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est of Corruption RAW novel - chapter (326)
326 화 마라트.
마라트.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신성이 일렁이고 바닥에서 일어선 그림자가 나와 지젤을 집어삼켰다. 찰나의 시야가 검게 물들고 우리는 어느새 다른 장소에 서 있었다.
주변으로 보이는 숲으로 보아 원래 있던 장소와 그리 멀지는 않은 듯했다.
이러면 나가리인데.
아까 그 장소는 성녀를 사냥하기 위해서 일부러 몇 가지 안배를 해둔 곳이었다. 지젤이야 모르고 그랬겠지만, 괜히 이동하는 것보다 싸우더라도 그 장소에서 싸우는 게 승리할 확률이 높았을 텐데.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젤을 내 가슴팍을 손으로 밀어내고 날 올려다보며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잘 들어. 곧 마라트가 내 권능의 흔적을 쫓아서 나타날 거야. 그러니까 짧게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을 설명해줄게. 일단은 묻지 말고 듣기만 해.”
성녀인지 뭔지가 된 여파인지는 몰라도, 작금의 지젤은 흑백 한 쌍의 오드아이가 무척이나 자연스러워 퍽 잘 어울렸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지젤은 다다다 말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놀라지 말고 들어. 나는 성녀(聖女)고 뭐고 아냐. 진짜 신에게 선택받았던 성녀(聖女)는 마라트한테 죽었어. 마라트, 그 녀석이 성녀의 머리를 쪼개고 그 안에서 보석 같은 걸 꺼내더니, 다시 반으로 쪼개 나한테 먼저 먹여서 지금 내가 이 모습이 된 거야. 내가 그 이상한 보석을 먹고도 죽지 않고 능력을 강화된 걸 확인하더니 남은 반쪽은 자신이 직접 먹어치웠고! 그 녀석은 나를 바지사장 삼아 성녀로 내세우고 뒤에서 암약하며 교단을 지배하고 있어. 나는 마라트한테서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칠 수 없었어. 권능을 이용해서 도망치면 그 흔적을 보고 우리는 서로 쫓을 수 있게 됐거든. 이미 말려든 이상, 이제 너도 조심해야…”
“설명하느라 참 바쁘신데 실례를 좀 해야겠군요. 성녀(聖女)님.”
지젤이 미처 말을 다 내뱉기도 전에 허공이 새카만 그림자로 물들며 그 속에서 금발 흑안의 사내가 느긋한 걸음걸이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말도 없이 그렇게 도망쳐버리시면 어떻게 합니까. 불만이 있으시면 진작에 말씀해주시지.”
지젤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너한테 불만을 말하다가 진짜 성녀(聖女) 대가리가 쪼개지는 걸 봤는데, 내가 너한테 어떻게 불만을 말해? 내가 완전히 돌아서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수가 없지!”
“평소와 다르게 활기가 아주 넘치시는군요. 보기가 참으로 좋습니다.”
“됐어. 마침 딱 말할 기회가 있으니 말할게. 나는 이제 교단에서 나가겠어. 당연히 성녀(聖女) 짓도 때려치울 거고! 그러니 좋게좋게 헤어지자고. 너한테 더는 볼 일 없으니까.”
마라트는 쓰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성녀(聖女)를 마음대로 그만두신다라. 좋습니다. 그야 성녀(聖女)를 하고 말고는 전적으로 성녀님의 자유니까요. 하지만 성녀를 그만두시겠다면, 제가 드렸던 사리 반쪽은 다시 돌려주셔야겠습니다. 저는 다음 성녀(聖女)가 필요하거든요.”
“이미 먹어서 없는데 뭘 어떻게 돌려 내. 헛소리 말고 꺼져.”
신성이 일렁이고, 지젤이 다시 권능을 발현하려 했지만, 그림자들은 지젤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지젤의 새하얀 이마가 구겨지고, 그 모습을 쳐다보는 마라트는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그는 지젤을 바라보며 말했다.
“서로 능력을 방해하면 둘 다 아무 곳으로도 못 가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아까는 기습적으로 도망치셔서 놓치고 말았지만, 이미 성녀(聖女)님께서 도망치실 걸 알고 있는 이상 권능으로는 제게서 벗어나실 수 없습니다.”
“알고 있는 데 한 번 해본 거야.”
짧게 쏘아붙인 지젤은 내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마르낙, 우리 당장 도망쳐야 해. 마라트, 저 자식. 실실 웃어대서 약해 보이지만 실제론 ‘달인’이야. 우리 둘만으로는 승산이 없어.”
“흐음.”
나는 지젤과 마라트를 번갈아 보곤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권능으로 이동 못 하게 하는 거, 쟤가 하는 것처럼 너도 할 수 있다는 거지?”
“…그렇긴 한데?”
“그럼 도망치는 거나 잘 막고 있어 봐. 마침 잘됐네. 어떻게 도망 못 치게 하나 고민 중이었는데.”
전대 사도를 죽이고 사리를 반쪽으로 나눠 먹어서 둘 다 사도가 됐다니. 나는 그게 가능하다는 사실에 솔직히 조금 놀라고 있었다. 그런 식이면 사리를 잘게 쪼개서 수십 명한테 나눠 먹이면 전부 사도가 될 수 있는 건가?
근데 그렇게 사도가 된 녀석은 제대로 사도인가.
궁금한 게 참으로 많았다. 눈앞의 사내와 맞부딪혀보면 내 의문에 대한 적당한 대답이 되리라.
지젤은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못 들었어? 마라트 녀석은 ‘달인’이라니까? 아무리 너라도…”
나는 지젤을 부드럽게 밀어내며 푸른 검, 절망을 꺼내 들며 앞으로 나섰다.
“그건 나도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고, 도망치지나 못하게 해.”
“…뭐?!”
마라트는 나와 지젤을 번갈아 보더니 큭큭 웃어댔다.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서로 검을 주고받다니, 제법 낭만 넘치는 상황이군요.”
나는 절망을 한 바퀴 빙글 돌리며 손목을 풀며 대꾸했다.
“마음껏 즐겨. 어차피 넌 여기서 죽을 테니.”
마라트는 자신의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빙그레 웃었다.
“너무 강한 말은 쓰지 마시죠. 약해 보이시니까요.”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대사에 불의타를 맞아 나는 잠깐 정신이 멍해졌다. 곧 정신을 다잡은 나는 말을 골랐다.
나도, 나도 좀 찰진 대사로 받아쳐야 하는데.
당장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는 탓에 미약한 패배감을 느꼈다. 내가 다시 무어라 입을 열려던 찰나.
마라트가 먼저 움직였다.
길게 쭉 늘어진 잔상을 남기며 내게로 쇄도한 녀석이 휘두르는 무기를 절망을 휘둘러 쳐냈다. 새카만 선과 푸른 선이 맞부딪혔지만, 불티는 튀지 않았다.
크게 한 번 절망을 내질러 녀석이 한 번 뒤로 물러나게 만들며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모를 새카만 무기를 살펴보았다.
한 쌍의 새카만 검은 그리 길지 않았는데, 검날이 곧게 뻗어 나오다 휘어진 모양의 전형적인 쿠크리 형태의 도검이었다. 특이한 점이라면 일반적인 금속으로 만들어진 검이 아니라, 내 부패의 검처럼 그림자를 권능으로 빚어낸 무기라는 것이었다.
녀석은 검을 크게 휘두르며 생겨난 내 틈을 파고 들어왔다. 한 쌍의 그림자 검의 길이가 그리길지 않은 탓인지, 아무래도 녀석은 초근거리의 근접전을 선호하는 듯했다.
이렇게 붙으면 조금 귀찮아지는데.
이건 내가 선호하는 간격이 아니었다. 내가 한 발 뒤로 물러나자, 녀석은 끈덕지게 거리를 좁혀오며 위협적으로 한 쌍의 새카만 검을 휘둘러왔다.
내 손이 바쁘게 움직이고, 절망과 한 쌍의 검은 검들이 찰나의 순간 속에서 수십 차례 맞부딪혔다.
합을 나눌수록 조금씩 밀리는 건 마라트가 아니라 나였다. 애초에 지근거리에서 한 쌍의 쿠크리를 상대로 검 한 자루로 맞서는 것 자체가 불리한 일이었으니, 마라트가 접근하는 걸 허용해버린 이상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지만.
마라트는 끊임없이 날 몰아붙이면서도 조금은 감탄한 눈으로 입을 열었다.
“숨겨둔 실력이 장난 아니시군요!”
“실력 숨겨둔 적도 없고… 아, 막느라 바빠 죽겠는데 말 걸지 마! 이 자식아!”
입을 움직이는 와중에도 절망과 한 쌍의 검은 쿠크리들이 치열하게 맞부딪혔다.
나는 거리를 조금이라도 더 벌리기 위해 노력했고, 마라트는 그 거리를 좁혀 자신의 간격으로 완전히 날 집어삼키기 위해 노력했다.
내뱉고 들이쉬는 호흡의 틈마저 거슬리게 느껴지는 격돌. 나는 크게 한 번 숨을 들이마시고 호흡마저 멈춘 채 내 육체와 기교를 한계까지 끌어올리며 승부수를 걸었다.
푸른 절망이 더욱 빠르고 날카로운 궤적을 그려내며 새카만 쿠크리 한 자루를 쳐올렸다. 힘껏 쳐올린 쿠크리가 튕겨나고, 마라트의 눈이 커졌다. 나는 훤히 벌어진 녀석의 가슴 한복판의 틈으로 절망을 내리그었다.
절대 막힐 리 없는 일검. 그러나 순간, 남아있던 그림자 쿠크리 한 자루가 주욱 늘어나며 절망을 빗겨냈다. 궤도가 틀어진 절망이 마라트의 가슴 한복판을 베어버리는 대신, 녀석의 왼팔을 깊게 베어냈다.
튀어 오르는 핏방울. 처음으로 흘린 혈향이 코끝을 간질여대고, 녀석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팔을 부여잡고 뒤로 크게 한 번 물러났다. 그는 진심으로 놀랐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놀랍네요. 제가 순수하게 검으로서 지다니. 이게 대체 얼마 만인지.”
나는 마라트를 지그시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지젤을 쳐다보았다.
“아니, 저거 검이 마음대로 늘어나는 거면 미리 귀띔을 해줬어야지. 다 죽인 거였는데 놓쳤잖아.”
내 타박에 당황한 표정을 지은 지젤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늘어나는 줄 몰랐는데, 어떻게 귀띔해줘! 나는 저 녀석이 저렇게 몰리는 것도 처음 본다고!”
“후, 그럼 어쩔 수 없지.”
나는 가볍게 절망을 한 바퀴 돌리고는 마라트를 향해 피식 웃었다.
“그럼 하던 걸 마저 해볼까.”
마라트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자신의 왼팔을 힐끔 쳐다보고 말했다.
“다친 이상 오늘 더 싸우는 건, 제가 조금 불리할 듯하군요. 처음부터 권능을 사용해서 전력으로 싸울 걸 그랬습니다. 괜히 검만 들고 덤비시길래, 장단을 맞추다 다치다니. 저답지 않게 큰 실수를 했군요. 아무래도 나중을 기약해야겠습니다.”
“뭐래. 나는 널 보내줄 생각이 없다니까?”
금발의 사내가 피식 웃었다. 그는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적어도 그건 제가 결정할 수 있는 영역이군요. 또 뵙죠. 성녀(聖女)님도 머리 간수 잘하십시오. 제가 다시 뵈러 올 때까지.”
그 한마디와 동시에 바닥에서부터 튀어나온 그림자가 마라트의 몸을 집어삼키고 마라트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나는 멍청한 표정으로 마라트가 튄 광경을 쳐다보다 지젤을 향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분명 아까 네가 방해하면 권능으로 도망 못 친다고 하지 않았어?”
지젤은 나보다 더 당황한 눈빛으로 마라트가 사라진 광경을 바라보다 대답했다.
“…어? 쟤는 되네?”
“…”
우리가 서로 뻘쭘하게 쳐다보는 가운데 무거운 침묵만이 숲속에 감돌았다.
***
“그러니까!”
지젤은 궁시렁대며 내게 연신 변명했다.
“…내 권능은 대규모 이동이나 장거리 이동에 특화됐고, 마라트는 혼자 이리저리 이동하는 데 특화되어서 그런 걸 거라니까? 그래서 교단에서도 대규모 이동을 할 때는 언제나 내가 담당했었어.”
“나는 너만 믿고 일부러 거리 벌리는 걸 허용한 건데. 진작에 처음부터 도망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으면 아까 그냥 죽였지.”
하얀 두 볼이 살짝 붉게 달아오르고 지젤이 자그맣게 투덜댔다.
“진짜 몰랐다니까… 걔가 이동하는 걸 방해해본 적이 있어야지. 시도라도 해봤다간 바로 내 머리가 쪼개질 텐데, 아마도 할 수 있겠거니 싶은 채로 놔두는 수밖에 없잖아.”
“모른다고 하면 다 끝나? 그냥 확신이 없으면 ‘아마 못 할 거 같다.’이렇게 말했어야지.”
반쯤 농 섞인 내 짓궂은 타박에 지젤은 어딘지 모르게 묘한 표정으로 날 쳐다보았다.
“그런데 말투가 왜 그래? 예전엔 평생 존댓말만 하면서 살 것처럼 굴었으면서.”
“이쪽이 편해.”
내 대답을 들은 지젤이 쿡쿡 웃었다. 나는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왜 웃어?”
“하나도 안 어울려서. 그냥 범생이가 억지로 폼 잡으면서 어색한 모습으로 무섭게 굴면서 험한 말하는 걸 보는 기분이야. 그냥 존댓말 하지 그래? 그편이 마르낙, 너한텐 더 어울리는데.”
어디서 기어나온지 모를 부끄러움에 내 볼이 살짝 뜨거워졌다. 잠깐 할 말을 잃은 내가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에 지젤은 슬쩍 내게로 다가와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싱긋 웃는 모습으로 말했다.
“또 구해줘서 고마워. 다시 얼굴 보니 좋네. 그동안 잘 지냈어?”
그리운 목소리와 관계에 나는 어딘지 모르게 마음이 안정되는 걸 느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다시 만난 옛 동료에게 답했다.
“잘은 못 지냈지. 너는?”
“나도 비슷하지 뭐.”
서로의 눈이 마주치고 우리는 잠깐 웃었다. 오랜만에 편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