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ife of an actor of a former idol RAW novel - chapter 44
녀석이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답한다. 어우, 괜히 쫄았잖아. 여자 친구가 내 팬인가 보네. 그런데… 오호, 그런데 이 녀석 여자 친구가 있으시겠다? 좀 놀리며 늦게 사인할까 싶었는데, 녀석을 표정을 보니 그러면 안 되겠다. 네, 사인이요, 드, 드리겠습니다. 경주에게서 받은 매직펜의 뚜껑을 열며 물었다.
“여친 이름이 뭐야?”
경주의 표정이 또 일그러지고, 어금니를 꽉 깨물며 물었다.
“내 여친 이름 알아서 니가 뭐 하게?”
녀석, 센 척하기는. 이렇게 보니 쫌 귀엽네. 여자 친구가 연예인인 날 좋아하는 건 마음에 안 들지만, 그래도 해 달라는 건 해 주려고 노력한다… 라….
나는 사진 위에 ‘to’라고 쓴 옆을 검지로 톡톡, 치며 답했다.
“이름을 알아야, 여기에 적지. 이름 없이 그냥 사인만 해 달라면 그렇게 하고.”
그러자 경주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가영, 박가영. 가영이라고 적지 말고 꼭 성 붙여.”
아, 진짜 귀엽네. 내가 자기 여자 친구한테 친근하게 가영이라고 부르는 것도 싫은가 보다.
“오, 이름 예쁘네.”
나는 괜히 녀석을 놀리고 싶어져서, 굳이 ‘가영이에게’라고 적었다. 날 살짝 아주 살짝, 쫄게 했던 것에 대한 소심한 복수였다. 그리고 ‘드라마 잘 봐 줘서 고마워. 경주 착한 애야. 둘이 오래 잘 만나면 좋겠다. 늘 건강하고.’라고 적었다.
드라마 잘 봤다는 말은 없었지만, 잘 봤으니 부탁했겠지. 아마도 경주가 나한테는 전해 주지 않은 걸 테고. 아니라면 뭐, 어쩔 수 없고.
글씨 아래로 사인을 하고 경주에게 건네며 말했다.
“자, 여기. 됐냐?”
내용을 확인한 녀석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오래 잘 만나라는 말에 기분이 좋아졌나 보다. 시커먼 녀석의 이런 모습을 보면 징그러워야 하는데, 녀석의 감정이 내게도 전해져서인가 아빠 미소를 짓게 된다.
아, 이런 거구나. 순간 깨달았다.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 이성을 사랑하는 감정. 아주 작은 일에도 행복해하며 주변까지 그 감정을 퍼뜨릴 수 있는 묘한 에너지. 그런… 거구나. 이런 감정들을 모아서 내 안의 어딘가에 저장해 뒀다.
강 선생님이 외우라고 하셨던 그런 감정들. 잠시 녀석에게서 보였던 감정과 내가 반응했던 이유를 곱씹으며 경주에게 말했다.
“경주야, 고맙다.”
다시 클리어 파일 속으로 조심스레 사진을 챙겨 넣던 녀석이 떨떠름한 얼굴로 답했다.
“뭐래. 웃지 마. 징그러워. 그리고 나중에 혹시 내 여친 앞에서, 그렇게 웃으면 죽는다.”
내가 웃었나? 아, 그랬지. 그래도 야, 그렇게 대놓고 징그럽다고 할 건 없지 않냐? 이건 고마워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웃음인데! 내가 잠깐 니들 결혼하면 사회 봐 줘야지 생각했던 거 취소다. 취소, 취소!
[지금 하던 프로젝트 마무리 단계야이번 주말에 너희 집으로 갈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 수현 형의 문자 메시지를 받았다. 드디어 결심했나 보다. 그럼 나도 준비할 일이 많은데…. 일단 아버지께 증권 계좌 오픈도 해야 하고, 신 변호사님 도움도 받을 수 있으면 좋고. 에효, 이걸 말을 어찌 꺼내지?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천천히 가자, 천천히.
연습실에서 대본을 집어 들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낮에 봤던 경주의 표정과 감정을 떠올리면서, 그의 감정을 잠시 훔쳤다.
* * *
그 남자, 권우진의 이야기 ― 성장 배경 및 가족 관계
권우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 권한길(55년생)과 학자, 강자경(57년생)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권한길은 재벌가에서 태어났지만, 경영에는 관심이 없었고, 위로 줄줄이 있는 형들과의 경쟁을 원하지도 않았다. 그림을 그리는 데 흥미가 있었고, 재능도 있었다. 자식 하나쯤은 예술을 해도 좋겠다는 생각으로 외국에서 유학까지 시켰다. 그리고 그는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해외에서도 활동하는 화가가 되었다.
어머니 강자경은 대법원장도 배출한 법조인의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법조인이 되길 원치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학자의 길을 택했다.
두 집안의 각각의 다른 목적으로 인해 둘은 결혼을 했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아버지와 조금은 건조하고 매사에 진지한 성격의 어머니는 처음부터 어울릴 수 없는 한 쌍이었다.
결혼 생활은 처음부터 삐거덕거렸고, 권우진을 낳은 후에도 그들의 관계는 좋아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해외에서 활동하는 경우가 더 많았고, 어머니는 학교와 자신의 연구에 더 집중했다. 이혼하지 않고 한집에서 살고는 있었지만, 각자의 생활에만 충실하게 그렇게 살았다.
그리고 우진은 보모의 손에서 자랐다. 생활을 돌봐 주는 이가 있었고, 공부를 가르쳐 주는 이가 있었다. 그것에서 무엇이 부족했는지 어린 우진은 알지 못했다.
우진은 태어날 때부터 많은 것을 갖고 태어났다. 집안은 부유했고, 어머니의 좋은 머리와 아버지의 예술적 재능 모두를 물려받았다. 게다가 외모 또한 빼어났다. 공부를 잘했고, 음악적인 재능이 뛰어났다. 남들의 눈에는 무엇 하나 부족한 것 없는 완벽한 아이였다.
우진이 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을 때, 어머니가 말했다.
“너도 이제 엄마가 필요한 어린아이가 아니니, 엄마 말을 이해했을 거라고 믿어. 3년. 딱 3년 정도만 있다가 돌아올 거야. 아빠 말 잘 듣고, 잘 지내.”
우진이 어머니가 우진의 곁을 지켜 준 시간, 딱 10년이었다. 그녀로서는 굉장한 희생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우진은 생각했다. 그는 어머니의 학자로서의 욕심과 어린 우진에 대한 책임감 사이에서 어머니 나름으로는 많은 고뇌를 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래서 어머니를 따라간다, 조르지 않고 아버지와 함께 남는 것을 받아들였다.
어머니가 유학을 떠난 후, 아버지는 한동안 한국에서 우진과 함께 지내기는 했다. 며칠에 한 번씩 얼굴을 봤지만, 우진은 크게 불만은 없었다. 아버지에겐 이게 최선이었다는 걸 우진은 이해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서 돌아왔는데, 집 앞에 못 보던 개 한 마리가 쓰러져 있었다. 몸은 앙상하게 말랐고, 탈진 상태였는지 숨소리도 심상치 않았다. 우진은 운전기사를 불러 개를 동물 병원으로 데려갔다. 개의 상태는 좋지 않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좋아졌다. 의사는 개의 나이는 3~4살가량으로 추정, 거리를 떠돈 지 꽤 된 듯하지만, 영양실조를 제외하고 크게 아픈 곳은 없다 하였다. 그리고 우진은 이제는 건강해진 개를 집으로 데려왔다.
아버지와 어머니도 자신을 낳았으니 책임지고 있었고, 자신이 죽어 가던 개를 살렸으니 혼자서 살아갈 수 있을 때까진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 우진의 생각이었다. 아버지는 반대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저 관심이 없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리고 우진은 개와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처음엔 그저 ‘개’라고 불렀다. 당시 우진은 ‘어린 왕자’를 읽었고, 이름을 붙인다는 것의 의미를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개’와 함께한 지 반년이 지난 어느 날부터 ‘개’를 ‘폭스’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우진아, 뉴욕으로 가자. 한국에 너무 오래 있었어. 너도 같이 가자.”
어느 날 아버지가 말했다.
“폭스는요?”
“폭스? 아, 개? 데리고 가지 뭐.”
“그래요. 그럼.”
1년여를 한국에서 지내던 아버지는 우진에게 뉴욕으로 가자고 했고, 폭스를 데리고 갈 수 있다면 우진은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아버지를 따라 뉴욕에서 3년, 런던에서 3년을 살았다. 어쨌든 아버지는 우진을 데리고 다녔고, 우진은 폭스를 데리고 다녔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쯤이 되어 우진은 한국으로 돌아왔다. 외조부의 부름이 있기도 했고, 자신은 이제 혼자서도 살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 떠나야 하고, 사람을 만나면 헤어지는 일에 좀 지치기도 했고.
사실은, 점점 나이가 들어가는 것이 느껴지는 폭스를 외국 땅에서 보내긴 싫었다. 그래도 태어난 땅에서 보내 주고 싶었다. 거리를 떠돌며 고생을 많이 했던 폭스는 우진과 함께 잘 지냈지만 노화가 오는 것을 막을 순 없었다. 우진은 그렇게 폭스와의 마지막을 준비했다.
폭스가 동물 병원에 입원하고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병원에서는 집에 데려가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했다. 이제는 앞을 보지 못하고, 바싹 마른 폭스를 담요로 감싸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비가 한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빠르게 걸으려고 하는데, 노란 우산이 씌워졌다. 고개를 돌려 보니 중학생쯤으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우산을 씌워 주고 있었다.
“비가 와서요. 저기… 강아지, 강아지… 비 맞으면 안 되잖아요.”
대답도 하지 못하고, 겨우 고개만 끄덕이고 걸었다. 폭스의 숨소리와 미약한 심장 박동을 느끼며 걸었다. 집 앞에 도착했을 때, 고맙다고 인사를 하려는데 여자아이가 노란 손수건을 건네주며 말했다.
“저기…. 필요하실 것 같아서요. 그리고, 그리고, 저기….”
말을 계속 늘이더니, 이어 말했다.
“어서 들어가세요. 강아지 힘들겠어요.”
그러면서 손수건을 폭스를 안은 손안에 끼워 주더니 뒤를 돌아 뛰어갔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우진은 깨달았다. 병원을 나오면서부터 자신이 계속 울고 있었음을.
그리고 그날 밤, 힘겹게 숨을 내쉬던 폭스가 곁에 있던 우진의 손에 앞발을 한 번 가져다 댔다. 그리고 그걸로 되었다는 듯 조용히 눈을 감았다.
태선이 얼음? 그럼, 땡!
“디카랑 인터넷의 가장 큰 수혜자는 고양이라고 그러던데, 아버지 생각은 어떠세요?”
시작은 그냥 가벼운 이야기였다. 아침을 먹고 있는 식탁에서 아버지와 대화를 이어 나가기 위한 그야말로 스몰 토크.
“어, 진짜 그런 거 같은데? 아빠도 예전에는 고양이 좀 무서워했거든.”
어, 이건 좀 새로운 정보다. 요즘 아버지가 하트 많이 찍고 다니는 글들 보면 고양이 사진도 엄청 많던데….
“아, 진짜요?”
“응. 고양이 눈동자가… 그, 칼눈이라고 하지? 햇빛 아래 있으면 가늘어지는 거. 아빠도 그건 좀 무서워했던 것 같아. 그런데 인터넷에서 귀여운 사진이나 영상들 보니까 점점 귀엽게 보이더라고.”
“그렇죠. 고양이가 귀엽긴 하죠.”
“아마 다들 비슷하지 않을까? 잘 모르는 것들은 원래 약간의 두려움을 갖게 하잖아. 예전에는 고양이 집에서 키우는 사람이 많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고양이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 검은 고양이는 불운의 상징이라는 속설 같은 것도 있고. 그렇게 갖게 된 편견이나 선입견은 직접 겪어 보기 전에는 바꾸기 어려우니까. 그런데 점점 귀여운 모습 보면서 인식 바뀌는 거. 원래 사람은 시각적 자극에는 약하거든. 아빠만 해도 지금은 고양이 좋아해.”
“네, 좋아하시는 거 같더라고요.”
나는 살짝 웃었다. 아버지도 함께 웃으셨다. 그냥 고양이로 시작된 이야기였을 뿐인데, 대화는 수월하게 이어졌다. 과거와는 정말 달라진 것이 이런 것이다.
아버지와의 대화가 껄끄럽지 않고, 자연스럽게 주고받는 이야기가 많아졌다는 것. 이건 정말 좋은 일인 것 같다. 이렇게 즐겁게 말씀하시는 아버지를 보는 것도 좋고.
“아마 너희 세대보다는 아빠 정도 나이 되는 사람들이 많이 느낄걸? 예전에는 고양이 불길하다, 그런 얘기 많이 했으니까. 근데, 누가 그런 말을 했대?”
“어떤 말요?”
“고양이가 수혜자라고 한 거.”
아, 고양이의 이야기를 한참 했는데, 시작 자체는 뜬금없었구나. 다들 가족 간의 대화는 이렇게 이어지는 거겠지?
“아, 태선이 어머니께서 그러셨대요. 태선이네 고양이 키우는데 급발진하더라고요. 무섭다는 걸 이해 못 하겠다고. 원래 귀여운데 왜 무슨 수혜냐고. 흥분해서 밥알을 막 튀기면서 이야기를…. 어휴.”
“밥알?”
그때의 태선이를 생각하니 또 웃음이 난다.
“네, 밥 먹다가 나온 이야기거든요. 침 아니고 진짜로 밥알 튀었어요. 드럽게 말이죠.”
“태선이는… 참 재밌는 애구나.”
음… 말을 줄이시는 아버지의 표정이 어쩐지 묘하게 느껴지는 건 내 기분 탓일 거다. 그럴 거다. 아마도.
“아, 그리고 아버지 오늘 태선이네서 자고 올까 하는데요, 괜찮을까요?”
“응? 왜? 무슨 일 있어?”
“태선이네 강아지랑 고양이 키우거든요. 강아지 좀 봐야 할 거 같아서요.”
“아, 그 드라마 때문에?”
“네, 좀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서요.”
“그래. 빈손으로 가지 말고 갈 때 뭐라도 가지고 가. 태선이 어머니 드릴 걸로.”
“네, 그럴게요. 그런데 뭐가 좋을까요?”
이건 할머니의 가르침이었다. 남의 집에 방문할 때는 절대 빈손으로 가지 마라. 이렇게 아버지와 나 사이에서 할머니의 흔적을 발견할 때가 있다.
이럴 때면 음…. 슬픔? 아니다. 슬프지 않은 건 아니지만 이건 꼭 슬픔만은 아니다. 그리움. 그래, 조금 더 할머니가 그립다. 그리고 지금은 함께 그리워할 이가 곁에 있어서 다행이라는 안도감 같은 것. 그런 여러 가지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먹을 거는 태선이한테 물어보고, 어머니 꽃 좋아하시는지 물어봐. 꽃다발, 오늘 수요일이네. 장미, 좋다. 장미 사. 포장 예쁘게 해 달라고 해서.”
“네. 장미. 근데 수요일이랑 장미랑 관련 있어요?”
“어? 장미? 아…. 너는 그 노래 모르겠구나. 비 오는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 이런 노래가 있었는데….”
수요일엔 빨간 장미라는 말은 들어 본 적 있는데, 노래였구나. 아버지가 살짝 노래도 부르신 거 같은데? 이 노래 찾아서 들어 봐야겠다.
“…네 엄마가 좋아했었어.”
“네….”
아버지가 엄마 이야기를 먼저 꺼내신 건 이번이 처음이다. 우리 사이엔 마치 엄마가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정말 단 한 번도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과거의 나는 그걸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었고, 지금의 나는 조심스러웠다. 그래도 이렇게 시작할 수 있는 거겠지.
언젠가, 정말 언젠가는 아버지에게서 엄마의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