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layer who hides his past RAW novel - Chapter 517
◈ 518화. 천적과 천직 (2)
기세가 급변했다.
“키치.”
“듣고 있어, 뚱땡이.”
“있잖아. 그 이번 내기는 뒤로 미루는 게 어때?”
천하의 락키드가 한 발짝 무르게 할 정도로.
“뭐, 안 될 거야 없지.”
슥.
짧게 쳐냈던 머리카락은 자라 어느새 어깨까지 닿았다.
목덜미를 건드리는 그 머리칼이 거슬리기 시작했다.
사선(死線)을 숱하게 넘어온 감각이 말하고 있었다.
‘여유를 부릴 상대가 아니란 거겠지.’
질끈.
키치는 풀었던 머리를 묶었다.
스릉.
비수가 손에서 빠져나가지 않게 역수로 치켜세웠다.
반짝.
날 끝은 여전히 빛을 잃지 않았다.
악크샨의 유물, [용맹의 기름].
악마를 베어낼 때 공격력을 대폭 상승시켜 주는 효과.
비수는 여전히 기름을 머금고 있었지만.
“저래선 닿을 수나 있을까.”
본능에 따라 날뛰던 녀석을 통제할 기수가 생겼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저 녀석 또한 악마라는 거겠지.
키치가 신호했다.
“울프, 헤르키오라, 알카리!”
소수 정예.
그것도 모자라 적게는 혼자, 많아 봤자 둘이서 숱한 임무를 수행했던 그림자 용병단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협공은 모든 면에서 완벽했다.
철컥.
울프의 은제 볼트가 악룡을 향해 쏘아진 순간. 유일한 마법사, 헤르키오라가 마력으로 파괴력을 더했고, 알카리가 그 일격을 숨기기 위해 포션병을 내던졌다.
쨍그랑.
포션병을 꿰뚫고 나아간 볼트가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그뿐만 아니었다. 그와 동시에 이자벨마를의 머리카락이 마력으로 일렁거렸다.
“길을 열어.”
네크로멘서.
이자벨마를의 명령에 불에 타올라 꺼졌던 제주도의 생명이 되살아났다.
자신의 생명을 불사른 악마에게 원한을 풀어내듯 악룡, 그리고 악룡에 올라탄 군단장 코퍼를 향해 쇄도했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공격.
키치와 락키드 핸더슨의 육탄 공격까지 포함한다면, 이제 막 활강을 시작한 악룡에게도 공격을 피할 활로는 보이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모두가 간과하고 있었다.
“……!!!”
드래곤은 차원을 찢는 존재라는 걸.
“이, 이럴 수가! 배합은 틀리지 않았는데……?”
알카리가 멈칫하며 자신의 망토 안을 바라봤다.
텅 빈 포션병들.
실수는 없었다.
마력 발현을 억제하는 옵시디언 추출물을 잊지 않았거늘.
그렇다면 저건……?
“……용언(龍言)이네, 키치!”
“용언? 그게 뭐야, 영감탱이?!”
락키드가 반말을 찍찍 내뱉었으나 대꾸할 여유는 없었다.
단순한 늙은이의 노파심이라고 여겼거늘.
불길한 상상이 현실이 되는 듯했으니까.
“오직 만물의 왕만이 내뱉을 수 있는 언어…….”
알카리가 곧장 경고했다.
“녀석은 그저 올라타 목줄을 채운 게 아니네.”
“그럼 뭔데?”
“저 악마는 드래곤의 능력을 온전히 다루고 있어!”
“……!!!”
울프가 곧장 판단을 내렸다.
“이거, 비상인데. 우리가, 우리만으로 승리를 자신했던 이유는 악룡에게서 이성이 엿보이지 않기 때문이었어. 우리한테 본성만 남은 적을 상대하는 건 익숙하니까.”
숱한 표적을 제거해온 그림자 용병단.
죽음 앞에 놓인 표적은 오직 본능에 따라서 움직이는 법.
울프가 기이의 탐구로 습득한 플레이어의 언어로 설명했다.
“우리가 숙지했던 패턴이 완전히 변화했다는 거야.”
물론, 다른 단원들은 알아듣지 못했다.
“……갑자기 뭔 개소리야?”
그러나 문제는 되지 않았다.
위협이 피부로 와닿고 있었으니까.
키치가 주먹을 쥐었다.
“좆 됐다는 거지, 뭐겠어?”
예상은 정확했다.
【모조리 불사르리라】
허공에서 들려오는 용언.
“……피해!!”
키치의 말에 반사적으로 엎드린 전 그림자 용병단.
현 악크샨 단원들.
그들이 머리 위로 강렬한 열기가 스쳐 지나갔다.
“앗 뜨거!”
헤르키오라가 다급하게 중급 빙결 마법, ‘겨울의 장막’을 발현했다. 그러나 부족했다. 그것은 고작 중급 마법으로 막을 수 없는 드래곤 브레스였으니까.
쩌저적.
“!”
하지만 깨져가던 얼음 위로 더욱더 차가운 얼음 결정들이 덧씌워졌다. 헤르키오라는 직감했다. 틀림없다. 이런 마법을 발현할 수 있는 건 마탑에서도 상당한 실력자다.
“내 마력은 무한대가 아닙니다, 악크샨 제군들.”
“……?”
“알아들었으면 어서 피하시죠!”
빙결마법학 선임, 커튼 레블.
“후우.”
쩌저적.
그가 한계에 다다른 빙결 마법의 발현으로.
차가워진 들숨을 뱉어냈다.
그런 그의 곁엔 날카로운 눈을 치켜뜬 마이아가 있었다.
마이아가 신입 악마 사냥꾼들의 과거를 들췄다.
“그림자 용병단.”
“뭐야, 망토까지 둘렀는데 알아보는 거냐?”
“좀 닥쳐 봐, 락키드.”
“뭐? 드쉐브, 이 쥐방울이 나더러 닥치라니……!”
마이아가 다시금 인내심을 발휘했다.
“나는 여전히 당신들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수석님.
저는 당신을 믿고 지켜보겠습니다.
저들이 진정으로 변화하였는지를.
‘당신의 말처럼.’
악크샨의 긍지를 증명하였는지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물론.’
저 또한 목숨을 걸어야겠지요.
결의를 다진 마이아.
그가 묵은 감정은 잠시 잊은 채 마력을 끌어올렸다.
“기억하십니까?”
“거, 미안한데 산 사람 얼굴은 잘 기억을 못 하거든.”
“그게 아닙니다, 락키드 군.”
드쉐브가 풉, 헛웃음을 삼켰다.
“이 덩치한테 락키드 군이래.”
“어이, 안 닥치냐고 쥐새끼! 그리고 콧대 높은 샌님.”
하지만 인내심을 발휘하고 있는 건 락키드도 마찬가지였다.
제주도에 발을 내디디던 순간부터 느껴졌던 묘한 적대감.
그 정체가 바로 눈앞에 마이아라는 걸 알았으니까.
그저 그동안 지은 죄가 커서 닥치고 있던 것뿐이지.
“마탑, 당신네들한테는 내가 받은 도움이 많아서 참고 있는 줄 아쇼. 특히 그 누구냐……? 녹색 머리칼, 그래! 벨리에 선임 마법사였나?”
커튼이 호들갑을 떨었다.
“뭐, 뭣?! 당신, 어떻게 벨리에 님을……?”
척, 마이아가 손을 들어 불필요한 잡담을 제지했다.
“아니, 지금 묻고자 하는 건 제 신분이 아닙니다.”
“뭐?”
“새벽의 도시, 라이나스에서 있던 일도 아닙니다.”
새벽의 도시, 라이나스.
“……!”
그 말에 반응한 건 그림자 용병단의 의뢰 목록을 열람했던 단장들, 키치와 울프뿐이었다. 두 사람은 어째서 마이아가 적대적인 반응을 보였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라이나스의 관련자인가, 그렇다면…….’
변명은 할 수 없었다.
그림자 용병단이 해산했다고 한들.
낙인처럼 새겨진 죄는 씻기지 않을 테니까.
‘어떤 모욕이라도 달게 받는 수밖에.’
그런데 이어지는 말이 의외였다.
“이 수석님의 가르침을 기억하느냐는 말입니다.”
“이 수석이라면……. 이호열 총대장?”
“그렇습니다.”
서로의 오해를 푼 그 순간.
【강림하라, 만물의 왕이여】
다시금 차원이 찢어지고 악룡기사 코퍼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유는 없었다.
더군다나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말 대신 행동으로.
콰드드득.
마이아가 대지 마법을 발현했다.
“……이건?”
그렇다.
그건 하늘로 이어진 암석의 계단.
‘누구’의 말로는 기초 중의 기초인 건축 마법.
키치가 입꼬리를 올렸다.
“이 수석님의 가르침, 이해했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증명해 주시죠.”
“물론. 판을 깔아주셨으니까요.”
타다닷.
키치가 과거, 호열과 호흡을 맞췄던 기억을 떠올리며.
계단을 박차고 하늘로 뛰어올랐다.
그 뒤를 락키드, 핸더슨이 차례로 쫓았다.
‘……젠장.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냐, 마이아.’
스스로 그림자 용병단의 발판을 자처하다니.
방금까지 저들을 보고 삭히던 분함은 어디로 내던진 거냐?
저들이 나를 신뢰하고 암석 계단을 타고 올라간 지금.
거창한 발현 따윈 필요하지 않았다.
하늘에 닿을 듯 아찔하게 펼쳐진 암석 계단.
저 높이에 떨어진다면 제아무리 튼튼한 육신을 가진 그림자 용병단이라고 해도 무사할 수 없을 테니까. 변명의 여지 또한 충분했다.
……부들부들.
상위 마법 ‘리버스 어스퀘이크’의 후유증이리라.
발현력과 마력 효율은 이미 바닥을 기는 수준이지 않은가? 그 바람에 발현을 실패했다고 한다면 이 수석님이라고 한들. 내게 책임을 물으실 수 없으시겠지.
그러나.
“……긍지롭지 못하군, 마이아.”
이 수석님.
당신께선 절 변화시켜도 지나치게 변화시키셨군요.
마이아는 이를 악물고 발현을 유지했다.
곁에서 지켜보고 있던 커튼이 흠칫할 정도로.
“……당신 괜찮은 겁니까, 마이아?”
“당신의 눈엔 괜찮아 보입니까?”
“말대꾸하는 거 보니까, 아직은 괜찮아 보이는군요.”
“네. 잘 봤습니다, 커튼 선임.”
마이아가 피식 웃었다.
“내게 신경 쓸 시간에 저들을 보호해 주시길.”
“물론입니다.”
커튼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공기 중에 넘실거리는 드래곤 브레스의 잔열.
그를 차단하기 위해 저들에게 상위 빙결 마법.
‘셰르파의 가호’를 발현했다.
“하아…….”
커튼의 입에서 더욱더 하얀 입김이 뿜어졌다.
두 선임 마법사가 마력 탈진에 이를 정도.
마력을 쏟아부으면서도 두 선임은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마이아는 생각했다.
‘용마대전의 승자, 드래곤이 두렵지 않은 겁니까?’
정말로 목숨을 걸었군요, 그림자 용병단 당신들은.
그러나 이내, 믿지 못할 풍경이 펼쳐졌다.
결코, 닿을 리가 없다고 생각했거늘.
푹.
“꽂았다, 이 새끼야!”
“!!”
그들의 검이 드래곤 스킨을 가르고 살점에 박힌 것이었다.
그 순간, 두 선임이 눈빛을 교환했다.
그래, 저들이 자신들의 가능성을 증명한 지금.
마이아가 입을 열었다.
“……이쯤이면 우리는 할 일을 마친 거 아니겠습니까?”
“그렇죠. 우리는 선발대에 불과하니까요. 꼭 마이아 선임과 제가 아니어도 우리 마탑에 인재는 많지 않습니까? 뱅그릿, 벤쉬, 마티스 선임님. 마지막으로…….”
“이 수석님까지.”
설령, 다른 악마가 기어 나온다고 한들.
뒷일은 걱정되지 않았다.
자신들이 여기서 탈진하여 쓰러진다고 하더라도.
기꺼이 뒤를 맡길 수 있는 아군이 있었으니까.
쿵쿵쿵……!!
터질 듯 뛰는 심장.
채 형성되지 못한 서클을 억지로 쥐어짜 내 발현하는 마법이었다. 그 후유증으로 어쩌면 치유학파의 별실에서 몇 달은 신세를 져야 할지도 모르겠지.
그럼에도 망설임은 없었다.
“그러니 부탁하겠습니다.”
마이아가 읊조렸다.
“이게 우리의 최선입니다. 그림자 용병단.”
콰드드득.
그림자 용병단이 내딛고 있던 암석 계단이 급속도로 팽창하기 시작했다. 덕분에 눈높이가 바뀌었고, 천적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부웅.
위에서 내려다보는 시야.
악룡의 육체에 가려져 있던 기수.
제4군단장 코퍼의 목덜미가 드러났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악크샨, 전원이 쇄도했다.
“!”
뎅겅.
그와 동시에 코퍼의 목이 달아났다.
.
.
.
남철민이 중얼거렸다.
“……뭔가 이상해.”
분명 처치하고도 남았을 일격이었다.
모두가, 카메라가, 전 세계가 지켜보고 있었다.
쉴 새 없이 갱신되고 있는 커뮤니티가 그 증거였다.
-와씨 추억이네 저 콤보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데자뷔 지린다ㅋㅋㅋㅋㅋㅋㅋ
-설마 저것도 이호열이 마탑에 전수한 건가?
-근데 저 시커먼 사람들은 누구냐???
-ㅁㄹ? 다른 건 몰라도 겉멋은 오지게 부린듯ㅋ
그런데.
“……처치 메시지가 떠오르지 않았어.”
마냥 놀랄 일은 아니다.
아직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저주’였다.
어떤 몬스터가 어떤 페이즈와 기믹을 보여줄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었으니까.
“막말로 잘린 머리가 붙어도 이상하지 않아.”
아르카나 대륙 전기를 경험한 플레이어라면 틀림없이 낌새를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림자 용병단과 마탑의 수석 마법사들에겐 플레이어의 지식도, 시야도 없었다.
“그러니까 위험해. 당장 거리를 벌려야 한다고!!”
태민이를 통해서라도……!
남철민이 다급하게 헤드폰을 고쳐 쓰던 순간이었다.
악룡기사, 코퍼.
고삐를 쥔 녀석의 손이 움찔거렸다.
그와 동시에 악룡이 내뱉었다.
【용마대전의 교훈을 기억하라, 인간이여】
불현듯 남철민의 시야가 점멸했다.
[상태이상, ‘마력 탈진’이 발생합니다.]
다급하게 고쳐 쓰는 안경.
“광범위 마나 번(Mana Burn)이라고……?”
잠깐, 그러면 저 암석 계단은?
……콰드드득.
불길한 예상은 이번에도 현실이 됐다.
마나 번의 여파.
마이아가 펼친 대지 마법이 해제.
그림자 용병단이 허공에서 처참하게 추락하기 시작했다.
남철민이 울먹거렸다.
“이건 너무 불공평하잖아……?”
최악의 가능성이 전부 실현되고 있었다.
정신력이 갉아 먹히는 듯했다.
그야말로 ‘저주’ 같았다.
그러나 낙담하기엔 일렀다.
강인한 정신력조차 무너트리는 저주라고 할지라도.
애초에 미쳐 있는 광인(狂人)을 굴복하게 할 순 없었으니.
“……저게 뭐죠, 분석관님? 누군가 접근하고 있습니다!”
조종사의 말에 남철민이 가쁜 호흡을 고르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목격했다.
작고 노란 무언가에 매달려.
악룡기사 코퍼에 접근하고 있는 사내의 모습이.
남철민의 입에서 그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스칼?”
*
작고 노란 무언가.
병아리로 형태를 바꾼 프로즈낙스가 말했다.
“여기서부턴 네 능력에 달렸다. 어디 증명해 보아라.”
스칼의 눈이 더없이 맑게 빛났다.
“물론입니다, 프로즈낙스님.”
그리고 호열 경.
아니지, 이호열 총대장님.
지켜봐 주십시오.
그것은 저주조차 막을 수 없는.
격이 다른 상위 마왕.
십좌들조차 경계하던 감정.
“제가 진정한 용기사로 거듭날 순간을.”
그래, ‘긍지’를 향한 날갯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