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layer who hides his past RAW novel - Chapter 561
◈ 561화. 끌어들이면 되는 일 (1)
“주군.”
“듣고 있습니다.”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바르바토스가 작게 웃어 보였다.
“괜찮을 리가 있겠습니까? 샤르멘도 알다시피 나는 십좌 중 가장 보잘것없는 세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당신에게 면목이 없군요.”
“주군께서 제게 면목이 없으시다니요?”
“내 부족한 권능이 그대를 연약하게 만들었으니까요.”
“!”
바르바토스의 유일한 심복, 샤르멘.
섬기는 자의 권능을 하사받는 군단장의 특권을 생각한다면, 여덟 번째 왕좌의 마왕인 바르바토스의 유일무이한 군단장인 샤르멘은 강해야만 했다.
그러나 샤르멘은 그러지 못했다. 파이몬의 군단장들과 전력을 비교하자면……. 군단장은커녕 군단장의 직속 부하들과 비교해야 할 수준이었으니.
“그런 말씀을……!”
주군인 바르바토스를 원망할 법도 했거늘. 샤르멘은 격하게 고개를 저었다. 보다시피 주군께서 먼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시지 않았는가?
샤르멘이 고개를 조아렸다.
“당치도 않으신 말씀입니다, 주군. 부족한 건 주군의 권능을 오롯이 활용하지 못하는 저의 그릇이지 주군이 아니십니다.”
“그대의 말이 위안이 되는군요, 샤르멘. 그러나 확실한 건 내게 새로운 십좌와 맞설 능력은 없다는 겁니다. 그렇기에 내린 판단입니다.”
“주군의 판단을 믿고 따르겠습니다.”
샤르멘이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바르바토스가 본론을 꺼냈다.
“나는 홀로 저들의 세계에 진입할 생각입니다.”
“!”
“물론, 저들을 기습하겠단 말은 아닙니다. 말했듯 파이몬께서 해내지 못했던 일을 제가 해낼 수 있을 리가 없잖아요? 새로운 십좌는 물론, 인간들과 싸울 생각도 없습니다.”
“하지만 주군……!”
지그시 고개를 젓는 바르바토스.
“결과가 어떻게 되든 손해 볼 일은 없으니까요.”
손해볼 일이 없다니?
주군의 말씀이었거늘.
샤르멘은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주군, 상대는 악랄한 십좌입니다. 가미긴과 부에르. 그리고 파이몬마저도 자비 없이 지옥에 떨어트린 존재란 말입니다!”
파이몬이 지옥에 떨어지게 된 경위?
인간이면서 십좌에 올라선 사내에게 지나친 호의를 품었다가 그를 처치하기 적합한 시기를 놓친 탓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주군의 계략이 사내에게 통할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였다.
저벅저벅.
그러나 염려를 헤아렸다는 듯.
바르바토스가 걸음을 옮겼다.
무릎을 꿇은 샤르멘에게 다가가 그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주군……?”
“설령, 그의 손에 내가 죽더라도 괜찮습니다.”
“부디, 그런 말씀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스윽, 부드럽게 그의 머리를 어루만졌다.
“샤르멘이 말했듯 그는 악마가 아닌 인간입니다. 그 말이 뜻하는 바를 알고 있나요? 부정적인 감정에서 힘을 얻는 우리 악마와는 다르게 인간인 그는 부정적인 감정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거라는 겁니다.”
“!”
샤르멘의 동공이 움찔거렸다.
“그래요, 그게 바로 잃을 게 없다고 말한 이유입니다. 내가 죽지 않는다면 죽지 않아 좋은 일. 설령 그의 손에 죽는다고 해도 그들의 세상엔 공포가 찾아올 겁니다.”
이윽고, 바르바토스가 양팔을 벌렸다.
“나처럼 나약하고 무해한 악마를 무자비하게 죽인 사내를 향한 공포가요. 나를 죽인 사내를 인간들이 무한히 신뢰할 수 있을까요? 글쎄요. 제 객관안이 말해주고 있군요, 샤르멘.”
비로소 십좌의 모습이 드러나는 듯했다.
“그럴 가능성은 일말조차 없으리라고.”
바르바토스가 다시금 양팔을 거둔다.
“그렇기에 손해 볼 일이 없다는 겁니다. 이제 알아들었나요, 샤르멘? 알아들었다면 우려를 접을 수 있겠지요?”
역시, 나의 주군이셨다.
“주군의 말씀이 옳습니다.”
샤르멘은 비로소 모든 뜻을 이해했다.
사사로운 감정을 초월한.
그야말로 악마 중 악마이신 나의 주군, 바르바토스시여.
샤르멘이 비장한 얼굴로 다짐했다.
“돌아오실 때까지 당신의 성채를 수호하겠나이다.”
바르바토스가 인자하게 웃었다.
“앞으로도 신세 지겠습니다, 나의 샤르멘.”
.
마안이 가장 선명하게 빛나는 땅이야말로 마계였다.
십좌들이 의식을 활용해 서로와 접촉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은밀하게 이야기를 나누기엔 마계에 떠오른 마안이 너무나도 많았으니.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하다.
“그 주둥이는 언제 봐도 가증스럽군, 바르바토스.”
모두가 바르바토스, 그의 연기를 지켜보았다는 것.
십좌들은 목격했다.
바르바토스가 자신의 심복.
샤르멘의 머리에 손을 얹을 때 어떤 수작을 부렸는지를.
저주, 《금이 간 그릇》
바르바토스는 자신의 목숨이 다했을 때.
샤르멘의 육체를 제물로 바쳐 부활할 수 있도록.
샤르멘의 육체에 저주를 발현한 것이었다.
“파이몬이 네 녀석을 멀리한 이유가 있군.”
바르바토스.
그는 악마조차 상종하기 싫은 부류의 악마였다.
자신의 강함을 주장하는 이들보다 자신의 약함을 주장하는 이가 더욱 섬뜩하게 느껴지는 법이니까. 그런 면에서 바르바토스는 완벽했다.
“저런 주군을 섬기게 되다니. 가엾군요, 샤르멘.”
바르바토스가 단 한 명의 군단장과 작은 성채로 십좌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이유? 간단하다. 바르바토스, 그는 자신의 권능을 누구와도 나누지 않았다.
그렇기에 한편으로는 호기심이 샘솟았다.
“새로운 십좌여.”
“그대라면 꿰뚫어볼 수 있겠는가?”
“바르바토스의 저 두꺼운 낯짝을.”
바르바토스의 가증스러움이 새로운 십좌에게도 유효할 수 있을지.
누군가는 말하리라.
강 건너 불구경하는 것처럼 여유로운 게 아니느냐고.
맞는 말이었다.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말했듯 십좌들은 아쉬울 게 없었다.
바르바토스의 계획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어떤 식으로든 저들의 세계는 혼란에 빠질 터였으니.
*
가장 먼저 레오니가 입을 열었다.
“각오 단단히 해라, 너희?”
역배팅 대성공.
짜릿함에 소름이 돋아야 했거늘.
다른 의미로 돋는 소름을 억누르며 애써 말한다.
“어떤 소원을 빌지 천천히 생각해 볼 테니까.”
남태민, 히사기, 제시 하인네스.
세 사람은 쉽사리 대꾸하지 못했다.
점멸하는 시야 속 시스템 메시지가 비현실적이었다.
[여덟 번째 왕좌의 마왕, ‘온화한 바르바토스’가 모습을 드러냅니다.]십좌는 감히 그 힘을 헤아릴 수조차 없는 존재.
단순한 출현 메시지였다면 읽을 수조차 없었겠지.
분명 □로 점철된 메시지가 떠올랐을 테니까.
그러나 또렷하게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악마가.
악마족 몬스터가.
플레이어에게 상태이상이 아닌 버프를 제공하고 있었다.
레오니가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기분 존나게 더럽네, 진짜.”
시스템 메시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믿을 수 없었다.
여태껏 수많은 악마를 상대해 오고, 그런 악마의 손에 수많은 동료를 잃어온 이들이었다.
그러니까.
“다들 긴장을 늦추지 마.”
“아직 함정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어.”
“맞아, 바르바토스가 적의가 없다고 해도 바르바토스의 사절단은 아닐지도 모르잖아? 그래, 속임수네 이거……!!”
꼭 누군가 외치지 않았더라도.
성전 연합군으로서 포탈 앞에 집결한 이들 중.
손에 쥔 무기를 느슨하게 푼 이는 없었다.
고오오오.
이윽고 포탈이 선명한 빛을 내뿜던 순간이었다.
“……!!!”
여덟 번째 마왕, 바르바토스.
녀석이 정말로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을 향한 모든 의심을 잠식시키겠다는 듯.
혼자서.
“처음 뵙겠습니다, 여러분.”
그것도 모자라서는.
공격 의사 따윈 없다는 듯.
양손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린 채 미소를 지었다.
“이 바르바토스가 인사드리겠습니다.”
그 광경이 전파를 타고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
AAU.
“저게 바르바토스라고요?”
“아니, 저거 진짜 악마 맞아?”
“생긴 것만 봐선 십좌는 맞는 것 같은데……?”
같은 십좌, 파이몬을 목격한 덕분이었다.
파이몬만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바르바토스에게선 십좌 특유의 기세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물론, 그 기세의 방향이 여태까지와는 달랐다.
“적대적인 태도가 아니야.”
“저걸 속임수라고 하기엔…….”
“뭣보다 혼자잖아? 이제 와서 병력을 불러낸다고 하더라도 저기에 있는 플레이어들의 수가 몇인데? 그뿐이야? 하르콘도, 마르셀로도 빤히 녀석을 지켜보고 있어!”
누군가 설마 하며 말했다.
“그럼 평화 사절단이라는 게 진짜란 소리야?”
누군가는 김칫국부터 마셨다.
“이러다가 이거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성전이 끝나는 거 아냐? 막말로 십좌 쪽에서 먼저 평화 협정을 제안하면……. 우리는 마다할 이유가 없잖아요?”
만년 신입.
AAU의 모두가 하늘 같은 선배님이다.
그러니까 성현준은 들리지 않게 중얼거렸다.
“마다할 이유가 없긴.”
내가 가슴이 답답해 미치겠는데.
‘나만 이상한 걸까.’
성현준은 묘하게 기분이 더러웠다.
대격변 이후 십수 년.
인류와 아르카나 대륙은 악마에 의해 짓밟히기만 해왔다.
아니, 단순하게 짓밟혔다고 표현하는 건 지나치게 순화된 것이었다. 인류는 악마에게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일방적으로 유린당했으니까.
“……악마는 진짜 빌어먹을 새끼들이잖아.”
AAU란 집단에 몸을 담은 이상.
플레이어들의 죽음에서 눈을 돌릴 순 없다.
그랬다, 분석을 위해서.
성현준은 악마에게 유린당하며 죽어간 플레이어의 기록을 수도 없이 봐왔다. 악마에게 빙의 당한 상태에서 동료를 공격하던 플레이어들의 얼굴?
-“하하하. 더 울부짖고, 절망해라.”
웃으면서 눈물을 흘리는 끔찍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비로소 복수의 기회가 왔다.
그동안의 빚을 되갚아줄 기회가 온 상황이란 말이다.
그런데.
이제 와서 사이좋게 지내자고……?
전부 없던 일로 하자고?
“다들 억울하지도 않아?”
……빠득.
성현준이 이를 갈던 순간이었다.
툭, 그의 어깨에 손이 올라왔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선배, 윤수겸이었다.
“나도 억울해. 손이 떨릴 정도로.”
……파르르.
어깨를 타고 전해지는 진동.
윤수겸 역시 화를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지켜보자, 현준아.”
“지켜봐요? 악마는 다 똑같은 거잖아요, 선배!”
“그래, 네 말이 맞아.”
윤수겸의 목소리가 점차 차분해져 갔다.
“악마는 겉과 속이 다르지. 어쩌면 자기 목숨을 걸고 연기를 하는 걸지도 몰라. 우리를 이용하려고 말이야. 그렇다면 이쪽도 그 점을 이용하잔 거야.”
“이용해요? 저걸? 십좌의 마왕을?”
“그래. 꿍꿍이가 있다는 건 그 꿍꿍이에 달성할 때까지 본색을 드러낼 수 없다는 거 아니겠어? 녀석이 저자세를 고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써먹어 보자는 거지.”
……그래서 어떻게 하는 건데요, 그거.
성현준이 되물으려던 순간이었다.
별안간 지부장, 박민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됐어, 수겸아. 오케이 사인 떨어졌다!”
됐다고?
뭐가?
나만 모르는 사이에?!
어리둥절해하는 성현준을 뒤로하고 박민재가 말했다.
“역시, 현 피디랑은 말이 잘 통한다니까?”
.
“진짜 말이 안 통하시네!!”
카메라 감독, 윤종진이 소리친다.
“저, 선배랑은 더는 일 같이 못 하겠어요!”
세상에 미쳐도 이렇게 미친 인간이 다 있나.
“마왕, 그것도 십좌를 상대로 백문백답이라고요?!”
“보여줘야 할 거 아냐?”
“대체 뭘요!!”
현용석은 대수롭지 않게 씩 입꼬리를 올렸다.
“악마보다 더한 방송국 놈들의 악랄함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