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Chapter 93
93화 리에트
예림이는 생각보다 훨씬 흔쾌히 노아를 용서해 주었다. 나를 다치게 한 건 화가 났지만 싸운 건 재미있었다, 라는 모양이었다. 그러니 내가 괜찮다면 상관없다고 말했다.
“빚 다 갚고 나면 해독 아이템부터 새로 살 거예요. 제일 좋은 걸로.”
– 꺄아우.
블루를 천장에 닿을 듯 높이 던졌다 받아 주며 예림이가 말했다. 그리고 2차전을 뛰고 싶단다. 처음부터 보통 성격이 아니긴 했지만 날이 갈수록 더 호전적이 되어 가는 것 같다. S급 전투 헌터치고 호전적이지 않은 경우가 드물긴 하지만.
“그보다는 탄식 컨트롤 연습에 더 집중하는 게 좋을걸. 네 스탯상 공격은 피하는 게 최고고 독기는 얼려서 막을 수 있으니까. 동시에 냉기 저항도 최대한 빨리 S급으로 올리고. 자속성 저항은 익숙해지면 조절도 가능해지거든. 네 경우엔 독에 당한 부분만 저항 낮춰서 얼리는 식으로 응급조치할 수 있겠지.”
유현이나 성현제도 장비 외 아이템 사용 금지인 랭킹전에서 그런 식으로 종종 사용했었다. 상처를 지져 버려서 말이다. 응급처치용으로 좋다곤 해도 보는 입장에서는 뭔 미친 짓이냐 싶은 광경이었지만.
자속성이 아니더라도 마력 컨트롤이 천재적인 수준이라면 저항력 조절이 가능하다. 물론 마력 스탯부터가 바닥인 반면 스킬 등급은 더럽게 높은 나야 영영 불가능할 테고. 끌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지.
“참, 패시브 스킬 끌 수 있더라. 저항 스킬 같은 거 말이야.”
“진짜요?”
“어. 두 번 연속 끄려고 하면 꺼져.”
신기해하던 예림이가 고개를 갸웃 기울인다.
“안 되는데요?”
“…안 돼?”
“네.”
…왜 안 되지. 독 저항을 껐다가 켜 보았다. 잘되는데. 혹시나 싶어 유현이에게 전화해 물어보았다. 아직 꺼 본 적 없다고 확인해 보겠다더니 이내 안 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너도? …등급에 따라 다른 건가?”
[그럴지도.]L급 패시브류 스킬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나 말곤 없을 테니 확인해 볼 수도 없고. 내 저항 스킬은 죄다 L급이니 스스로도 비교해 보는 게 불가능하다.
어쩐지 5년 뒤에도 스킬 끌 수 있다는 말이 안 나온다 했더라니. 나처럼 엉뚱한 시도 해 본 사람이 아예 없지는 않았을 텐데.
“등급 낮으면 안 꺼지나 보다.”
“길드장님 화염 저항 S급 아니었어요? 아저씨 독 저항 등급이 대체 뭐길래요?”
“L급.”
“와, 미친. L급도 있네.”
“예림아, 고운 말 예쁜 말 쓰자. 독 저항 S급 이상인 건 세성 길드장이 눈치채고 말해 버렸지만 자세한 등급은 비밀이다.”
어떻게 정확히 딱 잡아낸 건지는 아직도 의문이지만. 노아의 독 스킬 등급을 알고 있었나? 리에트와 대화하는 거 보면 스킬 털어놓고 지낼 사이는 아닌 듯했는데. 사육 시설 방문 허가도 안 내줬었고.
“아무튼 대부분의 스킬은 많이 사용해서 능숙해질수록 다양한 응용이 가능해. 등급이 오르면 추가 기능이 생기기도 하고. 그러니 아이템 살 생각보다 스킬로 해결할 궁리를 먼저 하는 편이 좋아.”
미래의 일들이다 보니 떠오르는 예시를 들 수가 없구만. 지금의 유현이는 아직 혈염은 사용하지 못한다. 바바르 때 보면 흑염까지만 쓸 수 있는 듯했다. 푸른 버들잎도 투명화 조절 못 하고.
등급 올라간 푸른 버들잎 진짜 개 같은 스킬이라고 치 떠는 랭커들 많았는데. 만약 지금 혈염 쓸 수 있었으면 노아가… 정말 위험했겠구만. B급 치유 스킬 정도로는 회복 불가능한 건 물론이요 날개가 아예 녹아내렸을 것이다. 일반 불길과 달리 피해 범위 조절도 쉬워서 주변 피해도 없었을 테니 말리기도 전에 끝장났겠지.
회귀 전의 예림이는 각성이 지금보다 늦어서 스킬의 등급 상승은 없었다. 그래도 탄식과 창백한 비의 조합은 좋았지. 스킬 사용에 능숙해지면 가르쳐 줘야겠다.
* * *
“이쪽입니다.”
예림이와 함께 헌터용 구치소로 가자 송태원이 직접 마중 나와 있다가 안내해 주었다. 헌터 전용이라고 해도 하급은 보통 인벤토리 봉인팔찌만 차고 일반 구치소행이다. 그래서 나도 여기는 처음 와 본다.
…유현이 놈은 몇 번이나 와 봤을까. 갑자기 심란해진다.
“예림이 넌 이런 데 잡혀 오면 안 된다.”
“저 법 없이도 살아요.”
음주에 헬멧 미착용 중학생이 자신 있게 말했다. 아직 위법까진 아니긴 하지.
문 몇 개에 계단까지 거쳐 상당히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다. 안쪽으로 갈수록 지키고 있는 사람들의 낯빛이 영 좋지 않았다. 그래도 나중에는 S급 헌터도 어느 정도 제압 가능한 아이템도 나오니까 조금만 참으세요. …한 사 년쯤.
상급 헌터용 수용실은 지하에 있었다. 총 세 개의 수용실은 들어가는 입구도 각각 달랐다. 한 명이 탈출할 때 다른 두 명까지 나가 버리는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였다.
“부끄럽지만 전투 적성 상급 헌터들은 탈출할 것을 상정해 둔 채 감시합니다. 탈출을 막지 말고 빠르게 보고할 것, 이 기본 지침이지요. 물론 이곳이 구치소이기 때문이기는 합니다. 비각성자 살해 건은 바로 특수격리소로 옮겨지니까요. 특수격리소는 상급 헌터라 해도 자력 탈출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특수격리소에 대해서는 굳이 묻지 않았다. 그곳이라고 하여 상급 헌터를 구속할 감옥이나 장비가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상급 헌터라 해도, 사지가 멀쩡하지 못하면 약해질 수밖에 없다.
“노아 루히르의 경우 독으로 잠금장치를 녹이고 은신 스킬을 사용하여 탈출하였습니다. 그래도 얌전한 편이었죠.”
송태원이 잠긴 문을 열며 말했다. 독도 뒤처리가 어렵지 않게 최소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래, 애가 갑자기 발작해서 문제였지 첫인상부터가 예의 바르긴 했어.
안은 평범한 방이었다. 십여 평 정도의 심플하게 꾸며진 원룸 같았다. 욕실 따로에 취식 시설이 없어 더욱 넓어 보인다. 상급 헌터들 눈에야 골방 수준이겠지만.
노아는 그 한가운데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얌전히 앉아 있었다. 아직 어제의 그 트레이닝복 차림이다. 모아 붙인 무릎 위에 두 손도 모아 올린 채 얌전히 있었다고 주장이라도 하듯 이쪽을 바라봐 오는 게, 말 잘 듣는 골드리트리버가 떠오른다. 손, 하면 줄 거 같은데.
“안녕하세요, 한유진 씨.”
인사하는 목소리에 뚜렷한 긴장감이 어려 있었다. 키워드 효과 때문인지, 칭호 때문인지, 아니면 그 밖의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알 수는 없다.
나는 최대한 다정하게 미소 지어 주었다.
“약속대로 기다리고 있어 주셨네요.”
“네. 전화 통화만 조금 하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전화? 자기 길드에 한 건가. 그러고 보니 얘 길드는 어쩌지. 그냥 다 데리고 오라고 할까. 계속 다른 길드들에게 경비 신세 지기도 그렇고, 믿을 만한 사람들이라면 통으로 옮기게 하는 것도 괜찮을 거 같은데.
합의만 하면 끝나는 일이라 노아를 빼내 오는 절차는 간단했다. 헌터용 계약서 한 장 작성하고 끝이었다. 계약서의 고용 기간은 한 달이었다. 상대가 S급 헌터였으니 피해 금액 대비 한 달은커녕 일주일도 과한 기간이었다.
노아야 자기 누나가 무서워지지 않을 때까지 있겠다고 했지만.
“리에트는 입국 금지 처리되었습니다.”
계약서 사본을 챙겨들며 송태원이 말했다.
“예? 입국 금지요?”
“네. 명목상은 불법 계약서 거래입니다만, 그날의 통화 내용상 한유진 씨에게 해를 입힐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어 입국을 막기로 하였습니다. 혹시 불필요한 조치였습니까?”
“아뇨, 아닙니다. 그렇게 해 주시면야 감사하죠.”
한동안은 리에트와 마주치고 싶지 않다. 시간이 적당히 지나면 일단 전화 통화로 대화를 해 본 뒤에 대면할지 말지 결정을 해야지.
“불법 계약서 거래는 경범죄에 해당되기 때문에 입국 금지는 최대 1년까지만 가능합니다. 그리고 이건 독 저항이 통하지 않는 약물 목록입니다. 헌터 전용 병원에 통보도 해 놓았습니다. 독 저항 스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의료사고 예방을 위해 자동 등록됩니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며 파일을 받아들었다. 목록이 제법 많다.
“술도 안 취하던데, 통하는 약물이 있나 보군요.”
“술의 독성은 생각보다 강합니다. 통하는 약물은 독성이 거의 없거나 독 저항에 걸리지 않을 만큼 약하기에 인체에 해를 끼치지는 않습니다. 대부분이 의료 보조용이지요. 또한 헌터용 진통제처럼 던전 부산물로 만들어진 특수한 약물도 있습니다.”
“저도 그 진통제 가지고 있어요. 해독 아이템이 B급짜리라 독 저항 B급까지 통하는 걸로요.”
예림이가 말했다. 나도 회귀 전에 헌터용 진통제를 쓰긴 했지만 제일 싼 거였지. 현재는 S급까지 나와 있다니 저항 스킬 안 끄고는 진통제도 못 쓰겠네.
그 외 독 저항 안 통하는 상비약 추천도 받고 구치소를 나섰다. 내 옆에 바싹 붙은 예림이와 달리 노아는 두어 발 떨어진 채 따라오고 있었다. 멈춰 서자, 역시나 뒤떨어진 채로 멈추어 선다.
“노아 씨.”
“네?”
“그렇게 떨어져서 걸을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아… 이게 더 편해서요. 안 됩니까?”
편하다, 라. 아마 리에트와 함께 다닐 땐 항상 뒤쪽에서 쫓아다녔던 모양이지.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당당하게 앞장서는 리에트의 모습이 너무 잘 떠오른다.
당장 억지로 고치라 할 필요는 없기에 괜찮다고 하고 다시 주차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예림이도 나도 아직 운전면허증은 없었기에 김지연 헌터가 따라와 주었다. 면허 딸 거라고 하자 예림이가 자기도 딸 거라며 다음 주 주말에 내 몫까지 같이 시험 신청을 해 놓았다.
“그래서 스크린 게임장엘 갔는데요, 나름 재밌긴 했지만 역시 현실이 최고긴 해요. 다음에 사격장 같이 갈래요? 저녁내기 어때요?”
“그냥 내가 사마.”
내기가 되겠냐. 저녁까지 시간 꽤 남았으니 노래방 가자는 예림이의 조름에 노아를 힐끗 돌아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 * *
“한국 헌터협회에 항의 좀 해 달라니까. 응?”
“제 권한이 아니라, 잠시만 기다려 주시면…….”
멕시코 헌터협회 직원이 쩔쩔매며 말했다. 로비의 일반 직원들은 이미 자리를 피하고 헌터들만 남아 소동의 원인, 리에트를 주시하고 있었다.
알록달록한 판초에 뾰족한 솜브레로까지 맞춰 쓴 리에트가 손끝을 팔랑팔랑 흔들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녀의 동작 하나하나마다 주위 사람들이 흠칫흠칫 몸을 떤다.
“그간 많이 도와줬는데 이런 것도 하나 못 해 줘?”
신규 불법 던전 공략을 주로 즐기는 리에트였지만 프리헌터로서의 활동도 했다. 미국과 유럽 쪽으로 죄다 빠져나가는 바람에 S급 헌터를 단 두 명밖에 보유하지 못한 멕시코도 몇 번 그녀의 도움을 받은 적 있었다. 정확히는 대가가 주어진 거래였지만 리에트의 머릿속에서는 선심 써서 도와줬다, 로 변질된 채였다.
어쨌든 아쉬운 쪽은 멕시코 헌터협회인지라 그녀의 거만한 말에도 반박은 할 수 없었다.
“내가 뭘 했다고 입국 금지라니. 고작 불법계약서 몇 장 가지고, 정말 너무한 거 아냐?”
– 쉬익쉿!
솜브레로의 너른 챙 너머로 작은 뱀이 머리를 내밀며 맞장구를 쳤다. 전신이 화려하게 반짝거리는 보석뱀이다. 리에트가 손을 올려 보석뱀의 턱 아래를 문질렀다.
“우리 자기가 얼른 널 맡아 줘야 하는데. 너도 빨리 성장하고 싶지, 벨?”
– 쉿쉿.
주인의 것과 닮은 황금색 두 눈이 기분 좋은 듯 가늘어진다.
“자, 얼른 나와 벨라레를 한국으로 보낼 궁리를 해 보라구.”
리에트의 눈썹 끝이 치켜올라가고, 스물스물 새어 나오는 살기에 헌터들이 얼어붙는 바로 그때였다.
콰장창!
유리문이 부서지며 헤비 듀티 픽업트럭이 로비로 뛰어든다. 반들한 바닥에 긴 타이어자국을 남기며 멈춰 선 트럭에서 무장한 남자들이 뛰어나왔다.
두두두두두!
곧장 퍼부어지는 총알에 헌터들이 제각각 몸을 피하거나 방어 스킬, 장비를 쓴다. 불행 중 다행이랄까. 리에트의 횡포 덕에 비각성자는 물론이요 총탄에 피해를 입을 정도의 하급 헌터도 이 자리에 없었다.
“저것들은 또 뭘까.”
어느새 벗어든 판초 자락을 털어내며 리에트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판초 자락 사이에 휘감겨 있던 탄환이 우르르 떨어진다. 평범한 천옷이건만 무슨 수를 썼는지 총알을 받아내고도 구멍 하나 나지 않았다.
“던전 브레이크는 신의 섭리다! 신의 뜻을 거부하지 마라!”
무장한 남자들 중 하나가 수류탄을 꺼내 들며 외쳤다. 다른 남자들도 제각기 폭탄을 꺼내든다. 긴장하는 다른 헌터들 사이에서 리에트가 입꼬리를 올렸다.
“아아, 요즘 튀어나온다는 테러범들이구나. 쟤들 처리해 줄 테니 한국 보내 주기다?”
멋대로 결정하곤 칼을 꺼내든다. 기다란 칼이 옆으로 뉘어져 느릿이 움직였다. 마치 장난처럼 허공을 가로로 스윽— 벤다. 갈라진 공기가 작게 흔들렸다. 미세하게, 그리고.
핑—!
팽팽하게 당겨진 실을 튕기는 소리와 함께, 어마어마한 힘이 폭탄을 든 남자들을 덮쳤다. 칼날로 된 폭풍 속의 힘없는 짚단처럼 인간의 몸뚱이가 서걱서걱 잘려 나간다. 팔다리, 머리가 떨어져 나가는데도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았다. 폭탄 또한 반 토막이 났음에도 잠잠했다.
지극히 비현실적인 광경 속에 공기가 한발 늦게 자르르 울린다. 멍청히 서 있던 헌터들이 그제야 마른침을 삼키고 침음을 흘렸다.
리에트는 칼을 인벤토리에 넣으며 인형처럼 흩어져 있는 시체들에게로 다가갔다.
“신의 뜻이라니. 그런 소리 하는 놈들치고 제대로 된 새끼가 없단 말이야.”
발끝이 잘려나간 머리를 툭 쳤다. 옆으로 데굴 구른 머리의 부릅뜬 눈이 리에트를 쳐다보았다.
[리에트.]“어머나?”
[다시 한 번 제안하겠다.]숨이 끊어진 머리로부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동시에 황금색 눈이 사납게 가늘어졌다.
“꽤 오래 잠잠하더니, 또 무슨 일일까. 나와 내 동생 근처에 얼씬 말라고 경고했을 텐데.”
물론 온건히 말로 한 건 아니다. 피가 흐르고 살점이 튀는 경고였다.
[리에—]“닥쳐.”
콰득, 군홧발이 머리를 짓밟아 깨부쉈다. 신발 바닥을 시체의 옷에 문질러 닦으며 리에트가 뒤를 돌아보았다. 환히 웃는 얼굴이 무섭도록 싸늘하다.
“저주 저항이랑 정신력 바닥 치는 놈, 있으면 알아서 기어 나오지 그래. 안 아프게 죽여 줄게.”
“그게 무슨—”
콱. 헌터의 목이 리에트의 손아귀에 눌러 잡히며 말이 뚝 끊어졌다. 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느끼지도 못한 헌터가 당혹감 속에 식은땀을 흘렸다.
“저주 저항 스킬이나 아이템 있어? 정신력은?”
“C급 아이템을…….”
“그럼 넌 됐고.”
목을 잡은 손을 휙, 흔들어 옆으로 내던진다.
“자, 다음. 빨리빨리 하자. 응?”
아니면 그냥 다 죽일까. 진득해지는 살기에 협회의 헌터들이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치는 가운데, 약간 창백한 안색의 남자가 리에트와 눈을 똑바로 마주쳤다.
“너구나.”
[저주독룡 디오 발쉐시스의 첫째.]황금색 눈이 순간 흔들렸다. 리에트의 미간에 골이 깊게 패며 여유롭던 입술 선도 일그러진다.
“방금, 무슨…….”
[한국 세성길드의 성현제를 죽이고 해연 길드 한유현의 형을 사로잡아 와라.]“이 새끼가 명령질을—!”
이가 으득 갈렸다. 하지만 리에트는 움직이지 못했다. 인간이 아닌 저주독룡으로서의 본능이 그녀의 발을 묶어 놓고 있었다.
완전한 디오 발쉐시스였더라면 공손히 머리 숙였을지도 모른다. 하나 리에트는 입술을 짓씹으며 스킬을 썼다. 무기의 힘을 빌지 않아도 충분하고도 넘칠 정도의 광포한 기세가 저주독룡왕의 주인이 깃든 남자를 세로로 갈라 찢어 놓는다.
동시에 남자의 몸의 일부가 폭탄의 파편처럼 주위로 튀어 올랐다.
“크악!”
“억!”
리에트의 기세에 짓눌려 있던 헌터들이 방어할 틈도 없이 픽픽 쓰러졌다. 그 주위로 짙은 독기가 흘러넘친다. 리에트의 발치로도 독기가 기어왔지만 높은 독 저항 덕에 근처만 맴돌 뿐이었다.
“…젠장, 머리 아파.”
– 쉬잇.
주인의 모자 속에 숨어 있던 보석뱀이 몸을 길게 빼어 리에트를 바라보았다. 리에트는 입술에 묻은 피를 손등으로 닦아내며 눈가를 찌푸렸다.
“뭐였지, 방금.”
기억이 흐릿하다. 어쨌든 오랜만에 만난 기분 나쁜 놈은 확실히 사라졌을 것이다. 저것은 정신력이나 저주 저항이 낮은 헌터에게만 빙의 가능하며 옮겨 갈 수 있는 거리도 그리 길지 않다. 그러니 리에트 외의 인간이 주위에 없는 이상 떠날 수밖에 없다.
“완전히 포기한 줄 알았는데 웬 변덕이람.”
불쾌하다. 신경질적으로 갈라진 시체를 걷어차는 그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났다. 맨 앞에 선 여자는 멕시코의 S급 헌터였다. 풍채 당당한 그녀가 리에트와 주위의 시체를 보고 인상을 일그러뜨렸다.
“그 잠깐을 못 기다리고 일을 쳤나?”
“뭐? 아냐, 난—”
“이번만큼은 얌전히 감옥에 처박혀라!”
“아, 젠장! 요즘 재수 더럽게 없네!”
한국에 가야 하는데! 이길 자신이야 있었지만 여기서 문제를 더 키우면 곤란해질 따름이다. 아무리 제 맘 내키는 대로 산다 해도 각국의 헌터협회와 죄다 척지는 일까지는 피해야 했다. 리에트는 혀를 쯧 차며 재빠르게 자리를 떠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