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aragon's Territory RAW novel - Chapter (256)
무적지경-256화(256/257)
무적지경 256화
“언제 눈치챘느냐?”
몸을 돌려 제자를 쳐다보면서,
천식의 사부는 물었다.
천식은 여전한 표정의.
여전한 형상의.
여전한 기세의 사부에게서 반가움 비슷한 것을 느끼는 스스로에게 어처구니 없음을 느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사랑이 필요하다! 이런 소리를 듣고서 그게 사부인 걸 눈치채지 못했다면 그거야 말로 제자의 자격이 없는 꼴 아니겠습니까?”
“음, 역시 그런가. 그게 좀 강하긴 했겠지.”
“온전한 제 자의식만으론 그런 터무니없는 결론 못 내렸을 테니까요.”
“그것이 연륜의 위대함인 것이지.”
“연륜…하기야 연륜으로 보자면 이미 강호제일에 가까우시겠군요.”
사부의 답에 어이없어 하면서,
천식은 어쩔 수 없어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사랑이 필요하다!
사랑이 결단하게 하고,
결단이 이해에 이르도록 한다.
천식 혼자였다면 도저히 도달하지 못했을 논리의 도약이다. 이미 어지간한 대종사를 씹어먹는 수준까지 이른 천식의 무리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도약은 무학의 정점은 물론, 삶의 여러 굴곡까지도 모조리 겪은 뒤에야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을 테지?”
“뭐 여러가지 있습니다.”
“형월을 이뤘으니 답해주마.”
형월이라.
사부가 그것을 인정한다고 하는 말을 듣는 순간, 천식은 진정으로 자신이 형월을 이뤘다는 걸 느꼈고, 그 때문에 사부에 대해 여러 감정을 품었지만, 결국 자신이 사부를 사부로서 존중하고 있었다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부를 만나면 꼭 하고 싶었던 질문을 주저없이 꺼냈다.
“천마와는 어떤 관계입니까?”
“천마와는…친구였다.”
“친구?”
꽤나 파격적인 답이 돌아올지 모른다고 생각은 했다.
하지만 친구라니, 생각했던 것보다 더 파격적이다.
사부는 고개를 흔들면서 말했다.
“아니, 그걸 친구라고 할 수 있을지는, 어렵군. 하지만 역시 친구라는 말이 우리의 관계에 가장 어울린다고 보인다. 처음 우리가 만난 건 정사대전이 한창이던 시절이었지. 성상은 무림이라는 힘을 법으로 다스릴 수 있게 하는 최소한의 장치였다만, 그것이 황궁에 갇혀 있기만 해서야 결국 무너질 거라 생각했다.”
“이해합니다.”
천식이 천하에 나와 경험한 것은 방대하고 다양하다. 사부의 무리는 압도적이지만 고여 있다면 썩어 뒤쳐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나는 궁을 나와 천마를 상대로 비무를 청했다. 뭐, 그냥 일방적으로 습격한 거였지만 말이야.”
“그리고 이겼군요.”
“그렇다. 이겼지. 하지만 뭐, 또 압도하진 못했다. 불과 반초 차이 정도? 천마는 어처구니 없어 하면서도 껄껄 웃었고, 나도 그 녀석의 성격과 힘이 마음에 들어 한동안 사귀게 됐다. 우리는 늘상 너를 죽이는 건 나라면서 목 간수 잘하라고 떠들곤 했지. 흠, 생각해 보니 역시 시건방진게 마음에 안 드는 놈이야.”
“제법 괜찮은 사이였군요.”
서로 틱틱대면서도 술잔이라도 나눴을 생각을 하니 당숙군이 생각나서 웃게 된다. 정말 사이가 나빴다면 아예 대면조차 하지 않았겠지. 한데 이야기를 듣는 한에서는 천마도 제법 대범한 구석이 있던 모양이다. 자기 목숨을 뺏을지도 모른다 싶던 위인을 그리 쉽게 허물없이 대한다니.
거기서 잠시 사부는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말했다.
“…하여간 그러다 죽었다. 배신 때문이었다지? 생각해 보건데 그 놈이 뒤진데는 내 책임도 상당히 있던 것 같다. 생사마란 놈이 일을 벌인 것도 그렇지만, 그런 놈이 벌인 일 때문에 천마랍시고 깝치던 게 죽은 건 역시 나와 싸우면서 당한 부상이 제법 깊었다는 뜻이겠지.”
“……”
제법,
무거운 죄책감 같은 것이 깔린 말이라고 천식은 생각했다.
하기는 생사마가 말하기를 천마는 졌기에 대체되어야 했다고 했다.
천마는 또한 패배로 인한 부상으로 대체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친우로 여겼을 이에 대한 이중의 책임이…
그에게는 있는 것이다.
“한데 녀석이 살아있을 적 우리는 한 가지 약조를 했다. 천마놈에게 자식이 생기면 내가 그 아이들의 후견인까지는 못되도, 세상의 풍파에서 비껴난 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자는 게 그 내용이었지.”
“그게 수천룡과 성상에게 말했던 천마의 혈족이 천하에 해를 끼치지 못하게 할 테니 그들에게 간섭하지도 말아 달라는 요청이었군요.”
천식이 기다렸다는 듯이 되물었고,
“그런 얘기까지 흘러 들어갔냐? 뭐, 맞긴 하다.”
손쉽게, 사부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랬나.
천식은 허탈하게 마음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수천룡과 황제로부터 그가 전해들은 정보는 이러하다.
사부가 천마의 혈족에 대해 손대지 말 것은 황궁에 요구했다는 것이다. 수천룡은 때문에 죽어가면서 성상의 배신자가 결국 저주받은 피로 끔찍한 괴물을 만들었다며 사부를 증오하는 말을 남겼다.
그 말을 듣고 천식은 혹시나 싶어 자신의 신세에 대해 조사하기 위해 정사대전의 과거 기록을 뒤졌던 것이고…
우습게도 도리어 십연걸이 천마의 후예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러니 혹시나 자신이 천마의 후예인가 하는 생각은 터무니없던 걸로 확인된 셈이다.
‘내 출신 따위 이제와서 별 의미도 없지만 말이야.’
천식은 약간은 시원섭섭하게 생각을 정리하면서 이어서 생겨난 의문을 입에 담았다.
“한데 그런 것 치고는 십연걸의 상황은…”
그렇다.
사부가 관찰했던 것 치고 그의 입장은 딱히 순탄히 풀리지 않았다.
심지어 생사마에게 잡혀 인신의 그릇으로 쓰이기까지 했고.
“나는 그저 멀리서 살펴보며 천마의 피붙이들이 남의 해꼬지나 당하지 않으며 살도록 하는데서 그쳤을 뿐이다. 맹의 놈들이 그들을 해꼬지 하려 들었다면 그야 내가 처단했겠지만, 놈들도 딱히 손대고 싶은 기색은 아니어서 나도 그냥 놔둔 거였지. 십연걸의 경우는…글쎄, 신분을 완전히 씻고서 자신의 재능을 발휘한다면 그건 그냥 좋은 일 아니겠느냐? 마인이 되어 복수하겠다는 것도 아닌데 말릴 이유가 없는 것이지.”
“그렇긴, 하군요.”
천식은 사부의 생각에 동의했다.
복수를 하겠다는 것도 아닌데 십연걸이 무학을 익히는 건 사부의 입장에서 보자면 말릴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앞으로 그 혈족을 영구히 지켜 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도리어 중원 무림의 일원이 되어 당당한 자기 세력을 구가하게 된다면 오히려 우정에서 비롯된 책무를 다하게 된 셈이라 여길 수 있겠지.
“그리고 내게는 그보다 훨씬 중요한 일이 있었다.”
“어떤?”
“사대마인을 처단하는 것이었다.”
“…그렇군요. 천마의 혈족이 안전하려면…”
천식은 즉각 이해했다.
천마의 후예들이 안전하기 위해서는, 사대마인의 처단이 최우선이다. 씁쓸한 듯이 자신의 턱을 매만지다가, 사부는 말을 이었다.
“복수심…도 조금은 있었던 것 같군. 어쨌거나 친구 비슷한 놈을 죽인 것들이다. 최소한 목숨으로 값을 치뤄야지.”
“……”
이제까지 장난스럽던 말의 밑바닥에 도사리는 분노와 슬픔이, 그 거대한 덩어리를 슬쩍 드러내놓은 듯한 느낌이었다.
“뭐 사대마인이라 해봐야 독마놈은 빙궁에 결박된 신세라 급할 게 없었고, 혈마는 소림에서 데려가 쉬이 손쓰기 어려웠다만, 광마는 제법 급했지. 언제 터질지 모를 폭탄 같은 놈이라 급히 제거했다. 하지만 제일 문제인건 역시 생사마였지.”
“네. 생사마는 무섭지요.”
생사마는 무섭다.
천하의 모든 안건을 뒤로 할 만큼.
실제로 생사마는 사부의 추적에도 불구하고 결국 뜻하는 바를 거의 모두 이뤘다. 그의 실수라면, 천마를 쓰러뜨린 자는 그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강했다는 점 뿐이다.
적의 힘을 제대로 가늠해 다시 시작했더라면 어쩌면…
생사마는 그 정도의 괴물이다.
“솔직히 일갑자나 못 찾을 거라곤 생각을 못 했다. 이리저리 함정도 설치해서 기어나오도록 유도도 해 봤는데 씨알도 안 먹히더라고.”
“혹시 광마의 비급이?”
문득,
스쳐지나가는 생각이 있어서 천식이 물었고,
사부는 코웃음 치며 답했다.
“그래. 내가 아니면 누가 그걸 가지고 있겠냐. 적당히 더러운 새끼 하나 골라 읽히고 무림에 내보냈지. 그래도 안 걸리더라고. 덕분에 광마하고 혈마 잡은 게 고작이었다.”
“역시, 혈마를 친 건 사부였습니까.”
“그 새끼 중노릇 하면서 좀 많이 변한 것 같은데,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핏값은 핏값으로 갚아야 하는 법이다. 그 놈도 자신의 운명을 차분히 받아들인 것 같지만 말이야.”
“…그렇게 된 거군요.”
천식은 혀를 찼다.
혈마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당혹스러우면서도 대체 누가…라고 생각은 했는데,
과거의 은원이 이렇게 얽혀 있다면 납득하게 된다.
다만 혈마 개인에 대해서 천식은 좋은 감정을 품고 있었기에 사부의 손에 죽었다는 건, 역시 안타깝다. 그러나 천식이 개입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뭐 대충 궁금한 건 다 풀렸냐?”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궁금한데…”
여기서 일단 이야기를 정리하려던 천식은 퍼뜩 떠오르는 게 있어 말을 이었다.
“뭐가 말이냐?”
“저는 무슨 체질입니까?”
“체질?”
뭔 개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사부는 천식을 바라봤다.
하지만 천식은 개소리하려고 이런 말을 꺼낸 게 아니다.
“그 뭐 구음절맥 이런 거 있지 않습니까? 그런 부분에서 특별한 게 있어서 저를 제자로 들이신 거 아닙니까?”
“아닌데.”
아주 무감정하게 사부의 답이 돌아왔고,
천식은 오히려 당황했다.
그가 갑자기 체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건 당연 그만한 연유가 있다.
“아니 무슨…혈마유가 제 몸에서 아무 문제없이 용해가 되던게, 그게 제 체질 때문이 아니라고요?”
“혈마유? 생사마 낚으려고 강호에 던졌더니 네놈이 홀라당 처먹은 그거 말이지?”
“……”
천식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머릿속은 폭풍우였다.
아니 그게 사부가 흘린 거였어?
생각해 보면 사부 정도 외에는 출처가 없는 거 같기도 한데…
그럼 거기 얽혀서 강호에 출두했던 나는 도대체? 아니 그 전에 강호에 출두하고서 사부한테 숨으려 들었던 그 노력들은 도대체?!
사부가 쐐기를 박았다.
“나한테 숨는다고 여러모로 애쓴거 같다만 쓸데없는 짓이었다.”
“……”
그랬던가!
부처님 손바닥 안 꼴이었던가!
어이가 없어서 화도 나지 않을 지경이다.
눈앞이 핑 도는 느낌을 진정시키기 위해 꽤나 시간을 들여서 심호흡을 하고서, 천식은 그제서야 다시 본론으로 돌아갔다.
“…하여간 그럼 그건 대체?”
혈마유는 비밀이 많다.
천마의 내단이라는 중요한 물건이 둘이나 있는 것도 그렇고,
그것을 용해해 사용할 수 있는 조건에 대해서도 그렇고.
하여간 중요한건, 그것은 십연걸과 천식의 몸에서 용해됐다는 점이다. 십연걸은 천마의 후예니까 그렇다 치는데, 천식은 왜?
이것이 천식이 자신이 혹여 대단히 특별한 체질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된 이유다. 사실 성상쯤 되는 사람이 그런 자질을 보지 않고 제자를 택할 리도 없고 말이다.
“…혈마유는 본래 천마를 위한 영약이었다.”
“생사마는 천마의 내단이라던데요.”
“그건 두 번째 만든 물건의 이야기고, 첫 번째는 단순하게 아주 강력한…영약이었다. 그도 그럴게 나하고 싸우고 치료하기 위해 개발된 거였거든. 생각해 봐라. 배신을 획책할 수 있을 지경까지 가려면 천마의 부상이 어느 정도인지를 가늠할 수 있는 놈이 있어야 할 거고, 부상의 정도를 알려면 치료를 위해 직접 진단하는 새끼가 있어야 할 거 아니냐. 그게 생사마였던 거지.”
“…그렇군요.”
일이 그렇게 되는 것인가…
세상 인과의 신묘함을 다시금 느끼면서 천식은 고개를 끄덕였고, 그리고 이것이 역시 답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천식은 물음을 반복했다.
“하여간 그게 왜 제 몸속에서는 그렇게 쉽게 녹은 겁니까?”
“……”
사부는 답하지 않았다.
이미 답했다는 듯이.
천식은 의아해 하다가,
어, 하고 놀랐다.
이거 내가 설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