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est of Corruption RAW novel - chapter (4)
4 화 이성적 판단.
이성적 판단.
일행은 푹푹 거리는 발소리와 함께 전날 내렸던 눈 위로 첫 발자국을 새기며 나아갔다.
내 위치는 행렬의 중간쯤. 책임자인 갈라드의 배려 덕에 행렬의 후미나 최선두에 서지 않을 수 있었다.
모인 열 명의 용병들 중 갈라드를 포함한 여섯은 그가 직접 데리고 온 사람들이었다. 총인원 여섯짜리 단출한 용병단. 무어라 나름 이름이 붙여져 있다고 소개를 하긴 했지만, 별로 새겨들을 이야기인 거 같진 않아 벌써 까먹었다.
“마르낙 사제님.”
소처럼 맑은 눈망울과 순진해 보이는 얼굴, 하지만 그 얼굴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덩치. 소년과 청년의 사이쯤에 애매하게 껴있는 남자는 바로 갈라드가 혹시 심부름시킬 일이 있으면 부탁하라고 내게 붙여준 그네들의 용병단 막내였다.
나는 인자한 미소를 짓고서 답했다.
“예.”
이름이 퓌에르라고 했던가. 출신지는 귀스 근처 마을. 퓌에르의 타고난 용력을 알아본 갈라드가 그쪽 집안에 사정사정하고 후한 대가를 치른 끝에 겨우 설득하고서 들인 막내였다.
내가 이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느냐.
“귀스 말고 다른 곳에서 오셨을 텐데 혹시 거기 풍경은 어떤지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그런데 여기 이 길로 쭉 가면 제가 살고 있던 마을이 나오는데, 어머니랑 아버지는 잘 지내고 있는지 잘 모르겠네요. 물론, 갈라드 대장님이 저희 부모님한테 후한 사례를 한 덕에 이번 겨울은 무난히 보내시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걱정이 되고 마는 이 심정은 뭘까요?”
퓌에르는 말이 많았다. 내게 하는 질문은 그저 말을 걸기 위한 빌미라는 듯이, 궁금하지도 않은 자신의 이야기를 쨍알쨍알 늘어놓고 마는 것이었다.
혹시 이 퓌에르를 내게 붙인 건, 나를 배려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수다스러운 입을 잠시라도 자신에게서 떼어놓기 위해서였을까? 나는 당해버린 건가.
“그거 아십니까? 사제님?”
이젠 내게 질문조차 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짐짓 엄숙해 보이는 표정을 지은 채, 내게 속삭이듯이 말하는 그 모습은 순진해 보이는 얼굴과 전혀 어울리지 않아 조금 웃겼다.
“뭘 말씀이십니까?”
퓌에르는 갈라드를 힐끔 보고는 소곤소곤 말했다.
“사실, 이 길을 다니는 농부들을 잡아가는 건 사람이나 몬스터가 아니라 귀신이라는 소문을요.”
이 세계에서 귀신이란, 부정적 에너지 덩어리의 몬스터와는 약간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다. 뭐, 우리네 세계에서 쓰던 귀신이랑 이미지가 크게 다르진 않았다.
“귀신 말입니까?”
“예. 귀신요.”
나는 그저 조용히 빙그레 웃었다.
“범인이 귀신이면 굉장히 곤란하겠습니다.”
퓌에르는 두 눈을 반짝이며 날 바라보았다.
“왜죠?”
뭔가 이능이 깃든 이야기를 바라는 건가. 아쉽지만 내 말뜻은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야 범인이 귀신이면 아무래도 저희가 허탕을 칠 게 뻔하고, 그러면 성공 보수를 받지 못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곤란했다. 성공 보수가 없으면 보수는 은화 한 닢. 어제 내가 접수원 아가씨한테 한바탕 잔소리를 듣고 가불 받은 액수와 똑같았다. 이 말은 즉, 동화 구십 닢짜리 내 주머니 사정이 전혀 나아지지 않을 예정이란 말과 동일했다.
진짜 곤란한데.
뭔가 대단한 이야기를 기대했었는지, 내 이야기를 들은 퓌에르가 살짝 실망스러운 눈치로 날 바라보았다.
“확실히 범인이 귀신이면 보수를 받기 힘들 것 같네요.”
“그런데 갈라드 씨도 범인이 귀신이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내 질문에 퓌에르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 거대한 덩치로 주변을 힐끔힐끔 살핀 뒤에 내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실, 갈라드 대장님도 범인을 잡을 거라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신 거 같아요. 어제 자기 전에 다른 분들하고 이야기 나누는 걸 들어본 바로는 그저 마땅한 일거리가 없어서 맡았다는 느낌이 강했어요. 애초에 정말 지나다니는 행인을 해치는 범인이 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으니까요.”
그럼 결국 내 주머니 사정은 나아지지 못하는 건가. 살짝 울적해졌다. 퓌에르는 그런 내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자기 할 말을 이어나갔다.
이거 왠지 라디오 틀어놓고 걷는 느낌이네.
“진짜 요즘 통 일거리가 없는 건 다 위대하신 트레돈 영주님이 너무 귀스를 잘 다스리시고 있는 탓에 문제가 없어서 그런 거라고 갈라드 대장님이 늘 투덜거렸어요. 덕분에 저희 용병단은 이번 달엔 용병 길드보다 인력소에서 일당받고 일하러 나간 적이 훨씬 많다니까요?”
인력소는 영주 직할의 기관으로 영주가 인력이 필요할 경우 적당한 대가로 일거리를 수배하는 곳이었다. 마치 현대의 인력사무소와 비슷한 이 제도는 원래 게임 초반 사냥이 애매한 직업들의 노가다를 위한 장소였다.
결국, 용병이 아니라 노가다를 뛰어야 하나. 내겐 용병 쪽이 훨씬 형편이 좋았다. 죽고 죽이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시체들을 내가 거둬들이면 용병일도 하고 신성도 얻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도랑치고 가재 잡는 이야기였으니까.
“그런데 퓌에르 같이 타고난 용력이 뛰어난 분은 그런 몸 쓰는 일 쪽엔 탁월하지 않으십니까?”
내 존댓말에 퓌에르는 영 적응이 안 된다는 듯이 어색하게 웃었다.
“여기서 저한테 반말 안 쓰시는 분은 마르낙 사제님이 유일하세요. 저는 진짜 편하게 말씀해주셔도 괜찮은데요.”
“저는 이게 편합니다.”
상대가 나를 무시하지 않는 이상, 친절함은 꽤 유용한 수단이었다. 평소의 이미지가 좋다는 건 생각보다 여러 방면에서 유리했다. 특히 안 좋은 쪽의 범인을 찾거나 하는 일에서.
“사제님께서 그러시다면야 저는 할 말이 없지만요.”
“퓌에르!”
“아무래도 잠시 가봐야 할 것 같네요. 곧 다시 올게요!”
무어라 이야기를 더 이어나가려던 퓌에르는 저 멀리서 자신을 부르는 갈라드의 목소리에 내게 고개를 꾸벅 숙이곤 눈 덮인 길을 가로질러 선두에 있는 갈라드에게로 향했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한시도 쉬지 않고 옆에서 재잘재잘 떠들던 퓌에르가 사라지자, 내 느릿한 숨소리와 심장의 고동 소리만이 들려왔다.
‘살해!’
“어머니, 뭘 자꾸 다 죽여버리시라고 합니까? 이들이 다 죽으면 오히려 제가 곤란합니다. 귀스에 돌아갔을 때 할 말이 없지 않습니까? 은화 서른 닢. 아니, 한 닢은 선불로 받았으니 보상은 은화 스물아홉 닢이군요. 당신의 아들은 은화 스물아홉 닢이 간절하게 필요합니다. 이 한겨울을 등 따숩게 지내고 싶다 이 말입니다.”
‘살해···.`
살짝 축쳐진 듯한 목소리와 함께 부패의 어머니는 순순히 납득하고 물러나셨다. 우리네 부패의 어머니께서는 동전을 만들어내는 기적을 부릴 재주는 없으셨다.
나는 품속에 있는 손을 톡톡 두드렸다.
“제가 말이 조금 심했었던 것 같습니다. 가난이 아무래도 제 밝은 이성을 조금 좀 먹었나 봅니다. 이 우둔한 아들의 말 때문에 너무 풀죽지 마시길. 저는 사실, 조금 춥게 지내도 괜찮습니다. 등쯤이야 봄이 오면 알아서 따뜻해지겠지요.”
‘살해!’
부패의 어머니는 감정을 푸는 게 빠른 분이셨다.
날이 살짝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저 멀리서 갈라드가 일행의 걸음을 재촉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미리 생각해둔 야영 장소까지의 조금 거리가 남은 것 같았다.
갈라드에게 갔다가 돌아온 퓌에르는 입을 꾹 다물고 침묵했다. 나는 피식 웃고서 퓌에르에게 말을 건넸다.
“무슨 이야기를 들으셨나 봅니다?”
내 눈치를 슬쩍 본 퓌에르가 우물쭈물거리다 말했다.
“사제님을 너무 귀찮게 하지 말라고 대장님한테 한마디 들었어요. 아침부터 날이 질 때까지 옆에 딱 달라붙어서 떠들면 얼마나 귀찮겠느냐면서요.”
확실히 조금 귀찮기도 했지만, 그래도 재잘재잘 떠드는 라디오가 없는 것보단 있는 게 조금 더 나았다.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염려치 마시길.”
퓌에르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 모습은 새끼 곰이 웃는 모습을 연상시켰다.
“정말요? 사제님?”
“예.”
은밀한 기척. 공기를 가르는 자그마한 소리. 예민한 내 감각에 무언가 걸려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퓌에르를 밀어 넘어뜨렸다.
푹.
두 발의 화살이 내 배와 어깨에 꽂혔다. 지나다니는 행인을 없애는 범인은 귀신이 아니었다. 사람이었다.
도적인가.
“사, 사제님?! 괘, 괜찮으세요? 화, 화살이!!!”
나는 침착하게 상황을 살폈다. 저 앞에서 걷던 갈라드는 이미 바닥에 누워있었다. 머리에 한 발의 화살을 꽂고서.
열 명의 일행 중 화살을 한 발도 맞지 않은 건 채 다섯이 되지 않았다.
무섭도록 예리한 조준 실력. 일개 산적들이 한 기습이라고 보기엔 너무나 체계적이고 날카로웠다.
‘살해!’
부패의 어머니께선 화살을 맞은 김에 바닥에 쓰러져 죽은척하라는 뜻을 담아 내게 전하셨다.
확실히 그게 이성적인 판단이었다. 적이 몇 명인지조차 확실하지 않은 지금, 적이 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렸다가 뭐든 하는 게 옳았다.
나는 뒤를 힐끔 바라보았다. 덩치에 안 맞게 달달 떨고 있는 퓌에르. 아무래도 그는 실전이 처음인 듯했다.
여기서 내가 죽은 척을 했다간 분명 나를 제외한 나머지는 다 죽겠지.
‘살해!’
“압니다. 어머니. 저는 무엇이 이득인지 아주 잘 압니다.”
이건 게임이다. 이 세계 자체가 게임. 곧 죽을 저들은 그저 데이터 쪼가리 NPC고 나는 플레이어.
“하지만 그거 아십니까? 어머니.”
나는 몸에 화살을 두 발 꽂은 채, 자리를 박찼다.
미리 봐둔 가장 가까운 시체의 허리춤에 메인 검을 빼들고 다시 튀어 나가며 소리쳤다.
“전 원래 이렇게 합니다!”
검을 휘둘렀다. 튀어나오는 피. 어두운 옷을 입고 숨어 있던 도적놈 하나의 머리통이 바닥에 떨어졌다.
적은 하나가 아니었다. 나는 어둠을 꿰뚫는 눈으로 주변을 살피고 다음 적을 향해 내달렸다.
그래, 나는 원래 이런 식으로 게임했다.
내 마음이 가는 대로 지키고 싶은 것을 지키면서.
게임이란 건 원래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이기에.
***
벨키르는 탈영한 레인저였다. 그는 그 딱딱한 규율로 가득한 레인저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탈영했다.
그리고 뒤따라오는 추적들을 간신히 따돌리고 산골 마을에 숨어들었다. 벨키르는 거기서 마음이 맞는 양아치 몇을 어느 정도 훈련해서 도적단을 만들었다.
레인저의 지식을 바탕으로 하는 도적질은 한낱 농민들은 절대 피할 수 없는 자연재해나 다름없는 일.
벨키르는 아주 체계적으로 적당한 무리의 농민들만 습격해 재물을 챙겼다. 짧고 굵게 도적질을 해봤자, 곧 목이 날아갈 게 분명했으니까.
하지만 그 도적질도 길게 이어지자, 결국 영주가 용병들을 꾸려서 자신을 쫓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크게 한탕하고서 근거지를 옮길 시간이었다. 벨키르는 떠나기 전 마지막 사냥감으로 영주가 보낸 용병들을 선택했다.
농민들을 터는 것보다, 무장한 그들이 가진 물건을 파는 게 훨씬 이득이었다.
미리 선점하고 기습한다면, 자신이 키운 일곱의 부하들이 겨우 열 명의 용병에게 질 일은 없으리라. 그렇게 판단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흘러갔다. 해가 서서히 숨어 들어가고, 용병들의 긴장이 한껏 풀려 있는 채로 일렬로 길게 이동하는 그때.
숨죽인 채 사냥감의 목을 물어뜯을 준비를 끝마친 부하들에게 사격 신호를 보냈다.
기습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무려 열 명 중 다섯이 화살을 맞았다. 대장으로 추정되던 인물은 자신이 쏜 화살에 즉사했고, 용병들은 아직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문제는 사제의 모습을 하고 맹수처럼 나타났다.
그 미친 사제는 배와 어깨에 화살을 꽂은 채로 기다렸다는 듯이 시체에서 검을 빼 들고는 숨어있던 부하 한 놈에게 달려들어 단칼에 머리통을 날려버렸다.
벨키르는 그 광전사 같은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었다.
“미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