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595
593화 파티 끝 (2)
콰득!
“……!”
검붉은 줄이 다리를 꿰뚫었다. 흰 바지가 순식간에 붉은 물이 든다.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었다. 피 냄새, 화약 냄새, 짐승의 으르렁거림. 입안이 바싹 메말랐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사실상 효과 없는 발버둥질이 전부였다. 머리를 굴려 보아도 답이 없었다.
‘…처음부터 각오는 했지만.’
채터박스의 목표를 내게로 돌렸을 때부터. 목숨만 건진 채로 놈에게 붙잡힌다 하는 결과는 각오하고 있었다. 그보다 더 나은 상황을 만들기 힘들 것이라는 사실 또한 짐작했었다. 그러니 지금 이 판도 최악까지는 아니었다.
어쨌든 채터박스가 나 외의 사람들에게 직접 손대지 못하게는 만들었고, 내 목숨도 붙어는 있을 테니까. 무해의 왕에게 덧씌워지는 것도 모면했지. 이 정도면 할 만큼 한 거긴 한데.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내 앞에 선 채터박스가 주위를, 밖의 시청자들을 돌아보는 몸짓을 하며 말했다.
“다시 계약을 합시다.”
“…계약?”
“예. 끈질기게 버틴 한유진에 대한 보답으로, 내가 만들어 낸 무해의 왕 또한 당신의 소중한 이들을 해치지 못하는 계약을.”
채터박스의 목소리가 나를 달래듯 한층 부드러워졌다. 몸을 누르는 위압감도 조금 약해졌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스스로를 포기하십시오.”
“내가 왜 그런─ 크, 읍!”
구두 굽이 다리의 상처를 짓밟았다. 절로 튀어나오는 비명을 간신히 삼켰다. 뒷덜미를 따라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이미 느껴 보지 않았습니까. 고통은 없을 겁니다.”
“이 개… 읏─.”
“그 몸 그대로 한유진만 지워질 뿐이니까요. 당신을 지켜보는 이들 또한 괴로움이 덜하겠지요. 아니, 그들은 보지 않게 해 드리겠습니다.”
유혹하듯 단 목소리 아래, 구두 끝이 상처를 누르고 틈을 벌린다. 입안이 달았다. 한껏 힘을 주느라 어금니는 물론 턱까지 얼얼해졌다. 그 와중에 이러다 치과 신세 져야 하는 거 아니냐는 헛생각이 들었다.
“내가, 없어지는데. 무슨.”
“지금 이대로도 한유진은 무사하지 못할 겁니다. 목숨은 붙어 있겠지요. 하지만 그 정신을 지켜 낼 수 있을까요.”
…마취 같은 건 바랄 수 없겠지. 지금도 이 지랄이니까. 채터박스가 내가 멀쩡한 정신을 유지하도록 놓아 둘 것 같지도 않았다.
“무해의 왕에게 덮어씌워진 한유진, 부서져 텅 빈 백지가 되어 버린 한유진. 그리 큰 차이는 나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과정은 후자가 훨씬 괴롭겠지요. 당신에게나, 당신의 사람들에게나.”
“…네 말대로.”
보기 힘들 것이다. 채터박스가 계약만 제대로 해 준다면 더 안전한 방법일 수도 있다.
“괴롭겠지. 나는 그렇다쳐도, 괴롭게 만들고 싶진 않아.”
“한유진만 포기한다면.”
“그런데 예시가 잘못되었어.”
채터박스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분명 핏기 없이 창백해진 얼굴이겠지만 힘껏 입술 끝을 올려 보였다.
“무해의 왕에게 덮어씌워진 한유진과 끝까지 버티고 있을 한유진이겠지. 내가 왜 부서져. 이젠 뭣도 아닌 새끼가 자신감만 넘쳐 나시네. 채널 주인인 주제에 딴 방송 보고 있었냐? 넌 그냥.”
내게 무슨 짓을 하든, 어떻게 날뛰든.
“지나갈 일 중 하나일 뿐이야. 그때 꽤 힘들었었지, 기분 나쁜 놈이었어. 이 정도 감상이나 되겠지.”
답이 없을 정도로 막막하다. 내가 감당치 못할 정도로 강하다. 하지만 그런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네놈은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게 될 거다. 아예 잊혀 버릴지도 모르지. 넌 별로 중요한 존재가 아니거든. 차라리 옥상정원에 자리 잡은 참새가 더─ 아아악!”
멀쩡한 다리에도 줄이 날아들었다. 살이 찢기고 피가 튀었다. 뼈까지 파고든 듯했다. 이번에는 다 참지 못하고 비명을 내뱉었다. 단 숨이 울컥 목구멍을 타고 올라온다.
“의외군요. 당신이 원하는 조건이라 생각했건만.”
“내가, 나를 별로… 후우. 아끼지 않는 건 사실이지만. 질기기도 더럽게, 질기더라고.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도, 그걸 알아.”
걱정은 하겠지. 힘들기도 하겠지. 그래도 희망이 있는 편이 낫다. 채터박스를 비웃듯이 쳐다보았다. 무해의 왕은 우리에게 별 관심 없다는 듯 몬스터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게다가 말이야, 조건이 너무 짜잖아. 고작해야 먼저 공격하지 않을게요~ 정도로 한유진을 포기하라고? 야! 내 몸값이 얼만데! 최소한 세계 평화 오백 년 정도는 내놔라!”
솔직히 그렇잖아. 내가 잡은 초월자만 해도 둘인데 그거 아는 놈이 뭐 어쩌고 어째? 적어도 ‘그쪽 애들 평생 안전하게 살 수 있게 해 주겠습니다’는 되어야 귀가 솔깃해지지.
“파티도 주최하고 볼 거 다 본 주제에 양심도 없이 후려치네! 난 비싼 몸이야! 반년 전에도 세계 1위쯤은 되어야 입찰 기회 준 댔거든? 지금은 더 올랐다!”
물론 기회만 있는 거지 무조건 살 수 있는 건 당연히 아니다. 쉽게 팔까 보냐.
“얼만데?”
몬스터 등에 올라 탄 해파리가 물었다. …안 팝니다. 채터박스는 조용히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반응이 없으니 더 섬뜩했다. 원래 조용히 미친놈이 더 무서운 법이니.
“다리부터 자르도록 하지요.”
다시금 강해진 위압감에 어깨가 묵직해졌다. 이를 악물며 피하지 않고 채터박스와 시선을 마주했다. 괜찮아. …솔직히 안 괜찮다. 다리 다친 적은 많아도 아예 잘려 나가다 못해 다른 걸 달게 된 적은 없었는데.
절로 숨이 가빠졌다. 버틸 수 있다고 당당히 외쳤지만 겁이 안 날 수가 없었다. 뭔가 방법이 없을까. 다른 방법이.
“자, 잠깐만!”
“이제 와서─.”
“내 인벤토리는, 간섭 못 하겠지!”
채터박스가 무슨 소리냐는 듯 눈썹을 힐끗 올렸다. 여태껏 만난 초월자들도 내 인벤토리를 뒤지진 못했다. 그러니 초월자도 아니게 된 채터박스야 말할 것도 없을 터였다.
“전에 보여 준 무해의 왕의 서랍, 가지고 싶지 않아?”
루가 폐야의 마지막 유품. 서랍을 써서 도망쳐 볼까도 했지만 꺼내는 즉시 사용하기도 전에 빼앗길 확률이 높았다. 그래서 최대한 거리를 벌려 보려 하였지만 순간이동 하는 줄 때문에 별 소용이 없었다. 내 말에 채터박스의 주위로 흔들거리던 검붉은 줄들이 움직임을 멈추었다. 놈이 말해 보라는 듯 턱 끝을 미미하게 움직였다.
“내가 정신을 놓으면, 인벤토리 사용도 못 할 테니까. 영영 묻히게 되는 거라고.”
“부서지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혹시 모르잖아, 혹시! 게다가 서랍 속엔 루가 폐야의 유품이 잔뜩 들어 있어. 네가 좋아할 만한 흔적도 있지!”
71번이라거나. 만약 채터박스가 서랍의 새 주인이 된다면 71번은 무해의 왕으로 변하지 않을까. …아니면 채터박스의 모습이 될지도 모른다.
“제일 작은 서랍이지만 아끼던 거야~ 종종 거기서 쉬기도 했어.”
휴대용 별장 같은 거였나. 루가 폐야의 말에 채터박스가 흥미 어린 눈빛을 머금었다.
“단순한 창고가 아니었군요.”
“나와 협상한다면 아예 서랍의 소유권을 넘겨받을 수도 있겠지.”
“당신을 장식해 두기에 괜찮은 곳입니까?”
…내 입으로 이런 소리 하고 싶진 않지만.
“그야, 완벽하잖아. 원래 무해의 왕이 머물렀던 의미 있는 장소고.”
“조건을 말씀하십시오. 물론 당신을 놓아줄 수는 없습니다.”
마른침을 삼켰다. 유품이라고 해도 내가 더 우선이니 풀어 줄 리는 없다. 대신 방송을 꺼 달라고 할까. 나를 보지 못하도록. 이 협상만 끝나면 채터박스는 바로 내 다리를 잘라 낼 것이다. 신체에 손대는 대신 분장 정도로 끝내 달라는 건, 들어주지 않겠지.
채터박스가 들어줄 만한, 최대한 내게 유리한 제안을 생각해 내기 위해 머리를 쥐어짜는 그때.
[□▲□□□■■◇◇◇■]메시지 창이 나타났다. 눈동자를 최대한 움직이지 않으며 그것을 바라보았다. 뭐라고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것은.
‘밖에서 뭔가 시도하고 있다.’
채터박스는 메시지 창이 나타난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듯했다.
“…내 몸뚱이 보존해 달라는 건, 안 되겠지?”
“안 됩니다.”
[□금■■◇▲□이□□▲■▽]신입인가. 명우도 함께 있는 걸지도. 미간을 잔뜩 좁혔다.
“젠장, 그냥 유품이나 받고 그만두면 안 돼?”
채터박스는 대답 대신 미소했다. 한껏 초조해하는 표정을 지어 주었다.
“내가 얼마나 힘들게 얻은 건데. …기다려 봐. 좀 더 생각해 볼 테니까.”
“뭘 하려고? 어떻게 하려고?”
무해의 왕이 내게로 돌아와 등에 매달리듯 달라붙었다. 메시지 창 쪽을 기웃거리는 것이 그녀에게도 메시지가 보이는 모양이었다. 제발 티 내진 마라.
[요정▲□□■▽그쪽▲□□□]…뭐? 요정이 또 있을 린 없고, 설마 한결이? 결이를 여기로 보내 주겠다는 건가.
‘결이는 일단 F급이니 공간이동 시켜 줄 수 있는 걸까.’
그리고 결이의 힘을 쓰면 내게 부담은 가지만 S급 이상이 될 수 있었다. 그래도 채터박스에 비하면 훨씬 약했다.
[신호] [˚▽˘]어, 신호가… 눈 한쪽을 감으라는 모양이었다. 그럼 요정용을 이동시킨다는 거겠지.
[뭐야? 뭔데?]머릿속으로 루가 폐야가 물어왔다. 대답하면 들통나잖냐.
“…공평하게 한번 붙어 보는 건 어때. 이기면 나 풀어 주고 앞으로 건드리지 않겠다 하고. 너도 스탯 F로 해서.”
“시시한 제안들이군요.”
[말해 줘! 말 안 할게. 내 이름 걸고 약속해. 자, 의식 위로 말을 떠올리는 거야. 쉬워. 게다가 내가 안으로 들어와 줬잖아. 서툴러도 난 기억을 읽을 수 있으니 알아볼 수 있다고!]“조금 더 머리를 굴려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양쪽에서 시끄러웠다. 루가 폐야를 완전히 믿을 순 없었지만, 그래도 혹 도움이 되진 않을까.
“고문당하기 직전인데 너 같으면 머리가 팽팽 잘 돌아가겠냐.”
[요정용을 보내 주겠대.] [응? 쉽지 않을 텐데 신기하네. 단순한 공간이동도 아니잖아.]루가 폐야의 말에 걱정이 덜컥 들었다. 설마 명우나 신입이, 혹은 어르신이 무리하는 건 아니겠지. 그렇지만 이대로 내가 채터박스의 손에 떨어진다더라도 그 셋이 고생하게 되는 건 마찬가지일 터였다. 오히려 지금 어떻게든 빠져나가는 게 부담이 덜할지도 모른다.
“그럼 A급 정도는 어때.”
“저는 파티 주최자입니다.”
“소심하시네. 나보다 템도 많이 가졌을 거면서. 그럼 S급.”
“고통스러운 나머지 서랍을 바치고 빌게 될 가능성도 있겠지요.”
불확실한 내기를 하느니 고문을 해서 빼앗겠다 이 소린가. 역시 쉽게 넘어오진 않았다. 설사 여기서 벗어난다더라도 채터박스는 저 힘을 그대로 지닌 채 우리 세상에 머물게 되는 것이다. 간접적으로 우리를 위협하는 일쯤은 어렵지 않겠지.
채터박스가 한쪽 팔을 들어 올렸다. 손목을 돌려 시계를 들여다본다. …주문한 시계 찾아야 하는데. 곧 받을 수 있을 거라는 연락도 왔었는데.
“10분 더 기다려 드리겠습니다.”
“30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치사한 놈. 초조함 속에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이 상황에 결이를 불렀다간 인질만 하나 더 늘어나는 꼴이 되지 않을까. 적당한 대가로 서랍을 넘기는 척 꺼내서 사용해 버려? …100퍼센트 바로 빼앗기겠지.
[너 말이야, 디아르마의 능력을 사용했었잖아.]루가 폐야가 돌연 말했다.
루가 폐야의 힘은 나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정신계니 기껏해야 공포 저항이 영향을 미칠까. 하지만 드래곤 슬레이어 칭호는 내가 타고난 능력도 아니었다.
[요정용이 올 수 있다잖아.] [그래도─ 아.]설마, 이거, 설마. 내 머릿속에서 무해의 왕이 까르르 웃었다.
[F급이라도 상관없어! 지금의 나도 아주 작은 조각이었으니까~.]그리고.
[씨는 이미 뿌려졌지, 내 기억이.]나는 루가 폐야의 힘을 직접적으로 느꼈다. 거의 동화되다시피 하여. 결이의 도움을 받아 충분히 사용할 수 있을 만큼 경험했다.
또한 기억은, 넘칠 정도로 전 세계에 존재하였다. 무해의 왕과 연결된 나의 기억이, 내 존재의 기억이.
“좋아, 그럼 내가 덜 고통스럽게 해 줘. 완전히 마취해 달라는 건 들어주지 않겠지.”
“당신의 정신을 유지할 정도로, 말입니까?”
“그래.”
“소중한 이들에게 희망이 생기겠군요. 비록 한유진의 육체는 일부 조각만이 남게 되겠지만.”
채터박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내 다리가 치유되었다. 통증이 사라지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다시 입을 열었다.
“덤으로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 10분 정도만 줘. 그동안은 내게 손대지 마. 내 소유물도 건드리지 말고, 위협하지도 말고.”
“원하시는 대로.”
계약서가 나타났다. 조건을 확인하고 서명했다. 이제 10분.
“근데 말이야.”
채터박스를 바라보며 한쪽 눈을 감았다.
“계약자가 사망하면, 대가를 내줄 필요도 없는 거지?”
서랍 그거 남 주기엔 너무 아깝거든. 채터박스가 의아해하기도 전에.
-아빠!
공간이 일그러지며 요정용이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