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Classes That I Raised RAW novel - Side Story 122 A Story of the Future (4)
외전 122화
어느 미래 이야기 (4)
석시명이 우리를, 나와 유현이를 바라보았다. 그의 나이도 이제 쉰을 넘어 50대 중반에 가까워졌다. 그러니 세월의 흔적이 짙은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지만, 현재의 석시명에 비해 유독 더 낡고 지쳐 보였다.
던전을 돌지 않아 능력치 성장은 느리다 해도 중급, B급이라 비각성자나 하급 각성자에 비해 노화가 더딜 텐데. 변화가 거의 없는 김성한과 달리 자기 나이로, 어쩌면 그보다 더 시간을 삼킨 것 같았다.
“음, 오랜만이라고 해야 할까요.”
얼어붙은 듯 우두커니 선 석시명에게 말을 걸었다. 솔직히 나로서는 그다지 반가워할 수는 없었다. 회귀한 후에야 아직 별짓 안 한 사람 붙잡고 화를 내는 꼴이라 내가 참았지만, 그럭저럭 적당히 넘어가고 나름 가까워도 졌지만 지금의 저 남자는 아니었다.
내가 저 인간을 싫어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나와 유현이에 대해서 훨씬 더 늦게 알았을 것이고 던전 공략 일만 주로 맡아 나와 관련해서는 직접적인 개입은 별로 하지 않았을 김성한과는 다르다. 석시명은 아주 일찍 눈치채고 적극적으로 나를 밀어내고 이용했다.
“반갑다느니 하는 빈말은 하고 싶지 않네요. 어쨌든 확실한 건.”
멍하게 굳어 있는 얼굴을 향해 웃어 보였다.
“나는 성공했고 당신은 실패했어.”
회귀 전의 시간들을 실패했다고 단순하게 치부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지금 저 남자는 분명한 패배자였다. 내가 말하기 전에 표정부터가 그러했다. 자신만만하고 거칠 것 없던 활기는 폭풍우에 휩쓸린 듯 사라졌다. 시간 파편의 뒤틀림 속에서 유현이와 만나지 못한 채 헌터협회까지 은퇴하고 프리 상태였던 석시명보다도 훨씬 더 빛을 잃었다.
현재의 석시명이 50살이, 아니 60살이 넘는다 해도 저보다 더 활력 있을 것이다. 설사 유현이가 이르게 은퇴한다더라도 여전히 적극적으로 해연을 뒷받침해 가겠지.
“…정말로.”
석시명이 마른 입술을 힘겹게 떼었다.
“그러니까, 정말로 스물한 살의… 길드장님이십니까.”
“맞아요. 우리는 일 년도 더 전에 화해했고 같이 살고 있습니다. 아무런 문제 없이요. 해연 길드는 오히려 더 커지기도 했죠.”
석시명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무어라 말을 하려다가 멈추기를 몇 번 반복한다. 유현이가 죽고 나서 나를 원망만 했을까, 혹은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가지고 있었을까.
“저는 과거로 돌아갔으니까, 아는 게 더 많으니까 조건이 다르긴 했죠. 하지만 석시명 씨.”
흔들리는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왜 그랬습니까.”
시간을 되돌렸기에 그냥 흘려보내려고 했다. 이런 걸 묻고 따질 사람 자체가 없어진 것이나 마찬가지라 그냥 잊기로 했다. 하지만 전부 다 기억하고 있으니 원망이 아주 안 들 수는 없었다.
“당신이라면 좀 더 좋은 방법을 찾을 수 있었잖아.”
아직 어리고 미숙한 나와 유현이와는 다르게.
“조금이라도 더 유현이를, 나를 생각해 줄 수 있었잖아.”
하고자 했다면 못 할 건 없었을 것이다. 그리 어렵지도 않았을 것이다. 유현이가 죽는, 혹은 나까지 함께 죽는 결말만큼은 피할 수 없었다고 해도… 우리는 좀 더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한유진 씨.”
석시명이 힘겹게 나를 불렀다.
“예, 저는… 실패했습니다.”
그가 내게 고해하듯 말했다. 괴로움을 담아 스스로의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당신이 사라져야만, 길드장님께서 더욱 완벽해질 것이라 착각했습니다.”
평범한 S급이 아닌, 완전히 새로운 상위 종족처럼 느껴지는 태생 S급. 그중에서도 이질적인 불. 유일하게 드높아야 할 그런 존재에게 혈육이라며 달라붙어 있는 평범한 F급을, 지워내야 할 오점으로 생각하였다고 석시명이 말했다.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고 괜찮아 보였고, 또, 아무런 문제 없이… 가장 높은 곳까지 다다랐습니다.”
회귀 직전의 한유현은, 해연 길드는 분명 그랬다. 성현제가 사라지면서 국내 최고가 되었고 계속해서 성장하여 실상 세계 최고나 다름이 없어졌다. 내가 디아르마의 함정에 빠져들기 전까지 석시명은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 믿고 있었을 것이다.
모든 게 완벽해 보였으니까.
“한유진 씨가 들어간 던전에 문제가 생겼을 때도…….”
석시명이 짧게 숨을 들이켰다.
“심각하게 느끼지 않았습니다. 길드장님께서 한유진 씨를 아낀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조용히 보호하는 것을 돕기도 하였지만 그래도 한유진 씨가 잘못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길드장님께서도 결국은 받아들이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보통은… 그렇게 생각하겠지요.”
나도 설사 내가 죽는다고 해도 유현이는 계속 살아갈 거라고 생각했었다. 이제는 아니었지만.
“…예. 하지만 틀렸습니다. 저는 그날 길드장님을 마지막으로 보았고, 제가 완전히 틀렸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내 소식을 들은 유현이는… 초월자가 나를 손에 넣었다는 사실을 눈치챈 유현이는, 어떤 표정을 어떤 눈빛을 하였을까. 석시명이 자신의 실패를 한순간 깨달아 버린 그 얼굴은.
쿵, 석시명의 두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지난 2년간, 아니, 1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쌓아 온 실수에 짓눌린 듯이 머리를 숙인다.
“한유진 씨의 말대로 저는 할 수 있었습니다. 간단하게는 한유진 씨를 죽은 것으로 위장하고 신분을 바꾼 뒤 길드장님 사택 담당 청소부 같은 걸로 넣었어도 될 겁니다.”
…너무 간단해서 오히려 할 말이 없어졌다. 입주 도우미로 만들었으면 아예 같은 집에서 살 수도 있었겠구나. 물론 나는 동생 위험한 일 시키는 돈으로 먹고살기 싫다고 반발했겠지만 유현이가 간절히 부탁해 왔다면… 결국은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 밖에도 방법은 많았습니다만… 저는 그런 위험을 굳이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철저히 준비한다더라도 끝까지 완벽하게 감추는 것은 쉽지 않기에, 길드장님을 방해만 하는 한유진 씨는 깨끗이 떼어 놓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습니다.”
수고스러운 일을 하고 들킬 위험을 감수하는 것보다는 날 버리는 편이 이득이었겠지. 유용하게 써먹기도 했었고.
그보다도.
“결국 실패한 사실이 미안한 거네요, 석시명 씨는.”
저 사람은 나와 유현이에게 도의적인 잘못을 저질러서가 아니라, 업무적인 판단을 잘못했다는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석시명이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보았다. 흐려진 얼굴 위로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고집스러움이 덧씌워진다.
“…죄송합니다. 한유진 씨에게 미안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유현이가 저 없이도 잘 살아갈 수 있었더라면, 석시명 씨도 아무렇지 않았겠지요. 오히려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했으려나요.”
“…….”
염치가 아주 없지는 않았는지 소리 내어 대답하진 않았다. 석시명은 유현이와 해연에 미안한 거지 내게 미안한 게 아니었다. 좋은 사람은… 확실히 아니지. 그냥 유현이 편이고 회귀해서는 내 편이기도 해서 괜찮았던 거지.
그렇다고 해서 나 외의 사람에게 나쁜 짓을 저질렀냐고 한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흠잡힐 일 없도록 만들려고 한 건지 해연 내부는 비각성자 직원 복지도 좋은 편이었고 그 밖의 일처리도 문제없이 깔끔하고.
다만 나는 제일 중요한 해연 길드장의, 완전무결한 존재의 툭 튀어나온 유일한 못이었으니까. 그래서 박아 넣지 않고선 견딜 수 없었다고 이해가 아주 안 가는 건 아니지만 피해자인 내가 알 게 뭐야.
퍽!
무릎 꿇고 있는 석시명을 힘껏 걷어찼다. 예림이와 김성한이 움찔했지만 나를 말리진 않았다. 예림아 잠깐 딴 데 보고 있으렴. 옆으로 비틀 균형이 무너진 석시명을 재차 차서 아예 넘어뜨렸다. 템빨 받아 봐야 난 F급이고 저 인간은 B급이라 뭐 크게 다칠 일도 없다. 그래도 나뒹구는 꼴을 보니 속이 시원해졌다.
“지난 일 생각하면 그쪽한테 칼 찔러 넣어도 부족해.”
“…예.”
“나는, 아니 대체 내가 잘못한 게 뭔데? 난 그냥 내 동생 열심히 키웠고, 내 동생 걱정한 것뿐이었어! 심지어 유현이가, 그걸 싫어했던 것도 아니었잖아…….”
내가 과보호해서, 잘못 돌봐서 동생이 벗어나고 싶어 한 것도 아니다. 나는 정말로…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 최소한 석시명 이 인간에게 그런 취급을 받아야 할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석시명의 멱살을 잡아들었다.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는 여기서 할 일을 마치고 돌아갈 겁니다. 해연 길드 잠깐 빌려 쓰기만 하고, 이용만 하고 떠날 거라고요.”
굳이 말해 줄 필요 없었지만, 공략이 끝나면 자연히 사라질 가상공간이었지만 그럼에도 말했다. 유현이가 다시 나타났다고 해서 돌이킬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당신에게 기회가 다시 주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너는 실패한 채로 이대로 남게 될 것이라고.
“…알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한유진 씨. 한유현 헌터는 여전히 해연의 길드장이기에,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
석시명이 순순히 대답했다. 2년 전에 이미 전부 포기한 듯이 남아 달라고 부탁하지도 매달리지도 않았다. 그를 놓고 물러섰다. 유현이와 예림이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어차피 다시 볼 일도 없는 사이니까 이쯤에서 끝내죠.”
현재의 석시명은 뭐, 어쩌겠어. 지금으로선 다른 사람이나 다름이 없으니. 그리고 어쨌든… 저 인간이 나를 독하게 몰아세우지 않았으면 나도 도중에 멈췄을 것이다. 그 사실이 조금도 고맙지도 달갑지도 않고 여전히 지긋지긋했지만 그래도 그런 일이었다.
한숨 한번 크게 내쉬었다. 유현이와 예림이가 동시에 내 양팔을 잡으며 내게 작게 속삭였다.
“형, 괜찮아?”
“괜찮아요?”
“응. 오히려 좋지 뭐. 쌓아 두기만 하고 풀지 못할 억울함이었는데.”
내가 돌아보자 김성한이 움찔 고개를 숙였다. 성한 씨는 그래도 진짜 나한테 미안하긴 미안한가 보네. 문득 여기 있을 한유진이 생각났다. 나야 이렇게 정리할 수 있었지만 그 녀석은 석시명도 김성한도 그냥 죽여 버리고 싶지 않을까.
심지어 현재의 성현제 씨라면 모를까 여기 성현제 씨는 자기도 여유가 그다지 없을 거라 둘이 어떻게 지내왔는지, 지내고 있을지…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끝까지 모르고 싶어. 어차피 일어나지도 않을 미래잖아.
제발 세상 소식 모르고서 어디 지하 동굴에서 수련이라도 하고 있으라고 빌면서 비틀비틀 일어나는 석시명에게 말했다.
“해연 길드장 복귀 소식부터 알리죠. 저와 유현이 찾는 연락 오지 않았는지도 알아봐 주세요.”
해연부터 정상화시키고, 그 다음은 브레이커와 세성이다. 참, MKC와 수담 길드장 아직 살아 있으면 죽여야 하나? 둘 다 길드는 이미 망했지만 길드장은 회귀 직전까지 무사했었는데.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석시명이 나와 유현이에게 꾸벅 인사하곤 길드장실을 나섰다. 김성한이 어색해하면서 내게 말했다.
“정확히 어떤 일을 하시려는 건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엉망인 상황을 살짝 바로잡으려 한다고 할까요. 이쪽에도 나쁘진 않은 일입니다.”
현재의 우리 세상이 여러모로 상황이 더 나았으니까. 김성한이 알겠다며 자신 또한 협조하겠다고 말했다.
“검증은 안 거쳐도 됩니까? 우리가 사기꾼이면 어쩌려고요.”
“가짜라고 생각진 않습니다만 만약 길드장님의 능력까지 완벽하게 사칭할 수 있다면, 저희로서는 별다른 방법 자체가 없지 않겠습니까. 해연에 해를 끼치지 않는다면 길드를 위해서라도 모르는 척해야지요.”
“어… 하긴 그러네요.”
기억도 거의 되찾은 유현이를 대체 누가 막아서겠어. 심지어 또 다른 S급인 예림이까지 함께 있다. 김성한이 길드 안내를 해 주겠다고 했지만 전과 크게 달라지진 않았다기에 잘 알고 있다며 거절했다. 그러자 유현이 사택 미니 포털 키를 꺼내 주곤 자리를 떠났다.
“…아저씨는, 시간을 돌리기 전에 고생 많았다고 했었죠.”
예림이가 책상 위의 물건들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그랬지. 욕도 많이 먹었고, 실제로 위험한 일도 여러 번 있었고. 내가 생각해도 독하게 살아왔다니까.”
“근데 아저씨 해친 사람들도 다 잘 살게 된 거잖아요. 나 같으면 좀 억울할 거 같은데.”
서랍도 죄다 열어서 뒤지면서 예림이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그러게 나한테 잘못한 사람들도 내 기억에만 남고 전부 아무 죄책감 하나 없이 잘 살겠지.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나도 잘 살게 되었으니 괜찮다 싶었는데 말이다. 저 인간 마주 대하니 울컥하는 게 확실히 나도 억울하긴 했나 보다.”
“그쵸, 당연히 그렇잖아요. 한유현 너 진짜 심심하게 살았구나? 아무것도 없네. 그래서 속 좀 풀리셨어요?”
“어, 꽤나. 역시 제일 얄미웠던 게 석시명이었으니까. 진짜가 아니라고 해도 내뱉으니 좋네.”
“형… 나도 미안해.”
“유현이 네가 뭘 미안해하냐. 괜찮아.”
얼마 지나지 않아 노크 소리와 함께 비서실 직원이 휴대폰과 작성해야 할 서류를 들고 나타났다. 유현이와 예림이는 김성한이 보증하는 S급 각성자로 바로 신원 등록이 가능했고 나는 그냥 한유진이 돌아온 것으로 쳤다.
[해연 길드장 한유현 귀환!]
그리고 이내 속보가 떴다. 해연의 길드장이 다시 돌아왔노라고.