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artial God who Regressed Back to Level 2 RAW - Chapter (517)
“……회귀를, 네가 시켜 줬다고?”
무성 성지한.
이드가 거론한 그 칭호는, 분명 저번 생에서 성지한이 불렸던 것이었다.
그는 저번 생에서, 죽기 직전을 떠올렸다.
-신기합니다.
-NO.4212. 인류는 가치 없는 종이었을 텐데.
-삭제에 저항하다니.
이제는 끝났다 싶은 순간.
그의 눈앞에 배경색이 각기 다른 메시지창이 마구 떠오르더니.
-그에게 재도전의 기회를 부여합시다.
-동의합니다.
-반대합니다. 힘의 낭비입니다.
-동의합니다.
-동의합니다.
찬성 3, 반대 1로 ‘재도전’ 기회를 부여받았다.
그렇게 회귀하고 난 이후.
이 재도전 기회를 부여한 상대가 누군지에 대해선, 가슴 한켠에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자리하고 있었다.
‘무신의 무한회귀를 알고 난 이후에는, 날 회귀시킨 게 그인가 싶었지만…… 아니었지.’
처음에야, 성지한을 컨트롤 가능한 변수로 보고 무혼을 얻을 때도 넘어가던 무신은.
나중엔 상대가 통제 불가능하다는 걸 알곤, 어떻게든 죽이려 들었다.
그런 과정 속에서, 무신은 회귀에 대해선 딱히 거론하지 않았으니.
그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메시지창의 색이 여러 가지인 걸 보고, 혹시 관리자들이 개입한 건가 싶었는데…….
“그래. 널 무신의 무한회귀 속 변수로 채택한 건 나다.”
“찬성 3, 반대 1이라며. 혼자 쇼했던 거냐?”
“아니. 널 회귀시키는 건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백색의 관리자의 권능이 꼭 필요했지. 그리고 이를 위해선, 우리 내부에서도 합의가 필요했다.”
“합의라. 그게 그 투표였나.”
“그래. 나는 네가 그릇을 지키는 데 필요하다고 주장했고, 이 제안은 받아들여졌다.”
“……그릇? 설마 대기만성을 말하는 건가?”
성지한은 미간을 찌푸렸다.
왜 여기서 갑자기 그릇이 나오는 거지?
그의 반문에.
씨익.
이드는 입꼬리륻 더욱 올렸다.
“그렇다. 네 조카는, 무한한 굴레에서 매번 일찍 죽었지. 경쟁자에 의해서.”
“…….”
“하나 그녀를 죽인 경쟁자는 자질이 뛰어나지 않았다. 관리자의 그릇으로 발전하기엔 턱없이 부족했지.”
성지한은 그 말에 중국의 진유화를 떠올렸다.
윤세아를 죽이라고 사주해서, 대기만성 기프트를 완성한 그녀는.
저번 생에서, 세계 랭킹 2위까지 오르긴 했지만 실력은 형편없었지.
전투뿐만 아니라, 대기 역할도 하지 못할 만큼 능력 부족이었나.
“그래서…… 날 회귀시켰다고?”
“그래. 그녀의 호위로 쓰기 위해, 내가 널 과거로 돌려보냈다.”
“……호위라면, 매형을 보내도 되었을 텐데.”
“그는 삭제에 저항하지 못했다. 그런 이는 제대로 돌아갈 수가 없지.”
배틀넷의 ‘삭제’.
이에 대항한 순간부터, 자신은 이드의 낙점을 받은 건가.
성지한은 눈빛을 가라앉혔다.
‘완성된 대기…….’
흑색의 관리자가 바로 아레나의 주인 모자를 준 것도 그렇고.
이것의 가치는, 생각보다도 훨씬 더 뛰어난 것 같았다.
그런데.
“적색의 대기로는, 길가메시가 있지 않았나. 왜 굳이…….”
“그는 1번째 예비 서버였다. 그리고…… 예비는 1개론 부족하지.”
“예비 서버…….”
“그렇다. 예비가 필요하다는 건, 네가 증명하지 않았나.”
이드가 손을 펼치자.
지이이잉…….
그의 손 위로, 지구의 형상이 떠올랐다.
“지구의 인류. 원래는 이들이 적색의 관리자가 만들…… ‘헤븐넷’의 메인 서버가 될 운명이었다. 하나 네가 청을 부여하며, 이 시도는 실패로 끝났지.”
그리고 이드가 손바닥을 쥐었다 다시 피자.
지구의 형상이 사라지고, 이번엔 길가메시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래서 예비 1번 서버로 대신 명계를 가동하려 했건만. 네가 완전히 소멸시켰다고 적색이 알려왔군.”
파아앗!
길가메시의 형상도 손바닥 위에서 사라지고.
그다음으로 뜬 건, 윤세아였다.
“거기에 2번째 예비는 이미 흑색의 산하에 들어갔다. 그와는 아직 부딪칠 수 없으니 이 예비 서버에도 손을 대긴 힘들어졌지.”
“그거 잘됐네.”
“하지만 명계를 열 방법은 아직 여러 가지 있다. 그중 가장 쉬운 건…….”
스으윽.
이드가 그러며 성지한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네가 그녀를 설득하는 것이지.”
“……설득이라니. 설마 서버가 되라고 말하란 거냐?”
“그렇게 대놓고 말할 필요야 없지. 잘 말해서 모자만 벗겨라. 그러면, 바로 그녀를 헤븐넷의 서버로 전환할 수 있다.”
성지한은 눈을 깜빡였다.
아니.
그러니까 이놈 말은 윤세아 뒤통수 치라는 거 아니야?
“……그걸 설마 내가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나?”
“명계, 아니 이를 바탕으로 구축될 헤븐넷의 지배권을 나눠 주지. 그럼 보상은 충분하다 못해 넘칠 터.”
“꺼져.”
성지한의 반응에, 이드는 자신의 턱을 쓰다듬었다.
“내 말이 너무 어려웠나? 더 쉽게 설명해 주지. 내 제안을 받아들이면, 너는 새로운 플랫폼의 상시 관리자가 되는 거다. 헤븐넷의 잠재력을 생각하면, 넌 진정한 불멸의 존재가 될 수 있겠지.”
“하…….”
“모자만 벗기면 되는 쉬운 일이다. 자. 빛의 계약을 진행하도록 하지.”
헤븐넷의 상시 관리자가 될 수 있는 거래다.
성지한이 이를 거절할 리가 없다고 확신한 이드는.
치이이익……!
허공에 새하얀 빛으로 이루어진 글씨를 써 내려갔다.
“자, 여기에 이름을…….”
그러며 이드는 마지막에 서명을 작성할 밑줄을 그었지만.
스스스스…….
성지한의 손에서 흑검이 튀어나오자.
허공에 새겨진 빛의 글귀가 대번에 갈라졌다.
그와 함께, 공허에 파묻히는 빛의 계약서.
“……뭐 하는 짓이냐?”
“뭐 하긴. 계약서 찢는 거지.”
“……왜지?”
이드는 그런 성지한의 행동을 보며, 잠시 의아해하다가.
“여기서 더 줄 수는 없다. 청색의 관리자. 더 이상은 욕심내지 마라.”
곧, 난색을 표했다.
성지한의 거절이, 대가가 부족해서 그런 거라고 철석같이 생각하는 것 같았다.
“네 제안은, 헤븐넷 전체를 준다고 해도 사양이다.”
그러면서, 성지한의 검이 또 한 번 계약서를 찢자.
“아, 설마 윤세아가 문제였나? 가족. 그것도 조카 따위에 얽매여서, 상시 관리자를 포기한다니…….”
이드는 이제야 이해했다는 듯, 턱을 쓰다듬었다.
그러면서.
“내가 지금껏, 너무 좋게만 설득했던 것 같군…….”
그의 목소리가, 점차로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럼, 다음 스탭으로 진행하지.”
짝!
그러며 이드가 박수를 한 차례 치자.
[알겠습니다. 후원자시여.]
허공에서 적색의 관리자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스으으…….
이드의 모습이 옅어져 갔다.
“언제든지, 마음이 바뀐다면 내게 말하도록 해라.”
“그럴 일 없다.”
“네 판단에 도움을 주기 위해, 구경거리를 보여 주지.”
지이이잉…….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허공에 생겨난 화면에서는.
‘이건…….’
기념비 ‘배틀넷의 초대장’을 비추고 있었다.
* * *
한편, 미국 워싱턴.
기념비 ‘배틀넷의 초대장’이 위치한 장소에선.
뚝. 뚝.
비석의 글귀에서, 붉은빛의 액체가 떨어졌다.
“대체 저 현상은 뭡니까?”
“저, 저희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케이스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어서.”
아니 당연히 없겠지.
누가 초대장 글귀에 저 핏물처럼 불길한 붉은 액체가 뚝뚝 떨어질 줄 알았겠어.
미국의 정부 요원들은, 배틀넷 협회에서 파견된 사람들이 그렇게 태평한 소리를 하는 걸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그래도 저런 이상 현상을 보고, 그저 모른다고 하면 끝인 건가?
그때.
[내가 알려 주겠다.]
비석 안에서.
유창한 영어가 흘러나왔다.
“어, 엇…….”
“뭐, 뭡니까. 이건?”
연구진들이 당황하는 기색을 보일 때.
[나는 너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할 것이다.]
초대장 안에서는, 더없이 친절한 목소리가 들렸다.
[배틀넷 접속 해제.]
그리고 그것이 접속 해제를 선언하자.
스으으으…….
파견 나왔던 사람 대부분이, 얼굴이 푸석하게 변해 나갔다.
어떤 이는 주름이 강해지고.
어떤 이는 머리카락이 눈에 띄게 빠져나갔다.
배틀넷 접속 해제.
그 한마디에 담긴, 위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뭐, 뭐야…….”
“오 마이 갓……! 내, 내 머리가!”
“거, 건강 증진 이후 분명히 몸 상태가 좋아졌었는데…….”
초대장으로 파견 나온 사람들은, 그렇게 자신의 뒤바뀐 외양을 보면서 당황했지만.
그들의 고민은, 사실 다른 이들에 비하면 사치였다.
-어…… 어, 어머니가 다시 쓰러지셨어요……!
-뭐, 뭐야. 왜 갑자기…… 사람들이…….
-응, 읍급실 전화를 안 받습니다…….
한때 의식이 불명하거나.
움직임이 힘들었으나, 종의 진화로 이를 이겨 냈던 사람들은.
배틀넷 접속이 해제되며, 다시 ‘응급 환자’가 되고 있었다.
거기에.
“어…… 뭐, 뭐야?”
“몸이 왜 이래?”
“힘이, 플레이어가 되기 전으로 줄었는데…….”
“상태창! 상태창! 아니…… 이거 왜 안 나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던 플레이어들마저도.
‘배틀넷 접속 해제’가 발동한 순간, 지닌 힘을 한순간에 모두 잃어버렸다.
-지금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긴 거죠…….
-내 친구 200kg로 스쿼트 하다가 갑자기 허리 나감…… 119 불렀는데 지금 사방에서 비상이라는데…….
-뉴스 속보만 엄청 쏟아지는 중이네.
-배틀넷 접속 해제란 말. 나만 들은 거 아니지?
-ㅇㅇ…… 나도 들었음.
-근데 배틀튜브는 되네…….
-그러게;
배틀넷 접속 해제란 메시지가 뜬 이후, 완전히 격변해 버린 세계.
세상은, 배틀넷이 있기 전 시대로 순식간에 되돌아와 있었다.
다만 그때와 다른 게 있다면.
배틀튜브에 접속할 수 있다는 점일까.
-여왕님……!
-혹시 이 현상에 대해 아시는 거 없으신가요?
-아, 미쳐. 갑자기 피부 주름 자글자글해졌어요 ㅠㅠ 오늘 소개팅인데.
-소개팅이 문제냐 지금; 우리 엄만 또 못 서 계심……
그림자여왕의 채널에 몰려든 사람들은.
현 상황에 당혹해하면서, 배틀넷 경력이 긴 그녀에게 답을 구했다.
하지만.
“배틀넷 접속 해제? 그런 게 떴어요?”
그림자여왕은 그런 채팅을 보며, 눈만 껌뻑거렸다.
하지만.
“배틀넷 접속 해제? 그런 게 떴어?”
그림자여왕은 그런 채팅을 보며, 눈만 껌뻑거렸다.
“난 그런 메시지 못 받았는데…….”
[지금 알아보니까, ‘인류’에게만 그런 거 같아.]
“너는 왜 아직 석상이야 근데?”
[……난 공허의 마녀가 되면서 인류에서 벗어났으니까.]
“아, 그렇구나.”
[나, 세아한테 가 볼게.]
성지아는 그림자여왕에게 그리 대꾸하면서, 자리를 떴다.
“음…… 전 인류에게 단번에 적용된, 배틀넷 접속 해제라니…… 설마 성지한과 연관이 있는 건가?”
그림자여왕이 현재 상황을 지켜보고는, 그렇게 추측하자.
-성지한님이…….
-아. 그러고 보면, 그동안 배틀넷에선 탈출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급하게 나가면 안 되지 ㅡㅡ;;;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은 줘야죠…….
-저 배틀넷 탈출론자였는데, 생각 바뀌었습니다. 배틀넷에서 얻은 종족 진화 효과가 대단한 거였네요…….
-ㄹㅇ 있다가 없으니까 체감 오짐;
-아 진짜 뭐 하는 거야!!
사람들은 배틀넷에서 나가야 한다고 성지한이 주장했던 걸 떠올리곤.
폭발적인 반응을 내놓기 시작했다.
‘아, 이거…… 괜히 이야기했나.’
성지한 이름 하나 거론했을 뿐인데, 쏟아지는 대중들의 성토.
이건 마치, 도화선에 불을 지핀 느낌이었다.
그림자여왕은 이걸 보며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당혹해 할 때쯤.
지이이잉…….
그녀의 채널화면 아래에.
붉은 눈이 불쑥 튀어나왔다.
[인류여. 잃어 보니 알겠는가? 그간 누린 것의 소중함을.]
아니.
붉은 눈은 그림자여왕의 채널뿐만 아니라.
현재 방송되는 모든 배틀튜브에서, 모두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너희가 원한다면.]
배틀넷 접속 해제를 한 장본인은.
[잃은 것…… 내가, 다시 되찾게 해 주겠다.]
그렇게, 혼란에 빠진 사람들을 현혹하기 시작했다.
〈2레벨로 회귀한 무신 515화〉
성지한은 이드가 띄운 화면을 바라보았다.
배틀넷 접속 해제가 된 후, 최하급 종족이 된 인류.
그간 종의 진화를 통해 누린 혜택이 모두 박탈당하고.
특히 플레이어들은 레벨이 모두 초기화되면서, 대혼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극도로 혼란해진 세상.
그것도 가장 극단적인 상황만을, 화면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보여 주고 있었다.
‘날 여기 가두고, 지구에서 저 짓거리를 하고 있었군…….’
배틀넷 초대장을 가지고, 접속을 해제시킨다니.
적색의 관리자, 정말 전투 빼곤 다 잘 하는군.
그건 그렇고.
“아예 대놓고 저러는데…… 흑색은 뭐 하고 있지?”
성지한의 의문에
[그의 도움을 기대하는 거라면, 생각을 바꿔야 할 것이다.]
화면 안에서, 이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인류와 배틀넷의 연결이 해제된 이상, 흑색은 이곳에 바로 개입할 수 없으니까.]
“네놈에 비해 흑색은 참 제약이 많군 그래.”
[대신 그는 힘을 지니고 있지…….]
백색과 흑색 사이에서 전력 자체는, 정면으로 붙으면 흑색이 이기나 보네.
성지한은 이드의 말에서 그렇게 추측을 하곤, 생각에 잠겼다.
‘세아한테 중절모가 있는 게 지금 당장은 낫군. 하지만 계속 여기서 발이 묶이면 더 답 없는 상황으로 몰리겠지.’
투성으로 무신이랑 적색의 관리자를 끝내기 위해 쳐들어왔는데.
백색의 관리자가 개입하는 바람에, 제대로 발이 묶여 버렸네.
성지한은 화면에서 시선을 돌려, 투성 전체를 봉인한 빛의 장막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봐도, 저건 못 뚫어.’
이드는 자신이 백색의 본능이자, 일부라고 했지만.
그럼에도 상시 관리자의 힘은 어디 가지 않는 건가.
저 빛의 장막은 지금 힘만으론, 통과할 수 없어 보였다.
[저 혼란은, 결국 네가 야기한 것이다. 단 한 명이 희생하면 모두가 행복할 것을…… 고통에 찬 인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가?]
“응. 안 보이는데?”
인류를 핑계 삼아 자신에게 계약서를 내밀려는 이드였지만.
성지한은 이를 철저히 무시했다.
오히려.
“근데 이상하다? 이 상황, 니네 계획대로 잘 되는 거 아니냐? 왜 자꾸 계약서를 내미는지 모르겠네. 자기 몫까지 떼 주면서 말이야.”
이드에게 무슨 생각이냐고 반문하기까지 했다.
[그래. 이대로 일을 진행해도, 명계는 구축되겠지. 하나 나는 그 이후를 보고 있다.]
“이후?”
[적색의 관리자는 통제가 쉽지 않은 존재. 그에게는 억제 수단이 필요하다. 바로 너와 같은 상극이.]
“……날 그의 견제 수단으로 쓰겠다고?”
[그렇다.] 바로 토사구팽할 각을 보고 있는 건가.
관리자급으로 을라가면 다 저렇게 변하는 건지.
백색과 적색, 녹색 죄다 정상이 없네.
“야. 근데 세아 모자 안 떼고 협력하면 되는 거 아냐?”
[그럴 순 없다.]
“그래? 그럼 결국 모자 떼야 하는 이유가 있는 거네.”
[…….]
성지한의 말에, 대답하지 않는 이드.
그건 결국 긍정이나 다름없었다.
‘저쪽도, 세아가 필요한 이유가 있는 거 같은데.’
진짜 여유로웠다면, 그놈의 모자 떼라고 계약서를 들이밀지 않았겠지.
성지한은 눈빛을 가라앉혔다.
이러면 더욱, 지구로 발리 가야겠는데.
‘지금 여기서 힘을 더 얻을 만한 변수는 저거밖에 없나.’
스으윽.
성지한은 눈앞의 화면을 치우고, 태극에 빨려 들어가는 뱀을 향해 다가갔다.
‘야. 어차피 죽을 거, 좀 빨리 들어가면 안 되냐?”
아직 완전히 소멸되지 않아서 그런지.
‘무신’ 칭호를 붙잡고 있는 뱀.
그런 성지한의 재촉에.
반도 안 남은 뱀의 몸뚱어리에서, 머리가 튀어나왔다.
[……나의 죽음이, 네 힘을 늘리나 보군. 혹시, 무신의 칭호를 원하는 건가.]
“눈치 빠르네.”
[네 기대와는 달리, 그 칭호는 단순히 명예에 불과하다…… 힘을 기대했다면, 실망할 것이다.]
뱀은 그러면서, 눈을 번뜩였다.
[그런 칭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다…….]
“뭔데?”
[내가 네 몸 안으로, 들어가게 해 달라.]
* * *
“……너. 그러니까. 내 몸에 기생하겠다는 거냐?”
성지한이 설마 하며 반문하자.
[그렇다. 작은 공간만 있으면 된다. 그래…… 벌레 정도 크기면 된다. ‘나’의 의식만 담을 수 있다면.]
당당하게 기생충이 되겠다는 뱀.
“됐고…….”
[받아만 주면, 남은 무구의 소유권을 모두 넘기지.]
“……몇 개 있는데?”
[내가 넘길 수 있는 건, 51개다.]
그 많던 성좌의 무구가 박살 나고, 그거만 남은 건가.
‘그래도 얻으면 확실히 전력은 강화되겠지.’
빛의 장막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지금.
뱀의 꼬드김은, 꽤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상대는 그 동방삭에게도, 빠져나올 수 없는 금제를 걸었던 존재였으니.
저 제안을 섣불리 받아들이기엔, 리스크가 컸다.
그가 잠시 대답 없이, 생각에 잠겨 있자.
스스스스…….
무신이 다급히 말했다.
[기생에 다른 조건은 필요 없다. 단 한 번, 널 물게만 해 달라.]
“물기만 하면 된다고?”
[그래. 물건도 미리 일부, 넘기겠다.]
본체가 계속 태극에 빨려 들어가서 그런지, 먼저 성좌의 무구를 건네겠다는 무신.
“뭐. 일단 무구부터 줘봐.”
성지한이 고개를 끄덕이자.
[방랑하는 무신이 ‘성좌의 무구 #174’를 양도합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방랑하는 무신이 ‘성좌의 무구 #2217’을 양도합니다.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눈앞에, 메시지창이 여럿 떠올랐다.
성지한이 예를 누르자.
지이이잉……!
허공을 떠다니던, 부서진 성좌의 무구들이 그에게 모여들기 시작했다.
“부서져서 둥둥 떠다니던 거잖아.
이 거.”
[어차피 형태보다, 중요한 것은 그 안에 담긴 힘. 기운은 그래도 상당량 남아 있다…… 그렇지 않은가?]
“흠.”
과연 무신의 말대로, 그가 넘긴 성좌의 무구는 막대한 힘을 담고 있었다.
근데 양도받기 전에는, 무구 파편에서 이런 힘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는데.
무신이 소유권을 양도해야 본격적으로 쓸 수 있었던 건가.
‘이 정도면 힘을 증폭시키는 수단으로, 쏠쏠히 써먹을 순 있겠는데.’
성지한은 자신과 검붉은 빛으로 연결된 5개의 성좌의 무구를 보곤, 힘을 가늠해 보았다.
부서져서 그런지 계속 기운이 새어 나가곤 있었지만.
일회성으로 쓰기엔, 쓸 만해 보이는 성좌의 무구들.
[어떤가?]
“……괜찮네.”
[그럼, 물어도 되겠는가?]
스으으윽…….
뱀의 몸통에서 불쑥 튀어나온 머리는.
자기 본체가 거의 끝부분까지 빨려 들어가는 걸 보고, 다급히 말했다.
이제 진짜, 얼마 안 있으면 죽을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아니.”
[……아니. 왜?! 힘이 필요한 것 아니었나!]
“어. 힘은 필요한데.”
성지한은 검붉은빛을 손으로 매만졌다.
“이거, 굳이 양도 안 받고도 써먹을 수 있을 거 같거든.”
[뭣…….]
“이렇게 말이야.”
파아앗……!
성지한의 몸에서 검붉은 빛이 피어오르더니.
성좌의 무구의 잔해에 연결되기 시작했다.
“이거, 본질적으론 적의 능력을 개조한 거네.”
성좌의 무구와 연결된 빛.
적과 상극인 성지한은, 이것이 지닌 성질을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스탯 적을 남겨 두길 잘했군.’
혹시나 해서, 놔뒀던 스탯 적.
이번에 써먹어야겠네.
성지한이 그렇게 성좌의 무구 잔해에 빛을 연결하자.
[적…… 이었는가. 이것도?]
뱀이 이를 보곤, 허탈한 음성을 내뱉었다.
이러면, 그와 거래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사라진 셈.
“고맙다 야. 저 잔해에 힘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힌트도 주고.”
[……하나, 살려 줄 생각은 없겠지.]
“당연하지.”
슥. 슥.
성지한은 태극을 향해 손짓했다.
“그만 버티고, 이제 가라.”
[아니다. 잠깐…… 내 말을 들어 보아라!]
거래할 것이 사라졌음에도, 무신은 마지막까지 살아 보겠다고 발악했지만.
슈우우욱……!
정방향으로 돌아가던 태극은, 뱀의 꼬리까지 집어삼켰다.
[‘방랑하는 무신’을 소멸시켰습니다.]
[무신을 쓰러뜨려, 칭호 ‘무신’을 이어받습니다.]
그러자, 성지한에게 무신이 소멸했다는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리고 이에 이어서.
[‘무신’ 칭호를 장착하시겠습니까?]
* 주의 – 무신의 칭호는 한 번 장착할 시, 뗄 수 없습니다.
칭호 장착과 이와 관련된 주의사항까지 나타났다.
칭호 슬롯을 1개 차지하는 꼴이 되니, 이렇게 경고 메시지까지 나타난 건가.
“바로 장착해.”
성지한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무신’의 칭호를 장착합니다.]
[스킬 ‘무극멸신’의 효과가 증폭됩니다.]
[무재의 구현도가 올라갑니다.]
무극멸신도 모두 담아내지 못했던 동방삭의 무재가, 보다 선명히 성지한에게 자리하기 시작했다.
‘……이거.’
스으윽.
성지한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신의 칭호로 인해, 한층 더 발전한 무의 재능.
이를 얻은 상태에서, 바라본 세상은 조금 전과는 확연히 차이가 났다.
‘그와 내가 보는 세상은, 이렇게도 달랐던 건가…….’
무신이 성좌의 무구를 양도하기 전만 해도, 힘을 느낄 수 없었던 성좌의 무구에선.
이제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숨어 있는 기운을 느낄 수 있었으며 .
아까 전까지만 해도, 절대 뚫을 수 없을 것 같았던 빛의 장막은.
벌써 허점을 몇몇 군데에서 찾을 수 있었다.
특히.
‘은하검흔의 양 끝을 틀어막은 장막은, 확연히 약하다.’
투성을 반으로 완전히 갈라 버렸던 은하검흔.
그 흔적의 끝부분은, 빛의 장막에 의해 봉쇄되어 있었지만.
그곳의 봉인은 완벽하지 않았다.
‘좋아. 저길, 뚫는다.’
파아아앗……!
성지한의 몸에서 검붉은 빛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고.
투성에 떠돌던 성좌의 무구 잔해가 일제히 연결되기 시작했다.
[청색의 관리자여. 설마…… 장막을 뚫을 생각인가?]
그러자 이를 보고, 화면을 끄고 다시 나타난 이드는.
입술을 바쁘게 움직였다.
[아무리 임시 관리자라 한들, 힘의 차이조차 보지 못하는가? 저건 ‘이드’가 아닌, 백색의 관리자께서 펼치신 장막. 이를 뚫을 수 있는 건, 흑색의 관리자밖에 없다.]
어쩐지 빛의 장막이 너무 강력하다 싶더라니.
저기엔 상시 관리자의 힘이 온전히 들어갔던 건가.
‘확실히, 은하검흔이 닿는 부위가 아니었으면 뚫기 쉽지 않았겠지…….’
그만큼 급이 다른 상시 관리자의 힘.
하나, 성좌의 무구에서 힘을 끌어 쓸 수 있는 지금은.
저 장막을 충분히 뚫을 수 있었다.
‘뚫기만 하는 게 아니라, 단숨에 지구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려면.
여기에 왔을 때와 같은 방법을 써야겠군.
스스스…….
성지한의 뒤에서, 태극이 떠오르고.
흑색의 마검이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좋다. 한 번 시도해 보아라. 그래야 격의 차이를 여실히 느끼겠지.]
이 모습을, 이드는 오히려 잘 되었다는 듯 지켜보았다.
상시 관리자의 벽에서 절망을 느껴야, 제 주제를 파악하겠지.
하나 처음에는 그렇게 여유롭게 성지한의 행동을 바라보던 그는.
흑색의 마검에, 성좌의 무구에 담긴 힘이 연결되는 걸 보고는 목소리를 달리했다.
[……제법, 하는구나.]
태극마검에 담긴 기운.
그건, 빛의 절대적인 힘을 아는 그로서도 꽤 위협적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이드는 결국 저 검이 장막을 뚫을 수 없을 거라고 여겼다.
성지한의 육신이, 검에 빨려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무극멸신武極滅神
신검합일身劍合一
심즉검행心卽劍行
파아아앗……!
성지한의 모습이 사라지고.
검이, 은하검흔의 궤적을 따랐다.
빛의 흔적을 향해 질주하는 암검.
그것은, 곧 빛의 장막에 닿더니.
[아니……!]
이를 단번에 꿰뚫었다.
그러자, 투성을 감싸던 빛이 일순간 반짝이는 듯싶더니.
빛의 장막이 차츰차츰 허물어졌다.
[머, 멈춰라……!]
이를 본 이드는, 급히 암검을 찾으려 했지만.
이미 검은 사라진 후였다.
〈2레벨로 회귀한 무신 516화〉
갑작스럽게 발생된 배틀넷 접속 해제.
전 인류에게 적용된 이것의 여파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커져 가고 있었다.
-아니…… 자고 일어났는데 이게 무슨 일이야?
-내 레벨 어디 갔어 ㅠㅠ 겨우 골드 리그로 올라왔는데!!
-지금 레벨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아버지가 정신을 제대로 못 차리시는데요…… 겨우 퇴원하셨는데…….
-최하급 종족으로 돌아오니까 역체감 엄청나네;
최하급 종족 시절로 다시 돌아온 사람들.
이들이 느끼는 박탈감은 현실에서 바로 체감이 되었다.
특히 중병을 앓던 가족들이 건강을 되찾고 퇴원했던 집에서는.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지만, 적잖은 수가 다시 재발된 병을 보고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역시 배틀넷을 탈퇴하면 안 됐어…….
-예전처럼은 못 살겠는데 진짜.
-아, 어떻게 해야 다시 돌아가는 거지?
그렇게 사람들이 혼란에 빠져 있는 상황에서.
유일하게 예전처럼 작동하는 건, 배틀 튜브였다.
다만.
-그림자여왕 채널 배고는 다 꺼지고 있네…….
-이리로 모이라는 건가?
-그림자여왕도 한패였음?
-모르겠네; 상황이 급변해서…….
다른 채널의 생중계는 모두 꺼져 가고.
단 하나, 그림자여왕의 채널만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이거, 시청자 신기록은 세웠는데…… 적색의 관리자 눈알이 걸리네.”
그림자여왕이 자신의 채널 테두리를 보며, 미간을 찌푸릴 즈음.
저벅. 저벅.
윤세아와 성지아가 그녀가 있는 곳을 향해 다가왔다.
“여왕님, 적색의 관리자가 이용하게 놔두느니 채널 닫는 게 낫지 않을까요?”
“나도 그러고 싶은데, 안 꺼져.”
[진짜?
시청자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고?]
“아, 진짜라니까? 애초에 지금 인류는 배틀튜브에서 허수 취급이야. 1000억 모여도 GP 안 준다고.”
-헐 그러고 보니 내 GP는 어떻게 된 거야!!
-시스템도 안 열리는데 GP라고 있겠냐.
-와, 어제 1억 환전했는데 개망했다…… ——
-돈도 건강도 다 잃었네 하…….
-아니 나 부모님한테 등록금 GP로 전달받았는데;; 달러로 바꿔 줘야지 이건!
배틀넷 접속 해제로, GP마저 모두 증발하자 사람들은 패닉에 빠졌다.
이 잠깐의 시간 동안, 잃은 게 많아도 너무 많았으니까.
그리고 이런 이들을 향해.
그림자여왕 채널 아래, 불쑥 튀어나온 붉은 눈이 말을 걸었다.
[인류여, 잃은 것을 되찾고 싶은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운을 땐 적색의 관리자는.
그림자여 왕에게로 다가오는 윤세아를 확대했다.
[그러기 위해선, 그녀가 필요하다.]
“아니…… 왜 절 확대하죠?”
윤세아가 화면을 보면서 미간을 찌푸릴 때.
그녀의 옆에서, 불가사리가 불쑥 튀어나왔다.
[적색의 관리자시여, 지금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는 겁니까?]
[보면 알지 않는가. 공허의 메신저여.]
[이번 사태, 흑색의 관리자께 벌써 보고했습니다. 그분께서는 절대 이를 좌시하지 않으실 겁니다.]
[후후……..]
흑색의 관리자가 곧 개입할 거라는 이야기에도, 웃음만 내는 적색의 관리자.
[지구와 인류는 이제, 배틀넷에 속한 세계가 아니다. 공허는 즉각 개입이 불가능하지.]
[하지만 당신이 개입해서 일어난 문제라면 다릅니다. 비상사태 때는 저희도 개입 권한이 있습니다.]
[그런가? 그런데 왜 오지 않지?]
붉은 눈의 반문어1, 메신저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말을 이어 갔다.
[통신이 두절되었군요…… 설마, 백색의 관리자께서도 이 일에 개입하신 겁니까?]
[글세, 나는 잘 모르겠군?]
[……어쩐지. 이렇게 일을 벌이는 이유가 있었군요.]
스스스…….
불가사리가 커지며, 윤세아의 앞을 막아서자.
적색의 관리자가 말했다.
[굳이 막을 필욘 없다. 그녀를 직접 건들 생각은 없으니까. 자신이 스스로 모자를 벗는다면 모를까.]
“내가 이걸 왜 벗어?”
윤세아가 자신의 머리를 가리키자.
지이이잉…….
그녀의 앞에 화면이 무수하게 뜨기 시작했다.
거기에는, 종이 갑작스레 최하급으로 떨어지며 아비규환에 놓인 사람들의 장면이 떠올랐다.
-와 상황 심각하구나…… 쓰러지고, 피 토하고.
-응급실 전화 안 받는다더니 이유가 있었네…….
-억, 뭐야 저거…… 저 사람 미국의 올리버 아니야? 왜 자살함?
-자살한 게 아니라 하늘에 플라이 마법 쓰면서 다니다가 추락했대;
-헐 대형사고네 ㄷㄷ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 긴급 상황.
화면 속 장면에는, 플레이어들이 능력을 과신하다가 터진 사고도 여럿 있었다.
그리고 이 화면 속에서, 적색의 관리자가 말했다.
[사람들이 이렇게 되었는데, 아레나의 주인으로 계속 있을 셈이냐?]
“이거 당신이 한 거잖아.”
[너는 이들을 도울 수 있지.]
“당신의 뭘 믿고?”
윤세아의 단호한 대답에, 적색의 관리자는 웃음소리를 내었다.
[후후…… 역시 그렇게 나오는가. 인류여, 1명이 희생했다면 60억이 다시 풍요로워졌을 텐데. 본인이 단호하게 거부하는구나.]
-아니 누가 저 말을 따라 一一
-ㄹㅇ 애초에 문제를 이렇게 만든 게 적색의 관리자잖아;
-그래도 협조하는 게 낫지 않았을까요…… 사람들 상황이 저런데.
-?? 저놈 어케 믿고 윤세아보고 희생하라 그래요.
-혹시 모르잖음…….
윤세아가 거부한 걸 보고 사람들의 반응이 갈리는 사이.
번쩍!
채널화면 아래, 붉은 눈이 크게 번쩍였다.
[그럼에도 나는, 너희에게 기회를 주겠다.]
그리고.
화면에서 불쑥 튀어나오는 눈.
-ㅎㄷㄷㄷ 뭐야 이 눈깔 실제로 튀어나왔어!!
-아, 개 징그럽네 진짜.
-어우 만질 뻔;
-저 이미 만졌어요 어떻게 하죠 ㅠㅠ?
채널 화면 아래에, 실제로 튀어나온 붉은 눈을 보고 사람들은 처음엔 기겁했지만.
[1억명.]
거기서 실제로 나오는 적색의 관리자의 목소리에.
[선착순으로 이 눈을 만진 1억명의 인간에게, 원래 누리던 것을 돌려주겠다.]
급격하게 빠져 들어갔다.
-아니, 뭔 개소리야…… 이게 ——
-이걸 누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ㄹㅇ; 개 징그럽구만.
-여러분 절대 누르지 마세요 이거!
그림자여왕의 채팅창에서는, 사람들이 이 눈을 누르지 말자고 말했지만.
스스스스…….
눈 옆에 숫자가 뜨더니.
카운트가 빠르게 을라가기 시작했다.
[벌써, 백만이 넘었구나.]
그러면서 새로이 떠오르는 화면.
거기서는, 쓰러졌던 사람들이 몸을 금방 일으키고.
플레이어들이 다시 능력을 되찾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특히.
[오…… 돼, 됐다. 상태창. 상태창! 다시 2개가 뜨는구나……!]
퀭한 얼굴의 배런이, 상태창을 2개 띄우면서 얼굴색이 순식간에 밝아지는 모습이 나오자.
-어…… 진짜 되나 본데?
-배런 얼굴빛 좋아진 거 봐;
-아 나도 GP 10억 넘게 환전해 놨는데…… ㅅㅂ 누른다 강!
-야, 누르고 나니까 진짜 예전처럼 돌아왔어!
카운트 수 늘어나는 게,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지기 시작했다.
100만이 천만.
천만이 또 3천만까지 가자.
-아니 재들 왜 저래? 적색을 어떻게 믿어?
-다 죽어 가는데 이거라도 눌러야지 어떻게 함;
-전 재산 GP로 바꿔 놓은 사람들은 누르는 수밖에…….
-쓰러졌던 아버지 앞에 화면이 떠서, 내가 눈알 터치해 주니 원래대로 돌아오셨음……. 사람들의 동요도 덩달아 심해졌다.
적색의 관리자가 이 문제를 야기한 원인이고.
그의 제안이 수상쩍다는 건, 어린아이라도 눈치챌 수 있는 사실이었지만.
당장 상황이 급한 사람들에겐, 아무리 썩은 동아줄이라고 해도.
붙잡아야 했으니까.
그렇게, 카운트가 빠르게 늘어 1억에 도달하자.
[되었다.]
쑤욱…….
화면에 튀어나왔던 붉은 눈이 다시 들어갔다.
* * *
-아, 아직 안 눌렀는데……!
-또 고민하다가 기회 놓쳤네 ㅠㅠㅠㅠ
-한 번 더 안 될까요…….
-아니 이걸 왜 눌러 미친놈들아;
-성지한 님 돌아올 때까지만 좀 기다리면 되는데 ——
적색의 관리자가 기회를 거둬들이자, 난리가 난 채팅창.
제발 다시 기회를 달라는 쪽과, 이걸 누르면 어떻게 하냐는 의견이 팽팽하게 갈렸다.
효과를 본 사람이 워낙 많아서 그런가.
처음과는 달리, 여론이 반반이 되어 있는 상황.
‘일을 이렇게 만든 게 적색의 관리자인데…… 사람들은 금방 저쪽에 붙는구나.’
윤세아가 차가운 눈으로 그런 여론을 지켜보는 사이.
[잘 눌러 주었다.]
적색의 관리자의 눈이 윤세아의 앞에, 불쑥 튀어나왔다.
[그릇이여. 너는 아직도 생각을 바꾸지 않을 것인가?]
“뭐, 너한테 협조할 생각?”
[그렇다.]
윤세아는 그 물음에 굳이 대답하지 않고, 손에 공허의 기운을 일으켰다.
그러자 거기에서 금방 생성되는, 보랏빛의 화살.
슉!
화살이 날아, 붉은 눈을 관통하자.
[대답은 잘 들었다…… 그러면 그릇은, 새로 만들도록 하지.]
파아아앗!
꿰뚫린 눈이 사라지더니.
한순간에, 밖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어, 집 밖이……!”
윤세아 일행이 거실의 창가를 바라보자.
거기엔 붉은빛을 띈 얼굴과 눈이, 창문을 통해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순식간에 거인의 형태로 변한 적색의 관리자는.
얼굴이 소드 펠리스 빌딩의 옥상까지 닿을 정도로 커져 있었다.
[이 건물…… 청색의 관리자가 머물던 집이기도 했지.]
[그가 나를 꽤 고생시켰으니, 이 건물 전체를 내 새로운 그릇으로 탈바꿈하겠다.]
소드 펠리스 빌딩을 그릇으로 바꾼다고?
윤세아는 거대화한 적색의 관리자가 건물로 손을 뻗어 오는 걸 보곤, 공허의 화살로 저항을 해 보았지만.
[그 정도로는, 1억이 바친 힘을 거스를 수 없다.]
펑! 펑!
보이드 애로우는 적색의 관리자에 닿지 못한 채 허공에서 폭발했다.
스스스스…….
그리고 그의 손이 소드 펠리스에 닿자.
유리창부터, 빌딩이 빠르게 붉어지기 시작했다.
-1억이 바친 힘이라니…….
-아 진짜 누르지 말라니까 —— 저놈 힘만 세졌잖아.
-사람이 죽어 가는데 그럼 어쩌냐…….
-어차피 이제 끝났어; 성지한은 보이지도 않고, 연락 두절이잖아…… 빨리 또 다른 대세에 줄 서는 게 낫지
-ㄹㅇ 성지한 어디서 뭐 함…….
-무신 잡으러 갔다가 본진 털린 거지.
그렇게 눈을 누른 결과, 적색의 관리자의 힘을 증폭시켰단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어쩔 수 없었다는 사람들.
오히려 성지한 탓까지 하는 여론을 보고 윤세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청색의 거점을, 적색으로 물들인다…… 명계의 완성 이후, 이렇게 기쁜 적은 오랜만이구나.]
“……삼촌은, 어디 있지?”
[궁금하느냐?]
윤세아의 물음에.
지이이잉……!
친절하게 화면을 띄워 주는 적색의 관리자.
화면에서는 은하검흔으로 인해, 반으로 갈라진 투성의 모습이 먼저 보였다.
[그는 투성을 반으로 갈랐지만, 이 안에 갇혔다.]
그의 말과 함께 확대되는 화면.
거기선 눈을 감고 있는 성지한이 보였다.
다만.
그를 실질적으로 가두었던 빛의 장막은, 어째서인지 화면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너희의 관리자는 이제 봉인될 것이다. 그러니 미련을 버리고 새로운 지배자를 맞이하라.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겠다.]
슉……!
그 말을 끝으로, 또다시 튀어나오는 붉은 눈.
1억명을 모집했던 카운트는.
이제 2억으로 목표 수치가 늘어 있었다.
-아, 성지한 진짜 갇힌 거야…….
-겉으로 보기엔 별로 안 위험해 보이는데.
-하지만 무신 이미 처리한 거 같은데 왜 아직까지 귀환 안 해? 갇힌 거 맞지 않아?
-아, 근데 2억으로 카운트 늘었네…… 진짜 눌러야 하나;
-난 오히려 성지한님 살아 계시는 거 보니까 더 누르면 안 될 거 같은데
-조금만 더 버텨 볼까…….
-근데 버티기엔 벌써 1억 2천만임 ——;;
성지한이 갇힌 걸 보곤, 이젠 안 되겠다고 직감한 것인가.
눈을 누른 인원은 순식간에 2천만이 추가되어 있었다.
이런 속도라면, 목표 2억은 눈 깜짝할 사이에 도달하겠지.
[왜 못 나오시는지 모르겠군요…… 분명, 무신은 사라졌는데.]
메신저가 그 화면을 보고 의아한 듯 말을 할 때.
성지한의 뒤에서, 태극이 떠오른다 싶더니.
그의 몸이 검에 빨려 들어간 상태로.
태극마검이 은하검흔을 따라 쭉 뻗어 나갔다.
[흐음. 쓸데없는 짓을…….]
그걸 보고, 적색의 관리자가 비웃음을 흘렸지만.
파아아앗!
암검이 허공을 꿰뚫자.
번쩍……!
화면상 어두워만 보였던 허공에서.
갑작스럽게, 빛의 장막이 드러났다.
[이, 이건. 빛의 장막……!]
“그게 뭔데요?”
[백색의 관리자의 절대권능입니다. 저걸 펼쳐서, 청색의 관리자를 봉인하려 했다니. 이건 백색이 이번 일에 개입했다는 실제 증거가 되겠군요!]
파직. 파직.
메신저가 화면에 촉수를 뻗으며, 신나게 주절거리는 사이.
[아니! 저게, 어떻게 뚫린단 말이냐…….]
적색의 관리자는 그답지 않게 당황한 목소리를 내며, 화면을 급히 꼈다.
성지한이 투성에 수감된 모습을 보여 주려고 했는데.
하필, 탈출하는 모습을 생중계해 버린 꼴이 되었으니까.
[이렇게 되면 무리를 해서라도……!]
화르르륵…….
성지한의 탈출을 본 적색의 관리자가.
몸에서 불꽃을 일으킨 채로, 건물을 명계의 그릇으로 뒤바꾸려 했지만.
치이이익……!
그가 본격적으로 일을 진행하기도 전에.
그의 머리와 몸통이, 세로로 쪼개졌다.
[이건…….]
목소리가 깨져 나오는 적색의 관리자.
그의 눈동자가, 데구루루 구르더니 아래를 향했다.
그러자 거기엔.
화면에서 보였던, 흑색의 태극마검이.
마치 처음부터 거기 있었다는 듯 도로 위에 꽂혀 있었다.
그리고.
“좀 늦었군.”
그 검에서, 성지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2레벨로 회귀한 무신 517화〉
투성에 유인하여, 빛의 장막에 성지한을 가둔다.
적색의 관리자의 계획은 심플했지만, 그만큼 효과적이었다.
애초에 ‘빛의 장막’은 백색의 관리자가 펼친 권능이었으니.
이걸 임시 관리자 따위가 뚫을 순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실제로, 성지한도 장막을 보자마자 이건 넘을 수 없다고 판단하기도 했으니까.
그래서.
[장막을 넘다니…… 믿을 수가 없구나.]
적색의 관리자는 더더욱 현재의 상황을 바로 인정하지 못했다.
상시 관리자의 권능을, 성지한 따위가 뚫어 내다니.
이건, 그의 상식선에선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성지한은 그런 적색의 의문을 풀어 주는 대신.
철컥.
도로에 박힌 검을, 가볍게 뽑아내었다.
무극멸신武極滅神
삼재무극三才武極
태산압정泰山押頂
그러자.
치이이익……!
한 번 갈라졌던 적색의 관리자의 몸뚱어리가.
또다시 반으로 쪼개졌다.
가볍게 뻗은 일검.
하나 그것은, 땅에서 시작하여 히늘까지.
푸른 빛줄기를 일직선으로 그어 놓고 있었다.
그리고.
[전투는, 안 되는군.]
번뜩!
반으로 쪼개진 얼굴에서.
적색의 관리자의 눈이 각기 다르게 번뜩였다.
전투에 서툴다고 스스로가 자평했던 적색의 관리자는.
이 일검만으로, 자신과 성지한의 차이를 빠르게 파악해 내었다.
빛의 장막을 베고 온 것만으로도, 격차가 있을 거라고 예상하긴 했지만.
맞아 보니 확실히 알겠다.
‘청색의 관리자와 전투는 필패.’
적은 청에 관하여, 무에 있어서는 열세임을 인정했다.
이러면, 전투 말고 다른 대처방법을 찾아봐야 했는데.
청색의 관리자는 그럴 틈을 주지 않고 있었다.
치이익……!
암검의 테두리에 푸른빛이 일렁이자.
붉은 거인의 몸뚱어리가, 금방 수백 수천 갈래로 갈라졌다.
“저항을 하지 않는군.”
성지한의 말에.
화르르륵……. 갈라졌던 거인의 몸에서 불길이 피어오르더니, 그가 다시 몸을 재생했다.
[애초에 전투는 나의 분야가 아니어서 말이지.]
“근데 그런 거치곤, 끈질기게 재생을 하는데.”
[그릇 완성이 코앞에 있는데, 포기하기는 이르지 않는가.]
“그릇이라…… 붉게 물든 소드 펠리스를 말하는 건가.”
성지한은 적색의 관리자가 만지던 빌딩을 힐끗 바라보았다.
건물은 색만 붉게 변한 게 아니라, 외부에서 막대한 힘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적색의 관리자가 방금 전 재생할 때, 저 힘의 일부가 쓰이기도 했다.
“저게 널 살리고 있군.”
[그래. 1억 2천만의 지원이 계속되는 한, 나는 계속 살아날 것이다.]
“1억 2천만?”
[나를 따르기로 한 인간의 숫자지. 네가 돌아왔음에도, 아직 늘어나는구나.]
투성에 갇혀 있는 동안, 저놈 또 뭔 짓을 했나 보네 .
성지한은 적색의 관리자를 유심히 지켜 보았다.
‘불씨가 남아 있으면, 그걸 기반으로 살아남는다.’
상대의 신체를 수천 조각 잘라 내도.
이게 단번에 소멸되지 않는 한, 적색의 관리자는 소드 펠리스를 통해 다시 몸을 재생했다.
상대를 없앨 거면, 단번에.
재생할 틈도 주지 않아야 했다.
‘그렇다면.’
성지한은 검을 땅에 꽂았다.
그러자 한순간, 완연히 푸른빛을 띠는 암검.
바닥에 태극의 문양이 잠시 일렁이자.
그는 다시 검을 뽑아, 하늘을 베었다.
무극멸신武極滅神
태극마검太極魔劍
검흔劍療
대지부터 하늘까지, 일직선으로 뻗어가는 청색의 빛줄기.
이것은 방금 전, 태산압정을 사용했을 때와 얼핏 보기엔 똑같았다.
[또 그 검인가. 아무리 날 베어 보았자, 소용없다…….]
적색의 관리자는 반으로 쪼개진 와중에도, 태연히 말을 이어 나갔지만.
그를 잘라 낸 검의 흔적.
푸른 선은 사라지질 않았다.
오히려.
[으음? 이건……!]
검광이 번뜩이자.
적색의 관리자의 육신이 일제히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검의 흔적이 빨아들이는 건, 적색의 불씨와 건물을 잠식했던 붉은빛.
[동방삭의 그 ‘검’인가. 이걸, 네가 쓰다니…….]
“그저 흉내 낸 정도에 불과하지.”
[허, 일이 거의 다 성사되었거늘…….]
원래의 색을 되찾은 빌딩과.
재생하기도 전에 검흔에 빨려 들어가는 몸을 보며, 적색의 관리자는 허탈한 음성을 발했다.
[이렇게 죽다니, 허무하구나. 명계 구축은, 불가능한 꿈이었나…….]
적색의 관리자가 검흔에 빨려 가는 와중에, 그렇게 유언을 내뱉자.
이를 듣던 성지한이 피식 웃었다.
“잔꾀는. 어딜 죽은 척하냐?”
[……알아챘나.]
“배틀넷 초대장에 있는 거점은 그대로잖아. 그걸 부술 때 유언 내뱉어라.”
[거기까지 을 셈이냐? 참으로 집요하구나.]
“집요? 그건 너한테 해당되는 단어지.”
[후후…….]
파아아앗……!
그 웃음을 마지막으로, 검흔에 적색의 흔적이 모두 빨려 들어가자.
성지한은 가볍게 점프를 해, 펜트하우스 창가 안으로 들어섰다.
“삼촌……!”
[지한아, 몸은 어때. 괜찮아?]
성지한이 창가에 도착하자, 걱정스런 기색으로 이곳에 다가오는 가족들.
그는 그들을 보곤 살짝 웃었다.
“다들 다행히 몸은 괜찮네.”
그러면서 그는, 윤세아 옆에서 둥둥 떠 있는 메신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야, 흑색의 관리자는 뭐 하고 있냐? 백색이 대놓고 적이랑 협력해서 나 가두는데, 구경만 하고 있어?”
[바로 보고는 드렸습니다만, 배틀넷의 통신망은 백색의 관할이라 지금까지 막혀 있었습니다. 다만 지금은, 다시 개통이 되어 보고가 들어갔습니다.]
“통신이 지금은 열렸다고?”
[예…… 그러면서, 이번 사태는 ‘일부의 일탈’이라고 해명하셨습니다.]
일부의 일탈이라니.
성지한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드란 놈 내세웠던 게, 이런 때 희생양으로 써먹기 위해서였나.
“그 ‘일부’가 빛의 장막까지 동원할 수 있냐?”
[그래서 빛의 장막이 온전치 못해서, 쉼게 뚫린 거라고…….]
“상시 관리자란 놈이 추하긴. 그래도 그렇게 나오는 걸 보면, 적색의 관리자 죽이는 데엔 개입 안 하겠다?”
[예. 그것은 확답받았습니다.]
백색의 관리자가 이런 상황에서도 나 아니라고 오리발 내미는 게, 황당하긴 했지만.
사실 각개격파하기엔 오히려 좋았다.
‘일단은 한 놈부터 확실히 없애고 보자.’
성지한은 그렇게 적색의 관리자부터 뿌리를 뽑아야겠다고 마음먹곤.
윤세아를 바라보았다.
“적색의 관리자 소멸시키고 올 테니까, 그때까지만 모자 쓰고 있어.”
“삼촌, 지금 바로 가게?”
“어. 저놈 시간 주면 또 뭘 할지 모르니까.”
전투 빼고는 다 잘한다는 적색의 관리자.
그에게 시간을 허용했다간, 또 뭔 짓거리를 할지 모른다.
지금 당장 부리를 뽑아 버려야지.
“……금방 올 거지?”
윤세아가 조심스레 묻자.
성지한은 피식 웃으며 답했다.
“당연하지.”
* * *
빛으로 가득한 공간.
거기서, 작은 불꽃이 피어오르더니.
적색의 관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위대한 후원자시여. 지금이야말로 당신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왜 쓸데없이 거기서 투성을 비추었지? 그 덕에, 빛의 장막의 모습이 드러났다. 이게 나타난 이상, 더 이상의 개입은 불가능해.]
[그게 뚫릴 줄 제가 어찌 알았겠습니까? 청색의 관리자는 임시에 불과하고. 빛의 장막은 상시 관리자의 강력한 권능 아니었습니까.]
[어쨌든, ‘이드’는 더 이상 나설 수 없다.]
적색의 관리자는 그 말을 듣고는 입꼬리를 올렸다.
[‘이드’말고, 직접 개입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건…… 안 된다.]
[흑색의 관리자 때문입니까?]
[아직은 백과 흑이 우열을 겨룰 때가 아니다.]
위대한 후원자께서 겁을 먹었군.
적색의 관리자는 백색의 반응을 보고는, 단번에 그의 본심을 파악했다.
[결국 직접적인 지원이 불가능하단 말씀이시군요.]
[……그렇다.]
[좋습니다. 그러면, 헤븐넷의 소유권이라도 넘겨주십시오.]
[그건…….]
명계를 통해, 배틀넷을 대체하는 플랫폼으로 이름 지은 ‘헤븐넷’.
아직 이게 결과물로 나온 건 없었지만.
백색의 관리자는 뭐가 아까운 건지, 이 요구에 답을 주저했다.
결국.
[이 일에 연루되었다는 증거도 없애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살아남으면, 소유권을 다시 드리지요.]
[그렇다면, 알겠다.]
적색의 관리자가 소유권을 다시 이전해 주겠단 이야기까지 하자.
번뜩……!
그제야 권리를 넘겨주었다.
붉은 거인의 이마에, 새하얀 빛이 새겨지자.
그는 만족한 듯 웃음을 지었다.
‘마지막으로 써먹을 수단은 얻어 냈군.’
백색에게서 소유권을 얻었다 한들, 청색의 관리자에겐 이길 수 없었다.
투성에 갔다 온 그는 이미 괴물이 되어 버렸으니까.
‘하지만, 꼭 전투로 이길 필요는 없지…….’
그럼에도.
적색에게는 계획이 있었다.
무신이 된 청색의 관리자에게, 저항할.
* * *
미국 워싱턴.
배틀넷의 초대장이 위치한 장소는.
이미 거대한 불꽃으로 뒤덮인 상태였다.
아무리 진화하려고 해도, 꺼지지 않는 불.
이를 일으킨 존재가 적색의 관리자임이 알려진 이후엔.
백악관을 포함하여, 워싱턴 시민 대다수가 피난을 가서 도시는 텅텅 빈 상태였다.
그렇게 이 불길의 중심부, 비석이 있는 장소에.
파앗……!
암검이 꽂히고, 성지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여기도 난리군.”
성지한은 가볍게 검을 뽑곤.
휙!
검을 허공에 몇 차례 베었다.
그러자.
스으으으…….
도시를 뒤덮었던 화마가, 급격하게 진화되기 시작했다.
이곳의 불꽃은 검흔까지 쓰지 않아도 사라질 정도로 약해서.
‘지금까진 별거 없네.’
성지한은 검을 열 번 휘둘러, 워싱턴에 번진 불길 대부분을 잡을 수 있었다.
그렇게 가볍게 진화를 끝내고 나자, 눈에 띄는 건.
붉게 변한 기념비, 배틀넷의 초대장과.
그 위에 커다랗게 떠 있는 붉은 포탈뿐이었다.
‘저 포탈…… 아까 그릇 역할을 하던 소드 펠리스같네.’
사람 수백 명은 한 번에 들어갈 것 같은, 커다란 포탈.
저 안을 향해, 사방에서 불특정한 기운이 모여들고 있었다.
이거, 아까 1억 2천만 운운하던 거랑 흡사한 힘 같은데.
성지한이 그렇게 초대장과 포탈을 살피고 있을 때.
[참 빨리 왔구나.]
붉은 포탈 안에서, 적색의 관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꽤 여유를 찾았군.”
[손님 맞이할 준비를 급히 끝났으니까.]
그러면서.
스으윽…….
붉은 포탈 안에서, 적색의 손이 튀어나왔다.
[그러니 얼른 들어오는 게 어떻겠나?]
“굳이 갈 필요 있냐?”
적색의 관리자가 뭘 해 놨을지 모르는 수상쩍은 포탈.
저 안으로 들어설 필요야 없지.
“아까처럼 베면 되지.”
성지한은 검을 바닥에 꽂았다.
태극의 문양이, 잠시 대지에 새겨지고.
푸르른 검광이 피어오르자.
포탈 안에서 적색의 관리자가 웃음소리를 내었다.
[후후…… 포탈 전체를 베려 하다니. 너답구나. 한데, 1억 2천만도 같이 죽일 셈인가?]
“1억 2천만?”
[정확히는, 1억 2514만이군. 나에게 종속되기로 한 인류의 숫자가.]
성지한은 그 말을 듣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놈 참.
혼자 죽지, 물귀신처럼 애들 다 끌고 가네.
‘기운의 흐름을 보니, 저게 거짓말은 아닌 거 같은데.’
그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적색의 관리자를 선택한 인류.
이들을 살리기 위해, 포탈에 들어가는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가.
‘……그럴 순 없지.’
그러다 일이 잘못되면.
1억을 살리려다가 인류 전체가 적색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꼴이 되겠지.
그렇다고.
그냥 베어 버리기에는, 확실히 1억이라는 숫자가 많긴 많았다.
‘다른 해결 방법은 없을까.’
그렇게 잠시 생각에 잠긴 성지한의 시선이.
포탈에서 서서히 아래 쪽으로 내려왔다.
그가 주시한 건, 배틀넷의 초대장.
인류를 배틀넷에서 탈퇴시켜서 이 난리를 일으킨 원홍이 었다.
‘……좋아.’
시도는 한번 해 봐야겠군.
스스스스…….
성지한의 등 뒤로, 황금의 수레바퀴가 떠올랐다.
〈2레벨로 회귀한 무신 518화〉
금륜적보.
성지한을 24시간 전의 상태로 되돌아가게 해 주는 황금의 수레바퀴는.
그동안 어떤 방식으로 작용되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 미지수의 능력이었다.
하나.
‘무재가 늘어나니 좀 알겠군. 응용이 가능하겠어.’
성지한은 금륜적보를 ‘배틀넷의 초대장’에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드르르륵…….
황금의 수레바퀴가, 서서히 역으로 움직였다.
그와 함께, 붉은색으로 물들었던 글자가.
원래의 색을 되찾기 시작했다.
[시간을 되돌리는 그 능력…… 초대장에 사용하는 건가.]
“그래.”
[그러면 인류는 다시 배틀넷에 소속될 텐데? 1억 2천만을 포기하고 배틀넷에서 해방되는 게 낫지 않겠나.]
“나와도 준비된 상태에서 나와야지. 안 그러면 개판 되는 걸, 네가 보여 주지 않았나.”
이미 인류 사회에서 배틀넷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상태가 되었으니.
여기서 나오려면 사전 준비가 필요했다.
그러니, 일단은.
“다시 들어간다.”
드륵. 드르르륵…….
금빛 수레바퀴가 움직이고.
초대장의 글자 색이, 빠르게 원래대로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오 몸이 급 건강해졌어.
-상태창 뜬다!
-아 GP도 그대로네 ㅠㅠㅠㅠ
-진짜 식겁했는데…… 원래대로 되돌아왔구나. 성지한 님이 뭐 하신 듯.
-이러면 눈깔 안 누른 사람이 승리자지?
-ㅇㅇ 믿음 없는 인간들 ㅉㅉㅉ
세상은, 배틀넷에 속했던 그 시절로 급속하게 되돌아오기 시작했다.
[시스템 에러 발견.]
[복구 작업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붉은 눈을 눌렀던 사람들에게는.
에러 발견이라는 메시지와 함께, 일제히 복구가 진행되었다.
그러자 금방, 힘이 약화되는 붉은 포탈.
‘1억의 연결도 이대로면 해제되겠네.’
이렇게 마지막 금륜적보를 소모한 건 아쉽긴 했지만.
그래도 적색의 관리자를 확실히 죽일 수 있다면, 쓰는 게 나았다.
그럼 이제.
‘저 포탈만 없애면 끝이군.’
성지한은 외부에서 몰려드는 기운이 끊기는 걸 확인하고는, 검을 들었다.
[이것까지 막혔구나…….]
포탈에서 적색의 관리자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만 말하고, 가라 이제.”
무극멸신武極滅神
태극마검太極魔劍
검흔劍療
파아앗!
성지한은 그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포탈을 갈라 버렸다.
하늘까지 쭉 뻗은 푸르른 검광.
그것은, 반으로 갈라진 포탈을 빠르게 안으로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적에 있어서는, 확실하게 상극의 힘을 발휘하는 검흔.
이대로 놔둬도 저 포탈은 저기에 빨려 들어가겠지만.
‘시체 한 조각도 남기질 말아야지.’
성지한은 유심히 저기서 빠져나가는 게 없는지 주시했다.
여기서 또 튀기라도 하면, 후환을 남기는 꼴이 되니.
이번에 확실히 불씨 하나도 남기지 않고 없애 버려야 했다.
그렇게 성지한이 만전의 준비를 한 채, 대기하고 있자.
스스스…….
반 갈라진 포탈에, 얼굴이 떠올랐다.
붉은 거인의 얼굴.
적색의 관리자였다.
[이건, 도저히 빠져나갈 수가 없군…….]
[청색이여. 네가 이겼다.]
반 갈라진 얼굴에서, 하나씩 목소리를 내는 상대를 보고.
‘또 뭔 소리를 하려고.’
성지한은 검을 휘둘렀지만.
[승자에게는 보상이 필요하겠지.]
[청색의 관리자에게, ‘헤븐넷’의 소유권을 양도한다.]
적색의 관리자의 ‘양도’가 더 빨랐다.
[‘헤븐넷’의 소유권을 양도받으시겠습니까?]
그러자 성지한의 눈앞에 뜨는 메시지.
그는 이를 거절하려 했지만.
[양도를 받지 않을 경우, 헤븐넷의 소유권은 ‘백색의 관리자’에게로 이전됩니다.]
거절할 시 소유권이 백색의 관리자에게 자동으로 넘어간다는 메시지가 뜨자 잠시 주춤했다.
적색과는 달리, 아직 전력이 탄탄한 백색의 관리자.
그에게 이게 넘어가면, 피곤한 상황이 나올 것 같았다.
‘……차라리 받아서 내 손으로 처리해야겠군.’
그렇게 결심한 그가 예를 누르자.
[헤븐넷이 서비스를 시작합니다.]
[플레이어 ‘성지한’이 헤븐넷의 상시 관리자로 올라섭니다.]
[기존의 시스템이 새로운 시스템으로 이전됩니다…….]
[…….]
번쩍. 번쩍.
성지한의 눈앞에, 수없이 많은 메시지창이 떠오르다 사라지고.
그의 발치를 중심으로, 새하얀 빛이 쭉 펼쳐지더니.
‘이건…….’
공간이, 원래의 세계와 완전히 분리되 었다.
[헤븐넷에 접속합니다.]
* * *
“하. 이 새낀 진짜…… 얌전히 뒤지질 않네.”
헤븐넷에 들어온 성지한은 미간을 찌푸렸다.
적색의 관리자.
참 마지막까지 참 성가신 놈이다.
‘주변 풍경은…… 천국이라기보단 지옥이군.’
헤븐넷이란 이름과는 달리, 이곳의 모습은 불지옥에 가까웠다.
땅이고 하늘이고 할 것 없이.
시뻘건 불꽃만 일렁이고 있었으니까.
‘그냥 바로다 없애 버릴까.’
이제 불만 하면 이가 갈리는 성지한이.
이 광경을 보면서 힘을 끌어 올렸을 때.
[헤븐넷의 상시 관리자로 부임했습니다.]
[관리자 권한을 획득합니다.]
[레벨이 상시 관리자의 기준에 맞게, 9999로 오릅니다.]
붉은 배경의 시스템 메시지가 빠르게 떠올랐다.
‘……9999?’
아니, 관리자는 원래 레벨 항목이 없을 텐데.
뭔 9999야?
성지한은 상태창을 열어 보았다.
이름 : 성지한
레벨 : 9999
적 : 100
청 : 999 (SSS급으로 오를 시, +731)
공허 (비활성)
영원(비활성)
잔여 포인트 : 9999
‘바뀐 게 적잖네.’
999가 가득한 능력치 창에, 비활성화된 공허와 영원까지.
성지한은 왼손을 바라보았다.
공허로 만들어 냈던 태극마검은, 헤븐넷에 들어온 이후부터 사그라들어.
청색의 검기만 피어오르고 있는 상태였다.
‘이럼 잔여 포인트로 을릴 수 있는 건 청과 적뿐인가. 한번 청부터 올려 봐야겠군.’
적은 여기서 올리기가 뭔가 꺼림칙했지만, 청이야 확실히 자신의 능력이니까.
성지한은 그리 생각하며 잔여 포인트를 청에 투자해 보았지만.
[헤븐넷의 잔여 포인트로는 청을 올릴 수 없습니다.]
청은 올릴 수 없다는 메시지만 떠올랐다.
‘이럼 결국 적만 을릴 수 있다는 건데.’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니, 더 적을 올리기 꺼려지는군.
성지한은 잔여 포인트에 대한 미련을 버리기로 마음먹곤, 검을 들었다.
공허가 봉인되어 태극마검은 사라졌지만.
‘대신 청을 활용하자.’
지이이잉……!
청광淸光이 번뜩이며, 빛의 검이 성지한의 손에 잡혔다.
그가 한 차례 검을 뻗자.
스르르르…….
불꽃이 일부 진화되며, 불에 가려졌던 장소가 드러났다.
거기서 나타난 건, 적의 일족이 사용하던 글자.
성지한도 읽을 수 있는 그 문자는.
[헤븐넷 설계도]
라고 쓰여 있었다.
아무리 읽을 수 있는 글자라 한들, 여기엔 매우 복잡한 내용을 담고 있어서.
설계도가 뭘 뜻하는지 이해를 못 해야 정상이었지만.
‘……이거. 어째 보자마자 이해가 되네.’
상시 관리자가 되어서 그런가.
성지한은 헤븐넷의 설계도를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파악할 수가 있었다.
‘결국 헤븐넷 사용법은, 적을 써서 신처럼 군림하라는 거군.’
여기서 상시 관리자로서 군림하는데 소모되는 자원은 스탯 적.
이건 지금 주어진 9999의 잔여 포인트뿐만 아니라.
여기서 계속 피어오르는 불, ‘명계’ 속에서도 얻을 수 있었다.
‘이걸 어떻게 해야, 효과적으로 없애나…….’
몇 번 검을 휘둘러보고 성지한은 깨달았다.
아직 SS등급인 스탯 청만으로는, 이 세계를 없앨 수 없다는 걸.
단순히 검을 휘두르는 것 말고 다른 좋은 방법 없나.
성지한은 잠시 생각하다가.
“시스템, 여기에 혹시 적색의 관리자가 있나?”
헤븐넷의 시스템에 물어보았다.
[저번 소유주, ‘적색의 관리자’는 명계에 스스로를 희생했습니다. 현재 그는 헤븐넷의 에너지원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래? 어쩐지 인류와의 연결점도 끊었는데, 이곳이 어떻게 유지되나 했네.”
적색의 관리자를 따르던 1억 2천만의 인류.
그들이 공급하는 에너지는 끊어 버렸건만, 헤븐넷이 어떻게 계속 유지되나 했는데.
적색의 관리자 놈이 명계에 자기마저 내던진 거였구나.
하여간 독한 놈이야.
[그의 파편은 소환할 수 있습니다. 소환하시겠습니까?]
“소환해 봐.”
[스탯 적이 50 필요합니다.]
성지한이 고개를 끄덕이자.
화르르륵……!
그의 눈앞에 불꽃이 번뜩였다.
거기서 나타난 건, 시커떻게 타오른 붉은 눈.
[왜 불렀는가.]
명계에서 에너지원으로 쓰이고 있음에도, 여전히 여유가 있는 적색의 관리자.
성지한은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조언 좀 구하려고 하는데.”
[네가…… 나한테?]
“어. 헤븐넷 파괴와 관련해서 말이야. 네가 설계했으니 네가 제일 잘 알겠지?”
[……그래서 그걸 나한테 묻겠다고?]
적색의 관리자가 당혹해하는 사이.
성지한은 시스템에 물었다.
“이놈이 진실만 말하게 하는 데엔, 적이 얼마나 필요하냐?”
[질문당 스탯 적이 100 필요합니다.]
“100?”
눈동자 소환하는 덴 50이더니, 뭔 질문 하나당 100을 쓰냐.
이러면 잔여 포인트를 써먹어야겠는데.
성지한은 상태창을 열어서, 잔여 포인트를 50 사용했다.
그러자.
화르르륵……!
사방에서 불꽃이 같이 피어오르며.
[명계의 지원을 받습니다.]
[스탯 적이 3배 더 성장합니다.]
스탯 적이 150 상승해서, 200이 되었다.
하나 성지한은 고속 성장한 능력보다.
‘이거…… 느낌이 장난 아닌데?’
스탯 적을 을렸을 때의 감각이 인상적이었다.
그 어떤 것보다, 중독될 것 같은 기분 좋은 감각.
스탯 적이 당장은 필요 없는 지금도, 능력치를 미리 올려 두고 싶을 정도였다.
“야. 적 올릴 때 느낌 왜 이래? 설계자가 대답해 봐.”
성지한의 질문에, 스탯 적이 100 사라지고.
적색의 관리자가 진실을 답했다.
[이곳에서는 스탯 적이 올라갈 때마다, 헤븐넷과 동화된다. 서버와의 일체화되는 감각은, 그 어떤 쾌락보다도 강렬하지. 한데…… 넌 멀쩡해 보이는군.]
“아니. 꽤 느낌이 강했어. 하마터면 더 올릴 뻔했다.”
[그걸 원했는데 아쉽구나.]
“너 헤븐넷은 나한테 왜 준거냐?”
[청색의 관리자가 헤븐넷의 주인이 되면, 이 세계는 보다 완전해진다. 네가 여기에 속하면 적의 상극인 청마저 흡수할 수 있게 될 테니, 설계자로서 그만한 성취는 없겠지.]
“그걸 위해 스스로를 희생할 정도로?”
[그렇다.]
즉답하는 적색의 관리자.
자신은 죽어도, 헤븐넷의 완성도만 올라가면 그걸로 족하다는 건가.
과연 상대가 얼마나 여기에 미쳐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런 너에게 헤븐넷 파괴 방법을 들을 생각하니 즐거워지는군.”
[……내가 제대로 된 답을 할 거라 생각하는가?]
“아, 적이 다 떨어졌네.”
성지한은 반항하는 적색의 관리자를 보고, 스탯 적이 떨어졌음을 깨달았다.
그가 잔여 포인트를 찍자, 적색의 관리자는 나름대로 목소리를 냈지만.
[이곳은 내 평생을 바쳐 설계한 세계다. 그걸 내 입으로 없애라니…… 차라리 네 스스로 파괴할 방법을 알아내라!]
“너 같은 전문가가 있는데, 전문가의 의견부터 들어 봐야지. 자. 빨리 말해.”
그가 만든 세계에서의, 상시 관리자의 명령엔 거역할 수가 없었다.
[……가장 빠른 방법은, 적을 9999 올리고 파괴를 명령하는 것이다.]
적을 9999로 만들라니.
그건 이쪽이 위험할 거 같은데.
“질문을 바꿔야겠군. 최대한 나에게 부작용 없이, 이 세계를 어떻게 없애지?”
[부작용 없이…… 그러려면,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상관없어. 안전이 제일이지.”
[…….]
성지한의 물음에, 그를 매섭게 노려보는 적색의 관리자.
하지만 파편에 불과한 그는, 상시 관리자의 권한을 이겨 낼 수 없었다.
[헤븐넷의 영역을 줄이기 위해서, 상시 관리자의 레벨을…… 낮춰라.]
레벨을 낮춰라.
그 방법을 알려 주는 적색의 관리자는, 그을린 눈에 핏발이 서 있었다.
“레벨 몇까지?”
[……적어도 세 자리까진 떨어져야 한다.]
“흠. 9999에서 세 자리라……. ”
그게 이 헤븐넷을 안전하게 없애는 방법이라고?
성지한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좋아. 한번 해 보지.”
설계자의 어드바이스에 한 번 따라보기로 했다.
어차피 레벨도 9999니까.
좀 낮춰 보다가, 영역이 안 줄면 다른 방법을 모색하지 뭐.
그렇게 시작한, 레벨 다운그레이드는.
예상한 것보다 오랜 시간을 소요했다.
* * *
[레벨이 2로 떨어집니다.]
“……결국 여기까지 왔군.”
분명 적색의 관리자는 레벨이 세 자리 숫자엔 도달해야, 파괴될 거라 했지만.
‘헤븐넷, 생각보다 끈질겼지.’
레벨이 한 자리 수.
그것도 2까지 떨어지고 나서야, 해결 방법이 나왔다.
성지한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예전과는 달리, 불길 한 점 보이지 않은 어두운 공간.
여기서 유일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 건.
그의 눈앞에서 둥둥 뜨고 있는, 붉은 빛의 구체뿐이었다.
‘헤븐넷의 영역…… 저기서 더 줄어들진 않는다.’
레벨 1이 된다 한들, 영역의 축소는 더 진행되지 않을 터.
이제는, 저걸 끝낼 때다.
스스스…….
성지한의 왼손에 푸른빛의 아지랑이 가피어오르고.
거기서 만들어진 청광의 검은.
붉은 구체를, 바로 찔렀다.
그러자.
스스스스…….
헤븐넷이 허물어지며, 사방으로 붉은 빛이 퍼지기 시작했다.
한 번의 찌르기에 사라지길 바랐건만, 반항이 심한 헤븐넷.
저렇게 빛이 퍼지다가, 파편이라도도 망치면 골치 아프다.
‘그렇다면…….’
성지한의 눈이 번뜩이고.
무극멸신武極滅神
진화봉옥鎭火封獄
청홍靑紅
청검의 안쪽에서, 적의 기운이 발현했다.
그러자 검의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는 붉은 구체의 빛.
슈우우우…….
헤븐넷의 힘을 안으로 갈무리한 청검은.
외곽의 푸른빛과.
안쪽의 붉은색이 확연히 대비되는 청홍의 형태로 변했다.
“……됐군.”
후우.
성지한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9999에서 2레벨로 떨어질 때까지, 이게 해결이 되나 싶었는데.
결국, 헤븐넷을 검 안에 가두는 데 성공한 것이다.
이제 이 상태에서 청으로 계속 적을 소멸시키면, 적색의 유산도 끝이 나겠지.
“그럼…… 돌아갈까.”
레벨을 낮추며 헤븐넷을 없애는 작업이 체감상 꽤 오래 걸리긴 했지만…….
‘아무리 오래 걸려 봤자 몇 년쯤 지났을 테니, 별일 없겠지…….’
그래.
세월이 아무리 오래 지나 봤자, 몇 년이다.
성지한은 그렇게 생각하며, 귀환을 시작했다.
〈2레벨로 회귀한 무신 519화〉
성지한은 주변을 살펴보았다.
헤븐넷이 사라지니, 완연히 어둠에 물든 세계.
이곳은, 관리자급 정도 되는 자신이 아니라면 금방 소멸할 정도로 각종 기운이 난립하며, 어지럽게 흐르고 있었다.
‘분명히 헤븐넷이 설치된 건, 워싱턴 근처였단 말이지.’
성지한은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어둠 속 공간에서 이동했다.
등 뒤로 청홍검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라, 전력을 다해 움직일 순 없었지만.
그래도 초월자에 걸맞은 속도를 내며, 성지한은 전진해 나갔다.
그렇게 얼마나 나아갔을까.
번쩍……!
어둠이 가득하던 공간에서, 급작스럽게 빛이 들어왔다.
빛과 어둠.
완전히 분리된 구역 중, 어둠의 영역에 속한 성지한은.
빛에 위치한 건물을 보며 눈을 빛냈다.
‘건물에 영어가 보이네.’
여기서 보기에도 관리가 안 되어 보이는 크고 작은 빌딩.
하지만 거기서 보이는 간판의 문자는, 분명 미국에서 사용되는 언어.
영어로 쓰여 있었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했네.’
저벅. 저벅.
성지한은 빛과 어둠이 확연하게 갈리는 경계로 다가갔다.
그리고 이를 넘으려는 순간.
[배틀넷 시스템이 ‘이레귤러’를 감지합니다.]
지이이잉……!
그의 앞을, 메시지창이 가로막았다.
‘어쩐지 일이 쉽게 풀린다 했다.’
그냥 걸어서 귀환하나 했더니, 세상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리진 않나.
성지한은 일단 걸음을 멈추고, 메시지에서 뭐가 뜨는지 지켜보았다.
[추방된 관리자, ‘청색의 관리자’와 플레이어의 정보가 일부 일치합니다.]
[배틀넷 입장을 불허합니다.]
‘뭐?’
아니, 내가 왜추방자야.
성지한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배틀넷의 경쟁 플랫폼인 헤븐넷을, 혼신을 다해 막아 줬구만.
기존 시스템은 자신을 범죄자 취급하고 있었다.
[정밀검사를 시작합니다.]
[레벨…… 2로 감지됩니다. 청색의 관리자와 일치하는 점이 없습니다.]
[스탯…… ‘청’이 크게 감지됩니다. 청색의 관리자와 99퍼센트 일치합니다.]
[칭호…… ‘무신’이 감지됩니다. 청색의 관리자와 100퍼센트 일치합니다.]
그러면서 뜨기 시작하는 메시지창에선.
성지한을 청색의 관리자 정보와 맞춰 보는 내용이 나타나고 있었다.
레벨을 제외하곤, 죄다 일치하는 매칭 정보.
삐빅, 삐빅…….
매칭을 하던 메시지창에서 경고음이 울리더니.
[검사 결과, 플레이어는 청색의 관리자와 98퍼센트 일치합니다.]
98퍼센트 일치한단 결론이 나왔다.
‘100퍼센트가 아니네. 레벨 2인 게 그렇게 컸나?’
레벨이 검사에 있어서 나름 비중을 차지하네.
성지한은 그리 생각하며, 이 시스템이 뭔 소리 하나 기다렸다.
그러자.
지이이잉…….
새하얀 배경의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입장이 불가능합니다.]
[플레이어가 배틀넷에 입장하길 원한다면, 청색의 관리자와의 일치도를 낮추십시오.]
[스탯 ‘청’을 초기화할 것을 권장합니다.]
[스탯 ‘적’을 초기화할 것을 권장합니다.]
‘스탯 초기화?’
성지한은 코웃음을 쳤다.
미쳤다고 그걸 하나.
레벨이 2로 떨어진 거야, 어떻게 보면 다시 쉽게 재성장해서 잔여 포인트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었지만.
스탯 초기화는 눈에 흙이 들어와도 할 수 없었다.
“초기화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는데.”
스윽.
성지한은 등 뒤에서 둥둥 떠올라 있는 청홍검을 쥐었다.
이것은 비록 헤븐넷을 봉인하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검으로서의 위력 또한, 강력했으니까.
‘어쩌면 태극마검과 비교해도, 이게 더 뛰어날지 모르지.’
푹!
성지한은 청홍을 들어, 새하얀 메시지창을 꿰뚫었다.
그러자 검 끝은, 메시지창은 물론.
빛과 어둠의 경계마저도 대번에 뚫어 버렸다.
지지직……!
부서져서 빛으로 변해 버린 메시지창과, 금이 가기 시작한 세계.
‘한 번 더 찌르면 들어갈 수 있겠군.’
스으윽.
청홍을 뽑아낸 성지한이, 이를 다시 찌르려 할 때.
툭, 툭……!
균열이 간 저 너머의 세계 쪽에서, 파열음이 들려왔다.
그리고.
세계의 일부가 보랏빛으로 물든다 싶더니.
슉!
모자 하나가, 그 공간을 뚫고 나타났다.
‘저건…….’
아레나의 주인이 지닌 모자잖아?
성지한의 눈이 크게 떠졌을 때.
스으으으…….
모자에서 공허의 기운이 퍼지나 싶더니.
“차, 찾았다……!! 삼촌!!”
눈물을 글씽이는 윤세아가 모습을 드러내.
그를 꼭 껴안았다.
* * *
“진짜,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성지한은 자신의 품 안에서 눈물을 글썽이는 윤세아를 보며 그녀 등을 두드려 주었다.
“너 이러는 거 보니, 시간 좀 지났나 보네.”
그 말에, 얼굴을 든 윤세아가 입술을 베죽 내밀었다.
“좀? 삼촌 사라진 지 5년이 넘었어!”
“……5년이나 지났다고?”
5년이라니.
성지한은 두 눈을 살짝 크게 떴다.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지났는데?
레벨을 다운하고, 헤븐넷의 영역을 줄이는 작업이 꽤 시간을 소요하긴 했지만.
그래도 5년이나 지났을 줄은 몰랐다.
“그동안 별일은 없었고?”
“별일…….”
성지한의 물음에, 윤세아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안 그래도 모자에서 나타날 때만 해도, 얼굴이 수척해 보이던 그녀였는데.
저렇게 얼굴색이 변하니.
뭔 일이 생겨도 확실히 생긴 것 같았다.
“왜, 설마 누나한테 무슨 일이 있거나 해?”
“엄마? 엄마는 잘 지내. 삼촌이 문제지.”
“나?”
아니.
5년 동안 갇혀 있었는데, 나한테 무슨 문제가 생겨?
성지한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어…… 여기서 말하긴 좀 장소가 안 좋은데. 집에 일단 갈까?”
윤세아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그리 말했다.
“그래. 일단 귀가하자.”
“응.”
그녀가 모자를 벗자.
슈우우우……!
중절모의 안쪽 공간에서, 검은 소용돌이가 치더니.
보랏빛 포탈이 생겨났다.
‘이거…… 공허 양이 상당한데.’
가벼운 동작 속에 담긴 힘을 보고, 성지한의 두 눈에 이채가 담겼다.
“너 좀 세졌다?”
“삼촌 구하려고 좀 노력했거든.”
“벌써 아레나의 주인 된 거야?”
“아니, 아직은. 근데 거의 된 거나 다름없어.”
“그래 보인다. 공허의 기운을 보니까.”
성지한은 그렇게 대화하면서. 포탈에 발걸음을 들이밀었다.
그러자, 금방 익숙한 거실의 풍경이 드러났다.
“오랜만이구만.”
5년 만에 귀가한 집.
사실 헤븐넷을 봉인하느라 바빠서, 그렇게 시간이 지났는지도 모르긴 했지만.
어쨌든 오랜만에 온 거실의 모습은 그에게 반가움을 안겨 주었다.
그때.
화르르륵……!
청홍의 내부에서, 붉은빛이 번뜩이더니.
강렬한 열기가 주변에 퍼지기 시작했다.
‘아, 이거 들고 일상생활은 못 하겠네.’
헤븐넷의 반항으로, 때때로 엄청난 열기를 쁨어내는 청홍.
이걸 들고 다니면서 일상생활을 하는 건 무리였다.
성지한은 청홍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다.
‘일단 몸에 넣어 둬야겠군.’
검을 들어 목 뒤로 가져다 대었다.
치이이익…….
그러자, 그의 목과 등에 청홍이 스며들더니.
그의 등에 검 형태의 문신이 새겨졌다.
‘이렇게 놔두다가, 안전한 데서 꺼내놔야겠네.’
성지한이 그렇게 청홍의 처리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을 때.
휘익!
윤세아가 뒤늦게 도착했다.
“윽, 삼촌…… 그 검 대체 뭐야? 포탈이 중간에 끊겨서, 다시 열었어.”
“좀 센 칼이지.”
“좀이 아닌 거 같은데…… 어, 목에 아까 없던 문신이 생겼네? 게다가 봉인한 거야?”
“어, 가만히 놔두면 집 녹아내리겠더라고.”
“아하.”
윤세아는 그을린 집안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아까 말한 건 뭐였어?”
“삼촌한테 문제 생겼다는 거?”
“어, 당사자도 모르는 문제는 뭐냐 대체.”
“그게…… 어디부터 설명해야 하지…….”
성지한에게 이걸 어떻게 전달해야 하나 고민하던 그녀는.
“아, 삼촌. 창밖 한번 봐볼래? 마침 밤이네.”
손가락으로 거실 창밖을 가리켰다.
“웬 창밖?”
“보면 변화가 딱 느껴질 거야. 내가 그동안 생각 정리 좀 하고 있을게.”
대체 무슨 문제가 생겼기에.
생각을 정리할 시간까지 필요한 거야?
성지한은 피식 웃곤, 거실 창으로 다가갔다.
매번 성지한이 현관문 대신 드나들던 거실 창의 위편에는.
커다란 보름달이 떠 있었다.
뭐 도시의 풍경이라도 달라진 건가.
스으윽.
성지한은 고개를 내밀어, 창 아래를 바라보았지만.
‘뭐, 큰 변화는 없는 거 같은데.’
서울의 야경은, 엄청난 변화를 체감하기는 힘들었다.
그냥 대도신데.
‘검흔이 남아 있는 걸 이야기하는 건 아닐 테고.’
땅에서 하늘까지 쭉 뻗은 푸른 빛줄기.
성지한이 적색의 관리자를 베었을 때 사용했던 검흔은, 5년이 지나도록 영롱하게 빛이 나고 있었지만.
이게 5년간의 변화를 느끼게 해 줄 것 같진 않았다.
그럼 대체 뭘 보라는 거지?
성지한이 자신이 놓친 게 있나 다시 한번 세상을 둘러볼 때.
번쩍……!
하늘 위, 새하얀 보름달에서 갑자기 빛이 나더니.
“……뭐냐 저거?”
초록빛의 나무 형상이 나타났다.
“봤어, 삼촌?”
“어. 보름달에 왜 나무가 튀어나오냐?”
“그게 말이지…… 지구가, 세계수 연합의 식민지가 되어 버렸거든.”
“……뭐? 식민지?”
* * *
성지한이 사라진 5년 동안.
브론즈 리그에 속한 인류는, 승승장구했다.
“3년의 정규시즌 기간 동안, 우리는 결국 브론즈 리그를 1위로 마무리했어.”
“세계수 연합에게도 안 밀리고?”
“응. 확실히 객관적으론 그들이 인류보다 강했지만, 이상하게 우리한테 많이 양보를 해 줬거든. 삼촌이 없는데도.”
세계수 연합의 양보로 랭킹 1위를 지킨 인류.
이때만 해도, 인류의 자신감은 절정에 달해 있었다.
그리고 정규시즌이 종료된 후, 열린 플레이오프에서.
“세계수 연합 쪽에서 날 밴하지 않아서, 우린 모든 경기를 3:0으로 압승했지.”
“널 아예 밴하지 않았다고?”
“응. 꼭, 3:0으로 이기라고 권하는 것 같았어.”
아레나의 주인 예정자가 된 윤세아.
그녀의 힘은, 브론즈 리그 수준에서 감당할 정도가 아니었다.
당연히 상대 팀에서는, 무조건 밴을 하고 들어가야 정상이었지만.
세계수 연합은 그녀의 강력함을 잘 알고 있음에도, 그녀를 항상 풀어 주었다.
그렇게 정규시즌 1위, 플레이오프에 서 압승을 거둔 인류에게.
“배틀넷을 탈퇴할 건지. 아니면 실버 리그로 올라갈 건지 선택하라는 옵션이 떴어.”
“그래? 분명, 브론즈 리그에서 3번 우승을 해야 그 기회가 주어진다고 들었는데.”
“우리도 그런 줄 알았는데…… ‘플레이오프 무패우승’ 업적을 달성하니까. 미리 고르게 해 주더라.”
성지한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세계수 연합이 일부러 인류에게 양보한 이유가 이거였나.’
탈퇴, 아니면 승급.
이 선택지를 제시하기 위해서.
세계수 연합은 일부러 패배를 자초한 거군.
“거기서 인류는 승급을 고른 건가.”
“응…… 적색의 관리자가 강림했을 때, 사람들이 겪어 봤잖아? 최하급 종으로 다시 돌아가는 게, 어떤 느낌인지.”
배틀넷 리그에서 빌빌거렸으면 모를까.
브론즈 리그에서 압도적인 성적을 거둔 인류는, 자신감이 넘쳤다.
우리들은 배틀넷에서 이 혜택을 누리면서, 잘 순항할 수 있을 거라고.
그리고 그 자신감은.
“실버 리그 올라오자마자, 인류는 완전히 깨졌어.”
“그래?”
“응, 난 무조건 밴당하고, 나머지 플레이어들의 실력은 실버 리그 평균에 미치지 못했거든.”
압도적 성적을 거두며, 올라왔던 실버 리그.
하나 그곳은, 인류의 예상보다도 훨씬 험악한 곳이었다.
“1년간 1승 거뒀나…….”
“그럼 꼴등이네.”
“응, 압도적인 리그 최하위였어. 이대로면, 종족 섬멸을 당할 처지였지…….”
실버 리그에서 최하위가 된다 해도.
브론즈로 떨어지는 게 아니라, 종족 섬멸을 당하는 배틀넷 시스템.
인류는 일찍 올라온 대가를, 톡톡히 치를 판이었다.
“그걸 녹색의 관리자가 구해 준 거냐? 대신 그 대가로 여길 식민지로 만든 거고.”
“맞아.”
“네 말을 듣고 보면, 세계수 연합이 여길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계획한 거네.”
“응. 난 그렇게 의심하고 있어.”
이그드라실.
청색의 관리자가 된 이후엔 꽤 협조적인 태도를 많이 취하더니.
자신이 자리를 비운 동안, 이렇게 지구를 식민지로 만들어 버릴 줄은 몰랐네.
“그래서 내가 문제라고 한 거야? 인류가 식민지 돼서?”
“……아니. 세계수 연합 쪽에서 한제 안이 문제야. 그들은 인류가 식민지로 편입하려면 믿음부터 버리라고 했거든.”
“뭔 믿음?”
“청색의 관리자 ‘성지한’에 대한 믿음.”
“뭔 종교냐.”
성지한이 ‘믿음’ 이야기를 듣고 황당해하자.
“종교였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윤세아는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
“……어쨌든 인류는 살기 위해 이를 받아들였고. 청색의 관리자 성지한은, ‘기록말살형’에 처해졌어.”
“기록말살형?”
“봐 봐.”
거실에 손을 뻗자, 날아오는 핸드폰.
스옥.
잠금을 해제한 그녀는, 포탈 사이트에서 ‘성지한’의 이름을 쳤다.
그러자.
동명이인의 검색기록만 뜰 뿐.
성지한과 관련된 정보는, 단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없네.”
“응, 인터넷상의 기록뿐만이 아니야. 사람들에게서도…… 삼촌은 완전히 잊혔어.”
“……그래?”
“응…… 인류는 살기 위해, 삼촌을 버린 거야.”
윤세아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저 청색의 검흔도, 이제는 이해할 수 없는 자연현상으로 치부될 뿐이고. 인류 종을 여기까지 진화시킨 공로는, 녹색의 관리자가 가져가 버렸지.”
녹색의 관리자가 제시한 기록말살형 .
이건, 단순히 기록만 사라지는 게 아니라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도 성지한을 잊게 한 것이었나.
그래도.
“세아, 넌 날 기억하는데?”
“……난 엄마랑 같이 열 받아서 공허로 아예 소속 옮겼거든. 이제 인류 소속 아니야.”
“누나도? 그럼 별문제 없네.”
“아니, 삼촌. 문제가 아니라니……! 사람들이 다 잊어버렸다니까? 자기들 살려고!”
윤세아는 자기가 더 화를 냈지만.
“왜, 가족들만 기억하면 됐지.”
성지한은 그런 그녀의 반응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오히려 맛집 가긴 편하겠다 야. 하도 유명해서 어딜 못 다녔는데.”
“……뭔 맛집이야 진짜. 밥도 안 먹으면서.”
“내게는 이름값의 가치가 그 정도라는 거지.”
성지한은 그리 대답하면서.
조금 전 메시지들을 떠올렸다.
-배틀넷 시스템이 ‘이레귤러’를 감지합니다.
-추방된 관리자, ‘청색의 관리자’와 플레이어의 정보가 일부 일치합니다.
이레귤러. 추방된 관리자.
거기에 기록말살형까지.
지난 5년간, 인류의 패망과는 별개로.
자신의 처우를 둘러싸고도, 관리자 차원에서 많은 일이 벌어진 것 같았다.
‘일단은, 판 돌아가는 걸 파악해야겠네.’
그리 생각한 성지한은, 윤세아에게 손을 혼들었다.
“나 잠깐 밖에 갔다 올게.”
“응…… 어, 어디 가게?”
“세상구경.”
휙!
창가에서 점프해, 강남 시내로 내려왔다.
그러자, 그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잠깐 쏠렸지만.
“뭐, 뭐야 저 사람……. ”
“저 건물에서 점프했지…… 저 높이에서 착지가 가능해?”
“에이, 관심 꺼. 플레이어인가 보지.”
예전처럼, 성지한이 착지했다고 모두가 관심을 보이던 것과는 달리.
지금은, 일부만 저 사람 신기하단 반응을 보일 뿐.
그가 ‘성지한’이라는 건 아무도 인지하질 못하고 있었다.
“진짜, 아무도 못 알아보는구나…….”
이거, 뭔가 시원섭섭한데.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슬쩍 웃은 성지한은.
저벅. 저벅.
인파 속으로 자연스레 섞여 들어갔다.
그렇게 그는.
5년 만에 돌아온 지구에서, 무명無名이 되었다.
(2레벨로 회귀한무신 1부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