 촬영이 모두 끝났다. 짝짝짝짝짝. 박수가 터져 나왔다. 마지막 대사를 곱씹으면서 서서 나도 박수를 쳤다.
“고생하셨습니다.”
“수고했어.”
“고맙습니다.”
배우와 스태프들이 저마다 인사를 건네며 촬영의 마지막을 자축했다. 어쨌든 ‘일’이 끝났다는 것은 좋은 것이니까.
“주목. 마지막으로 짧게 한마디 하겠습니다. 큰 사고 없이 모든 촬영이 마무리되었습니다. 부족한 제 현장을 잘 따라와 주셔서 모두 고맙습니다.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방송까지 열심히 후반 마쳐서 여러분의 수고로움이 헛된 일이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우리 배우분들, 스태프분들 한 분 한 분 모두 기억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