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401
399화 일몰 (3)
친절하게도 시간을 알려 주는 메시지창이 떴다. 내게만 보이는 메시지였기에 다른 사람들은 인벤토리에서 타이머를 꺼내 시간을 맞추었다.
“근 두 시간이라니 넉넉하네. 일부러 해가 느리게 지게 만든 건가.”
강남에 어떤 호텔이 좋다더라. 우리는 자잘한 헌터들을 쓸어버리며 십여 분 만에 강남역에 도착했다. 차도 안 막히고 신호도 무시하니 느긋이 오토바이를 몰아가도 금방이었다. 역시 교통체증이 문제야.
콰과과과-!
강남역 1번 출구에서 물이 치솟았다. 여태까지 중에서 가장 힘차게 솟구친 물이 하늘 높이 거대한 글자를 만들어 냈다.
[여─기!]안의 글자는 노란색 얼음으로, 테두리는 파랑과 초록을 섞어서 눈에 띄게 만든 얼음 표지판에 윤윤이 다가갔다. 그리곤 품 안 가득 든 야광 스티커를 얼음 위에 다닥다닥 붙이기 시작했다. 날이 꽤 어두워진지라 스티커들이 희미하게나마 빛을 흘렸다.
서울 내 헌터란 헌터들은 죄다 몰려들겠다. 호텔은 여기서 좀 떨어진 곳으로 골라야지.
근처 버스 정류장으로 가 의자에 앉았다. 회귀 전의 나도 의자에 앉아 케이크 상자를 무릎 위에 얹어 놓았다. 나와는 약간 거리를 띄운 채였다.
“배고프진 않아?”
유현이가 주위를 살피며 말했다.
“호텔에 식재료가 남아 있을까. 뭐 먹고 싶은 건 없어? 시간 넉넉하니까 마트라도 찾아볼게.”
“저기 햄버거집 있네.”
“날이 추우니까 따뜻한 게 좋겠지?”
동생이 내 말을 무시했다. 햄버거가 뭐 어때서. 물론 추천할 만한 식단은 아니다만 그래도 고기와 채소가 들었잖아. 감자튀김과 탄산을 빼면 나름 건강한 메뉴라던데.
“…너, 동생한테 밥 차리게 하냐.”
던전 속의 내가 몹쓸 인간 대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아니, 유현이가 집 나가기 전엔 내가 맡긴 했지만, 그건 애가 아직 어려서고. 지금도 어리긴 하지만.
“유현이가 하고 싶어 해서, 말이야.”
“스무 살이라며. 사회생활 중이라고 해도 적어도 대학 졸업할 나이 때까진 네가 챙겨 줘야 하는 거 아니냐?”
“당연히 내가 주로 하긴 하거든!”
“내가 좋아서 하는 거 맞아. 형을 챙겨 주고 싶어서.”
유현이의 말에 회귀 전 내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곤 얼음 표지판에 온갖 장식을 하고 있는 예림이와 윤윤을 흘낏 올려다보았다. 분명 나보다 덩치가 더 좋을 텐데도 검은 패딩 속에 푹 파묻힌 녀석이 묘하게 작게 느껴졌다.
여러모로 기분 정말 이상하겠지. 그런데도 약한 티는 내고 싶지 않을 거고. 나도 꽤 고집이 있는 편이라.
“그래도 내 입장에선 내일이 네 생일이니까. 내일까지, 음, 괜찮을지도 모르고. 그래서.”
“그건 그러네. 야, 마트 들러서 미역 사가자.”
일부러 가볍게 말했다. 유현이가 나와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리고 형, 내일도 이대로야.”
입가에, 눈가에 띠고 있는 옅은 미소와 달리 유현이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나를, 어느 쪽이든 무슨 일이 있어도 쉽게 손에서 놓지 않을 것이다. 동생은.
“아저씨! 헌터들이 잔뜩 몰려들고 있어요!”
얼음으로 커다란 곰인형을 만들던 예림이가 두 팔을 흔들며 소리쳤다. 좀 일그러지긴 했지만 곰인형 맞지?
“어느 쪽인데?”
“저쪽이요!”
예림이가 방향을 가리키자마자 유현이가 움직였다. 순식간에 빌딩 앞으로 치달은 유현이가 검을 길게 뽑았다. 가속도가 붙은 그대로, 물 흐르듯 부드럽게 검날이 빌딩을 가른다.
기이이잉─!
고막을 울리는 검음과 함께 공기가 사납게 진동했다. 검푸른 불길이 검의 궤적을 따라 빌딩의 아랫부분을 휘감고, 넘어뜨리고자 하는 방향을 집중적으로 녹이고 파먹는다. 쿠궁, 한쪽이 내려앉기 시작하는 빌딩을 향해 유현이가 그대로 몸을 한 바퀴 돌리며, 어느새 연검화한 검을 크게 내리쳤다. 새카만 검신이 바람을 거칠게 가르며 빌딩의 옆면을 두들기고.
구그그긍, 묵직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건물이 옆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져 간다. 빌딩 하나가 완전히 무너지기도 전에 유현이가 또 다른 빌딩 쪽으로 이동했다. 차량 한 대 없이 훤히 뚫린 8차선 도로를 막아 놓을 심산인 모양이었다.
그에 더해 시야를 가리는 높은 건물들을 치워 그 잔해로 골목을 봉쇄하면 혹시라도 헌터들이 우리 쪽으로 빠지지 않게 막기도 수월해진다.
“박예림 헌터.”
“응, 이번엔 네 차례라는 거지, 죠? 윤윤! 아저씨들한테 가자.”
여기 오면서처럼 발만 묶어 두는 게 아니라 확실하게 처리해 버릴 모양이었다. 그런 건 예림이에게 시키기 뭣하고 윤윤은 피를 싫어하니까 유현이가 맡는 게 낫겠지. 그래도 유현이가 예림이 생각을 해주긴 한단 말이야.
“아저씨, 또 속으로 한유현 칭찬하고 있죠.”
내 앞으로 날아온 예림이가 눈을 쭉 가늘게 뜨며 말했다. 귀신이네.
“아니, 뭐. 근데 예림이 넌 별일 없었어?”
“있었죠.”
예림이가 내 옆의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씨익 웃었다.
“세상에서 제일 대단한 사람을 만났어요.”
“응? 대단한 사람?”
“네. 그래서 아저씨보다 그 사람이 더 좋아질 거 같은데, 괜찮죠?”
“그야 예림이 네 마음이지. …그런데 누구야?”
순수하게 궁금했다. 예림이가 이렇게나 좋게 평가하는 사람이라니, 혹시 현아 씨인가? 아니면 세성 길드장이나 마찬가지였던 소영 씨?
“음, 아직은 쫌 부끄러우니까 나중에 말해 드릴게요.”
“부끄럽다고?”
“그런 게 있어요!”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예림이 옆에서 윤윤이 두 손으로 자기 입을 막고 있었다. 윤윤은 아는 모양이구나. 슬쩍 찔러서 털어놓게 만들기야 쉽겠지만 그래서는 안 되지. 궁금했지만 예림이가 직접 말해 줄 때까지 기다리는 게 맞다.
궁금하지만. 누구지. 이상한 사람인 건 아니겠…….
“예림아, 그 반지는 못 보던 건데.”
“받았어요! 그 사람한테.”
“뭐? 반지를?”
누구냐, 진짜! 아니, 그냥 아이템이겠지만, 그래도 대체 누구야! 반지, 한 쌍의 링 반지. 누가 가지고 있었더라. 반지나 팔찌 같은 액세서리는 감추기가 쉬운 만큼 잘 드러내지도 않았다. 남에게 성능을 들켜서 좋을 거 없으니까. 그래서인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아이템, 맞지?”
“네, SS급이에요!”
예림이가 자랑스레 반지 낀 손을 흔들어 보였다. 혹시 아느냐고 옆에 앉은 나를 쿡 찔러보았지만 모르는 눈치였다.
“아, 그리고 저 대학 갈 거예요.”
“당연히 가야지.”
“제대로 공부할 거라고요. 길드장처럼 무늬만 대학생 말고요.”
…세상에. 대체 뉘시기에 애를 저렇게 바꿔 놓은 거야. S급 헌터가 시험 성적까지 좋을 필요 있냐던 중학생 입에서 스스로 공부할 거란 소리가 나오게 만들다니. 완벽한 양육자 칭호 넘겨드려야 하는 거 아니냐.
건축학 쪽으로 알아볼 거라며 예림이가 말했다. 그래, 공부 열심히 해두면 좋지. 세상이 또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으니까 헌터 말고도 자기 자리 하나쯤 만들어 두는 게 안전할 것이다.
그사이 빌딩의 산 너머에서 탄내가 자욱하게 풍겨왔다. 치솟는 연기에 무너진 건물들, 희미하게 들려오는 비명. 그야말로 전쟁터가 따로 없었다. 물론 던전 안은 언제나 전쟁터였지만.
“다른 사람들도 슬슬 올 때가 되었는데.”
늦네. 설마 던전이 서울 한정이 아니라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프랑스에 떨어져 버린 노아 씨라거나. 송 실장님이야 서울 출신이지만 성현제는 모르겠다. 처음부터 한국 서울에서 시작했을까. 아니면 다른 곳에 있다가 적당한 거점으로 여겨진 한국으로 온 것일까. 엉뚱하게 이탈리아 같은 곳에 가 있는 거 아닐까 몰라.
“참, 아저씨! 피스는 글자 모르잖아요! 아마도요……?”
“피스는 못 들어왔다고 했어.”
“그래요? 다행이네요.”
“김서방들! 뭐 마실래?”
잠깐 사라졌던 윤윤이 자판기를 뜯어왔다. 주인 없는 물건들을 마구 가지고 오는 것이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밖에 나가서도 저러면 안 되는데.
“아저씨, 손 시려 보이는데 캔 커피 데워 드릴까요?”
“응? 괜찮아.”
“아저씨 말고요.”
아, 저쪽 나. 하긴 장갑 없이 내내 케이크상자를 들고 있다 보니 손가락 끝이 살짝 발개져 있었다. 저 정도야 별거 아니긴 한데.
“나도 괜찮아.”
“괜찮기는요. 여기 식혜도 있어요.”
예림이가 단검을 꺼내 음료수 자판기 옆면을 깔끔하게 잘라냈다. 그리곤 큼직한 물방울을 만들었다. 캔 커피와 식혜, 꿀물이 따뜻한 물방울 속에 퐁당퐁당 담겼다. 윤윤이 옆에서 사이다를 마구 흔들어 땄다. 먹을 거 가지고 장난치지 마라.
“난 커피로 부탁할게.”
“아저씨는 꿀물이요.”
“아니 커피 마시고 싶은데.”
“홍삼도 들었대요. 아저씨도 꿀물로 드릴까요?”
회귀 전에 내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난 건강해.”
“아니거든, 예림아. 얘도 꿀물 줘. 집에서 맨날 믹스커피 타 먹었다고.”
그보다는 술이 더 문제였지만 그것까진 예림이 앞에서 말하고 싶지 않았다. 결국 우리 둘 다 나란히 홍삼이 쥐꼬리만큼 함유되었다는 꿀물을 손에 쥐게 되었다. 나도 장갑을 벗고 따뜻한 음료수 병을 감싸 쥐었다. 장소도 버스 정류장이다 보니 어쩐지 던전이 튀어나오기 전으로 돌아온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퇴근길에 가끔 온장고 음료수 사 마시곤 했는데.”
“만지작거리기만 하다가 다 식기도 했고.”
“버스 정류장 보면 동생 생각나서 한동안 버스 타기 싫기도 했잖아. 겨울엔 마중 나오지 말라고 몇 번이나 타일러도 말도 안 듣고.”
“…그랬었지. 진짜 까마득하다.”
우리 둘은 무의식중에 병뚜껑을 따고 동시에 한 모금 마셨다가 동시에 인상을 찌푸렸다. 이상한 맛이야. 음료 뚜껑 닫고 다시 손으로 감싸기만 했다.
“악! 한유현! 얼음 녹잖아! 내 강아지!”
예림이가 소리치며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곰 아니었어?
“힘들게 만든 건데! 단순한 글자와는 다르… 어? 아저씨, 저쪽에도 헌터들이 오고 있어요! 제가 갈까요?”
“가까운 거 아니면 내버려 둬. 유현이가 금방 처리하고 올─”
콰르르릉!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얼른 예림이에게 선생님 스킬을 썼다. 예림이의 시야에 번뜩이는 빛이 들어왔다. 황금빛 전류가 검은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 이리저리 미친 듯이 튀어 오른다. 마치 파도가 밀려오는 것처럼 사방을 뒤덮으며 화려한 빛을 흩뿌려 댔다.
이어 차르륵, 뻗어 나간 사슬이 도로 양옆의 가로등들을 휘감았다. 꺼져있던 가로등 불빛이 일시에 눈부시게 켜지며 퍼버벙, 폭음과 함께 터져 나갔다. 작동은 하지 않았어도 전기는 흐르고 있어 힘이 더해진 걸까. 유독 큰 폭발이었다.
“한 분은 납시셨네.”
음료수 병을 의자에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귀 전의 나 또한 몸을 일으켰다.
멀쩡히 사슬 쓰는 거 보니 현재의 성현제 맞고, 별문제는 없었던 모양이었다. 유현이가 먼저 무너진 건물을 넘어 돌아오고 이내 성현제가 나타났다. 눈도 멀쩡하고.
“내가 마지막은 아닌…….”
성현제가 드물게 말꼬리를 흐렸다. 나와 나를 향하는 금안이 살짝 커졌다. 습관처럼 띠고 있던 미소도 더욱 짙어지며 장갑에 감싸인 손가락이 입가를 가볍게 누르듯 매만진다. 저거 저거, 틀림없이 흥미가 동한 거네. 보자, 지금이 26분이니까.
“한유진 군이 두 명이라니. 한 명은 내가 데려가도 되겠군.”
뭐래, 싶었지만 3분이 지나지 않았기에 속으로만 생각했다. 유현이가 우리 뒤로 가 당장이라도 감쌀 듯 서며 말했다.
“형은 전부 내 겁니다.”
유현이 넌 또 뭔 소리야.
“유현아, 사람한테 그러면 안 되는 거야.”
“하지만 나도 형 거잖아.”
– 맞아요, 형! 원래 기브 앤 테이크랬어요!
그건 또 어디서 들었니, 린아.
“한유현이야 당연히 한유진 군의 것이지만, 한유진 군에 대해서는 내게도 지분이 있지 않나. 우리는 파트너니까.”
파트너? 하고 회귀 전의 내가 작게 중얼거렸다. 성현제의 말에 예림이도 거들고 나섰다.
“저도요! 한유현은 몇 명이든 아저씨 거 하라 그러고요, 아저씨 지분은 저한테도 있죠! 후견인과 피후견인, 보호자와 피보호자 관계잖아요.”
“어? 그럼 나도! 나 대장 김서방과 계약관계야!”
저런 식으로 말하니까 내가 무슨 빚쟁이 된 거 같잖아. 그리고 아직도 3분이 지나지 않았다. 3분 기네. 그래서 성현제에게 웃어 보였다.
“성현제 씨도 참. 물론 우리는 동업자가 맞긴 하지만요. 아, 이쪽은 스물아홉 살의 저입니다. 저쪽은 내 친절한 파트너인 성현제 씨야. 세성 길드장이라고, 잘 알지?”
상냥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자 성현제는 물론이요, 예림이와 유현이와 나까지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형, 어디 아파? 이상한 스킬에 당하기라도 한 거야?”
“아저씨, 우리랑 같이 있던 아저씨 맞죠? 옷 바꿔 입은 거 아니죠?”
“나 맞고 멀쩡해. 성현제 씨, 어디 다친 곳은 없지요? 헌터 무리를 처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참 믿음직스럽… 3분 지났다.”
해방이다. 무슨 상황인지 몰라 하는 회귀 전 내 팔을 붙잡으며 당부했다.
“위험한 인간이니까 조심해.”
“…뭐?”
“세성 길드장 말이야, 세성 길드장.”
“부정은 않겠네만.”
성현제가 얼굴만큼은 정말 다정하게 꾸미며 나를, 내 옆의 나를 바라보았다.
“친애하는 한유진 군. 만약 여기서 무사히 나가게 된다면 있을 곳이 필요해지지 않겠나.”
“우리 집에 빈방 있습니다만? 해연 길드에는 더 많고요.”
“힘들 텐데.”
성현제의 목소리가 나직이 이어졌다.
“사람은 가까울수록 서로 비교하게 되지. 동료, 친척, 친구, 부부, 형제자매. 자주 마주치고 비슷한 환경 속에 있을수록 누가 더 나은가 모자란가 무의식중에라도 생각하기 마련이야. 그런데 심지어 그것이 같은 사람이라면.”
…구별만이 아닌, 차별이 일어날 수밖에 없겠지. 그것도 회귀 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에 뚜렷한 차이가 있었다. 성현제의 말대로 내게 너무 가혹한 환경이 될 게, 분명했다.
아직 무사히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긴 하지만. 틀린 소리는 분명 아니다.
“그래서 성현제 씨가 맡아 주시겠다고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지금이야 신기하니까 관심을 가지는 거겠죠. 하지만 그게 얼마나 가겠습니까.”
강한 감정은 공유가 될 정도로 나와 깊게 연결이 되어서, 성현제도 아마 던전 속의 나를 진짜로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흥미가 돋긴 하겠지. 회귀 전 나를 보호하듯 바싹 끌어당겼다. 나보다 힘이 약할 리 없었지만, 순순히 끌려왔다.
“사람 좋아 보이는 얼굴에 넘어가지 마. 세성 길드장 잠깐 관심 가졌다가 몇 달 못 지나 버리기로 유명한 인간이야. 피해자가 한둘이 아니라더라.”
“한유진 군의 말대로 계속 관심을 유지하겠다는 장담은 할 수 없다네.”
“저 봐, 저렇다니까.”
“하지만 보호와 필요치 이상을 충족하는 보살핌은 끊기지 않을 것이라 약속하지.”
“뭘 믿고요?”
“이래 봬도 나에 대한 길드원들의 신뢰도는 높다고 자부하네만.”
그, 그거야. 문득 던전 속의 성현제가 떠올랐다. 그는, 끝까지 책임을 졌었다. 자신의 길드에. 어떤 식으로든지.
“그러니까, 세성 길드로 데려가겠다는 겁니까.”
“서로에게 괜찮은 계약이 아닌가.”
일단은 나니까 세성 길드원으로 데리고 간다면 나쁠 거야 당연히 없었다. 세성과 사육소 간의 관계도 더욱 강해질 테고 여차하면 인질로 삼아도 되고. 그리고 회귀 전 나에게도 분명 도움이 되겠지. 대뜸 사육소로 가서 낯익으면서도 낯선 환경에 떨어뜨려지는 것보다야 아예 낯선 곳에서 천천히 적응해 가는 편이 나을 것이었다.
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주눅이 든 듯 성현제와 시선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면서도 고집스럽게 말을 이었다.
“왜 멋대로들 남의 보살핌이 필요하다고 말하는지, 모르겠군요. 저 하나쯤은 충분히 책임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왔고요. 너도 마찬가지야. 난 내가 알아서 살아가.”
마지막 말은 떨림 하나 없이 단호했다. 그래, 내가 이랬지 뭐. 내 형편이 훨씬 좋아졌다고 해서 무심코 나를 약하게 생각해 버렸다. 나는 언제나 여전했는데.
그리고 성현제는 두 번 거절당해 버렸다. 같은 나니까 어쩌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